제목 ; 자객혈(刺客血) - 와룡강(臥龍罔) 著 刺客血을 위한 서언(序言) 자객(刺客)-! 이는 무릇 무협(武俠)의 필(筆)을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전하고 싶어하는 화두(話頭)일 것이다. 자객이란 타인의 목숨을 해침으로써 삶의 수단을 얻는 자들을 일컬음이다. 물론 전국시대의 전제(專諸)나 형가(荊軻)처럼 자신의 의지나 정 치적인 신념에 의해서 자객이 된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필자가 금번에 쓰고자하는 것은 직업인(職業人)으로서의 자객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 직업을 갖을 수 밖에 없다. 이 세 상에는 수많은 직업들이 있으며 생존을 위해 사람들은 늘 자신의 재주나 능력을 타인에게 팔아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객(刺客)도 하나의 직업이다. 대가(代價)를 받고 인명을 해치는 청부살인업(請負殺人業)! 그것 은 어떤 수식어로도 미화(美化)될 수 없는 가장 추악하고 음습한 직업일 것이다. 황금과 인간의 생명을 바꾸는 죽음의 장사꾼들인 그들만큼 저주 받아야 할 대상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객들이 스스로 좋아서 청부살인을 직업으로 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혹자는 명분(名分)을 위해서 스스로 자객이 되었겠지만 직 업인으로서의 자객은 생존(生存)을 위해 그길로 들어서야만 했다. 대가(代價)는 허무하고, 실패(失敗)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가장 암울한 세계가 그들, 자객들의 세계인 것이다. 필자는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생존의 전장(戰場)을 살아가야하는 그들 자객의 세계를 늘 그리고 싶었으며, 드디어 졸작이나마 한편 의 대하설(大河設)로 독자제현께 선보이게 되었다. 새로운 시도인지라 조악하고 생경됨을 면치 못하겠으나 그 어느 작품보다도 저자의 애정이 배가되었음을 알아 주기 바란다. 끝으로 졸작 <자객혈>에 영감(靈感)을 불어넣어주고 작업에 도 움을 준 K형에게 지면을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初夏의 佛岩山下 寓居에서 臥龍罔 拜 第 一 章 招待받지 않은 손님 1 절강성(浙江省) 항주(抗州)-! 술(酒)과 운하(運河)와 미녀(美女)로 이름 높은 예향(藝鄕) 항주 는 하루종일 궂은 비로 젖어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삼월(三月)의 봄비는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어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비가 그치면 피를 머금은 듯하던 철쭉도 모조리 떨어져 땅바 닥을 붉은 원색의 음영(陰影)으로 물들일 것이다. 무림맹(武林盟) 감찰전(監察殿)의 부전주(副殿主)인 귀견수(鬼見 手) 조중(組中)은 뒷짐을 진 채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봄비가 추적 추적 내리고 있는 음울한 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십여세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는데 혈색 좋은 동안(童顔)의 얼굴에는 언제나 훈훈한 미소가 감돌고 있 었다. 악의(惡意)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서글서글한 표정에 다 전형적인 문사(文士)의 기질을 풍기는 그의 겉모습에는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넘어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귀견수(鬼見手)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는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냉철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일점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인을 할 수 있는 잔인한 독심(毒心)과 이에 걸맞는 고절한 무예를 지닌 고 수가 바로 귀견수 조중인 것이다. 외견상 들어난 그의 현재 직위는 무림맹 절강성 지부(支部)의 관 사(官士)였다. 하지만 실제 그가 하는 일은 전적으로 비밀에 싸여 있었다. 자신을 모충(毛沖)이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와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조중은 초췌한 이 청년의 표정에서 내면적인 혼란과 공포 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모충이란 젊은이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무림맹 절강 지부장(支 部長)인 원이광(圓李廣)이었다. 모충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원이광을 만났는지는 지금으로서 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조중은 다년간 쌓아온 경험에 의해서 이 청년의 출현으로부터 무엇인가 음습한 음모의 냄새를 맡을 수 있 었다. 겉으로 보기에 모충은 수려한 용모와 훤칠한 체격을 지닌 미청 년(美靑年)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할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였고 아마도 그 역시 그 같은 자신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수려한 외양과는 달리 그의 몸에서는 은연중 냉혹한 기 운과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언제라도 감추어두었던 발톱을 들어낼 준비가 되어있는 모충의 자세에서 조중은 이 청년이 지극히 엄중한 수련을 거친 인물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태양혈(太陽穴)이 우뚝 돌기한 것으로 보아 상승의 내공까 지 겸비한 고수임이 분명했다. 아주 짧은 시간안에 모충이란 청년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정리 한 조중은 사람좋은 웃음을 띄우며 돌아섰다. {이 차가 비록 소주(蘇州)의 명차(名茶) 용정(龍井)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래도 정신을 맑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그만이라 오. 우선 한 잔 드시고 말씀을 들어보는 게 어떻겠소?} 모충의 앞자리에 앉은 조중은 자신의 찻잔을 들며 그에게도 차 를 권했다. 상대방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분위 기를 조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모충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처음 왔을 때보다 얼굴빛은 많이 풀어졌으나 아직도 턱 밑 의 근육은 극도의 긴장으로 미미하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노력이 무용(無用)하다는 것을 느낀 조중은,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럼 나를 만나자고 한 용건이나 들어봅시다.} 조중의 온화한 말에도 모충의 회색빛 동공에는 일순 공포의 그 늘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마음 속의 두려움을 떨치며 말 을 꺼냈다. {나는 한 가지 거대한 음모를 알고 있소.} 모충은 속삭이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햇다. {이 음모는 당신네 무림맹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으 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소.} {하하 처음부터 너무 겁을 주시는구료.} 조중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말했다. 그렇지만 내심으로는 이 젊은이를 진지하게 대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암암리에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 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소협의 내력부터 알려 주시지 않으 시겠소?} 차분한 조중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신의 성급함을 느낀 모충은 목이 타는 듯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2 조중은 젊은이의 표정을 주시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젊은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데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았 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아무런 확실한 점이 없는 이상 성급함은 금물이었다. 조중은 서두르지 않고 모충이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나의 이름은 모충이요. 그 외의 것은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 소.} 모충의 단호한 말에 조중은 짐짓 이마를 찌푸렸다. {젊은이! 알고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는 무언가 믿음이 필요 한 법이오.} 조중은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모충도 만만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은 필요없소. 나는 애송이가 아니오.] 그의 음성은 단호하고도 절박했다. [진행되고 있는 음모에 대해 알려 주는 대가로 안전한 은신처와 삼천냥을 제공해 주시오. 물론 금화(金貨)로!} (금화로 삼천냥?) 조중은 모충의 요구에 절로 쓴웃음을 떠올렸다. 은신처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금화 삼천 냥이라는 돈은 실로 큰 액수였다. 금화 한 냥을 은자(銀子)로 치면 대략 삼십냥, 그리고 은자 열냥 이면 한 가족이 한 달 정도는 걱정없이 살 수 있는 돈이 아닌가? 삼천냥의 금화, 즉 은자 구만냥은 무림맹내에서도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조중에게조차도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들릴 만큼 막대한 금액인 것이다. 그 정도의 대가를 요구하는 정보라면 어쩌면 조중 자신의 선에 서 처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선 음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조중은 내심의 곤혹을 일절 내비치지 않고 온화하게 말했다. 협 상에 있어서 조급함을 내비치는 것은 초보자나 저지르는 실수다. 과연 조중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응대에 모충은 불안한 표정 이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무림맹의 요인(要人)을 암살하기 위하여 여러명의 일급 자객들을 고용했소. 이번에 고용된 자객들 중 한 명은 비마영 (飛魔影)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고 있소.} 한 순간 조중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모충이 말한 내용도 내용이 지만 비마영(飛魔影)이란 이름이 그의 가슴 속에 섬뜩한 한기(寒 氣)로 스쳐지난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이것밖에 말해줄 수 없소. 나머지는 거래가 성립된 연후에 이야기하겠소.} 속삭이듯 말을 마친 모충은 초조한 눈빛으로 다시 창 밖을 쳐다 보았다. {사안이 그토록 막중하다면 우리쪽에도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오. 위의 재가도 받아야하고 또 금화 삼천냥의 거금을 마련하는 것도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니오. 이틀 후에 다시 만나면 어떻겠소?} 조중이 내심의 긴장을 숨기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모충은 펄쩍 뛰었다. {이틀은 너무나 긴 시간이오!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당신의 목 숨이 아니오. 매 시각이 나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란 말이 오.} 이어 모충은 협상을 끝내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기한은 십 이 시진이오. 그 이상은 안되오! 내일밤 초경 무렵 교외의 정운사(淨雲寺)에서 기다리겠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충은 연자초운(燕子招雲)의 신법으로 방바 닥을 박차고 날아올라 창밖으로 쏘아나갔다. [잠깐만!]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조중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가 황망히 창가로 달려갔을 때 모충의 모습은 이미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경공조예로군.} 나직이 독백하는 조중의 눈빛이 다음 순간 차갑게 빛나기 시작 했다. -비마영(飛魔影)! 모충이 거론한 그 이름에 조중은 누구보다도 익숙해져 있었다. 이름이나 신분내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비마영의 자객행 (刺客行)에 수 년 동안 몇 명의 거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조중은 잘 알고 있었다. 비마영이 구사하는 수법의 치밀함과 교묘한 자객술은 지금껏 한 점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행되어 왔다. 이렇듯 다년간 자객노릇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만 으로도 비마영의 무예와 수법이 얼마나 고명한 짐작할 수 있었다. 헌데 모충의 말을 빌자면 비마영 정도의 자객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 이번 음모에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암시라도 조중의 결단을 도와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 리고 일단 결심을 한 조중의 행동은 무섭게 빨라졌다. 3 이경(二更)이 가까워질 무렵, 항주성 북동쪽에 자리잡은 홍등가(紅燈街)로 한 명의 건장한 체 격의 청년이 들어섰다. 비록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주위를 살피 는 그의 눈빛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룻밤의 욕망을 풀려고 온 여느 사내들과 다 름없이 보였으나 간혹 싸늘히 빛나는 그의 눈초리는 긴장감과 초 조가 가득 서려 있는 것이다. 서늘한 한기(寒氣)를 머금은 봄비가 그친 뒤였지만 원색으로 물 든 홍등가의 거리에는 음습한 열기가 깔려있었다. 색향(色鄕)으로 유명한 항주인만큼 이곳 홍등가는 규모도 크려니 와 등급도 천차만별이었다. 동전(銅錢) 한 문에 하룻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싸구려 창녀(娼 女)도 있는 반면, 비옥하고 화려한 장원(莊園) 하나쯤을 던질 각오 를 해야 한 번 안아볼 수 있는 엄청난 가격의 기녀(妓女)도 있다. 금테를 두른 것같은 그런 고가(高價)의 여자야 다른 세상의 이야 기고, 보통의 사내들이라면 길가에 즐비한 싸구려 매음굴을 찾게 된다. 천박한 꾸밈새의 이 홍루(紅樓)들 마다마다에는 매춘(賣春)을 의 미하는 붉은 홍등(紅燈)들이 내걸려있다. 홍등가(紅燈街)라는 이름 은 바로 이 붉은 등에서 유래한 것이다. [호호! 들렸다 가세요 오빠!] [싸게 해드릴께요!] 붉은 등불이 야릇한 열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가운데 곳곳에서 창기(娼妓)들이 거리를 지나가는 사내들을 붙잡고 흥정을 하고 있 었다. {어머 잘생긴 공자님이시네! 흐응! 소녀 앵화(櫻花)가 어때요? 잘 해드릴께요.} 홍등가를 지나가려는 예리한 눈빛의 청년에게도 분을 짙게 바른 창기 하나가 교태를 부리며 달라붙었다. 한껏 치장을 하긴 했으나 눈가의 주름과 거칠어진 피부가 이미 한창 때가 지났음을 보여주 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앵화라는 그 창기의 탄력 잃은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주접을 떨었다. {흐흐흐 좋아! 오늘 밤은 너로 결정했다.} 청년은 축축한 웃음을 띄우며 창기를 끌어안고 홍루 안으로 들 어갔다. 헌데 그들 한쌍의 남녀가 추잡한 소리를 내뱉으며 홍루 안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 [...!] 두 명의 건장한 장한이 어둠 속에서 재빠르게 뛰쳐나왔다. 칠흑 같이 검은 흑의(黑衣)를 걸친 그들은 그 날렵한 동작에다가 등에 짊어진 검자루가 삐죽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무사들임이 분명했 다. 소방원(少房院)이라는 간판이 붙은 홍루(紅樓)를 쳐다보는 두 흑 의장한의 눈빛은 매섭게 빛났다. 두 흑의장한의 눈빛이 한차례 교차되고 그들은 곧 태연히 발걸 음을 소방원 안으로 옮겼다. {호호 나으리들! 어서 오세요.} 두 장한이 소방원으로 들어서자 분을 잔뜩 처바른 사십 세 가량 의 살찐 포주가 간드러진 교소를 흘리며 두 사람을 맞았다. {호호호! 저희 집은 처음이시죠? 제가 두 분에게 좋은 아이들을 추천해드릴...!} [조용히 해라.] 포주가 한껏 눈웃음을 치며 어울리지 않는 교태를 부렸지만 그 들 흑의장한들은 싸늘한 신색으로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방금 들어온 청년은 어느 방으로 들어갔느냐?} 포주의 말을 막으며 내랭히 소리치는 흑의장한의 눈빛은 일순간 비수같이 빛이 났다. 상대의 살벌한 기세에 포주는 흠칫한 표정으로 뒤로 주춤 물러 섰다. 이 바닥에서 수십 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포주인지라 이들의 모습과 행동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도 결코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호호! 어떤 손님을 말씀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앉으시와요. 차라도 한잔 올리겠어요!} 수작을 부리면서 그녀는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우락부락한 사 내에게 눈짓을 했다. 아마도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는 손님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뒷 세계의 어깨쯤 되는 자인 듯했다. 헌데 포주의 눈짓을 받은 우락부락한 사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 으킬 때였다. 스읏! 왼쪽에 서 있던 귀 밑에 사마귀가 있는 흑의장한이 오른손을 느 릿하게 움직였다. 보기에는 느릿하게 보였지만 그것은 상승(上乘) 의 금나수(擒拿手)인 회룡박수(廻龍拍手)의 수법이었다. 우둑! 포주의 손목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흑의장한의 수중에 틀어쥐켰 다. 강철같은 힘으로 포주의 맥문을 낚아챈 흑의장한은 냉랭하게 말 했다. {쓸데없는 수작따위는 하지도 마라. 죽고 싶다면 별로 어려운 일 이 아니니까!} 포주는 갑자기 팔목을 통해 거대한 힘이 전신을 파고들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고통이 너무 커서 비명도 터져 나 오지 않았다. {한 마디라도 쓸데없는 소리를 내지른다면 심장에 구멍을 내주 겠다.} 한 점의 온기도 실리지 않은 흑의장한의 스산한 목소리는 포주 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포주의 신호로 다가서던 우락부락한 사내도 어느 새 삐 적 마른 또 다른 흑의장한에게 점혈을 당했는지 나무조각처럼 멀 뚱히 눈알만 굴린 채 서 있었다. 4 더러운 이불이 깔린 조잡한 나무침대만이 덩그란히 놓여 있는 초라한 기방 안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싸구려 지분내음이 코를 찔렀다. 나무침대 위에는 수혈(睡穴)이 점혈된 창기가 늘어진 젖가슴과 허여멀건 허벅지를 들어낸 방자한 자태로 널부러져 자고 있었다. [염병할....!] 아무렇게나 가랑이를 벌린 채 코까지 골아대며 잠이 든 창기를 내려다보는 두 흑의장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 더러운 포주년과 실랑이만 하지 않았더라도 놓치지 않았을 텐데...!} 비쩍 마른 몰골의 흑의장한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 그러자 귀밑에 사마귀가 난 다른 흑의장한이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책할 필요는 없네. 그자는 지부(支部)를 떠날 때부터 우리가 자기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어. 비록 지금은 놓쳤 지만 그 놈이 항주성 안에 있는 이상 결코 우리의 추적을 피할 수 는 없을 것이네.} {젠장할!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시간이 없단 말일세. 모충이 란 그 작자는 고작 십이시진의 여유를 주었을 뿐이야! 그 안에 놈 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알아내야만 하는게야!} 비쩍 마른 장한은 투덜거리며 방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방원에서 귀견수 조중이 붙인 미행을 뿌리친 모충(毛沖)은 걸 음을 빨리했다. 그는 곧 항주성의 서문(西門)을 빠져나갔다. 성문을 빠져나온 모충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뒤 경신술을 시전하여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한동안 달려가자 이윽고 야트막한 구릉 이 하나 나타났다. 아늑해보이는 그 구릉을 끼고 황폐한 장원 한 채가 음산한 형상 으로 서있었다. 잡초와 무너진 돌담, 한 점의 인적도 없는 것으로 봐서 오랫동안 버려진 폐장임이 분명했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리운 지금 장원은 귀기(鬼氣)마저 풍기고 있 었다. 모충은 판석(板石)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회랑(回 廊)을 따라 폐장의 후원(後苑)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나타났다. 그 불빛은 비 교적 온전한 형체를 갗추고 있는 한채의 전각에서 흘러나오는 것 이었다. 창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본 순간 땀방울이 비오듯 흘러내 리는 모충의 표정에 짙은 안도감이 스쳤다. 흐릿한 등잔 불빛 아래에는 이십여 세 가량의 여인이 초조한 기 색으로 앉아있었다. 여인은 삼단 같은 긴 머리를 지닌 요염한 자태의 미녀였다. 특히 흑요석같이 까만 눈망울에 배인 슬픔의 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 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모랑!] 모충이 주위를 경계하며 방안으로 들어서자 수심에 잠겨있던 여 인은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어....어떻게 되었어요 모랑?} 불안감이 잔뜩 배인 그녀의 목소리는 은방울이 구르는 듯듣기 좋은 청아한 음성이었다. 이마의 땀을 훔친 모충은 미녀를 향해 따뜻하게 말했다. {상매(霜妹)!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는 없소. 일은 잘 진행되고 있소!} 그는 말하면서 여인의 가녀린 두 손을 가만히 잡았다. {흑흑... 모랑!} 여인은 억누를 수 없는 격동에 가냘픈 몸을 땀내음이 물씬 풍기 는 남자의 품에 던졌다. 모충은 힘주어 여인을 껴안았다. {상매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소. 오늘만 지나면 우리는 안전한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오.} 모충은 불안에 떠는 여인을 달래며 그녀의 섬세한 얼굴을 눈부 신 듯 바라보았다. 눈물에 함초롬히 젖은 여인의 옥용은 너무도 해 맑고 아름다웠다. 모충은 몸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가만 히 입술을 아래로 향했다. 며칠 동안 숨막히는 공포와 갈등 속에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모충은 여인의 살내음을 맡자 참을 수 없는 성욕을 느꼈던 것이다. 여인도 그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녀린 두팔로 모충 의 목을 휘감으며 열렬히 매달렸다. 입술과 입술, 혀와 혀가 뒤엉키고, 한덩어리가 된 두 남녀의 몸 은 자연스럽게 한옆에 놓인 침대위로 쓰러졌다. 본능의 욕정으로 조급해진 모충은 허겁지겁 여인의 꺼풀을 벗겨 내렸다. 저고리 고름이 풀어지며 탐스럽고 뽀얀 젖가슴이 들어났다. 무르 익은 수밀도같은 그 한쌍의 융기 정상에는 이미 한껏 고추 선 유 실(乳實)이 흥분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고리 고름과는 달린 단단히 옥조여맨 치마의 끈은 쉽 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속이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모충은 여인의 치마를 벗기는 것은 포기하고 치마자락을 위로 걷어올렸다. 치마가 허리 위로 걷혀지자 여인의 눈부신 하체가 흐릿한 등불 아래 환상처럼 들어났다. 상아로 깍은 듯 매끄러운 피부의 다리는 시원하고도 미끈했다. 반면 나긋나긋한 허리 아래의 둔부는 풍만하기 이를 데없다. 은은한 분홍빛을 띈 여인의 속살은 모충의 숨을 막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여체 중심부의 봉긋한 둔덕 일대는 손바닥만한 천으로 간신히 가려져있을 뿐이었다. 5 [으음!] 보드라운 체모까지 담뿍 가리고 있는 탓에 더욱 붕긋해보이는 여체의 중심부를 보는 순간 모충은 열병을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 다. 곧 여인의 그 비역을 가린 고의가 뜯기다시피 거칠게 제거되었 다. 무성하고 짙은 그늘 속에 숨어있는 여인의 중심부는 이미 뜨거 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여인도 주저없이 모충의 의복을 벗겼다. 오랜 수련으 로 단련된 탄탄한 상체가 들어나고 바지와 내의가 함께 아래로 밀 려내려갔다. 이미 모충의 남성은 철주(鐵柱)가 되어있었다. [흐윽!] 맨살이 서로 닿는 순간 여인은 자신의 비단같이 보드라운 허벅 지 안쪽에 닿는 뜨겁고 맥동하는 살덩이를 느끼고 전율했다. 본능의 열기로 달아오른 그녀는 섬섬옥수를 두 개의 육체가 잇 닿은 곳으로 밀어넣어 스스로의 비역을 한껏 개방하였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모충의 맥동하는 실체를 부여잡고 홍수가 진 자신의 입구로 이끌어들였다.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해져있는 탓인지 두 사람의 육체는 아무런 장애나 망설임도 없이 하나로 결합되었다. 여인은 자신의 손안 가득히 느껴지던 정인의 뜨거운 맥동을 곧 더욱 예민하고 보드라운 부위로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흡사 열탕같은 그 깊은 동굴이 정인의 꿈틀대는 실체를 온통 휘감 고 아우성을 쳐대었다. 사내도 사랑하는 여인의 점막의 동굴에서 느껴지는 그 미끈덩하 고도 옥죄는 긴축감에 절로 짐승의 울음소리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더욱 큰 희열을 기대하며 자신의 욕망의 실체 를 뿌리까지 여체의 깊은 곳으로 밀어넣었다. [하악!] 몸안에 그득히 들어차는 그 뜨거운 불덩이를 느끼며 여인은 그 대로 광란(狂亂)상태가 되었다. 새침하고 도도해 보이는 인상과 달린 여인의 반응은 너무도 격 렬했다. 모충의 몸을 휘감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치태는 평소보다도 유독 뜨거운 것이었다. 아마도 벼랑 끝에 몰린 듯한 극도의 불안과 초조 가 오늘밤 그녀를 특별히 격정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여인의 몸부림에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느끼며 모충의 눈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그 여자가 떠오르다니...!) 자신에게 매달리며 오열하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 전혀 다른 어떤 여인을 그의 뇌리에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 여인은 모충보다 이십여세나 연상이었고, 여자에 대해서는 쑥 맥이었던 자신에게 감미로운 성인의 세계를 맛보여주었던 장본인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촉망받던 자신의 인생을 진창에 던져넣은 그 여인의 모습이 지금 모충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모충은 원래 구대문파 중 공동파( 派)의 제자였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사 년 전, 출중한 기재로 추앙받던 그는 공 동파의 장로 추성도(秋星刀)의 부인과 한 순간의 격정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느 더운 여름날, 무공 밖에 모르는 남편 때문에 늘 독수공방을 하던 그녀가 가끔 말상대가 되어주던 모충에게 몸을 던져온 것이 다. 유난히도 무덥던 그날, 모충이 추성도의 부인을 찾아갔을 때 그 녀는 막 목욕을 마치고 알몸으로 나오던 길이었다. 나중에 생각하 면 아마도 그녀는 일부러 그같은 상황을 만들었던 같았다. 물기에 젖은 터질 듯 무르익은 중년여인의 육체, 게다가 그녀는 당황하여 도로 나가려는 모충에게 오히려 먼저 달려들어 안겼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터질 듯 무르익은 여체의 감촉은 한창 이성 에 눈을 떠가던 모충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모충은 문중의 장로인 추성도의 침대에서 그의 부인과 살 을 섞고 말았고, 그 한 번의 쾌락으로 전도양양하던 모충의 인생은 어둠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가장 몸이 뜨거울 나이의 중년여인과 한창 양기가 솟구 치는 젊은 청년이었다. 한 번 맛본 금단의 쾌락은 두 남녀를 걷잡 을 수 없는 자멸의 길로 몰아넣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하물며 그들은 격정에 휩쌓여 주위의 이목을 완전히 차단할 분 별력도 없었다. 만나기만 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불꽃이 튀었고 대 충 주위를 물린 뒤 한쌍의 짐승이 되어 뒤엉켰다. 공동파 문중내에 그들 사이의 추문이 퍼지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어느 날 그들이 한몸이 되어 몸부림치는 현장에 여인의 남 편인 추성도가 들이닦쳤다. 추성도는 문중 사람들이 모두 쉬쉬하는 바람에 가장 늦게 자신 의 부인의 불륜 사실을 알게되었었다. 그래도 긴가민가하던 추성도는 자신의 침대에서 아내가 나이 어 린 제자와 살을 섞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는 순간 그대로 미쳐버리 고 말았다. 현장을 들킨 부인은 알몸으로 남편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지만 이미 추성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추 성도의 부인은 목이 잘리고 모충은 간신히 화를 면하고 필사의 도 주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비록 세상이 넓다지만 구대문파중 일파인 공동파의 추살 령이 내려진 터라 그의 한 몸이 숨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쫓기고 쫓기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동문(同門) 에게도 검을 겨루어야만 했고, 살기 위하여 한 마리의 이리가 되어 야만 했다. 바로 그때 그에게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6 -월화(月花)! 외견상 그녀는 항주성에서도 이름높은 기루(妓樓) 월화루(月花 樓)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정체는 뭇 자객들에게 일감을 주고 의뢰를 받는 대모(代母) 격의 여인이었다. 그녀 월화가 일년여동안 공동파 전체의 추격을 받고도 살아있는 모충에게 주목을 하고 접근해온 것이다. 그리고 요염하고도 능란한 이 여장부를 만남으로써 모충은 비로 소 일년만에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한눈에 모충의 자질을 알아본 월화는 그에게 아낌없이 최고의 향락을 제공했고, 그런 그녀를 위해 모충은 기꺼이 견마(犬馬)의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후로 삼 년 동안 모충은 자객들의 대모인 월화의 보호 아래 마음껏 향락을 맛보며 명문의 제자에서 밑바닥의 비정한 살수로 변해갔다. 헌데 한 달 전 ,우연히 보게 된 한 여인으로 인하여 모충은 중대 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진여상(秦汝霜), 그녀는 본래 명문세도가(名門勢道家)의 여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부친이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면서 집안은 풍지 박산되었고, 꿈많던 규중처자였던 그녀의 운명도 하루아침에 뭇 사 내들의 노리개인 관기(官妓)로 전락하고 말았다. 원래 그런 곳에 손이 닿아 있는 월화의 행동은 빨랐다. 진여상의 빼어난 미태(美態)에 대해 전해들은 월화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관 기에서 자신의 월화루 소속의 기녀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옛말에도 돈이라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다. 은자 일만 냥이란 엄청난 거금이 요로(要路)에 투입되어 월화루 소속이 된 진여상의 미모는 월화루의 수입을 단번에 두 배로 껑충 올려놓았다. 월화의 안력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여상의 출현이 비록 월화에게 가볍지 않은 부(富)를 안 겨다 주었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파멸까지 부르리라고는 그녀 자신 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진여상과 모충의 만남! 그것이 바로 파국의 발단이었다. 진여상을 본 그 날로부터 모충은 눈이 멀어버렸던 것이다. 수려한 자태와 미모, 게다가 명문가의 규중처자에서 뭇 사내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진여상의 비극적인 분위기는 이미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모충의 가슴에도 열정의 불길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하에서도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꿈많은 소녀에서 한순간에 취객들의 희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진 여상은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비참해질대로 비참해진 자신을 진심으로 동정 하고 애모하는 모충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었고, 사무치는 그의 사 랑에 새로운 삶의 의욕을 품게 되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의 나락에서 만난 두 남녀는 쉽게 타올랐으며 그 열정의 강도는 실로 격렬한 것이었다. 비록 사문에 죄를 짓고 추격을 당해 할 수 없이 살수로 변신했 지만, 모충은 그래도 한 때는 무림명문의 고제자였다. 더 갈데 없 는 밑바닥 인생으로 타락한 그였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뭇 사내들 품에서 술을 따를 때마다 피를 말리는 질투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거기에다가 그는 월화가 진여상조차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수 로 만들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여상의 미모와 교태는 가 장 무서운 암살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한 때문이었다. 결국 월화의 그같은 복안을 알게 된 모충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 쓰고 배반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진여상 역시 자신을 그저 욕정의 도구로만 여기는 다른 사내들 과 달리 진심으로 대해주는 모충을 일점의 망설임 없이 따라나서 게 되었고....! [아아 모랑!] [허억! 상매!] 방 안의 열기는 뜨거웠다. 공포에 쫓기는 두 남녀의 열정은 활화 산 같았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모충은 거칠고 격렬하게 여체로 파고들 었다. 사내의 구리빛 동체가 세차게 기복을 일으킬 때마다 그 밑에 깔 린 여인의 입에서는 참을 수 없는 신음성이 비명처럼 터져나왔다. 개구리같은 자세로 벌려진 여인의 하체를 쉴 새없이 압박해대는 사내의 등줄기로 땀방울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여인은 사내의 그것이 엄청난 힘과 속도로 출입함에 따라 하체 의 중심부가 급격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녀의 가녀린 우유빛의 지체가 무서운 기세로 사내의 몸에 휘감겨들었다. [죽....죽어요!] 잘익은 석류처럼 벌려진 붉은 입술 사이에서 터지는 격렬한 신 음성, 눈앞에 명멸하는 불꽃들, 온몸을 훑고 지나는 짜릿한 전율의 가닥들...! 여인은 드디어 정점(頂點)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콰창! 열풍이 몰아치고 있던 방의 방문이 돌연 부서질 듯 요란하게 활 짝 열렸다. [헉!] [흐윽!] 너무나 갑작스런 일인지라 두 남녀는 몸을 가릴 새도 없었다. 부서지며 열린 문을 통해서 회색 단삼(短杉)을 걸친 세명의 젊고 건장한 장한이 들어섰다. 짧은 소매 밖으로 들어난 팔다리가 강인 해 보이고 얼굴과 팔뚝에 난 상처자욱이 한층 흉악한 인상을 더해 주는 자들이었다. 그들 세 흉한(凶漢)들의 뒤를 이어 한명 청삼(靑衫)을 걸친 수려 한 용모의 청년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삼청년의 정갈한 이목구비에는 한 점 의 온기도 보이지 않는 무감정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언뜻 보기 에 헌앙한 미장부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비정한 기운이 감도는 얼굴이었다. 제 2 장 움직이는 刺客 1 펑! 모충은 갑자기 방문이 열리자마자 맹렬히 양손으로 침상을 후려 쳤다. 그리고는 그 반동을 이용해서 날아올라 벽에 세워진 검을 낚 아채 갔다. 실로 날렵한 동작이고 전광석화와 같은 임기웅변이었 다. 차앙! 모충의 손이 검집을 잡는 동시에 검이 빠져나왔다. 하지만 바로 같은 순간 한 줄기 서릿발같은 검광이 번쩍 등잔불 빛에 빛이 났다. {크흑!} 직후 참혹한 비명을 토하며 퉁기듯이 물러서는 모충의 오른손은 팔뚝부터 깨끗하게 베어져 나갔다. 그의 팔을 베어버린 보검(寶劍)은 이미 다시 청삼청년의 검집 속 에 들어가 있었다. 가히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쾌검(快劍)이었다. 모충 역시 손 속의 빠름과 신랄함으로 그 세계에서 이름을 얻은 인물이었지만 이 청삼청년의 놀라운 신수(迅手)에는 비할 바가 아 니었다. {모랑!} 진여상은 모충과 정사를 벌이던 반나의 모습임도 잊고 미친 듯 이 울부짖으며 침상에서 뛰어내려와 모충을 껴안았다. 하지만 팔이 잘린 고통보다도 앞으로 닥칠 무서움에 뇌리가 모 충의 뇌리는 새하얗게 비워져 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모충은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모 르는 것은 살인의 수단으로 선택될 방법 뿐이다. 잘려진 팔뚝의 상처에서 분수같이 솟구치는 피는 삽시에 방바닥 을 가득 적셨다. 진여상은 너무나 놀라 손발이 굳어진 채 눈이 휘둥그래져서 마 치 얼어붙은 양 망연히 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은 무슨 말을 할 듯이 벌어져 있었지만 정작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네명의 이방인은 진여상의 탐스런 알몸을 바라보고도 눈빛에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청삼청년은 무심하게 두 명의 장한에게 눈짓을 했다. 세 명의 흉한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잘알고 있었다. 그들중 가장 왼쪽에 서 있던 장한이 주머니에서 가죽을 꼬아 만든 끈을 꺼냈다. 그가 포승을 들고 진여상에게 다가서자, 그녀는 본능적인 반응으 로 주춤 물러섰다. 한 순간 모충의 눈빛에 분노의 빛이 스쳐갔다. 하지만 한 옆에 서서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있는 장한을 일별한 순간 그의 동 공에는 절망감이 서렸다. 모충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가 무슨 짓을 한다고 치더라도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 기 때문이다.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고 눈에는 눈물이 괴어 흡사 막이라도 덮 인 듯이 보였다. 모충은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저항을 한다면, 그 뒤에 따른 참혹한 현실이 얼마나 견딜 수 없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진여상이 느끼는 공포는 전신이 마비되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녀 는 이렇게 무서운 사람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일이 없었다. 손발이 묶여진채 한 구석에 내던져진 진여상은 자신이 흡사 육 지에 내동댕이쳐진 물고기인 듯 여겨졌다. 공포와 흥분으로 폐는 빠른 숨을 간단없이 몰아쉬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진여상은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정랑과 몸을 불태우 던 침상에 편안한 자세로 앉은 청삼청년을 향해 애원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청삼청년은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혈도가 점혈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충을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모충, 아니 본명은 모전일(毛田一)이지. 난 지금까지 자네한테 알맞은 대접을 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렇지 않은가?} 청삼청년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모충의 대답을 기다리려는 듯이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모충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청삼청년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네. 즉 자네를 싫어하지 않았단 말 일쎄. 비록 거래하는 입장으로 우리는 만났지만 나는 자네에게 많 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 이어 청삼청년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스쳤다. {헌데 자네는 서로 거래하는 단계에서 지켜야 할 일을 어겼고 나의 기대 또한 무산시켰단 말이야.} {...} 굳어진 모충의 몸으로 가는 파문이 스쳤다. 직감으로 자신에게 내려질 판결이 결정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심판(審判)하기 위해서가 아 닐세. 약속을 어긴다면 어떻게 되는지 그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청삼청년은 서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모충! 자네로 인해 우리 일이 몹시도 힘들게 생겼네.] 침대를 떠난 그는 일정한 걸음걸이로 꿇어앉은 모충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게다가 이번 일로 나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네. 자네야 지금 이대로 사라지면 모든 것이 끝이 나겠지만 앞으로 몇십년을 더 살아가야하는 나의 고통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나?} 2 청삼청년은 서두르지 않았다. 다만 마음 속의 흥분을 억누르지 못해 모충의 정면에 섰다. {이제 어느 정도 자네로 인해 내가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았으리라 믿네. 어떤가? 나를 위해 몇 마디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보지 않겠나?} 모충의 표정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침내 그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무... 무엇을 알고 싶소?} 바싹 마른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임종을 앞둔 노인의 그것같이 쉬어 있었다. {별 것 아니네. 자네가 항주성 무림맹 지부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는 사소한 말을 듣고 싶을 뿐이네.} 청삼청년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모충은 눈물 고인 얼굴로 그에게 애원하듯이 말 했다. {원하는 건 무었이든간에 다 이야기 할 테니 상매는 살려 주시 오.} 순간 청삼청년의 검미가 슬쩍 모아졌다. {모충, 결과를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다니.... 자네는 나에게 끝까 지 실망만 줄 셈인가?} 그는 말을 하면서 오른발을 모충의 무릎 위에 올렸다. {으아악_____ 크아악!} 모충의 입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우지직... 청삼청년의 발이 느릿하게 내려갔다. 그에 따라 모충의 무릎뼈가 그대로 으스러져 내려앉고 있었다. 살이 터진 사이로 허연 뼈조각 이 튕겨져나오고 끊어진 혈관에서 뿜어진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크아아악...!} 생살이 터지고 뼈와 골수가 으스러지는 그 끔찍한 고통에 오랜 수련을 걸친 모충의 입에서도 짐승같은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 사랑하는 사람의 처절한 부르짖음을 들으며 진여상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무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 참혹한 공포 앞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여상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점점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숨쉬 기도 곤란함을 느꼈다. 이윽고 청삼청년의 발이 모충의 무릎에서 떨어졌다. 그때서야 모충의 비명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모충의 눈빛은 맥없이 초점이 풀려 있었다. {진소저...!} 청삼청년은 공포로 떨고 있는 진여상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방이 절망적으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예의를 지켰다. {당신 같은 절세미인이 이런 추잡한 사건에 관계되어 정말 유감 이오.} 그는 실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표정마저 애처로운 기색을 띄 웠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때로는 죄없는 사람이 날벼락을 맞 는 수도 더러 있고, 옛말에도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 있지 않소.} [....!] 모충의 신형이 절망적인 공포로 부르르 떨렸다. 청삼청년이 느릿 하게 품 속에서 조그만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소도(小刀)를 꺼내는 것을 본 것이다. 청삼청년은 소도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가만히 손톱을 손질했다. 소도는 비록 여인의 장난감처럼 앙증맞아 보였지만 칼날에 서릿발 같은 예기(銳氣)는 핑시 신물이기(神物異器)임이 분명했다. 세 명의 흉한은 잠자코 그를 보고 있었다. 모충은 다음에 올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문득, 모충의 신형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 서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그의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청삼청년은 그런 모충을 스산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접한 모충은 자신도 모르게 팔다리에 끌어올렸던 그 나마의 힘마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쓸데없는 짓이야.) 청삼청년의 무감정한 차가운 눈빛은 그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 다. 모충은 무익한 저항이 고통만을 더할 것임을 깨닫고 완전히 의 지를 잃고 말았다. 고개를 떨구는 모충을 흘깃 돌아본 청삼청년은 다시 진여상에게 시선을 몰렸다. {진소저 당신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지만 이 불쾌한 사건에 가담 시키지 않을 수 없소.} {안돼! 그녀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소. 제발 상매만은 살려주시 오.} 절망감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모충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애원 했다. 그것이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노 력이었다. {흠... 말할 기력이 남아있다면 어디 마음 속의 말을 해 보실까?} 청삼청년이 비정한 눈빛으로 모충을 노려보며 말했다. 결국 모충은 체념한 표정으로 저녁 무렵 조중과 만났던 이야기 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실토할 수 밖에 없었다. 3 한동안 모충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삼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솔직이 말을 했으니 고통만은 주지 않겠다. 잘 가게 모 충.} 친한 친구에게 인사하듯이 말을 한 청삼청년은 슬쩍 손을 흔들 었다. 쉿! 그의 수중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한줄기 섬광이 흘 러나왔다. {컥!} 직후 짧은 단말마의 비명이 모충의 입에서 터짐과 동시에 옆으 로 쓰러졌다. 그의 미심(眉心)에 박힌 소도는 손잡이만 남기고 날이 거의 다 머리 속에 파고 들어가 있었다. 모충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이 툭 불거져 나오고 실룩 실룩 경련을 일으켰다. 예리한 소도의 칼날이 뇌속으로 파고들며 생명을 끊어놓는 사이의 불과 잠시 동안이 그에게 있어서는 무서 운 고통의 영원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을 섞으며 열락에 몸부림치던 정인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본 진여상은 이제 공포로 인해 몸을 움직일 수마저 없었다. 그녀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방안의 사람들과 모충의 참혹한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춤을 추며 그녀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완전히 얼이 빠져 사타구니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훤 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무르익은 석류같은 그녀의 은밀한 곳에는 아직도 모충과의 격렬했던 정사의 흔적이 흥건하게 남아있었다. 그런 진여상의 난잡한 자태를 바라보는 세 흉한의 눈빛은 피를 본 맹수처럼 붉은 핏발이 서렸다. 청삼청년은 모충의 이마에서 자신의 소도를 회수한 후 몸을 돌 렸다. {기왕지사 이 땅을 떠날 생명, 시간이 잠시 지체된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겠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상관인 청삼청년의 모습이 완전히 방 안에서 사라지자, 세명 흉 한들의 표정에 잔인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자들은 진여상에게 다가 서며 허리춤을 풀기 시작했다. 두손이 뒤로 묶인 자세로 주저앉은 진여상은 망연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려는 일이 그녀에게는 그저 남 의 일을 보는 듯 몽롱하게만 느껴졌다. 사내들의 흉칙한 실체가 눈앞에 들어나는 것도, 자신의 몸이 개 나 소처럼 끌려가 침상 위에 눕혀지는 것도 그녀에게는 꿈결인 듯 만 싶었다. 침상에는 아직도 그녀와 모충이 뜨겁게 뒤엉켰던 체온이 남아있 었다. [...!] 한순간 진여상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뜨거운 이물질이 하복부로 뻐근히 파고들며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이 혼미하던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 정인을 머금고 있던 그곳에 다른 사내의 실체가 무 자비하게 삽입된 것이다. (안돼...!) 절망의 신음을 토하려고 했지만 입만 벌어질 뿐 소리가 되어나 오질 않았다. 내장까지 휘젓는 듯한 사내의 거대한 육괴, 그리고 바로 눈 위 에서 이글거리는 욕정에 가득한 사내의 얼굴, 그녀는 자신의 미끈한 두 다리가 쳐들려 모양좋은 자신의 젖무 덤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사내는 그녀의 두 다리를 쳐들어 겨드랑에 낀 자세로 세차게 하 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자연히 둔부는 둥글게 들려지고 진여상은 자신의 무참한 하체로 사내의 검붉은 흉물이 나타났다가 세차게 삽입되곤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당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저 그 뿐이었다. 반항할 엄두도 못내고 그저 어서 이 악몽이 끝나 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극에 달한 공포로 인해 그녀의 뇌리는 점차 하얗게 탈색되어갔 다. 땀에 젖은 얼굴이 연신 멀어졌다 가까워졌다하며 주마등처럼 스 쳐간다. 헌데 그녀의 정신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이율배반적으로 그녀의 육체는 급격히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정인과의 행위로 달아올랐다가 방해를 받아 사그라졌던 본능의 불길이 무참하게도 겁탈의 행위에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으으으!] 악다문 입술 사이로 비명같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하체가 절로 요동을 쳐대었다. 그녀의 그같은 방응에 땀에 젖은 사내의 얼굴에도 언 듯 놀라움 의 빛이 스쳤다. 기대하지 않았던 진여상의 반응에 흥분한 사내는 한층 더 격렬 하게 그녀를 압박해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여인은 몸 안 깊은 곳에 격렬한 남자를 느끼 며 마침내 단말마의 신음성을 터트렸다. 사내의 긴 한숨이 얼굴 위로 뿜어지며 이윽고 하체가 허전해졌 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아니 시작에 불과했다. 다시 내려다 보는 얼굴이 바뀌고 또 다른 강렬한 힘이 깊숙이 자신의 중심부로 파고들어옴을 느끼며 여인은 자지러지는 신음성 을 내뱉았다. 한스런 여체여! 정인이 핏물 속에 시체로 누워있는 지척에서 진여상은 몇번이고 열락의 절정을 느껴야만 했다. 육체의 본능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녀 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몸둥이가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4 이윽고 세 번째 흉한도 욕심을 채우고 일어섰다.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그자가 바지를 입는 것을 보며 축 늘어 진 진여상의 눈가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정말 굉장한 몸이군. 한 번으로 끝내긴 아쉬울 정도야!] [하지만 이미 결정된 운명은 돌이킬 수 없지.] 두손이 뒤로 묶인 채 상아빛의 하체를 벌리고 망연히 누워있는 진여상을 내려다보며 세 장한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고자가 아닌한 누군들 진여상의 육체에 매료되지 않으랴? 서로 눈길을 주고 받은 세 장한중 첫 번째로 진여상을 범했던 자가 침상으로 다가왔다. 그자의 눈빛에 떠오르는 냉혹한 광채를 발견한 진여상의 봉목이 하얗게 치떠졌다. 그런 그녀의 가냘픈 목을 흉한의 두툼한 손길이 우악스럽게 움 켜쥐었다. 점점 커지는 여인의 눈망울, 경련을 일으키는 동체... 투툭! 한 순간 여인은 놀라운 힘으로 뒤로 묶인 포승을 끊어버렸다. 절 망에 빠진 인간은 종종 믿기지 않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이 다. 고운 팔목이 다 까진 진여상의 섬섬옥수는 죽음 앞에 마지막 발 버둥인 양 사내의 무쇠 같은 팔을 잡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사내의 강철같은 손아귀에 힘이 가해짐에 따라 진여상의 까만 동공에 흰자위가 덮여가고, 경련을 일으키던 동체의 움직임도 서서 히 멈추었다. 이로써 두 개의 생명은 영원히 이 땅을 떠난 것이다. 뒷처리를 마친 세명의 흉한들은 무표정한 신색으로 방 안을 둘 러본 후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비릿한 피의 향기,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 었다. 삼월(三月)도 막바지에 이른 항주는 포근한 봄날씨로 하늘은 구 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무림맹 감찰전의 부전주인 귀견수(鬼見手) 조중은 자신의 수하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모충이라는 젊은이가 죽었단 말인가?}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진한 분노가 담겨 있었 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의 어리석음으로 그만....}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두 명의 인물은 바로 소방 원(小房院)이란 홍루에서 모충을 놓친 그 흑의 장한들이었다. 그들은 무림맹 감찰전 소 속의 고수들로 부전주인 조중의 지시 로 모충의 뒤를 미행했던 것인데 그만 일시의 실수로 모충의 종적 을 놓치고 말았었다. 둘중 귀 밑에 사마귀가 난 장한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허나 다행히도 우리의 눈에 빨리 발견되어 시신만은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조중의 눈빛이 밝아졌다. {찾은 것이 있나?} 옆에 서 있던 삐쩍 마른 장한이 안도의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많은 것은 조사할 수는 없었지만 여인의 내력은 밝혀 냈습니다.} {좋아, 잘됐어.} 조중은 약간 흥분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그래 시신은 어디다 두었나? 내가 직접 살펴 보겠네.} 두 명의 장한은 급히 앞장을 섰다. 지하석실, 사방 오 장 가량의 썰렁한 석실에는 하나의 등잔만이 어둠을 밝 히고 있었다. 그 석실 중앙에 놓인 나무침대 위에는 두 구의 시신이 누워있었 다. 둘중 사내의 시신은 한팔이 잘려있는데 죽기 전에 고문을 당한 듯이 다리가 으스러진 처참한 몰골이었다. 반면 여인의 시신에는 별달리 상처가 보이지는 않았다. 목을 졸 린 것이 직접적인 사인(死因)으로 그녀의 육감적인 몸에는 누가 봐 도 확연한 겁탈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노련한 귀견수 조중은 최소 한 둘 이상의 사내가 그녀를 유린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상태가 서로 다른 이 두구의 시신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직전에 극도의 공포를 느낀 듯 툭 불거져 튀 어나온 동공에 초점이 없다는 점이었다. 귀 밑에 사마귀가 난 장한이 조심스럽게 조중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모충의 내력은 밝혀 내지는 못했지만 여자의 내력은 월화루의 기녀로 밝혀졌습니다.} 성명:월몽(月夢), 본명은 진여상(秦汝霜)으로 밝혀짐. 나이:십 구 세. 내력:절강성 진씨세가(秦氏世家)의 무남독녀로, 이 년 전 그녀의 부친 진호중(秦護中)이 관부에 재직시 역모에 연루되어 일가족이 참살되었음. 하지만 그녀만은 극적으로 월화루의 주인 월화에 의해 구출되어 일 년 전부터 기녀로 일해옴. 5 장한의 설명이 끝나자 조중의 눈빛에 일순간 칼날 같은 광채가 스쳤다. (월화루의 기녀라....) 조중의 뇌리에 번갯불 치듯 하나의 사건이 뚜렷히 떠올랐다. {지금 월화루에는 누가 가있나?} {지부장께서 직접 월화루로 가서 동정을 살피고 있습니다.} 조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시신들의 상태는 내가 살펴 볼 것이니 자네들은 월화루 로 가서 단서를 찾아보게.} 두 명의 장한은 허리를 숙인 후 재빨리 지하석실을 빠져나갔다. {...} 모충의 미심에 난 상처를 살피는 조중의 눈빛은 몇 차례 파문을 일으켰다. (실로 고절한 수법이다. 피의 응고 상태로 보아 살인자의 무예는 상상 이상이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일은 자명한 사실 한 시라도 빨리 이 사건에 뿌리를 찾아내야 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조중의 눈빛은 횃불같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의 눈빛이 이러할까? 사실 몇 년 동안 하는 일없이 태평스럽게 보낸 조중은 평온한 하루하루에 맥이 빠질대로 빠져 있었다. 평생을 피가 난무하는 격 전과 치밀한 두뇌로 강호를 마음껏 질타하던 그에게는 평화라는 것은 서서히 목숨을 끊어가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무림맹 감찰전 부전주라는 요직에 있는 그가 총단을 떠나 이곳 절강성의 지부에 관사라는 신분으로 위장하고 나와있는 것도 현장 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그의 타고난 체질 때문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조중의 내면에서는 무 인의 뜨거운 피가 전신 혈관을 타고 맹렬히 치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 조중은 잠시 동안 꼼짝하 지 않은 채로 그 동안 그의 부하들이 작성한 문서를 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두 번 읽고는, 등을 의자에 편안히 기대로 한동안 눈 을 감은 채 머리를 정리했다. 일다경(一茶更)이 흘렀을 때 조중은 자신의 심복 수하들을 불러 들였다. 들어와서 자리에 앉은 세 명의 사내는 귀견수 조중과 생사고락 을 같이한 수족과도 같은 인물들이었다., 약간 지친 듯한 표정을 지닌 이 세 사내들은 오랫동안 해온 일 이어서 이번에도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싶었 다. 오른쪽 첫째 편에 앉은 장한은 장차수(張차手)라는 인물이다. 현 재 나이 삼십 이 세로 날카로운 눈매에 강퍅한 얼굴을 지녔다. 오 년 전 무림맹 형당(刑堂)에서 감찰전으로 넘어왔는데 조중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었다. 장차수 옆에는 장차수와 비슷한 나이의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장한이 앉아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공표(司空表)로 동료를 사이에 서 흔히 흑심수라(黑心手羅)라고 불린다. 평범한 용모의 그가 흑심수라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불린데 는 다음과같은 비사가 있었다. 십 년 전, 산동성(山東省)에서 하나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었다. 강호에서 살인이야 다반사였으나 문제는 그것이 무림맹에서 파 견한 산동 지부장(支部長)의 피살사건이라는데에 있었다. 지부장을 잃은 무림맹에서 이 사건이 대외적인 명분의 문제인지 라 거의 반 년 간 필사적으로 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아무런 단 서도 찾지 못하고 사건은 끝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헌데 사건 일 년 만에 산동성지부의 소속이던 무명의 무사 사공 표는 단신으로 범인을 추적, 결국 체포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사공표는 단숨에 승진을 하여 지금은 감찰전의 제 이인자인 조중의 충실한 수하가 되었다. 맨 마지막의 장한은 자운유(紫雲儒)라는 인물로서, 이들 삼인 가 운데 가장 젊고 문사풍의 치밀한 성격을 지닌 수려한 미목의 청년 이었다. 그는 소림사(少林寺)의 속가제자로 소림사의 장로인 영허선사(靈 虛禪師)의 제자였다. 감찰전 내에서도 최고의 인재들로 꼽히는 그들은 나이에 비해 직급도 높아서 외당(外堂)의 당주(堂主)급 대우를 받고 있었다. 조중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이들 세 심복의 지식과 판단력, 그리고 충성심에 의지하는 바가 컸 다. 第 三 章 늑대와 여우의 情事 1 <월화루(月花樓)> 항주 서호(西湖)의 수려한 호반(湖畔)에 자리한 월화루는 색향(色 鄕)으로 소문난 항주에서도 가장 이름이 높은 기루(妓樓)다. 당연히 오늘 밤도 월화루는 예외없이 흥청거리고 있었다. 그 월화루의 후원에는 넓직한 인공연못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서호와 수로로 연결된 이 인공연못은 서늘한 초 여름의 밤바람에 물결을 일으키며 누각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편월(片月)의 달빛 아래 삼 층으로 세워진 그림 같은 누각은 흥 청거리는 월화루의 다른 곳과 달리 아주 조용하여 적막감마저 감 돌고 있었다. 이 연못가의 삼 층 누각 맨 위층에 자리한 한칸의 아담한 방은 호사의 극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두터운 양탄자, 벽에 입힌 금칠, 오목(烏木)으로 만 들어 침상과 가구 등등 실로 호화롭기 이를데 없는 방이었다. 지금 이 호화로운 방에는 사람의 키만한 동경(銅鏡) 앞에 서서 자신의 몸매를 비추고 있는 미녀(美女)가 있었다. 나이는 이제 삼십 세 가량 되었을까? 우유빛 보드라운 살결에 촉촉히 젖은 듯한 눈매와 앵두빛 입술, 흑단같이 보드라운 머리는 허리까지 드리우고 풍염한 몸매는 옅은 분홍빛 망사의에 감추어져 튀어나올 듯이 부풀어 오른 젖무덤, 실로 보기드문 미녀였다. -월화(月花)! 그녀가 바로 이곳 월화루의 주인이며, 항주의 밤을 좌지우지하는 요화(妖花) 월화였다. 월화가 항주에 나타난 것은 칠 년 전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월화루의 기녀로서 일했으나 단 일 년 만에 당 시 월화루의 주인이었던 장과(張科)를 치마폭에 감싸고 주인행세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장과가 갑자기 병사하자 그녀는 완전히 월화 루를 수중에 넣어버렸다. 그러나 이 주루도 오래지 않아 월화가 다른 사업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녀는 이곳 월화루의 밀실에서 값비싼 물건을 팔고 싶어하는 암흑가의 사람들과 그것을 사려고 하는 사 람들을 소개해 주는 역할을 시작했던 것이다. 암거래뿐만 아니라 그녀는 누구든 암살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 일을 맡아하겠다는 자객과 손을 잡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오래지 않아 자객들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유력자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일도 아니고 살인청부업이란 것은 그만큼 위험도 뒤따르고 생명의 위협도 있었다. 만일에 청부자와 자객 사이에서 중개가 실패하거나 어느 쪽이 파멸된다면, 그녀는 목숨으로 보상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일에는 그녀가 청부자나 자객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져 야 한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는 쌍방에게 거금의 액수를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불과 오 년 만에 그녀는 수많은 돈을 축적할 수 있었다. 드르륵! 갑자기 등뒤의 방문이 열리자 동경을 보고 있던 월화는 아미를 상큼 찌푸렸다. 염소 수염을 기른 사십대의 교활하게 생긴 장년인이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趙)관사, 무슨 일이예요?} 돌아보지도 않고 묻는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조관사라 불리운 장년인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석(石)공자께서 왔습니다.} 순간 월화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지난 며칠동안 그녀 를 전전반측하게 만든 사건의 장본인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곧 나갈 테니 그 분들을 밀실로 모시세요.} 그녀는 입술을 지긋이 물며 조관사에게 쌀쌀맞게 지시했다. 조관사가 다시 한 번 깊이 머리를 숙여보이고 방에서 나가자 월 화의 행동이 갑자기 빨라졌다. 가장 화려한 옷과 장신구와 향수가 그녀의 깊은 서랍에서 꺼내어졌다. 모충이 진여상과 함께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그녀는 불안 감에 떨어왔었다. 특히 자신만의 정보망을 통하여 모충의 시신이 무림맹의 절강 지부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그녀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었다. 자신의 행각이 들어났다고 여긴 그녀는 종내에는 모든 것을 버 리고 잠적을 해 버릴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세상이 비록 넓다지만 거의 전 무림에 걸쳐 뻗혀있는 무 림맹의 감시망이나 이번 일을 청부한 제 삼 세력의 살수를 피한다 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결론은 하나, 뒤로 물러 설 수는 없으니 부딪칠 수밖에 없 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나름의 복안이 이미 세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이윽고 전신을 새로이 치장한 월화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자태를 살펴본 후 입술을 깨물었다. 살며시 걷는 그녀의 자태는 보기에도 아름다왔다. 그녀는 지금껏 숱한 난관과 위기를 자신이 가진 최대의 무기인 미모와 교태로 넘 겼었다. (잘 될거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월화는 스스로를 위안하듯 되뇌었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마음 속의 공포는 그녀 자신도 참기 어려웠다. 2 두툼한 융단이 깔린 방 안은 전체적으로 포근한 감을 주었다. 하지만 방 안에 머물고 있는 네 사람으로 인해서 어딘지 모르게 방안의 분위기가 삭막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월화는 자리에 앉았다. 월화의 맞은편 좌석에 앉아있던 청삼(靑衫)의 청년은 그녀가 들 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고 무심히 어두워져 가는 바깥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청삼청년의 뒤에서 그를 보호하듯이 서 있는 세 명의 건 장한 회색 옷의 장한들 또한 힐끗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을 뿐, 파 충류처럼 무심한 동공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이들은 바로 항주 교외의 폐장에서 모충과 진여상을 살해한 그 일행들이었다. 월화는 방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들의 표정을 통해 자신이 계획 했던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여자의 아 양이나 교태로 마음이 움직일 인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싸늘히 식어가는 가슴을 억누르며 요염한 미소를 띄웠다. {호호.... 석공자님 어서 오세요.} 월화가 미청년과 만나는 것은 두 번째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의 배 위에서 만났었는데 그때는 서로 복면 을 했던 관계로 얼굴을 알지는 못했다. 청삼청년이 자신의 얼굴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자신을 만나러 왔 다는데 대하여 월화는 문득 심장이 오므라 드는 공포심을 느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전날 청년 의 뒤에 서 있는 장한들의 무예를 보고 난 후 그녀로서는 결코 상 대할 수 없는 무서운 세력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들의 무서움을 느끼고 난 후 그녀는 청부를 거절하고 싶었지 만 그 대가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이윽고 청삼청년의 시선이 월화를 향했다.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방해가 안되었는지 모르겠소.} 언제나처럼 그의 말은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에게 급한 용무가 있어서 말이오. 특히 소개해준 한 사람이 기대를 저버려서 결례를 할 수 밖에 없었소.} 청년의 예의바른 말투에서 월화는 올 것이 왔다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충의 소식은 들었어요. 이 일은 저의 책임인만큼 보상책 을 강구하고 있어요.} 재빠르게 말을 하는 월화의 표정은 애원의 빛이 서려 있었다. 청년은 스산한 눈빛으로 그런 월화의 전신을 지그시 훑어보았다. 몸 구석구석에 청년의 강렬한 시선을 느낀 월화의 눈꺼풀이 문 득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래, 나를 보고도 나의 몸을 탐내지 않는 남자는 한 명도 없었 다. 비록 일이 잘못 되었지만 나의 몸이라면 그 대가로 충분할 것 이다.) 월화는 한껏 요염한 미소를 떠올리며 입술을 약간 벌렸다. 붉디 붉은 입술 사이로 옥같이 고운 이가 들어나며 그녀의 농염한 표정 에 약간의 백치미까지 더해주어 한층 고혹해보이게 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동안 말없이 쳐다보던 청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호호 그럼 그렇지, 네놈도 사내인데... 오늘밤 나의 치마폭에 감 긴다면...) 생각만 해도 전신에 짜릿한 기운이 펴지는지 월화는 기묘한 미 소를 지었다. {호호.... 석공자님 우선 술부터 드세요.} 한껏 염기를 풍기며 월화는 술을 따루었다. {소저, 오늘은 늦었소. 몇 가지 일이 있으니 이 밤의 남은 시간 을 더 이상 빼앗고 싶지는 않소.} 한점의 변화도 없는 조용한 목소리에 월화는 자신의 생각이 착 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에 별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이라면...?} 월화는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소저! 나는 소저 덕분에 녹초가 되어 버렸소.} 청년은 날카로운 눈으로 다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의 소개가 잘못되는 바람에 많은 일이 틀어졌소. 소저가 나 의 기대를 배신하게 되면 나도 나의 윗사람에게 실망을 주게 되고 연쇄반응으로 나의 힘이 그만큼 더 들게 된다 말이오.} [그 점은 진심으로 죄송하게....!] 월화가 무어라 변명을 하려했지만 청삼청년은 자신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왔다갔다 이리저리 뛰게 되고 마치 쥐새끼처럼 맴 돌게 된다 말이오.} 청년은 한숨을 내쉬며 고소를 지었다. {소저도 같은 입장에 서게 되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오.} {죄송해요. 석공자님의 일에는 최선을 당했는데...} 월화는 누가 봐도 진솔한 자세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청삼청년은 가차 없었다. {그만큼 대가는 충분히 받았지 않소?} 청년의 그 싸늘한 대꾸에 월화는 할말을 잃었는지 낯빛을 굳혔 다. {일은 이렇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발뺌을 할 생각이시오?} 약간 흥분을 했는지 늘 예의바르고 차분하던 청년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3 월화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청년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대로는 끝낼 수 없소.} 그는 말을 멈추고 주의 깊게 월화의 표정을 살폈다. {이 일에는 내 책임만은 아니예요.} 월화는 즉시 변명하듯 말했다. {석공자님께서 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 문에...} {그건 그렇소.} 청년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이번 일은 나에게도 얼마간의 책임은 있지.} 월화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눈 앞의 이 청년은 분명 새로운 거 래를 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모충의 건으로 이번일을 취소할 생각이라면 이렇게 긴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 자신의 목은 바닥에 깔린 갑 비싼 서 역산 융단을 피로 적시며 뒹굴고 있을 것이다. 아직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있는 것이다. {루주가 추천한 다른 두 사람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소.} 청년은 조용히 말했다. 월화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이고,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뛰 어난 실력자가 두 명 더 필요하오.} 월화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녀는 급히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석공자님이 일고 계시다시피 저는 이제 더 이상 비마영과 같은 수준의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에 순간 청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소저, 이 일은 절대 피할 수가 없소.} 청년은 월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이 일에서 벗어나고 싶겠지만 그런 생각은 그만 두는 것이 좋 소.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니까.} 그의 말에 월화는 비로소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그랬군, 그랬어.} 월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미 자신에게 는 재고나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이다. 청년은 그런 월화의 표정을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일을 서둘러 주시오. 이번 일로 인해 우리 쪽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는 절대 안되오!} 말과 동시에 일어선 청년은 습관인 것처럼 뒷짐을 지으며 월화 에게 말했다. {명심하시오! 두 사람이오. 그것도 최고의 자객들이어만 하오. 이 일에 소저의 몫도 대단할 거요.} 월화는 더 이상 청삼청년의 요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주저하거나 미련을 갖을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어느 정도나 있어요?} 그녀의 물음에 청년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여유는 삼일 뿐이오. 그 안에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소저를 위 시해서 이번 일에 관계된 칠인(七人)은 더 이상 햇빛을 볼 수 없게 될 것이오.} 월화는 청년의 말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지독한 놈, 이미 나의 뒷조사를 다했구나. 이 자가 원하는 네명 의 자객이라면 황제라도 살해할 수 있는 자들이다. 도대체 어떤 사 람을 표적으로 한단 말인가?) 속으로는 염두를 굴리면서도 월화는 나직이 대답했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준비를 해야 된다면 그들은 구하는데 시 간이 걸려요.} 청년이 쌀쌀하게 말했다. {그들이 함께 일하는 것은 아니오. 표적은 하나지만 각자의 방법 으로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 거요!] 말을 하며 청년은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억해 두시오. 시간은 삼 일 뿐이라는 것을....!] 그 순간 청삼청년 뒤에 서 있던 장한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삼 일은 너무 짧아요. 오 일이라면....} 월화가 다급히 외치자 문 앞에 도착한 청년이 빙글 신형을 돌렸 다. {소저_____!} 청년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만일에 그 시간이 인생의 마지막 삼 일임을 기억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야겠지 않소?} 위협은 이제 확실히 표면에 나타났다. 월화는 전신이 싸늘해졌다. 억지로 웃는 얼굴을 보이려 했지만 굳어진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월화는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얼어 붙 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 인을 지켜보았다. 세 사람의 장한이 위협을 과시하는 그림자처럼 그의 옆을 따르 고 있었다. (제미랄 것! 시간이 너무 없어!) 이윽고 네명의 방문자가 사라지자 월화는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제 그녀에게는 한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삼일 안에 의뢰자들의 요구를 충죽시켜주어야한다! [....!] 헌데 막 삼층 누각에 들어서던 그녀는 흠칫 놀라운 표정으로 자 신의 침상을 바라보았다. 한명의 사내가 그녀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삼십 오륙 세 가량쯤 되었을까? 황갈색 장포에 한 자루의 장검을 지닌 건장한 체격의 장한이었 는데, 남자답게 생긴 얼굴에는 사람을 얕보는 듯한 야릇한 미소가 배어있엇다. 전체적으로 퇴폐적인 분위기와 잔인한 인상이 함께 느껴지는 호 남(豪男)형의 인물이었다. 자신의 침대 위에 앉아있는 그 장한을 발견한 월화의 얼굴에 돌 연 반가움과 욕정의 불길이 확 솟아올랐다. 4 {천갈(天蝎), 언제 왔어요?} 그녀는 부르짖듯이 외치며 그대로 장한의 품 속에 안겨들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 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침대에 앉아있는 사내는 그 만큼 월화에 게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천갈(天蝎)이란 기괴한 이름으로 불린 사나이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를 껴안으며 침상에 나뒹굴었다. 그자는 잠시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월화의 치마를 벗기며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 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아이! 뭐가 그리 급해요!} 자신의 비지를 굶주린 짐승처럼 거칠게 더듬는 손길을 막으며 월화는 다급히 외쳤다. 허나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치마가 벗겨진 월화의 은밀한 곳을 가린 자그마한 천조각도 뜯기듯이 제거되고 미끈한 허벅지는 부끄 러운 자세로 활짝 벌어졌다. 백옥같이 희고 우윳결처럼 매끄러운 속살 중앙에 자리한 무성한 수림지대가 밝은 불빛 아래 거침없이 들어나보였다. 그 무성한 수림 속의 깊은 균열을 노려보는 사내의 눈빛이 벌겋 게 충혈되었다. [하악!] 마침내 사내의 머리가 사타구니 사이를 파고들자 월화의 입에서 더운 김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예민한 곳을 뱀처럼 움직이는 사내 의 설육이 헤집어대는대로 여체는 요동을 치며 울부짖었다. 일찍부터 육욕에 잘 길들어져있는 월화의 육체는 사내의 직접적 이고도 강렬한 자극에 그녀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올 랐다. 그녀의 중심부는 삽시에 뜨거운 홍수를 일으키고 있었다. [너....너무해!] 미칠 것만 같은 욕정에 몸부림치면서도 월화는 짐짓 앙탈을 부 려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섬섬옥수는 자신의 중심부에서 움직 이는 사내의 머리를 내리누르며 하체를 요동치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는 히죽 웃으며 그녀의 중심부에서 얼굴을 떼며 일 어섰다. 그리고는 재빨리 옷을 벗어부치고는 건장한 동체로 그녀의 육체를 찍어눌러왔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내의 구리빛 동체, 월화의 깊숙한 곳을 파 고드는 사내의 머리 속은 싸늘하게 식어갔지만 하반신은 그와 달 리 뜨겁게 달아올랐다. 월화의 앵두빛 입술 사이에서 자지러지는 비음이 터져나왔다. 몇 달 새 허전하기만 했던 몸의 어느 곳으로 뜨거운 불덩이가 그득히 들어참을 느끼며 그녀는 사지로 뱀같이 사내의 몸을 휘감았다. 사내의 움직임은 폭풍과도 같았다. 망망대해를 끝없이 급류하는 일엽편주랄까? 거침없이 나아가는 배는 파도와 강풍에 한 점의 요동없이 야생 마처럼 질주했다. 월화는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전신의 모세 혈관 하나하나에 파고드는 전율감, 계곡은 끊임없이 넘쳐 흐르고, 종내 그 물줄기는 땀과 범벅이 되어 온통 계곡을 적셨다. 어느 순간 월화는 단말마의 비음을 토하며 축 늘어졌다. 몸서리 쳐지는 전율이 그녀의 팽팽해진 신경을 가닥가닥 끊어버린 것이다. 허나 월화가 쾌락의 절정에 올라 반 실신하며 늘어졌음에도 사 내의 움직임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갈수록 힘차게 전신을 움직여 축 늘어진 여체를 집요하게 공략해갔다. 그러자 한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월화의 눈망울이 다시 벌어졌다. 휴식을 용납지 않는 사내의 행위는 여체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가 파른 정상으로 치닫게 만든 것이다. 사내에 의해 억지로 쾌락의 혼미에서 일깨워진 월화는 짐승의 암컷처럼 울부짖으며 다시금 무섭게 사내에게 휘감겨들었다. 사내는 여인이 반응을 보이자 히죽 득의의 웃음을 떠올리며 더 욱 세차게 하체를 움직엿다. 광란(狂亂)_____! 굶주린 한쌍의 짐승같은 두 남녀의 광란의 행위는 밤이 깊도록 계속 이어져갔다. 뿌옇게 밝아오는 햇살이 창문을 통해 어둠을 밝혔다. 그제서야 온통 땀으로 덮인 한 쌍의 남녀는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밤새 정사의 열기를 말해 주듯 월화의 표정은 온통 포만감과 허 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끈한 지체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무성 한 수림에 가려진 계곡 일대는 서로의 분비물로 흥건히 젖어있었 다. 반듯이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던 사내의 눈빛이 문득 음산하게 빛을 발했다. {월화! 석무심(石無心)의 일에 관계하니.... 당신도 정말 무모하군 그래.} 조용하게 뇌까리는 사내의 목소리는 악의를 담고 스산한 울림을 발했다. 그 순간 천갈의 팔을 베고 누워있던 월화의 두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무....무슨 소리예요 지금? 석무심이라니...!} 월화는 놀라움에 찬 목소리에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천갈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설마 석무심을 모른단 말인가?} 천갈의 그말에 월화의 희미한 눈동자로 심각한 우려의 빛이 스 쳤다. {석공자... 저녁에 찾아온 석공자를 말하는 것이예요?} 그녀는 긴장이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아니면 누가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石無心)이겠어.} 천갈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한 순간 월화의 전신에 파르르 경련이 스쳤다. 불길한 예감이 현 실로 들어난 것이다. {그가.... 석공자가 철혈무정... 석무심이란 말인가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숨길이 없는 공포가 담 겨 있었다. 사내는 여인의 놀라운 표정에도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천갈이 확인을 해주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뒤통수에 쇠망치를 맞은 느낌이랄까? 5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石無心)! 이 이름이 강호에 알려진 것은 삼 년 남짓이었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그 동안 철혈무정이란 이름 앞에 기라성 같은 강호인들이 쓰러졌다. 그와 부딪쳐 살아 남은 강호인은 아직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를 직접 보고도 살아난 자가 없는 때문에 내력이나 얼굴은 온 통 신비에 가려졌지만 철혈무정 석무심이란 이름은 그 잔인한 손 속과 초절한 무공 덕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특히 일 년 전 강호의 명숙(名宿)인 만승검존(萬勝劍尊) 백장천 (白長天)이 석무심의 손에 쓰러졌을 때 강호는 벌컥 뒤집혀졌다. -만승검존(萬勝劍尊) 백장천(白長天)! 그는 검의 달인으로 칠십 평생을 검도(劍道)에 몸바친 일대검호 (一代劍豪)다. 천신검류(天神劍流)의 마지막 전승자인 그는 일파의 종사(宗師)에 못지 않은 초절한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승검존조차도 철혈무정 석무심이란 이 신진고수 의 살수를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그가 바로 철혈무정 석무심이었다니....!) 자신이 방금전에도 만났던 그 예의바른 청삼청년이 다름아닌 철 혈무정 석무심이란 사실에 월화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멀리서 사 내를 올려다 보았다. 천갈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스쳤다. (철혈무정의 명성이 과연 무섭군. 천하에 둘도 없는 독부(毒婦)가 얼이 빠졌으니.) 사내는 내심 통쾌함마저 들었다. -천갈(天蝎) 냉유도(冷有道), 이것이 사내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당금 강호무림에서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 다. 그것은 천갈 냉유도의 무예가 남보다 못하다거나 실력이 없어 서가 아니고 그가 언제나 암중으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월화도 오랜 동안 살을 섞어온 그의 내력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냉유도란 그의 이름도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있 는 것이다. 월화가 냉유도를 만난 것은 칠 년 전이었다. 당시 월화루의 주인이던 장과에게 심신(心身)이 시달리고 있었 다. 뒷골목 출신답게 탐욕스럽고 잔인한 장과는 상당한 값을 치루 고 사들인 월화의 진을 다 빼먹을 기세였다. 월화는 장과의 주머니를 채워주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 다. 한 번에 몇 명의 사내와 그짓을 하거나 하루에도 수십여명의 노리개가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뿐만 아니라 장과 자신도 틈만 나면 월화에게 갖은 수치를 다 주며 욕심을 채웠다. 정상적인 행위로 만족을 얻지 못하는 그자의 취향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월화는 안해본 짓이 없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으며 성장한 월화도 결코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장과에게 당하는 수모와 착취를 결코 잊지 않았 으며, 언제고 몇배 몇십배로 돌려받을 독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후일을 위해 장광의 비위를 맟춰주면서도 자신을 대신해 서 그를 죽여줄 인물을 물색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천갈(天蝎) 냉유도였다. 냉유도는 한 달에 두세 번씩 월화루에 찾아와 여자를 사곤 했었 는데 한 번은 뒷골목의 건달들 십여명과 시비가 벌어져 은연 중 초절한 무예를 드러내보였다. 냉유도의 뛰어난 실력을 간파한 월화는 갖은 방법으로 은밀히 냉유도를 유혹했고, 월화 자신의 육체와 장과의 막대한 재산에 구 미가 동한 냉유도는 그녀의 악랄한 계획을 간단히 승낙했다. 결국 장과는 냉유도의 무시무시한 고문에 견디다 못해 자신의 숨겨둔 재산을 모조리 토해낸 뒤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장과의 죽음은 병사(病死)로 공표되었고, 월화루는 일찍부터 그 의 첩으로 소문이 난 월화의 것이 되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월화가 살인중개를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월화루의 주인이던 장과가 죽고 전 재산이 월화의 손으로 들어 오자 냉유도는 자신의 몫을 챙겨 말없이 사라졌다. 그 후 일 년 만에 다시 나타난 냉유도는 본격적으로 청부살인업 을 시작한 월화의 곁에서 자객일을 하며 지냈다. 일반 무림인들과는 비교조차할 수 없는 초절한 무공을 지닌 냉 유도가 맡는 일은 주로 뒷골목의 파락호들이 해치울 수 없는 거믈 들의 암살이었다. 어떤 무림고수나 권력자도 냉유도의 살수를 피할 수는 없었고, 그 덕분에 별볼일 없는 청부조직에 불과하던 월화루는 삽시에 그 방면에서 확고한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 결국 오늘의 월화루는 냉유도 덕분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냉유도는 월화에게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허나, 냉유도의 행방은 일정치가 않았다. 한 번 훌쩍 사라지면 짧으면 한 달, 길게는 반 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 냉유도가 최근에 그녀의 곁을 떠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개월 전이었다. 헌데, 오늘밤 갑자기 나타난 그가 철혈무정 석무심의 존재를 월 화에게 일깨워준 것이다. 6 월화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천갈, 이 일을....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나요?} {어떻게 하다니? 항상 하던대로 그쪽의 요구를 채워 주면 되는 것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천갈의 목소리는 다분히 조롱섞인 어조 였다. 월화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랐다. {흥, 당신은 언제나 그따위 말투군요. 그래 이번에는 무슨 바람 이 불어서 왔어요?} 그녀가 토라져서 말했지만 냉유도는 어디까지나 능글능글하기만 했다. {흐흐! 내가 못올 곳을 왔나! 오늘은 갑자기 왜 이러지.} 천갈은 음험한 미소를 띄우며 월화의 미끈한 몸매를 훔쳐 보았 다. 그의 눈에는 다시 붉은 열기가 피어 올랐다. {색마 같으니 밤새 나를 괴롭히고도 또 그래요?} 냉유도의 끈적한 시건을 느낀 월화는 차갑게 외치며 침상에 내 려왔다. 따뜻한 아침 햇살에 비친 월화의 나신은 환상 같은 신비감을 풍 긴다. 동산 같은 젖무덤이 출렁거리고, 세루요의 허리, 그 아래 풍만한 둔부는 터질 듯이 팽팽한 탄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가, 전날 밤의 격렬했던 정사를 말해 주는 듯 곳곳에 얼룩 진 물기와 비릿한 살내음은 사내의 욕정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거야?} 냉유도는 재빨리 월화의 나신을 끌어 안으며 침상으로 끌어 당 겼다. {이거 왜 이래요. 해야 될 일이 있단 말이예요. 어멋! 어딜 만져 요.} 월화는 냉유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연약 한 여자의 몸으로 이미 욕정이 되살아난 사내의 손길을 벗어난다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악!] 월화는 고개를 쳐들며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을 토했다. 달아나려 던 그녀는 네 발로 엎드린 자세로 냉유도에게 붙잡혔고, 야릇한 그 녀의 자세에 더욱 흥분한 냉유도는 무쇠기둥같이 단단해진 일부를 뒤로부터 그녀의 탐스런 엉덩이 사이로 밀어넣은 것이다. 뒤쪽으로부터 몸 속 깊숙이로 삽입되는 뜨거운 이물질의 감촉에 월화는 자신도 모르게 짐승의 암컷같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냉유도는 한줌 밖에 안될 것같은 월화의 허리를 움켜쥐고는 거 칠게 허리를 앞뒤로 움직여대었다. 무르익은 복숭아같이 발그레 홍 조를 띈 탐스런 살덩이 사이로 자신의 실체가 출몰하는 것을 내려 다보며 냉유도의 두눈은 흥분으로 벌겋게 충혈되었다. {당....당신같이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 요. 흐윽!} 월화는 뒤쪽으로부터 가해지는 그 거친 출입에 자지러지는 신음 을 토하며 몸부림쳤다. 냉유도의 행위에 박자를 맟춰서 달덩이같은 엉덩이가 절로 요동 을 치고 모양좋은 젖가슴은 땀에 흠씬 젖은 채 털렁거렸다. {흐흐! 좋으면서 뭘 그래?} 냉유도는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힘차게 허리를 앞뒤로 저어나갔 다. 여인은 다시금 몸 속으로 가득히 번져가는 짜릿한 전율감에 감 겨들면서도 뇌리 속에는 한 가지 계획을 떠올렸다. [부....부탁이 있어요 천갈!] 월화는 할딱이면서 고개를 돌려 냉유도를 돌아보았다. [말해봐!] 냉유도는 더욱 힘차게 그녀의 허리를 자신쪽으로 끌어당기며 대 꾸했다. {이번 일... 당신이 좀 도와주어야겠어요! 그들은 비마영 수준의 자객 두명을 더 요구했어요!} 지금까지 감당 못할 청부대상이 생기면 냉유도가 나서서 해치워 주곤 했다. 월화는 이번에도 냉유도가 자신을 위해서 나서줄 것이 라고 믿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냉유도는 검미를 꿈틀하더니 움직임을 멈추었 다. [왜....왜 갑자기 멈춰요?] 급격히 절정을 향해 치달리던 월화는 갑작스런 냉유도의 반응에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사내를 머금은 그녀의 하체가 절로 움 찔거리며 행위의 계속을 재촉했다. 하지만 냉유도는오히려 여체에서 지신의 일부를 이탈시켜버렸다. {왜...왜 그래요 천갈?} 돌아앉으며 토해내는 짜증섞인 월화의 투정에 냉유도는 서늘한 눈길로 싸늘하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에는 결코 말려들고 싶지 않아. 나는 아 직 죽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그....그게 무슨 소리예요?] 냉유도의 예기치 못한 싸늘한 방응에 월화의 눈빛이 초조하게 물들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천갈! 이 일에는 이미 비마영(飛魔影) 과 추명사(追命蛇)가 투입되었다구요. 나로서는 그 두사람 이상의 살수를 구할 재주가 없단 말이예요. 이런 때에 당신이 도와주지 않 으면 난 어떻게 해요?} 월화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냉유도는 욕정의 불길 마저 사그라들었는지 그냥 벌렁 침상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군.] 그는 팔베개를 한 채 비릿한 조소를 떠올렸다. [석무심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다면 당신 목숨을 내 놓을 수밖 에 없지.] [뭐예요?] 순간 월화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치밀어 오르는 울 분을 참기 어려운 듯 그녀의 두눈에서는 독기가 시퍼렇게 쏟아져 나왔다. {당신은 내가 죽든 말든 상관이 없단 말이예요?} 매섭게 소리치는 그녀의 입술을 창백하게 질린 채 푸들푸들 경 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천갈이라는 이 사내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담담히 말했 다. {어쨌든 나는 이번 일에는 끼어들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하기 싫은 듯 두 눈을 감았다. 월화는 한동안 독기에 찬 눈길로 천갈을 노려보았다. {흥! 좋아요! 당신이 도와 주지 않아도 나를 도와줄 사내는 얼마 든지 있어요.} 월화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침상에서 뛰어 내려와 옷을 입었다. {그래! 철혈무정의 요구에 맞는 자들을 구하려면 아침부터 부지 런히 뛰어야겠지.} 정사의 흔적이 역력한 몸에 옷을 걸치는 월화를 보며 천갈은 혼 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흥! 걱정말아요. 팽노대(彭老大)라면 나를 위해 방법을 강구해 줄 것이예요.} 냉냉하게 말한 월화는 재빨리 옷을 걸치고는 냉유도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 그녀에게 냉유도는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밀통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밖에는 벌써 무림맹의 개들이 쫙 깔려 있으니까!} 방문을 열려던 월화는 냉유도의 그 말에 한 순간 움찔했지만 이 내 차갑게 코웃음치며 방을 나갔다. 쾅! 방문이 요란스럽게 닫히자, 천갈의 눈빛이 한 순간 칼날갔이 전 광이 이글거렸다. {팽노대라! 과연 월화는 요화로군. 벌써 그 늙은이와도 손이 닿 아 있다니.} 중얼거리는 천갈의 눈빛에 기묘한 광채가 스쳐 지나갔다. 第 四 章 轉輪敎와 武林盟 1 새벽의 여명 아래 희뿌연 안개가 가늘게 숲 속을 드리우로 있었 다. 서호(西湖)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 야트막한 숲은 월화루 와 백여 장쯤 떨어져 있었다. 투툭! 문득 나무 사이의 무성한 수풀 일각이 흔들리며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흡사 두더지가 땅 속에서 튀어나오듯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교묘히 위장된 비밀통로(秘密通路)의 입구가 숨겨져 있었다. 비밀통로를 빠져나온 그 인물은 비록 허름한 남장(男裝)을 하고 얼굴 색은 거뭇거뭇하게 변장했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봐도 갸름 한 얼굴과 체형을 미루어 남장여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완전히 비밀통로를 빠져나온 남장여인은 긴장한 암코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시 주위를 살폈다. 한동안 주위를 살핀 남장여인은 이윽고 별다른 이상이 없자 그 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긴장으로 인해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맥박이 세게 뛰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욱신거린다. {휴! 나 월화가 이렇게 쥐새끼처럼 남의 눈을 살펴야 하다니....!} 남장여인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월화(月花)! 그렇다. 이 추레한 남장여인은 바로 비밀통로로 월화루를 빠져나 온 월화였다. 지난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만 해도 모골이 오싹해지 는 그녀였다. 천갈 냉유도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 자신은 지금 신비의 청년고 수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의 패거리와 무림맹(武林盟)의 감시 속에 놓여있었다. 자신이 놓인 처지를 떠올리자 월화는 새삼 내 인생도 이것으로 마지막인가 하고 생각했다. 철혈무정 석무심이라면 비록 그의 명성이 높다지만 요구대로 해 준다면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금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닌 무림맹의 감시 가 그녀에게 붙었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무림맹의 감찰전(監察殿)! 이곳은 여타 방파의 대외조직과는 전혀 질이 틀렸다. 정보수집, 추적, 감시, 납치, 암살 등 전무림에 걸쳐 방대한 행동 을 하는 무림맹 감찰전은 강호인들에게 있어서 공포와 경원의 대 상이었다. <무림맹(武林盟)!> 당금 무림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이 거대한 조직이 결성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육십 년 전, 황하(黃河) 이북에서는 악(惡)을 숭배하는 하나의 사악한 교파(敎 派)가 창궐을 했었다. 그 자들은 스스로를 전륜교(轉輪敎)라고 불렀지만 무림에서는 그 자들을 오래전에 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마교(魔敎)의 재래(在來)라 고 믿었고, 또 그렇게 불렀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전륜교(轉輪敎)라는 사이한 단체는 당 시 황하에서 몇 년은 거푸 홍수가 계속되는가 또 그후 몇 년은 가 뭄으로 수많은 이재민이 들끓었을 때 독버섯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금전(金錢)의 힘과 색(色)의 유혹으로 조금씩 교파를 확 장해 나갔다.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청년에게는 색(色)으로, 노인들에게는 인 심(人心)으로 전륜교는 차근차근히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기를 삼십 년, 마침내 전륜교는 휘하의 교도가 오십만을 헤 아리는 실로 거대한 교파로 자라나게 되었다. 그때서야 황실이나 강호에서도 비로소 이 전륜교라는 신흥교파 에 경각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밀교(密敎)적인 분위기가 강한 전륜교에서 주신(主神)으로 숭배 하는 것은 불교에서 지옥(地獄)을 관장한다는 전륜마왕(轉輪魔王) 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능케헤주는 암흑의 권세(權勢)인 전륜마왕의 응답을 이끌어내려면 피(血)로써 제전(祭典)을 치루어야하고 음양 (陰陽)의 도리는 색(色)에 있다고 설파했던 것이다. 이상세계의 건설을 위해 인간은 자연의 본능(本能)에 충실해야하 며 인의도덕(仁義道德)은 집권자들이 우매한 민중을 장악하고 부려 먹기 위해 만든 허위(虛僞)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륜교의 주장이었 다. 그리고 이같은 파격적인 교리 덕분에 전륜교는 신분계급의 한계 를 느낀 조락한 식자(識者)층과 사회에 불만을 품은 숱한 불평분자 들을 흡수하며 급격히 세력을 키워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불교(佛敎)를 나라의 국교(國敎)로 삼고 있던 황실(皇室)에서는 전륜교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들이 역시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적극적인 탄압을 하지 는 않았다. 대신 황실은 감찰사(監察使)를 전륜교 총단에 파견하여 그들의 실체를 살피게 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유장교(劉長交)-! 한림원 내에서도 식격과 인덕이 뛰어나기로 이름이 난 그가 감 찰사로 파견되어 반 년 동안 전륜교의 내실을 살핀 후 하나의 문 서를 작성했다. <전륜교가 비록 명부(冥府)의 암흑신(暗黑神)을 숭배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행동은 구세구민(救世救民)에 앞장서고 나라를 위 해 힘을 쓰는 바, 시중(市衆) 일각에서 그들을 매도하는 일부의 허 무맹랑한 소문이 결코 사실과 틀리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오 히려 소문과는 달리 전륜교는 나라를 위해서나 백성들을 위하여 필요한 종파(宗派)로써 인정해 주심을 바랍니다. 한림학사 유장교.> 2 유장교가 올린 이 한장의 문서로 인해 황궁은 전륜교에 대해서 묵시적으로 인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실 유장교의 이 문서는 모두가 허위로 작성된 것이었 다. 유장교는 전륜교에 대한 감찰도중 교주인 전륜천존(轉輪天尊) 의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전륜천존이 제공한 숱한 미녀와 재물에 녹아난 유장교는 전륜교 에 대해 좋게 보고서를 올렸고, 비록 묵시적이나만 황실의 인정을 받은 전륜교는 그 후 무섭게 교세를 확장하여 항하 이남에까지 진 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전륜교의 발흥(勃興)은 필연적으로 기존 질서나 이념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하의 남쪽 하남성(河南省)에는 불문의 성지이며 무림의 태산북 두인 천 년의 전통(傳統)을 자랑하는 대소림사가 자리하고 있다. 악신을 숭배하는 전륜교가 하남성으로 진출하자 소림사에서는 이 일을 좌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륜교가 자연에의 순응을 주장하며 난교(亂敎)의 풍속을 권장하는데는 소림사의 선승들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본래 서역(西域) 좌파밀교(左派密敎)의 색채가 농후한 전륜교에 서는 남녀간의 색욕(色慾)이야말로 해탈(解脫)에 이르는 가장 빠른 첩경이라고 설파했다. 전륜교도들은 뜻만 맞으면 아무하고나 어디서든 육체적인 교섭 을 벌였다. 상대가 가까운 인척이든, 나이 차가 많이 나든 그런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오직 생각이 동하면 행할뿐이고 지극한 쾌락 의 기쁨 속에서 전륜명왕을 찬양하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철저한 금욕(禁慾)을 주창하는 불문의 태두 소림사로서는 이것은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악습이었다. 이에 당시 소림사의 방장이던 혜인선사(慧仁禪師)가 황궁에 진정 서를 올리고 전륜교의 만행을 격렬히 규탄했다. 만일 전륜교를 방치하면 세상을 떠받쳐온 윤리규범이 와해될 것 이고 마침내는 그 화가 황실에도 미칠 것이다! 황실에서 윤허를 내 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소림사는 전륜교의 배척을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혜인선사의 장계는 그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고, 그것은 이미 황 실에까지 그 마수를 뻗히고 있던 전륜교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에 격분한 전륜교의 교도들이 소림사를 습격했다. 이 날이 후세에 승산의 혈사(血事)라고 불린 전륜교와 무림의 첫 충돌이었다. 무려 십만(十萬)의 전륜교도들이 소림사에 들이닥치자 당시 소림 사의 오천 무승(武僧)들은 결사항쟁을 외쳤다. 그러나 소림사로 몰려든 전륜교도들은 대다수가 무예를 모르는 일반백성들이었다. 아무 죄도 없고 힘도 없는 그들을 무력으로 상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소림사의 제자들은 장문방장인 혜인선사의 지엄한 법유에 분루를 삼키면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폭도들에 의해 소림사의 대웅전이 불타고 불타의 좌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기세가 등등해진 전륜교도들이 소림의 중지(重地) 장경각 (藏經閣)까지 몰려 왔을 때 소림사의 제자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장격각은 소림의 생명이요, 천 년의 뿌리다! 소림사의 오천제자들은 무저항으로 장경각을 고수했다. 이틀 동안 계속된 광란의 불길은 소림사의 장엄하던 도량은 태 반이 잿더미로 만들었고 장경각의 주변에는 승인의 시신이 산을 이루었다. 마침 그때 소문을 들은 하남절도사(河南節度使)가 이만의 관군을 이끌고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이 땅에서 소림사의 이름은 그 날로 사라졌을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소림사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천여채에 이르던 소림사의 전각들중 칠할이 잿더미로 변하고 오 천을 헤아리던 소림사의 제자들 중 사천에 가까운 사상자가 승산 을 피로 물들였다. 살아남은 제자들은 동문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피의 복수를 맹 세했다. 하지만 무릇 불문은 자비가 근본이라, 장문방장인 혜인선사는 소 림의 십 년 봉문(封門)을 선포하고 제자들의 속세 출입을 금지시켰 다. 하지만 장문인의 이러한 조치로 복수의 길이 끊긴 제자들은 단 식으로 혜인선사의 법유에 맞섰다. 보름이 지나도록 혜인선사의 결심이 요지부동임을 느낀 당시 칠 대제자 백 오십 승인은 장문인의 법유를 거역하고 이마에 검은 띠 를 두른 채 소림산문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소림의 계율은 예로부터 엄중한 것, 혜인선사는 즉시 이 들을 불문으로부터 파직하고 소림사로부터도 파문시켰다. 백 오십 명의 칠대제자는 이에 하루종일 소림산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한 뒤 무림으로 뛰쳐나가 탕마멸사(蕩魔滅師)의 깃발 을 앞세우고 전륜교와 격돌했다. 오십만 대 백 오십의 싸움-! 그것은 누가 봐도 불을 보듯 뻔한 싸움이었다. 허나 싸움은 머리수로 하는 것이 아닌 법, 천 년의 소림사의 무 예는 천하를 진동시켰다. 원한에 사무친 소림 칠대제자들의 손속은 잔인무정했다. 아무도 그들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했다. 가히 파죽지세로 그들은 전륜교의 무리들을 쓰러뜨렸다. 삽시에 만(萬) 단위를 헤아리는 전륜교도들 이 소림 제자들의 수하에서 불구가 되거나 고혼이 되었다. 허나 전륜교의 힘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비록 처음 한 달동안은 소림승들의 무예에 전륜교는 주춤했지만 총단으로부터 호교(護敎)의 고수들이 파견되면서 전세는 일변했다. 특히 전륜교의 교주인 전륜천존 휘하 전륜천인마방(轉輪千人魔 幇)의 일천명 마인(魔人)들은 하나같이 고절한 무예로 단련된 마왕 들이었다. 하북대평원(河北大平原)에서 벌어진 전륜천인마방과 살아남은 소 림칠대제자 백이인(百二人)의 격돌은 실로 처절한 것이었다. 삼주삼야에 걸친 이 대혈전 끝에 양진영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결과는 몰살(沒殺)-! 탕마멸사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사문을 뛰쳐나왔던 소림사의 칠 대제자 일백이인은 일천인(一千人)의 전륜마왕들과 맞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장렬히 산화했던 것이다. 백 오십 소림제자의 죽 음-! 이 사건의 파급이 전 무림에 전파되자 소림의 무예를 조금이라 도 익힌 강호인들은 검(劍)을 들었다. 거기에다 소림은 백도의 정신적인 지주가 아닌가? 3 -혜천선사(慧天禪師)! 소림사의 집법장로(集法長老)이며 장문방장인 혜인선사의 사형이 던 철불(鐵佛) 혜천선사가 파계(破戒)를 하고 복수를 맹세했다. 이에 혜인선사는 사형 혜천선사를 말리다 못해 달마조사의 영전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철불 혜천선사는 이에 삼 일 동안 조사동(祖師洞) 앞에서 통곡을 한 후 단 한 마디의 말만 남기고 소림을 떠났다. -전륜의 이름이 이 땅에 사라질 때까지 혜천은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으리라! 혜인장문의 자결로 소림의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혜인선사는 죽음으로 소림의 살계를 지킨 것이었다. 그 후 일 년 전륜교의 만행은 극에 달해만 갔다. 곳곳에서 전륜 교도들의 행패가 일어나고 공공연히 색을 탐하니 민심이 흉흉하게 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홀연히 나타난 세명의 기인이 있었으니 이들이 후에 우내 삼기(宇內三奇)라고 불리운 기인들이었다. -소림장로 철불(鐵佛) 혜천대사(慧天大師)! -도문(道門)의 태허천존(太虛天尊) 황보승(皇甫承)! -신검황(神劍皇) 연주백(燕州伯)! 불(佛), 도(道), 속(俗)을 대표하는 이들 삼 인의 기인들은 타도 전륜교의 기치를 내세우고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했다. 무림맹은 전륜교를 배척하기만 한다면 백도와 마도를 가리지 않 고 능력 있는 자들을 끌어들였고, 전륜교의 악행에 치를 떨던 숱한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우내삼기의 부름에 호응해 몰려들었다. 이렇게 사상 유래 없는 흑백양도의 결맹체이며 최강의 세력을 지닌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그후 오 년-! 장장 오년 간에 걸쳐 전륜교와 무림맹의 결전은 가히 나라와 나 라간의 전쟁을 연상시켰다. 전륜교가 비록 오십만의 교도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무예를 익힌 무인들의 집합체인 무림맹에는 불가항력이 었다. 결국 안탕산(雁蕩山) 천학봉(千鶴峯)에 세워진 전륜교의 총단이 화마(火魔)에 휩쌓여 잿더미로 변하고 교주인 전륜천존(轉輪天尊) 이 천참만륙당해 죽음으로써 이 땅에 오 년에 걸친 혈사가 끝이 났다. 초창기에 무림맹이 창립되었을 때 그 힘은 별 것 아니었지만 오 년 간의 혈사 끝에 무림맹은 명실공히 천하종주로서 위용을 갖췄 다. 그후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 우내삼기를 주축으로한 무림맹은 천 하 곳곳에 그 힘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에 죄를 지은 이상 이젠 편히 살긴 다 틀렸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숲속을 지나면서 월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일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그녀는 모든 것을 정리해서 영 원히 잠적하기로 결심했다. 그 동안 모아온 금전은 얼마든지 있다.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평 생 호의호식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찾아가는 팽노대라면 마지막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좋은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 팽노대-! 그는 자신의 육체에 흠뻑 빠져 있다. 비록 늙고 추한 작자지만 저번처럼 약간 수치스러운 꼴만 참고 견딘다면 만사가 잘 풀릴 것 이다. 문득 전날 팽노대와 침상에서 기묘한 방법으로 정사를 치루던 생각이 나자 사타구니 사이가 짜릿해졌다.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 니지만 그 강렬했던 쾌락의 기억은 마약과도 같이 그녀를 흥분시 켰다. (꿩먹고 알먹기지 뭐!) 팽노대와의 변태적인 행위를 연상한 월화는 새로운 기운을 얻은 듯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좀 마음의 불안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항주를 남쪽으로 휘감고 도는 전당강(錢塘江)의 물줄기는 크게 곡선을 그린 뒤 항주만(杭州灣)을 통해서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그 전당강을 끼고 있는 석포현(石浦縣), 강변의 선착장에는 수많은 고깃배와 사람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 루고 있었다. 배에서 부려지는 생선들의 비린내와 흥정을 하는 상 인들의 떠들썩한 소음이 아침의 강변을 활기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석포현의 동쪽 끝에 자리한 또다른 선착장은 몇 채의 범선이 정박해 있을 뿐 비교적 조용했다. 수평선 위로 떠오른 태양이 제법 열기를 뿌려대며 강변을 비추 고 있을 때 한명의 추레한 차림의 소년이 종종 걸음으로 범선들이 정박한 선착장으로 들어섰다. 옷차림은 초라하지만 제법 귀염성 있게 생긴 그 소년은 누가 자 기 얼굴을 볼세라 고개를 푹 떨군 채 종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소년은 물론 남장을 한 월화였다. 그녀는 한 인물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곳 석포현의 포구에 나타난 것이다. -팽노대(彭老大)! 정확히 말해서 그는 인마(人魔) 팽조(彭鳥)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월화가 살인청부업의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팽노 대의 사업 규모는 기껏해야 절강성을 배경으로 사업을 벌이는 월 화의 그것과는 격이 틀렸다. 본래가 전설적인 자객(刺客)출신인 인마 팽조는 이 세계에서는 실로 대단한 거물이었다. 팽조는 현역 때의 전설적인 명성을 이용하여 도처에 자기만의 인맥(人脈)과 영역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현재 그의 사업 영역은 북육성(北六省) 남칠성(南七省)에 모두 미치고 있으며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일급 자객의 숫자만 해도 백여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나이도 들고 평생 호의호식할 정도로 재물을 모은 그는 십여년 전 일선에서 은퇴했었다. 하지만 평생 손에 피를 묻혀온 직업의식은 그렇게 쉽사리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인(知人)들의 권유도 있고 한 때 문에 그는 살인중개업을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이 방면에서 독보 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4 남장을 한 월화는 선착장에 도착하자 곧 한 척의 호화스런 범선 으로 올라갔다. 그 범선이 팽노대와 그의 충실한 수하들이 거주하 는 곳이었다. 팽노대, 젊었을 때는 인마(人魔)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로 어둠의 세계에서 악명을 떨쳤던 이 인물은 그러나 지금 겉모습은 작달막한 키에다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덮인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군데군데 붉은 반점이 얼룩진 팽노대의 나이는 일견하기에도 칠 순이 훨씬 넘어보였다. 하지만 메부리코에 쭉째진 날카로운 눈초리 는 한 점의 빈틈도 엿보이지 않았다. 팽노대는 어울리지 않게 남장까지 하고 자신을 찾아온 월화의 표정에서 그녀에게 무언가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재빨리 알 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은 팽노대 자신에게 적잖은 돈과 쾌락을 가져다 줄 것이다. {흐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있는 이상 걱정일랑 싹 털어 버려도 좋네.} 팽노대는 남장을 한 월화의 아래 위를 쓸어보며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그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온몸에 느끼면서 월화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한달음에 지껄여댔다. {정말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어떤 일에 적합한 사람을 내일 밤 까지 구하지 못하면 나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예요.} 월화는 팽노대를 믿고 있었지만 내심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다. 팽노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별일도 아닌 것에 호 들갑을 떨며 쪼르르 도움을 청하러 온 그녀의 나약함을 자신이 경 멸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처음 팽노대는 여자의 몸으로 살인청부업을 하는 월화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한 가닥의 호기심을 느끼고 그녀를 찾았다. 그 결과 몇 가지 실망은 했지만, 그녀의 미모와 몸매에 그는 나 름대로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후 그는 몇 번인가 그녀를 도와주었고, 그 대가로 자신의 특별 한 취미와 쾌락을 즐길 수가 있었다. {흠.... 살인청부인가?} 월화는 잠시 주저했다. 전후 사정을 다 토로하고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다! 이 늙은이에게 사실대로 설명한다면 괜히 일만 복잡해질 것이다. {그래요. 최고의 솜씨를 지닌 두 명이 필요해요.} 재빨리 머리를 굴린 월화는 전후 사정은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 로 용건만 말했다. 철혈무정 석무심이라면 몰라도 무림맹이 이 일에 관련되어있다 는 것을 안다면 팽노대도 냉유도처럼 발을 빼려고 할지 모른다. {두 명이라....?} 딱! 딱! 팽노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손끝을 튕겼다. 그것이 심사숙 고할 때 나타나는 그의 습관이었다. 월화는 필사적으로 내심의 초조를 숨기며 팽노대의 말을 기다렸 다. 자신의 희망이 오직 팽노대뿐이라는 것을 알면 이 추잡한 늙은 이가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던 팽노대는 이윽고 게슴츠레 눈 을 뜨며 말했다. {내가 소개시켜 준 추명사(追命蛇)도 이 방면에서는 일급중의 일 급인데...?} 팽노대는 무언가 석연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화는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이 늙은이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일의 전후사정을 만나 면 내 몸을 원하기는 해도 도와주는 것은 거절할지도 모른다. 그렇 다면 모른 척 속일 수밖에....!) 짧은 순간에 단안을 내린 월화는 생긋이 미소를 띄우며 팽노대 에게 말햇다. {추명사에게는 다른 일을 맡길 셈이예요. 그에 필적하는 수준의 솜씨로 두 사람을 더 구할 수 있나요?} 팽노대는 콧소리가 섞인 나긋나긋한 월화의 애교에 아랫도리의 일부가 뿌듯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얼굴에 검뎅을 바르고 남장까지 하여 귀여운 소년처럼 보 이는 월화의 모습은 팽노대의 도착적인 취향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욕구를 채우고만 싶어진 팽노대는 교태를 부리는 월화의 표정을 대충 살피며 입가에 음욕에 찬 웃음을 떠올렸다. (하긴 이 간덩이 작은 계집의 사업에 무슨 위험에 처할 일이 생 기겠는가?) 월화의 교태와 특이한 분위기에 몸이 단 팽노대는 간단히 생각 을 하며 잘라 말햇다. {흠! 일꾼을 둘 정도 더 구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는 걱정말라는 듯 자신에 차서 말했다. 계집의 마음을 휘어잡 는데는 적당한 허세(虛勢)도 필요한 법이다. {그자들, 추명사보다 확실히 나은 일꾼들인가요?} 월화는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물었다. 그녀의 채근에 팽노대는 잠자코 눈을 감았다. 한 명이라면 금방 수배할 수 있겠지만 일급으로 두 명이라면 조금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했다가는 눈앞에서 알랑거리는 이 탐스런 먹이를 놓칠지도 모른다. 5 {한 명은 추명사에 못지 않은 솜씨지만 또 한 명은....!} 대충 얼버무리며 시간을 끌던 팽노대는 다음순간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월화를 쳐다보았다. {일류중의 일류들인 이런 수준의 일꾼들을 구한다면 일도 보통 일이 아니겠지만 보수도 만만치가 않아.} 팽노대는 은근한 어조로 월화에게 압력을 가했다. {보수 문제는 걱정마세요.} 팽노대의 말 뜻을 알아차린 월화는 잘라 말하며 품 속에서 몇 장의 전표(錢票)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전표는 모두 네 장으로 중원에서 가장 신용이 좋은 금화전장(金 華錢場)에서 발행한 것인데 각기 액면가가 일천냥, 즉 합쳐서 사천 냥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순간적으로 힐끗 전표를 살펴본 팽노대의 입가에 만족한 빛이 스쳤다. {월화! 알다시피 이런 일에는 반드시 금전이 필요한 법이야. 월 화와 나 사이를 생각해서 그냥 소개할 수도 있지만... 나를 이해하 겠지.} 팽노대는 말을 하며 한쪽 옆에 서 있는 장한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 장한은 재빨리 탁자위에 놓인 전표를 거두어 들였다. (흥 늙이은가 욕심은 많아가지고! 이 따위 늙은이와 두 번 다시 육체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지.) 월화는 내심 소름이 오싹 돋는 징그러움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태연히 말했다. {내일 밤까지는 준비가 되겠지요?} 그녀가 다짐을 하듯이 묻자 팽노대는 힐끗 월화의 전신을 훑어 보면서 능청을 떨었다. {한 명은 간단한데 또 한명이 문제군.} [늦으면 안돼요! 삼일 내로는 그들을 일에 투입시켜야만 해요!] 월화가 즉시 반응을 보이며 안달을 했다. [글쎄....어떻게 서둘러보면 될 것도 같은데....!] 팽노대는 말을 끌며 남장에 감싸인 월화의 터질듯한 육체를 쓸 어보았다. 팽노대의 그 끈끈한 시선에서 그가 무얼 원하는지 알아차린 월 화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내심을 숨긴채 짐짓 요염한 미소를 띄우 며 살그머니 입술을 벌렸다. {여기는 매우 춥군요.} 그녀의 야릇한 치태에 팽노대의 입이 헤벌레해졌다. {아!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옆방으로 옮기자구. 아무래도 그 쪽 이 조금 따뜻할 테니까.} 팽노대가 음험한 웃음을 띄우며 일어서자 월화는 내심 욕을 퍼 부었다. (망할 놈의 색마같으니! 돈에다 내 몸마저 탐하다니... 지옥에나 떨어져라.) 하지만 사정이 사정인지라 일찌감치 각오를 했던 월화는 스스로 앞장 서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아아! 다 벗을 필요 없어!] 앞장 서서 옆방으로 들어간 월화가 옷을 벗으려고 하자 팽노대 가 급히 말렸다. 그 방은 사방이 막힌 어둑한 침실이었는데 한쪽에는 넓직한 침 대가 놓여있고 화로도 하나 피워져 있어서 아직 남아있는 늦봄 아 침의 한기를 없애주었다. [늘 하던대로... 저기에 누우면 돼!] 팽노대가 침을 꿀꺽 삼키며 침대를 가리켰다. 넓직한 그 침대의 모서리에는 가죽으로 된 네 개의 노끈이 묶여 있었다. 월화는 팽노대가 눈치채지 않게 한숨을 쉬며 침대 모서리에 걸 터 앉았다. 이미 저고리 고름은 풀어져 있어서 한쌍의 묵직해보이 는 육봉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듯 출렁거렸다. 남장을 한 그녀의 그같은 야릇한 자태를 잡아먹을 듯 훑어보는 팽노대의 눈길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흐흠! 자넨 언제 봐도 멋진 몸을 지녔어.} 팽노대는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가섰다. 그러자 월화는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요! 아직 확실히 언제까지 일꾼들을 수배해준다고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말하면서 월화는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너무나 커 서 무거워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두 손으로 가 린다고 해서 다 가려지겠는가? 가슴을 가리고 흡사 고양이 앞에 쥐처럼 웅크리는 그녀의 고혹 한 자세에 팽노대는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걱정마라. 내가 말하면 틀림없을 테니까!} [늦어도 삼일 안에 월화루에 일꾼들이 닿아야해요!] 월화는 웅크린 자세를 풀지 않으며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허허! 걱정 말래두! 사흘 안에 그놈들을 못보내주면 계약금을 배로 돌려주겠네!] 몸이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팽노대가 월화를 달랬다. [그럼 어르신만 믿겠어요!] 그제서야 월화는 안도의 표정으로 배시시 웃으며 느릿하게 침상 에 몸을 뉘었다. 팽노대가 여자를 즐기는 방법은 아주 괴이했다. 그는 우선 여자의 사지를 침상 모서리에 있는 네가닥의 가죽끈 으로 묶어 꼼짝도 못하게 한다. 그런 다음 가장 부드러운 거위털로 여인의 예민한 성감대를 자 극하는 것이다. [으흑! 하아악!] 더 할 수 없이 보드라운 거위의 깃털이 온몸을 쓸어내릴 때마다 월화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비명같은 괴성이 터져나왔다. 간지러움은 가장 참기 힘든 감각이다. 전국시대의 어떤 고문의 달인은 제 아무리 굳은 의지의 소유자라고 해도 비둘기 깃털 하나 면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간지러움은 쾌감으로 통한다. 가장 간지러움을 잘타는 곳이 가장 섬적으로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다. 월화는 자신의 온몸이 그대로 살살 녹아벌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6 팽노대의 깃털 쓰는 솜씨는 이미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는 여자 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면 어느 정도의 간지러움, 즉 쾌감이 생기는 지 잘 알고 있었다. 팽노대의 손길에 따라 월화는 울고 웃고 발정난 짐승의 암컷처 럼 헐떡여대었다. 이미 수많은 사내와 접촉을 해온 탓에 월화의 몸은 어느 정도의 자극만 가해도 순식간에 타오른다. 팽노대가 그녀에게 빠진 이유중 에 하나도 바로 그같이 민감한 월화의 육체 구조때문이었다. 삽시에 극점까지 이른 월화는 미친 듯이 신음성을 터뜨리며 몸 을 비틀었다. 그녀는 타오르는 욕화에 견디다 못해 직접적인 행위 를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하지만 팽노대는 들은 척도 않고 거위의 깃털로 그녀의 육체를 교묘히 공략해 나갔다. 그에 따라 여인의 비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것은 차라리 고문 이었다. 가장 수치스럽고 감미로운 고문....! 팽노대의 손에 들린 그 가벼운 깃털에 따라 무르익어 터질 듯한 월화의 육신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요동을 치고 튕겨올랐 다. 목덜미, 목젖, 겨드랑이, 젖가슴의 융기부분, 젖꼭지, 아랫배, 허벅지 안쪽, [제...제발! 아학! 너무해! 주인님! 그만... 어서 제발...!] 월화는 최후의 한올까지 수치심을 떨쳐버리고 울부짖었다. 거위 의 깃털은 그녀의 허위와 자존심을 산산히 날려버린 후였다. 비단 자존심과 수치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 존재하는 모든 점막이 달아올라 흠신 체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직 깃털이 직접 닿지도 않았건만 활짝 벌려묶인 그녀의 미끈 한 다리 가운데 자리한 깊은 계곡도 뜨거운 홍수로 넘쳐흐르고 있 었다. 무르익은 석류같은 그 오묘한 균열은 흡사 별개의 생물처럼 꿈 틀대며 꿀물을 울컥 울컥 토해내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침상을 흠 씬 적실 정도였다. [아악!] 그리고 마침내 직접적인 자극이 그곳에 가해진 직후 월화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자지러들고 말았다. 월화는 너무도 강렬한 자극에 신경이 견디지 못해 까무라친 것 이다. 그제서야 팽노대는 흡족한 표정으로 손길을 멈추었다. 사지가 묶 인 채 기절한 월화를 내려다보는 팽노대의 두눈이 도착적인 욕정 으로 번들거렸다. 월화는 하의만 벗은 채 사지가 묶여있었다. 상체에는 여전히 남 장을 걸치고 있어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팽노대는 침을 삼키며 자신의 의복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들어나 는 그자의 남성은 왜소하고 구부정한 체격과는 달리 실로 장대했 다. 팽노대는 활짝 벌려져있는 월화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그 녀의 중심부를 더듬어 확인한 뒤 그곳으로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서서히 미끌어뜨렸다. 퍼득! 흡사 우마의 그것같은 남성이 월화의 몸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하 자 까무라쳐 축 늘어져있던 월화의 몸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마치 끝이 없을 듯 계속 밀려들어오는 이물질의 감촉이 기절했 던 그녀를 일깨운 것이다. 정신을 차린 월화는 내장이 온통 다 후벼지는 듯한 끔찍한 느낌 에 진저리를 쳤다. 십몇년을 화류계에서 살아오면서 숱한 사내들을 겪은 그녀였건만 팽노대같은 인간은 만난 적이 없었다. (더...더이상은....!) 위기감을 느낀 그녀가 입을 쩍 벌리며 비명을 터트리려는 순간 마침내 진입이 끝났다. 팽노대의 늙어 쭈그러든 육신이 한창 물이 올라 탱탱한 탄력을 지닌 여체 위에서 헐떡이기 시작했다. 이미 한차례 까무라치기까지 했던 월화의 육신은 금방 달아올라 그의 행위에 호응을 했다. 거의 세 시진 동안 사방이 꽉 막힌 석실에서 월화의 자지러지는 신음과 애원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말라 비틀어진 팽노대의 늙은 몸이 한순간 부르 르 떨다 맥없이 월화의 나신에서 굴러 떨어졌다. {흐흐.! 너는 역시 훌륭한 몸을 지니고 있단 말이야.} 팽노대의 말을 들으며 월화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지독한 고문과도 같은 정사로 인해 그녀의 몸 안에는 한 점의 기력도 없었다. 지겹고도 끔찍한 정사였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쾌감도 격렬한 것이라서 타고난 색골인 월화는 팽노대와의 이 도착적인 행위를 잊지 못한다. {두사람의 솜씨는 틀림없겠지요?} 월화는 노끈 자욱이 난 손목을 주무르며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물었다. {물론이지. 둘 중 한 놈은 추명사에 비해 좀 처지긴 해도 상관이 야 없겠지.} 팽노대는 포만감에 젖은 표정으로 벌렁 누운 채 아무렇지도 않 게 말했다. 월화와 한시라도 빨리 일을 벌이고 싶어 얼버무렸던 본 심을 들어낸 것이다. [한명은 추명사보다 처진다구요?] 순간 월화의 입에서 비명같은 일갈이 터졌다. [안돼요. 두 사람 다 최소한 비마영에 못지 않은 인물은 되어야 해요. 노야도 그러마고 하셨잔아요!] 용수철 처럼 튕겨져 일어선 월화는 이를 바득 갈며 팽노대에게 외쳤다. 그녀의 그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에 팽노대는 자신도 모르게 눈 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그 둘이면 일방지주(一幇之主)라도 처치할 수 있 는 정도인데....!} 하지만 월화는 단호히 말했다. {절대로 안돼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방면에서 최고의 인물이어 야 해요.} 절박하게 말하는 월화를 보며 팽노대는 가는 두 눈을 더욱 가늘 게 떴다. 대체 이 천박한 화냥년은 누구를 암살하려고 자객들을 모으는 것인가? 7 불길한 의혹이 팽노대의 본능에 더 이상 월화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종(警鍾)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게다가 이미 대가까지 받은 상태에서 물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신뢰를 잃는다면 이 방면의 사업에서 손을 떼어야만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월화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은 만만한 일이 결 코 아니다. 비마영(飛魔影)이나 추명사(追命蛇)라면 자객들의 세계에서는 일 류중의 일류로 통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보다 나은 자객을 구하 기는 쉽지 않을뿐더러 시간도 많이 걸린다. 바로 그때 고민하던 팽노대의 뇌리로 불현 듯 스치는 한 인물이 있었다. 새로운 일거리를 벌써 일 년째 기다리고 있는 자를 그는 생각해냈던 것이다. 지금으로써 당장 연락이 가능하고 필요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자는 팽노대가 아는 한에서 이 자 뿐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짚이는 놈이 있기는 한데....!} 내심 초조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팽노대는 짐짓 조용히 말을 끌었다. [실력은요? 실력은 어때요?] 월화가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으로 다급히 채근했다. {내가 알고 있기로 그의 실력은 이 방면에서 최고야. 설사 비마 영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미치기 어려울 걸!} 팽노대는 단언하듯 자신있게 말했다. {게다가 내일까지는 충분히 연락이 가능하지.} [잘됐네요!] 월화는 비로소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어 깨에 얹혀져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되어있었다. {어떻게 연락을 하면 되죠?} 월화는 침상 모서리에 걸터 앉으며 팽노대에게 물었다. {연락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네. 하지만 그를 쓰려면 몇 가지 다 른 문제가 있어.} 팽노대는 주름 투성이인 이마를 가로로 접으며 말했다. {문제랴뇨? 무슨 문제지요?} 활짝 펴졌던 월화의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우선 첫째로...!} 팽노대는 힘주어서 말했다. {그를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구인지 나는 모르고 있어. 표적이 누 구인지 모르나?} {그런 것은 원래 당사자들이 결정을 하는 문제고 우리가 아는 것은 금기예요.} 월화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것은 그렇지만...} 팽노대는 말 끝을 흐리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결정 하기 어려운 듯 손가락 끝을 계속 퉁겼다. 이윽고 팽노대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두번째로... 이 자는 움직이게 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 {금전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을 했을 텐데요.} 월화는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팽노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작은 액수가 아니야.} {얼마나 드는데 그래요?} 팽노대의 신중한 말투에 월화도 비로소 부담을 느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일만냥! 그것도 황금으로...!] 팽노대는 천천히 말했다. 그가 알고 있는 자는 최소한 황금 만 냥 이하로는 만족하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금....금으로 일만냥이라구요?] [그래! 일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우선 황금 오천 냥을 요구할 거 야. 단지 계약금으로 말이지.] 팽노대의 확인에 월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동시에 눈이 휘둥그래 졌다. 황금 오천 냥이라면 은자(銀子)로는 십오만냥, 삼대(三代)가 걱정 없이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런데, 그 것이 단지 계약금이라니? {그게 정말인가요?} {월화, 내가 쓸데없는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을 것인데.} {황금으로 일만냥이라니....! 그것은 너무 큰 금액이예요.} 팽노대는 싱긋이 웃었다. {그 자는 보통 자객과는 전적으로 틀려. 아주 완벽한 자객이지.} 팽노대는 입가에 굳은 미소를 더올렸다. {그 자를 보내 주지. 만일 그 쪽에서 그 조건에 납득이 가지 않 는다 해도 월화는 역할을 다한 셈이 되는 거야. 그 다음 책임은 그 쪽에 있지.} 월화는 팽노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팽노대가 한 말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쪽 사람들에게 소개만 시켜주면 된다. 그 뒤 의 이야기는 그들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닌가? {좋아요. 그럼 그를 쓰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요?} 월화가 물었다. 팽노대는 차분히 설명을 했다. {항주의 어떤 전장(錢場)에 그 돈을 맡기면 되지. 만일 그 쪽에 서 그를 쓸 생각이 있어서 그만한 액수를 전장에 맡기면 연락은 된 걸로 봐도 좋아.} {그것은 너무 일방적인 것이 아니예요?} 월화가 불안한 표정으로 묻자 팽노대는 고개를 설래 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그에게 일을 시키려면 달리 다른 방도가 없어.} 월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특이한 청부방법이군요. 그 전장의 이름은 뭐죠?} {화룡전장(華龍錢場)!} 짤막하게 말한 팽노대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그리고 월화, 한 가지 충고해 두겠는데 이 일이 끝나면 손을 씻 고 주루에나 충실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거야.} 한 순간, 월화는 내심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 으로 말했다.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요?} {만사가 잘 되어가고 있지. 잘못된 일은 없어.} 팽노대는 느릿하게 일어섰다. {허지만, 이런 일에는 여자가 적합치는 않지. 물론 이익은 많겠 지만 나 같으면 벌써 손을 씻고 편안히 살 거야. 세월은 기다려 주 지 않지. 그리고 분에 맞지 않는 일은 한시라도 빨리 그만두는 것 이 앞날을 위한 것이지.} 월화는 피곤한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자신도 갈수록 위험이 가중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第 五 章 鳳心劍의 傳人 1 두두두! 두 필의 건장한 준마(駿馬)가 어둠을 가르며 질주하고 있었다. 항주성을 향하는 관도 위에는 몇몇의 행인들이 걷고 있었지만, 마상의 인물들은 훌륭한 기마술로 교묘히 행인들을 피하며 맹렬히 질주했다. 자욱이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행인들은 욕설을 퍼부었 다. 하지만 준마들이 달리는 속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갈색의 준마 위에는 단단한 무장을 한 귀견수(鬼見手) 조중이 흙 먼지를 더불어 쓴 채 무표정히 말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뒤를 조금도 처지지 않고 따르는 선홍빛 준마의 마상에는 죽 립을 깊숙이 눌러 쓴 남의인이 가끔씩 주위를 살피며 따르고 있다. 조중은 태산(泰山)에 자리한 무림맹의 총단(總壇)으로 가서 직속 상관인 감찰전주(監察殿主)에게 항주의 사건을 설명한 후, 몇 가지 지시를 받고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일단 자객의 표적이 될만한 인물이 네 사람이었다. 무림맹의 공동맹주들인 우내삼기(宇內三奇)와 삼기중 일인인 신 검황(神劍皇)의 아들 연대강(燕大强)이 바로 그들이었다. 무림맹의 최고 요인들인 이 네 사람의 신변은 항상 호전(護殿)의 고절한 무예를 지닌 위사(衛士)들에 의해서 주야로 경호되고 있었 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치밀한 그 경호를 다시 더 강화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주의를 끌게 할 따름이었다. 두두두...! 두 필의 준마가 성 안으로 들어서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는 듯 두 필의 말을 막아서며 장읍을 했다. {조어른, 사공표입니다.} 나타난 인물은 조중의 심복들 중 비마영의 행방을 찾고 있던 사 공표(史公彪)였다. 갑작스런 사공표의 출현에 조중은 황망히 마상에서 내려섰다. {무슨 일인가, 사공표?} 사공표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나지막이 말했다. {공동파(공동派)의 장문인 진산도인(震山道人)이 지부에 와 있습 니다.} 조중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 사람이 왜 절강지부에 찾아왔나?} {우선 자리를 옮기시지요. 지금 열래객잔(烈來客棧)에서 차수와 운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앞장서게.} 사공표의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조중이 급히 말을 몰 았다. 열래객잔은 주로 숙식만을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방들은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했다. 조중이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장차수와 자운유가 급히 인사를 했다. 조중은 인사를 받은 둥 마는 둥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공동파의 장문인이 지부로 쳐들어오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 인가?} 자운유가 난색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이번 일을 진산도인에게 알렸는지 모르지만, 이틀 전 오 인의 제자와 함께 온 진산도인이 다짜고짜 모충이 공동파의 반도 라면서 내놓으라고 설치는 것을 지부장이 겨우 달래어 조어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충이 공동파의 제자라?] 조중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모충의 시신을 절강 지부로 옮긴 것을 아는 사람은 모두 합쳐야 십 명 내외였고, 그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붙이도록 되어 있었다. 헌데 그것을 공동파에서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또 자신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던 모충의 출신이 공동파라는 건 어찌된 노릇인가? {그래! 모충이 공동파의 제자라고 치고... 하면 공동파 장문인은 또 어떻게 모충의 시신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알았다고 하던가?} 조중의 추궁에 장차수는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공동장문은 아직 모충이 죽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도 막무가내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 볼 엄두 도 내지 못했습니다.} 돌연 이때 청아한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려퍼졌다. {흠, 말코 같은 도사가 더러운 성질을 부리는 모양이군.} 지독히도 경멸이 섞인 말이 아닌가? 조중을 제외한 삼 인은 죽립을 깊이 눌러 쓴 남의인을 향해 놀 라운 시선을 던졌다. 냉소를 터트린 장본인은 자그마한 체구를 지 닌 그 남의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동파 장문인이 어떤 신분인가? 배분으로만 따져도 당 금무림에서 감히 이런 막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였다. 헌데, 비록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데다 먼지를 막기 위하여 면사 를 둘렀지만 많아 보아야 이십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남의 인의 말투는 너무도 무례한 것이었다. 만일 이 자리에 공동파의 진산도인이 있어 그의 말을 들었다면 벌써 피라도 튀었으리라. 2 남의인은 세 사람이 멀거니 쏘아보자 문득 자신의 말이 너무 지 나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흠....} 조중이 헛기침을 터뜨리자 삼 인은 꿈에서 깨어난 듯 고래를 돌 렸다. {현재 공동파의 장문인은 어디에 있나?} 자운유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지부의 접빈각(接賓閣)에 머물고 있습니다.} 조중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사공표에게 던졌 다. {비마영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잡았나?} 사공표는 송구스러운 표저으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노력은 해 봤지만.... 아직 별다른 소식은....} {개방에 도움을 청해 봤나?} 사공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해봤지만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사공표는 조중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시지만 개방의 방주가 바뀐 후로 그들은 우리에게 한 번의 도움을 준 일이 없습니다.} 조중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맹과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련과 절제를 기본으로 삼는 구대문파의 입장에서 본다면 흑백 양도를 불문하고 마구 잡이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패거리를 만든 무림맹의 존재는 그 근본조차 의심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지난 삼십년동안 욱일승천하여 그 위세를 대강남북에 떨 치고 있는 무림맹의 혁혁한 성공은 수백년동안 사실상 무림을 영 도해온 구대문파의 심기를 뒤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무림맹과 구파일방의 관계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고, 도처에서 양진영 사이의 사소한 충돌이 끊이지를 않고 있었다. 조중은 입맛이 쓴 표정으로 장차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장차수는 힐끗 남의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빛은 상대방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빛이 흐르고 있었다. 조중이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차수, 그 분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네. 할말이 있다면 해 보게.} 남의인에 대한 조중의 존칭에 순간적으로 장차수의 눈에 호기심 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같은 내심을 숨기며 말했다. {제가 마침 개방의 절강 분타주인 황룡개(黃龍개)와 몇 번 면식 이 있어서 비마영이 현재 악양(岳陽)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일들은 어떤가?} 자운유가 설명했다. {월화루에서 별다른 동정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틀 전 월화가 변장을 하고 몇 시진 동안 사라졌는데 현재 그 일을 조사중에 있 습니다.} 조중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녀가 잠시 동안 사라진 것이 별다른 일이 아니라니 그게 무 슨 소린가?} 노기섞인 조중의 목소리에 자운유는 고소를 지었다. {그것이... 월화루에 비밀통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 의 변장한 모습을 포착했기에 곧, 행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조중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와졌다. {자네들은 그 동안 편안한 생활로 몸에 살이 찐 것 같군. 게다가 정신까지 나태해졌으니...}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신랄한 추궁의 빛이 담겨 있 었다. 삼 인은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삼 인 심복의 모습을 노려보는 조중의 입가에 굳은 미소가 떠올 랐다. {자네들은 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겠지... 한 번은 모르지만 두 번째는 결코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장차수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아, 잘 듣게 지금으로서는 월화루의 주인이 이쪽의 수중에 있 는 유일한 현실적인 단서야.} 조중은 차분히 말했다. {그녀의 일거일동 하나라도 절대 놓쳐서는 안돼. 청부자의 목줄 기를 잡기 위해서는 그녀의 꽁무니를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사실 조중에게는 무거운 압력이 가해져 있었다. 그와 감찰전주는 자신들의 행동을 삼태상(三太相)에게 먼저 알려 야 했지만, 그들은 이건에 대한 보고를 일방적으로 늧추어 버리자 고 결정했다. 사건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 자연히 비밀이 누 설되고 혼란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이 일이 어설프게 처리된다면 값비싼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생명까지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조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이제 지부로 가세.} 그는 말과 함께 다른 사람이 말할 틈도 주지않고 밖으로 나갔다. 3 항주성내에 자리한 무림맹 절강 지부 접빈각(接賓閣)에는 도사 차림의 육 인(六人)이 머물고 있었다. 여섯명의 도인들 중 다섯명은 백발을 깨끗이 빗어 틀어올린 한 명의 늙은 도인을 호위하듯이 반원으로 둘러 서 있었다. 방 중앙에 포단을 깔고 좌정한 이 노도인(老道人)은 조중이 들어 서자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번쩍! 한 순간, 노도인의 눈에서 화광(火光) 같은 강렬한 눈빛이 뻗어 나와 조중의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실로 지순한 공력!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로구나!) 조중은 내심 감탄을 하며 정중한 포권지례를 취했다. {조중이 장문인께 인사드리오.} 노도인은 일순 흰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웃는 낮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일, {조대협, 오랜만에 뵙는구료.} 노도인은 소태 씹은 표정으로 마지 못해 조중에게 마주 인사를 했다. {하하 그 동안 진산장문인께서도 별래무양하셨는지요.} 조중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하자 진산도인은 쓸데없는 소 리를 하지 말라는 듯 냉막하게 외쳤다. {조대협, 그 따위 가식섞인 인사는 필요없소. 내 다 알고 왔으니, 어서 썩 공동파의 반도 모충을 내놓으시오.} 진산도인의 사람을 무시하는 어조에 조중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 랐다. {장문인, 우선 그 일을 논하기 전에 나의 말을 들어 보시지요.} 조중은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며 정중히 말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강호에서 성격이 편협하고 괴퍅한 인물로 소문 난 진산도인은 차갑게 외쳤다. {흥 딴 말은 들을 필요없으니 먼저 모충이란 놈을 내 놓으시오.} 조중은 진산도인의 기세로 보아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꼈다. {차수! 모충의 시신을 가져오게.} 장차수는 흠칫했지만 곧 몸을 돌렸다. {장문인, 지금 사람이 갔으니 곧 가지고 올 것입니다.} 진산도인의 눈빛이 커졌다. {아니, 방금 시신이라고 하셨소?} 놀라움에 찬 그의 음성에 조중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충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은 상태였습 니다.} 진산도인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조대협, 그것이 확실하오?} 어딘가 비웃는 듯한 진산도인의 물음에 조중의 눈빛이 매서워졌 다. 수십 년을 강호에서 생과 사를 헤쳐나온 조중은 묻는 말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말뜻을 보아하니 우리가 모충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곤 란하게 되었군.) 진산도인의 말대로라면 모충은 비록 반도라고는 해도 구대문파 중 하나인 공동파의 제자다. 그의 죽음은 다분히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조중은 힘주어 말했다. {장문인 이 조중의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소.} 진산도인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스쳤다. {조대협의 말은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사람의 마음은 조석으 로 변하고 강호는 원래 음모가 난무하는 곳, 나는 이 일의 진상을 규명해야 되겠소.} 조중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셔야지요.} 장차수가 모충의 시신을 운반해 오자, 진산도인은 무표정히 시신 을 일별한 후 자신의 제자들에게 소리쳤다. {모충의 시신을 본산으로 옮겨라.} 이어 조중에게 포권을 취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훗일 꼭 보답하겠소.} 싸늘하게 말한 진산도인은 걸음을 옮겼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흥, 언제부터 공동파가 은혜를 잊지 않을 정도로 대의(大意)를 지켰지?} 누가 들어도 비웃음이 잔뜩 실린 말이었다. 그것은 물론 조중과 동행한 왜소한 체구의 남의인이 한 말이었다. 조중은 다급히 동행에게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문 앞까지 갔던 진산도인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 다. 푸르락 불그락하는 그의 얼굴로 보아 노기가 머리 끝까지 치솟 아 올랐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방금 네가 나를 모욕했느냐?} 진산도인은 두눈에서 번갯불같은 안광을 토해내며 남의인을 노 려보았다. 조중이 황급히 진산도인 앞으로 나섰다. {장문인 별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니 고정하시고...!} 조중이 어색한 얼굴로 대신 사과를 했지만 진산도인은 그는 아 랑곳 않고 남의인에게 노성을 터뜨렸다.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디 네놈의 입처럼 손재간도 좋은 지 보자.} 쏴아아! 일갈과 함께 진산도인이 우수를 확 펼치자 그의 소맷자락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경력이 칼날같이 남의인을 향해 뻗어갔다. 4 {흥, 그까짓 공동파의 무예로는 어림도 없다.} 남의인은 냉소성을 외치며 식지(食指)와 중지(中指)를 꽂꽂이 세 워 마주 찔러갔다. 내찔러진 그의 두 손가락에서는 창날같이 예리 한 무형의 살기가 터져나와 진산도인의 강맹한 경력을 가르고 들 어갔다. 남의인의 이같은 수법의 신랄함과 기묘함은 진산도인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흠칫 놀란 진산도인은 소맷자락을 회수하며 손바닥을 위로 향하 면서 손목을 비틀었다. 꽈르르릉! 그러자 다음순간 대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지며 강맹한 장풍이 일어나 흡사 태산을 허물 듯이 남의인을 향해 덮쳤 다. 남의인은 갑자기 변화된 진산도인의 수법에 재빨리 좌우로 후려 치며 두 발을 교차시켰다. 그러자 남의인의 신형은 한 순간 기우뚱 거리더니 비쾌하게 허공으로 치솟았다. 진산도인은 자신의 수법이 무산되자 그 자신도 용등호약(龍騰虎 躍)의 신법으로 신형을 날리며 독룡탐조(毒龍探爪)의 금나수법으로 남의인 왼쪽어깨를 낚아채 갔다. {말코도사가 제법이군.} 남의인은 멸시에 찬 어조로 중얼거리면서 허공에서 재주를 넘었 다.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그것은 곤륜파(崑崙派)의 신법...!} 진산도인은 다급한 일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황망히 뒤로 물러서며 냉랭히 물었다. {네놈은 곤륜파의 제자이냐?} 남의인은 그가 갑자기 물러서자 기회를 잡은 듯 추호의 사정도 없이 찌르고 후려치면서 속공으로 공격해 왔다. {내가 곤륜파의 제자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쩌겠단 말이냐?} 폭포수가 내리 쏟는 듯한 공세에 진산도인은 허둥지둥 피하기에 급급했다. 한 번 기선을 빼앗자 사기가 오른 남의인의 공격은 갈수록 수법 이 신묘해지고 깊어가 무궁했다. 허나 진산도인은 수십 년 동안 격전 속을 헤쳐나온 백전노장이 었다. (네놈이 곤륜파의 제자라도 이렇게 존장을 몰라보고 함부로 손을 쓴다면 결코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치솟아 오르는 노기에 진산도인은 대갈성을 터뜨렸다. {이런 육시랄 놈 같으니! 노부가 네 사문과의 정리를 생각해서 용서해 줄려고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기필코 네놈 의 버릇을 고쳐주겠다.} 우르르릉! 대노한 진산도인이 필생의 공력을 끌어올려 우수에 집중시키자 그의 손바닥이 갑자기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을 본 조중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거령산수(巨靈散手)...!} 거령산수! 진산도인은 바로 공동파의 가장 무서운 호산절기를 발 휘하려는 것이다. 진산도인이 자신의 최고절기를 구사하려고 하자 남의인도 방심 할 수 없다는 듯 흠칫 몸을 떨며 신형을 멈추었다. 이어 그가 허리띠에 손을 갖다대자 창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허 리띠에서 한 자루의 연검(鉛劍)이 시퍼런 검광을 발산하며 뽑혀져 나왔다. 그 얇고 좁은 검신의 연검은 칼날에 서릿발 같은 예기가 흐르고 검신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절세신기(絶世 神器)임이 분명했다. 그 특이한 연검을 본 진산도인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봉심검(鳳心劍)...!} 진산도인의 턱밑 근육이 실룩거렸다. 그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연검과 남의인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윽고 탄식과 함께 공력을 풀었다. {소협은 봉심도주(鳳心島主)와 어떤 관계이신지요?} 거령산수를 거둔 진산도인은 긴장한 눈빛으로 남의인에게 정중 히 물었다. 진산도인의 그같은 표변한 태도에 주위에서 보고 있던 조중을 비롯한 중인들도 긴장된 표정으로 남의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연검을 손에 든 채 엉거주춤 서서 무어라 대꾸하려던 남의인은 자신에게 쏠린 중인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성을 버럭 내었다. {그것은 알려 줄 수 없소. 나의 검이 두렵다면 패배를 자인하시 오.} [....!] 남의인의 그같은 질타에 진산도인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딱딱 하게 굳어졌다. 무인이 패배를 자인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수 치가 아닌가? 진퇴양난에 빠진 진산도인은 한동안 막연한 눈길로 남의인을 쳐 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이윽고 땅이 꺼질 듯이 탄식을 토했다. {휴! 나 진산은 전날 봉심도주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니 무어 라고 하셔도 대항할 수 없소이다.} {흥, 할머니가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단 말이예요?} 남의인이 냉소성을 터뜨리자, 진산도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장읍 을 취했다. {이제보니 그 분의 세손(世孫)이셨구료. 진산이 문안을 여쭙드라 고 전해 주시오.} 남의인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한 번 뱉은 말은 되물 릴 수 없는 법, {누가 당신의 말을 전한단 말이예요?} 매섭게 외치는 남의인의 목소리는 어느 새 방울굴리는 듯한 청 아한 옥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사실 남장을 한 여인이었던 것이 다. 진산도인은 억지 같은 남의인의 말에 고소를 지으며 조중에게 말했다. {조대협 실례했소이다.} 발길을 돌리는 진산도인의 등은 왜소해 보였다. 이윽고 진산도인과 그의 제자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조중은 남의 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5 -봉심도(鳳心島), 중원의 어느 곳인가에 있다는 신비지처(神秘之處)다. 봉심도가 강호에 알려지게 된 것은 봉심검주(鳳心劍主)라는 신비 여고수로 인해서였다. 오십여년전, 절세신병인 봉심검을 허리에 두른 한명 화용월태의 미녀가 강호에 나타나서 중원을 떠돌며 협행(俠行)을 시작했었다. 그녀의 미모는 천하절색이었지만 무예 또한 고절해서 당시만 해 도 악명을 떨치던 마웅거효(魔雄巨梟)들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 다. 강호출도 이 년 만에 그녀의 명성은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진동 시켰고 그 후 반 년 만에 홀연히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그로 인해 그 당시 그녀를 추종하던 수많은 무인들이 행방을 수 소문했지만 오리무중(五里霧中), 한 번 사라진 그녀는 바다에 돌이 빠진 듯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있는 곳이 봉심도 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 진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조중의 시선에 따가움을 느낀 남의인은 버럭 교성을 외쳤다. {뭘 봐요? 사람을 처음 보나요?} {아.... 아무것도 아니오.} 조중은 멀쑥한 표정으로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더 있다가는 무 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총총히 발걸음을 옮기는 조중 은 절로 한숨을 몰아쉬었다. (염병할, 계집인 줄은 누가 알았나? 전주도 미쳤지. 저런 망나니 같은 여자를 내가 데리고 있으라니...) 조중은 생각하면 할수록 감찰전주가 원망스러웠다. 조중이 그녀 와 함께 오게 된 것은 모종의 사연이 있었다. 무림멩의 총단의 감찰전에서 그가 전주와 항주사건으로 의논을 하고 있을 때 남장을 한 그녀가 갑자기 들어왔다. 이쁘장하게 생긴 얼굴을 보면서 조중은 처음에 몹시 놀랐지만, 전주가 아무런 말도 없는 이상 그도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조중이 무림맹을 떠날 때 전주가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을 부탁했고, 조중은 전주의 부탁과 강압에 어쩔 수 없이 그녀에 대한 내력을 아무것도 모른 채 같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전주의 태도를 보았을 때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남장여인에다 봉심도의 후예인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 아닌가? 조중은 지끈지끈 쑤시는 듯한 골머리에 저절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어떤 시기인가? 자객들을 잡지 못하고 사건이 미궁에 빠 진다면 장차 무림맹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런지도 모른다. 조중은 사실 이 일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있었다. 헌데 이런 시기에, 난데없이 천방지축같이 날뛰는 여인을 데리고 있어야 하다니 생각만해도 머리가 쑤셨다. 그 날 밤 조중은 장차수, 자운유, 사공표를 불러서 은밀히 지시 를 내렸다. {진산도인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미루어 보아 암중의 인물은 이 번 일을 확대하여 혼란을 조성하려는 것같다.} 잠시 말을 멈춘 조중은 자신의 수하들을 일별했다. [장차수, 자네는 황룡개를 최대한 이용해서 비마영의 행방을 추 적해라.] [예!] [그자를 빨리 찾아낼 수만 있다면 어떠한 수단을 사용해도 무방 하네. 자네에게 한 가지 이점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 자네 는 그 자를 알고 있지만 그 녀석은 자네가 뒤쫓고 있다는 사실조 차도 모른다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장차수가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각자 그 동안 수집한 정보에 대하여 검토해 보세.} 조중의 말을 시작으로 네 사람도 그 동안 파악한 모든 것을 세 세히 자세하게 살폈다.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누군가가 무림맹의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거금을 뿌리고 있고 사오 명의 일 류자객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조중은 한숨을 쉬었다. 동원된 자객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살수들이다. 아주 적은 가능성에 대해서도 진지한 대응을하여 필사의 방어망을 갖추 어야 한다. 오랜 연륜을 쌓은 빈틈없고 대담한 자객의 행위가, 그 자객으로 부터 요인을 지키려는 쪽보다 유리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 는 사실이다. 자객은 이미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조중 쪽에서는 아직 아는 것이라고는 동원된 여러명의 자객들 중 한명의 이름이 비마영이라는 것 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일은 공개적으로 조사할 수도 없다. 무림맹의 조직 이 아무리 방대하고 치밀하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으니 실무책임자인 조중으로서는 속이 바삭바삭 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모충의 정보가 허위임을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잠시 동안 그 가능성이 주는 위안으로 마음이 편안해졌 지만, 제정신으로 돌아가고 보니 그 불안으로 도피는 아직 자기에 게는 허용되지 않는 사치스러운 생각임을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중은 침울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잊지 말게. 이번 일에는 우리의 생명까지 달려 있다는 것을....!}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 조중은 천근같이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옮 겼다. 第 六 章 第四의 刺客! 1 이른 아침, 언제나처럼 소호(巢湖)의 호숫가를 걷는 황삼(黃衫)의 청년은 오 래 전에 폐허로 변한 토지묘(土地廟)의 처마 밑을 습관처럼 힐끗 쳐다보았다. 곧 큼직한 일거리를 주겠다고 약속한 팽노대(彭老大)로부터 벌써 일 년째 소식이 없다. 오늘도 역시 토지묘의 처마 끝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것이다. 황삼청년은 무심한 시선으로 호수를 쳐다보았다. 겉보기에 그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의 인물 이었다. 하지만 한 점의 생기도 없는 무감동한 동공(瞳孔)은 섬뜩 한 느낌을 들게 했다. 잠시 호수를 바라보고 서있던 황삼청년은 아직 서늘한 새벽의 냉기에 오한을 느낀 듯 어깨를 움츠리고 지난 일 년 동안 지내온 자신의 초막(草幕)으로 들어섰다. 이 초막은 그가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곳으로 주위의 마을이나 시진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어 인적이 드물었다. 그는 때때로 옷을 갈아 입듯이 거처를 옮겨 다녔다. 직업의 특성 상 많은 원수가 생길 수 밖에 없고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추적자 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냄새를 남기게 되는 때문이다. 그가 지금의 거처로 삼고 있는 이 허름한 초막에는 다 낡은 나 무 침상과 때묻은 이불, 그리고 한 개의 의자와 솥 밖에 없었다. 그는 함부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설사 밖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이른 새벽에 그 튼튼한 몸에 독소 처럼 괴어 버린 긴장감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산책을 나올 뿐이다. 물론 때때로 며칠분의 음식을 사기 위해 시진으로 나가기도 했 지만 그밖에는 그저 몇시간이고 계속 창가에 앉아 호수를 쳐다보 거나 수면을 취할 뿐이었다. 황삼청년은 천천히 의자에 앉아 밝아오는 소호의 전경을 바라보 았다. 바다같이 드넓은 소호의 호면 위로 피어오르는 안개의 장막 속에서 붉은 빛을 뿌리며 떠오르는 태양은 몽롱한 형상으로 그의 눈에 비추어졌다. 조금의 감흥이라도 가슴에 품은 사람이라면 절로 탄성을 토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호의 일출이건만 청년의 눈길은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잠시 일출을 바라보던 청년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곧 고른 숨소리와 가슴의 일정한 움직임이 일어 그가 깊은 수면 상태에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매일 매일이 똑같은 생활, 무의미한 삶이었다. 하지만 청년에게 그것은 조만간 닥쳐올 일에 대하여 준비하기 위한 휴식일 뿐이다. 그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굴 속의 불곰처럼 팽노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림맹 총단에서 돌아온지 삼 일 후, 극비로 봉인된 몇장의 문서가 귀견수 조중의 손에 들어왔다. 그 속에는 그의 세 심복들이 그 상이 조사한 상세한 정보가 들어 있 었다. 첫 번째 부분은 사공표와 자운유가 보낸 것으로 모충(毛忠)과 진 여상의 살해사건과 관련해서 다시 재조사하여 알아낸 결과였다. 두 번째의 보고서는 장차수가 비마영의 행방을 알아본 결과에 관한 정보였다. 장차수는 어느 정도 그자의 발자취를 추적한 것 같 았다. 모충의 주변을 탐문하고 있는 사공표와 자운유의 보고서에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모충의 출신내력에 대한 정보와 그가 죽기 전 행방, 그리 고 월화에 대한 며칠 사이의 동정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 다. 이것으로 조중은 모충이 자신에게 팔려던 암살기도에 대한 정보 가 확실한 것임을 깨달았다. 모충은 뒷쪽의 세계에서 청부살인업을 중개해오던 월화(月花)의 충실한 살인도구로서 그 동안 여러차례 자객행을 해왔었다. 그러다가 그는 명문가의 여식에서 하루 아침에 창기의 신세로 전락한 진여상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사문인 공동파의 추적이 항주성까지 미친 것을 알자 그는 진여상과 도피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진여상과의 도피를 위한 자금이 필요하게 된 그는 정보 를 팔기 위해서 조중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이번 건이 허위정보였기를 바라던 조중의 한가닥 바램 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실제로 누군가에 의해서 무림맹 요인 의 암살이 기도되고 있는 것이다. 암살기도가 사실로 확인되자 조중의 눈빛이 칼날처럼 빛났다. 고 요하던 그의 혈관은 긴장과 흥분으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石無心)은 월화의 주선으로 세 번째 자객인 독수귀(毒手鬼)라는 인물과 만났다. 이십대의 중반의 나이에 대단한 미남자인 이 인물은 어느모로 보나 자객같은 험한 일을 할 인물로는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나 어 쩌면 사람들의 그같은 선입관이 그의 일을 쉽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수귀는 석무심이 제시한 막대한 액수에 순순이 일을 맡았다. 이제 석무심이 네 번째 상대와 만나는 일만 남았다. 그는 은밀히 수하를 시켜 화룡전장(火龍錢莊)에 계약금을 위탁했 다. 2 소호(巢湖)변에 있는 토지묘의 처마밑에 언제부터인가 다 낡은 제비모양의 연(鳶)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마을의 아이들이 날리다 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제비연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위 태롭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은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새벽 산책을 하던 황삼 청년의 시선이 토 지묘의 처마에 걸린 연에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다시 옮겼 다. 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연을 발견한 순간 황삼청년의 눈빛에는 한가닥 이채가 스쳐지났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봇짐을 손에 든 황삼청년이 초막을 나섰다. 그리고 그가 초막에서 사라진 직후 초막이 있던 곳에서 짙은 연 기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곧 걷잡을 수 없는 화염에 휩싸인 초막은 채 두 시진도 채 되지 않아 완전히 재만 남기고 사그라 들었다. 신고를 받고 관부(官府)에서 관리가 나와 조사를 했지만 건성으 로 한 번 잿더미가 된 초막을 훑어 보았을 뿐, 오랫동안 버려졌던 초막이 불에 탄 이 화재 건은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다. 이틀 후, 봇짐을 멘 황삼청년이 초췌한 표정으로 죽립을 눌러쓴 채 항주 성으로 들어섰다.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은 채....! 철혈무정 석무심은 화룡전장에 황금 오천냥의 계약금을 위탁한 후 삼 일 동안 한 번도 자신의 거처인 상가장(桑家莊)에서 움직이 지 않았다. 상가장은 항주성 동쪽에 있는 장터에 위치한 조그만 장원으로 남의 눈을 피해 잠적하기에는 극히 좋은 장소였다. 상가장의 장주는 소금사업으로 얼마간 부를 획득한 소상인이었 다. 한 달 전 석무심은 자신들을 관인(官人)으로 소개하고 몇 가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라면서 한 달 동안 상가장의 바깥 채를 빌 렸다. 예로부터 백성들은 관인을 하늘처럼 무섭게 보아왔다. 거기다가, 금전까지 듬뿍 쥐어 주니 상가장의 식솔들은 그들을 신주 모시듯 극진히 대접했다. 석무심은 계획대로 세 사람의 자객에게 따로따로 일을 맡겼다. 지금쯤 이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각자의 방식으로 행동을 옮기고 있을 것이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네 번째 자객은 월화가 그처럼 극찬한 이상 특히 믿을만 할 것이다. 제사(第四)의 자객인 그자 또한 다른 세 자객들과 마찬가지로 독 자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석무심은 자기가 없는 동안 이 미지의 자객으로부터 연락이 올 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에 여타의 다른 일들은 모두 단념할 수밖 에 없었다. 석무심은 그렇다고 쳐도 기약없이 상대를 기다려야만 하는 이 미묘한 상황은 그의 수하들인 세 회의장한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들 세 장한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돌아다 니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지금같이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문객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 하자 안정되지 않은 기색을 보이 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석무심은 낮에는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씩을 교대로 홍등가로 보내어 무림맹의 활동도 탐지할겸 쾌락도 맛볼 수 있도 록 배려하였고 다른 두 사람은 상가장 내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현재 항주 곳곳에는 무림맹의 수하들로 인해 함부로 움직인다는 것은 여간 경솔한 행동이 아니다. 석무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침상에 몸 을 눕혔다.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제사의 자객에 대한 궁금한 점이 떠 올랐다. 황금으로 일만냥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도 그렇지만 도대체 어 떠한 인물인데 그 많은 금액을 요구하는지 필요 이상으로 호기심 이 일어났다. 황삼청년이 항주성내의 유명한 은장(銀莊)인 화룡전장을 나서자, 곧 쥐새끼같이 작은 눈에 염소수염을 기른 사십대의 왜소한 사나 이가 나타나 태연히 그 황삼청년의 뒤를 따랐다. 황삼청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흡사 벽 지에서 처음 대처(大處)로 나온 시골뜨기가 항주성의 화려한 모습 을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살피면서 장터로 향했다. 장터는 수많은 인파로 인해 북새통처럼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황삼청년은 단 한 사람과도 부딪침없이 교묘히 이리저리 빠져 나 갔다. 거의 장터를 벗어날 무렵 황삼청년은 길가에 자리잡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미행하던 염소수염의 사나이도 재빨리 발걸음을 재촉 해 뒤따라 들어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염소수염의 사나이 눈이 째질 듯이 커졌다. 음식을 먹으러 들어간 줄 알았던 황삼청년이 다시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재빨리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황삼청년이 완전히 사라지자 염소수염의 사나이는 급히 뒤따라 나왔다. 3 어느 새 황삼청년은 장터를 빠져나가 샛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행인들과 부딪침에도 아랑곳없이 맹렬히 달렸다. 등 뒤에서 그와 부딪친 행인들이 욕설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 제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샛길로 접어들은 그는 급히 앞쪽을 살폈다. 제법 떨어진 앞쪽에서 다시 황삼청년의 신형을 발견한 염소수염 의 사나이는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직였다. 다시 얼마나 걸었을까? 염소수염의 사나이는 눈앞의 황삼청년이 담벼락을 따라 돌자 재 빨리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염소수염의 사내가 급히 담벼락을 끼고 돌았지만 황삼청 년의 신형이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흠칫 놀란 그는 황망히 담벼락 저쪽의 모퉁이를 향해 뛰러아겨 고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나를 뒤쫓느라 수고가 많군.} 갑자기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한 쌀쌀한 목소리에 염소수염의 사 나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높직한 담장 위에 한명의 청년이 태연히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물론 염소 수염의 사내가 미행하고 있던 황삼청년이었다. 황삼청년을 발견한 염소수염의 사내는 급히 뒷걸음치며 무어라 변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 그는 황삼청년의 주먹이 눈앞을 스치는 것 을 보았고, 이어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황삼청년은 널브러진 염소수염의 사나이를 내려다보면서 나지막 이 중얼거렸다. {어떤 자가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실망인데.} 다분히 조소섞인 미소를 지으며 그는 실신한 사나이를 안고 훌 쩍 몸을 날렸다. 한 사람의 장한을 안고도 가볍게 물을 날리는 그 의 민접함은 실로 영민한 것이었다. 상지호(相支湖)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나이는 철혈무정 석무심이 신임하는 세 명의 수하 중 하나였다. 벌써 한 달째 항주성에서 머물고 있는 그는 홍등가에서 한바탕 욕정을 발산한 뒤 상가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밤 샀던 홍련(紅蓮)이란 기녀도 나쁘지는 않았다. 육덕이 흐 드러진 몸매에다 전문가답게 사내를 녹여버리는 그 부분의 기교는 발군이었다. 거푸 서너번이나 그년의 몸에 배설을 하고 나자 몸안 에 쌓였던 피로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계집만은 못했어!) 상지호는 진여상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단 한차례였지만 진 여상을 범한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진여상은 동전 몇문으로 쉽게 사서 즐길 수 있는 전문적인 창기 들과는 전적으로 틀린 계집이었다. 무언가 고급스럽고 깔끔하다고 나 할까? 한 번 즐긴 뒤 죽여버리기에는 정말 아까운 계집이었다. (별 잡생각을 다 하는군! 그년은 그때 반드시 죽었어야만 했어!) 상지호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그와 동료들은 오늘로써 사 일째 의문의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 다. 기다림에 지쳐 짜증을 내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자 상지호는 미안한 감이 들었다. . 약간 취기와 시원스럽게 홍등가에서 음욕을 배설한 상지호는 상 가장에 도착하자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사 일째 꼼짝없이 갇혀 있다시피한 자신의 상사인 석무심을 생 각할 때 그의 앞에서 술기운을 풍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 심호흡을 한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담벼락에 난 쪽 문을 슬며시 열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당신의 주인을 만나고 싶소.} 어둠 속에서 나직하나 단호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쪽문을 열려던 상지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숙련된 동작으로 방 어를 갖추고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뒤쪽 이 장 떨어진 곳에 목소리의 주인이 서 있었다. 나이는 잘해야 이제 이십세 가량쯤이나 되었을까? 오랜 여행에 지친 듯 얼굴은 초췌하고 몸에 걸친 황색장삼은 먼지가 가득 묻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었 지만, 상지호는 이 황삼청년과 마주 서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섬뜩 한 느낌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발가벗은 무방비 상태로 사나운 맹수와 마주 선 듯 한 기분이었다. 황삼청년은 바로 지난 일년간 자신의 은신처가 되어주었던 소호 변의 초막을 불태우고 떠난 장본인이었다. 상지호는 가슴의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헌데, 이 자는 어디서 튀어 나왔다는 말인가? 그것도 이 황삼청년이 자 신의 곁에 다가서는 것을 상지호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상지호 역시 결코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빔틈없는 방어의 자세를 취하며 짧게 내뱉았다. 하지만 상지호로써는 최대한 내심의 놀라움을 감추려고 노력했 으나 입을 빠져나온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 다. 문득 황삼청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상지호의 작은 감담을 비웃는 조소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무의미 하게 웃는 듯한 모호한 웃음이었다. 4 {나는 당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오.} 황삼청년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상대가 누군지를 확인한 순간 상지호는 깜짝 놀랐다. 월화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네 번째의 자객(刺客)-! 상지호는 그 제사(第四)의 자객이 적어도 무언가 특별난 점이 있 는 사람인 줄 알았었고 기대를 했었다. 헌데, 자신들이 지난 사 일 동안 노심초사하며 지루함 속에 기다 린 자가 이토록 초라하고 불품없는 인물이라니...! 기대가 어긋나버린 상지호는 소태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확인 하는 것처럼 물었다. {당... 당신이 정말 담사(潭邪)라는 사람이오?} {이름이야 무엇인들 상관 있소. 사람만 확실하면 되지.} 황삼청년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깊이 침잠한 두눈은 상지호에게서 한치도 떨어질 줄 몰랐다. 황삼청년의 엉뚱한 답변에 상지호는 움찔했다. {시간을 끄는 것은 좋지 않소. 그것도 이곳에서는.} 상지호는 청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 갑시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상지호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철혈무정 석무심은 담사(潭邪)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황삼 청 년의 모습을 주의깊게 살폈다. 당연히 그로서는 처음 보는 이 청년은 마치 습관인 듯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견 이십세 전후로 보이지만 어쩌면 겉보기보다는 나이가 좀더 많은 지도 모르겠다. 그는 보통사람보다 약간 큰 키에 이상하게도 등을 꼿꼿이 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먼지로 가려 초췌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지나 칠 정도로 무감동했다. 어떤 희,노,애,락의 감정도 담사라는 이름을 지닌 이 청년의 눈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철혈무정 석무심의 날카로운 안력으로도 이 청년의 전부를 가름 해보기는 불강한 듯 여겨졌다. {석형께서는 내가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찾아온 것에 대하 여 의문을 가지고 있겠지요?} 황삼청년 담사는 정중히 말했다. 석무심은 그가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데 내심 놀라움을 느 꼈지만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이다, 담형.} {그것은 별 것 아닙니다. 우연히 저를 미행하는 자를 알게 되어 몇 가지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솔직한 담사의 말에 석무심은 오히려 침착성을 잃어 버렸다. 처 음 대하는 이 청년의 행동에는 어딘지 모르게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이 청년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일견해 보아 경의 를 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무시하 는 것 같기도 했다. {담형의 의향대로 화룡전장에 금액을 맡겼으니 만족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소만....!} 석무심은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이쪽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소이다.} 황삼청년 담사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의 재정상태에는 전혀 흥미가 없소. 내가 알고 있는 바는 눈앞에 피차 해치워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뿐이오.} 지극히 사무적인 담사의 말에 석무심은 절로 쓴웃음을 지웠다. {나는 당신들의 단체에서 나를 고용하겠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 이오.} '당신들의 단체'라는 그 말에 석무심의 눈빛이 일순 달라졌다. 대 체 이자는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안ㄹ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담사는 석무심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 말에 별다른 생각은 가지지 마시오.}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석무심을 쏘아보았다. {석형은 단체를 대표해서 나를 상대하는 것, 피차 무용한 긴 말 은 생략합시다.} 추호도 여지를 두지 않는 상대방의 기세에 석무심은 자신이 이 미 한 수 지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분하고 불쾌한 일이 지만 그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석형이 상대하려는 사람이오. 그리고 이쪽에서 원하지 않 는 일은 단 하나! 성급하게 하려는 행동은 삼가해 달라는 것이오.} 담사의 단호한 말투에 석무심은 계속 이렇게 끌려 가서는 안되 겠다고 생각했다. {담형! 당신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료?} 석무심이 은연중 싸늘한 기세를 흘려내며 말했다. 하지만 황삼청년 담사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이런 일에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아니되오요. 나 의 생명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정보와 조심성 으로 자행해 올 수 있었던 것이오.} 황삼청년 담사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 불필요한 말은 더 이상 하지 맙시다. 우리 사이에 거래부터 성립시켜야 하니까.} 그는 석무심의 파르르 떨리는 눈빛을 무시해 버렸다. {그쪽에서 보여준 호기는 마음에 들었소. 하지만 나는 아직 어떤 행동에도 착수하지 않았소.} 석무심은 이미 세명의 다른 자객들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숨기며 말했다. 눈 앞의 이자를 상대로 전세를 만회하려고 해봐야 헛일이 라는 것을 알았다. 5 {나의 표적은?} 단도직입적인 담사의 말에 석무심은 입술을 실룩거리다가 내뱉 듯이 말했다. {무림인이오.} 담사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언 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선금의 액수로 보아 보통 거물은 아니겠군.} 그는 말하며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무심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세한 이야기는 석형의 상부자에게 들어야겠지요.} 순간 석무심의 눈빛이 모멸감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쓴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소.} {그렇다면 일차 흥정은 끝이 났군. 내일 밤 삼경까지 다시 오겠 소.} 담사는 더 이상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침착한 자세로 방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의문의 청년 담사가 방밖으로 완전히 나가자, 석무심은 어처구니 가 없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 네 번째 자객의 태도와 어조는 완전히 그를 바보 취급한 것 이었다. 태도는 방자하기 이를 데 없고, 또한 화가 날 정도로 무례 했다. 석무심은 돌연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노 출시키지는 않지만, 지금의 그 청년은 그를 형편없는 애송이로 만 들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이 초면의 청년이 자신의 가슴 속에 불러 일으킨 감정이 공포(恐怖)라는 것을 느끼며 흠칫했다. 황혼무렵, 십여 필의 인마(人馬)가 하남성(河南省)의 성도(省都) 낙양(洛陽) 으로 들어섰다. 앞장 선 인물을 제외하고 한결같이 산뜻한 백색경장을 입은 마 상의 기사들은 위풍당당했다. 대열의 맨앞에 선 삼십대의 비단 장삼을 입은 건장한 사나이는 한 자루의 보검을 허리에 매고 있었다. 강북사람들이라면 그가 바로 북천뇌보(北天雷堡)의 실력자인 뇌 전신도(雷電神刀) 비사중(飛士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북천뇌보(北天雷堡)> 그들은 산서(山西)와 하북(河北), 감숙(甘肅)일대에 크나큰 세력 을 가진 북방(北方) 무림의 명가였다. 본래 서북방의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용맹하며 활달하다. 아 마도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유목민족들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 탓 일 것이다. 타고난 그같은 성정(性情)에다가 무예를 좋아하는 풍속탓에 서북 방의 사나이들은 모두가 일당백의 호한(豪漢)들이다. 그들 서북의 세력들에 의해 숱한 왕조가 명운을 달리해왔음은 사서에 잘 들어 나 있다. 그 서북방 무림을 영도하고 있는 최고의 명가가 바로 북천뇌보 (北天雷堡)다. 북천뇌보의 세력과 영향력은 구파일방의 어느 문파도 견줄 수가 없으며 무림맹 조차도 그들 북천뇌보 적용(狄容) 일족에게는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정도였다. 그 북천뇌보의 요인인 뇌전신도(雷電神刀) 비사중이 몇 명의 수 하들만을 대동하고 황하(黃河)를 건너 무림맹의 세력권인 이곳 낙 양에 나타난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선 뇌전신도 비사중 일행은 낙양성의 주작대로(朱 雀大路)를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마장쯤 갔을까?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비사중 일행의 맞은편에서 세 필의 인마가 급히 달려왔다. 세필의 말 위에는 오순 가량의 화포(華袍) 노인과 청색 경장에 장도를 메고 있는 두 명의 대한(大漢)이 고삐를 잡고 있었다. 이 화포노인이 바로 무림맹(武林盟)의 총관(總管)인 삼절우사(三 絶羽士) 갈추상(葛秋相)이었다. 그가 직접 뇌전신도 비사중을 마중 나온 것이다. {어서 오시오 비대협.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먼길을 오시느라고 고초가 많으셨겠소이다.} 삼절우사 갈추상은 뇌전신도 비사중 일행을 보자 말을 멈추고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의 총관인 갈추상이 반가운 표정으로 정중히 인사를 하자 비사중은 환한 기색으로 마주 인사를 했다. {갈노사께서 이렇게 마중을 나오시다니, 비사중은 몸둘 바를 모 르겠습니다.} {하하! 별 말씀을 다 하시오. 비대협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우 리 소맹주(少盟主)께서는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시오.} 갈추상은 흔쾌히 말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자, 가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갈노사.} 비사중은 급히 답례를 하며 말머리를 그와 나란히 했다. 갈추상이 말했다. {그래 뇌(雷)보주께서는 무양하시겠지요?} 비사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갈총관께서 염려하심으로 저의 주군께서 언제나 기력이 완성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물론 뇌소저께서도 편안하시겠지요?} 갈추상이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비사중은 손을 훼훼 저으며 한 숨을 토했다. {편안이 다 무엇입니까? 이번 길에 소저께서 자신의 낭군이 되 실 연(燕)공자를 직접 보시겠다고 따라 나서시는 바람에 정말 혼이 났습니다.} 비사중의 말에 갈추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뇌소저께서 장래의 낭군이 되실 저희 소맹주님에 대해 몹시도 궁금하시겠지요. 이해합니다!} 갈추상의 말에 비사중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말도 마십시오. 사실 저의 입장으로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갈노사께서도 아시다시피 뇌소저의 성격이 어디 보통입니까?} {하하! 폐맹의 삼태상(三太相)들께서는 오히려 뇌소저의 그런 활 달한 성품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갈추상의 말에 비사중의 표정이 은근해졌다. {사실 연공자께서 소저와 정혼하신 후 그 사나운 등살에 어떻게 견디어 내실까 궁금합니다.} 순간 갈추상과 비사중의 시선이 마주치고 동시에 대소성이 터졌 다. {핫핫핫핫....} {하하하....} 두 사람의 대소는 한 점의 가식도 없이 기분좋게 울려퍼졌다. 제 7 장 標的은 定해졌다! 1 희래각(喜來閣)-! 항주성 홍등가의 외각에 자리잡은 청루(靑樓)다. 청루란 전문적으로 여자만 파는 홍루(紅樓)와 달리 술과 여자를 함께 파는 곳이다. 매춘만을 하는 홍루가 붉은 홍등을 내거는데 반해서 술까지 파 는 청루는 푸른 청등(靑燈)을 내거는 연유로 청루(靑樓)라는 이름 이 유래한 것이다. 담사(潭邪)라고 불리운 황삼 청년은 어젯밤부터 유향(遊香)이라 는 청기(靑妓)와 함께 방에 들어간 후 다시 하루가 지나 어두어지 기까지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담사가 선택한 기녀 유향은 한때 이 바닥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 으나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은 기녀로서 황혼기에 든 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법 풍만하고 흐벅진 몸을 소유한 덕분에 그녀는 그런 대로 이곳에서 비록 시들어가는 몸뚱아리지만 손님을 받을 수 있 었다. 세상에는 그녀처럼 적당히 닳고 적당히 살이 찐 여자를 좋아 하는 사내들도 있는 것이다. 유향은 지난 수년 이래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었다. 입가에는 저 절로 복사꽃 같은 미소가 감돌고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찼다. 주방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장만하는 그녀는 어젯밤 의 일을 생각만 해도 전신이 황홀해졌다. 담사라는 이 젊은 손님은 겉보기에도 시골에서 막 대처로 나온 시골뜨기처럼 어리숙해보였다. 하지만 허름한 외양과 달리 그의 주 머니는 상당히 두둑했다. 근 십여일만에 손님을 받은 유향으로서는 담사가 눈이 번쩍 띄 는 먹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숙맥같은 이 시골 촌뜨기를 잘 울거내면 당분간은 생활비 걱정 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록 한물 갔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는 여전히 사내들의 단물을 빨아낼 훌륭한 수단과 기교가 있는 것이 다. 까짓 몸매야 젊고 탱탱한 것들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여자의 그 부분으로 사내들을 녹이고 조여대는 기술만큼은 상대가 없는 자신 이다. 이 멍청이는 자신의 아랫도리에 숫총각의 왕성한 정욕과 함께 상당한 돈을 토해내게 될 것이다. 유향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하며 연하의 어리숙한 청년을 몸 위에 태웠다. 헌데, 그녀는 허둥대는 듯한 청년의 실체가 자신의 몸 안에 깊숙 이 파고드는 순간 저절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숱한 사내를 거치며 닳고 닳은 그녀의 육체가 감당할 수 없을 청년의 그것은 굵고 거대했던 것이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 시골 무지렁이가 다른 흉기를 숨기고 있다가 밀어넣은게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할 정도였다. 흡사 둔기가 몸 속을 파고드는 듯한 강렬하고 뻐근한 느낌과 함 께 시작된 청년의 무지막지한 행위는 수 년 이래 어떤 사내와의 행위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그녀를 몇 번이나 혼절 시켰다. 사내는 거칠었다. 황소처럼 난폭하면서도 끝이 없었다. 유향은 상대가 흡사 몇년을 굶었던 것을 한 번에 자기 몸에 배 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소호변에 은둔하여 수도승처럼 지냈 던 담사는 일년여동안 쌓인 욕구불만을 한 번에 모두 배설해낸 것 이다. 유향같은 닳고 닳은 나이든 기녀를 택한 것도 젊은 기녀들은 그 것을 감당해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향은 겨우 아침이 되어서야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담 사는 밤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몇번이고 혼절했던 유 향이 깨어나면 그는 그 즉시 달려들어 괴롭히곤 했었다. 동창이 훤히 밝아서야 겨우 풀려난 유향은 전신을 쑤시는 아련 한 통증과함께 뼈 속까지 파고들어 남아있는 희열감에 새삼 다시 상대를 쳐다보았다. 볼품없는 얼굴에 초라한 행색, 그리고 보통 보다 약간 더 클 뿐 인 그의 몸에서 어떻게 그런 거칠은 힘이 숨겨져 있는지 의심스러 웠다. 하지만 그의 몸이 드러났을 때 그녀는 감탄을 못했다. 약간 갈색 빛이 도는 육체에 구리빛 근육은 강철같이 단단해 보였다. 전신에 난 무수한 흉터가 더욱 강인해 보였다. 그것은 오히려 가 슴에 난 털과 더불어 더욱 건강해 보였다. 정성들여 저녁상을 차린 유향은 음식이 담긴 소반을 든 채 수줍 은 처녀처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담사는 그녀의 출현에 힐끗 시선을 던진 후 다시 무표정하게 어 두워져 가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눈길이 밖으로 향하고 있 지만, 그의 정신은 다른 데 있는 듯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식기 전에 드세요.} 유향은 남편을 모시는 것처럼 나지막히 말했다. 담사는 느릿하게 시선을 유향에게 돌렸다. 유향은 그의 시선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려 고개 를 푹 쉬였다. 담사는 말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음식을 먹는 방법은 특이했다.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골고루 먹으면서 잠시도 쉬지않고 수저를 놀리는 것이다. 유향은 그 모습을 행복한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잠시나마 그녀는 자신이 한 남자만을 섬기며 사는 평범한 아낙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3 징! 징!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징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되었군.} 석무심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창 밖을 응시했다. 마침내 제 사의 자객 담사가 정한 시간이 된 것이다. 헌데 막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석무심의 두눈이 찢어질 듯 이 크게 치떠졌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창 밖의 담벼락에는 어둠과 함께 서 있는 농부 차림의 사나이가 한명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면 석무심은 그 허름한 차림의 농부가 바로 어제 만났던 담사라는 인물이라는 것을 죽어도 깨닫 지 못했을 것이다. {석형, 늦지는 않았겠지요?} 흡사 귀영처럼 창밖에 다가선 담사는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다루기 힘든 자로군.) 고저 장단이 없는 무미건조한 그 음성으로 비로소 상대가 담사 라는 것을 깨달은 석무심의 검미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불쾌한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지금 이 방 주위에는 자신의 수하들이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 고 또 그의 청각으로 사방 십여 장의 동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헌데, 그는 담사라는 이 자가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내심 노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명하군 고명해! 당신의 진실한 모습은 영원히 알아내지 못하 겠군.} 석무심은 담사가 역용한 사실을 비웃듯 이죽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내 진실된 모습을 알 필요가 없으니까.} 담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투는 평이했지만 그의 눈빛은 섬뜩 한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누구도 내 정체를 모른 것! 내가 노리는 바는 바로 거기에 있 소. 기밀의 유지는 당신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당면한 문제요. 나 의 정체는 일을 수행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주된 목적은 일을 만족하게 처리하는 것뿐이니까.} 담사의 착 갈아앉은 그 말에 석무심은 자존심이 상하는지 차갑 게 말했다. {당신의 실력도 말솜씨와 같은지 궁금하군.} 하지만 담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싱긋이 웃었다. {석형, 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쪽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오. 다 소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 점을 잊지 말아 주시오.} {알겠소.] 석무심은 쓴웃음을 띠우며 면사여인을 소개했다. [이 분이 이번 일을 주재할 분이요.] 하지만 담사는 손을 들어 석무심의 말을막앗다. {잠깐, 나는 일을 하려고 왔지 이름 따위나 듣고 있을만큼 한가 한 사람이 아니오.} 면사여인의 눈이 면사 속에서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처음 석무심을 통하여 담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한 흥미를 일으켰다. 석무림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을 가졌던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담사의 언사에 석무심은 더 이상 참기 어 려웠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면사여인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너무 날뛰는 것은 신상에 좋지는 않지.} 석무심은 담사를 노려보며 짧게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짙은 살기가 서려 있었다. 담사는 석무심을 쳐다보며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강호를 위진하는 철혈무정(鐵血武情)의 이름으로 말이오?} 조롱하듯 말하는 담사의 말에 석무심의 눈썹이 휘어졌다. 어지간 한 그도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담사란 이 작자에게는 사람의 속을 긁어놓는 ㅁ묘한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석무심이 발작을 하려고 할 때였다. {사형은 잠시 나가 있도록 하세요.} 면사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듣는 이의 귀를 시원하게 만 드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차갑고도 단호한 위엄이 깃든 목소리였다. {이 일은 제가 처리하겠어요.} 여인의 말에 석무심은 무언가 항변을 할 듯 입을 발렸지만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밖으로 나갔다. {당신이 담사라는 사람인가요?} 단둘이 남게 되자 면사여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담사를 바라보 며 물었다. 담사 역시 면사여인의 우아한 자태를 살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 다. {그렇다고 칩시다.} 순간 면사여인의 신형이 움찔했다. {이상한 대답이군요. 맞으면 맞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그렇다니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소. 나의 이름은 항상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오!} 문득 면사여인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허름한 그의 몰골로 보아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살수로서 는 거리가 먼 인상이다. 하지만, 엄중한 경비를 뚫고 소리없이 나타난 것과 종잡을 수 없 는 모습, 그리고 석무심을 조롱하는 태도는 그가 뛰어난 점이 있다 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당신이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확실하군요?} ㅁ면사여인의 눈꼬리가 약간 휘며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렇소.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4 두터운 면사로도 가려질 수 없는 여인의 해사한 웃음에 담사는 기분이 유쾌해진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나이나 육체의 조건, 실력 등은 내 자신의 문제요. 당신들 이 믿지 않는다해도 나는 이 직업에서는 최고이며, 황제라도 조건 만 맞는다면 목을 자를 수 있소.} {호호...! 당신의 말은 매우 재미있군요. 허나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황제의 목이 아니니....!} 여인은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는 해맑고 고혹한 음ㅁ성으로 웃었 다. 하지만 그녀 웃음을 듣는 순간 조금 밝아졌던 담사의 표정이 갑 자기 음산해졌다. {흐흐! 그러나 당신들이 내게 맡기려는 일이 황제를 죽이는 것보 다 오히려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소.} 면사여인이 처음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좋아요. 말이 통하니 우리의 거래는 쉽게 이루어질 것 같군요.} {나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소. 이런 거래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 [....!] 면사여인은 잠시 동안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접한 담사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스쳐지났다. {나에 관해서 흥미를 느낀 모양인데, 나의 정체에 어떤 사항을 모색하려는 것은 정말 무리한 일이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석무심이 나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를 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 지 못했소.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지요.} 한 동안 기다려도 면사여인의 입에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 자 담사의 입가로 야릇한 표정이 스쳤다. {석무심이 모충이라는 자는 죽이면서 월화루의 월화를 죽이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어. 한 번 문 표적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찾아낸다는 귀견수(鬼見手) 조중이 그것을 놓칠 리 없지.}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리는 담사의 말에 여인의 면사가 부르 르 떨렸다. 얼굴을 가린 면사로 인해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그녀 가 크게 놀라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신은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지나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르 죠.} 면사여인의 음성엔느 더 이상 웃음기가 실려있지 않았다. 하지만 담사는 개의치 않는 듯 편안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지나치게 안다고는 할 수 없소. 이런 일을 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이 해야할 일을에 상세히 파헤치지 않으면 안되니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요.} {....} {난 내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는 가능한한 모든 것을 조사해야만 하오. 내가 지난 몇년 동안 청부살인을 직업으로 삼아오면서도 지 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아마 그러한 준비 덕택이었는지도 모르오.} 면사여인은 그가 한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객이란 이 위험한 직업에서는 작은 실수나 무지가 곧 죽음으로 연결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담사라는 이 의문의 사나이를 살펴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영민한 뇌리에서는 이번 일에 동원된 다른 세 사람의 자 객, 비마영(飛魔影)과 추명사(追命蛇), 그리고 백명추혼(白名追魂)이 라 암호로 불리는 낭혼(狼魂) 등의 살수들과 눈 앞의 이 인물을 비 교해 보고 있었다. 앞서의 세 사람도 모두 각자 행동을 하며 그 세계에서는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 인물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뛰어 들 어 온 것이다. 모든 것이 신비의 장막에 단단히 갇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번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짐작은 하고 있나요?} {어느 선까지는...} 말꼬리를 끄는 담사의 표정이 진지해 보였다. {당신네 쪽은 힘은 있지만 정체를 드러낼 수 없기에 나를 고용 한 것이 아니오?} 여인의 음성이 다시 명랑해졌다. {그 말이 맞는다고 치고, 당신은 이번 일의 표적이 누구라고 생 각하죠?} 담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상대는 짐짓 자신이 노련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으나, 실은 이런 일에 애송이임이 분명하 다. 그녀의 이번 질문에 담사는 가소로움을 느끼며 조소를 띠웠다. {피차 사정을 확실히 합시다. 표적이 누구이든 간에 그쪽이 노리 는 것은 무림맹(武林盟)의 거물일 것이요.} 담사는 이어 경멸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뿐 만이 아니지! 이 일에 무제한 돈을 쓴다는 것은 표적이 그만큼 위험이 많다는 것을 뜻하고, 당신들이 이미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애송이를 하나 선택해서 불장난을 하다가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는 일부러 상대방을 화나게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그들의 계 획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 실히 증명해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담사 자신에게 있어서 도 위험한 것이다. 만일 그들의 실수로 그의 발목이 잡히게 된다면 그는 아무 목적도 없이 자기의 몸을 위험에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모충의 건에 대해 조롱을 받자 과연 여인의 얼굴을 가린 면사가 파르르 떨렸다. 아마도 면사 속의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 해질 정도 로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면사여인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평정을 유지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좋아요.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일에 관해 본론으로 들어 가죠.} {잠깐만!} 담사가 손을 흔들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내쪽의 조건이 결정될 때까지 그쪽의 표적을 알고 싶지는 않 소.} {좋아요, 얼마를 원하는가요?} 면사여인이 아미를 상큼 찌푸리며 물었다. 담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수는 총 이만 냥이어야만 하오. 물론 황금으로! 오천 냥은 이 미 받았으니 일이 끝나면 만 오천 냥을 화룡전장에 넣어주시오.} [이만냥!] 면사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음색을 토했다. {호호! 농담이겠지요. 그 돈이라면 하나의 현을 통채로 살 수 있 는 엄청난 액수라구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자는 일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자 갑자기 대금을 두배로 증액한 것이다. 여인의 반응에 담사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그쪽에서 그렇게 말하다니 정말 유감이군.} 5 담사는 허리를 펴고 면사여인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은 나에게 혹독한 추적의 대상이 되는 살인을 시키려고 하고 있소. 내가 확실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한 돈이 있어야 하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예상을 넘는 액수예요. 난 당신을 쓰는데 일만냥이면 된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면사여인도 지지 않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담사는 망설임없이 품 속에서 한 장의 전표를 꺼내들었다. {이것은 화룡전장에서 발행한 전표요. 모두 황금 오천 냥의 액 수, 돌려드리겠소.} 그는 탁자 위에 전표를 올려놓고 미련 없이 일어섰다. {밤이 깊었군.} 그는 정중한 자세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오랫 동안 실례가 많았소. 그럼 이만....} 말과 동시에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방문쪽으로 걸음 을 옮겼다. 면사여인은 그가 이렇게 빨리 포기하고 돌아갈 줄은 몰랐다. 담 사는 대담한 도박을 걸었으며, 여인은 그가 이겼다는 것을 깨달았 다. {잠깐만, 우리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는 급히 일어서며 담사를 불렀다. {이야기는 기꺼이 듣겠소.} 담사는 문 앞에 선 채로 대답했다. {한 가지 말해 두겠어요. 어떠한 이유든간에 표적물이 당신이 암 살하기 전에 죽는다면 우리는 계약금 외에는 한푼도 지급할 수 없 어요.} 담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인의 말 뜻은 분명히 알아 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 지 않고 기다리고만 있었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면사여인은 말을 계속했다. {정해진 기간내에 이 일을 끝내야 돼요. 우리도 당신이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할 때까지 시간이 제법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단오절(端午節) 안으로 일을 마치지 않는다면 이 일은 백지로 돌아 가는 것이예요. 이 두 가지 조건만 맞는다면 이 일은 결정된 것이 예요.} 담사는 문 앞에서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탁자 가까이로 다가와 서 전표를 집어 품 속에 넣었다. 면사여인은 그제서야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것으로 이야기는 결정된 것이예요.} 그녀가 한시름 놓은 듯이 말하자 담사는 다시 의자에 앉으면 말 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도 않고 도움도 필요없소. 단지 표적의 이름만 가르쳐 주시오.} {좋아요. 역시 당신은 말이 잘 통하는군요. 당신 표적은 바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담사의 눈이 야수의 눈처럼 무섭 게 빛이 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뼈 속까지 보는 듯한 매서운 눈초 리는 그녀로서 평생 처음 보는 무서운 눈길이었다. 이미 평범한 농부차림의 중년사내는 온데간데 없고 지금 여인의 눈앞에는 한 번 노린 목표는 결코 놓치지 않는 맹독(猛毒)의 독사 (毒蛇)가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도 치명적이고 위험한....! {표적은?} 굳어진 면사여인을 향해 담사가 재차 담담히 물었다. 면사여인은 가볍게 몸을 떨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무림맹의 소맹주(少盟主) 연대강(燕大强)!} 여인의 입에서 토해지는 그 이름을 듣고서도 담사의 표정에는 한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흐흐 무림맹의 소맹주라...! 그러고도 이쪽의 보수를 깎으려 하 시겠소?} 그는 느릿하게 일어서며 계속 말했다. {그를 죽인 뒤 나는 일생동안 무림맹의 감찰전에게 쫓겨 다녀야 할 신세가 된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거기에 또 구파일방 외에 북 방무림의 패주(覇主)인 북천뇌보(北天雷堡)의 추적도 피해야 하고 말이야.}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이 일을 성공하면 나는 전 백도(白道) 무림의 공적이 된다 말이오. 아무튼 그쪽에서 받는 돈은 필요한데 쓰이게 될 것이요.} 말을 마치자 담사는 몸을 돌렸다. {두 가지 조건을 잘 기억하세요. 한 가지라도 잘못된다면 우리는 한푼도 주지 않을 테니까.} 면사여인은 냉랭히 그의 등 뒤를 향해 외쳤다. 담사는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항주의 번화가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의 중요성을 너무도 예민하게 느끼고 있 었다. 표적(標的)은 결정(決定)되었다! 상대는 천하무림의 대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거물 중의 거 물인 것이다. 거기에다, 그의 주위에는 무수한 절정고수들이 주야 를 가리지 않고 호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객인 그의 사기를 드높이고 자극을 주는 하나의 도전일 뿐이었다. -범천대공(凡天大公) 연대강(燕大强)! 그의 부친은 무림맹을 만든 우내삼기(宇內三奇)의 일 인인 신검 황(神劍皇) 연주백(燕州伯)이다. 무림맹 삼태상(三太相)의 일인인 부친의 후광과 빼어난 재질을 배경으로 그는 이십 세가 되기 전 무림맹의 차기 후계자로 내정되 었고 고절한 무예와 지모(智謀)로 강호에서 협명(俠名)을 떨치고 있었다. 게다가 타고난 관옥(貫玉) 같은 용모는 강호 명문규수들의 사랑 을 한 몸에 받으니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절세미녀가 따르고 세상 에서 온갖 행운을 차지한 전형적인 명문의 후예였다. 비단 배경과 외모뿐이 아니었다. 그는 부친인 신검황의 성명절기인 신허검법(神許劍法)을 극성까 지 익혔고 또 철불(鐵佛)이라고도 불리는 혜천(慧天)대사로부터 소 림절기까지 이어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실공히 천하기남(天下 奇男)이기도 하다. 바로 그 당대제일의 기린아 범천대공 연대강이 표적인 것이다. 강호 뭇 여협들의 가슴을 애태워온 연대강은 다가오는 단오절에 서북무림의 맹주격인 북천뇌보(北天雷堡)의 여식과 화촉(華燭)을 밝힐 것이라고 알려져있다. 면사여인이 단오절 안에 일의 결행을 요구한 것은 복잡한 내막 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담사로서는 그 내막이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직업인 자객의 역할만을 확실히 수행해내면 되는 것이다. 第 八 章 妖女 月花의 죽음 1 항주성의 홍등가에서는 조그만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가게보다도 성업중이던 월화루의 주인이 갑자기 가게를 팔 기 위해 매수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틀 전, 월화는 자신 앞으로 일천 냥 짜리의 은표(銀票) 열 장 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평소 거래하던 금화전장(金華錢莊)으로부터 받았다. 이것은 철혈무정 석무심이 네 번째 자객과도 거래가 끝나면 그 녀에게 지불하겠다고 말한 액수였다. 그녀는 일이 너무 빨리 이루어진데 놀랐다. 중개료가 들어왔다는 것은 그녀가 추천한 사 인을 석무심쪽에서 이미 확보했다는 증거 였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철혈무정 석무심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났다고 여긴 월화는 즉시 자신의 가게를 매물로 내놓았다. 그리고 워낙 성업중인 월화루라 즉시 여기저기서 입질이왔다. 가 게를 내놓은 그날만 해도 칠팔명의 상인들이 월화루의 매매에 관 심을 갖고 찾아왔을 정도였다. 그 중 몇 사람은 월화의 가게를 적극적으로 원했지만 월화가 요 구하는 금액과 지불 조건에는 모두 난색을 표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즉 확실한 가격을 정 하고 그 금액을 즉시 현찰로 지불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조건에 맞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액수도 액수지만 그 정도의 막대한 현찰은 아무나 쉽게 조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쪽 일에서 손을 떼어야겠다고 생각한 월화는 내심 초조해졌다. 하지만 지난 칠년간 심혈을 기울여 키워온 월화 루를 헐값에 넘길 수야 없는 일이다. 그녀는 좀더 적당한 매수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를 작정했 다. 사실 월화는 팽노대로부터 은퇴하라는 충고를 들었을 때부터 마 음 속으로 이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했었다. 돈이라면 이미 여생을 풍족히 즐기고도 남을 정도로 벌었다. 게 다가 철혈무정 석무심의 요구대로 자객들도 수배해주었으니 이제 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무림맹의 눈길이 그녀에게 붙었다는 것이다. 특히 끈질기기로 이름난 귀견수(鬼見手) 조중의 감시망에 걸린 이상 그녀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남의 손에 달 린 것이다. 지금도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조리, 하다 못해 그녀가 지금 까지 은밀히 감추어온 지난날의 과거까지도 파헤쳐져 조중의 귀로 들어가고 있었다. 팽노대(彭老大) 역시 월화가 돌아간 이후로 웬지 마음이 편치 못 했다. 특히 이틀 전 월화로부터 모든 일이 잘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몇 장의 은표가 수고비조로 도착했을 때는 정체모를 이 불안감이 한층 더 심해졌다. 그러나 날짜가 다시 며칠 경과되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자 그의 불안도 차츰 멀어져 갔다. 전단강(錢塘江)의 넓은 강줄기 위로 달이 떠올랐다. 화사한 은빛의 월광이 어둠을 환히 밝혔다. 오늘 밤 팽노대는 자신의 배에서 손님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벌 이고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명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하는 것은 그의 사업을 위한 면도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과시욕의 수단이기도 했 다. 비천한 백정(白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달리 과시욕이 강 했던 것이다. 이경(二更) 무렵이 되자 연회는 최고조에 달했다. 조그만 나룻배들이 부지런히 범선과 나룻터를 왔다갔다 하며 손 님들을 실어나르고 연회장에는 산해진미와 진귀한 술로 가득했다. 갑판에서는 특별히 초청된 가무단이 화려한 공연을 벌이고 있고 그 앞에는 오십여 명의 손님들이 모여 있었다. 팽노대는 손님들 사이를 돌아 다니며 분위기를 북돋았다. 오늘 밤의 손님들 중에는 관부의 인물도 있고 대상인도 있었으며 몇몇 강호의 거물들도 눈에 띄었다. 온갖 부류의 명사들이 뒤섞인 연회는 팽노대의 기분을 즐겁게 했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교우 관계는 팽노대의 사업에도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그저 마시고 웃고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삼경(三更)이 가까워질 무렵 팽노대는 작은 나룻배에서 자신의 범선으로 옮겨 타는 한 사나이를 발견했다. 나이는 삼십 세 가량이었는데 혈색이 아주 좋아 보이는 장사꾼 차림의 인물이었다. 그의 몸매는 호히호리해보일 정도로 날렵했지만 반면 어깨는 아 주 넓고, 눈꼬리가 약간 아래로 쳐져서 인심 좋은 사람으로 보였 다. 팽노대는 이 사나이가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팽노대는 항상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나이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사나이는 팽노대가 곧 자신을 찾아올 것을 확신한 듯 그에게는 일별도 하지 않고 선실로 내려갔다. 2 잠시 후, 팽노대는 손님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연회장을 빠져 나 왔다. 그는 사닥다리를 타고 갑판 아래 선실로 내려갔다. 그를 늘 만나던 선실의 문 앞에 도착한 팽노대는 숨을 한 번 깊 숙이 들이마신 후 문을 열었다. 그 손님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인인 팽노 대가 들어왔지만 손님은 모른 체하고 느릿하게 술을 마셨다. 빈 술잔이 탁자에 놓여지자 손님은 비로소 시선을 팽노대에게 돌렸다. {팽노대!} 팽노대는 빙그레 웃었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팽노대가 사람좋게 웃어보였지만 손님의 입가에는 반대로 서늘 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얼간이 같은 행동을 하다니 정말 놀랍 소.} 냉혹한 눈빛을 흘리며 손님은 천천히 일어서더니 가벼운 걸음으 로 팽노대 앞에 와서 섰다. 그 사나이의 손이 채찍처럼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뻗어왔지만 팽노대는 태연히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하얀 여인의 옥수처럼 길고 수려한 손가락이 목덜미를 가볍게 만져도 팽노대는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언젠가는 이 손으로 당신을 죽이게 될거요.} 미소를 잃지 않는 팽노대의 그 모습에 손님은 입꼬리를 실룩이 더니 손을 거두며 말했다. {당신은 이 날까지 단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팽노대 당신이 이런 얼간이 같은 짓을 하다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야.} 손님은 그대로 돌아서 다시 탁자 앞으로 가서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는 단숨에 그 독한 옥호춘(玉戶春)을 들이마셨다. {팽노대! 실수에 대한 대가는 치루어야지. 당신의 그 멍청한 짓 으로 인해 이번 일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내 반드시 이곳 으로 돌아와 끝장을 내주겠소.} {알았네. 충분히 각오가 되어있네!} 팽노대는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이 손님의 말에 한점의 의문도 갖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내뱉은 말 은 반드시 실행하는 인물이다. {븐명히 말해 두지만...} 손님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어쩌면 이번 실수의 뒷수습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렇지만 내가 한 경고는 기억해두는게 좋아!} {미안하네. 허나 그녀는 정말 좋은 여자였네.} 팽노대는 쓸쓸히 말했다. {하하! 이거야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군.} 팽노대의 말에 손님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문둥이한테라도 가랑이를 벌릴 그 화냥년이 좋은 여자라고? 하하! 정말 실망인데! 천하의 인마(人魔) 팽조께서 망령이 드셨나? 늙으막에 시궁창같은 계집에게 순정을 느끼시다니 말이야!} 팽노대는 손님의 조롱 섞인 어조에 소태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손님의 비난과 조롱에 항변할 방법이 없었다. 그날 팽노대는 월화가 돌아간 후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월 화의 교태와 애원에 혹해서 눈앞에 있는 이 인물을 동원함에 있어 지켜야할 규칙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이 손님이 당연히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해 올 것을 그는 각오하고 있었다. {우린 상호간의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이 있었는데 당신은 그것 을 깨뜨렸소.} 손님은 다시 냉혹한 어조가 되며 술을 따랐다. {우리들의 일에서는 실수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목숨으로 보 상해야 돼. 나도 언젠가 실수를 하는 날에는 단단한 보상을 받게 되겠지.} 그의 단호한 말에 팽노대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당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쪽은 흰머리가 나기 전에 손을 떼 고 싶다는 것이지. 실수를 범하기 전에 말이오.} 손님은 술의 향기를 음미하는 듯 코를 술잔에 가까이 했다. {이번 일만 끝이 나면 나는 한가롭게 지낼 수 있지. 여전히 분주 한 당신과는 다르게 말이오. 나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 뿐 이지. 헌데 그것이 좋지 않단 말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무감동한 시선으로 팽노대를 쳐다보았다. 일점 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그 냉혹무비한 시선은 흡사 냉혈의 독사 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 눈빛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한 위기와 역경을 극복해온 인마 팽조조차도 섬뜩한 오한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철두철미한 당신이 우리사이의 사업에 다른 사람을 끼 어 넣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실수였지. 내 자신의...!} 손님의 추궁에 팽노대는 힘없이 대답했다.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지. 얼간이처럼 말이야.} 손님도 냉소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랬네. 정말 내가 눈에 무어가 쒸웠던 게야!} 팽노대는 손님의 비난에 동의했다. 그 자신도 손님의 말대로라고 믿고 있었다. 분명히 이 손님은 모든 것을 조사했을 것이다. 그는 어줍잖게 속 이려고 해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3 팽노대도 이번 일의 사술에 또 하나의 고리인 월화가 존재한다 는 것을 이 무서운 인물이 알아차릴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팽노대가 월화를 도와준, 즉 비밀보장이란 면에 있어서 범한 실 수는 월화가 간절히 그를 필요로 했고 또 팽노대는 미처 모충의 사건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구차한 설명은 해봐야 오히려 자신의 실수를 더 욱 커지게 할 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다른 방법으로 부딪쳐 봐 야 한다. {하여간 큰 일거리를 달라고 했던 것은 잊지 말게! 어쨌든 이번 일은 자네에게도 좋은 기회였으며, 그것을 월화가 가져왔던 것이 네.} [그녀에게 돈을 주어셔 적당히 따돌릴 수도 있었소.] 하지만 손님은 팽노대의 어줍잖은 변명따위는 일소에 부쳐버렸 다. [당신의 그 노쇠한 머리가, 젊은 계집에 대한 추악한 욕정이 얼 토당토 않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오.] 손님의 신랄한 비판에 팽노대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 다. {노부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게나! 자네도 언젠가 실수를 범할 날 이 있을 걸세.}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하겠지.} 손님은 냉랭히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지. 그 일을 위해서 산더미 같이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인가?} 팽노대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월화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볼 작정이오. 그리고 나서 상태를 살 펴봐야지.} {그녀를 해치지 말게.} 팽노대는 노기를 참으며 말했다. {자네의 비밀이 드러날 정도가 아니면 목숨만은 살려 주도록 하 게나.} 하지만 손님은 대답할 뜻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는 의자에 편안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에 잠긴 듯했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그는 기댔던 의자에서 일어서 면서 눈을 떴다. {팽노대, 당신은 늙었소.} 손님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존경하오. 이 일에 월화라는 얼간이 창부 를 끼여들게 했다는 것은 실로 유감이오.} {....} 팽노대는 굴욕감에 앞서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어쨌든 이 승 냥이같은 친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거나 할 작정은 아닌 것 이다. {그녀는 석무심이 협박에 어쩔수 없이 당신에게 도움을 청한 것 이오. 당신은 그녀의 썩어빠진 몸뚱아리에 혹해서 무림맹에 맛있는 뼈다귀를 던져 주고 말았소.} 손님은 천천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를 어떻게 할지 지금은 모르겠소. 하지만 만일에 그녀가 나 를 위험한 지경에 몰아넣는다면 내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겠소.} 단호한 그의 말에 실린 뜻은 너무도 분명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이 위험한 인물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냉혹한 짓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팽노대는 손님이 나간 다음에도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월화에게 위험을 알려 주고 싶었지만 결국 상대에 대한 공포가 그에게 침묵을 명령했다. 날씨가 화창한 사월 어느날의 축시(丑時) 무렵, 관복(官服)을 입 은 삼십대의 관인이 월화루에 들어섰다. 약간 마른 얼굴에 적당히 구레나룻을 기른 이 인물은 당삼관(唐 三觀)이란 이름을 지닌 항주성 형부(刑部) 소속의 포리(捕吏)였다. 그는 이 며칠 동안 일어난 몇 건의 살인사건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거기에다 무림맹의 감찰전 소속 무림인들이 요근래 부쩍 눈에 많이 뜨이고 월화루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자 곧 조사를 나온 것이었다. 월화루는 아침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당삼관은 이내 월화의 요염한 자태를 감상할 수 있었다. 전에도 몇 번 그녀의 자태를 보기는 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 이었다. 사실 월화루의 술값은 다른 곳보다 곱절이나 비싸다. 평소라면 형부 포리의 박봉 수준으로는 월화의 접대를 받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당삼관은 내심 월화의 미색에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따라 자신 의 마누라가 그렇게 추물처럼 생각이 들 수 없었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는데 무슨 일이신가요?} 사내를 은근히 유혹하는 윤기도는 월화의 음성에 당삼관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별 것은 아닙니다.} 급히 대답을 하며 다시 한 번 그녀의 자태를 살폈다. (염병할, 지독히 예쁘군. 이런 여인이라면 단 한 번 품고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겠다.) 내심 월화의 자태에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당삼관이었다. 4 산전수전 다 겪은 월화가 당삼관의 그같은 응큼한 속내를 못 알 아챌 리 없다. 그녀의 표정에 일순 불쾌한 빛이 스쳤다. 평소라면 이런 작자는 상대조차도 않았을 월화였다. 하지만 그래 도 상대는 관부의 인물이다. 게다가 일전 모충의 일로 인해 마음이 불안해진 그녀는 억지로 좋은 얼굴을 꾸미며 당삼관에게 말했다. {아시다 시피 아직 문을 열 시간이 아니라서... 별다른 용무가 없 으시다면 돌아가 주세요.} {그게 저... 월화루를 내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부근의 건달 들에게 협박이라도 당한 것이 아닌가 해서....} 당삼관은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직분을 지키기 위해 무척 애쓰고 있었다. 월화는 그런 당삼관의 모습에 한숨을 돌리며 억지로 웃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어요.} 월화는 웃음을 멈추고 차분히 말했다. {제가 가게를 내놓은 것은 이 장사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예요. 그리고 개인 사정도 있고 해서...} 당삼관은 월화의 말에 충분히 공감을 가졌다. 종종 이런 일에 종 사하는 기녀들 중에도 좋은 사내를 만나 화류계에서 벗어나는 것 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저는 일이 있어서 들어가봐야겠어요.} 월화는 재빨리 몸을 돌리고 안으로 사라졌다. 당삼관은 이대로 돌아가기는 싫었지만 장본인은 사라졌으니 도 리가 없었다. 집사가 몇 푼의 돈을 집어 주면 헤헤거리는 것을 뒤로 하고 당 삼관은 월화루를 떠났다. 당삼관이 돌아가고 나자 월화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당삼관의 갑작스런 방문은 그녀의 긴장된 마음을 한층 더 고조 시켰다. 당삼관이라는 이 인물에 대해서는 그녀도 들어서 알고 있다. 항 주성 형부의 소속인 그는 치밀하면서도 끈덕진 면이 있는 인물이 다. 몇 번인가 술좌석에서 그의 이름을 들은 적도 있었다. 비록 관직 은 낮지만 무예가 높고 집념이 강한 탓에 항주성 일대의 녹림인들 이 그를 사갈시(蛇蝎視)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는 지난 수 년 이래로 이렇게 긴장과 불안에 떨기는 처음이 었다. 이런 저런 탓에 그녀는 그 날 오후에 월화루의 매입 건으로 찾 아온 손님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밝은 등잔 불빛 아래 앉은 이 사나이는 햇빛에 그을린 듯 거무 스름하면서도 살이 찐 듯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몸에는 고급스런 비단천을 두르고 있고 아랫배까지 제법 튀어나 온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제법 재력을 지닌 시골의 부자처럼 보였 다. {호호 어서 오세요 대인.} 월화는 요염한 미소를 띄우며 한껏 애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청해성(靑海省)애서 온 상인이라고 밝힌 이방춘(李方春) 이라는 이자는 월화의 자태에 넋을 빼앗겨 버렸는지 허둥지둥 몸 둘 바를 몰라했다. {허허! 정말 좋은 가게로군요.} 이방춘은 가게를 둘러보면서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희 가게는 이곳 항주에서는 최고의 주루랍 니다.} 월화는 요염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건물은 이 년 전에 새로 수리를 했고 기녀만도 칠십 명이나 돼 요. 거기에 일꾼까지 합치면 고용인이 이백 명을 넘는답니다.} {허어! 정말 굉장하군요.} 이방춘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좋은 주루랍니다. 항주성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기에는 더 없이 적격이예요.} 월화의 자화자찬에 이방춘은 헤벌레 해져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 같소이다. 그런데 그동안 장사를 하신 영업 장부를 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래야죠.} 적극적인 이방춘의 자세에 월화는 기쁜 듯이 외치며 걸음을 돌 렸다. {저를 따라 오세요. 장부는 내실에 있답니다.} 그녀는 생글거리며 서둘러서 내실을 향했다. (호호! 봉(鳳)이 제발로 굴러 들어왔구나. 보아하니 청해에서 제 법 돈을 벌어 지금은 중원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것이겠지. 만 일 흥정이 잘 안되면 내 몸으로라도 녹여버려야겠다!) 월화는 내심 뿌듯한 흥분을 누르며 내실로 들어갔다. 좀 무리한 가격을 불러 협상이 잘 안되더라도 한번 자신의 몸을 안게 해주면 만사형통일 것이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 시골 졸부에게 골치덩이인 월화루를 떠 넘겨야겠다고 다짐하는 월화였다. 5 월화는 이방춘을 자리에 앉게 하고는 자신의 비밀금고에서 몇권 의 장부를 꺼냈다. {이것이 지난 반 년 동안 매상을 기록한 장부예요.} 이방춘은 월화가 내민 장부를 건성으로 슬쩍슬쩍 훑어본 후 담 담히 말했다.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장부도 보여 주시겠소?} 월화의 눈에 의아로운 빛이 스쳤다. {다른 것이라면...?} {주루의 매상이 아닌 다른 것 말이오.} 이방춘의 목소리는 더 이상 대시진의 화려함에 들뜬 시골 졸부 의 어수룩한 것이 아니었다. 낮으막하나 듣는 사람의 숨통을 조이 는 듯한 섬뜩함이 배인 도살자(屠殺者)의 음성이었다. 이방춘의 그 표변(豹變)에 월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무....무슨 말이예요?} 놀라 더듬거리던 월화는 잠자코 그녀를 쏘아오는 한쌍의 서늘한 시선에 그만 심장이 오므라드는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 를 돌렸다. 굶주린 야수의 눈빛이 이러할까? 한 점의 생기도 보이지 않는 무심한 동공은 깊은 바다의 심연처럼 고요했다. 공포가 얼음덩어리처럼 목구멍을 메워오고 얼굴에도 그러한 흔 적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지난 몇 년동안 몇 가지 실용적인 무예를 수련해왔고, 웬 만한 고수 정도는 흔적없이 살해할 수 있는 교묘한 수법을 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방춘이라는 이 사나이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전혀 소 용이 없는 것이다. 그 짧은 사이에도 그녀는 몇 번인가 살수를 시전하려고 생각을 했지만 매번 사나이의 냉혹한 눈빛에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표정이라고 할 수 있 다. 지금 이 순간 월화의 나약함이 얼굴에서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이방춘, 아니 월화 자신의 중개로 고용된 제사(第四)의 자객 담 사(潭邪)는 이 여인을 살려둔다면 자신에게 막대한 위험이 닥쳐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여자를 다그쳐서 정보를 알아내기란 간단한 일이다. {당.... 당신은 누구예요?} 월화는 얼어붙은 듯한 목구멍을 억지로 쥐어짜내어 ㅁ물었다. 문득 담사의 입가에 특유의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조소하는 듯 한, 아니 비웃는 듯한 회색의 미소였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을텐데... 그렇지 않소 루 주?} 한 순간 월화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당신의 수고로 화룡전장(火龍錢莊)으로부터 황금 오천 냥 을 받은 사람이오.} 담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 당신이...?} 담사는 무표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예요? 내 역할은 당신을 그들 에게 소개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말이 그녀의 목구멍에서 술술 흘러나 왔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말하시오.} 담사는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세세한 부분까지 당신이 알고 있는 모두를!} 월화는 한참동안 열심히 지껄였다. 마치 말을 하므로써 이 정체 를 알 수 없는 사나이를 쫓아낼 수 있다는 듯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이야기함으로써 자기에게 내려질 판결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말했다. 담사는 의자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한 점의 표정도 없었다. 월화는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추천한 사람이 모두 사인(四人)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담사의 눈빛이 굳어 졌다. {네 사람?} {그래요. 당신과 또 다른 세 사람이예요.}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한 사람이 실패하더라도 남은 사람들이 계속 일을 할 수 있도 록 그들은 계획한것이예요. 그들은 사중(四重)으로 확실히 손을 쓸 것이예요.} 갑자기 그녀는 입을 다물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담사를 노려보았 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말을 당신에게 들려주고 있지요.} 월화는 뿔길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이 일에 관해서는 저보다도 당신이 더 상세히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담사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조금은 알고 있소. 그렇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모 두 말해 주시오. 당신의 역할도...!} {나는 단지 중간에서 소개를 했을 뿐...} {계속하시오.} 담사의 이 말은 명령과 위협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가 문득 공포감이 다시 살아나고 말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 나왔다. 6 월화의 말은 담사를 놀라게 했다. 살인자는 혼자가 아니라 또 다 른 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모충의 입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정보가 무림맹으로 새 어 나갔을 것이다. 갑자기 내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월화의 말이 모두 끝이 난 것이 었다. {그것 뿐이오?} 담사가 물었다. {그래요. 이제 내가 아는 것은 모두다 이야기를 했어요.} 월화의 손이 갑자기 말과 동시에 흔들렸다. 쉬이잇! 순간 비릿한 내음을 풍기는 붉은 연기와 더불어 녹색빛을 띤 세 가닥의 강침(鋼針)이 쏘아왔다. 강침의 속도는 빛살처럼 빨랐다. 게다가 월화와 담사의 거리는 불과 반 장도 채 되지 않는데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살수였다. 누구라도 이 한수의 암수는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아니 월화는 그렇게 확신했다. 헌데 담사는 눈앞으로 날아드는 그 강침들을 보면서도 태연했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른다는 듯이... 그러나 월화가 던진 강침이 막 그의 얼굴에 박히려는 찰나였다. 콰당! 갑자기 담사의 몸은 앉아있던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로 인해 월화의 회심에 찬 살수는 허망하게 무위로 변해 버렸 다. 파팍! 담사를 지나친 세자루의 강침은 창틀에 박혀버렸고, 그 직후 담 사의 몸은 족제비처럼 날렵하게 튀어올라 월화의 시야로 확 달려 들었다. [크륵!] 들부들 떨리는 입술 사이로 헛바람이 새는 듯한 야릇한 소리가 빠져나왔다. 공포로 두눈을 부릅뜬 월화의 가녀린 목을 여자의 그것같이 새 하얗고 긴 손가락이 틀어쥐고 있었다. {홍살독연(紅煞毒煙)에 우모강침(牛毛鋼針)이라. 제법 수법은 좋 았으나 암습이라면 내가 전문이지.} 담사는 냉혹하게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월화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핏기 바랜 입술을 벌렸지만 종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 개를 푹 꺾었다. 숱한 사내를 유혹하여 진을 빼먹었던 탐스런 몸뚱이는 이제 다 만 혼백이 떠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었다. 항주의 홍등가를 휘어잡고 있던 밤의 요화(妖花) 월화는 그렇게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담사는 추하게 무너져내린 월화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방구석에 던져버렸다. 방금 한 사람의 생명을 뺏고도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월화의 시신을 팽개친 그는 잠시 느릿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어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내실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침착했다. 흡사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 럼 여유가 있었다. 그는 월화의 비밀금고에 들어 있는 것을 가능한 많이 챙겼다. 부 피와 무게가 나가는 금붙이나 보석들을 제외했는데도 황금으로 일 만냥 가량의 전표가 담사의 수중에 들어왔다. {위험을 가중시킨 대가로 받아두겠다. 또 이번 일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당분간 이곳의 일은 강도사건으로 꾸밀 필요도 있지.} 나지막히 독백하며 그는 적당히 내실을 어질렀다. 누가 봐도 강 도가 들어와 월화를 목졸라 죽이고 돈을 훔쳐간 것으로 여길 것이 다. 완전히 해야 할 일이 끝나자 담사는 허리를 쭉 세웠다. 잠시 동안 방 안을 다시 한 번 점검한 연후 그는 태연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사가 월화의 내실에서 가게로 나오자 월화루의 집사가 재빨리 달려왔다. {헤헤 안녕히 가십시오.} 담사는 인심 좋은 웃음을 지으며 태연히 밖으로 나갔다. {표정으로 보아 흥정이 잘된 같은데...} 집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급히 내실로 달려갔다. 자신의 목줄 이 달려 있는 월화루의 앞날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第 九 章 始作되는 追踪 1 월화루를 떠나온 담사는 느릿하게 시진으로 들어섰다. 한 번도 뒤도 돌아봄 없이 천천히 주위를 구경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항주의 풍물을 구경하는 유람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와 십 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허름한 장삼을 입은 장한 이 가끔 그의 뒷모습을 살피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담사의 신형이 한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멀찌감치 뒤 를 따르고 있던 장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장한은 건물 앞에 도착하자 잠시 머뭇거렸다. 건물의 처마 밑에는 장전원(場錢院)이란 간판이 붙었는데, 이곳 은 항주성에서 유명한 도박장의 하나였다. 담사는 도박장에 들어서자 주위를 힐끗 둘러본 후 한쪽에 문이 있는 곳으로 태연히 열고 들어갔다. 도박장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도박에 정신이 팔려 그가 들어온 것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문안으로 들어사자 그 안은 변소였다. 담사는 네 개의 문 중 제 일 안쪽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담사를 뒤따르던 장한은 도박장은 둘러보면서 연신 눈살을 찌푸 렸다. 잠깐 동안 살펴보았지만 그가 찾는 인물을 그 어디에도 보이 지 않았던 것이다. 초조해진 그는 허둥지둥 도박장을 샅샅이 살폈다. 도박장은 거의 이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곳이었다. 거기다 가 이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층도 대충 살펴본 장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급히 다시 내려왔 다. 그때 구석에 자리한 변소의 문이 열리고 백발에 등이 구부러진 칠순 가량의 추괴한 노인이 뒤뚱거리며 나왔다. 한 순간 장한의 시선이 그 노인에게도 향했지만 이내 그냥 무심 히 스쳐지나갔다. 추괴한 노인은 연신 투덜거리며 도박장 밖으로 나갔다. [제길.... 오늘도 돈만 잃다니.... 에이그.... 돌아가면 마누라에게 무 어라고 변명하지...] 아마도 제법 돈을 잃은 모양이다. 헌데 그 노인은 도박장 밖으로 나오자 마자 마침 서둘러 안으로 들어오려던 한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빛 문사의를 입은 이 사나이는 바로 귀견수 조중의 세 심복 중 한명인 사공표였다. 월화의 내실로 들어서던 월화루의 집사와 월화의 호위무사겸 살 수이기도 한 전삼(田三)은 멍청해졌다. 어지럽게 널려진 방 안에는 목이 부러진 월화의 시신이 아무렇 게나 누워 있었던 것이다. 자객으로서 숱한 죽음을 목격해온 전삼은 그래도 어느 정도 침 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인 집사의 놀라움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 이었다. {살인이다 살인...!} 집사는 황망히 뛰쳐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살인이다! 주인마님이 괴한에게 죽었다..} 집사의 비명은 이제 막 흥청거리기 시작하던 월화루를 벌컥 뒤 집어 놓았다. 월화루에서 멀지 않은 찻집에서 월화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사공표는 깜짝 놀랐다. 월화가 죽다니... 사공표는 놀라움과 동시에 머리 끝까지 노화가 치솟아 올랐다. [차단하라!] 그의 손이 들림과 동시에, 사공표의 신형은 무섭게 월화로로 돌 진했다. 그러자, 갑자기 사방 곳곳에서 흑색(黑色) 경장에 역시 검은 색 의 두건(頭巾)을 맨 험상궃은 장한들이 튀어나오며 월화루 일대를 완전히 차단했다. 이들의 행동은 자로 잰 듯이 절도있고 재빨랐다. 길가던 행인들이나 월화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살벌한 기세에 놀라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흑색 경장을 걸친 이 인물들의 가슴에 금빛 수실로 새겨 진 살(殺)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모두 겁에 질려 슬그머니 물러서 고 말았다. 2 -흑건추혼대(黑巾追魂隊)! 무림맹 감찰전 소속인 악명 높은 대외척살단(對外刺殺團)! 중원의 하늘 아래에서 강호의 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이 들을 모르랴? 하다 못해 삼척동자라도 흑건추혼대의 용맹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마도인(魔道人)에게는 공포의 사신이요 백도(白道)에서는 경원의 대상이었다. 흑건추혼대는 모두 일백 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하나가 고 절한 무예와 무림맹의 노선에 절대 복종하는 골수분자들로 이루어 져 있었다. 일체의 인간적인 감정은 배제되도록 지옥의 수련을 거친 그들 흑건추혼대의 솜씨는 능히 단독으로 일파의 지존을 척살할 수 있 을 정도였다. 하지만 흑건추혼대의 진정한 무서움은 그들의 합격술(合擊術)에 있다. 똑같은 수련과정을 거친 탓에 그들은 심령상 서로 통하고 있 으며 그 덕분에 둘이 모이면 넷의 힘을 발휘하고 넷이 모이면 여 덟의 위력을 구사한다. 당금무림의 어떤 고수라고 해도 네 사람의 흑건추혼대를 단신으 로 상대해서는 살아날 수가 없다고 알려질 정도였다. 좀처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무서운 무림맹의 척살 조가 한꺼번에 이십 인이나 나타났으니 항주성 전체가 들썩인 것 도 무리가 아니었다. 차앙! 월화의 경호담당인 전삼은 미친 듯이 내실로 달려오는 사공표를 발견하고 검을 뽑았다. 사공표의 무서운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보 인 무의식의 반응이었다. [비켜라!] 사공표는 전삼의 검이 쏘아오자 노호성을 지르며 바른손을 앞으 로 뻗은 동시에 반월을 그렸다. 터어엉! 검과 손이 부딪치자 검은 무서운 기운에 퉁기고 한 가닥 암경(暗 勁)이 전삼의 가슴을 때렸다. 전삼은 갑자기 심장이 턱 막히는 둔통을 느끼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그 방면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은 전삼이건만 사공 표의 단 일격에 불귀고혼이 되어버린 것이다. 철비단수(鐵臂丹手)-! 사공표의 독문절기(獨門絶技)인 철비단수의 무서운 위력이었다. 도문(道門)의 비전수법인 철비단수는 도검을 부수고 강기도 바스러 뜨린다. 월화의 시신을 살피는 사공표의 입에서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이 새어나왔다. {휴! 이럴 수가!} 누구보다도 월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하늘이 무 너지는 것만 같았다. {월화와 마지막으로 만난 자를 쫓아간 자는 누군가?} 어느 새 다가들어온 장한을 보고 사공표는 외쳤다. {포진(浦陣)입니다. 그는 표적을 다라 도박장으로 들어간 것 같 습니다.} 장한은 빠른 어조로 대답했다. {나도 그쪽으로 가겠다. 이곳을 지켜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공표는 비학충천(飛鶴沖天)의 신법으로 화 살처럼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같은 일련의 상황이 있은 후 사공표는 이곳 도박장까지 찾아 온 것이다. 얼굴에 가득 초조한 빛을 띠운 사공표는 비틀거리며 도박장에서 걸어나오는 이 추괴한 노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황황히 도박장 안 으로 사라졌다. 노인은 연신 무어라 궁시렁거리며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사공표는 도박장 안에서 허둥거리고 있는 포진을 발견하자 버럭 외쳤다. {포진______!} 담사의 뒤를 쫓아 도박장까지 들어온 포진이란 장한은 해연히 놀라며 급히 대답했다. {예! 사공당주(史公堂主)님!} {그 자는 어디에 있나?} 이를 갈며 묻는 사공표의 살벌한 기세에 포진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주츰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당주님.} 포진의 표정을 살핀 사공표는 이미 일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얼간이 같은 놈! 그 자를 놓치다니....} 분을 참기 어려운 듯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생각같아서는 앞에 있는 장한을 일장에 때려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 다. {포진, 어떻게 된 일인지 전후 사정을 말해 봐라!} 포진은 붉어진 얼굴로 자신이 당한 일을 설명했다. 곧이어 포진과 사공표는 도박장을 모조리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행적은 도박장에서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이 다. 사공표는 참담한 표정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조중의 표정 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이 일로 인해 그 동안 쌓아 올린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 변 할 것이다. 백주대낮에 그들이 주야로 감시하던 월화를 죽이고 범인은 유유 히 사라졌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사공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은 자신의 손으로 꼭 잡겠다는 맹세를 거듭 반복했다. 3 언제나처럼 사람좋아 보이는 인상의 귀견수(鬼見手) 조중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무림맹 절강지부의 지하밀실은 숨막히는 정적에 싸여 있었다. 조중의 맞은 편에 앉은 사공표와 자운유는 초췌한 얼굴로 고개 를 푹 숙이고 있었다. 흡사 죄지은 사람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 다. 월화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조중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벌써 한 시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 수록 사공표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지 만, 그는 미처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 그대로 꼼짝없이 앉아 있 었다. 자운유가 더 이상 침묵을 견딜 수 없는지 고개를 들었다. {부전주님!} 그는 나지막이 조중을 불렀다. 자신의 말에 조중의 눈까풀이 올 라가자 자운유는 침을 삼켰다. {월화의 죽음으로 일이 어렵게 되었지만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 다고 생각합니다.} 조중은 아무런 말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장차수가 지금 비마영(飛魔影)을 추적하고 있으며 월화의 수하 들을 모조리 잡았으니 곧 조그만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 다.} {운유, 자네가 그들에게서 무언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조중은 마치 어릿광대라도 보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자들은 쓰레기지.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썩어빠진 월화의 몸 뚱아리에 눈이 멀어 그년의 발바닥이나 핥던 쓰레기들이란 말이 야.} 조중은 조롱하듯이 말했다. {진짜는 모조리 빠져나가고 자네들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쓰레 기만 주워 온 것이지.} 말을 하면 할수록 노기가 치밀어 오르는지 그의 목소리는 격앙 되었다. {그 동안 조사한 정보로는 이일에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있어. 첫째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이라는 자가 두 달 전부터 은밀히 항주성 내에서 머물고 있었고, 둘째 월화에게 천갈(天蝎)이라 불리 우는 의문의 사나이가 가끔 그녀를 찾아왔다는 사실이야.} 자운유와 사공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사실이었다. {월화가 죽은 이상 나는 여기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총단 으로 돌아간다. 자네들이 이 두 가지 정보에 관해서 철저히 밝혀내 도록!} {...} [...!] 고개를 떨구고 있는 두 심복을 훑어보는 조중의 눈매가 싸늘하 게 빛났다. {잊지 마라. 한 번 실수는 있을 수 있지만 두 번째는 없다는 것 을...!} 사공표와 자운유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러나갔다. 그들이 나가 자 조중은 두 눈을 가늘게 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가 심 사숙고할 때 나타나는 자세였다. 조중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밀실의 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여인처럼 가냘프게 생긴 미 소년(美少年)이 들어왔다. 그 미소년을 본 조중은 절로 쓴 웃음을 지었다. {어서오시게 황보소저!} 미소년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어때요. 그들보다 내가 훨씬 낫지 않아요?} 어리광을 부리는 듯이 말하는 미소년의 말에 조중은 빙그레 웃 었다. {허허! 그래, 황보소저는 어떻게 해서 철혈무정과 천갈이라는 이 름을 들을 수 있었지.} {별 것 아니예요. 그것은....} 미소년은 양 뺨에 귀여운 보조개를 지으며 웃었다. {개방의 항주분타 황룡개를 닥달했어요. 처음에는 모른 척 하닥 내가 물고늘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말을 했어요.} 순간 조중은 자신도 모르게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흥! 왜 웃어요, 기분 나쁘게...?} 뾰족한 미소년의 교성에 조중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 그냥 우수운 일이 생각나서 그만....} 미소년이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조중은 말을 멈추고 급히 일어섰다. {어쨌든 급히 가 볼 때가 있으니까 우선 나가지!} 조중은 다른 말이 나오기가 무섭다는 듯이 총총히 밀실을 빠져 나갔다. 미소년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조중은 통로를 따라 걸으며 내심 쓴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뒤를 따로오는 미소년은 다름아닌 전날 공동파의 장문 인 진산도인을 쫓아보낸 장본인이었다. 이름은 황보가혜(皇甫佳慧), 우내삼기의 둘째인 태허천존(太虛天尊) 황보승(皇甫承)의 무남독 녀로 그녀는 일찌기 부모의 슬하를 떠나 봉심도(鳳心島)에서 무술 을 배우다가 두 달전에 무림맹으로 돌아왔다. 조중은 그녀에 관하여 자세히 아는 바는 없었으나 그가 전날 본 맹에 들렀을때 감찰전주의 부탁과 그녀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온 것이다. 협박이란 다름이 아니고 그가 감찰전주와 상의 도중 그녀에게 항주성 사건을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가 만일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 자신을 자신의 부친 에게 알리겠다는 공갈에 어쩔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감철전주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바람에 함께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그녀는 철혈무정과 천갈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가져왔던 것이다. 허나 월화가 죽고 어느 정도 사건이 밝혀진 이상 이 일을 더 이 상 감출 수는 없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삼태상에게 모든 것 을 보고하고 자객들을 찾아 내야만 한다. 4 태산(泰山)-! 중원의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써 동악(東嶽)으로 불리는 태산은 산세의 웅장함과 수려함이 가히 천하일절이었다. 태산 비류봉(飛流峯) 기슭에 위치한 상가현(床家縣), 백여 호 가량의 조그만 마을은 반 이상이 주루나 객점으로 형성 되어 있었다. 원래 상가현은 삼십 년 전만 해도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것이 멀지 않은 곳에 무림맹의 총단(總壇)이 세워짐으로 해서 단숨 에 대처의 시진 못지 않은 번화한 마을로 번성하게 된 것이다. 상가현의 서쪽, 태산을 등에 지고 거의 삼십여리에 걸쳐 세워진 거대한 장원이 하나 있엇다. 곳곳에 즐비한 고루거각과 건물로 보아 장원이라기보다 일국의 도성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무림맹(武林盟)!> 이 거대한 장원이 바로 당금 무림에서 최대최강의 세력으로 성 세(盛勢)를 드날리고 있는 강호의 패자(覇者) 무림맹의 총본산(總本 山)이었다. 초 여름으로 접어드는 푸근한 날씨건만 무림맹의 총단은 태산의 산중에 자리한 탓에 아침저녁으로 아직은 쌀쌀한 찬바람이 불어왔 다. 조중은 총단에 도착하자 곧장 감찰전으로 뛰어들어갔다. -감찰전주(監察殿主) 막대승(莫大昇), 강호에서는 진천쾌수(震天快手)라고도 불리우는 무림맹의 실력자 중의 실력자다. 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 막대승은 깜짝 놀랐다. {어서오게 부전주!} {전주님!} 막대승은 조중의 목소리가 조용했으나 말투는 무섭게 굳어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중의 표정을 살펴본 막대승은 그가 지금 필사적으로 치미는 화를 억제하느라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 렸다.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우선 앉게.} [고맙습니다!] 조중은 무너지듯 맞은편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감찰전을 맡고 있는 이 두 사람 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긴지는 오래였다. 조중은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고 문보다 무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그러나 막대승은 지모(智謀)로써 오늘 날의 지위까지 올라온 철 저한 문사형의 인물이었다. 강호의 싸움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한 막대승은 일을 하는데 보 다 냉정하고 억제할 수 있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하 들에게 새삼 모든 일을 판단한 뒤에 행동을 하도록 요구했다. 반대로 조중은 경험과 직관을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말보다도 행동으로 어느 정도 사실에 입각하여 결정이 나면 실 천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성격은 물론 일에 접근해 가는 방법, 또 일을 파악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대립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그 일을 위기에 빠뜨리지 않도록 개인적 인 대립을 늘 피하려고 오랫동안 함께 일해 왔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고 있나?} 막대승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조중은 지그시 막대승을 응시하며 말했다. {보고서를 보셨을테니 이미 사건의 전말은 모두 알고 계실 테지 요?} 이제 육순을 바라보는 막대승은 밋밋한 미소를 띄웠다. {잘 알고 있네.} 조중의 관자놀이가 떨렸다. {말씀은 그것 뿐입니까?}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나, 조중!} 조중은 팔걸이를 지그시 움켜잡았다.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불덩어리 같은 울화를 참기는 어려웠다. {제 말의 뜻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신음하듯이 그는 말했다. {전주께서는 언제나 정확한 사실과 실증을 요구합니다. 좋습닏 다.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로는 우려가 명확한 사실로 드러났단 말 입니다.} 조중은 속이 타는지 입술을 축이며 계속 말했다. {철혈무정이 나타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두 명이 피살됐습니다. 모충도, 월화도 이제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무슨 말을 듣 고 싶나 하는 말씀을 하시렵니까?} 그는 양쪽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분노의 눈을 번쩍였다. {저는 분명히 전날 몇 가지 요구를 했습니다. 헌데 나의 요구는 하나도 이행치 않았습니다. 개방의 도움도, 오십 명을 보내달라고 한 흑건추혼대도 고작 이십 인밖에 보내주지 않았단 말입니다.} [진정하고 내말도 들어보게!] 막대승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조중은 지금까지 일의 심각성을 주장하며 몇 가지 요구를 했다. 그러나 막대승은 일의 중요함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 다. 무림맹의 창립되고 난 이후 수많은 도전을 받아왔고 그 중 수십 번의 암살도 시도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극단상황에 도달했던 적 은 없다. 무림맹의 힘과 방비는 동장철벽(銅藏鐵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다. 이제 조중이 무 엇을 포착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좋네, 나의 실수를 인정하지.} 조중의 눈빛이 약간 풀어졌다. {전주님, 이제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객은 최소한 삼 명 입니다. 더 있을지도 모르고..} 조중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는 행동으로 옮길 때입니다. 현재 자객들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 개방의 도움 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개방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삼태상의 재가 를 얻어야 하네. 그리고 현재 맹내는 소맹주의 혼사문제로 온통 신 경이 그쪽에 쏠려 있단 말일세.} 막대승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내가 이 일을 삼태상에게 설명을 해도 얼마나 먹혀 들어갈지 의문이야.} 조중은 이 말에 고소를 지었다. 5 삼태상(三太相)-! 즉 무림맹을 세운 우내삼기(宇內三奇)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미 무인으로써 더 이상이 없을 경지에 이른 그들 세 기인에게 있어서 자객이란 그저 하오문(下五門)의 삼류무사로 보일 뿐이다. 전에도 수차례 암습의 시도는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얼굴도 보지못하고 시신으로 변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자객 따위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 신들을 격하시키는 일이 될 뿐이다. {어쨌든간에 그 분들에게 이 일은 말을 해야되겠지.} 막대승은 힘없이 말했다. 조중은 초조한 기색으로 재빨리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개방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정입니 다.} {알겠네. 허나 너무 기대는 갖지 말게.} 막대승은 갑자기 전신에 피로가 엄습해 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나중에 다시 보세.} {알겠습니다. 그럼...} 조중은 가볍게 머리를 숙인 다음 말없이 돌아서 나갔다. 장차수는 악양(岳陽)에 도착했다. 그는 오랫 동안 무림맹 감찰전 소속으로 일해 오면서 무림맹에 반기를 드는 수많은 적들을 추적해왔다. 그 동안 몇 번의 공적도 있었지만 눈에 띠게 드러날만한 일을 아니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언젠가는 감찰전주의 지위에 올라 자신의 힘을 떨쳐보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다가, 감찰전의 일은 자신의 성격에 꼭 맞는 것이었다. 혼자서 일을 하는 첩자를 둘러싼 특수한 분위기, 한 마리 이리같 이 어둠 속을 헤치며 적을 쫓고 척살하는 일을 언제나 그의 피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가까스로 이러한 일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이러한 일이 많았지만 자신이 생각할 때 이런 일은 전날의 일과는 질적으로 틀렸다. 그리고, 이번의 일에는 그가 애타게 바라는 요소가 모두 들어 있 었다. 악양성에 도착해서 그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이 순간부 터 만일 도움이 필요해서 누구에게 연락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취 하는가 하는 것은 그가 결정해야 한다. 이번 임무에는 무서울 정도로 대담성이 필요했으며 또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자객을 뒤쫓는다는 것은 생명을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자객이 비마영(飛魔影)일 때는 더욱 그랬다. 정면으로 승부를 한다면 승산이 그에게 있지만 상대는 암습을 위주로 하는 전문적인 자객이다. 막대승은 담담한 표정으로 조중을 응시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중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막대승이 삼태상을 만나러 간 후 조 중은 벌써 두 시진 동안 꼼짝도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다. {개방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게 되었네. 하지만 흑건추혼대는 이 십 인 이상 쓸 수 없네.} 조중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졌다. {전주님, 상대는 보통 자객이 아닙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 란 말입니다.} 따지듯이 말하자 막대승의 표정이 음울해졌다. {그것 뿐만 아니네. 이 일은 감찰전 단독으로 처리하라는 말씀이 계셨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조중은 한동안 막연히 막대승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일은 감찰전의 인원만으로는 해결하기에 인력이 너무나 적었 다. 자객이란 일정한 거처나 내력은 거의 장막에 싸여 있다. 한 마디 로 바람 같은 인물이다. 그것은 한 명도 아니고 최소한 삼 인은 되은데 오백 명도 되지 않는 감찰전의 인력으로는 온 중원천지를 뒤지기에는 불가능한 일 이 아닌가? 허나 막대승의 표정을 살펴본 순간, 조중은 더 이상 말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막대승에 관하여 잘 알고 있 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조중으로서는 그 말 한 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미 일이 결정 된 이상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것은 서로에게 피곤한 일이 될 것 이다. 조중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자네는 황보소저를 잘 구슬러 볼 수 있을 것이네.} 순간 문 앞에 선 조중의 눈빛이 환해졌다. 태허천존의 무남독녀 황보가혜-! 그녀라면 무언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항주성에서 보여준 그녀의 실력은 예사롭지 않은 데다, 그녀는 삼테상중 한명인 태허천존 정대선생의 무남독녀가 아닌가?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녀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조중으로서는 생명을 바쳐도 모자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감찰전주가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할 리는 만무한 것, 조중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第 十 章 쫓는 者, 쫓기는 者 1 손씨(孫氏) 모녀는 일 년 만에 돌아온 자신들의 은인을 극진히 대접했다. 삼 년 전, 손부인(孫婦人)은 돌림병에 남편을 잃고 친정집으로 돌아가다가 녹림도(綠林盜)들의 마수에 걸려 그자들의 산채로 끌려 가서 갖은 수모를 당했었다. 얼마 안되는 재물을 빼앗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낮에는 그자들 을 위해 밥과 빨래를 해야했으며 밤이 되면 수십명의 사내들에게 돌아가며 시달려야했다. 평범한 아낙이던 손부인에게 산채에서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 다. 물론 산채에는 다른 여인들도 여럿 있었지만 상당한 미모를 지 닌 손부인은 산적들에게 단연 인기였기 때문이다. 노예와도 같은 중노동에 시도때도 없이 자행되는 겁탈에 그녀는 무참히 시들어갔다. 그렇게 이년여를 지낸 어느날 손부인은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산채에서 탈출하고 말았다. 목숨을 건 이 탈출은 그러나 손부인 자 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산채로 끌려갈 당시 열살이 된 딸이 있었다. 헌데 이 년이 지나 제법 소녀 티를 내게 된 딸을 녹림도들이 예사롭지 않 게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자들의 음험한 시선에서 손부인은 이대로 가면 딸이 자신과 똑같은 신세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딸과 함께 산채를 도망쳐나온 것이다. 다행히 산적들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오기는 했으나 막상 세상에 다시 나오니 그들 모녀의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정집은 벌써 일 년 전 어디론가 이사를 가 버렸고, 그들 모녀 를 반기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돌림병에 죽은 전 남편은 가난한 선비였던 탓에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침내 그들 모녀는 굶주림에 지쳐 홍등가로 갔다. 기왕에 정조 를 잃은 몸, 손부인은 자신의 육체를 팔아서라도 연명할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병들고 거지 같은 모습이 된 그들 모녀를 받아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꼼짝없이 굶어죽는 일만이 남았다. 바로 그때, 그들 모녀에게 손길을 뻗친 인물이 있었다. 그는 하복생(下卜生)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사나이였다. 하복생은 가엾은 손씨모녀에게 따뜻한 음식을 사주었고, 평생을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태산(泰山)에서 멀지 않은 제남성(齊南 城) 외곽에 다점(茶店)을 차려 주기까지 했다. 한 달 동안 그는 손씨 모녀를 도와 가게를 운영했고, 그 후 아무 런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난 지금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손부인 은 죽었던 남편이 다시 돌아온 듯 그를 반겼다. 이제 삼십대 중반인 손부인은 하복생보다 십여살이나 연상이었 다. 게다가 무뚝뚝한 하복생의 성격 탓에 두 사람 사이에는 별반 대화도 없엇다. 그러나 손부인은 이미 일년전부터 이 연하의 잔재미 없는사내를 마음 속으로 자신의 새로운 남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육체관계도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이 없는 손부인은 자신의 몸으로라도 하복생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했고, 인의도덕따위와는 거리가 있는 성격인 하복생은 그것을 마 다하지 않았다. 삼십대 중반의 난숙한 손부인의 육체와 그녀의 헌신적인 봉사로 하복생은 더 할 수 없이 깊은 만족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손부인 역시 이년에 걸친 녹림산채에서의 수난으로 만신 창이가 된 자신의 육신이 하복생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시 여자의 기쁨을 되찾게 된 것을 깨닫고 감격해했다. 비록 나이 차이는 나고 서로 살아온 환경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돌아온 하복생은 일년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약간 초췌 한 몰골에 허름한 장삼, 어디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나이 였다. 일년전 하복생이 쓰던 조그만 방은 그 동안에도 깨끗이 관리되 어 있었다. 나무침상 하나와 요와 이불, 탁자와 의자하나가 전부였지만 이 소박한 방은 하복생에게 더할 수 없는 포근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하복생은 이틀 동안 꼼짝도 않고 방 안에 틀어박 혀 있었다. 가끔 손부인과 그녀의 열세살 난 딸 손아유(孫雅柔)가 들어왔지 만 그 외에는 아무도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하복생-! 그는 바로 항주성에 나타났던 제 사의 자객 담사(潭邪)의 또 다 른 변신이었다. 담사처럼 자객이란 위험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누구도 모 르는 은신처가 필요했다. 담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에게도 중원 곳곳에 몇 개의 은신처 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손씨 모녀가 운영하는 이 다점이었다. 사실 그가 손씨 모녀를 도와준 것은 인정이나 동정하는 마음으 로 보살펴 준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게는 은신처가 필요했고 손씨모녀는 그것을 위해 우연 히 만난 것 뿐이다. 어릴 때부터 세상의 비정함 속에 삶과 투쟁을 해온 그에게는 인 간으로서 사랑이니 인정이니 하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살인를 위한 냉철한 이성과 잔혹한 독심, 그리고 계산된 행동만 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이런 그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산동성(山東省)의 성도인 이곳 제남성(齊南城)의 외곽에 자리한 손씨모녀의 다점은 담사의 여러 은신처중 무림맹이 있는 태산(泰 山)과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도 최적지이기에 담사는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곳이라면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가 손부인의 남편으로 대상(隊商)들을 따라 다니는 장사꾼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손씨 모녀도 그 를 그렇게 알고 있지만...! 2 침상에서 일어난 하복생은 전신을 가만히 움직여 본 다음 의자 에 앉아 김이 다 빠진 차를 단숨에 들이 마셨다. 지난 이틀 동안 그는 자신이 할 일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을 완 전히 세웠다. 이번 암살에 동원된 네 명의 자객들! 자신을 포함한 이 네 명은 모두가 이 방면에서는 최고로 알려진 암살의 전문가들이며 각자가 한 가지 표적을 두고 독자적으로 움 직이고 있다. 담사에게 있어서 이러한 배치는 즐거운 일이 못되었다. 만일 자신과 똑같은 목표를 노리는 다른 세명의 자객이 존재한 다는 진상을 몰랐다면 승산이 없는 입장으로 몰리게 될지도 모르 는 입장이다. 우선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게 되고, 자칫 잘못될 경우에는 돈이 그의 코앞에서 다른 사람이 낚아채 가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 다. 그에게 일을 의뢰한 자들은 분명히 말했다. 자신이 표적을 해치우기 전에 그 표적이 없어진다면 자신에게로 선금 한푼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멋지게 해치운 범천대공(凡天大公) 연대강 (燕大强)을 해치운 대가로 그 자신이 그 보복을 받게 될지도 모른 다. 무림맹은 자신들의 차기 맹주인 연대강을 해친 살인자를 찾기아 내 전에는 결코 추적의 손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담사는 천천히 움직일 준비를 했다. 팽노대로부터 곧 자신이 부탁한 정보가 도착한 것이다. 그 안에 그는 표적이 된 인물에 관해서 나름대로 조사할 수 있 는 데까지 조사를 한다. 일을 하는데 있어 사소한 일이라도 중요한 것이다. 실수를 저지 르지 않기 위해서는 바늘구멍 같은 허점이라도 그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 다. 그는 지금부터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철옹성과 나머지 다른 세 명의 자객까지도 상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담사가 가게로 나가자 손아유가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하숙부...!} 귀엽게 생긴 손아유는 급히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하! 아유가 그 동안 많이 컸구나.} 계산대에 앉아 있던 손부인은 자신의 딸을 번쩍 안아드는 그를 보며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로 서른 네살인 손부인은 유난히 뽀얀 살결에 풍만한 몸을 지닌 손부인은 상당한 미녀였다. 일년전 담사가 처음 만났을 때 만해도 굶주림과 병으로 인해 마 르고 볼품없던 그녀가 지난 일년 사이 화사한 장미처럼 만개한 것 이다. 역시 여자란 존재는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만 시들지 않는 존 재인 것이다. 여섯 개의 탁자가 놓인 손부인의 가게는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아늑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때 담사를 발견한 몇몇 손님이 아는 척했다. 담사는 환히 웃으 며 그들과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그것을 쳐다보는 손부인이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사랑하던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장차수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오 년 전인가 육 년 전인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모종의 사건 으로 악양성에 왔을 때 도움을 준 자가 있었다. 그 자는 비록 악양성에서 건달패에 속했지만 어쩌면 의외의 소 득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객이란 따지고 보면 흑도(黑道)상의 부류 아닌가? 호태(胡太)라는 이름의 그 장한은 도박장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 다. 이제 갓 삼십이 넘은 호태는 장차수를 보자 조상을 본 듯 반가 와 했다. {아이고 이게 누굽니까, 장어른 아니십니까?} 호태는 허둥지둥 장차수를 큰 주루로 안내했다. {호태, 할말이 있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세.} 장차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돈은 내가 낼 터이니 밀실 같은 곳이면 좋겠네.} {아니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이 호태가 술값도 없는 놈은 아닙니다.} 호태는 허풍을 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아, 어서 빨리 최고급 객실로 안내하지 않고 무얼하느 냐?} 점소이는 호태의 말에 실없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황망히 조용한 밀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푸짐한 술상이 들어오고 이어 교태넘치는 기녀들이 따라 들어오 자 장차수는 손을 저었다. {기녀들은 필요없으니 내보내게.} {아니, 장어른, 여자가 없다면 무슨 재미입니까?} 눈이 휘둥그래진 호태에게 장차수는 침중히 말했다. {자네의 호의는 고맙지만 은밀히 할말이 있으니 나중에 오라고 하세요.} 호태는 할 수 없는 듯 기녀들을 내보냈다. 이윽고 한 잔의 술이 오가자 장차수가 입을 열었다. {호태, 자네는 나의 신분을 모르고 있지.} {헤헤.... 장어른의 신분이야 아무려면 어떻읍니까? 저야 뭐 장어 른이 어떤 분이든 간에 존경하는 데는 변함이 없읍니다.} {고맙네.} 장차수는 빙그레 웃었다. {내 이런 말을 안하려고 했지만 일이 워낙 중대해서 어쩔 수 없 이 자네의 힘을 빌려야겠네.} 호태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장어른, 말씀만 하십시오. 장어른을 위해서라면 끓는 물이 아니 라 불 속이라도 뛰어 들어겠읍니다.} 장차수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잘못하면 이 일로 자네의 생명까지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네.} 호태는 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호태는 장어른이 살려준 생명입니다. 명령만 하십시오.} 장차수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비마영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순간 호태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비마영이라면... 자객으로는 유명한...} {그렇네. 나는 비마영을 찾고 있네. 그가 악양성에 머무르고 있 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행방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자네의 힘을 빌리고 싶은 걸세.} {그 사람과 무슨 원한이라도....?} 호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를 찾아야 하네.} 말 끝을 흐린 장차수는 침음성을 터뜨렸다. {으흠! 사실 나는 무림맹의 감찰전 소속의 당주네. 그 자를 잡기 위해서 이곳으로 밀파된 것이지.} 호태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림맹의 무사라고 해도 놀랄 일 인데 감찰전의 당주라니...! 장차수의 신분을 안 호태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했다. 호태같은 뒷거리의 패거리들에게는 천하무림의 정세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무림맹은 가히 하늘밖의 하늘같은 존재인 것이다. 장차수는 그의 놀라는 표정에 싱긋이 웃었다. {이번 일만 끝이 나면 내가 자네를 무림맹의 무사로 천거해 주 겠다.} 이 말에 호태의 눈에서 빛이 났다. 강호무림 최강의 조직인 무림 맹의 무사로 발탁된다면 낙양의 뒷골목쯤 손아귀에 넣고 뒤흔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장어른?} 호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악양성에서 행세께나 하는 흑도 인물 한 사람의 거취와 행적을 알아야겠네. 비망영을 찾으려면 뒷골목부터 족쳐봐야겠어!} 호태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독목수(獨目手)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발 이 유달리 넓은 자이니 장어른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장차수는 눈에서 일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자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보게.} -독목수(獨目手) 소패(小覇)! 악양성 내에서 제법 거들먹거리는 인물이다. 그가 하는 일은 인 신매매와 암거래를 주로 하는데 무예도 고강한 흑도인이었다. 3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사십대 초반의 건장한 사내인 소패(小覇)는 월동문을 가로질러 통로에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그 뒤를 두 명의 험상궂은 장한이 귀두도(鬼頭刀)를 차고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이곳은 악양성 내 제법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소패 는 자신의 애첩을 위하여 조그만 연못까지 있는 장원을 이천 냥이 라는 거금으로 샀다. 허나 실상 이곳은 각가지 암거래가 주로 이루어지는 소패의 비 밀 소굴 중 하나였다. 소패는 오늘 밤에도 인신매매로 수중에 거금이 들어 왔는지라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약간 취기까지 오른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애첩을 생각하면 벌써 바지가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산홍(珊紅)이라 불리우는 그의 애첩은 원래 명문세가의 규수였 다. 소패는 은밀히 그녀를 납치해 기루에 팔아 넘기려다가 그녀의 빼어난 미색에 반해 자신의 애첩으로 삼은 것이다. 애첩 산홍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 소패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두 명의 장한은 비릿한 미소를 모두 지우며 절을 했다. {소어른, 편안히 쉬십시오.} 소패는 들은 척도 않고 애첩이 한껏 치장을 하고 기다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옆구리에 격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숨막히는 고통에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 직후 재차 눈앞에 별이 번쩍이는 것을 느끼며 그는 의식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밖에 서 있던 두 명의 장한은 아무런 낌 새도 느끼지 못하고 서로 음담패설을 주고받고 있었다. 소패의 거구가 완전히 거꾸러지자 호태가 재빨리 들쳐 업었다. {장어른, 정말 굉장하십니다. ㄴ낙양성을 주름잡는 이자를 단 일 수에 가볍게 제압하다니...} 장차수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가세.} 그는 밖의 동정을 살피며 창가로 움직였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만요.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한쪽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가냘픈 목소리였으나 그 속에는 간절한 애원의 빛이 담겨 있었다. 장차수와 호태는 침상 위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제 막 이십 세 가량 된 청초한 미모를 지닌 미녀였다. 그녀가 바로 독목수 소패의 애첩인 산홍(珊紅)이었다. 마혈이 봉쇄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그녀는 커다란 봉 목에 잔뜩 눈물을 머금은 채 글썽이고 있었다. {여기에 저를 두고 가시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어요. 제발...} 산홍이 애처롭게 애원했지만 장차수는 냉정히 고개를 돌렸다. 이 런 일에 여인까지 돌봐야 한다면 그로서는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어른! 괜찮다면 데리고 가지요. 우리가 이대로 떠나면 이 여 자는 무참한 보복을 당할 겁니다.} 호태의 조심스런 말에 장차수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 역시 이쪽 뒷거리의 생태는 잘 알고 있다. 산홍은 틀림없이 소패의 실종에 대한 모진 추궁을 당할 것이다. 아마도 끔찍한 고문 속에 죽어가겠지만 설령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매음굴에 던져져서 평생 사내들의 노리개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 우아하고 애처로워 보이는 미녀가 당할 고통을 생각하자 장 차수는 차마 독해질 수가 없엇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호태에 게 말했다. {좋아, 저 여인은 자네가 책임지게. 소패는 내가 업고 가겠네.} 호태는 환히 웃으며 소패를 장차수에게 넘겨 주었다. {잘 생각하신 일입니다.} 잠시 후, 담장을 타고 넘은 장차수와 호태는 어둠 속으로 빨리는 듯이 사라졌다. 그 뒤로 환한 달빛이 교교히 어둠을 밝혔다. 사공표가 상가장(桑家莊)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철혈무정 석무심 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알아낸 것이라고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월화라고 생각되는 여인이 두 번 찾아왔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로써 철혈무정과 월화의 관계는 명백해진 것이다. 즉, 철혈무 정의 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번 사건에 중요한 관계가 있다 는 것이다. 사공표는 끈덕지게 주위조사를 계속했으나, 더 이상 별다른 것을 찾지 못하자 그는 자운유와 합류해서 다름 일을 결정하기로 했다. {휴... 염병할! 사공형은 그래도 몇 가지 단서를 찾았지만 나는 천갈(天蝎)이라는 놈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소.} 자운유는 사공표를 보자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월화의 졸개들을 다그쳤으나 사람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모르니 원...}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연신 술을 들이 부었다. 사공표는 동료의 푸념을 이해했다. {장차수로부터 별다른 소식이 없었나?} 자운유는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소.} 사공표는 고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차수만이라도 무슨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면 조금은 나올 것인 데...} 자운유는 그 말에 표정이 밝아졌다. {사공형, 여기서 더 이상 지체해 봐야 나올 것은 없으니 우리도 악양으로 갑시다.} 마침 사공표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4 소패는 눈을 떴다. 먼저 약간의 퀘퀘한 곰팡이 내음이 코를 스쳤다. 이어 억지로 일어나려던 그는 얼굴에 가득 번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사방 다섯 자 정도의 지하창고 같은 이곳은 중앙에 놓인 허름한 의자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죽음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소패는 몸을 움직였다. 한 순간, 도검으로도 끊기지 않는다는 천잠사(天蠶絲)의 노끈이 자신의 몸을 묶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득 그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어떠한 처 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의 사업은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 었지만 적들이 많았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나를 잡아왔단 말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저벅... 저벅...! 문득 나지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로 보아 서너 명은 될 것 같다고 소패는 추측을 하면서 문쪽을 응시했다. 그그그_____ 긍! 이윽고 철로 된 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나타난 것은 세 사람의 건장한 사나이였다. 장차수와 호태, 그리고 말상에 황색 장삼을 입은 사십대의 인물 이 그들이었다. 그들 삼인 중 소패의 시선이 말상의 사나이 얼굴에 딱 멈추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얼굴빛은 백짓장처럼 창백해 졌다. {감....감대협! 나는 무림맹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왜....} 소패의 목소리는 공포에 떨리고 있었다. -탈명도(奪命刀) 감천수(坎泉秀)! 말상의 인물은 바로 무림맹의 악양 지부장이었다. 감천수는 비록 지부장의 자리에 있으나 그의 고절한 무예와 명 성을 생각한다면 총단 당주(堂主)의 지위에라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소패의 표정은 참담해 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무림맹에 붙 잡혀 왔다면 요행을 바랄 수는 없었다. {질문은 이쪽에서 한다. 다만 너는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면 돼.} 장차수가 말했다. 퍼억! 그와 동시에 장차수의 발이 소패의 정강이를 찍었다. 그것은 소 패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크아아악!] 숨이 막힐 듯한 비명을 지르는 소패의 이마에 비오듯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아마 정강이 뼈가 파열되었으리라. 하지만,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차수의 손이 환상처 럼 뻗어나왔다. 가슴, 옆구리, 얼굴 할 것 없이 전신을 난타했다. 픽! 퍼퍽! {크흑...!} 소패는 처절히 비명을 터뜨렸다. 이런 무지막지한 인간과 뼈를 쑤시는 고통은 뒷골목에서 뼈가 굵어온 소패에게도 태어난 이래 처음이었다. 종내 소패의 비명도 고통의 신음성으로 바뀌고, 장차수의 손이 멈추었을 때 소패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리고 전신에는 바늘로 쑤시는 듯한 고통 이 계속되었다. 잔뜩 움츠리고 미약한 신음성을 내는 소패의 몰골은 실로 처참 했다. 호태는 장차수의 잔혹한 손길에 입을 딱 벌렸고, 감천수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감천수 자신도 결코 성인군자는 아니었으나 장차수의 지독한 손 속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감천수는 무림맹 감찰전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도인들이 왜 그들을 사갈시하며 공포를 느끼는가 하고..., 장차수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흡 사 돌을 깎아 만든 돌부처마냥 그의 숨소리도 평소처럼 변화가 없 었다. 장차수는 소패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이름은?} 소패는 우물거렸다. 고통이 심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 이다. 그 순간, 장차수의 발 끝이 일점의 사정도 없이 칼 끝처럼 소패의 배심을 파고 들었다. {으아악... 소패, 소패입니다!} 소패는 울면서 홀린 듯이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나이는?} {마...마흔 둘 입니다.} 소패의 입에서 자신에 관해 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술술 흘러나 왔다. 이 상태라면 자신의 십 팔대 조상까지 다 말할 것 같았다. {좋아, 소패 악양성에서 살인청부를 주선해 주는 사람도 있겠 지.} {그것은...} 소패는 말을 우물거렸다. 그리고, 비록 찰나지간이었지만 그의 두 눈에 공포가 스쳐 지났다. {왜? 모른다고 말할 셈인가? 이 새끼야!} 장차수의 발이 소패의 사타구니 사이를 파고들었다. 퍼______ 억! {크아_______ 악!} 순간 소패는 폐부를 쥐어짜는 비명을 터뜨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의 바지가 삽시에 피로 축축해졌다. 아마도 그의 남성의 상징이 뭉개졌을 것이다. 하지만 장차수의 손길은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소패는 이 자의 앞에서는 세상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는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은 설사 부모라도 다구칠 인간이다. 그리고, 설사 나중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의 이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있는 인내는 없었다. 자신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 자는 자신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만... 알고... 있읍니다.} 손을 멈춘 장차수는 계속 다그쳤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모조리 말해. 하나도 남김없이.} 소패의 입에서 두 명의 인물에 관한 말이 흘러 나왔다. 장차수는 마침내 네명의 자객중 한명인 비마영에게 한발 접근 한 것이다. 거의 한 시진동안 소패의 말을 들은 장차수의 입가에 그때서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태는 계속 입을 쩍 벌렸고, 감천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쓰디쓴 고소를 지었다. 문득 장차수라는 사람이 감천수의 가슴에 서늘한 찬바람을 일으 켰다. 그것이 공포라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한동안 시간 이 걸렸다. 5 골동품상을 경영하는 양(梁)노인은 전부터 호태를 알고 있었다. 그 호태가 소패의 소개로 왔다는 장차수를 데리고 찾아왔다. 장차수의 신태는 어제와 완전히 달랐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손에는 한 자루의 섭선을 든 것이 거부로 보였다. 양노인은 소패가 보내서 왔기에 믿을 수는 있었지만 웬지 거부 감이 일어났다. 하지만 장차수의 부티나는 행색으로 보아 수고의 대가는 상당히 그에게 돌아올 것 같았다. 평소 때라면 그는 꺼림칙한 느낌에 손님을 따돌려 보냈겠지만 거의 석 달 가까이 일거리가 없어 그는 재정적으로나 그를 믿고 있는 자들로부터 불평을 듣고 있었다. 양노인은 내심 결정을 내리고 호패와 장차수를 밀실로 안내했다. 가게를 지나 안채에 들어서자 잘 다듬은 정원이 나타나고 대청 이 나타났다. {호태,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양노인의 말에 호태는 흠칫 했으나 장차수의 눈길에 고개를 끄 덕였다. 이때 허름한 나삼을 입은 여인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연아야, 이 손님을 잘 모셔라. 그리고 서재에서 있을 것이니 무 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해라.} 연아라는 여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서재는 매우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가지런히 진열된 책과 고풍스런 가구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붓 과 벼루 등은 주인의 서품을 자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둥글게 나 있는 이중으로 된 창문과 구조는 어딘지 밀폐 된 느낌이 들었다. 연아라는 여인이 차를 탁자 위에 놓고 나가자 양노인은 조심스 럽게 물었다. {손님께서는 소패를 어떻게 아시고 계십니까?} 장차수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산 사람이 죽은 자에 대하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양노인의 입술이 새파래졌다. {손님의... 말 뜻은?} {장춘원(長春院)의 주인도 그렇게 물었지만 결과는 소패와 다름 이 없었소.} 장차수는 어디까지나 태연한 표정으로 양노인이 듣기에는 너무 도 섬뜩한 말을 암무렇지도 않게 내뱉앗다. 양노인의 턱 및에 실룩거렸다. 이 바닥에서 수십년을 굴러먹은 그가 장차수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장춘원(長春院)은 주루로써 주인은 양노인과 마찬가지로 암중으 로 자객들을 소개하는 중개인이었다. 그 장춘원의 주인과 소패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양노인의 왼손이 느릿하게 탁자 모서리를 짚어갔다. 아주 자연스 러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양노인, 그 손이 한 치만 더 움직인다면 앞으로는 한 손으로만 생활하셔야 될 것이오.} 장차수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비록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내면에는 무서운 위협이 담겨 있었다. 탁자 모서리에는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누르기만 하면 눈 앞의 인물은 다섯 가지의 암기에 고슴도치처럼 변해 버릴 것이다. 양노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어찌할 것인가? 기관장치를 발동할 것인가 아니면 이 독사같은 자의 위협에 굴복할 것인가? 사시나무 떨리듯이 경련을 일으키는 양노인의 손은 한 동안 그 자리에서 머물다 다시 돌아왔다. 잠시 동안 양노인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 다. 그것으로 보아 그가 한동안 얼마나 공포와 갈등에 시달렸는지 알 수가 있었다. {으음.} 양노인은 짧은 신음성을 토했다. 마치 천 근같이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허탈한 표정으로 말 했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오?} 양노인이 이 사업에 발을 디딘 것은 삼십 년 전이다. 그가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임기웅변과 사람을 보 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차수의 태도에서 그는 이 사람이야 말로 자신이 만났던 사람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가장 위험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이런 유의 인물에게는 음모나 귀계는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는 이미 모든 준비를 하고 온 것이다. 더 이상 저항한다는 것은 부 질없는 짓이었다. 장차수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스쳤다. {비마영의 거처를 알고 싶소.} 양노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행방을 찾기는 쉽지 않소.} 장차수의 눈빛이 심각해 졌다. 양노인의 표정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작정 밀어붙일까도 생각했으나, 양노인의 말에 방법을 바 꾸기로 내심 결정을 내렸다. {쉽지 않다는 말은 바꾸어 말한다면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지 요?} 양노인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악양성 내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찾 을 수는 있을 것이오. 허나, 그가 여기에 없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소이다!] 장차수는 차갑게 양노인의 말을 끊었다. [그가 악양성에 머물로 있다는 것은 확실하오. 양노인, 시간은 하 루뿐이오. 그안에 그자의 행방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장차수는 입을 다물었다. 뒷 말은 듣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을 뜻 하는지 양노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오. 게다가 자금도 필요하고...} 양노인은 애원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비마영 같은 자는 절대로 그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소. 최소한 삼 일은 필요하오.} 장차수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하루 뿐이오. 그리고 우선 천 냥 짜리 은표 한장을 주겠 소. 그를 찾으면 두 장을 더 주겠소. 허나, 만일 찾지 못한다면 양 노인은 결코 무림맹 감찰전의 손길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오.} 양노인은 한 순간 얼이 빠졌다. 그는 비로소 이 자로부터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의 정체를 안 것이다. 상대는 바로 무림인이라면 치를 떤다는 무림맹 감찰전의 냉혈한 이었던 것이다. 장차수가 떠난 뒤에도 양노인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단 하루, 그 안에 비마영을 찾지 못 한다면 그에게는 죽음 뿐이다. 당금 천하에 있어서 무림맹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한 가 지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잠을 자는 것이다. 양노인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었다. 수년 이래 몸을 움직이지 않아 전날의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한때는 그도 자객의 길을 걸어온 살수였다. 6 조그만 인공 연못 사이로 목련(木蓮)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화 이초들이 온통 뒤덮여있었다. 수면이 미풍에 가볍게 일렁거리자 누각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림처럼 이층으로 만들어진 누각 주위에는 온통 꽃향기로 가득했 다. 백색 문사의(文士衣)를 입은 이십대 중반의 사내가 뒷짐을 지고 누각에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검미에 한성(寒星) 같은 눈동자, 쭉 뻗어난 콧날 아래 굳게 닫힌 입술, 흡사 여인처럼 수려한 미목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 백삼청년 뒤로 공손한 표정의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이 서 있었다. 석무심이 여기에 온 지 일다경이 지났지만 눈 앞의 청년은 도무 지 반응이 없다. 다만 그가 인사를 했을 때 가볍게 고개만 까딱 했 을 뿐 일체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오만한 태도에 석무심은 내심 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로 서는 눈앞의 인물에게 감히 분통을 터뜨릴 간담은 없었다. 이 인물의 눈 밖에 벗어난다면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된다는 것 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상(文相) 또는 백마(白魔)라고 불리우는 모용천엽(慕容天葉)! 그는 자신의 조직에서 제이인자(第二人者)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다. 배분을 따진다면 평배이나 위치면에서 보자면 너무나 큰 차이 가 있다. 문득 모용천엽의 시선이 석무심을 향했다. {석형께서 하신 일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조금의 실수는 있었지 만 임무는 훌륭히 수행했읍니다.} 낭랑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포근한 느낌을 들게 만들었 다. 석무심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저로서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무슨 말을... 저는 언제나 석형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과찬의 말씀을...} 석무심은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모용천엽은 환한 미소를 띄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석형!} 석무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석형의 노고는 알고 있지만 한 가지 일이 생겨서 석형의 힘이 필요합니다.} {명령한 하십시오, 문상.} 석무심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이 일은 명령이 아니고 제 부탁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모용천엽은 선뜻 말하기 어려운지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걸었다. {석형도 알고 있다시피 이번 일은 우리에게 몹시 중요한 일입니 다. 처음의 계획대로라면 마지막 마무리는 저의 형님이신 무상(武 相)께서 직접 하려고 했지만 급한 일로 변방(邊方)을 방문해야만 합니다.} 모용천엽은 멈추어 서서 다시 계속 말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 일을 석형과 적용(狄容)소저가 합심해서 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일은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석무심은 충분한 어조로 재빨리 대답하며 장읍을 했다. 담사라는 자를 다시 한 번 만나서 전 날의 수모를 설욕하고 싶었던 석무심 이 아니었던가? {석형, 그럼 곧 준비하도록 하지요.} 모용천엽은 석무심이 자신의 아랫 사람이었지만 더할 수 없이 예의를 다했다. 이것으로 그의 고매한 인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의 마음이란 한 면만 보고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청풍각(靑風閣)! 이곳은 무림맹의 악양성 지부의 중지였다. 양노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장차수와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 다. 항주성을 떠나온 사공표와 자운유 그리고 악양지부장인 감천수 가 기대에 찬 눈으로 양노인을 응시했다.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그의 시선은 장차수의 눈과 마주쳤다. {이 늙은이는 아무런 할 말이 없소.} 체념한 듯 말하는 목소리 내면에는 가득 절망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비마영의 행적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장차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분노한 그의 손이 움직이면 이 은퇴한 늙은 자객의 목숨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때 나삼을 입은 산홍(珊紅)이 차가 엊혀진 소반을 들고 가만히 들어왔다. 독목수 소패의 애첩이던 산홍은 장차수에 의해 구출되었 지만 막상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해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면서 은근 히 장차수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산홍이 나타나자 장차수는 가슴에 들끓던 살의를 억지로 짓눌렀 다. {그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단 말씀이오.} 장차수의 차가운 일성에 양노인은 비감 서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자가 현재 전유(田油)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그 외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소이다.} 양노인이 진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장차수는 힘이 쭉 빠 졌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헌데 바로 그때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저.... 전유라고 하셨나요?} 한 순간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산홍을 향했다. 산홍은 갑자기 중인들이 시선이 자신에게 닥치자 고개를 푹 숙 였다. 수줍기도 했지만 그들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장차수가 물었다. {그 사람인 줄은 모르지만.... 이 주일 전에 소패 그 사람이 전유 라고 하는 사람은 제가 있던 곳에 함께 왔던 일이 있어요.} 양노인이 다급히 말했다. {소저,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기억할 수 있소?} 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은 기억하고 있어요. 나이는 마흔쯤 되어 보이고.... 눈 빛이 무서웠어요. 그리고....} {소저 혹시 왼쪽 눈 밑에 조그만 점이 있지 않았소?} 양노인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외쳤다. {맞아요. 그 사람의 눈 밑에 점이 있었어요.} 산홍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소이다.} 양노인이 크게 말했다. {그 자가 비마영이요. 삼 년 전 그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틀림 없이 기억하고 있소.} 중인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감천수가 재빨리 물었다. {소패, 그 사람의 말로는 동정호(洞定湖)에 있는 어느 기방에 머 물고 있다 했어요.} 장차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산홍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소저.} {아니예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요.} 살며시 고개를 숙이는 산홍의 얼굴은 붉게 달아 있었다. 양노인은 언제 죽을 상을 지었나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동정호의 기방이라면 내가 앞장서겠소.} 그는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동정호에 떠 있는 기방의 수는 천척에 달하지만 내가 나서기만 하면 곧 찾아 낼 수 있소이다.} 자운유가 빙그레 웃었다. {좋소, 앞장을 서도록 하시오.} 자운유는 비록 양노인이 흑도인이었으나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 는 판단에 승낙한 것이다. 양노인은 생기에 찬 표정으로 급히 앞장으로 섰다. 第 十一 章 刺客의 破戒 1 담사는 옛날처럼 손부인을 도와 일을 했다. 그녀의 가게는 작았지만 손님은 제법 많았다. 다점에 들리는 손님은 각양각색이다. 선비, 상인, 관인 등 대체로 중산층 사람들이 많았다. 담사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일에 필요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오는 손님 중 무림인들은 드물었지만, 무림맹의 소맹주인 범천대공 연대강의 이름은 일반인들에게도 흠모의 대상이었던 것 이다. 그는 연대강에 대한 이야기라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 해 두었다가 시간이 나는대로 기록해 두었다. 그것은 나중에 암살 을 준비할 때 막대한 도움이 될 것이다. 표적에 관해서 잘 알기 전까지는 언제, 어떻게 어떤 형태로 활동 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 담사는 곤히 잠든 손부인을 절망감에 젖어 바라보았다. 그 자신이 알기로는 손부인은 정말 좋은 여자였다. 생활력도 강 했고 남자에게 순종할 줄 아는, 현모양처의 표본같은 여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화사한 미모와 뽀얀 살결, 풍만한 몸매는 많은 여 인을 경험한 담사조차도 수시로 흥분시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용모와 몸매뿐 아니라 그녀는 늘 침상에서 대단한 정열을 발휘 하곤 했다. 십여살이나 연하인 담사를 새로운 남편으로 여기고 있 는 그녀는 담사에게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쾌락을 맛보여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주저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자상하고, 고혹하고, 손부인은 그야말로 사내들이 바라 는 가장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담사는 문득 문득 이 착한 여인과 그냥 이대로 살아 벌릴까 하 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오히려 독약 과 같은 것일뿐이다. 자객이란 정에 이끌리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라는 것은 살수업을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없을 지도 모르는 먼훗날의 일이었다. 문득 담사의 하체가 뜨거워졌다.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에 뽀얀 손부인의 하체가 드러났기 때문이 다. 뒤척이는 통에 위로 말려올라간 속치마 아래로 배꽃처럼 흐드 러진 중년여인의 아랫도리가 고스란히 들어나보였다. 만지면 묻어날 듯 뽀얗고 흐드러진 허벅지, 그 유달리 풍만한 허 벅지 안쪽으로 가뭇가뭇한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있었다. 잠자리에 서는 늘 그렇듯이 손부인은 오늘도 치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 은 채 잠들어있는 것이다. 한 순간 열이 오른 담사의 몸이 손부인의 뽀얀 여체를 찍어 눌 렀다. 흐드러진 여인의 허벅지는 거칠게 벌어지고 그 중심부의 짙 은 음영의 계곡을 향해 뜨거운 불기둥이 돌진해갔다. 잠이 들었던 여인은 움찔했지만 곧 사내의 목에 팔을 휘감으며 그의 뜨거운 입김을 가득 들이마셨다. [아...!] 꽃뱀처럼 감겨들던 여체는 일순 하반신을 파고드는 둔탁한 통증 에 한껏 눈을 치떴다. 여러차레 경험한 것이긴 하지만 이 사랑하는 연하의 정인과 몸 을 합칠 때는 매번 약간의 고통을 느끼는 그녀였다. 그만큼 그의 욕망의 상징은 남다른 중량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내의 움직임도 힘이 넘쳤으나 여체도 그에 못지 않게 격렬했 다. 가장 예민한 부분으로 불덩이의 세찬 출입을 느끼며 여인은 급 격히 정점을 향해 치달렸다. 탄탄한 사내의 몸 아래 깔린 채 여체는 무섭게 뒤틀렸다. 격렬하 게 자극을 받아 그녀는 숨가쁜 비명을 토하며 자지러져 갔다. 여인의 짐승 같은 신음은 사내를 한층 자극했다. 한 순간, 사내는 비등점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며 맹렬히 허리를 움직였다. 자신의 예민하고 은밀한 동굴로 사내의 불덩이가 급격히 달아오 르고 팽팽해지는 것을 느끼며 여인도 발작적으로 둔부를 움직여 사내의 행위에 동조했다. 그러다가 여인은 문득 몸 속에 가득 퍼지는 강렬한 분출감을 느 꼈다. 거푸 십여차례 자신의 동굴 깊은 곳에 뿜어지는 그 강렬한 분출감에 여인은 온몸이 녹아드는 듯한 환희를 맛보았다. 손부인은 삭신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듯한 희열 속에서도 간헐적 으로 움직이던 사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는 것을 느끼며 그를 휘 감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랑, 너무나 행복해요.} 자신 위에 널부러져 어린 애처럼 헐떡이는 사내를 꼬옥 끌어안 아주며 여인의 입가에 고혹하고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사내가 자 신을 사랑해준 증거가 몸안에 그득하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은 그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는 건성으로 손부인의 큼직한 젖꼭지를 만지며 빙그레 웃었 다. 묘한 뜻을 간직한 미소였지만, 이미 사내에게 혼을 빼앗긴 여 인은 그 웃음마저도 따뜻해 보였다. 이윽고 한쌍의 남녀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깊은 수면의 나락으 로 빠져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담사는 가게의 문을 닫고 손씨모녀와 함께 장안성 북쪽에 있는 백운사(白雲寺)를 향했다. 어젯밤 담사는 손부인에게 백운사에 불 공을 드리러 가자고 미리 약속해 두었던 것이다. 손아유는 어린 소녀답게 기쁨에 들떠 있었다. 오랜만의 외출은 손씨모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즐거운 것이다. 백운사는 당태종(唐太宗) 시대에 건립된 절로써 구층으로 된 사 리탑 등 고적지가 많았다. 연화동(蓮花洞)도 그 중 하나로 석굴 속의 벽에 새겨진 연화십팔 불(蓮花十八佛)의 좌상은 성당(盛唐) 시대의 조각기법과 불문의 장 엄함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연화동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유객(遊客)들과 신도들이 붐볐 다. 담사는 손씨모녀와 연화동을 구경하면서 다른 이들처럼 불공을 드렸다. 2 문득 담사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연화동 한쪽에는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가득한 한 노승(老僧)이 앉아있는데 그런 노승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다. 나이를 짐작할 수도 없는 이 노승은 빡빡 민 민대머리에 아홉 개의 계인(契印)이 뚜렷이 찍혀 있는데 턱밑에 가득난 백염이 가슴 에까지 내려와 있다. 더럽혀진 회색 승포와 초췌한 몰골의 노승은 중인들의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담담한 시선으로 십팔연화 좌불상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노승의 옆에 사발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시 주를 받는 것 같긴 했으나 노승은 그저 웅얼웅얼 알 수 없는 경문 을 읊기만 할 뿐 사람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실로 괴이한 노승이었다. 허나 담사의 시선이 그쪽을 향한 것은 노승의 그런 특이한 외양 때문이 아니었다. 노승으로부터 느껴지는 무언가 섬뜩한 느낌 때문 에 보인 무의식 중의 행동이었다. [관세음보살!] 본래 불심이 깊은 손부인은 딸의 손을 잡고 노승에게로 다가가 사발에 은자 한 냥을 넣었다. {아미타불! 잠깐만 여시주.} 시주를 한 뒤 담사에게로 돌아오던 손씨노며는 노승의 갑작스런 부름에 멈추어 섰다. [소첩에게 하교하실 일이 있으시온지요?] 손부인이 공손히 합장을 하며 묻자 노승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 녀와 담사를 일별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여시주의 불심이 깊으니 이것은 부처님의 도리를 행함이요. 가 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법, 아미타불.... 여시주께서 언제인 가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닥치면 노승을 생각해 주시오.} 말을 마친 노승은 힐끗 담사를 일별한 후 눈을 감았다. {스님의 말씀 잊지 않겠읍니다.} 손부인은 말 뜻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연신 감사의 뜻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담사의 일행이 완전히 사라지자 노승의 입가에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미타불! 업보로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노승의 말은 누구도 그 뜻을 알기는 어 려웠다. 백운사의 산문 앞에는 길가에 불문에서 쓰이는 향이나 염주 등 잡동사니를 파는 몇몇 장사꾼이 물건을 가득 널려놓고 팔고 있었 다. 담사는 하나의 그림을 흥정했다. {이것은 얼마요?} 삼십대 가량의 작달만한 장사꾼은 헤푼 웃음을 지으며 급히 말 했다. {헤헤... 그것은 두 냥 입니다요.} 담사는 비싸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비싼 것 같은데 한 냥 두 푼 반 짜리는 없소?} 그의 말에 한 순간 장사꾼은 웬일인니 움찔햇다. 하지만그는 이 내 안색을 회복하며 대답했다. {에이 손님도... 좋읍니다. 이것은 원래 한 냥 닷 푼은 받아야 하 는데 두 푼 반을 깎아 한 냥에 드리죠.} 담사는 만족한 얼굴로 한 냥을 치루고 그림을 구입했다. 관음보 살의 반신상이 그려진 그림인데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였다. 그 날 밤 초경 무렵부터 손부인은 담사와 격렬한 정사를 치루어 야만 했다. 오늘 따라 유달리 집요한 담사의 행위에 손부인은 이경이 될 때 까지 거푸 몇 번이나 혼절을 했다. 결국 진이 다 빠져버린 손부인 은 죽은 듯이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손부인이 잠이 들자 담사는 그제서야 가만히 침상을 빠져나왔다. 느릿하게 옷을 입은 담사는 이미 수혈이 짚여 깊은 잠에 빠져든 손부인을 일별한 다음 방 안을 빠져나왔다. 가게에 들어선 담사는 등잔에 불을 붙였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가게 안이 서서히 밝아졌다. 불을 밝힌 담사는 백운사에 갔을 때 구입한 그림을 꺼내어 등잔 에 대고 가만히 흔들었다. 그러자 문득 관음상의 반신이 희미하게 사라지면서 대신 그 자 리에 깨알같은 글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림 속에 숨겨져있던 글들을 노려보던 담사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쏟아져나왔다. <비마영(飛魔影)-! 사십 세 가량으로 눈 밑에 검은 점이 있으며 항상 황갈색 장포 를 즐겨 있음. 무기는 검(劍)을 주로 사용하지만 가끔 암기도 사용하는데 수법 은 불명. 거취는 일정한 곳이 없고 절강성 일대에서 근래 행동해 왔으나 한 달 전부터 악양성내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위치는 불명. 추명사(追命蛇)-! 내력불명. 오순의 나이로 자주 변장을 하지만 그의 왼손에 호두알 만한 붉 은 반점이 있으며 걸을 때 왼쪽발을 약간 절뚝거림. 무기는 은사(銀絲)와 비도(飛刀)를 사용하며 여색을 좋아함. 한 달 전까지 항주성에 머물러 있었으나 현재는 위치를 알 수 없음. 다만 비마영과 연락이 닿지 않나 생각됨. 술을 좋아하며 여색을 지독히 밝힘. 독수귀(毒手鬼)-! 독에 능통하고 출신은 오독문(五毒門). 흰옷을 즐겨 입으며 무기로는 주로 암기를 사용하고 오독지(五毒 指)에 능통됨. 나이는 이십대 중반이고 살결은 창백하나 보기드문 미남자임. 술을 좋아하지 않으나 대신 여자는 매우 좋아함. 석년 섭혼미랑 (攝魂美琅)과 염분이 있었지만 확인된 바 없음. 거취는 불명. 항상 고궁과 주루를 즐겨찾음.> {그 사이에 팽노대가 이들에 대하여 이 정도라도 밝혀 내었으니 다행이군.} 담사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다. {나를 제외한 삼 인의 자객... 너희들은 결코 연대강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직이 독백하는 담사의 표정은 음산하게 보였다. 이어 그 동안 자신이 정리한 연대장에 대한 기록을 훑어보았다. <범천대공(凡天大公) 연대강(燕大强)-! 나이 : 이십 일 세. 성격: 다감하면서도 굳강함. 무예: 검을 사용하며 가전의 절기인 대천구검(大天九劍)의 검법 에 달통함. 소림의 각종 신공(神功)에도 조예가 깊고 강호의 견문 에 정통함. 근황: 풍류적이긴 하나 잘 절제를 하며 현재 북방무림의 패주인 북천뇌보(北天雷堡)의 여식과 혼담이 진행 중. 이 혼담이 이루어진다면 무림맹은 단숨에 서북무림에도 거점을 확보하여 중원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 타문파에 막대한 위 협을 주게 될 것임. 무림맹에서는 이 혼담을 적극 추진 중이며 이미 칠할이 성사, 오 는 단오절에 정혼이 이루어질 전망임.> [청부자는 이 혼담을 저지하기 위하여 연대강을 택했군.] 담사의 눈가로 한광이 흘렀다. [연대강의 암살로 득을 보는 것은 무림맹을 제외한 강호의 모든 문파이니 청부자의 정체를 추측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담사는 차근차근히 속을 정리해 나갔다. 우선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삼 인의 자객에 대하여 생각해 봐 야 한다. 표적을 어찌 제거해야할 것인가는 그 후의 일이다. 담사는 자료를 정리하여 등잔불에 불을 붙였다. 한 순간 불이 환 히 타오르고 몇 장의 종이는 재로 변해 갔다. 그는 또 떠날 때가 된 것이다. 3 동정호(洞庭湖)-! 중원 오대호(五大湖) 중 가장 큰 호수인 동정호는 그 길이만도 천 리를 넘는다. 호변의 경치 또한 수려하고 수많은 군소 섬들이 어울려 동정호 는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동정호 변을 끼고 세워진 수많은 주루와 홍루가 군집된 홍등가 를 쾌활림(快活林)이라 부른다. 이 쾌활림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물 위에 배를 띄우고 영 업을 하는 기방을 들 수 있다. 화선(華船), 또는 화방(華房)이라 불 리는 이 산상의 기루들은 동정호의 명물들이다. 선상에서 술을 마시며 여체를 품는다는 것은 풍류객의 아취를 맛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것이다. 어둠이 쾌활림에 밀려오면 동정호변에는 불야성이 이루어진다. 수많은 청사홍등이 호수를 밝히고 화려하게 치장을 한 야화들이 사내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이다. 환락의 쾌활림, 그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인간의 추악함과 야화의 애환이 화려함에 가려져 이 밤도 환락의 열기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 다. 옥향(玉香)은 이 배에서 생활을 한 지 벌써 오 년째 접어들었다. 그녀도 쾌활림에서 몸을 팔고 살아가는 수많은 야화 중에 한 명 이었다. 옥향은 어둠이 깔리는 호수를 바라보면서 술상을 차렸다. 그녀는 문득 열 흘 전부터 자신의 배를 독점하고 있는 사내의 생각이 스쳤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녀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표정없는 얼 굴에 독사 같은 눈초리, 전신에 퇴폐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사십대 의 이 사나이는 흡사 들개와도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녀의 경험으로 이런 유의 사나이는 위험한 손님이었다. 생각같 아서는 거절을 하려고 했으나 그를 데리고 온 사내는 그녀의 목줄 을 쥐고 있는 쾌활림의 건달패라 순순히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뒤 그녀의 마음은 급격히 달라졌다. 그의 인상은 나쁘지만 돈이 많았고 침상에서의 재주는 또 남다른 것이 었다. 매일 밤 사내는 그녀를 몇 번이나 혼절시키곤 했다. 오래전에 화 류계에 투신하여 닳고 닳은 기녀를 환락의 나락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은 실로 대단한 정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부터 옥향은 완전히 간판을 내렸다. 은자 백 냥을 내놓고 그 사나이는 한 달 동안 머물겠다고 말한 것이다. 백 냥이라면 그 녀가 반 년 간 쉬지 않고 벌어도 다 벌지 못할 큰 돈이다. 그때부터 옥향은 그 사나이를 신주 모시듯이 모셨다. 금전의 위 력은 그녀의 마음마저 휘어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로써 십 일째, 옥향은 수 년 이래 이러한 행복은 처 음이었다. 무엇보다도 매일밤 뜨내기같은 이남자 저남자의 품을 전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이래서 여자는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해야하는 것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는 옥향이었다. 주방에서 술상을 차려들고 나오던 옥향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무슨 일이예요 아저씨?} 그녀는 자신의 옆에 붙은 배로부터 자신의 배로 막 넘어오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앙칼지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니, 오늘 장사 안해?} 능청스럽게 말하면서 옥향의 배 위에 올라선 사나이는 바로 장 차수의 충실한 정보원이 된 호태였다. 옥향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장사 안해요. 다른 곳으로 가 봐요.} {호오. 이것봐라?} 호태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언제부터 네년이 규방아낙이 되었냐? 내가 누구인 줄 몰라?} 옥향의 눈빛에도 독기가 스쳤다. {당신이 누군지 알게 뭐예요. 어쨌든 장사는 하지 않으니 어서 썩 꺼져요.} 호태의 코에서 더운 김이 쏟아져 나왔다. {오라, 그러고 보니 어떤 놈팽이를 물은 모양인데 어디 낯짝이나 한 번 보자.} 호태는 시비조로 말하고는 다짜고짜 선실의 휘장을 들쳤다. {무슨 짓이예요?} 옥향은 교갈을 지르며 호태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호태는 노성으로 외치며 옥향을 떠밀었다. [아악!] 뱃전에 처박힌 옥향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호태의 무지막지 한 행동에 머리가 뱃전에 부딪친 그녀는 한동안 눈앞이 어지러웠 다. {흐흐! 어디 어떤 봉줄인가 보자.} 옥향을 밀어버리고 호기롭게 외치던 호태의 입이 다음순간 갑자 기 다물어지고 눈은 크게 치떠졌다. 한명의 사내가 밖의 소란을 듣고 선실 휘장을 들치며 나섰던 것 이다. 나이는 사십대 전후로 보였는데 무표정한 얼굴에 독사같이 음사 한 눈동자와 매부리코, 그리고 실같이 옅은 입술을 지닌, 흡사 들 개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그자의 찢어진 듯한 두 눈에서 쏘아오는 안광은 어찌나 날카로 운지 호태는 흡사 수많은 바늘이 자신의 눈 속에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호태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의 생전에 이다지 도 위압감을 주는 인물은 처음 보았다. {너는 누구냐?} 고저(高低)가 전혀 없는 사나이의 삭막한 음성은 호태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나....나는 호태라는 사람이요. 저.... 손....손님이 있다는 것을 알 았으니....} 제딴에는 태연히 말한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재미 많이 보시오.} 호태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급히 몸을 돌렸다. 헌데 바로 다음 순간, 호태는 눈앞이 어두워지고 목줄기에 무서 운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새 사나이는 호태를 가로막고 그의 목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신법의 빠름과 수법의 기묘함은 호태로서 설사 알고 있었다 하 더라도 피할 수 없는 괴이한 수법이었다. {네놈이 누구냐고 물었다?} 호태는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지고 숨이 막히는 고통에 캑캑 거렸다. {캑... 캑! 나는.... 호태....} 바로 그때, 호태의 목을 움켜쥔 사나이의 귓전에 누군가의 냉랭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마영, 그 사람은 죄가 없으니 놓아 주시지.} 일순 움찔 경직되었던 사나이의 시선이 느릿하게 음성이 들린 곳으로 향했다. 옥향의 배와 맞닿은 옆의 배 위에는 장검을 손에 든 장차수와 사공표가 우둑 선 채 무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휘이익! 갑자기 호태의 몸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 순간 사공표가 재빨리 호태의 몸을 받았고 장차수의 신형은 화 살처럼 옥향의 배로 쏘아갔다. 사나이는 사공표와 장차수를 발견한 순간, 자신에게 위험이 닥쳤 다는 것을 직감했다. 십수 년 동안 위험과 함께 살아온 그의 반사 신경은 놀라울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헌데 그의 검은 선실에 있다. 생각은 느리고 동작은 빨랐다. 다급히 호태를 그들에게 던져 그 들이 움찔하는 사이 검을 가지러 선실로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장차수와 사공표는 그에 못지 않은 백전노장의 경험자들 이다. 장차수의 검은 번갯불처럼 선실로 들어가는 사나이의 등을 베어가고 있었다. 第 十二 章 追擊의 손길 1 살을 후비는 화끈한 통증이 등을 파고들자 비마영은 입을 악물 었다. 바닥을 구르듯이 선실로 뛰어들어 검을 잡은 그는 맹렬히 발 끝 을 차며 천정으로 쏘아갔다. 이 일련의 상황은 눈깜박할 사이에 벌 어진 일이었다. 콰창! 비마영의 신형이 천정을 부수고 날아올라 선실 지붕에 내려섰다. 하지만 바로 그때 사공표의 우수가 기다리기라도 한 듯 벼락처 럼 후려쳐왔다. 그의 장기인 철비단수(鐵臂斷手)의 벽상용포(劈祥龍 捕)의 일수였다. 순간 비마영은 검을 뽑을 사이도 없이 몸을 풍차처럼 회전시키 면서 재빨리 풍차급전(風車急轉)의 신법으로 후딱 물러났다. {비마영, 네가 피할 곳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장차수의 대갈성이 터지면서 뒤로부터 시퍼런 검광(劍光)이 터져나와 삼엄한 예기를 뿌려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앞과 뒤로 완벽한 공세는 추호도 빈틈이 없었다. (검을 맞는 것보다 장(掌)이 나올 것이다.) 찰나에 판단을 내리자 비마영은 조금도 주저없이 왼쪽어깨로 철 비단수를 막으며 검을 뽑아 장차수의 검을 마주쳐갔다. 차차창! [컥!] 금속음이 요란하게 터지고 그 직후 비마영의 몸이 퉁기듯이 날 아가 사정없이 갑판에 나동그라졌다. 장차수의 검은 막았으나 철비단수의 일격이 여지없이 비마영을 거구러 뜨린 것이다. 사공표를 알 리 없는 그가 철비단수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결과 였다. 금석도 부순다는 철비단수는 그의 왼쪽 어깨를 완전히 으스 러뜨린 것이다. 등과 어깨에 중상을 입은 비마영은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검으 로 자신의 몸을 의지하며 우뚝 섰다. 그런 비마영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공표와 장차수는 내심 침음성 을 삼켰다. 보통사람이라면 벌써 저항을 포기했을 것인데, 기세로 보아 죽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은 들었지만 이렇게도 지독한 놈일 줄이야. 생각보다 일은 힘들어지겠군.) 사공표는 뇌리를 굴리며 차분히 말했다. {비마영, 순순히 우리를 따라간다면 생명만은 보존시켜 주겠다.} {크흐흐....} 비마영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네놈들은 누구냐?}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한 점의 변화도 없이 스산 한 음성이었다. {무림맹!} 장차수가 말했다. {무림맹 감찰전 소속의 장차수라는 사람이지.}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안 비마영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 났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타났나 했더니 무림맹의 개새끼들이었 군.) 내심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그는 오늘로써 자신의 생이 끝났다 는 것을 느꼈다. 한 명만 해도 벅찬 노릇인데 이들은 두 명에다가 또한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무림맹 감찰전에는 귀신도 찾아냈다는 세 명의 당주(堂主)가 있 다던데 바로 당신들인 모양이군.} {비마영! 헛소리는 필요없다. 말장난 따위에 허점을 드러낼 우리 가 아니니까!} 사공표가 냉혹한 어조로 비마영의 말을 끊었다. 비마영은 일순 어깨에서 번지는 고통에 휘청거렸다. (개새끼들! 정말 철저하군! 나 비마영도 이대로 끝장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어차리 죽을 바에야 한 놈이라도 같이 지옥에 가 야지.) 생각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섬전같이 사공표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준비가 돼 있던 사공표는 바른손을 기묘하게 뻗었 다. 헌데 사공표의 손과 부딪치려는 순간, 비마영의 장검이 갑자기 빨라지며 그의 손을 떠나 암기처럼 사공표에데 쏘아왔다. {사공형, 조심하시오.} 장차수는 다급히 고성을 외치며 비마영의 옆구리를 검으로 후려 쳐 갔다. 사공표는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했다. 무인으로서 자신의 병기를 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역시 자객이 아닌 사공표로서 는 설마 비마영이 검을 버리며 공격을 해올줄은 몰랐던 것이다. {으윽!} 사공표는 나직이 신음성을 터뜨렸다. 비마영의 장검은 그의 어깨 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 장차수의 검은 비마영의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비마영은 상처따위는 아랑곳 없이 사공표를 향해 악귀처 럼 덮쳤다. 사공표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철단파룡(鐵斷破龍)!} 대갈성이 그이 입에서 천둥처럼 터지고 손그림자가 수십 개로 불어났다. {사공형, 그를 죽이면 안되오.} 다급한 장차수의 외침에 흠칫한 사공표는 일순 공력을 급히 감 소시켰지만 완전히 거두어드릴 여유는 없었다. 퍼펑! 그의 강맹한 역도가 실린 장력은 그대로 비마영의 삼대요혈(三大 要穴)에 작렬했다. {으악_____!} 처절한 비명을 터뜨린 비마영은 삼 장이나 날아가 물 속에 곤두 박질쳤다. 석양의 노을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악양성 동정호변에 위치한 악양루(岳陽樓), 이십대 중반의 문사 티를 물씬 풍기는 서생이 이층의 창가에 앉았다. 혈색이 감도는 매끄러운 살결과 뚜렷한 이목구비, 붉은 비단 홍 삼은 보기에는 권문세가의 자제처럼 보였다. 그는 천천히 음식을 들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주위에서 떠도는 주객들의 여담에 쏠려 있었다. 모습은 비록 달라졌으나 언제나처럼 무감동한 눈빛과 입가에 걸 린 희미한 미소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제남성의 손씨모녀를 떠나온 담사였다. 2 [....!] 문득 느릿하게 술잔을 입가에 대던 담사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왼쪽편 탁자에 병기를 지닌 삼 인이 장한이 담소를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입에서 무림맹의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강형, 소문 들었니? 어젯밤 옥향이란 년의 화방에서 혈전이 벌 어졌는데, 그 와중에서 한 명이 죽고 비마영이라는 자는 무림맹의 지부로 잡혀갔다는구먼.} 한 사내의 말에 그자의 맞은편에 앉은 강씨의 장한의 입에서 호 탕한 웃음이 터졌다. {하하! 아니 자네는 그 일을 지금에야 알았나? 나는 어젯밤부터 벌써 알고 있었네.} 강씨 성 장한의 눈빛이 의기양양해졌다. {죽은 놈은 호태라고 하는 놈으로 평소에 도박장에서 어깨 노릇 을 하던 놈이야. 그리고 물림맹에 잡힌 비마영이라는 자는 이름난 자객이지. 그 자를 잡아간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다른 두 사람의 눈빛에 호기심이 서렸다. 장한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자네들 무림맹의 감찰전 알지?} {예끼, 이 사람아! 강호천지에서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 나?} 옆의 장한이 한 마디 했다. {저승의 염라대왕을 만나더라도 지상에 있는 염라부(閻羅府)의 인물들은 피해가 되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상에 있는 염라부란 말은 강호인들 사이에 무림맹의 감찰전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비마영을 잡아간 사람들이 그들이란 말인가?} {그렇네. 그것도 보통 감찰전의 인물이 아니라 당주급 인물들이 라 하더군.} 이어 장한은 한 바탕 없는 말까지 보태어 한동안 어젯밤 사건을 늘어놓았다. 담사는 창가를 바바라보면서 계속 술을 들이켰다. (역시 무림맹의 정보는 빠르군. 비마영이 잡혔으니 이제는 남은 것은 두 명! 서둘러야 하겠군.) 힐끗 세 명의 장한을 일별한 담사의 표정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의 뇌리에 하나의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다. 취화루(翠花樓)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청매(靑梅)는 이제 십 팔 세의 나이로 청순하면서도 막 만개하려는 요염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밤 그녀가 모시게 된 손님은 조금 묘한 데가 있었다. 그는 서생이었는데 다른 사람처럼 자신의 손을 잡는다거나 이상 한 행동을 일체 하지 않고 묵묵히 술만 마시는 것이었다. 청매는 내심 기이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 잘생기고 부유해보이는 손님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은근히 그녀쪽에서 유혹을 했다. {공자님, 여기는 처음이예요?} 청매는 눈웃음을 치면서 슬쩍 섬섬옥수를 서생의 허벅지 부근에 얹었다. 서생의 시선이 술잔을 떠나 청매를 응시했다. {이름이 청매라고 했나?} 청매는 고개를 끄덕이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저의 이름은 방금전에 말씀드렸는데 벌써 잊으시다니요! 몰라요.} 청매는 고양이같은 소리를 내며 자그마한 주먹으로 서생의 가슴 을 콩콩 두드렸다. 애교를 떠는 그녀의 모습은 사내의 혼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미안하네, 그런데 말이야...} 서생의 눈빛이 은근해지면서 그의 손이 품 속을 들어갔다가 빠 져나오자 몇 장의 전표(錢票)가 나타났다. 각기 백 냥짜리인 은표(銀票) 석 장을 보는 순간 청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정도의 액수면 자신이 포주에게 진 빛을 모두 갚고도 충분히 다른 생활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돈이다.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은데 들어 줄 수 없겠나?} 청매의 눈길이 뜨겁게 빛이 났다. {말씀만 하세요. 무슨 부탁이든지 다 들어 줄테니까요.} 서생은 빙그레 웃으며 꺼낸 석장의 은표들 중 한 장을 청매에게 주었다. {이 일이 끝나면 나머지 두 장을 다 주지.} 청매는 은표의 감촉을 손 끝으로 생생히 느끼며 서생의 입을 쳐 다보았다. 이 정도의 보수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다. 설령 살 인이라도...! 이어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서생의 말에 청매는 배시시 웃었다. 서생이 부탁한 일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청매는 갑자기 찾아온 이 횡재에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상표(商豹)-! 그는 무림맹의 악양지부 소속의 무사였다. 나이 올해 서른인 그는 아직 마누라가 없었다. 반 년 전, 우연히 길가에서 청메를 본 이후 그는 시간이 날 때마 다 그녀를 찾아왔다. 한 마디로 그는 청매의 미모에 푹 빠져 있었 던 것이다. 하지만 청매는 단 한 번도 그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열 여 덟의 나이로 한창 잘 나가는 청매에게 외모도 별 볼일 없고 가진 재산도 없는 상표 따위는 성에 차지도 않는 때문이다. 헌데 그 쌀쌀맞던 청매쪽에서 먼저 그를 보자고 연락을 해왔다. 당연히 상표는 일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취화루로 한달음에 달려왔 다. 상표는 청매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가 먼저 자신을 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미 온몸이 욕정으로 달아올라있었다. {아이, 왜 그리 급해요.} 하지만 청매는 슬쩍 그의 몸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우선 술부터 한 잔 드시와요.} 살살 녹는 음성과 나긋나긋한 청매의 자태에 상표는 얼빠진 사 람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자리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청매가 먼저 나를 보자고 하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청매는 눈을 흘기며 교소를 지었다. {제가 보자고 한 것이 싫은가요 상어른?} {무슨 소리! 나는 그저 청매가 나를 싫어 하는 줄 알았는데.....} {상어른도 잘 아시잖아요. 전날에는 비록 마음 속으로 생각은 있 었으나 상어른의 간절한 마음을 몰랐으니....}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소매끝으로 살짝 입을 가리며 눈읏음을 치는 그녀의 고혹한 자태에 상표의 입 가로 게거품이 흘렀다. {청매, 내 비록 별로 가진 것은 없지만 청매를 생각하는 마음만 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것이야.} 3 감격에 찬 상표의 손은 어느 새 청매의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청매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그의 품속으로 안겨들었다. 벌써 한 달이나 여체에 굶주리 상표는 성급하게 설쳤다. 청매의 상의가 허겁지겁 벗겨지고 치마가 흘러내렸다. 은은히 분홍빛을 띈 새하얀 청매의 우유빛 나신이 드러나자 거 친 숨을 몰아쉬는 상표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의 거칠은 손이 청매의 사타구니 사이를 파고들어 벌리려 들 자 청매는 코맹맹이같은 신음성을 흘렸다. {아이... 상어른! 성급하시기는......} 몸을 비틀며 은근히 앙탈하는 청매의 치태는 상표의 꼭지를 돌 게 하기에 충분했다. {말씀해주세요! 요사이 지부에 총단으로부터 높은 분들이 왔다면 서요?} 청매의 물음에 욕정에 들떠있던 상표의 표정이 흠칫했다.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여전히 욕정에 몸을 떨면서도 상표는 의심에 찬 표정으로 물었 다. {누가 그러긴요. 벌써 모두가 알고 있던데....} 청매는 눈웃음을 치며 갓 씻어낸 무같이 미끈한 다리를 벌려보 였다. [으음!] 활짝 개방되어 전모를 들어낸 청매의 야릇한 부분을 직시한 상 표는 다시 음욕의 불길이 겉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 꼈다. 그는 입을 청매의 수밀도같은 젖무덤에 갖다대며 손은 아래쪽의 계곡으로 밀어넣어 바쁘게 움직였다. 청매도 섬섬옥수로 사내의 바지 속을 헤집으며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떤 인물이예요?} {나중에 말하지. 지금은 이 일부터...} 그가 거칠게 찍어누르며 분격적인 행위로 들어가려고 하자 청매 는 갑자기 그를 밀치며 일어섰다. 그 다음 순간 상표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엉겁결에 반듯이 누운 그의 몸위로 허리를 숙인 청매가 고혹한 미소를 짓더니 입술 을 그의 중심부로 가져간 것이다. [허억!] 상표의 입에서 헛바람이 빠지는 듯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너무 도 보드랍고 촉촉한 청매의 입술이 그의 끊어질 듯 아픈 일부를 애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쌀쌀맞고 도도하던 청매가 이런 봉사까지 해줄줄은 상표로서 는 상상도 못했었다. 촉촉한 입술이 끝부분을 흡입하고 미끈덩한 혀가 용틀임하는 기둥의 뒤쪽을 핥아올릴 때마다 상표는 짐승같이 으르렁거렸다. 청매는 혀를 움직이면서 고혹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듣기로는 그 사람들도 이곳으로 풍류를 즐기러 왔다고 하던데 우리 집으로 모셔오면 오때요?} {무슨 소리! 부전주가 어떤 분이라고....} 청매의 말에 상표는 자신도 모르게 노기띤 목소리로 외쳤다. 하 지만 그 직후 상표는 경각심을 느꼈는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흥! 말하기 싫으면 관둬요.} 갑자기 청매가 발딱 일어서더니 몸을 돌렸다. [흥! 난 상어른을 특별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어른은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것같군요! 흥흥!] 청매가 토라져 앉아 연신 콧방귀를 뀌자 욕정에 눈이 뒤집힌 상 표는 다급해졌다. {내 말을 들어 봐! 그 분들은 그런 일로 온 게 아니고 누구를 잡 으러 왔단 말이야.} {거짓말을 하려면 당장 나가요.} 발딱 일어선 청매는 상표가 벗겨놓은 옷을 잡았다. 다급해진 상표는 급히 그녀를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감찰전의 사람들이 어떤 자들이라고 풍류를 즐기러 다니겠어?} 청매는 샐쭉한 얼굴로 따지듯이 말했다. {그들도 남자인데 다를 게 뭐 있어요?} {글쎄, 내 말을 들어 보라니까!} 마음이 급해진 상표는 앞 뒤 가리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내 용을 모두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부전주이신 조중이란 분은 정말 무서운 분이라구! 현재 지부에 와있는 사람은 그 조어른 뿐이 아니야! 무려 이십 명의 흑건추혼대 와 세 명의 당주까지 와있어!} 한동안 상표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설명이 끝나자 그때서야 비로소 청매는 자신의 몸을 상표에게 개방했다. 한 시진 후, 무림맹 악양지부의 무사인 상표는 만족한 표정으로 취화루를 빠져나갔다. 청매는 온갖 기교와 봉사로 그에게 지극한 쾌락을 맛보게 해주 었다. 다른 어떤 여자도 줄 수 없는 그 짜릿한 희열에 상표는 자신 이 중요한 기밀을 누설했다는 사실조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정 도였다. 한동안 사내에게 시달린 청매는 목간에 들어갔다. 못 생기고 땀 냄새나는 사내와 그짓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직업이라고는 해도 소름이 돟는 일이다. 게다가 마침내 간절히 원하던 그녀를 손에 넣었다고 여긴 상표 는 지칠 줄도 모르고 그녀를 괴롭혔다. 그는 거푸 세 번이나 그녀 를 탐한 후에야 상표는 만족을 하고 떨어졌었다. (호호! 그래도 한 번에 백냥씩인 셈이니 수지맞은 거지 뭐!) 목욕물의 따뜻한 기운이 전신에 퍼지자 눈을 감은 그녀는 머리 속에 석 장의 은표가 떠올랐다. 바로 그때 목간으로 통하는 휘장이 벌어지고 소리없이 서생이 들어섰다. 인기척에 흠칫한 청매는 눈을 떴다. {흐응! 목간까지 들어오시다니 너무해요. 그 작자의 얘기는 옆방 에서 다 들으셨잖아요!} 짐짓 앙탈을 하는 그녀의 입가에 요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 히려 그녀는 물에 깊이 잠겼던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탱탱한 젖가 슴을 은연중에 사내에게 들어내보였다. 이 잘생긴 사내에게라면 공짜라도 기꺼이 육체를 제공할 수가 있다. 원한다면 이곳 욕실에서라도 좋다. 아마 각별한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대로 서생의 새하얀 손이 그녀의 왼쪽 젖무 덤을 움켜쥐어왔다. [하아...!] 여자의 손처럼 섬세한 서생의 손길을 젖가슴에 느끼며 청매는 짜릿한 흥분으로 바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직후 서생의 눈가로 냉혹한 빛이 흐르고, 순간 청매의 동공이 찢어질 듯 확대되고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렸지만 목구멍은 꽉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은 점점 멀어졌다. 4 그로부터 두 시진 후, 몇 명의 관인이 신고를 받고 취화루로 들 이닥쳤다. 목간으로 들어간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싸늘히 식어 있는 청 매의 시신을 조사한 뒤 그녀의 사인(死因)이 병사(病死)라고 단정 했다.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던 때문이다. 다만 죽기 전, 한 차례 정사를 치를 듯 침상만이 어지럽게 널려 져 있었다. 관인은 혹시나 살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가졌다. 그러나 겉보 기에 아무런 상처도 찾아내지 못한 데다 그녀가 손님을 받아 아주 격렬한 정사를 치루었다는 증언을 들은 후 심장발작에 의한 병사 로 처리되고 말았다. 허나 안력이 뛰어난 무림고수가 조사했다면 그녀의 사인이 일종 의 음유한 내가(內家) 장공에 의한 심장 파열이란 것을 알 수 있었 을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지만 그녀의 심장은 완전 히 으스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청매의 시신은 관부로 옮겨졌다. 그녀의 신분은 기녀였으나 가족 이 있다면 주어야 한다. 과인들은 다시 한 번 청매의 방을 세세히 살펴보았으나 그녀의 물건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가 상표를 유혹 한 대가로 받았던 백 냥 짜리 은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 다. 바마영이 중상을 입고 무림맹 악양성 지부에 끌려온 지 이틀 후, 귀견수 조중과 황보가혜가 악양성에 도착했다. 황보가혜는 전날처럼 여전히 남장차림이었다. 조중은 도착하자마자 악양지부장 감천수의 환대를 무시하고 곧 장 지하밀실로 들어갔다. 전날 독목수 소패가 갇혀 있던 지하밀실은 그대로였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묶여있는 것이 소패에서 비마영으로 사 람만 바뀌었을 뿐이다. 조중이 들어서자 장차수와 사공표, 그리고 자운유가 급히 절을 했다. {수고했네.} 비마영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굳어 있었다. 발과 손이 뒤로 묶 여져 있는 비마영의 몰골은 인간이 아니라 상처입은 짐승처럼 보 였다. 퀭하니 움푹 들어간 눈, 산발한 머리, 간신히 하반신만 가린 그 의 몸 곳곳에 선혈이 낭자하고 살갗이 헤집어져 있었다. 한누에도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고문을 당했음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조중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황보가혜는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알아낸 것이 있나?} 조중의 시선이 장차수에게 돌아갔다. 장차수는 쓴웃음을 띄우며 상관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아직 아무런 것도...} {조어른, 실로 지독한 인간입니다. 열 여덟 가지 독형(毒刑)을 시 도했으나 아직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읍니다.} 사공표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자네들은 나가 있게. 내가 말해 보겠네.} 사공표등 세 사람은 고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황보가혜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따라나갔다. 조중은 무표정하게 비마영을 응시했다. 이틀 동안 잠 한 번 자지 못하고 각가지 독형에 시달린 비마영 은 죽어가고 있었다. 허나 독사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초리만은 아 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귀견수 조중을 본 순간부터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조중이라는 사람일세.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비마영은 푸석푸석한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알고... 있소 조나리!} 힘없이 나오는 목소리였지만 비웃는 기색이 완연했다. {다른 말은 하지 않겠네. 짐승도 살려고 발버둥치는데 하물며 사 람인 자네가 죽음을 원한다고는 생각지는 않네.} 조중은 서두르지 않았다. {설혹 자네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월화가 우리 수중에 있는 이상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지금부 터 내가 말하는 것은 확인하는 것 뿐이네.} 월화라니? 월화는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변했지 않은가? 그러나 월화의 죽음을 아직 모르는 비마영에게는 조중의 그 말 이 크나큰 충격이었다. 비록 젊을 때 뼈를 깎는 수련을 거친 덕에 지금까지는 독형을 어찌어찌 견디었지만, 그 역시도 피와 혈육으로 이루어진 인간이었 다. 오직 정신력으로 지금까지 버티어 왔으나 중개인인 월화도 무림 맹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듣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게집이란 믿을게 못된다. 결국 얼마 못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을 고주알 미주알 토해내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제 아무리 신의를 지키려고 입을 다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마영은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서글퍼졌다. 그는 세상에서 천대 받는 자객이었지만 그래도 기쁠 때는 웃고, 울 줄 아는 인간이었 다. 조중은 아무런 말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비마영은 같은 일류자객들에게는 어떠한 육체적인 고문도 통하 지 않는다. 자신을 단련시킬 때부터 극한의 고통을 당해온 그들에게 무력으 로는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조중은 경험을 통해 잘 알 고 있다. 방법은 단 하나, 그것은 이들의 정신을 먼저 굴복시키는 것이다.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고 철로 만든 사람이라도 육체와 정신이 무 너지면 별 수 없는 것이다. <제1권 끝> 제 13 장 刺客 對 刺客 1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마영의 표정이 참담해졌다. {무.... 무엇을 알고 싶소?} 조중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스쳤다. {별 것 아니네. 자네가 노린 표적과 자네를 제외한 다른 자객들 의 이름만 말하면 되네.} {대가는?} {생명이네.} 비마영의 표정이 비감에 잠겼다. {물론 무공은 남겨두지 않겠지?} 조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인터라 비마영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 다. {표적은 범천대공 연대강이고, 이번 일에 고용된 다른 자객들중 추명사(追命蛇)가 끼어있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소.} 순간 조중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암살 표적이 삼태상(三太相) 중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소맹주인 연대강이라니? 조중이 제정신을 차리기에는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 이튿날 아침, 서생으로 변장한 담사는 자신이 묵고 있는 절을 향했다. 빌어먹을 청부자놈들같으니...! 비마영이 무림맹에 잡혔다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는 다시 한 번 이번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조중이란 사나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마영으로부터 한 방울의 기름까지 다 짜낼 것이다. 조중은 귀견수(鬼見手)라는 그의 별호대로 사람을 쥐어짜는대는 전문가다. 아마도 지금쯤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났을 것이다. 비마영 이 또 다른 자객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존재는 모른다. 그렇다고 물론 안심할 수는 없다. 자신의 위협은 그렇다 치고라도 이제 표적대상을 알았으니 그들 은 천라지망을 펼칠 것이다. 사실 그들이 암살대상을 모르고 있더라도 연대강의 암살은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다. 헌데 이제는 어느 정도 사실이 드러났으니 아예 불가능이 아닌 가? 그러나 일은 이미 시작된 것, 이제 와서 멈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神)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 자체부터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연대강은 신이 아니다. 그도 피와 살로 된 보통사람과 다름없는 인간인 것이다. 이제 남은 자객은 자신 외에 두 명뿐이다. 추명사와 비마영이 서로 연락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부 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림맹이 추명사를 찾기 전에 그가 먼저 찾아내야 한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비마영은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몇 사람의 이름 이 나왔다. 천갈(天蝎), 추명사(追命蛇), 그리고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 모충이 살해된 지 삼십 이 일째, 무림맹 감찰전은 아연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조중의 보고를 받은 감찰전주 막대승(莫大昇)은 비로소 일의 심 각성을 느꼈다. 철혈무정 석무심이란 이름은 감찰전에 비치된 문서에 의하면 무 림맹의 적들 가운데서도 제일급으로 분류되어 있다. 감찰전에는 하나의 비밀서고가 있다. 이 안에는 강호 각대문파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무림맹에 반기 를 드는 위험 인물에 관하여 신상내력이 파악된 각종 문서가 보관 되어 있다. 감찰전주 막대승은 이번 일에 문서담당의 책임자인 문창필(文昌 筆) 학만궁(鶴萬弓)을 합류시켰다. -문창필(文昌筆) 학만궁(鶴萬弓)! 문무쌍절의 인물로 문예도 조예가 깊지만 붓으로 시전하는 문창 필번(文昌筆法)은 강호일절(江湖一絶)이다. 성격은 부드러운면서도 신중한 면이 있고 죄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는 사십 칠 세, 그는 우내삼기중 태허천존(太虛天尊)의 기명제자이기도 했다. 조중과 감찰전주 막대승은 학만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만궁은 귀가 크고 각진 모습은 무뚝뚝하게 보였으나 전체적인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학만궁이 입을 열자 두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그 동안 자료에 의하면 천갈(天蝎)이라는 이름은 아직 한 번도 강호상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것 같읍니다.} {...!} {반면 추명사(追命蛇)라는 이름은 과거 몇몇 암살사건에 연루되 어 있으며, 그에 대한 것은 제가 여기 사본을 준비했으니 나중에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탁자 위에 꽂인 똑같은 내용이 담긴 다섯 장의 종이를 가 리켰다. {다음은 철혈무정 석무심인데 이 자에 대한 자료는 충분합니다.} 그는 말하며 두 장의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이름: 석무심, 나이: 이십 삼사 세 가량, 성격: 잔인한 성품에 수법이 독랄한 자임. 특징: 수려한 미목에 무심한 표정, 흑색장삼을 즐겨 입음. 무예: 검에 대단한 조예가 있으며 수법은 잔인하면서도 괴이한 검법을 구사함, 간혹 지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의 무예 근원에 대해서 밝혀진 것은 없음. 무예의 수준은 일류고수임. ...> 2 그 밑으로 그가 강호에 나타난 이래의 활동상황과 자세한 행적 이 기록되어 있었다. {여기서 보다시피 철혈무정의 내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으나 사실 별로 밝혀진 것은 없읍니다. 게다가 한 달 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행방을 다시 추적하자면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 한 것 같읍니다. 현재로서 해야 할 일은 암살에 동원된 자객을 먼 저 찾아야 합니다. 여기에 다른 것은 없으나 추명사의 특징과 그의 모습에 관하여 설명이 있으니 다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중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외에 다른 것은 더 없나?} 학만궁은 생각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가지 더 있기는 한데....} 그가 뒷말을 흐리자 조중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부전주께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모충은 죽었고 월 화도 죽었읍니다.} {그래서...} {그래서 하는 말인데, 철혈무정이 청부자라고 가정할 때.... 모충 이 죽음으로 그자의 계획에는 심각한 차질이 생겼읍니다. 여기서 몇 가지 추측할 수가 있읍니다.} 감찰전주 막대승과 조중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한 가지는 모충의 죽음으로 어느 정도 비밀이 밝혀졌으니 그들 은 연막을 칠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래서 누군가 공동파 장문인에 게 은밀히 모충의 자취를 전했고. 진산도인이 향주지부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막대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추측은 그럴 듯하군.} 학만궁은 빙그레 웃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두 번째, 모충이 살해된 후 철혈무정은 당장 모충을 대신할 자 객이 필요했읍니다. 그로 인해 월화는 철혈무정으로부터 더욱 유능 한 능력자를 구해 보라고 독촉했을 것이고, 시간이 없었던 월화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조중의 눈에 감탄의 빛이 스쳤다. 학만궁의 말은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시 그녀는 약 서너시진 동안 사라졌다가 다 시 나타났읍니다. 제생각으로는 그 시각에 월화는 누군가와 은밀히 만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또 다른 자객을 구하기 위해서...!} 막대승과 조중은 바보가 아니다. 학만궁의 말이 무슨 말인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그 다음 말의 뜻을 환히 알고 있었다. {세 번째, 현재 이 일에 관계된 이름은 죽은 자들을 제외하고 철 혈무정, 추명사, 비마영, 천갈입니다. 이 중에서 자객으로는 비마영 은 잡혔으니 제외되고 철혈무정은 청부자, 천갈은 월화가 잠깐 실 종되기 전날 사라졌으니 그도 해당은 안됩니다. 허나 이 자의 정체 가 신비하니 제외해서는 안되겠지요. 이로써 남은 것은 한 명의 다 른 자객 몇 명 더 있을지는 모르나 제 생각으로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급히 해야 할 일은 두 가지군.} 조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추명사의 추적과 월화가 만났던 의문의 인물....} {그렇읍니다.} 학만궁이 말했다. {추명사는 저의 수하들이 지금 추적 중이고 의문의 인물을 찾기 위해서는 제가 직접 항주성으로 가겠읍니다.} 학만궁의 말에 막대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것으로 각자 해야할 일은 결정됐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조중에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한 마디 해줄 말이 있네. 알고 있다시피 현재 구파 일방은 우리의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위협을 느끼고 협조를 회피 하고 있는 실정에다 시간에 쫓기고 있어 그러한 이유로 나는 어느 정도 수단이 조금 나쁘더라도 상관치는 않을 생각이네.} 잠시 말을 멈춘 감찰전주 막대승의 눈빛이 비수같이 날카로워졌 다. {나의 신념은 단 하나 뿐이네. 무림맹을 적대시 하는 자는 설사 황제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네. 그리고 만일 연공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아무도 살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명 심해 주기를....} 조중과 학만궁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찰전주 막대승의 침중한 말을 혈풍(血風)을 예고하는 것만 같 았다. 무림맹은 전륜교(轉輪敎)와의 대결전이 끝난 후 지금까지 별다른 큰일 없이 평화롭게 지내왔다. 간혹 크고 작은 시비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문제시 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림맹의 전체를 뒤흔들려는 음모가 시작된 것이 다. 감찰전의 분위기는 전례없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며칠 동안 담사는 자신의 처소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지는 않 았다. 비마영의 사건 이래 그는 추명사의 행방을 탐지하기 위하여 분 주히 돌아다녔다. 그 대가로 추명사의 행방에 대한 조그만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팽노대의 정보에 의하면 추명사는 분명 비마영과 연락이 있었다. 그렇다면, 혼자서 행동하는 그로서는 비마영과 거리상 멀리 떨어 져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먼저 성문을 지키는 관인들을 매수했다. 그 결과, 오 일 전 추명사의 모습과 비슷한 인물이 악양성을 들어 왔다는 것을 확인 했다. 황계(黃啓)는 악양성 토박인 동시에 야효방(夜梟幇)의 향주급 인 물이었다. 야효방은 악양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흑도(黑道)의 세력 중 하 나로 이들은 주로 도박장과 주루등을 상대로 기녀를 공급하거나 여파세력으로부터 보호 또는 협박으로 금전을 갈취하는 하오문의 단체다. 초경(初更) 무렵, 언제나 즐겨 찾는 주점에서 황계는 수하 두 명과 음담패설을 지 껄이며 술을 마셨다. 그들의 이야기는 추잡했고 행동은 방약무인했 으나 다른 손님들도 거의 같은 수준의 거친 인간들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삼십대의 험상궂은 사나이가 황계의 좌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왼쪽 뺨에 긴 칼자국이 지렁이처럼 나 있어 음침해 보이는 인상 에 녹삼(綠衫)을 입고 있는데, 허리에 걸려 있는 장도는 그가 무림 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황게 일행을 살펴보던 그 녹삼인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황계의 좌석으로 다가섰다. {잠시 실례하겠소.} 녹삼인의 목소리는 약간 탁하면서도 굵직했다. 황계를 비롯한 두 명의 수하는 어떤 놈이 흥취를 깨느나 하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황계는 힐끗 그를 아래 위로 한 번 훑어보았다. {무슨 일이오?} 녹삼인의 일신에서 풍기는 기세가 험악해 보였는지라 황계의 목 소리는 떨떠름했다. {혹시 야효방의 형제 아니시오?} 녹삼인의 물음에 황계는 흠칫했다. 그의 어조는 녹림도가 쓰는 용어가 아닌가! {그렇소만, 형제는 어느 도상(途上)의 사람이오?} 녹삼인은 반가운 표정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나의 눈이 잘못 보지 않았구료. 나는 하북(河北) 승가채(丞家寨)에 속해 있소이다.} 이 말에 황계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하북 승가채라면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에서 두 번째로 가는 강 력한 세력이다. 야효방을 승가채에 비교한다면 아이와 어른의 차일 것이다. 황계는 급히 일어나 포권을 했다. {야효방의 황계가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녹삼인도 함께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를 했다. {하북 승가채의 하복(河福)이라고 합니다.} 서로 수인사가 오가고 자리에 앉자 자신을 하복이라고 밝힌 녹 삼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황형제, 오늘의 술은 내가 살 터이니 마음껏 마십시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인이니 당연히 내가 사야지 요.} 서로 한 동안 사양을 거듭하며 술잔이 오갔다. 야효방도 따지고 보면 녹림도상의 방파이다. 게는 가재 편이고,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녹림인들의 단결력은 매우 좋다고 할 수 있 다. 하복은 술잔을 내려 놓으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보기에 몹시 도 근심에 찬 표정이었다. {하형제께서 무슨 근심이라도?} 황계가 말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돕겠으니 말씀해 보시 오.} 처음부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복은 쓴웃음을 띠우며 말 했다. {황형제의 의리는 제가 높이 사고 있지만... 이 일은 사적인 일이 되어서....} 그가 짐짓 말 끝을 흐리자 황계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형제 무슨 소립니까?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간에 말 씀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끓는 물이 아니라 불 속 이라도 뛰어들겠읍니다.} 그는 큰소리로 외치며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이거.... 황형제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럼...} 말 끝을 흐리며 한 차례 세 사람을 일별하고 난 다음 은근한 어 조로 설명했다. {사실 저는 한 사람을 찾고 있읍니다. 이 사람은 누님의 남편인 데 정혼을 했을 때는 가난 했으나, 그 동안 누님의 고생으로 어느 정도 살만 해지자 한 달 전 갑자기 돈을 챙겨 가지고 사라져 버렸 읍니다.} 하복은 탄식하며 허탈한 빛을 띠었다. {그래서요?} 황계와 두 사람은 앵무새처럼 말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누님은 열 명이나 되는 조카들을 거느리고 백방으로 수 소문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병으로 드러 눕게 되어 버렸읍니다. 이 일을 제가 몰랐다면 모르지만 동생된 도리로 써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읍니까?} {그러니까 하형제께서는 자형을 찾고 있는 셈이로구료?} 황계가 말하자 하복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읍니다. 제가 며칠 전 그 사람이 악양성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어디 악양성이 조그만 마을도 아니 고.... 며칠 동안 찾아보았지만 허탕만 치고 말았읍니다.} 그의 말을 들은 황계가 걱정말라는 듯이 분연히 외쳤다. {하형제, 걱정마시오. 나 황계는 악양성의 정보통이오. 여기서 많 이도 말고 두 시진만 기다리시면 제가 그 사람을 찾아 오겠소이 다.} 하복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황망히 두 손을 모았다. {이 하복, 죽는 한이 있더라도 황형제의 의리는 절대 잊지 않겠 소이다.} {별말씀은.... 그것보다는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인상착의나 가르 쳐 주시오.} 하복은 연신 감사를 표하며 품 속에서 열냥 정도의 금자를 꺼냈 다. {이것은 제 성의니 경비로 써 주십시오.} 한 순간, 황계와 두 명의 장한들 눈에 탐욕의 빛이 스쳤다. 황금 열 냥이면 쌀이 삼십 가마는 족히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황계는 처음에는 사양을 했지만 하복이 계속 권하자 짐짓 못이 기는 채 받아 넣으며 인상착의를 듣고는 황망히 수하들과 뛰쳐나 갔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옛말이 있듯이 그날밤 야효방의 패거리 들은 온 악양성을 뒤졌다. 하복은 물론 담사가 변장한 것이다. 그는 추명사의 행방을 찾기 위해 악양 일대의 흑도 무리인 황계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황금 열 냥의 위력은 그로부터 두 시진 후에 나타났다. 얼굴에 가득 땀을 흘리며 황계가 주점으로 뛰어들어왔다. 일순 담사의 눈에 광채가 스쳤지만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졌다. 황계는 맞은편 좌석에 털썩 주저 앉으며 술을 물마시듯이 들이 마셨다. {크____ 좋군.} 황계는 의기양양할 표정으로 트림을 하고는 말했다. {하형제, 찾았읍니다.} 담사는 벌떡 일어서면서 환한 표정으로 감사를 했다. {이거 정말 황형에게 무어라 감사해야 될지....} {하하하 다같은 동도끼리 무슨 말을 제가 하북으로 가면은 그때 잘 부탁합니다.} {그거야 이를 말씀입니까? 오시기만 한다면 제가 화끈하게 모시 지요.} {하하 기대가 됩니다!} 한 동안 두 사람은 호통한 웃음을 터뜨리며 술을 마셨다. 4 삼경(三更) 무렵, 담사는 서생 차림으로 만송루(萬松樓)란 객점으로 들어갔다. 그 는 어느 새 악양성에 처음 올 때의 차림으로 돌아간 것이다. 숙박과 함께 술도 파는 만송루는 이미 삼경이 지났지만 제법 많 은 주객(酒客)들로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는 돈푼 꽤나 있는 듯한 담사의 풍모에 강아지처럼 살살 거렸다. 그의 오랜 점소이 생활도 지금 이런 시간에 오는 손님들든 거의 대부분 여자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헤 저의 집에는 미주가효와 기막힌 미녀들이 있지요.} 담사는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 은자를 점소이 손에 쥐어 주었다. {마침 제시간에 왔읍니다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점소이는 신바람난 걸음으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안에 들어선 담사는 점소이가 나가자 두 눈을 빛내며 청력을 집중시켰다. (황계의 말에 의하면 바로 옆방에 추명사가 있다.) 한 동안 옆방의 동태에 귀를 기울이던 담사의 입가에 서늘한 미 소가 번졌다. 똑똑! 그때 문득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청초한 미모를 지닌 이십 세 가량의 기녀가 술상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소녀 난향(蘭香)이라고 하옵니다.} {내 성은 하씨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난향은 눈을 곱게 흘리며 그의 옆에 앉자 담사는 호색한처럼 설 쳤다. {흐흐 너의 몸이 일품이구나.} {하공자님, 우선 술부터 드시와요.} 난향은 싫지 않은 듯 몸을 피하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담사의 행동은 완전히 방탕한 탕아처럼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연 신 그의 손은 난향의 몸을 더듬었다. 겉으로는 갸냘프게 보이던 기녀 난향의 몸매는 막상 옷을 벗겨 내자 의외로 풍만했다. 전체적으로 몸은 호리호리했지만 나옷 곳과 부풀 곳은 확실히 나오고 부풀어있기 때문이었다. 동산 같은 탐스런 젖무덤, 그에 반해 한줌이나 될까 싶은 가녀린 허리, 그 개미허리같은 아래쪽에 자리한 평퍼짐한 둔부, 담사의 섬세한 손 끝이 부드럽게 스칠 때마다 난향은 바르르 떨 었다. 그녀는 초생달같은 눈썹을 파르르 떨었고, 살짝 벌려진 붉은 입술에서 짐승 같은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집요한 담사의 손길에 나향의 깊은 계곡은 이내 뜨거운 홍수가 일어났다. [어...어서 제발....!] 집요한 담사의 애무로 인해 몸의 중심부가 얼얼해진 난향은 참 지 못하고 애원했다. 그녀는 스스로 담사의 하의를 벗기며 자신의 육체를 개방했다. [훌....훌륭해요!] 하의가 벗겨지며 들어난 담사의 실체를 본 난향은 기쁨과 경이 의 탄성을 토해내었다. 담사의 그것은 그녀의 손으로 다 쥘 수 없 을 만큼 엄청난 중량감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장대한 크기와 박달 나무같은 강도하며...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난향은 스스로 자신의 화끈거리는 부분 을 벌리고는 그곳으로 담사의 실체를 이끌어갔다. 이미 질펀한 홍 수가 진 그녀의 그곳은 흡사 뜨겁게 끓어오르는 늪지와도 같았다. 담사는 미끈한 다리를 허공으로 쳐들고 안타깝게 몸부림치는 난 향의 중심부로 서서히 몸을 밀어붙여갔다. 자신의 관문이 침탈당하는 순간 나향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 길 로 들어선 이래 그녀는 충분히 준비가 된 상태에서도 처음으로 뻐 근한 둔통을 느꼈다. 하지만 생살이 튿어지는 듯한 그 둔통은 이내 후련한 충만금으 로 돌변하여 그녀로 하여금 절로 앓는 듯한 신음을 토하게 만들었 다. 기대하지 못한 놀라운 희열에 몸부림치며 난향의 섬섬옥수가 백 사처럼 담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정작 담사의 뇌리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담사를 완전히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난향은 완전히 도취되어 열 띈 신음소리를 냈다. 사내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자 그녀의 몸도 어느 새 연체동물처럼 꿈틀대며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삽시에 절정이 육박해왔다. 난향은 그 높은 언덕으로 치받혀 올 라가며 숨을 할딱였다. 헌데 바로 그 중요한 순간 난향은 갑자기 사내의 움직임이 정지 한 것을 느꼈다. {왜....왜 그래요?} 절정 직전에서 멈춰진 난향은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담사에게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담사를 머금은 그녀의 일부는 별개의 생물인 양 움찔대며 자극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담사는 여체의 교묘한 옥죄임과 흡입에도 아무 반응도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난향은 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눈을 떴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엄청난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 며 무어라고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수혈(垂穴)을 짚어 난향을 잠들게 한 담사는 소리없이 난향의 몸 에서 빠져나온 뒤 재빨리 옷을 입었다. 옆방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가 담사의 방문 앞으로 가까와 졌다 이내 떨어져갔다. 담사의 신형이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사경(四更)이 지난 만송루는 간간이 멀리서 들리는 취객의 고성 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담사는 복도를 빠르게 살펴본 다음 소리없이 옆방으로 스며 들 었다. 방문은 문이 잠겨 있지 않아 그대로 열렸고, 불이 켜져있지 않은 방 안은 어두웠지만, 창을 통해 흘러드는 달빛으로 인해 그렇게 어 둡지만은 않았다. 왼쪽 벽쪽에 위치한 침상 위에는 알몸의 여인이 풍만한 상반신 을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보아 잠 속에 빠 진 듯 했다. 담사의 신형은 고양이처럼 한 점의 기척도 없이 침상 아래로 빠 려 들어가듯이 들어갔다. 5 얼마나 지났을까? 스르륵! 문이 다시 열리고 누군가 들어왓다. 침대 아래로 보니 들어서는 그 인물은 왼쪽 발을 약간 절고 있었다. 사내는 힐끗 침상 위를 쳐다본 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그 사이에 잠들다니...} 그자는 탁자 위에 찻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침상에 올라갔다. 사 내가 다시 옆자리로 들어오자 여인은 일순 몸을 흠칫했지만 그대 로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요것.... 밤새 주물러도 싫증이 안 난다 말이야.... 윽!} 잠든 여인의 젖퉁이를 주무르던 그 사내는 돌연 비명을 터뜨리 며 벼락같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촤아! 솟구치는 그자의 등뒤로부터 피분수가 쏟아졌다. 침상위에 툭 튀 어나온 검 끝에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가? {추명사(追命蛇)! 도망갈 수가 없다!} 어느 새 침상 아래에서 빠져나온 담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식지(食指)와 중지(中指)로 사내의 기문(氣門), 현기(玄氣) 요혈(要 穴)을 찔러갔다. 순간 절름발이 사내는 허공에서 후딱 재주를 넘으며 양손을 뿌 렸다. 슈우욱____ 슉! 녹광(綠光)을 머금은 십여개의 독질려(毒叱犁)가 푹죽터지듯 무 서운 속도로 담사의 전신을 쏘아왔다. 담사의 눈빛이 번쩍 불이 났다.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다니.) 찔러가던 식중이지를 거두며 쌍수를 풍차처럼 돌렸다. 파____ 파팍____팍! 잠풍에 맞부닥친 독질려는 주춤했지만, 그 중 몇개가 장풍의 막 을 뚫고 그대로 파고들었다. 허나 이때 담사의 신형은 이미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몸을 휘돌려 발로 천장을 박차며 매처럼 절름발이 사내를 향해 내리꽂 히고 있었다. 절름발이 사내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암기를 쏘아 보내려고 했지만 불가사의한 속도로 덮쳐온 담사의 손길에 기문(奇門), 장대 (壯臺)의 양 혈도가 점혈되고 말았다. [....!] 갑작스런 사태에 잠이 깬 여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공포에 몸이 굳어졌는지 두 눈을 멀거니 뜨고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 슴에는 절름발이 사내의 등에서 쏟아진 선혈이 벌겋게 뿌려져 있 었다. 그러나 담사는 그녀를 아랑곳 않고 재빨리절름발이 사내를 옆 에 끼고 방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꺄아아악!] 그때서야 여자의 입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추명사는 눈앞의 담사를 쳐다보며 넋을 잃었다. {네가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등, 그런 것은 아무런 필요도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비마영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사실이 다.} 담사는 일점의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은 무미건존한 음성으로 말 했다. 자객의 제일 첫째 요건은 안력이 좋아야 하는 사실이다. 즉, 사 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무공수위등 모든 것을 재빨리 파악해야 된다는 말이다. 추명사로서는 눈앞의 인물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 는 자라는 것을 느꼈다. 치밀한 수법과 여유있는 행동, 그리고 야수 같은 민첩성 등은 이 방면에서는 일류로 통하는 추명사로 하여금 절로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등 뒤 명문혈(命門穴)에 난 그의 상처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명문혈은 치명적인 사혈(死穴)로 심하면 즉사하고 조금만 다쳐도 반신불수가 된다. 담사가 그 명문혈을 찌른 깊이는 세치, 추명사는 길어야 이틀을 넘길 수 없는 것이다. 추명사는 자신보다 더욱 지독한 전문가를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 자신도 누구에 못지 않은 독심을 지니고 있으나 이런 자 앞 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내 말이 끝난 후 통쾌한 죽음을 달라는 것이오.} 담사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그 말이 얼마나 진실한가에 달려 있지.} 추명사는 담담히 설명했다. 그가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월화와 비마영, 그리고 철혈 무정의 이름 정도 뿐이었다. 헌데, {천갈(天蝎)이라니...!} 담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나도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소. 다만 그의 이름 이 천갈이고, 직접 보지는 않았으나 무서운 절예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소.} {그것 뿐인가?} 추명사는 문득 허공을 한 번 올려다 보았다. {그렇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담사의 좌수가 소리없이 그의 사 혈을 찔렀던 것이다. 풀썩 주저앉는 추명사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십 년 동 안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전 속에 숨가쁜 삶을 살아온 그의 최후 로서는 너무나 허망했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 쓰러져 가는 자객의 길, 그러나, 그도 한때는 꿈많은 시절이 있었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第 十四 章 追擊, 또 追擊 1 악양성 동쪽에 자리한 소고산(小鼓山) 기슭의 숲 속, 한 구의 시신을 대하는 장차수의 표정은 더 할 수 없이 침울했 다. {이 사람이 추명사가 확실한 것 같소.} 그런 장차수의 등 뒤에서 말하는 거지노인이 한명 있었다. 나이 는 육순 가량인데 오른 쪽 허리에 맨 허리띠의 매듭이 육결(六結) 로 되어 있었다. 그는 바로 개방( 幇)의 악양 분타주인 만취개(滿醉개) 손노삼(孫 老三)이었다. 장차수는 쓴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이다 손타주!} 비마영으로부터 추명사의 정보를 얻은 장차수와 사공표, 자운유 는 개방의 협조를 얻어 추적을 시작했다. 헌데 겨우 그자의 소재를 파악해서 만송루에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그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이튿날 갑자기 개방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달려온 장 차수는 추명사의 시신을 확인한 후 허탈감에 빠졌다. 그 동안 잠 한 번 제대로 자지 못하고 노심초사하며 추명사의 뒤를 추적했는데 시신만 찾았으니...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만송루를 위시해 이 부근 일대를 모조리 탐문했다. 그러나 범인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한 장차수의 일행은 이제 마 지막 단서인 철혈무정 석무심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막북(漠北)!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을 등에 지고 사방 오십여리에 달하는 거 대한 성보가 한 채 세워져 있었다. 흥안령(興安嶺) 일대에 자리잡은 이 거성은 바로 변경의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강대한 세력 막북동맹(漠北同盟)의 총본산인 태양성 (太陽城)이었다. 태양성의 웅장한 성보 안에는 수십 채의 전각들이 바둑판처럼 늘어져 있고 곳곳에 병기를 든 무사들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태양성 중앙에 자리한 하나의 거대한 전각, 이 전각의 바닥에는 일견하기에도 호화로운 자주빛 색깔의 양탄 자가 깔려 있었다. 대전 한가운데에서는 무희(舞姬)들이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차림 새로 둥근 원의 형태로 춤을 추고 있고, 그 주위로 악사인 듯한 자 들이 호각과 북 종류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삘리리_____ 삘리리_____ 둥둥___ 둥____ 둥_____! 기이한 주악과 함께 기이한 율동을 자아내는 무희들의 동작은 격렬하다 못해 노골적이면서도 활기에 가득차 있었다. 대전의 상단부에는 발등이 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가 여러 겹으로 깔려 있었다. 오목(烏木)으로 만든 넓은 탁자에는 이름도 모를 각종 산해진미 가 쌓여 있고, 더우기 놀라운 것은 산양 한 마리가 통째로 구이가 되어 상의 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탁자의 전면에는 호피(虎皮)를 입힌 의자가 놓여있는데 지금 일 노일소(一老一少)가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 금포를 입은 얼굴이 붉은 육순의 노인은 변황무림 최강의 세력인 막북동맹을 창시한 태양제(太陽帝) 막리극(漠里剋) 이었다. 이 막리극과 나란히 앉아있는 젊은 사나이는 중원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삼십대의 기우가 헌앙한 청년이었다. 청년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약간 거무스름한 살결은 강인하면서 도 패도적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막북동맹(漠北同盟)! 이 단체는 천산북로(天山北路)에서부터 시작하여 대막(大漠)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맹주인 태양제 막리극의 휘하에는 청해, 대막, 신강의 패주들이 굳게 단합되어 있으며 무려 삼만에 달하는 정예들이 중원진출을 위해 오늘도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문득 주악이 조용해지고 무희들의 춤도 끝났다. 그러자 막리극이 손을 흔들었다. 태양제는 나이답지않게 건장한 체격과 고절한 무예를 지니고 있 는데 나름대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거웅(巨雄)이었다. {하하 자 모두 이리 와라! 중원에서 오신 모용(慕容)공자에게 인 사드려라.} 막리극의 호방한 웃음에 무희들은 모용공자라는 사나이 앞에 무 릎을 꿇고 상반신을 엎드리며 절을 했다. 그것은 노예가 주인에게 바치는 최대의 경의표시였다. 바닥에 엎드린 여인들의 풍만한 젖가슴이 온통 계곡을 드러냈다. 그녀들의 체격은 한족여인에 비해 컸으며 몸매 또한 풍만하면서도 날씬했다. {어떻소, 모용공자? 마음에 드는 아이를 골라 보시겠소?} 태양제 막리극은 호탕하게 웃으며 권했다. 그러나 모용공자라는 이 청년은 담담히 미소를 띄우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막어른의 호의를 감사히 생각하오나 사양하겠읍니다.} {허허! 본래 영웅은 원래 호색(好色)하는 법인데 모용공자는 그 렇지 않은 것 같구료.} 막리극이 놀렸지만 모용 성의 사나이는 그저 담담히 웃기만 했 다. {이것 보게! 일은 일이고 오늘은 마음껏 즐겨 주게. 그래야 자당 (慈堂)이신 모용부인(慕容婦人)에게 내 체면이 설게 아닌가?} 막리극이 다시 농담을 하듯이 가벼이 말하자 청년의 표정이 다 소 굳어졌다. {막어른의 성의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저에게는 별로 시간이 없 읍니다.} 약간 무뚝뚝한 어조에 막리극의 표정은 신중해졌다. {허헛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는 말하며 무희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다도록 해라.} 그러자 대전에 모여 있던 중인들은 모두 일어나서 정중히 절을 하고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갔다. 2 이윽고 대전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막리극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자네가 나를 보자고 이 먼곳까지 달려온 이유는 뭔가?} 막리극의 말에 청년의 눈빛이 아주 날카로워졌다. 어둠의 빛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의 안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만 들었다. {어머님께서는 전날 약정한 계획을 일부 변경했읍니다.} 그의 이 말에 막리극의 눈썹이 휘어졌다. {무슨 말인가? 우리 측의 준비는 다 끝났거늘 이제 와서 연기라 니...!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네.} 놀라듯이 말하는 막리극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스며 있었 다. 그러나 사나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차분히 말했다. {우리쪽에 불가피한 사정이 생겼읍니다. 계획대로라면 다가오는 단오절(端午節)에 시작을 해야되겠지만 어머님께서는 두 달 뒤로 연기했으면 합니다.} 한 순간 막리극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직이 거친 숨을 몰 아쉬며 마음을 억눌렀다. {연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뭔가?} 짤막한 말이었지만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여실히 담겨 있었다. {현재 북천뇌보(北天雷堡)와 무림맹이 연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읍니다.} [뭐라고?] 막리극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입까지 쩍 벌린 것이 대단히 놀 라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릇 한 파의 종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역량이 있어야 한다. 담대한 포용력과 판단력, 그리고 태산이 무너져도 초연할 수 있는 정신력 등 모든 재질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막리극은 이 모든 것을 고루 갖춘 일대의 종사라고 할 수 있는 거웅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렇게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그 일이 얼마나 그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북천뇌보가 무림맹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 말을 반복했다. {북천뇌보의 여식인 북천일미(北天一美) 뇌옥연(雷玉蓮)과 무림 맹의 소맹주인 연대강의 혼사가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습니다.} [으음... 그런 일이...!] 모용성을 가진 청년의 말에 막리극은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막리극은 오래전부터 중원으로 진출하여 무림맹을 깨트리고 천 하의 패주가 되고자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모용성을 지닌 이 청년과 그의 어머니가 이끌고 있 는 비밀세력이 제휴를 제안해왔었고, 막리극은 기꺼이 결맹을 약속 했다. 모든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원내부의 조 력자로부터 중원진공의 연기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그 연유가 혼사를 통한 무림맹과 북천뇌보의 결연이라면 분하지 만 수용할 수밖에 없다. 막북동맹으로서도 북천뇌보와 무림맹을 동 시에 상대하기는 벅찬 것이다. 한동안 대전에는 질식할 듯한 침묵이 흘렀다. 문득 막리극의 눈빛이 횃불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혼사는 막 아야만 해. 어떤 일이 있어도...} 막리극의 말에 청년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읍니다.} 막리극은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래 모용부인께서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청년은 천천히 술잔을 잡았다. {죽은 자가 혼인을 치룰 수는 없지요.} 순간 막리극의 눈빛이 밝아졌다. {흐하하하! 그 말은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본 말 중에서 제일 마음 에 드는군.} 광소를 터트리며 막리극은 술잔을 들었다. 한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와핫핫...} 호쾌하게 울려퍼지는 대소는 대전을 뒤흔들며 멀리 퍼져나갔다. 이 무렵 문창필(文昌筆) 학만궁(鶴萬弓)은 항주성에서 황룡개의 도움을 받아 월화의 행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찾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월화가 자주 접촉을 가졌던 인물, 석 달 사이게 항주성 을 출입했던 강호인들 등 모든 가능성에 대한 것을 하나하나 실타 래 풀듯이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항주성은 풍류의 고도(古都)이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가지각양 의 사람들이 출입한다. 이 모든 사람들을 조사하기에는 시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개방분타에는 그날 그날 항주성에 드나드는 사람 중 특 별한 자가 있을 때는 그 사실을 기록해둔 문서가 있었다. 석 달 동안 많은 강호인이나 대상인, 몇몇 황족(皇族) 등도 있었 지만, 학만궁의 눈길을 끄는 것은 월화루를 들린 사람 중 단 두사 람 뿐이었다. 팽노대(彭老大)란 이름과 호치숭(胡値嵩)이란 이름이었다. 팽노대는 상인이었고 호치숭은 항주성의 명문세가인 금룡장(金龍 莊)의 총관이었다. 학만궁은 두 눈을 빛내며 황룡개에게 물었다. {팽노대란 자와 호치숭에 대한 것을 알고 있소?} 한쪽에서 기분좋게 옥호춘(玉戶春)을 마시고 있던 황룡개는 거스 츠레한 눈을 휘번뜩였다. 그는 상부에서 무림맹에게 협조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전날 황 보가혜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을 하면 두 번 다시 무림맹의 사람들 과 상대도 하기 싫었다. 한 달 전, 황보가혜가 개방의 항주 분타로 쳐찾아왔을 때 황룡개 는 그녀의 매서운 손속에 당해 이틀 동안이나 드려누웠었다. 다짜고짜 개방 분타로 쳐들어와 월화의 정보를 내놓으라고 욱박 지르는 바람에 그녀를 쫓아내려고 몇명이 달겨들었지만 모조리 나 뒹굴었다. 특히 황룡개는 엉덩이가 채여 이틀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한 것 이다. 결국 그녀의 내력을 알고 나서 순순히 모든 것을 응해 주었으나 분풀이 할 곳을 잃은 그는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황룡개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그자들이 누구인 줄 알게 뭐요? 모든 것을 문서로 보관되 어 있으니 그리 아시오.} 3 그는 다시금 술을 마셨다. 학만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은근히 말했다. {이 일은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오. 내 은혜는 잊지 않을 터이니 알고 있는 사실만 말해 주시오.} 이어 그는 품 속에서 한 장의 은표를 꺼내 옆에 있던 세 가량의 화자에게 넘겨 주었다. {얼마 안되지만 이것으로 술이나 한 잔 사서 마시게.} 힐끗 은표의 액수를 확인한 젊은 화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 순간 그는 재빨리 까마귀 같은 더러운 손으로 은표를 낚아 채며 황룡개의 눈치를 살폈다. {이 놈아 보기는 뭘 봐. 어서 술이나 사가지고 오지 않고....} 황룡개는 냅다 버럭 고함을 지르고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놈! 그 동안 입혀 주고 먹이고 키워 주었더니 돈에만 눈이 뒤집혀 가지고서... 죽일 놈!} 한 동안 무어라고 욕지러리를 내뱉으면서 팽노대에 관하여 설명 했다. {팽노대란 놈은 상인행세를 하고 있지만 무언가 구린 냄새를 풍 기고 있소. 사실 그 동안 우리도 그 자의 정체를 조사했지만 별다 른 소득은 없었소이다. 월화가 죽고난 후 그 다음 날 출항을 했는 데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소. 호치숭은 적혀 있는 그대로이데 금룡장을 반 년 전부터 사업을 크게 확장해서 현재 절 강성의 상권을 휘어잡고 하남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소.} 황룡개는 힐끗 학만궁의 얼굴을 쳐다본 다음, {내가 아는 것은 이것 뿐이오. 다른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곧 조사해 보도록 하겠소.} {고맙소이다.} 학만궁은 그의 말을 뇌리에 담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 날 초경 무렵 학만궁은 금룡장을 방문했다. <금룡장(金龍莊)> 그들은 항주성 일대에서 손꼽는 거부에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세가이다. 전장, 골동품가게, 차, 비단 등 많은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는 대 상인 집안이면서도 무림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장주는 전육당(田六堂)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현재 항주성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오순가량의 나이에 화려한 화포를 입은 전육당은 배가 툭 튀어 나온 전형적인 거부의 모습이었다. {어서오시오, 학대협!} 학만궁이 대청에 들어서자 전육당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 다. {학만궁이 전장주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통성명이 끝나자 시녀가 차를 가지고 왔다. {차 한 잔 드시지요?} 차는 차중에서도 최고의 고급품인 용정(龍井)이었다. 금룡장의 대청은 그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이 바닥에는 양탄자가 푹신하게 깔려 있고 금치믈 입힌 기둥, 벽에 걸린 송대의 고서화 등 매우 호화스러웠다. {헌데 학대협께서 저를 보자고 한 것은...} 학만궁은 빙그레 웃었다. {별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항주성을 방문하게 되었기에 평 소에 전장주님의 이름을 듣고 그만 실례를 범하게 되었읍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 학대협은 무림맹의 실력자로서 강호에서 협맹이 자자한데 오히려 제가 학대협을 모시게 된 것이 영광이지 요.} {무슨 그런 말씀을... 금룡장이라면 절강성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 지 않읍니까?} {허헛... 제가 조금 부를 가지고 있다 해서 알려졌겠지만 어디 무 림맹에 비할 수가 있겠읍니까?} 한동안 두 사람은 세상사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학만궁은 금룡장을 빠져나와 지부로 향했다. (금룡장! 생각보다 신비한 데가 많아 호치숭이 일 관계로 강북으 로 떠났다고 하지만 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일, 필히 조사를 해 봐야 하겠군.) 문창필 학만궁이 금룡장을 떠난 직후, 금룡강의 후원에 자리한 깊은 내실에서는 세명의 인물이 심각한 표정으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상가장(桑家莊)에 나타났던 철혈무정 석무심과 금룡 장주 전육당, 그리고 피부가 희다못해 투명해 보이는 절세미녀였 다. {백부님, 학만궁이 얼마나 눈치를 챘을까요?} 교염한 미녀의 목소리는 상가장에 나타났던 복면여인의 음성과 흡사했다. 전육당은 눈썹을 찌푸렸다. {학만궁은 무림맹 감찰전에서 제사인자인 인물인만큼 그의 안력 은 매서운 데가 있지.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그들의 손길이 뻗쳐올 것이다.} 여인의 고운 아미가 찌푸러들었다. {백부님, 그럼 앞으로...?}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의 말에 전육당은 신중히 말했다. {학만궁은 내가 맡겠다. 너는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라.} {하지만 백부님도 알다시피 학만궁은 보통 인물이 아니예요. 게 다가 그 자의 뒤에 누가 또 있는지도 모르구요.}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소식에 의하면 현재 항주성에 들어온 무림맹의 인물은 학만궁 혼자 뿐이다. 그리고 아직 극단적 인 상황은 아니니 벌써부터 위축될 필요는 없어.} {...} 전육당의 말에도 석무심과 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 다. {그 일은 그렇다 치고 석무심, 담사라는 자의 행방을 찾았느냐?} {그게 아직은...} 석무심이 주저거리자 여인이 나서면서 말했다. {백부님, 그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 자가 어디에 있든 결국 우리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자신만만한 그녀의 말에 전육당은 껄걸 웃었다. {허헛 너의 말은 못믿는 것은 아니라 일의 중요함을 생각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하긴 그 자의 종적이 그렇게 쉽게 드러난다면 우리의 일에 쓸 모가 없지.} 여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제가 생각할 때 담사라는 자는 성공할 가능성이 반 이상은 되 어요. 일은 이미 시작된 것,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나는 그 자가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전육당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의 어머니와 나는 언제나 너를 믿고 있다. 이번 일은 모 두 너의 머리에서 계획된 일이니 모쪼록 실수없이 잘 해결을 하도 록 해라.} 여인은 환한 미소를 띄었다. 만개한 꽃이 활짝 피어오르는 듯이 고혹적인 매혹의 미소였다. 4 학만궁이 항주 지부에 도착했을 때 반가운 소식이 그를 기다리 고 있었다. 지부장인 원이광이 그를 맞으며 하나의 전문을 보였다. <팽노대의 배가 악양(岳陽)을 향해 출항했음. 또 월화가 죽기 삼 일 전 서너 시간 동안 팽노대와 만났다는 것 이 확인되었음. 황룡개.> 학만궁의 입에서 유쾌한 대소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이원광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이형,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단서요.} 그는 전문을 흔들며 다급히 뛰쳐나갔다. {나는 지금 악양으로 갈 터이니 본단에 연락해서 부전주님이 올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전문을 무어라고 보낼까요?} 이원광이 다급히 외쳤다. {마지막 자객의 행방 발견이라고 보내시오.} 이 말이 끝났을 때 학만궁의 신형은 마굿간에 있었다. 잠시 후 학만궁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두두.... 두______ 두! 그의 자태가 항주성 북문(北門)을 벗어났다. 금룡장의 대청, 전육당은 수하의 보고를 받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학만궁이 항주성을 떠났다는 소식은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 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으음! 북문으로 나갔다면 무림맹이 아니라 다른 곳인데...) 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나직이 수하에게 지시했다. {좌총령(左總令)에게 연락해서 학만궁의 행선지를 조사하도록 해 라.} {알겠읍니다, 장주님!} 장한이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문득 이때 석무심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 생겼읍니까?} 전육당은 힐끗 그의 얼굴을 일별했다. {학만궁이 항주성을 떠났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구먼.} {그 자가 떠났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닙니까?} 그 말에 전육당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멍텅구리 같은 놈! 저따위 돌대가리로 어떻게 무예를 익히게 됐 는지 모르겠군.) 내심 욕설을 퍼부었지만 겉은 아무런 기색도 없었다. 다만 그의 머리가 가볍게 흔들릴 뿐이었다. 말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악양으로 출발한 학만궁은 먼저 숭명도(崇明島)에 자리한 장강 (長江) 수로녹림(水路綠林) 총타에 들렸다. 당대 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의 총타주(總舵主)는 흑사룡(黑死龍) 여운모(呂雲毛)란 인물로 당금 무림에서 그의 수공(水功)은 적수가 없었다. 그는 비록 녹림인이었지만 사람됨이 호탕하고 녹림인답지 않게 정도를 걷는 인물이었다. 사실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학만궁과 여운모는 인척지간이 었다. 여운모는 학만궁의 외숙아들 즉 둘은 외사촌 형제인 것이다. 여운모는 은밀히 찾아온 학만궁을 보자 대단히 반가와 했다. 오 년 이래 아무런 연락이 없었던 두 사람은 밤새 술로써 회포를 풀 었다. {하하하 그래, 오 년 동안 콧배기도 보이지 않더니 어쩐 일로 나 를 찾아왔나?} 여운모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 동안 무림맹에서 큰 감투를 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왜 목 이라도 잘렸나?} 농담섞인 말에 학만궁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역시 형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사실 이번 일에 형님이 저 를 도와 주시지 않으면 할 수없이 형님에게 와서 밥을 빌어 먹어 야 될 것입니다.} {그것 잘 됐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네 같은 사람이 나를 도와준다면 내 당장 이 자리도 물려 주지.} 학만궁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의 농담은 예나 다름없이 여전하군요?} 한 동안 따뜻한 정담이 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학만궁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형님, 저는 지금 중요한 일로 한 척의 배를 찾고 있읍니다. 장 강 하류 어디엔가 있을 것인데 오 일동안 수소문을 해왔지만 아무 런 소득도 없었읍니다.} 여운모는 걱정달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염려말게. 이 사람이 자네가 찾는 배가 장강에 있다면 곧 찾을 수가 있으니 걱정말고 술이나 들게.} 학만궁은 빙그레 웃으며, {역시 형님을 제가 잘 찾아왔읍니다.} {이 사람 그런 말보다 잠시 후 내 처자나 만나 보게. 형제라야 나이든 사람 중 이제 우리 밖에 더 누가 있나! 무림맹의 높은 자리 에 있다고 해서 급한 일이 많겠지만 자주 찾아와 주게.} 이 말에 학만궁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학만궁은 녹림인들을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예로부터 정 과 사는 물과 불처럼 상극이 아닌가? 게다가, 그는 정도의 대문파인 무림맹의 인물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를 따뜻히 맞아주는 여운모의 인정에 문득 학 만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다음 날, 장강 십팔채에 하나의 배를 찾아내라는 명령이 은밀 히 떨어졌다. 태산 기슭에 위치한 상가현(床家縣)-! 점점 햇살이 따가와지기 시작하는 늦봄의 어느날 삼십 대의 봇 짐을 멘 장사꾼 차림의 청년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초췌한 표정으로 주점에 들어섰다. 주점에 들어온 그는 소면(素 ) 한 그릇과 화주(火酒)를 주문했 다. 그는 먼길을 온 듯 음식이 나오자 순식간에 모조리 비우고 입맛 을 다셨다. 양이 차지 않는 듯, 연이어 다시 두 그릇을 추가해 먹는 청년은 주점을 나와서 한 바퀴 마을을 둘러본 후 무림맹 총단(總壇)으로 통하는 길가에서 봇짐을 풀었다. 봇짐 안에는 몇 자루의 붓과 벼루 등 여러개의 문방사보가 들어 있었다. 이윽고 청년은 그것들은 죽 널어놓고 지나가던 행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다. 거의 네 시진 동안이나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으나 청년의 장 사는 영 신통치가 않았다. 해가 기울 무렵 청년은 다시 봇짐을 싸고 주점으로 들어섰다. 그는 싸구려 화주를 물 마시듯이 혼자서 네 병이나 비우고 피곤 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5 오 일 동안 청년은 변함없이 똑같은 주점에 똑같은 장소에서 문 방사보의 장사와 더불어 식사를 했다.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도 이 붓장수 청년을 알게 되었고 인사까 지 나누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비록 불품없게 생겼으나 술을 좀 지나치게 먹는 것을 제외 하면 매우 성실했으며 겸손했다. 어느 민가의 허름한 헛간을 빌어 잠을 자는 그는 이른 새벽부터 장사를 시작해 해가 져야 돌아왔다. 붓장수 청년이 묵고 있는 집주인은 육순이 넘은 노부부인데, 그 는 장사를 끝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만두나 고기 등을 지니고 와서 노부부에게 주었다. 순박한 노부부는 청년의 행동에 감격을 했고 안방을 기꺼이 내 주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을 했다. 붓장수 청년가 그 집에 들어온 지 십 일 만에 노부부는 그를 친 아들같이 여기게 되었다. 또한 주위 사람들도 그의 성실함과 예의 바른 행동에 그를 좋아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호자(李虎子)라는 이름의 이청년은 완전히 그 마을에서 신임을 얻게 되었다. 청심호(淸心湖) 방유광(方有光)은 장강십팔채중 청수채(靑水寨) 소속의 향주(香主)였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에 작달막한 방유광은 이른 새벽에 순찰을 맡게 되었다. 방유광이 탄 배가 수채를 빠져 나온 지 한 시진이 지나자 동녘 하늘이 느릿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방유광은 갑판에 나와 수면에 가래침을 뱉았다. (제기랄.... 하필이면 매홍(梅紅)이 년의 기막힌 사타구니를 맛볼 수 있는 오늘 당직에 걸리게 되다니....) 그는 내심 허연 여체를 그리며 투덜거렸다. 매홍은 수채에서 채주의 시중을 드는 시녀였다. 그 동안 몇 번이 고 기회를 엿보다 겨우 겨우 합궁(合宮)을 하기로 말을 맞춰놓았었 는데 그만 그는 새벽부터 순찰 당직에 걸린 것이다. [시간은 왜 이리 더디가는거야? 그 새 고년이 딴 마음을 품으면 안되는데....!] 방유광은 매홍의 흐벅지 알몸을 연상하며 똥줄이 바짝 바짝 타 들어갔다. 빨리 이 지겨운 하루가 지나야 오랜 소원을 풀 수가 있 는 것이다. 헌데 투덜대며 애꿎은 독대를 걷어차던 방유광의 시선이 문득 한 곳에서 딱 멈추었다. 무엇을 발견한 듯 갑자기 그의 눈에서 빛이 번쩍 났다. (노랑 깃발에 보통 크기의 범선, 배 이름이 송양호(宋楊號)! 틀림 없다. 저 배가 바로 총타에서 찾고 있는 그 배가 틀림없다.) 방유광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우편으로 배를 돌리고 속도를 올려라.} 그의 수하들은 갑작스런 그의 외침에 어리둥절 했으나 곧 배의 방향을 틀고 속도를 올렸다. 희미한 안개 사이로 한 척의 범선이 느릿하게 하류로 미끄러지 듯 가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노랑색 깃발이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 다. {저 배와 십장을 유지하면서 따라간다.} 방유광은 다급히 외치며 선실로 내려갔다. 잠시 후 한 마리의 전서구가 아침 햇살을 뚫고 동으로 날아갔다. 학만궁은 방유광의 전서구를 받아보고 하루만에 무창(武昌)에 도 착했다. 그가 무창성 황학루(黃鶴樓)에 들어갔을 때 조중을 위시하여 황 보가혜, 사공표, 그리고 자운유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나?} 조중이 황급히 물었다. {팽노대의 범선은 한 시진 후면 무창성 포구에 도착할 것입니 다.} 재빠르게 대답을 한 학만궁은 신중한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팽노대는 조사한 바에 의하면 상인으로 행세하고 있으나 사실 은 자객들을 소개하는 자로 밝혀 졌읍니다. 이 분야에서 매우 유명 한 인물인데 현재 배에는 오십 명의 수하들이 타고 있으니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수고했네.} 조중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분히 말했다. {흑건추혼대 이십 인도 함께 왔으니 그 일은 나에게 맡기고 자 네는 철혈무정 석무심의 뒤를 계속 추적하게. 여기는 사공표와 장 차수만 있으면 충분하니 자운유는 자네가 데리고 가게.} 학만궁은 흠칫했다. {철혈무정의 소재지가 밝혀졌읍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금룡장에 출입하는 인물 중 그와 비슷한 인물 이 드나들고 있다는 소식이 개방으로부터 왔네.} 학만궁은 딱딱한 표정으로 나직이 물었다. {부전주께서는 금룡장이 이 일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조중은 침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룡장은 십여 전부터 상인이면서도 무림과 접촉을 가년왔네. 언젠가 한 번쯤 그들에 관하여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 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했지. 내 예감이 틀림없다면 전날 항주성에 서 살해된 두 명의 순찰사자가 어쩌면 금룡장과 무관하지는 않을 걸세.} {알겠읍니다. 즉시 항주성으로 돌아가겠읍니다.} 학만궁이 대답하고 절을 할 때였다. {소노사, 나도 금룡장이란 곳을 가보고 싶어요.} 황보가혜가 갑자기 나서며 말했다. {황보소저, 철혈무정은 보통 놈이 아니오.} 그러자 학만궁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황보가혜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이미 결정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어요. 학노사 빨리 가 요.} 학만궁은 난처한 표정으로 조중을 쳐다보았다. 저번 총단에서 황보가혜의 신분을 알게된 학만궁, 장차수 등 사 인은 그 동안 그녀 신변보호에 신경을 많이 써 왔다. 비록 그후 그녀의 무예수준이 매우 높음을 알고 안심을 하긴 했 으나 그래도 철혈무정 석무심을 쫓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조중은 소태 씹은 듯한 얼굴로 무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앙칼 진 그녀의 교갈에 입을 다물었다. {조노사, 만약 딴소리를 한다면 저 혼자 금룡장에 가겠어요.} {허헛... 누가 무어라고 했나. 만궁! 황보소저를 모시고 가도록 하 게.} 학만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읍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읍니다.} 잠시 후, 학만궁을 위시해 자운유, 황보가혜가 완전히 사라지자 조중은 급 히 말했다. {공표, 총단에 연락해서 황보소저를 보호하도록 항주성에 사람을 보내라고 연락을 하게.} {예, 부전주어른.} 사공표는 급히 나갔다. 第 十五 章 生과 死의 岐路, 산 자는 生을 쫓는다 1 무창성(武昌省) 포구, 한척의 화려한 범선이 천천히 닻을 내리고 있었다. 선착장에는 수명의 인부가 열심히 사다리를 걸쳐 놓고 짐을 풀 면서 움직였다. 두두두두! 헌데 문득 멀리서 우뢰 같은 말발굽소리가 들린다 싶자 이내 수 십 필의 인마가 포구로 돌진해 왔다. 앞장 선 사 인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검은 흑삼에 검은 두건을 지닌 그 기사들은 가슴에 살(殺)이라는 섬뜩한 글자가 금색 수실로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도의 수련을 거친 위맹한 무사들이었 다. 짐을 풀고 있던 인부들은 갑작스런 이들의 출현에 겁먹은 얼굴 로 멍청히 바라보았다. 이들이 선착장에 이르자 그 중 앞장선 사 인의 신형이 화살처럼 범선을 향해 쏘아갔다. 인부들은 눈앞에 그림자가 희끗 스쳤을 뿐 귀신 같은 신법이었 다. 그 뒤를 이어 이십 인의 흑삼무사들도 마상에서 그대로 몸을 박 차고 범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팽어른!} 갑자기 문을 박차고 뛰어드는 장한의 표정은 잔뜩 겁에 질려 있 었다. {무슨 짓이냐? 여종.} 팽노대는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무... 무림맹의 흑건추혼대(黑巾追魂隊)가...} 여종이란 장한이 더듬거리며 말할 때였다. [크악!] [케엑!] 돌연 바깥에서 몇마디의 비명이 일제히 터져나왔다. 순간, 팽노대는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왔다. 범선의 선상에서는 이미 수십 명의 인물이 뒤엉켜 결전을 벌이 고 있었다. 선부(船夫)들은 비록 열심히 싸우고 있었으나 침입해온 흑삼무사 들의 수법이 워낙 고절했다. 팽노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순 그의 시선이 한쪽에 못박혔다. 한명의 동안(童顔)의 중년인 이 선미에 서서 격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견수 조중....!} 그 동안의 중년인을 발견한 팽노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심이 담겨 있었다. 바로 그때 조중도 선실 밖으로 나온 팽노대를 발견하고 손을 흔 들며 외쳤다. {멈추어라!}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격전을 벌이던 흑건추혼대와 사공표, 장차 수, 자운유 등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멈추고 물러섰다. 팽노대는 선상을 둘러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수하 오십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이십 명도 채 되지 않고 그나마 성한 사람도 별로 없다. (무림맹의 척살조인 흑건추혼대의 무서움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 록 짧은 시간에 나의 수하들을 태반이나 살상하다니....) 팽노대는 공포와 함께 격렬한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무림맹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짓들이 오?} 조중은 느릿느릿하게 팽노대 앞에 다가왔다. {인마(人魔) 팽조(彭鳥)! 나의 눈이 틀리지 않겠지.} 순간 팽노대의 표정이 잿빛으로 변했다. 설마 귀견수 조중이 한 눈에 자신을 알아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그였다.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주춤 물러서는 팽노대, 아니 인마 팽조의 이마에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칠 년 전 하남성 개봉에서 용하게도 나를 피했지만 오늘은 기 적이 없는 한 절대 피할 수 없다 인마 팽조.} 늘 온화해보이던 조중의 두눈이 섬뜩한 한광을 토해내었다. 그의 별호가 어째서 귀견수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칠 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나를 알아보다니.... 역시 귀견 수로군.} 팽노대는 체념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이들은 완전히 모든 준비를 갖추고 나를 찾아왔군.... 자칫하면 오늘로써 나의 생이 끝나겠는데....) 팽노대는 연신 뇌리를 굴리며 기회를 보았다. -인마(人魔) 팽조(彭鳥)! 칠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흑도무림에서 흉명을 떨친 일대 마효 (魔梟)였다. 살인, 강간, 방화 등 온갖 악을 저지르고 다니던 그는 팔 년 전 무림맹의 수를 십여명이나 살상하고 달아난 일이 있었다. 당시 싸움의 원인은 그가 보물을 탈취하기 위해서 살인을 하다 무림맹의 무사에게 걸려 싸움이 벌어졌다. 그 때의 결전에서 세 명의 무림맹 무사 중 두 명은 죽였지만 한 명을 놓친 인마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추적을 했다. 그러나, 마침 무림맹 측의 응원군이 도착하는 바람에 일대의 격 전이 벌어지게 되어 팽조는 당시 수명의 무림맹 무사들을 죽였지 만 자신도 상처를 입고 달아났다. 헌데, 그 때부터 무림맹의 집요한 추적을 받은 팽노대는 복건성 (福建省) 북주(北州)근에서 조중과 부딪쳐 중상을 입고 구사일생으 로 도주를 했다. 그 후 칠 년 동안 팽노대는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살아 왔는데 마침내 이 곳에서 다시 조중과 만난 것이다. 조중은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 {팽노대란 자가 살인중개인이라는 소문은 들었으나 악명높던 인 마 팽조라는 것은 몰랐지.} 갑자기 팽노대는 버럭 노성을 지르며 바닥을 쳤다. {모조리 죽여라!}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악에 받힌 팽노대의 수하들은 저돌적으로 흑건추혼대를 공격해갔다. 동시에 팽조 자신도 멀지 않은 곳에 선 조중을 득달같이 덮쳐갔 다. 조중은 자신을 향해 번개처럼 덮쳐오는 팽노대의 좌수를 노려보 면서 추상망월(秋霜芒月)의 일식으로 장력을 뻗었다. {팽조! 네놈의 수법은 옛날과 다름이 없군.} 겉으로는 비웃듯이 말했지만 사실 조중은 내심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팽조의 일견사망수(一見死亡手)는 그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수법이었다. 팽조는 조중의 장력이 물밀 듯이 강력하게 덮쳐오자 찔러가는 수법을 지로 바꾸면서 몸을 왼쪽으로 되폈다. 수법의 빠른 변초와 신법은 귀영처럼 빨랐다. 조중은 그의 빠른 변초에 장력을 회수하면서 풍운뇌전(風雲雷電) 의 수법으로 쌍장을 교차시켰다. 그러자 두 줄기 웅맹한 장력이 공기를 긴장시켰다. 그 즉시 팽조도 지를 다시 장으로 변화시키면서 같이 쌍장을 뻗 었다. 2 펑_____펑! 요란한 굉음이 허공에서 터지고 팽조의 신형이 장력의 탄력을 빌어 화살처럼 선착장쪽으로 날아갔다. 삼 장이나 날아가 맨땅 위에 처박히려고 하는 찰나, 팽조의 신형 은 한바퀴 원을 그리며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는 몸을 세우 자 마자 다시 발 끝으로 지면을 맹렬히 차며 동쪽으로 섬전처럼 날아갔다. 조중은 팽조가 상처를 입은 줄 알고 따라오다가 그가 갑자기 달 아나기 시작하자 노성을 외쳤다. {팽조, 절대 도망갈 수 없다.} 재빠르게 추적을 했으나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팽조의 신형은 벌써 십 장 밖을 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팽조의 신형이 마악 어느 건물 옆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갑 자기 한줄기 음유한 장력이 전면에서 뻗어와 그의 가슴에 작렬했 다. 퍼펑! {으악!} 뒤쪽의 조중만을 경계하고 달리던 팽조는 갑자기 들이닥친 그 장력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진흙탕에 개처럼 처박힌 팽조는 비틀거리면서 재빨리 일어섰다. [크윽!] 하지만 입에서는 한 사발이나 선혈을 쏟아내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다급히 쫓아온 조중은 팽조 앞에 버티고 선 왜소한 체구의 미청년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허허! 황보소저가 또 도와 주셨구료.} 어느 새 나타났는지 팽조 옆에 내려선 남장여인 황보가혜가 싱 긋 웃었다. {이 늙은이가 교활하기 짝이 없어요. 수하들을 버려두고 자신만 도망치다니.} {이 자는 자신의 생명이라면 처자도 버릴 위인이지요.} 조중은 매서운 눈으로 팽조를 노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선상에는 싸움이 곧 끝났다. 팽조의 수하들 중 몇몇 무예가 높은 자도 있었지만 상대는 무림맹의 고수자들이다. 일다경도 되지 않아 살아 남은 자는 모조리 집결되어 끌려갔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팽조는 사방이 탁 트인 정자에서 조중과 마주 앉았다. 비록 그의 몸은 자유를 잃은 상태였으나 기문혈(奇門穴)이 봉쇄 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고문은 없었다. 이곳으로 끌려 올 때부터 자신의 생을 완전히 포기한 팽조는 담 담한 표정이었다. {팽노형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조중의 정중한 말에 팽조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강호의 생활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 하는 법, 죽음에 연연하지 않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조중은 감탄한 얼굴로 두 손을 벌렸다. {팽형의 철담(鐵膽)에 조중은 진심으로 탄복하시오. 하지만...} 조중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 준다면 일이 끝난 후 당신을 풀어 주겠 소.} 팽조는 흠칫하는 얼굴로 조중을 쳐다보았다. 무림맹은 지금까지 절대로 그들과 대항하는 적들을 살려 준 전 례가 없었다. 허나, 또한 그는 조중이 절대로 허튼 소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득 팽조의 눈빛에 삶에 대한 욕구가 타올랐다. (이들은 전 날의 일로 나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살 아날 수 있는 희망도 없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쨌든 칼자루는 저쪽 에서 쥐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전 날 항주성에 있을 때 월화라는 여인과 접촉이 있었 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팽조는 움찔했다. 무어라고 답변을 하려고 했으나 이내 마음을 바꾸어 입을 다물고 조중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은 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 한 가닥 생의 빛이 나타난 이상 말에 신중함이 필요했다. 조중은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눈알만 굴리자 빙그레 웃었다. 마 치 그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팽형, 시간이 별로 없소.} 하지만 조중의 표정이 이내 심각해졌다. {솔직이 말해서 당신도 관련된 암살 건이 지금 이 시간에 벌어 지고 있다면 나중에 당신이 사실대로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해도 팽 형이나 나도 목숨을 바쳐야 하오.} 팽조는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의 생명이야 그렇다 쳐도 조중의 목 까지 달려 있다니... 사실 아직도 조중의 말 뜻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조대협,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줄 수 없겠소?} {팽형, 나의 참을성은 그다지 많지 않소.} 조중의 목소리는 위협의 빛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월화에게 소개시켜 준 자객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을 못 하겠지.} 팽조는 한 순간 목에 응어리가 치밀어서 목이 막힐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월화 같으니....! 결국 그년이 문제였던 것이다. 담사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 었다. 하지만 팽조는 어디까지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무슨 말인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소이다.} {시치미를 뗀다고 해도 아무 소용도 없소 팽조.} 조중의 말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이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 주지. 당신은 월 화가 죽기 오 일 전에 월화와 만났고 그녀는 당신에게 한 가지 부 탁을 했지. 옛날부터 그녀와 관계가 있던 당신은 그녀의 부탁을 들 어 주었으나 그 후 월화가 살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재빨리 항주성을 떠났지.} 팽조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들어가는 듯함 을 느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것은 모조리 알고 있다. 더 이상 발뺌을 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월화의 부탁을 한가지 들어준 것은 사실이오! 헌데 그게 무림맹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난 도저히...!] 팽조는 식은 땀을 흘리며 조중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소개시켜준 자객이 본맹의 소맹주님을 노리고 있거늘 관 련이 없다고?] 쾅! 조중은 더 이상 내심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사납게 외치며 탁자 를 내리쳤다.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두툼한 탁자가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다. 그리고 팽조의 가슴도 함께 철렁 내려 앉고 있었다. (범....범천대공 연대강이 표적이었다고...!) 팽조의 주름 투성이인 얼굴에 주체 할 수 없는 경련이 일었다. 그것을 보면서 조중은 격했던 감정을 다시 추스리며 말을 이었 다. {팽형, 당신도 알고 있듯이 이제 술책을 부려 봐야 아무런 소용 도 없어. 그 자를 위해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가상한 생각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이 죽고 나면 아무런 소용도 없지 않은 가?} 조중은 조용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소. 팽형은 그 자의 이름과 행방만 말하면 되오. 그러면 당신은 다시 전날처럼 되돌아 갈 수 있으니까.}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팽노대는 속이 바싹바싹 말랐다. 인간이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라도 한 번쯤 발버둥을 친다. 팽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살기 위해서라면 부모 마저도 팔 위인이었다. 허나, 그는 담사에 대하여 억제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 다. 만일 자신이 기밀을 누설 한 것을 안다면 그는 절대 자신을 살 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담사라도 무림맹의 고수들에게는 별 수 없 을 것이다. 죽은 자는 더 이상 그에게 위협을 줄 수 없는 것이다. 3 {당신들은 언제까지 나를 잡아 둘 생각이시오?} 이윽고 팽조는 두눈을 교활하게 굴리며 물었다. {우리가 그 자의 숨통을 끊는 순간까지!} 조중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팽조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좋소. 자객은 모두 두 명이오.} 이 말에 조중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 명...?} {그렇소. 나는 월화에게 두 명을 소개해 주었소. 한 명은 독수귀 (毒手鬼)라는 자고 또 하나는...} 팽조는 두 번째 자객을 설명할 적당한 말을 선택하려는 것처럼 잠시 망설이면서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또 한명의 자객에 대해 서는 사실 나도 아는게 하나도 없소.} 조중은 유심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이름은?} 팽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름은 고사하고 그의 얼굴이나 나이, 늙었는지 젊었는지 그것 도 모르는 실정이오.} 팽조의 말에 조중의 표정이 한 순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일 그러졌다. {그렇지만 무슨 이름으로든 그를 부를 게 아닌가?} 조중은 소리쳤다. {분명히 그렇소.} 팽조는 인정했다. {언제나 다른 이름으로서...} {그건 무슨 뜻이오.} {지금 말한 것처럼 애초부터 그는 그림자 같은 인간이었소.} 팽조는 불안한 눈빛으로 지껄였다. {끊임없이 거처를 바꾸고 일을 할 때마다 다른 모습, 다른 이름 으로 행동했소. 어떤 때는 노인으로 어떤 때는 젊은 문사로 도인으 로 등 그는 항상 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소.} 조중은 찌르는 듯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은 그를 무어라고 부르고 있소?} {담사!} {담사! 거기에 무슨 뜻이 있지?} {나도 모르오.} 팽조는 불안이 더해졌다. 조중을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 은 것이다. 조중의 눈빛이 냉랭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팽조는 땀이 배여나옴을 느꼈다. {그 놈은 보통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악마 같은 놈이오.} 그는 중얼거렸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소. 그는 절대로 실수를 범하지 않는 악마 같은 놈이오.} 그는 목이 마르는지 입술을 축이며 계속 설명했다. [나는 그 놈이 어떻게 해서 자객이 되었는지는 모르오. 그의 과 거도 모르고...!] 비지땀을 흘리는 팽조의 얼룰로 공포의 빛이 떠올렸다. 담사는 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주는 인간이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이 년 전이었소. 그 때는 사십 세 가량의 험상궃게 보이는 장한이었는데 절명수(絶命手)가 보내서 왔다고 했 소.] {절명수는 또 누구요?} 조중은 새로운 일음에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절명수라는 이름은 내가 붙어준 이름인데 그 자는 십 년 전 내 가 녹림인이었을 때 두번같이 일했던 적이 있었소. 난 그의 소개서 를 보고 담사를 쓰게 된거요!] 팽조는 입술이 바짝 타는 듯 연신 침으로 입술을 축였다. [담사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출신은 산동성인데 어릴 때부터 변 방에서 생활하다 중원으로 들어 왔다고 했소. 그의 무예는 별로 대 단한 것은 없었지만 실전무예를 익혔는지 난전(亂戰)이 벌어지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소이다.] {...} {절명수와 난 하북 장가장(張家莊)을 턴 다음 헤어졌는데 그 이 후 나는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했소. 그런데 그 자가 이 년 전 절명 수가 보내서 왔다고 나를 찾아온 것이오.} 팽조는 처음 그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생긴 몰골이 평 범한데다 절명수의 친구라는 바람에 적당히 그를 자신의 배에서 일을 시켰다. 헌데, 그가 온 지 한달이 되던 어느 날 자신에게 살인청탁이 들 어왔는데 마침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가 나섰던 것이다. 팽조는 살인표적이 평범한 상인이라 할 수 없이 그에게 일을 맡 겼다. 그런데, 그는 단 이틀만에 표적을 아무런 흔적도 없이 해치웠던 것이다. 그 다음 날 그는 팽조에게 자신은 다른 곳에 머물겠다고 말하고 훌쩍 떠나버렸다. 그 후 팽조는 적당한 일거리가 있으면 그에게 연락을 했고 올 때마다 사람이 바뀌었다. {그 것 뿐이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 뿐이 오. 아마도 이 일을 끝내고 나면 그는 몸을 감출 것이오. 최소한 일평생 걱정없이 살 수 있는 돈이 생길 테니까.} 문득 팽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세상에서 그 놈의 같은 얼굴을 두 번 이상 본 사람은 나 뿐 일 것이오. 같은 모습을 두번 다시 본... 그래서 언제나 나를 죽이 러 오겠지. 세상에서 그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니까.} {그를 두려워 하고 있군.} 조중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소.} 그는 숨결이 매우 거칠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나를 두렵게 만드는 단 한명의 인물이오.} 그의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그는 이제 담사에 대한 두려움을 굳 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 역시 알고 있소. 한때는 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아직 그런 놈을 보지 못했소. 그 놈에게 있어서는 살인이 단순한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마치 백정이 개 돼지를 죽이듯이...! 그 놈은 바로 도살(屠殺)하는 놈이오. 악마 같은 놈이지.}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움츠려 들어갔다. {그 놈은 무슨 악귀처럼 살인을 장난같이 생각을 하오. 그의 표 적이 된 자는 살 생각을 말아야 해요.} 조중은 무슨 주문을 하듯 말하는 팽조의 모습을 지그시 노려보 았다. {팽형, 그 자의 인상을 말해 봐요. 무슨 특징이라든지, 어떻게 생 겼는지....} 팽조는 잠시 생각한 후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마 나이는 이십 이삼 세 정도고... 키는 보통 사람보다 조금 큰 편에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몸을 지니고 있소. 참 그렇지.} 그의 눈빛이 밝아지는 듯했다. {피부빛은 희고 손가락이 길어요. 흡사 여자의 섬섬옥수처럼! 얼 굴 형태는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놈에게는 무언가 야수 같 은 기질을 느낄 수 있소. 흡사 이리를 보는 듯한 느낌 말이오.} 조중은 어둠이 내릴 때까지 팽조가 홀린 듯이 지껄이는 말을 하 나하나 정리하면서 뇌리에 깊이 간직했다. 그날 밤 조중은 사공표, 장차수 등을 대동하고 태산으로 떠났다. 담사라는 자의 행방도 알 수 없었으나 독수귀의 거처를 알았기 때문이다. 주점에서 거나하게 취한 붓장수 이호자(李虎子)는 자신의 거처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앞쪽에서 희끗한 머리가 난 노인이 그에게 부 딪친 듯 스치며 지나갔다. 그 순간 이호자의 귓전에 노인의 나지막한 음성이 스쳤다. {팽노대가 무림맹의 손에 떨어졌소.} 이호자의 발길이 일순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일, 어느 새 그의 발걸음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극히 자연스러운 이 둘의 행동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나 누군가가 이호자의 걸음을 세심히 살핀다면 그의 발걸음이 전과는 다르게 허둥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역시 무림맹의 정보망은 거미줄 같군. 이렇게 된 바 에야 일을 서둘러야 하겠지. 그리고 계획을 수정할 필요도 있겠고.) 자신의 거취가 보이자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 었다. 어느 새 그의 등은 땀에 젖어 있었다. 팽노대의 사건은 그만큼 그에게 놀라운 충격을 준 것이다. 第 十六 章 빗나간 사랑 1 고운청(孤雲靑)은 무림맹 외당당주(外堂堂主) 고운엽(孤雲葉)의 딸이었다. 그녀는 현재 무림맹의 내당(內堂)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고운청은 한달 전에 상가현의 저자거리에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 친 한 사나이에게 넋을 빼앗겼다. 송현중(宋玄中)이라는 이십대의 이 백삼서생은 그녀가 은근히 사 모하는 범천대공 연대강에 못지 않는 준수한 외모와 귀품을 지니 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은밀히 그가 거처하고 있는 양운사(楊雲寺)라는 절을 찾아갔다. 헌데 막 양운사가 보이는 언덕을 넘었을 때 그녀는 문득 은은히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 피리소리는 백락천(白樂天)의 단심가(斷心歌)였다. 그녀는 음율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으나, 그 피리소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실려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피리소리에 따라 걸음을 옮긴 고운청은 한 순간 두 눈이 몽롱해졌다. 오래된 고송 아래 낮에 보았던 송현중이라는 서생이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피리를 불고 있지 않은가?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외로이 앉아 있는 모습은 처량한 음율과 더불어 사정없이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도대체 어떤 애틋한 심사가 있기에 저다지도 외로워 보이는 것 일까?) 갑자기 그녀는 그의 외로움을 포근히 감싸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새 그녀는 백삼서생 송현중의 바로 옆에 다가서고 있었다. 허나 그는 음율에 심취되었는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피리에 열 중했다. 창백한 살결에 짙은 검미가 우뚝 솟은 콧날 아래 여인을 연상시 키는 붉은 입술... 가히 임풍옥수(臨楓玉樹)라 할만한 미남자였다. 문득 송현중의 감겨진 두 눈에서 두 줄기 이슬이 방울져 흘러내 렸다. 고운청은 일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섬섬옥수 로 그의 눈물을 훔쳐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손을 멈추며 흠칫했다. 두 줄기 한성(寒星) 같 은 눈동자가 아련한 슬픔을 담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운청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저렇게도 슬픈 눈인가?)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던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두 사람의 시선은 움직일 줄 몰랐다. 고운청은 섬섬옥수가 품 속을 빠져나왔다. 새콤한 향기가 풍기는 비단천의 손수건이 달빛에 드러났다. 고운청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섬섬옥수가 송현중의 얼 굴로 향하고 떨리는 손길로 흘러내린 눈물을 가만히 문질렀다. 그 순간 송현중의 손이 그녀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사람의 몸이 합쳐졌다. 교교한 월광이 고운청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고통의 신음이 아니라 희열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거친 숨을 뿜어내는 것이었다. 사내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조금도 서두름이 없었다. 시간은 충 분하다. 여체가 미친 듯이 사내를 요구할 때까지 그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최초의 입맞춤은 여체는 겁먹은 듯 굳어져 있었으나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젖가슴에 이르렀을 때 여체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 졌다. 사내의 손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 게 전신을 안마하듯이 누볐다. 문득 여인은 하체가 서늘해지는 기분에 움찔했지만 몸 속에 타 오르는 쾌감에 그녀는 모든 것을 잊었다. 사내의 입술이 꼿꼿이 서 있는 유두를 덮었다. 한동안 젖가슴에 머물렀던 입술은 다시 잘록한 허리를 지나 긴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여체는 희열감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의 입술과 손가락은 여체를 학대했다. 고운청의 입에서 숨가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섬섬옥수 는 사내의 머리를 잡고 힘껏 당겼다. 그때서야 사내의 입술이 다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며 구리빛 건 장한 동체가 젖무덤을 짓눌렀다. 한 순간, 그녀의 입술이 찢어질 듯이 벌어지고 두 다리를 움츠렸 다. 격렬한 통증이 하반신에서 일어났다. 생살이 째지는 듯한 고통이 잠시 동안 지속되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꼬옥 깨물었지만 신음성은 감출 수 없었다. 문득 그녀의 섬섬옥수가 사내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고통과 동 시에 기이한 쾌감이 점점 커졌던 것이다. 고통에 젖은 신음은 어느 새 짐승 같은 신음으로 변했다. 사내의 입에서도 뜨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첫경험의 옥죄는 여체의 감촉은 숱한 여인을 겪어온 그 조차도 견디기 힘들게 만들 었다. 나무토막같이 굳어있던 여체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리한 통증은 어느덧 생경하고도 미묘한 쾌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몸을 송현중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부드럽 게 출입했다. 오래지 않아 고운청은 참을 수 없는 격정에 휘말린 듯 무서운 힘으로 사내에게 안겨들었다. 그것은 끝없는 파도였다. 아니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환락의 소 용돌이였다. 사내의 힘은 끝이 없었다. 자세가 바뀌고 또 바뀌었다. 첫 경험인 고운청에게 사내는 자연스럽게 각가지 체위를 요구했 고 고운청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기껑이 그의 요구를 따랐다. 여인은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치심 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고운청의 전신에 힘이 다 빠져 나갔을 때야 사내 는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이대로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태 어난 이래 이처럼 행복한 때가 처음이었다. 고운청의 입가에 환희에 찬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그녀는 사흘이 멀다하고 송현중을 찾아왔다. 그 때마다 사내는 그녀를 따뜻이 맞이했고 한 번 불붙은 두 남녀의 정열은 끝이 없었다. 2 사내의 몸은 아직도 여체의 내부에서 꿈틀거렸다. {청매는 갈수록 예뻐지는군.} 일부가 그녀의 깊은 곳에 수용된 사내의 목소리는 낭랑하면서도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몸 깊은 곳에서 다시 힘을 찾아 꿈틀거리는 정인의 실첼 르 생생히 느끼며 고운청은 눈을 흘기고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 었다. {몰라요.} 가볍게 앙탈하는 그녀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듣자하니 요사이 범천대공이 자주 사냥을 나간다고 하던데...} 그런 고운청의 윤기도는 머리결을 쓰다듬으며 송현중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순간 여인의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올랐다. {당신은 올 때마다 그분의 말을 꺼내는데 아직도 저를 믿지 않 는군요.} 고운청이 앙탈을 하는 순간 사내는 하체에 힘을 주었다. [하악!] 이미 한차례의 열락으로 민감해져있는 몬 속 깊숙이로 치받는 그 강렬한 자극에 고운청은 절로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렷다. {내가 청매를 의심할 리 있겠소. 다만 범천대공의 이름이 워낙 유명해 궁금해서 그럴 것이지.} 송현중은 은근한 어조로 말하며 하체를 일렁이기 시작햇다. 고운청은 다시 타오르는 열기에 전신을 비틀며 앙탈을 했다. {아이... 나중에 말을 할께요.} 그녀는 할딱이며 허리를 움직였다. 사내는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계속 말했다. {범천대공이 사냥을 갈 때는 경비무사가 백 명도 넘는다고 하던 데...?} {백 명은 무슨 백 명이예요. 연공자님은 경비무사가 호위하는 것 을 싫어해서 십 명의 무사가 따르긴 해도 평소 십 장 밖에 떨어져 있어요.} {설마 그럴 리가... 그가 어떤 몸인데 호위가 십 명도 안된다 말 인가? 믿을 수 없는 걸.} 사내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전번에 경비무사들이 공자의 말을 듣지 않고...} 고운청은 비몽사몽간에 열심히 범천공자에 관한 이야기를 지껄 였다. 사내는 하체가 뜨겁게 달아 올랐지만 그의 정신은 고운청의 말 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운청은 자제력을 잃고 목구멍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몸 을 떨며 사내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다. 사지에 번지는 쾌감에 그녀 는 죽을 것만 같았다. 한동안 짐승같이 신음성을 터뜨린 고운청은 이윽고 사내의 몸이 떨어지자 황망히 일어나 옷을 걸쳤다. {오늘은 늦었어요. 내일 다시 올께요.} 서둘러 옷을 걸친 고운청은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송현중은 그녀가 사라지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익! 돌연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동시에 한줄기 흰빛이 창문을 뚫 고 들어왔다.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물러서면서 바닥을 박찼다. 순간, 그의 신형이 번갯불처럼 창문을 향해 쏘아갔다. 그의 신법은 귀영 처럼 빨랐다. 허나,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힐끗 주위를 살피려는 그의 눈초리는 시퍼런 귀화(鬼火)가 쏟아 져 나왔다. 흡사 지옥의 불길처럼 그의 눈빛은 흉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다니...} 한동안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재빨리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가 다시 방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스읏! 한 줄기 인영이 소리없이 처마 밑에서 튀어나오며 서쪽을 향해 사라져 갔다. <독수귀(毒手鬼), 팽노대는 이미 무림맹의 손에 붙잡혔다. 곧 그들이 너를 잡으려고 달려올 테니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 다.> 구겨진 종이에는 그같은 단 두 문장이 적혀 있고 그 아래 아무 런 표시나 이름도 없었다. 송현중은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희백색으로 변했다. (팽노대가 잡혔다니.... 어쨌든 지금은 이곳에서 피하고 보자.) 잠시 후 그의 신형은 동북쪽으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또 하나의 인영이 멀찌감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오월(五月)의 어느 이른 아침, 상가현의 주민들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놀라움에 깨어났다. 약 백여 명의 자삼을 걸친 무림맹의 무사들과 흑삼의 무사들이 집집마다 수색을 시작했다. 처음에 주민들은 그들의 험악한 기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예의에 어긋남이 없는 정중한 자세와 도둑을 찾고 있다는 말에 주 민들은 오히려 협조를 했다. 이미 상가현의 외곽은 무림맹의 무사들로 철저히 봉쇄되었고 상 가현에 낯선 사람은 모조리 심문을 당해야만 했다. 상가현 만성객점(萬星客店)에 임시 연락처를 정한 조중은 하루 종일 계속되 수색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 작했다. (팽조의 말은 틀림없다. 독수귀의 위치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는 상가현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 다는 것은... 혹시 이 자가 눈치를 채고...) 조중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차를 들었다. 문득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그의 말은 거칠었다. 들어선 사람은 초췌한 표정의 장차수였다. 벌써 두 달째 침식을 잊고 일에 매달려 동분서주한 장차수의 몰골은 형편없다. 조중은 내심 안타까움이 치밀어 올랐으나, 지금은 그것을 표현할 때가 아니다. {그를 찾았나?} {찾지는 못했으나 그 자의 흔적을 발견했읍니다.} {어디서 발견했나?} {양운사(洋雲寺)라는 절입니다.} 조중의 입에서 버럭 고함이 터져나왔다. {그럼 빨리 앞장 서게.} {예!} 장차수는 황망히 대답을 하고 몸을 돌렸다. 3 양운사(洋雲寺)는 상가현에서 일 리 가량 북쪽에 위치한 절로 스 님이래야 세 명 밖에 없었다. 주지승인 오방(五方)대사는 조중을 맞이하며 더듬 입을 열었다. {저.... 그게 한달 전쯤 되었읍니다. 송공자라고 자신을 밝히면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몇 달간 묵겠다고 했읍니다.} {그를 찾아온 인물은 아무도 없었소?} 조중의 침중한 물음에 오방대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 동안 한 번도 찾아오는 사라은 없었읍니다만...} 조중은 무서운 눈빛으로 오방댓를 노려보았다. 오방대사는 약간 겁에 질려 있을 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언제 그 자가 떠났소?} {그게.... 그것은 나도 잘 모르니 등법(等法)에게 물어 보시지요.} 오방대사는 말하면서 한쪽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서 있는 소사미 를 가리켰다. 소사미는 조중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말 했다. {송공자님은 이틀 전에 떠났어요. 평소에 저에게 잘해 주었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가버리고 말았어요.} 조중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이제 겨우 십여 세나 되었 을까한 소사미의 두려움 없는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아무런 말도 없었다면 어떻게 그가 이틀 전에 떠났 다는 것을 알았지?} 조중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소사미에게 물었다. 문득 소사미는 기이한 표정으로 민대머리를 어루만졌다. {그게...} 소사미는 말끝을 흐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힐끔거렸다. {어린 스님,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으니 말해 보게.} 소사미는 조중의 따뜻한 어조와 어린 스님이란 말에 활짝 웃었 다. {예쁜 누나가 말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순간 조중과 장차수의 눈빛이 굳어졌다. {예쁜 누나라니 무슨 말이지?} 소사미는 아차 싶었는지 겁먹은 얼굴로 오방대사와 조중의 얼굴 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미타불.... 등법아! 네가 아는 게 있으면 사실대로 말씀드려 라.} 준엄한 오방대사의 말에 소사미는 더듬 입을 열었다. {이틀 전 밤중에.... 예쁜 누나가 송공자를 찾아왔어요. 헌데 송공 자의 방에 아무런 짐도 없자 나에게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어요. 나 는 그때 송공자님이 예쁜 누나와 함께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듣고는 송공자님이 떠났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 예쁜 누나가 누구인 줄 아느냐?} 장차수가 놀란 눈으로 무슨 말을 할 듯 입을 벌리자 조중이 손 을 흔들렸다. {자네는 가만 있게.} 조중이 차분히 말을 했다. {그래, 아기 스님은 그 예쁜 누나가 무림맹의 사람이란 것을 어 떻게 알았지?} {전에 한 번 왔으니까요. 이름도 알고 있는 걸요.} 자랑하듯이 말했다. {그래 이름은?} 소사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눈알을 굴렸다. {이름이... 고... 고운...?} 순간 장차수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고운청이라고 하지 않더냐?} 소사미는 손뼉을 쳤다. {맞아요. 그때 같이 온 누나가 운청이라고 했어요.} 조중은 따뜻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아기 스님, 어떤가? 잠시 나와 함께 무림맹을 구경하지 않겠 나?} 소사미는 기쁜 듯이 외쳤다. {좋아요. 언제인가 무림맹을 구경하고 싶었어요.} 조중은 가만히 소사미의 손을 잡으며 오방대사에게 말했다. {대사, 아기 스님을 제가 잠시 데리고 있겠소.} {아미타불. 조대협의 말씀이시라면 제가 어떻게 거절을 하겠읍니 까.} {차수, 천 냥을 시주하도록 하게.} 조중은 말과 동시에 소사미를 끌어 안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돌아간다.} 이 말이 끝났을 때 그의 신형은 오십 장 밖을 날고 있었다. 초상비(草上飛)______! 경공술의 절정신법인 초상비였다. 그의 신형은 삽시에 행운유수 처럼 멀어져 갔다. 이경(二更) 무렵, 붓장수 이호자(李虎子)는 헛간에서 조심스럽게 등잔에 불을 붙였 다. 지저분한 헛간이 환히 밝아오자 그는 가만히 문 사이로 바깥 동 정을 살핀 다음 한쪽 구석에 쌓인 짚단을 헤쳤다. 흙바닥이 나오자 손으로 흙을 파냈다. 그의 손이 한 번씩 파낼 때마다 무슨 강철처럼 땅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쯤되면 피와 살 로 된 손이 으깨지기라도 할 것인데 새하얀 그의 옥수와 긴 손가 락은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 두 자 정도 팠을까? 하나의 조그만 나무상자와 무명천으로 싼 한 자 가량의 뭉치가 나왔다. 이호자는 다시 흙을 묻고 전처럼 짚단을 그 위에 쌓았다. 잠시 후, 완전히 처음 형태로 돌아가자 그는 천천히 무명천을 풀 었다. 무명천 속에는 한자 두치 가량의 묵광(墨光)이 감도는 단검(短 劍)이 들어있었다. 검자루는 약간 거무튀튀했지만 검신에는 한 점 의 흙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단검을 응시하는 이호자의 눈빛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웅수림(熊獸林)에 숨어 있는 독수귀는 내일 행동을 하겠지. 독수 귀, 미안하지만 나를 위해서 네가 미끼가 되어 주어야겠어.) 이호자는 가만히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을 떠올렸다. 그는 범천대공에 대한 조사결과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 것은 그가 성격이 굴강하다는 데서 발견한 것이다. 이미 연대강에 대한 암살기도가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 무림 맹 감찰전에서는 철저하게 경비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경비망을 뚫고 들어가 범천대공을 죽일 수 있 다 하더라도 그들의 포위망을 절대 빠져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어야 남도 있는 것이지 자신이 죽는다면 남 도 없는 것이라는 신념 속에 살아왔다. 한 마디로 철저한 자기 위 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을 잃지 않고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내야만 한다. 4 그는 처음 상가현에 왔을 때는 독수귀마저 죽이려고 했었다. 하 지만 은밀히 그를 미행한 결과, 독수귀가 고운청을 유혹하여 정보 를 얻는 바람에 그는 좀더 기다리기로 했다. 헌데 갑자기 팽노대가 사로잡혀버렸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쯤 그 추잡한 늙은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발설했을 것이다. 이제 상황은 막다른 곳으로 몰린 셈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이 독수귀를 미끼로 삼아 자신의 계획을 달성시키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완벽한 퇴로를 생각해 두었다. 다만 손을 언제 쓰느냐 하는 것이 남았을 뿐이다. 허나 이제는 더 이상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다. 무림맹에서 자신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결국 어느 정도 그에 대해서 알아낼 것이고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포위망을 좁 혀을 것이다. 게다가, 의뢰인과 한 약속기한인 단오절(端午節)은 이제 불과 일 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가 아는 바로는 내일 독수귀가 암살을 시도할 것이다. 팽노대 가 잡혔다는 것을 안 이상 독수귀도 시간을 끄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운청의 말에 따른다면 내일보다 더좋은 기회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죽음과 함께 살아온 인생, 죽는다 해도 그로서는 아무것 도 안타까울 게 없는 것이다. 이호자는 가만히 나무갑을 열었다. 안에는 조그만 동경(銅鏡)과 역용에 필요한 도구가 들어 있었다. 분가루를 손에 뿌려 얼굴에 한동안 비비자 거무스름한 피부가 되었다. 이어 눈썹에 검은 칠을 하자 조금 짙게 보였다. 다시 구레나룻을 코 밑에 붙이고 고정을 시키자 사십대의 험상궃게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좋군. 이제 옷만 갈아 입으면 무림맹의 무사이지.} 자신의 솜씨에 만족감을 느끼며 분주히 움직였다. 잠시 후, 헛간에 불빛이 사라지고 무림맹 무사차림의 사십대 장 년인이 태연히 밖으로 나왔다. 고운청은 자신이 끌려온 것이 감찰전 형당(刑堂)이라는 것을 안 순간 완전히 얼이 빠졌다. 오십 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대전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그저 회백색 벽과 돌로 된 바닥뿐이었다. 그리고 대전 중간에 놓인 길쭉한 사각형 탁자와 세 개의 의자가 보이는 전부였다. 지금 그 의자 위에는 감찰전주 막대승과 부전주 조중, 그리고 사 공표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데리고 온 무사가 사라지자 일순간 대전 안은 무거운 침 묵이 흘렀다. 고운청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무림맹의 내당 시녀로 일하는 그녀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너 무나 잘 알고 있다. 무림맹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이곳을 지옥전(地獄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직까지 이곳에 들어온 사람치고 살아 돌아온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부친이 외당당주였지만, 이곳에 들어온 이상 삼태상(三太 相)이라면 몰라도 그 외는 설사 황제라도 그녀를 구할 수는 없다. {고운청, 양운사에 갔던 적이 있었지?} 낮고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은 사공표였다. 그때서야 정신이 든 그녀는 나직이 부르짖었다. {전주님,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예요} 울먹이며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어요. 전주님, 저를 아시잖아요?} 조중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공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사공표는 일지(一指)를 뻗었다. 순간 고운청은 어깨에 파고드는 격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바닥에 주저앉은 고운청은 비오듯 눈물을 쏟았다. {시끄럽다. 두 번 다시 다른 소리를 지껄인다면 사지 중 하나를 자르겠다.} 차분한 사공표의 목소리에는 무서운 위협이 실려 있었다. {너는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된다.} 고운청은 억누를 수 없는 공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표의 표정에서 그의 말이 협박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너는 양운사에서 송공자라는 서생을 만났지?} 고운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을... 어떻게...} 사공표의 눈에서 비수 같은 안광이 쏟아졌다. {너는 대답만 하면 돼.} 가느다란 음성이었지만 그녀의 귓전에 닿았을 때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사공당주, 내가 물어 보겠네.} 막대승이 고운청의 공포에 질린 행색에 안스러움을 느꼈는지 차 분히 말했다. {청아, 네가 양운사에서 만난 송공자라고 하는 자는 독수귀라는 이름으로 연공자를 암살하기 위하여 온 자객이다.} [그....그런....!] 고운청은 한 순간 넋이 빠졌다. {이제야 제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끌려 왔는지 잘 알겠지?} 막대승의 침중한 목소리에 고운청은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며 말 이 없다. 그녀의 뇌리는 텅 비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한 정인이 자객이라니 그것도 무림맹을 상대하기 위하여.... 그녀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그럴 리 없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앵무새처럼 되니이며 중얼거리는 고운청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 었다. 5 조중은 힐끗 막대승의 눈칠을 살피며 사공표에게 눈짓했다. 그러 자, 사공표는 고운청 앞으로 다가섰다. 허나 그녀는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고 있는데 두 눈의 초점은 풀려 있었다. 한 순간 사공표의 손이 그녀의 명문혈과 뇌호혈(惱虎穴)을 번갈 아 누르자 고운청은 한 순간 두 눈에 초점이 잡히며 눈물을 주르 르 흘러내렸다. {고운청, 시간이 없다. 그 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도 남김없이 말해.} 사공표가 외치자, 문득 그녀는 삼 인을 멀뚱히 쳐다보며 부르짖 었다. {아니예요. 그 분은 절대 자객이 아니예요. 당신들은 나를 속이 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미친 듯이 외치며 발딱 일어섰다. 그녀의 두 눈에서 증오 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나는 절대로 믿을 수 없어요. 나는 그 분을 만나야겠어요.} 발작하듯 외친 그녀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재빨리 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어느 새 사공표가 앞을 가로막으며 식지와 중지로 지풍 을 퉁겼다. {아악... 으... 아악...} 고운청은 일순 바달을 구르며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소음경혈(少陰經穴)과 기문혈(奇門穴)이 찔린 그녀는 전신의 뼈 가 부서지는 고통에 계속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막대승만이 얼굴을 돌렸을 뿐 조중과 사공표는 무표정했 다. -착골수혼(鑿骨輸魂)! 이름 그대로 뼈가 부서진다는 고문수법이다. {고운청, 빨리 말을 하면 고통은 줄어들 것이다.} 사공표의 외침에 고운청은 피가 나올 듯 입술을 깨물며 계속 신 음성을 토할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대전의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소리친 사람은 이제 이십 이삼 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흰 피부와 조각같이 섬세한 용모, 지혜가 충만해 보이는 두 눈은 가히 절세미공자였다. 특히 백옥 같은 흰 피부가 더욱 그이 용모를 돋보이게 하고 있 었으며 연남빛 유삼(儒衫)을 입고 문사건을 두른 모습은 부드럽고 지극히 풍류적인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 뒤로 오순 가량의 황색장삼의 노인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노기 섞인 일갈을 터트린 사람은 바로 미공자였다. 막대승을 비롯한 조중, 사공표는 두 사람의 출현에 쓴웃음을 지 었다. 사공표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즉시 소리없이 지풍을 쏘았다. 고 운청은 일순 신음을 그치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아마 혼절한 것이 리라. (외당당주가 연공자를 모시고 온 것 같군.) 조중은 힐끗 오순의 노인을 노려 보았지만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바로 범천대공 연대강과 외당당주인 고운엽이었다. 고운엽은 자신의 딸 고운청의 처참한 모습에 전신을 부르르 떨 었지만 그로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는 없었다. 다만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서글픈 표정으로 막대승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연대강은 노기에 찬 시선으로 막대승과 조중을 응시하며 냉랭히 말했다. {운청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나 그녀는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아이요. 그런데 나에게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막대승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공자, 운청은... 자객과 내통했읍니다.} {그만 두시오, 막전주.} 연대강은 막대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쳤다. {운청은 무슨 죄를 지었던 간에 내가 처리하겠소. 고당주, 운청 을 데리고 갑시다.} 고운엽은 막대승과 조중의 표정을 일별한 다음 황망히 운청을 껴안았다. {잠깐만, 연공자.} 연대강은 조중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공자, 전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현재 자객이 공자의 생명을 노 리고 있소이다.} 하지만 연대강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조중은 내심 침음성을 삼켰다. {연공자, 운청은 조사한 결과 자객과 몇 번이나 만났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부전주, 설혹 운청이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그 아이는 내궁의 소관이오. 그리고 자꾸만 자객 운운하시는데 나는 그 자객이란 자 를 직접 만나고 싶으니 앞으로 경비무사는 내 곁에서 철수시켜 주 시오.} 연대강의 눈빛이 굳어졌다. {만약.... 전날처럼 내 주위에서 경비무사들이 얼쩡거린다면 내 손속이 무정하다고 나를 욕하지 마시오. 나는 어린 아이가 아니니 까.}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돌아서 나갔다. 조중이 무어라고 말할 듯 입을 벌렸다. {부전주, 그만두게.} 막대승이 조중에게 눈짓했다. {이렇게 된 이상 연태상께 직접 말씀드려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네.} 막대승은 침울히 말하며 문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연대강은 인정에 약해서 그들이 더 이상 고운청에 대해서 따지고 든다면, 연대강의 분노만 살 뿐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 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 사람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자네들은 다시 한 번 독수귀의 행방을 찾아보게. 나는 연태상 어른을 뵙고 오겠네.} 막대승이 말하자, {전주님께서 태상어른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조중이 침울히 말했다. 막대승은 말없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조중과 사공표는 무림맹을 나왔다. {제길.... 운청, 그 년만 족쳤으면 일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 인데.} 사공표가 투덜거리자 조중은 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만 두게! 사실 그 애를 닥달해 봐야 큰 소득은 없을 것이네.} 조중은 차분히 말했으나 내심 그의 마음도 사공표에 못지 않게 고운청의 이야기를 못 다 들은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진술에서 최소한 독수귀의 용모라도 알아낼 수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중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고운청의 일은 나중에도 알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을 달래며 부지런히 걸음을 빨리 했다. 제 17 장 標的은 除去되었다! 1 웅수림(熊獸林)-! 이곳은 태산 서쪽에 위치한 울창한 원시림이다. 태고 이래 인적이 침범한 적이 없는 그 안에는 독수리같은 새나 짐승들외에는 살 수 없다고 해서 웅수림이란 이름이 붙었다. 수많은 기괴암석과 수림이 무성히 우거진 웅수림의 분지로 어둠 이 밀려들자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리는 동시에, 한 줄기 인영이 날렵하 게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헤쳐나가며 웅수림 깊숙이 들어갔다. 이윽고 그 인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 줄기 달빛이 드러나자 인영의 자태가 드러났다. 창백한 안색 에 준수한 용모, 그는 바로 양운사에서 묵고 있었던 송현중이라는 서생이었다. 헌데 지금 그의 행색은 전날에 비교해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검은 무복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왼손에는 녹피(鹿皮) 장갑을 끼고 있는데 그의 눈빛은 긴장감에 굳어 있었다. 그는 등 뒤에 메고 있던 자루를 신중한 표정으로 끌렀다. 순간 자루 안에서 수십 마리의 뱀떼가 기어나왔다. 살모사, 칠채흥사, 죽 엽사 등 하나같이 치명적인 맹독을 지닌 독사들이었다. 삐이이! 송현중의 입에서 괴이한 휘파람이 새어나오자 독사들은 이리저 리 풀숲으로 기어 들어갔다. 잠시 후, 독사떼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송현중은 주위를 한 차 례 살펴본 다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헌데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홀연히 한 사람이 나타났다. 무림맹 수하의 복장을 한 사십대의 장한은 바로 이호자의 변장 한 모습이었다. {사독진(蛇毒陣)이라. 독수귀, 결코 너는 성공할 수 없어. 나 담 사를 위하여 미끼가 되어 주어야 해.} 담사? 그렇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붓장사 이호자는 바로 담사의 변용 한 모습이었다. 한 차례 주위를 훑어본 그는 땅을 박찼다. 두두두! 이른 새벽,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게 다섯 필의 준마가 무림맹 을 빠져나왔다. 맨 앞장 선 마상의 인물은 영풍절륜한 모습의 청년이 헌앙한 자 태를 뽐내며 타고 있었다. 범천대공 연대강-! 그는 바로 다음대 무림맹의 맹주로 내정된 당세의 기린아 범천 대공 연대강이었다. 연대강의 뒤로는 네 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활과 사냥에 필요한 도구를 지니고 맹렬히 질주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웅수림이었다. 날짐승과 네발 달린 들짐승들 이 들끓는 웅수림이야말로 사냥하기에 다시 없는 요지인 것이다. 조중은 밤새 수하들과 상가현을 수색하다가 겨우 새벽녘에야 흑 시나 하는 마음으로 맹에 돌아왔다. 장차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급히 나왔다. {전주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었나?} {전주님께서 아직 태상어른을 만나뵙지 못한 것 같읍니다.} 조중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제는 나도 늙었는가 보군.} 피곤한 표정으로 조중은 나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대로 잠깐 눈을 붙일 테니 자네는 내당에서 고운청에 관해 무슨 소식이 있으면 알려주게.} 말을 마친 조중은 두 눈을 감았다. 장차수는 가만히 절을 하고 소리없이 물러났다. 연대강은 웅수림에 도착하자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한 명의 장 한이 재빨리 활을 건네주었다. 연대강은 활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곳의 지명이 명색이 웅수림이니 곰이라도 한 마리 잡아야 하 겠군.} 산중은 고요했다. 가끔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제외하면 태고 의 정적에 싸인 듯 적막했다. 핑_____ 하나의 화살이 파공음을 내며 숲 속으로 쏘아져 갔다. 풀썩____ 둔탁한 소리와 함께 쓰러진 노루의 목에는 화살이 목줄기를 뚫 고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과연 연공자님의 솜씨는 대단 하십니다.} 연대강을 뒤따라온 장한들은 감탄성을 토하며 익숙한 솜씨로 화 살을 뽑고 살을 갈랐다. {장표, 나는 먼저 갈 테니 천천히 뒤따로 오게.} 연대강은 실망에 찬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곰을 잡고 싶었 지 노루 따위는 생각지 않았다. 장차수는 당황한 얼굴로 급히 조중을 깨웠다. {조어른! 조어른_____} 조중은 두 눈을 떴다. 혼란으로 가닥한 장차수의 표정을 본 조중 은 일순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철렁했다. {연공자님이 한 시진 전에 사냥을 떠났다고 합니다.} {뭐야? 누가 연공자를 따라 갔나?}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황망히 묻는 뗍像? 말에 장차수는 말 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게.... 그게... 철패사웅(鐵覇四雄)만 따라 간 것 같읍니다.} 조중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슨 소린가? 항상 뒤를 따르던 경비무사들은?} {그것이... 연공자께서 은밀히 떠나는 바람에 그만...} 장차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중은 이를 갈며 외쳤다. {간 곳은 어딘가?} {웅수림입니다.} 조중은 벼락같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사람들은 데리고 웅수림으로 오게.} 이 말이 끝났을 때 조중의 신형은 어느 새 십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2 연대강은 천천히 수림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꾸우우우! 그때 돌연 수림 속에서 무언가 울부짖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들 려오기 시작했다. 연대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으음... 이건 무슨 소리지.)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수림 속을 빠져 나오자 기괴암석이 여기저기 솟아 있고 수백 년 이나 된 고송들이 청량한 내음을 풍겼다. 연대강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문득 그의 눈에 고송 사이로 움직이는 희끗한 그림자가 스쳤다. (곰이다.) 연대강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이십 장 정도 떨어진 고송 사이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 고 있었다. 곰이었다. 크르르르~! 시커먼 털이 난 거대한 흑곰이 땅바닥을 쏘아보며 괴성을 토하 고 있었다. 연대강은 급히 화살을 재고 소리없이 움직였다. 흑곰은 두 마리의 독사와 대치하고 있었다. 흑색빛은 띠운 철갑사(鐵甲蛇)는 어른 팔뚝만한 동체에 길이는 반 장이나 되었다. 그 옆에 있는 조금 작은 뱀은 역시 철갑사였는 데 얼핏 보기에도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흑곰은 비록 덩치가 뱀에 비해 훨씬 크지만 독이 두려운지 함부 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대강은 이 희귀한 싸움을 잠시 구경하기로 했다. 문득 상처 입은 철갑사가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곰은 흠칫하면서 앞발을 휘둘렀다. 순간 철갑사는 대가리를 흔들어 피하자 한쪽에서 기회만 보고 있던 큰놈이 재빨리 덤벼들었다. 그러자 곰은 괴성을 토하면서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철갑사는 공격이 실패하자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곰은 흉성이 격발했는지 포효성을 지르며 맹렬히 앞발을 좌우로 휘둘렀다. 철갑사는 계속 앞으로 피했으나 종내 피하지 못하자 마주 공격 을 했다. 연대강은 입을 크게 벌렸다. {정말 굉장하군. 평생에 두 번 다시 못 볼 진풍경이군.} 바로 그때 연대강은 갑자기 발등이 따끔한 것을 느꼈다. {이런....} 반사적으로 내려다 보던 연대강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의 발등 에는 손가락보다 더 가느다랗고 비늘이 금빛을 띈 뱀이 발등을 물 고 있었다. 연대강은 급히 지풍을 퉁기자 금사는 머리가 으깨어진 채 발등 에서 떨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공자님.} 철패사웅이 다급히 외쳤다. 연대강은 황망히 무릎 근처 전근혈(前筋穴)을 봉쇄하고 손을 흔 들었다. {조심하게. 독사가 있네.} 철패사웅이 흠칫하는 순간이었다. 삐이이이! 갑자기 피릴르 부는 듯한 가늘고 날카로운 기이한 소리가 수림 깊은 곳에서 일어나며 역겨운 비릿내가 코를 찔렀다. 보라. 수풀 사이사이에서 수많은 뱀들이 기어나오고 있질르 않은 가? 꿈틀꿈틀 기어나오는 뱀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백 마리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이....이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 철패사웅의 쌍장이 일제히 수림을 쓸었다. 펑______ 펑_______ 펑!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터지고 땅거죽이 패이면서 흙먼지와 함께 뱀의 살점이 튀어올랐다. 연대강은 지척에까지 다가온 뱀들을 발견한 직후 이미 그의 몸 은 독수리같이 허공을 비상하며 쌍장을 아래로 후려갈겼다. 우르르_____ 릉_____ 쾅! 그의 쌍장에서 뻗어 나오는 장풍은 해일처럼 땅바닥을 쓸었다.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뱀을 풀어 놓은 것 같으니 모두 조심하 라!} 연대강은 사위를 살피며 버럭 외쳤다. 허나 주위는 조용할 뿐 인 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일다경이 지났을까? 다섯 사람의 장력에 의해 주위는 온통 폐허처럼 변했다. 자욱이 풍겨나오는 피비린내 오 장 부근에는 온통 뱀들이 으깨지고 잘린 채 즐비하게 쌍였다. 연대강과 철패사웅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바로 그때 돌연 연대강이 비틀거렸다. {공자님!} 철패사웅 중 셋째인 초소윤이 놀라듯이 외쳤다. {금선사(金線蛇)에게 물렸네.} 연대강은 일순간 발목이 마비되는 느낌에 황망히 품 속에서 옥 병을 꺼내들었다. 헌데 연대강이 약을 바르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피핑! 갑자기 허공에서 세 가닥의 검은 빛이 벼락같이 쏘아왔다. {흥!} 연대강은 차갑게 코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세 가닥의 흑광이 그의 몸을 스치듯이 지나 나무에 박혔다. {어떤 놈이냐?} 퍼퍼펑! 연대강은 암기를 피함과 동시에 벼락같이 쌍장을 왼쪽 수림에 쳐냈었다. 콰드드드! 막강한 경력이 담긴 연대강의 암경이 수림에 닿자 벼락치는 듯 한 굉음과 함께 몇그루의 거목이 우지끈 부러져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나의 시커먼 인영이 쓰러지는 거목들 사이에서 비호같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실로 눈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 다. 연대강의 반응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철패사웅이 상황을 알고 덮쳐왔을 때는 어느 새 연대강의 신형이 수림에서 튀어나온 인영을 향해 다시 쌍장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상대는 다섯 손가락을 앞으로 뻗치면서 재빨리 찔러왔다. 검게 물들은 손가락은 비릿한 내음을 풍겼다. {운남 오독문(五毒門)의 오독지(五毒指)로구나.} 연대강은 냉랭히 외치며 장을 회수하는 동시에 손가락을 오므리 며 좌우로 교차시켰다. {천불강기(天佛 氣)!} 꽈릉! 연대강의 입에서 뇌성이 터지자, 노도 같은 경력이 대해처럼 쏟 아졌다. {으악____} 덮쳐들던 인영은 가슴이 빠개지는 고통과 함께 오 장이나 날아 가서 암석에 처박혔다. 3 -천불강기(天佛 氣)! 소림의 무상신공으로 불문의 비전절예(秘傳絶藝)이다. 그 위력은 무쇠를 가루로 만들고 어떤 호신강기도 종이처럼 무너뜨린다. 암습했던 인영은 천불강기에 강타당해 가슴이 완전히 박살나고 오장과 선혈이 쏟아져 나왔으나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크으... 과연 범천대공이군.} 다가선 연대강을 바라보며 그 인물은 피와함께 신음을 게워내었 다. {네놈은 누구냐?} 연대강은 차갑게 외쳤다. {나는... 독수귀(毒手鬼)다!} 암습자는 죽음이 가까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독수귀(毒手鬼)-! 그렇다. 그 암습자는 바로 연대강의 암살에 동원된 네명의 자객 중 한명인 독수귀였다. 물론 그가 양운사에 머물며 고운청을 유혹 했던 송현중이기도 하다. 연대강의 눈빛이 커졌다. {무엇 때문에 나를 암격했느냐?} 자신을 독수귀라고 밝힌 그는 숨을 점차 크게 헐떡이고 있었다. 또한 그의 두 눈에 초점이 완전히 흐려져 가고 있었다. {돈이지. 너의 목에 황금 만 냥이...걸려 있단 말이야.} 독수귀는 키득이며 말했다. 연대강은 문득 무언가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네놈이 운청을 유혹한 놈이군.} 독수귀는 감겨져 가는 두 눈을 뜨려 애쓰며 말했다. {후... 후! 그 년의 사타구니는.... 정말 굉장했지. 아암....!} {이런 죽일 놈, 감히 누구 앞이라고...} 철패사웅 중 한 명이 노성을 지르며 발을 뻗었다. 그 순간, 다 죽어가던 것같던 독수귀가 벌떡 몸을 구르며 쌍수를 쳐냈다. 슈우_____ 슈____ 슈욱! 수백 개의 암기가 폭죽같이 쏘아져 왔다. {피해랏!} 연대강이 다급히 외치면서 몸을 날렸다. 허나, {크_____ 악_ {으______윽!} 철패사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 졌다. {절멸신사(絶滅神沙)!} 연대강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철패사웅의 몸에 박힌 것은 암기가 아니라 운남(雲南)의 오지(奧 地)에만 있다는 맹독을 지닌 독모래였다. 절멸신사가 박힌 부위에는 순식간에 새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퉁 퉁 부어올랐다. 연대강은 철패사웅의 처참한 모습에 입을 악물었다. 전신이 검게 물들은 철패사웅은 이미 숨이 끊어졌고 그 시신조차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런 지독한 놈, 죽으면서까지 독수를 쓰다니.} 연대강이 이를 갈았지만 독수귀는 이미 죽어 있었다. 자신의 힘 을 전멸신사에 쏟아부은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것이다. 분노하던 연대강은 일순 비틀거렸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고 역겨움을 느꼈다. (아차.... 아까 독사에 물린 독이 퍼졌구나.) 연대강은 다급히 그의 발을 쳐다보았다. 왼발은 퉁퉁 부어올랐 다. 연대강은 다급히 신발을 벗고 발을 살폈다. 발등은 푸르죽하게 부어 올랐고 물린 자국에서는 새까만 피가 흘러나왔다. (독은 이미 몸 속에 퍼졌다. 빨리 운공조식을 해서 독을 몰아내 지 않으면 큰일이다.) 연대강은 급히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소맹주님!} 저쪽에서 한 명의 무림맹 무사 차림을 한 사내가 달려왔다. 흠칫한 연대강은 급히 눈을 떴다. 하지만 나타난 자가 무림맹의 무사차림을 한 것을 본 연대강은 다시 눈을 감으며 나직이 말했다. {나를 호위해라 운기조식을 해야... 크으윽!} 연대강은 말을 하다 갑자기 비명을 토했다. 한 자루의 검은 색 날이 달린 단검이 그의 심장을 파고든 것이다. 연대강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네놈이... 왜?} 그러자 사십 세 가량의 그 무사는 서늘한 미소를 띄었다. {연대강, 나는 당신을 죽이러 온 마지막 자객이다.} 그의 말에 연대강의 두눈이 찢어질 듯 부릅 떠졌다. {죽일 놈!} 이를 가는 동시에 연대강의 몸이 앉은 채로 확 솟아올랐다. 연대 구품(蓮臺九品)이란 소림사 비전의 절정 경신비기가 시전 된 것이 다. {불연광천(佛蓮光天)!} 콰_____ 츠츠츠! 악에 바친 폭갈과 함께 연대강의 손에서 터져나온 수십 개의 장 영이 허공을 자욱이 덮으며 암습자에게 쏟아져 내렸다. 순간 장년무사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숨을 깊이 들이마 시고는 마주 쌍장을 뻗었다. 헌데 서로의 장력이 채 맏닿기도 전에 장년의 무사는 무시무시 한 압력에 자신의 손목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했다. (틀렸다!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무사의 안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연대강의 정신력과 내공은 그 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극독에 중독되고 심장이 단검 에 찔린 상태에서도 이토록 강맹한 장력을 토해낼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사실 그의 무예는 연대강에 비해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만약 정 면으로 부딪쳤다면 그는 십초도 안되어 피를 토할 것이다. 헌데, [컥!] 연대강은 장력을 쏘아낸 후 갑자기 가슴이 찌르르 하는 고통과 함께 기운이 쭉 빠졌다. 퍼펑! 굉음이 터지면서 연대강은 일장이나 날아가서 그대로 곤두박질 쳤다. 장년무사는 흠칫했다. 자신을 으깨버릴 듯이 무섭게 들이닥치던 연대강의 장력이 갑자기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오공에서 피를 토하며 나뒹군 연대강의 모습을 응시하던 그는 그제서야 어찌된 사정인지 깨닫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 자의 기력이 이어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군.} 연대강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 최후의 기력을 다 짜내어 장력을 뽑아내었던 것이다. 만일 그의 내공이 찰라지간만 더 이어졌어도 장년무사 역시 오장육부가 박살이 나서 나뒹굴었을 것이다. 4 연대강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재빨리 그자의 심장에 꽂 인 단검을 뽑았다. 단검이 뽑혀진 연대강의 심장에서는 이미 검게 변하기 시작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 돌연 멀리서 은은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누군가 이곳에서 벌어진 변고를 알아차리고 현장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다음순간 장년무사의 신형이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수림 속을 파 고 들었다. [우아아아!] 그 사이에도 장소성은 점점 커졌다. 휙______! 이어 하나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전신에서 비오듯 땀 을 흘리고 있는 그는 바로 귀견수 조중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주위에 널려진 시신을 보고는 망연자실해졌다. 철패사웅의 이미 반쯤 녹아내린 시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 이 치밀어 올랐다. {실로 처참하게 죽었군.} 신음하며 주위를 돌아보던 조중은 그러나 다음 순간 숨이 넘어 가는 듯한 표정으로 크게 부르짖었다. {연공자_____!}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퉁퉁 부어 오른 시신의 가슴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흘 러내리고 독에 중독된 듯 얼굴도 부었지만 조중은 그 시신이 틀림 없는 범천대공 연대강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조중은 비틀거리며 연대강의 시신에게 다가갔다. {부전주님_____!} 비통하게 울부짖는 그의 뒤로 한 무리의 사람이 들이닥쳤다. 장 차수, 사공표를 위시한 흑건추혼대이었다. 장내를 둘러본 그들은 다음순간 동시에 경악성을 토했다. {연공자님이...?} {이럴 수가...!} 한 동안 장내는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쏴______ 아! 문득 한 줄기 바람이 장내를 스쳤다. 조중은 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다급히 품 속에서 하 나의 길쭉한 통을 꺼내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렸다. 슈우웅_____ 펑_____ 펑! 갑자기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며 붉은 연기를 뿌렸다. 창공을 수 놓은 듯이 꺼지는 붉은 연기는 보기에 장난같았지만 이것은 일종 의 신호였다. 단숨에 웅수림을 빠져나온 장년의 무사는 상가현을 향해 비조같 이 날아갔다. 이윽고 상가현에 도착하자 그는 경신술의 구사를 멈추고 태연히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마을에는 무림맹의 무사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골목에 접어들자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잠시후 그는 자신이 묵고 있는 노부부의 집 앞에 이르렀다. 하지 만 그는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담장을 따라 뒤곁으로 돌아갔 다. 뒤쪽 담장에 이른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 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했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음순간 발 끝에 힘을 주 어 담장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어 재빨리 헛간으로 들어선 그는 급히 옷을 벗고 얼굴의 칠과 수염을 떼어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헛간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바로 성실하기로 소문난 붓장수 이호자였다. 마침 그때 집주인 노인은 밖에서 들어오다가 그를 보고는 근심 스럽게 물었다. {아니, 아직도 장사를 안나갔나?} {예,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지금 나가는 것입니다.} 노인은 안스러운 듯 허리를 찼다. {이 사람이 몸이 안 좋으면 쉬어야지, 무어라고 해도 몸이 건강 해야 장사를 할 게 아닌가?} 이호자는 빙그레 웃으며 걱정달라는 듯이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노인어른. 이제는 괜찮읍니다. 나중에 저녁에 다 시 뵙겠읍니다.} 말을 마친 그는 재빨리 집을 나섰다. 등 뒤에서 노인이 무어라고 했으나 그는 들은 척도 않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거리로 나온 이호자는 동쪽으로 향했다. 상가현을 나오자 관도에는 무림맹의 무사들이 들어오는 사람을 일일히 조사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방무사님.} 이호자는 평소 안면이 있는 말대가리 형상을 지닌 무림맹 무사 에게 넓죽 허리를 숙였다. 방무사라고 불리운 그 대한도 이호자를 보자 아는 척을 했다. {이노제 아닌가? 벌써 물건이 다 팔렸나?} 이호자는 히죽 웃었다. {예, 이번에 장사가 잘되어 물건이 동이 났읍니다. 이번에는 개 봉성에서 물건을 해올 생각입죠. 올 때 좋은 선물도 함께 가져올 테니 기대하십시오.} 방무사는 입이 크게 벌어졌다. {헐헐 그럼 잘 다녀오게.} 이호자는 다시 넓죽 절을 하고는 관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형, 저 놈을 잘 아나?} 한쪽에 있던 무사가 이호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걱정말게. 저 놈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방무사는 대답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 동안 몇 번이가 이호자 에게 술을 얻어 먹은 방무사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가 조금만 생각을 해본다면 이호자는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돌연 그때 방무사의 눈이 휘둥그래 졌다. {저걸 보게. 저 붉은 연기는 일급 경계령을 나타내는 홍무탄(紅 霧彈) 아닌가?} 흠칫한 무사들은 급히 서쪽 하늘로 향해 눈을 돌렸다. 웅수림이 있는 하늘에는 붉은 연기가 넓게 퍼져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무림맹의 주위 백 리 안은 완전히 차단되 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한 행동이었다. 허나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이호자는 이미 유유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第 十八 章 武林盟의 憤怒 1 -매죽헌(梅竹軒)! 무림맹의 후원에 위치한 신검황(神劍皇) 연주백의 처소다. 뒤로는 울창한 죽림이 펼쳦 있고 앞쪽으로는 연못과 소축(少築), 그리고 잘 손질된 정원에 기화이초가 활짝 피어난 채 향기로운 향 기를 풍긴다. 따사로운 햇살이 잘 가꾸어진 화원을 비추고 있었다. 소축 안에는 백색 화포를 걸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화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은은한 자주색 피부에 수염을 정갈히 다듬은 단아한 모습, 나이 는 육순 정도, 각진 턱은 그의 성품이 굳강하면서도 냉정함을 느끼 게 했다. 전신에는 숨막힐 듯한 위엄이 넘치고, 간혹 두 눈에서 뻗어나오 는 광채는 절정고수만이 지닐 수 있는 무서운 안광이었다. -신검황(神劍皇) 연주백! 그가 바로 무림맹의 삼태상(三太相)중 일인이며 천하제일검(天下 第一劍)이라도 불리우는 연주백이었다. 문득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감찰전주 막대승이 소축 안으로 들어와 연주백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상! 연공자가 오늘 아침 자객의 암수에 의해....} 막대승의 목소리는 비통함에 떨리고 있었다. {죽었읍니다. 태상! 죽여 주십시오.} 막대승은 이마를 땅에 박았다. 노인의 몸이 느릿하게 돌아섰다.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 노인은 갑자기 십 년이나 더 늙게 보였다. {강아가... 죽었단 말인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감정을 억제하고 애쓰고 있음이 역력했 다. {태상, 죽여 주십시오.} 막대승이 부르짖듯이 말하자 노인은 문득 휘청거리며 가슴에 손 을 짚었다. {그 애가 죽었단 말이지?} 충격이 너무 큰 것일까? 그는 한동안 그렇게 망연히 중얼거렸다. 노인은 바로 무림맹의 삼 인자(三人者)이며 일세의 거웅 신검황 연주백이었다. 자식을 잃은 어버이의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은 법, 연주백은 비 틀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천웅대전(天雄大殿), 무림맹의 대소사가 논의되는 곳으로 오십 명 정도 수용할 수 있 는 호화로운 대전이다. 천웅대전은 지금 질식할 듯한 침묵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전 중앙에 놓인 옥관(玉棺) 안에 연대강의 참혹한 시신이 안치 되어 있고, 무표정히 그 시선을 바라보는 연주백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그 앞으로 감찰전주 막대승을 위시하여 조중, 장차수, 사공표, 그 외에도 십여 명의 눈빛이 매서운 사람들이 묵묵히 서 있는데 하나 같이 전신에 풍기는 위세가 비범한 고수임이 분명했다. 이들은 바로 무림맹을 이끌어 가는 삼전일각(三殿一閣)의 핵심인 물이었다. 중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연대강은 무림맹의 후계자이며 연주백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었다. 연주백은 떨리는 손으로 가만히 시신을 쓰다듬었다. {강아야! 너의 원한은 이 아비가 풀어 주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연주백은 몸을 돌렸다. 문득 급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 앞장 선 인물은 육순 가량 되어 보였다. 일신에는 백삼문사의를 입었는데 단정하고 탈속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은 오관이 수려하고 청수했는데 특이한 것은 그의 눈(眼)이 었다. 길고 가느다란 눈이 차분하면서도 지혜롭고 심기가 깊은 인물이 라는 인상을 주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위엄이 만인을 위압하는 종사의 풍도가 어리고 있었다. 그 뒤로 그림자처럼 따른 회색 장삼을 입은 삼십대의 청년은 일 견해 보아도 매우 어두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연주배글 제외하고는 모든 중인들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삼가 태상을 뵙옵니다.} 일제히 소리치는 그들의 표정은 극히 공손했다. 노인은 바로 태허천존(太虛天尊) 황보승(皇補承)이었고 청년은 항상 그의 신변을 따르는 향사(鄕師)라는 인물이었다. -태허천존(太虛天尊) 황보승! 불과 이십 세 때 만학(萬學)에 달통하여 과시에 장원을 했으나 그는 관직을 사양하고 심산에 은거하며 계속 학문에 정진했다. 탁월한 지모와 인품, 그리고 병법에 조예가 깊은 그는 이십 삼 세가 되던 해 혜천선사를 만나 강호에 뛰어들게 되었다. 사실 전륜교(轉輪敎)가 무너진 데에 황보승의 지모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황보승은 침통한 표정으로 연주백의 손을 잡았다. {연제, 무어라고 할 말이 없네.} 연주백은 격동을 참지 못하는 듯 전신을 떨었다. {아닙니다, 형님! 제가 박복한 탓이지요.} 황보승은 나직이 탄식을 흘리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자네가 직접 나설 생각인가?} 연주백은 이 말에 무표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우선 철불(鐵佛) 대형을 뵙도록 하세.} 황보승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동안 연대강의 시선을 주시했다. (강아를 살해한 자들은 그 대가를 치룰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 다. 무림에 또다시 혈풍이 일어난단 말인가?) 황보승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그 날밤 천웅대전은 밤새 등잔이 타오르고 황보승의 주재 아래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이른 아침, 삼십 년 이래 처음으로 무림맹의 정문이 활짝 열리고 수많은 인마의 무리가 쏟아져 왔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무사들은 중원각처를 향해 무섭게 질주했다. 무림맹 내의 감찰전, 귀견수 조중은 핏발이 선 눈으로 사공표를 쳐다보았다. {상가현 팽씨(彭氏) 농가에 한 달 전부터 묵고 있던 이호자라는 자가 오 일 전 사라진 이후 행방이 묘연합니다. 조사한 결과로는 그 자가 자객일 가능성이 제일 많읍니다.} 사공표의 설명에 조중은 냉랭히 말했다. {그 놈은 변장의 명수다. 게다가 교활하기 짝이 없으니 그 자가 설사 범인이라고 해도 벌써 또다시 다른 모습으로 바꾸었을 것이 다.} {...!} 조중의 말에 사공표의 얼굴도 납처럼 굳어졌다. {팽노대를 끌어내라. 그 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팽노대 뿐! 우리는 그자를 데리고 범인을 추적한다.} {알겠읍니다. 부전주님!} 사공표는 대답과 동시에 밖으로 달려갔다. 조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담사! 네놈을 잡을 때까지는 추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설사 지옥이라도 네놈을 따라 가리라.) 조중의 눈빛은 한 순간 횃불처럼 무섭게 타올랐다. 2 항주(杭州) 금룡장(金龍莊)-! 장주인 전육당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연아! 천엽(天葉)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다.} 복면여인은 눈을 빛냈다. {엽오빠의 예측이 틀릴 때도 있군요?} 비꼬는 듯한 어조였으나 그녀의 눈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백부님도 알고 있듯이 삼 일 전 연대강은 우리의 계획대로 죽 었어요. 그러나 한 명의 자객이 무림맹에 잡혔고 그때문에 석무심 의 이름이 이미 그들에게 알려졌을 거예요.} 전육당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내가 너를 은밀히 부른 것도 그 일 때문이다.} {...!} {천엽의 연락에 의하면 북천뇌보의 여식 뇌옥연(雷玉燕)이 약혼 자인 연대강의 소식을 듣자 일단의 고수를 거느리고 남하하고 있 다고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예요? 정혼자가 비명횡사했으니 조의 라도 표해야 되지 않겠어요?} 복면여인이 말했다. {이 일은 원래 계획 속에 들어 있던 일이 아니예요?}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소림사의 달마원주 혜오대사가 북천뇌보 에 가있다가 십팔나한(十八羅漢)중 오 인을 거느리고 뇌옥연과 함 께 오고 있다는 소식이야.} 복면여인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혜오선사라면 소림장로인데 거기다 오나한(五羅漢)까지...!}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소림이 강호에 나오지 않은 것은 삼십 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뇌옥연과 함께라니...} 전장주는 고소를 머금었다. {너도 알다시피 천엽의 말은 정확한 사실이다. 북천뇌보와 소림 사가 이번 일에 관계한다면 너도 알고 있듯이 현재 진행 중인 계 획은 중단해야 한다.} 전장주는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소림은 잠자는 거인이다. 혜오대사가 북천뇌보에 가 있었다는 사실은 소림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 당금무림에서 무림맹과 북천 뇌보, 그리고 소림이 힘을 합친다면 황제라도 어쩔 수 없는 세력이 다.} 북면여인은 막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문득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전장주의 눈빛이 굳어졌다. {소림이 움직이고 있는 이상 확실한 사태를 파악할 때까지 우리 는 잠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의 입은 모두 막아야 하 겠군요?} 복면여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엽의 뜻은 그렇다. 석무심은 비록 아까운 인재지만 일이 이렇 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좋아요. 하지만 그를 제거한다고 해도 현재 석무심과 담사라는 자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어요.} 복면여인은 차갑게 대답하자, {이틀 후면 천위(天威)가 도착할 것이다.} {그게 정말이예요? 천위오빠가 정말 중원으로 돌아오나요?} 황망히 외치는 복면여인의 어조에 반가움이 잔뜩 실려 있었다. 전장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敎)중에서 석무심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천위밖에 더 있 느냐?} 복면여인은 눈빛이 몽롱했다. {천위오빠를 볼 수 있다니... 이틀 후면....} 그녀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흥분을 억눌렀다. {기뻐하는 것은 이틀 후예라도 늦지 않으니 그때 하도록 하고 그 전에 우리는 준비를 해야된다.} {걱정말아요, 백부님! 천위오빠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신념에 차 있다. 전장주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단정할 일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 된다. 사실 범 천대공 연대강도 무공만으로 따진다면 천위에 비해 결코 낮지 않 아. 그런데도 일개 자객인 담사라는 자는 그를 죽이고 유유히 빠져 나왔단 말이야.} {흥!} 복면여인은 불복하는 듯 코웃음쳤다. {그것은 그 자의 무예가 높아서가 아니라 암수를 쓴데다 독수귀 라는 자가 먼저 상처를 입혔으니 성공을 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결 코 그 자는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쨌든간에 우리는 조심할 필요가 있어. 담사가 연락을 해 오는 대로 준비를 해야 해.} 전장주가 신중히 말하자 복면여인은 나직이 대답했다. {알았어요, 백부님!} 그녀는 대답과 함께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전장주는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제수씨, 소림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오. 남편을 잃은 제수씨의 사무치는 원한을 모르는 바는 아 니나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려.) 전장주는 가슴에 스치는 불안감에 문득 피곤함을 느꼈다. 범천대공 연대강의 피살은 강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금무림에 어떤 자가 있어 그를 죽었단 말인가? 강호인의 관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것이 무림맹을 상대로 어떤 단체가 도전한 것인가, 아 니면 단순한 원한 관계인가? 단순한 원한관계라면 모르나, 만약 이것이 방파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계획된 살인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바로 혈풍을 예고하는 것이다. 무림맹은 당금무림에서 구파일방을 제치고 천하제일세력으로 자 타가 인정할 정도로 거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그 무림맹이 복수를 내걸고 움직인다면 그 파급은 전강호에 미 친느 것이다. 난세천하(亂世天下), 그것은 바로 난세천하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3 홍무(洪武) 팔년(八年) 오월(五月)-! 점점 기승을 더해가는 초 여름의 더위에 지칠대로 지친 듯 축 늘어져서 힘든 걸음걸이로 항주성(杭州城) 동문(東門)으로 걸어 들 어오는 마삼노인이 한명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이빨이 숭숭한 낡은 죽립을 쓴 노인은 먼 길을 걸어왔는지 입고 있는 마삼(麻衫)에는 온통 먼지가 쌓여 있었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노인의 발걸음은 힘에 겨운 듯 간간이 떨리고 있었다. 마삼노인은 시진으로 들어서자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은 채 서 쪽 대로로 접어들었다. 운상객점(雲上客店)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 앞에 멈추어 선 마삼노인은 옷에 묻은 먼지를 대강 털었다. 잠시 후 노인은 약간 주눅이 든 표정으로 객잔에 들어갔다. 운상 객점은 고급주루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제법 깨끗한 곳이었다. [어서 옵....!] 점소이는 급히 나와 손님을 맞으려다가 노인의 그 초라한 몰골 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점소이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낀 노인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저 주저 말했다. {돈....돈은 있네. 음식만 먹고 금방 갈 테니까...!} {따라 오슈.} 점소이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홱 돌아섰다. 마삼 노인은 점소이가 안내해준 가장 후미진 구석자리에 앉아 머리에 쓴 죽립을 벗었다. 그러자 가느다란 눈에 광대뼈가 툭 튀어 나오고 삶에 잔뜩 찌들린 듯한 추례한 얼굴이 들어났다. 나무거죽 같이 꺼칠하고 주름진 그 얼굴에서 평생을 고생과 함께 살아온 흔 적을 옅볼 수 있었다. 등 뒤에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노인은 그 제어야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십여 개의 탁자가 놓인 실내는 왁자지껄 매우 시끄러웠다. 개 중에 상인의 모습도 보였으나 손님들은 대부분 도검을 찬 무인들 이었다. 운상객점의 주인은 석년에 무림에서 제법 명성을 떨쳤던 노강호 (老江湖)였다. 그러나 원수에게 한쪽 다리가 잘린 이후 무림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서 객잔을 차린 것이다. 상노대(商老大)라고 불리우는 이 객점 주인은 무예는 그다지 특 출나지 않지만 교우관계는 매우 넓었다. 자연히 항주성의 무림인들이 운상객점에 모여들게 되었고 교우 관계를 중히 여기는 주인은 돈이 없는 무사들에게는 숙식도 공짜 로 제공하곤 했다. 자연히 운상객점은 절강성 일대의 무사들 뿐 만 아니라 대강남북의 무인들로 항상 들끓게 되었다. 사람이 모이면 정보의 교환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 늘상 무인 들로 붐비는 이곳 운상객점처럼 무림의 동정을 알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은 없었다. 그리고 요사이 무림인들은 모였다 하면 무림맹의 이야기 뿐이었 다. 마삼노인에게서 멀지 않은 좌석에 앉은 파풍도(破風刀)를 찬 장 한들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떠들고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지, 아암.} 입술이 두터운 장한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곡형도 알다시피 얼마전에 내가 표국 일로 태산을 지나가지 않 았소?} 그가 말하자 같이 앉아 있던 세 명의 장한들은 호기심에 찬 눈 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무림맹은 완전히 초상집이 되었소. 연대공의 부인은 비보 를 접하자 침상에 드러누웠고, 감찰전의 무사들은 범인을 찾느라고 동분서주, 그야말로 벌컥 뒤집어졌단 말이오.} 장한은 목이 마른지 말을 멈추고 술잔을 기울였다. 곡형이라 불린 장한이 외쳤다. {아! 이 사람아, 괜히 어물거리지 말고 술은 내가 살 터이니 빨 리 이야기해 보게.} 장한은 오만한 기색으로 입가를 소매로 훔쳤다. {사실 당금무림에서 범천대공 연공자를 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소?} {아! 이 사람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문제는 범인이 누군가 하는 것이지.} 한쪽에서 듣고 있던 장한이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내가 들은 바로는 두 명의 자객이 공격했다고 하는데 한 명은 독수귀(毒手鬼)라는 자로 오독문(五毒門)의 출신이라고 했소이다. 또 한명은 바로 도망을 갔다는데 그 자에 대한 것은 아직 아무것 도 밝혀진 게 없다고 하오.] [허어! 대단한 자로구먼!] [독수귀는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연공자를 시해한 두 번째 자객 은 변장술에 능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어서 귀견수 조중대협이 필 사적으로 추적을 하고 있으나 아직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고 하더이다.] [그래, 무림맹에서는 이번 일에 어떻게 조치하고 있는가?] 옆에 앉은 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듣기에는 태허천존의 지휘로 흑건 추혼대(黑巾追魂隊), 감찰전(監察殿), 태상전(太相殿)등에서 수백 명 의 고수가 강호천지에 흩어져서 범인을 쫓고 있다고 들었소.] {신검황 연주백 대협께서도 이번에 강호로 나오시겠지? 아들의 원수를 갚으러?} 왼쪽에 있던 장한이 확신하듯 말하자, {그야 당연한 일 아니오. 이틀 후 아들의 초상이 끝나면 연대협 께서 직접 강호에 나올 것이외다.} 그자들이 신나게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는 자리로 검사 차림의 젊은이가 다가왔다. 이야기를 나누던 장한들은 그 젊은이를 발견하자 황망히 자리에 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소표두(少 頭)님, 어서 오십시오.} {하하! 전부 여기에 있었군.} 장한들에게 소표두라 불린 청년은 유쾌하게 웃으며 그들과 합석 했다. 잠시 동안 인사가 오간 후 두터운 입술의 장한이 은근히 말했다. {소표두님, 이번에 범천대공의 죽음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 까?} 순간 소표두의 표정이 엄중해졌다. {자네들, 말조심하게.} 소표두는 주위를 일별한 다음 나직이 말했다. {지금 항주성에는 풍운이 일고 있네. 어젯밤 무림맹의 감찰전주 를 위시하여 부전주와 수명의 고수 그리고 흑건추혼대의 오십 인 무사가 은밀히 들어왔네.} [흑건추혼대가 오십명이나...!] 네 명의 장한은 일순 눈이 휘둥그래졌다. {혹...혹시 범천대공의 살인범이 항주성에...?} 한 명의 장한이 더듬거리자 소표두는 엄중한 표정으로 그자의 말을 끊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것 같네. 그러니 자네들은 행동을 조심하 도록 하게.} 이때 구석에 앉아 있던 마삼노인의 눈에 문득 한가닥 광채가 떠 올랐다가 찰나지간에 사라졌다. 第 十九 章 刺客의 憤怒 1 항주에서 서쪽으로 이십리 정도에 위치한 숭명산(嵩明山) 중턱에 는 하나의 절이 있었다. 원각사(元覺寺)-! 송조(宋朝) 말엽에 장강을 건너 침공해온 여진족에 의해 불이 났 으나 다시 건립되어 삼백 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었다. 삼경(三更) 무렵, 원각사 뒤쪽 언덕 위에 위치한 구층의 불영탑(佛影塔)에 다가서 는 훤칠한 인영이 하나 있었다. 준미한 외모에 어딘가 차가움을 풍기는 이십 오륙 세의 사나이, 그는 바로 새로이 강호에 나타나 무명을 날리고 있는 철혈무정(鐵 血無情) 석무심(石無心)이었다. [....!] 석무심은 불영탑에 도착하자 형형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한쪽에 멈추었다. 불영탑 아래 불안한 눈빛으 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오순 가량의 노인이 한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 노인은 평범한 마삼(魔衫)에 거슴츠레한 눈을 지닌 초라한 몰 골의 인물이었다. 마삼노인은 석무심이 노려보자 겁먹은 표정으로 더욱 입을 열었 다. {나...나는 담사라는 사람이 보내서 왔소이다.} 더듬거리며 말하는 그의 표정은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공포 에 턱밑을 씰룩이고 있었다. 석무심은 마삼노인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쓰디쓴 고소 를 지었다. (이 자는 절대 전날 나타났던 담사가 아니다. 실로 치밀한 놈! 자신이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다니...!) 내심 석무심은 담사의 철두철미한 행동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삼노인은 석무심이 말없이 노려보자 그의 무서운 눈빛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철(李鐵)아! 힘내라! 이 사람에게 물건만 받아가면 그가 이십 냥의 은자를 줄 것이다.) 내심 기대감에 부풀며 마삼노인은 말했다. {공... 공자가 석씨 성의 공자이시지오?} [담사라는 사람은 지금 어디 있소?] 석무심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냉랭히 물었다. {그....그건 저도 모릅니다요.] 마삼노인은 두려움에 떨며 더듬거렸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에 있으면..... 석씨 성의 공자가 무언가 를 줄테니 그것을 받아가지고 있으면 며칠 안으로 찾아온다고 했 지요 네!} 문득 석무심은 우수를 뻗었다. {아이고 나리! 살려 주십시요.} 마삼노인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　다. 어느 새 석무심의 우수가 그의 어깻죽지를 잡아 비틀고 있었다. 연신 식은땀을 쏟으며 비명을 지르는 마삼노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노인의 견정혈을 쥐어 그 노인이 정말 무공은 전혀 익힌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석무심은 이를 부득 갈았다. (죽일 놈! 교활하게도 이런 자를 보내다니.....) 노인을 노려보는 석무심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살기가 치밀어 오 른 것이리라. 헌데 바로 그때였다. [석사형, 그를 죽이면 안되어요.] 한 줄기 여인의 전음성이 석무심의 귓 속을 파고들었다. {그 자를 죽이면 담사라는 자객을 찾을 수가 없어요.} 막 내공을 투여하여 노인의 오장육부를 으스려 버리려던 석무심 은 움찔하며 손을 멈추었다. 여인의 전음성은 잠시 멈추었다 다시 들려왔다. {내 생각으로는 어디선가 그 자가 저 노인을 기다리고 있을 거 예요. 우선 돈을 주어서 노인을 보내도록 하세요. 제가 그 노인의 뒤를 은밀히 따라갈 테니까요.} 석무심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수를 거두어들였다. 이어 품 속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든 그는 그것을 마삼노인의 수중에 들려주었다. {이것을 그 사람에게 전해 주시오.} 마삼노인은 어깻죽지가 몹시 아픈 듯 오만상을 찡그리며 가죽주 머니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석무심의 살벌한 기세에 항의 한 번 못 해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휑하니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직후 한줄기 가냘픈 인영이 소리없이 숲 사이를 흘러 노인의 뒤 를 따라갔으나 노인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이윽고 노인과 그 뒤를 따르는 왜소한 인영은 어둠 속으로 오나 전히 사라졌다. [교활한 놈!] 석무심은 담사를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고는 노인이 달려간 곳 으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무심! 오랜만이군.} 갑자기 어디선가 석무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분한 이 목 소리에는 어딘가 스산한 느낌이 깃들어있었다. 흠칫 놀라 재빨리 돌아서던 석무심은 다음순간 눈을 크게 떴다. 불영탑의 어두운 그늘 속에 누군가 유령처럼 서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인물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 다. {석무심이 무상(武相)께 인사드립니다.} 석무심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무심, 비록 우리는 신분의 차이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사형제 (師兄弟)사이가 아닌가? 무상이라는 소리는 관두게.} 탑 그늘에 선 사내는 소탈하게 말하며 천천히 그늘에서 걸어나 왔다. (사형제 사이라고?) 석무심은 그 인물의 말에 내심 고소를 지었다. 자신을 비웃는 듯 한 웃음이랄까, 웬지 허무한 느낌을 주었다. {아직 막북에 계신줄 알았는데.... 항주에는 언제 오셨읍니까?} 석무심이 물을 때 한 줄기 달빛이 구름을 벗어나 어둠을 희미하 게 밝혔다. 그러자 불영탑의 그늘에서 걸어나온 인물의 모습이 비 로소 확연히 들어나 보였다. 헌앙하고도 강인해 보이는 용모의 준미한 청년, 그는 바로 마교 (魔敎)의 비전장법인 천마산수(天魔散手)로 자운유를 살해한 모용 천위(慕容天威)라는 신비 청년이었다. 2 무상(武相)-! 이것이 모용천위가 그들 신비조직에서의 지위인 듯 했다. {항주에는 사흘 전에 도착했네.} 모습을 들어낸 모용천위의 그 말에 석무심의 눈빛이 한 순간 어 리둥절해졌다. 그는 이 인물이 항주에 와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 르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오시는 줄 알았다면 소제가 마중을 나갔을 것인 데.....}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석무심의 사과에 모용천위의 표정이 갑자기 음울해졌다. {나는 일부터 자네에게 알리지 않았으니까!} [....!] 순간 석무심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주춤 뒤로 물러섰다. {저....저로서는 그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군요.}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석무심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그런 그를 보며 모용천위의 입가로 깊은 한숨이 흘렀다. {무심! 자네는 나의 말뜻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렇지 않 은가?} 한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질식할 듯한 침묵이 흘렀다. 불신과 회의, 그리고 은은한 분노가 실린 석무심의 눈길과 역시 복잡한 상념이 담긴 모묭천위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계획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입니까?} 이윽고 석무심이 질식할 것같은 침묵을 깨며 물었다. 이미 어떤 상황을 연상한 그의 목소리는 극히 침울했다. {소림사가 강호에 나왔네. 그것도 달마원주와 오나한이 북천뇌보 에 몇 달 전부터 머물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네.} 모용천위가 우울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의 이 말에 순간 석무심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계...계획을 변경해야 되겠군요.} 석무심은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모용천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십오년전의 좌절에서도 보았듯이... 소림사는 잠자는 사자와도 같은 존재네! 소림사가 자신들의 진정한 힘을 세상에 풀어놓는다면 천하를 장악하고 있다는 무림맹조차도 그들에 비할 바가 못돼지!] 모용천위의 눈빛이 더욱 침울해졌다. [그 소림사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또 그들이 출도한 목적과 확실한 동정을 모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당분간 잠적할 수밖에 없 는 일이네.] 석무심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모용천위를 주시했다. {그렇다면... 저는 성숙해(星宿海)의 성지(聖地)로 돌아가야 하겠 군요?} 그는 한가닥 희망을 품고 모용천위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이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모용천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무심! 성숙해로 돌아간다고 한들 무림맹의 손길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네. 그들은 지옥이라도 자네를 찾아올 걸세.} 순간 석무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모용 천위의 그 말에서 설마하던, 그리고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답을 얻은 것이다. {설마..... 나를 제거하려고....!} 석무심은 분노와 충격에 몸을 떨며 쥐어짜듯 내뱉았다. 영리한 도마뱀은 꼬리를 짤라버려 몸통을 지키는 법이다. 그리고 석무심의 말은 채 이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이 일을 반대했지만 어쩔 수 없네.} 모용천위가 진심으로 유감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듣는 석무심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우는 듯, 웃는 듯, 흡사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그는 자조의 웃음까지 떠올렸다. {이 일은... 문상(文相)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적용화 련(狄容華蓮), 그 여우년의 생각입니까?} 어느덧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난 듯 차분한 어조로 묻는 석무심 의 표정은 그러나 무겁게 일그러져 있었다. 모용천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네. 자네의 말뜻은 자네와 우리 형제의 사부이기도 한 혁(赫)어른께서 이 일을 아느냐고 묻고 싶겠지?} {알고 있으니 제가 입을 더 놀릴 필요는 없겠지요.} 냉랭한 석무심의 말에 모용천위는 쓸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 분은 자네의 사부이니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그 분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석무심은 그의 말에 만족한 미소를 띄었다. {무상! 나는 무림맹 따위에 몰살을 당한 전륜교(轉輪敎)의 제자 가 아니라 천년의 전통을 지닌 위대한 마교(魔敎)의 제자요. 내 비 록 무상의 적수는 아니지만 결코 호락호락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 오.} 석무심은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 뽑아들었다. 창______! 일순간 어둠을 밝히는 삼엄한 검기가 번쩍 빛이 났다. 서릿발 같 은 예기를 품고 있는 예리한 검날은 시퍼런 광채를 뿌렸다. 이어 석무심은 검집을 땅에 던졌다. 무사가 검집을 버린다는 것 은 이미 생사를 도외시한 것이다. 모용천위는 석무심의 단호한 태도에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가 비 록 석무심에 비해 한 단계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나 무사로서 적을 대함에 있어 방심한다는 것은 금물중의 금물이다. 그리고 사실 모용천위는 석무심이란 이 사나이를 한 사람의 무 사로서 대단히 높이 사고 있었다. {무상의 천마산수(天魔散手)를 이 검으로 받아보겠소!} 석무심은 장검을 쳐들어 형형한 에기를 토해내며 음산하게 말했 다. 극도의 분노와 충격으로 격랑을 일으키던 그이 마음은 이 순간 이미 무섭도록 고요해져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이토록 기백과 정신이 자신의 검과 혼연일체 가 되는 재능은 결코 쉽게 찾아볼 수 있느 ㄴ것이 아니었다. 모용천위도 말없이 자세를 갖추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은 불필요 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상대의 투지가 최고조에 이른 이상 조그 마한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하늘에는 만월(滿月)이 둥그렇게 솟아올랐다. 어둡던 숲속이 환한 달빛 아래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 달빛아 래 마주 선 두 사람의 일류고수들 사이에는 터질 듯한 침묵이 말 없이 흘렀다. 3 시간이 흘렀다. 모용천위와 석무심은 아무도 먼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모용천위의 자세는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른발로 공중을 밟고 우수는 가슴 앞으로, 좌수는 가슴을 보호하듯이 가리고 있었 다. 그의 표정은 고요하리만큼 무심했다. 석무심은 내심 감탄을 했다. (과연..... 모용천위이다. 사부께서 이자가 마교(魔敎) 창립 이래 제일고수라고 하더니...) 두눈을 스산하게 빛내며 그는 검 끝을 날카롭게 세웠다. 치_____ 치짓____ 칙! 그의 검으로부터 강렬한 검기(劍氣)가 흡사 독사의 혀 끝에서 독 이 뿜어지듯 솟아나왔다. 그 싸늘한 검기에 사위는 무서리라도 내 린 듯이 얼어붙어갔다. {...} 석무심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광채가 번뜩였다. 그때 모용천위의 몸이 서서히 움직였다. {.....!}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미세하고 느려 지루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와함께 음유한 암경이 소리없이 일어나 사방에서 석무심을 압박 해왔다. 석무심의 검 끝이 가늘게 흔들렀다. 모용천위의 몸에서 일어나는 무형의 압력은 흡사 천근만근의 무쇠덩이처럼 그의 전신을 내리눌 러오고 있는 것이다. (으음 과연! 이대로 가면 천마산수의 압력에 손도 채 써보지 못 하고 당한다.) 석무심은 이를 악물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냉공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자신이 불리 할 뿐이다. 그리고 일단 판단이 서는 순 간 석무심의 행동은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다. {천마도천세(天魔屠天勢)-!} 그의 입에서 벽력 같은 대갈성이 터졌다. 순간 그의 검 끝에서 폭죽 같은 검광이 쏟아져 나왔다. 츠츠..... 츠츳... 츳! 번갯불이 일 듯 연속 십팔검이 작렬했다. 서릿발같은 반 고형의 검기가 모용천위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며 발휘되었 다. 그 예리한 검기에 스치기만 해도 잘라지지 않는 것이 없을 정 도였다. 허나 모용천위는 여전히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며 검끝을 따라 몸 을 띄웠다. 흡사 바람에 깃털이 날리는 듯 그는 검기의 자락을 타 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무엇이든 잘라버릴 듯하던 석무심의 일격은 너무도 어이없이 파 해된 것이다. {탓______!} 일격에 실패한 다시 한 번 석무심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지고 두 사람의 신형이 스쳐지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석무심, 비록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었지 만 그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모용천위의 자세는 자리는 뒤바뀌었으나 한 점의 변 화도 없었다. {후후..... 과연 무상의 무예는 천하제일이요.} 괴소를 흘리며 말하는 석무심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이미 이 대결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모용천위가 지닌 바 실력 을 무리없이 구사하는 것을 본 순간 석무심 자신에게 이길 수 있 는 기회는 영영 없어진 것이다. {석무심! 미안하네.} 모용천위는 진심으로 유감을 담아 말함과 동시에 우수를 앞으로 쭉 뻗었다. 순간 석무심의 입에서도 대갈성이 터졌다. {마도귀천행(魔道鬼天行)-!} 쩌어엉! 폭발하는 듯한 검광이 현란하게 빛을 뿌리며 검과 함께 석무심 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꽈릉! 검과 장이 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음이 터져 사위를 뒤흔들었다. 그와함께 두 사람의 위치가 다시 후딱 바뀌었다. 서로 자리를 바꿔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 다. 두 사람 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툭_____! 그러다가 문득 땅바닥에 석무심의 검이 떨어졌다. 그것은 이미 검날이 산산이 부서진 파검이었다. 주르르! 그와함께 굳게 다물고 있던 석무심의 입가로 한줄기 선혈이 흘 러내렸다. {천마산수.....! 과연.... 마교 제일의 비전절예답군.} 다음순간 쥐어짜듯 중월거리던 석무심의 입에서 핏물이 확 터져 나왔다. 쿠웅! 그와 동시에 석무심 몸은 흡사 전신의 모든 뼈와 근육이 부서지 고 끊어지기라도 한 듯이 그 자리에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왁!} 동시에 그의 입에서 조각조각 끊어진 내장이 섞인 한 사발의 피 가 왈칵 쏟아졌다. 그의 가슴이 삽시간에 시뻘건 피로 물들어 갔 다. 석무심의 손이 부들부들 떨며 땅을 짚었다. {사....사부가.... 이 일을 안다면.... 결코 가만... 있지는 않을 거요.} 석무심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땅에 기댄 채 쓰러졌다. 그렇게 그들 신비조직과 담사를 연결하던 한 고리는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모용천위는 석무심의 시체를 응시하며 나직이 독백했다. {게다가 자네를 죽인 것은 무림맹이 될 것이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모용천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네가 당한 상처는 천마산수가 아니라 소림의 수법인 격산타 우(擊散打牛)의 수법이거든!} 그는 독백하며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은 어둠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석무심으로부터 가죽주머니를 받은 마삼노인은 벌써 반 시진 동 안 걷고 있었다. 멀리 불야성을 이룬 항주성의 모습이 보이자 노인은 대로에서 왼쪽으로 난 숲길로 접어들었다. 약 백 장쯤 더 갔을까? 어둠 속에서 하나의 희미한 불빛이 보였 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은 한채의 황폐한 사당묘(祠堂廟)였다. 몇 십 년 동안 손질을 하지 않은 사당묘는 무성한 잡초와 들짐승의 은신처로 변해 버렸다. 마삼노인은 사당묘에 도착하자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살펴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염병할...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이십 냥이 아니라 백 냥을 준다 해도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마삼노인은 귀기마저 감도는 버려진 사당묘를 쳐다보며 진저리 를 쳤다. 그러나 노인은 이내 할 수 없다는 듯이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으 로 걸음을 옮겼다. 공포로 인해 그의 두 다리가 후줄근히 떨려왔 다. (꼭.....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군. 그 늙은이도 이상하지. 하필이 면 이런 곳으로 오라고 하다니.....) 노인은 내심 투덜거리며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4 마삼노인이 완전히 안으로 사라지자 어둠 속에서 그를 지켜보던 한쌍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호호! 여기서 만나기로 한 모양이군.) 내심 만족한 교소를 흘리며 복면여인은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피핑-! 돌연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고 측면의 어둠 속 에서 두 가닥의 백광(白光)이 그녀의 천돌혈(天突穴)과 기문혈(奇門 穴)을 향해 섬전같이 쏘아왔다. {흥! 이따위 암습으로 어림도 없다.} 하지만 복면여인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면서 식지(食指)와 중지 (中指)를 뻗었다. 그러자 두 가닥의 지풍이 쏘아져 나가 날아들던 백광과 부딪치 고, 두 가닥의 백광은 이내 힘없이 뚝 떨어졌다. 쉬잇! 거의 동시에 복면여인의 몸이 비조처럼 백광이 쏘아져온 좌측의 숲속으로 날아갔다. 실로 재빠른 임기웅변에 날렵한 경공이었다. 쉬쉬쉭! 그녀의 신형이 숲 속으로 파고들자 다시 세 가닥의 백광이 벼락 같이 날아왔다. 흠칫한 그녀는 소맷자락을 휘저었다. 강력한 진기가 주입된 그녀 의 소맷자락은 강철보다 더 단단했다. 헌데 소맷자락과 백광이 부딪치는 순간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 다는 것을 느꼈다. 퍼펑! 별안간 백광이 폭발하면서 뿌연 연기를 피웠던 것이다. {이런 치사한 자 같으니.....} 그녀는 깜짝 놀라며 다급히 섬섬옥수를 뻗었다. 한 순간 그녀의 양 소맷자락에서 강렬한 경풍이 일어나며 폭발한 백연을 허공으로 말아올랐다. (휴..... 자칫 잘못 했으면 그 놈의 암수에 당할 뻔했어.) 독연(毒煙)을 날려버린 그녀는 내심 안도의 숨을 삼키며 주위를 살폈다. 그녀가 날아든 숲 속은 어둠만이 앞을 가릴 뿐 고요한 정 적에 휩싸여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으악______!} 갑자기 사당묘 쪽에서 한소리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아차! 도적놈의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에 속았어.) 복면여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황망히 사당묘를 향해 날아갔 다. 비연천림(飛燕穿林)의 신법으로 날아가는 그녀의 경공은 섬전처 럼 빨랐다. [이....이런!] 사당묘 안에 들어서던 복면여인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작자에게 당하고 말았어.} 그녀는 노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이를 바득 갈 았다. {내가 이 따위 술책에 넘어가다니..... 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 만은 꼭 잡고 말겠다.} 흐릿한 등잔 불빛 아래 심부름을 한 마삼노인이 가슴에 검이 박 힌 채 널브러져 있었다. 입가에 가득 묻은 피, 그리고 가슴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재빨리 노인의 시신을 살펴보던 복면여인은 문득 눈을 빛냈다. 피로 물든 마삼노인의 가슴 섶에 삐죽이 튀어나와있는 가죽주머니 는 바로 석무심이 그에게 건네준 돈주머니가 분명했다. {호호호...} 가죽 주머니를 발견한 그녀는 득의의 교소를 흘렸다. {흥! 그 작자는 급히 달아나는 바람에 저것을 가져가지는 못했구 나.}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허리를 숙여 가죽주머니를 잡아챘 다. 헌데 가죽주머니는 무엇에 걸렸는데 잘 빠져나오지 않았다. 흠칫한 그녀는 시신 쪽으로 좀더 가까이 허리를 숙이고 가슴을 풀어헤쳤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팟! 노인의 시체가 갑자기 눈을 부릅 뜨더니 벼락같이 그녀의 기문, 장대 양혈을 짚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악_____!} 깜짝 놀라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후 였다. 대표적인 마혈(痲穴)인 두 혈도를 짚인 그녀는 그대로 전신 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그와함께 피를 흘리며 누워있던 시체가 벌떡 일어섰다. {흥! 감히 날 부려먹은 뒤 죽이려고 하다니.....!} 죽은 척 하고 있던 노인은 입가에 묻은 피를 쓰윽 닦으며 스산 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복면여인은 이 갑작스런 사태에 까무러질 것만 같았다. {당..... 당신은.....?} {그렇다! 네가 쫓고 있는 담사라는 사람이지.} 그는 냉랭히 대답을 하며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았다. 담사! 그렇다! 죽은 척 하고 있던 그 노인은 바로 담사였다. 그는 복면여인이 자신의 심부름을 한 이철(李鐵)이란 노인의 뒤 를 밟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해서 암기로 암습하여 멀찍이 유인한 뒤 사당으로 돌아왔고, 심 부름을 한 노인이 가져온 가죽주머니를 이용하여 그 노인으로 위 장했던 것이다. 팟! 담사는 자신의 가슴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내었다. 빠져나온 그 검의 칼날은 너무나 얇아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그때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복면여인은 눈앞이 캄캄 했다. 이 자는 자객이다. 그것도 보통사람처럼 인정이나 세상의 관습 따위에는 얽매이지 않는 잔악무도한 자객이다. 이런 자의 손에 걸 린 이상 그녀는 자신의 생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뜻을 보아 이미 그도 자신이 그를 죽이기 위해 온 줄 알 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이 늑대같은 자의 손에 떨어진 이상 살아날 희망이 없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만 시간을 끈다면 혹시라도 모용 천위가 와 줄지 모른다. 그녀의 눈빛은 공포에 젖었다가 다시 절망에 빠졌다 하면서 담 사를 응시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교활하군요. 어떻게 해서 마삼노인과 당신이 바뀔 수 있었죠?} 복면여인의 말에 담사는 돼지피에 젖어있는 겉옷을 벗어버리며 냉혹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시간을 끌려는 수작인 모양인데..... 네가 기다리는 모용 천위란 자는 절대 오지 않아.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겠지.} 순간 복면여인은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놀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담사는 잔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별 개 아니야. 내가 너의 뒤를 따르면서 표시해 놓은 것 을 모조리 지워 버렸지.} 담사는 말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사의 그 말에 복면여인은 아득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 다. {어쨌든간에 잠시 동안 시간이 있으니 설명을 해 주지. 의문을 풀지 못하고 염라대왕 앞에 간다면 그가 너에게 한동안 설명해야 할 테니!} 5 문득, 담사는 조롱섞인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은 계략을 잘 세웠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지만 동료였던 석무심도 죽이고 나 까지도 죽이려고 말이야.} 복면여인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모용천위라는 자의 무예는 정말 고명하더군. 그 대단하다는 철 혈무정을 단 삼초에 죽였으니 말이야!}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모용천위의 존재가 뇌리에 크게 부각되었 다. 사실 모용천위의 살인적인 무예는 그로서 난생처음 보는 절정 의 무공이었다. 그의 손에 죽은 범천대공 연대강도 대단한 고수였 지만 모용천위라는 이 자에게는 역시 미치지 못했다. 그는 힐끗 복면 여인을 주시한 다음 말을 계속했다. {나는 불영탑 꼭대기에 숨어 있었지. 너희들은 주위만 살폈지 불 영탑을 조사하지는 않더군.} 복면여인은 이 말에 새삼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탑의 꼭대기에 있었다니.... 본래 사람이란 동물은 원래 하늘을 잘 쳐다보지 않는다. 첫째는 눈이 부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눈의 구조가 좌우, 정면, 땅을 쳐다 보며 살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신빙성이 없는 소리다. 등하불명이랄까? 지척인 불영탑 위에 숨는 것은 참으로 간단하 면서도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복면여인은 그의 혜지에 감탄 을 느꼈다. 담사의 말은 조용히 울려퍼졌다. {석무심이 죽고나자 나는 너의 뒤를 쫓아왔지. 물론 오면서 네가 표해둔 표식을 완전히 지우고 말이야. 그 다음은 내가 너를 유인한 다음 재빨리 이곳으로 돌아와서 노인을 죽인후 너를 기다린 것이 지.} {....!} 담사의 치밀함과 잔혹함에 복면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변장은 처음부터 그 노인과 똑같이 했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 복면여인은 그의 절묘한 계책에 고개를 흔들었다. 담사는 역시 보통의 평범한 자객이 아니다. 뛰어난 음모와 무예, 그리고 대담한 철담을 고루 갖춘 초일급 자객인 것이다.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구원의 손길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한 복면여인은 힘없이 물었다. 담사는 씨익 웃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자 문득 여인은 눈앞의 이 사람이 매우 젊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직까지 나를 건드린 사람은 아무도 살려둔 적이 없어. 너도 예외는 아니지.} 담담한 그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지옥의 사자가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복면여인은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강호의 율법은 피에는 피로 이에는 이로니까 할말은 없어요! 죽 이려면 어서 죽여요! 당신의 생명을 노리다가 이렇게 잡혔으니 죽 어야 당연한 일이예요.} 주르르! 말하는 복면여인의 눈에서 문득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 렸다.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리운 얼굴들이 생각나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나면 천위오빠는 비록 십팔층지옥의 아비지 옥이라고 해도 당신을 찾아내서 원한을 풀어 줄 것이예요.} 울먹이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확 고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담사의 눈길이 기묘해졌다. {모용천위라는 놈을 사랑하는 모양이군?} 순간 복면여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흥! 그 분은 당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분 이 아니예요.} 그녀의 교갈에 담사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훗훗훗....!} 솟구치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인가? 복면여인은 문득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의 괴소는 무어라 표현 하기 힘든 것이었다. 흡사 황량한 들판에서 상처입은 늑대의 부르 짖음이랄까, 그녀는 힐끗 자신을 쳐다보는 담사의 눈을 보며 숨을 죽였다. 유리알처럼 생기가 없는 한쌍의 눈동자가 무기력하고 힘이 없으 며 절망감이 엿보이는 여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담사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억압된 분노의 불길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동자에 실린 그 격렬한 감정을 보는 순간 복면여인은 섬 뜩한 한기를 느꼈다. 역린(逆鱗)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무언가 건 드려선 안되는 것을 건드린 듯한 예감이 그녀의 교구를 떨게 만들 었다. {그래, 난 자격이 없지. 없고 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언 듯 듣기에는 아주 차 분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는 듯 고저 장단도 없 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착 갈아앉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마치 눈앞에서 한 마리의 상처입은 늑대가 자신의 상처를 핥고 있다는 듯한 느낌 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였다. 퍼억! 돌연 눈앞이 흐릿해짐과 동시에 복면여인은 얼굴에 수십 개의 바늘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담사가 갑자기 그녀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여인은 세상에 태어난이래 이런 엄청난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귀 하디 귀하게 자란 그녀가 언제 남에게 손찌검을 당해봤던가? 허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담사는 무어라고 악에 바친 소리 를 지르면서 미친 듯이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퍼퍽! 철썩! 얼굴, 가슴, 배 할 것 없이 담사의 주먹은 잔인하게 그녀의 전신 을 격타했다. [네...네놈이! 아악! 이 개같은... 흐윽!] 복면여인은 구타당하면서 부르짖었다. 처음에는 욕설이 튀어나왔 으나 그것은 일순간 뿐이고 그녀는 구슬 같은 눈물을 뿌리며 담사 에게 애원을 했다. {제발..... 그만.... 그만 때려요. 아악! 그만....!} 아파도 너무나 아팠다. 마혈이 제압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는 꼼짝도 못하고 사내의 주먹세례를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몸에 가해지는 연속된 엄청 난 고통에 눈앞이 흐릿해져 가고 자신이 이대로 죽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神)들의 이름을 외우며 빌었다. 이 끔찍한 고통을 어서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6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는 일순 자신에게 가해지던 잔인한 매질 이 멈추어졌다는 것을 느끼며 감겨드는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눈앞에 온통 땀에 젖어있는 사내의 얼굴이 있엇다. 그는 거친 황 소처럼 연신 숨을 푹푹 몰아쉬고 있는데 땀에 흠뻑 젖은 그 얼굴 은 그녀로써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얼굴에는 여기저기 때 같은 것과 수염이 아무렇게나 붙어 있었 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와 약간 치켜올라간 입술을 그의 고집이 세 다는 것과 턱 밑의 선은 그의 굳건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비록 절세미남은 아니었으나 그녀로서는 이토록 강한 이질감을 풍기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황야를 누비는 고독한 늑대의 모습이랄까? 그의 몸 전체에서 강 렬한 야수의 지질이 풍겨나왔다. 그녀는 한동안 막연한 얼굴이었으나 곧 이 사나이가 변장했던 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쏴아아아! 제단 앞에 켜져있는 등잔불빛이 부서진 사당문 틈으로 불어온 바람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그 불빛 아래 담사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 다. 변장이 벗겨진 그의 모습은 이제 많아야 이십 이삼 세 가량으 로 보였다. 꽉 다물어져 있던 그의 엷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키키! 그래! 나는 버려진 몸이었다. 날 낳아준 부모란 것들은 열 냥인가를 받고 나를 부자집에다 팔아넘겼단 말이다. 그때 나의 나 이 겨우 칠 세, 일곱 살 때였지.] 담사의 입에서 상처입은 늑대가 으르렁대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 왔다. [흐흐! 뼈가 빠지도록 일했지! 하지만 어린 난 언제나 굶주렸고... 돌아오는 것은 매와 멸시 뿐이었다.} 옛일을 회상하는 그의 목소리는 차라리 피를 토하는 듯 부르짖 는 절규였다. [나는 주인집의 개가 부러웠어. 왜냐구? 그 놈은 매일 하는 일 없이 꼬리만 흔들어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나는 그 놈이 정말 한없이 부러웠었다!] 담사의 악 문 이빨 사이로 소름이 오싹 끼치는 금속성이 새어나 왔다. [그리고 주인 집에는 딸이 하나 있었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 고 귀여움이란 귀여움은 모두 받고 자란 예쁜 딸이 말이야.] 담사의 두 눈에서 잔혹했던 유년(幼年)의 기억이 어둠의 빛처럼 음사한 광채로 피어올랐다. [그 애도 나를 괴롭혔지. 매일 나를 채찍으로 때리고 조금이라고 반항하면 사흘씩 밥도 주지 않았어. 헌데 말이야! 킥킥! 열두살인가 열세살인가 되었을 때 주인집 딸년은 나에게 기묘한 짓을 시키기 시작했어.] 담사는 복면여인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서 느릿하게 붉은 핏 발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욕정(欲情)의 불길이었다. [나보다 네 살이 위인 그년은 어느날 밤... 아무도 없는 제방으로 날 불러들이더니 갑자기 옷을 벗는거야!] [...!] 온몸이 쑤셔대는 고통에 떨고 있던 복면여인은 담사의 말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을 연상하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녀 의 그 예감은 담사의 이어진 말로 확인되었다. [그래 맞았어! 난 그년의 노리개가 된거야!] 복면여인의 눈빛을 읽은 담사는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이며 말했 다.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엄격한 훈도를 받고 자란 그녀로서는 실 로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 [날 즐겁게 해봐! 그럼 저건 네거야!] 주인집 딸은 이제 막 여자 티가 나기 시작한 알몸을 자랑스럽게 들어낸 채 눈웃음을 쳤다. 백옥같이 희고 매끄러운 피부, 이제 막 봉긋이 돋기 시작한 앙증 맞은 젖가슴, 뽀얀 허벅지 사이의 도독한 둔덕에는 자잘한 솜털이 제법 덮여있었다. 난생 처음보는 여자의 알몸이었다. 남자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지닌 여자의 몸은 어린 소년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 했다. 하지만 여자의 벌거벗은 알몸따위는 어린 담사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소녀가 대가로 내놓은 맛있는 음식 이었다. 주인집 딸은 어디서 배웠는지 사내가 여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 을 알고있었다. 아마도 부모나 집안의 아랫것들이 부주의하게 정사 를 벌이는 것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유혹과 또 소년다운 호기심으로 담 사는 기꺼이 그녀를 위해 봉사했다. 그는 두손뿐 아니라 혀와 입술까지 다 동원하여 주인집 딸을 애 무해주었고, 그녀는 그 생경하고 강렬한 쾌감에 발정난 짐승의 암 컷처럼 신음하며 몸부림쳤다. 오래지 않아 담사는 주인집 딸이 어디를 어떻게 애무해주어야 가장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겨우 모양을 갗추기 시작한 젖무덤 을 쥐어 비틀고 흡입하면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그래도 역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치부에 대한 직접적인 자극이었다.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담 사는 솜털이 덮이기 시작한 소녀의 그곳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핥아야만 했다. 第 二十 章 너도 똑같은 女子다 1 [흐흐! 밤마다 난 그 계집의 욕정을 채워주기 위해 혓바닥이 부 르트도록 그년의 냄새나는 거기를 개처럼 핥아주어야만 했었다!] 담사는 진저리를 치는 복면여인이 모습을 악의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덕분에 그 후로 나의 생활은 조금 나아졌지. 그년은 내 충실한 봉사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그때까지 맛도 보지 못한 각가지 기름 진 음식들을 던져주었거든!] 그의 눈빛은 점점 음욕과 광기에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좋은 날도 오래 가진 못했어!] 담사는 처절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 날은 추운 겨울이었다. 눈도 많이 내렸고.... 그 날 밤도 나는 개처럼 그년에게 봉사를 했지. 따뜻한 음식을 얻어 먹기 위해서....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년 애비에게 그 일이 들통이 나게 되었다.] 그 말이 끝났을 때 담사의 신형이 한 순간 부르르 떨었다. 이미 십년이상이 지난 그때의 일을 바로 어제의 일인양 생생하게 떠올 린 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분노에 사로 잡혀 있었다. 복면여인은 그의 광기에 젖은 말로 공포와 호기심, 그리고 동정 등과 같은 기이한 느낌으로 듣고 있었다. [내가 한창 그년의 벌린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박고 헐떡일 때 주인이 들이닦친 거야! 헌데 애비가 방에 들어선 순간 그집 딸년이 어떻게 했는줄 알아?] 담사는 키득이며 조롱하듯 말했다. [갑자기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치는 거였어. 사람 살리 라고 말이야. 졸지에 나는 주인집 딸년을 겁탈하려고 한 죽일 놈이 되어 버렸지.] 담사의 표정이 처절해졌다. [나는 울고 불면서 설명을 했지만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고 하루종일 죽도록 얻어맞고 난 다음 광 속에 갇혔어.] 그의 악문 이빨 사이로는 연신 이가 갈리는 섬뜩한 소리가 배어 나왔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어. 어둠 뿐인 광속에서 십여일 동안 굶주림 과 암흑 그리고 상처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지. 하지만 아무 도 나를 구해 주려 하지 않았어. 그 누구도 말이야.] 어느덧 복면여인의 눈빛이 애처롭게 변했다. 이 짐승같은 사내의 처절함이 절절이 그녀의 가슴에 와 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그녀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이었다. [주인도 물론 내가 제 딸 년을 겁탈하려는 것이 아닌 줄 알고 있 었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놈이 아닌 이상 주인의 딸에게 손을 댈 놈은 없거든!] 담사는 자종의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소문이 나면 패가망신이니 내가 죽기를 바랬어. 하지만 나는 너무나 억울해서 그대로 죽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탈출하기 로 결심을 하고 광속에 있던 짚이나 쥐를..... 먹을 수 있는 것이라 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어.] 담사가 유년시절에 겪은 이야기는 실로 한 인간의 비참했던 과 거사였다. 한 인간의 얼룩진 과거-! 살기 위해서, 죽을 수가 없어서 끈질기 게 이어온 한 불우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이제 겨우 열두살이 된 어린 소년은 피죽 한 숟갈 얻어먹지 못 하고 십 삼 일이나 광속에 갇혀있었다. 주인은 딸년의 추문을 막기 위해서 그가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저절로 죽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담사는 죽지 않앗다. 십삼일 동안 그는 쥐, 벌레 등 무엇 이든 닥치는대로 잡아 먹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굶주림을 채울 수는 없었다. 겨우 숨을 붙여가 는 정도에 불과했다. 헌데 어느날 밤 한 마리의 개가 광의 비좁은 틈새로 기어 들어 왔다. 그 개는 바로 주인이 애지중지하는 저 멀리 아라서(러시아) 에서 온 조그맣고 털이 많은 개였다. 소년은 개를 발견하자 젖먹던 힘까지 다 발휘해서 개의 목을 조 였다. 개는 원래 생명력이 질긴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할 때는 종종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소년은 개의 숨결이 멈추자 목을 물어 뜯었다. 입 안에 자욱이 비린내가 번졌지만 소년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네 시진 후, 주인의 개를 남김없이 뱃속에 집어넣어 어 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소년은 광 속에 있던 나무들 이용해 원시 적인 방법으로 불을 일으켰다. 원래 광 속에는 짚단과 나무가 많이 쌍여 있었다. 순식간에 광속 은 불길이 솟아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눈과 코로 파고들어 죽을 지경이었으나 소년은 땅바닥을 기며 문이 타들어 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문에 불길이 옮겨져 맹렬히 타오르자 소년은 문을 부수 고 튀어나왔다. 원래 이 곳은 장원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 인적도 별로 없었다. 이 추운 한겨울 밤에 누가 나와 다니겠느냐? 충천하는 불길이 사 방을 환히 밝혔을 때야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소년은 광을 빠져나온 다음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인집으로 숨이들었다. 2 잠시 후 온 집안의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몰려나가자 소년은 은 밀히 주인집 딸의 방으로 침입했다. 방 안은 여인의 침실답게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희끄무레한 여인의 동체가 침상 위 에서 가느다란 숨을 몰아쉬며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서서히 침상 앞에 다가선 소년의 수중에는 날카롭게 날이 선 부 엌칼이 들려 있었고, 소년의 두눈은 증오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문득, 인기척을 느낀 침상의 소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주인집 딸은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를 못햇다. 피와 오물로 얼룩진 누더기를 걸치고 깡마른 손에 부엌칼을 든 소년의 몰골은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끔찍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어둠 속에서 시퍼런 인광을 토하는 소년의 핏발 선 두눈은 지금 막 지옥에서 뛰쳐나온 아귀와도 같은 것이었다. 소녀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를 개처럼 부리며 쾌락에 떨던 상전의 딸이 아니었다. 발가벗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목숨만 살려주면 무엇이든 하겠 다고 애원하는 소녀의 자태를 본 소년의 가슴에서 악마의 본성이 꿈틀거렸다. 소년은 먼저 소녀의 손을 뒤로 묶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자신에 게 했던 일을 똑같이 소녀에게 시켰다. 주인집 딸은 살기 위해서 오물로 얼룩진 소년의 몸을 혀와 입술 로 샅샅이 핥아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애처로운 입안에 자신의 실체가 수용되었 을 때 소년은 격렬한 욕정을 느끼며 자신이 이미 여자를 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소녀는 인후 가득히 느껴지는 역겨운 소년의 분비물에 격렬한 구토를 느꼈지만 살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며 참아야만 했다. 처음으로 성인의 쾌감을 맛본 소년은 곧 무서운 회복력을 발휘 하여 다시금 무쇠처럼 단단해졌다. 두손이 뒤로 묶인 채 꿇어앉아 구토를 참으며 숨죽여 오열하는 주인집 딸을 본 소년의 마으속에서 악마가 충동질을 했다. 그는 그녀를 거칠게 쓰러뜨리고 올라타 치명타를 가했다. 배를 채우기 위해 개가 되어 핥아야만 했던 주인집 딸의 그 치부에 자 신의 끊어질 듯 아프게 단단해진 일부를 무자비하게 밀어넣었던 것이다. 어린 악마의 흉기에 난자당한 소녀의 눈이 까뒤집혀 하얀 흰자 위만 들어나고 손이 뒤로 묶인 온몸이 미친 듯이 뒤틀렸다. 담사는 자신의 일부를 격렬하게 옭아매는 소녀의 그 부분을 느 끼며 자신도 모르게 두손으로 소녀의 가녀린 목을 움켜쥐고 있었 다. 공포와 절망으로 부릅떠지는 소녀의 눈은 역시 소년에 의해 광 에서 죽어가던 개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엇다. 숨이 넘어가는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지만 여인의 그 비명은 바 깥의 소란통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목적을 이룬 소년이 패물이 잔뜩 든 보따리를 움켜쥐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죽을 때는 똑같다는 것 을 깨달으며...! 그것이 장차 세상을 공포로 떨게 만들 희대의 자객의 첫 살인이 었다. {.....!} 복면여인은 눈물 젖은 눈으로 막연히 담사를 쳐다보았다. 비참하 고도 끔찍한 담사의 유년사(幼年史)는 냉철하고 비정하던 그녀의 마음에도 납덩이가 들어찬 듯한 처절한 감흥으로 와 닿은 것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담사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너도... 그 년과 똑같은 계집이야. 음탕하고, 독랄하고, 더러운 갈보란 말이야.} 찌직! 그는 씹어 뱉듯이 말하면서 복면여인의 복면을 잡아챘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복면이 떨어져 나가며 그녀의 본 모습이 들어났다. {....!} 순간 담사의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너무나 아름다워 담사는 눈이 부신 느낌이었 다. 백옥 같은 피부와 그린 듯한 이목구비, 약간 차가운 듯한 표정과 귀품을 풍기는 절세미녀였다. 사슴을 닮은 듯한 큰 눈과 앵두빛 앙증맞은 입술은 애잔함과 섬 세한 느낌을 주었다. 실로 인세에 보기드문 우물(尤物)이었다. 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신의 몸에 닦쳐올 끔찍한 일으 떠 올리며 그녀의 동공에 두려움에 찬 빛이 떠올랐다. {흐흐흐흐!} 담사의 입에서 스산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속에는 끈적끈적한 욕정의 빛이 숨겨져 있었다. 담사의 손길이 서서히 그녀의 옷을 잡아갔다. 미녀는 그의 눈빛에 음욕의 불길을 발견한 순간부터 무엇을 하 려는지 깨달았다. {안... 안돼! 안돼요.} 그녀는 절망감에 빠진 채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찌이익_____ 찌익! 하지만 담사의 손길에 의해 여인의 화려한 상의가 무참히 찢어 져 나갔다. 그의 손은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찌이익_____ 여인의 바지도 아무렇게나 찢어져 나갔다. 이제 그녀의 몸에 남은 것은 붉은 색의 젖가리개와 하체의 은밀 한 부눈을 간신히가린 새하얀 삼각고의뿐이었다. 대부분의 옷이 제 거되자 들어난 그녀의 희디흰 살결이 눈을 부시게 한다. {그만둬요! 제발!} 미녀는 애원을 했다. 허나 담사는 들은 척도 않고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그는 손가 락으로 젖가리개에 가려진 그녀의 탄력있는 젖가슴을 슬슬 문질렀 다. 미녀는 마치 징그러운 뱀이 몸에 닿는 것처럼 섬뜩함과 수치감 을 느끼며 악을 썼다. {더러운 색마....! 차라리.... 그냥 죽여라!} 그러자 담사의 시선이 느릿하게 미녀의 얼굴을 향했다. {흐으윽!} 미녀는 한 순간 헛바람을 삼켰다. 담사의 시선을 접하는 순간 심 장이 오므라드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욕정과 광기에 뒤얽힌 눈빛에 얼음장 같은 살기를 느꼈다. 그것은 잔인하면서도 독기에 찬 시선이었다. {더러운 색마라! 흐흐! 네가 말하는 색마가 어떤 인간이지 보여 주지.}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이 말하는 담사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 다. 3 잠시 멈추었던 담사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여인은 담사의 손길을 속살에 느끼며 아득한 절망감에 사로잡혔 다. 가슴을 꼭 옭아매고 있던 붉은 색의 젖가리개가 풀어져 흘러내 렸다. 그러자 한쌍의 너무도 탐스러운 살덩이가 물결치듯 출렁이며 모습을 들어내었다. 날씬해보이는 외양과 달리 여인의 젖가슴은 놀랄만큼 풍만했다. 눈부시게 흰 피부는 아직 한 번도 타인에게 노출된 적이 없었고 한껏 부풀어오른 젖무덤은 무거워보일 정도로 중량감이 있었다. 그 탐스럽고 풍만한 젖무덤 위에 자리한 자그마한 분홍빛의 유 실(乳實)은 수치심과 놀람으로 인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자신이 고이 간직한 속살이 늑대같은 사내의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나자 미녀의 두눈에서는 뜨거운 이슬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느덧 그녀는 채념한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담사는 그런 그녀는 아랑곳 않고 여인의 몸에 남은 마지막 장애 물인 자그마한 삼각고의를 거칠게 잡아뜯었다. 그러자 들어나는 여인의 신비한 부분...! 고의 속에 숨어있던 여체의 은밀한 부분을 직시한 담사는 절로 눈이 부셨다. 그는 새삼 자신 앞에 실 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알 몸으로 누어있는 여체를 쓸어보았다. 그것은 실로 티 하나 없는 완벽한 나신이었다. 대리석 조각이랄까? 숱한 여인을 경험한 담사이었으나 지금 자 신의 눈앞에 무방비 상태로 누어있는 가엾은 제물만큼 놀라운 여 체는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여인의 몸매는 너무나도 완벽했다. 잘룩한 세루요와 둔부는 반대로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둥그렇 게 퍼졌다. 그 아래 날씬하게 뻗은 두 다리는 유난히도 길면서 뽀 얗다. 아랫배의 배꼽을 지나 한 점의 군살도 배이지 않은 능선을 내려 오면 갑자기 붕긋한 둔덕이 나타나고, 그 완만하고 도독한 둔덕은 아주 보드라우면서도 윤기도는 검은 방초로 소담스럽게 덮여있었 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그 방초의 숲 아래로 깊 고도 완만하게 갈라진 균열이 언 듯 언 듯 들어나 보였다. 담사는 거칠게 살아온 사나이였다. 여인에게는 거칠었고 특히 여 자란 동물은 모두가 욕정과 허영심에 가득찬 암컷에 불과하다는 경멸감마저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눈 앞의 이 미녀의 나신은 이제까지 신념처럼 간직해온 생각을 뒤엎었다. 그는 문득 입안 가득히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이내 삼켰다. 그의 파충류 같은 시선은 미녀의 계곡에 머물렀다. 무성한 수림 이 우거진 비림은 보일듯 말듯한 여체의 내밀한 균열부분을 무성 하게 뒤덮고 있었다. 담사는 옷을 벗었다. 그러자 날렵해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아주 건장한 체격이 드러났다. 검게 그을린 구릿빛 살결에 강철같이 단단한 근육, 그 위에 지렁 이같이 튀어나온 흉터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그것은 구리빛 육체와 더불어 더욱 강인함을 풍겼다. [흐으윽!] 문득, 미녀의 입에서 비명같은 신음이 터졌다. 갑자기 조용해진 것에 의아하여 눈을 뜬 미녀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은 충격을 받 았던 것이다. 그녀의 눈앞에 난생 처음 보는 사내의 알몸이 버티고 서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 군살 하나 없는 팽팽한 복부, 그 리고 그 아래쪽 무성에 수림속에서 허공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너 무도 생경한 남성의 실체...! 아직 사내를 알지 못하는 처년의 몸인 여인에게 담사의 실체는 실로 충격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푸른 혈맥이 툭툭 불거져나온 검붉은 육괴! 약간 휘어진 채 허공 을 향해 치솟아 꿈틀거리는 반자 남짓이나 되는 그 장대한 남성의 상징은 공포같기도 하고 또 묘한 전율감 같은 감정을 여인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켰다. 그 절박한 상황하에서도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이 과연 저 굵고 장대한 이물질을 전부 받아들일 수 있을까하는 어이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 미녀는 문득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담사의 입술이 서서히 그녀 의 몸 위를 누비기 시작했던 것이다. 담사의 자극적인 애무를 받는 순간 남성의 실체를 처음 보고 받 았던 망연한 충격에서 벗어난 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 아져 내렸다. {더러운 색마같으니 이 원한은 죽어도 원귀가 되어 갚으리라.} 미녀는 한스럽게 신음하며 이를 갈았다. 물론 담사는 그녀의 저주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미녀의 도톰한 귓볼에서 시작된 담사의 입마춤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더니 젖가슴에서 한동안 멈추었다. 담사의 자세는 소중한 보물을 어루만지듯 경건하면서도 집요했 다. 그것은 결코 여인을 겁탈하려는 색마의 자세가 아니었다. 사내의 부드럽고도 정성스런 애무에 미녀는 문득 자신의 몸 안 에서 기이한 열기가 스믈스믈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 었다. [아아....!]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가벼운 신음성 을 토했다. 담사의 능숙하고도 교묘한 애무는 어느덧 그녀의 여자 로서의 본능을 일깨운 것이다. 담사의 머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뜨거운 입술과 혀를 사용하여 전신을 애무해갔다. 미녀는 입술을 피라도 낼 듯 꼬옥 깨물었다. 허나, 그녀는 자신 도 모르게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뜨거운 신음성을 참을 수가 없었 다. 무언가 몸 안에서 퍼지는 표현하지 못할 기이한 전율감, 그녀는 타오르는 열기에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 야릇한 열기는 담사의 입술과 혀가 자신의 부그럽고 도 소중한 부분에 이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담사는 그녀의 미끈한 허벅지를 한껏 개방한 뒤 최고의 인심과 기교를 동원하여 공략했다. 마치 그 옛날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주인집 딸의 치부를 핥아주듯이...! 처음에 미녀는 숨이 넘어갈 듯 놀라고 진저리를 쳤다. 자신의 은 밀한 뭇 사내들이 원하는 궁극적인 쾌락의 근원임을 알면서도 그 녀는 괴상망측한 형상인 자신의 그곳이 더럽다는 관념을 갖고 있 었다. 너무 끔찍하고 외설적인탓에 그녀 자신도 잘 손이 가지 않던 그 곳을 사내는 너무도 소중하고 열렬하게 애무를 해대었다. 몸의 신경이 모두 모여있는 듯한 그 예민한 곳에 가해지는 애무 의 느낌은 너무도 강렬하여 차라리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몸은 절로 요동치며 용수철처럼 튕겨졌다. 마혈이 찍혔음 에도 그 강렬한 본능의 쾌락은 그녀의 육신이 제멋대로 움직이게 만들 정도였다. 몇번인가 아찔한 쾌락의 해일이 그녀를 엄습했다. 신경은 극단으 로 예민해져서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아득한 혼절의 나락으로 떨 어졌다가 다시 깨어나곤 했다. 다시 깨어날 때마다 그녀는 담사가 여전히 자신의 민망하게 벌 려진 하체의 중심부에서 입술과 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아야 만 했다.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과 죽을 것만 같은 희열에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4 어느덧 자신의 그곳이 열렬히 사내를 원하며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며 그녀는 한층 더 비감해졌다. 그렇게 비몽사몽간을 헤매던 어느 순간, 그녀는 가슴을 압박하는 무거운 사내의 체중을 느꼈다. 몽롱하게 눈을 뜬 그녀의 몸위에 어느덧 사내의 단단한 육체가 올라타고 있었다. 하복부에 느껴지는 사내의 체중에 그녀는 어떤 일이 벌어지려는 지 깨닫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비명은 다시 목구멍 속으로 되삼켜지고 말았다. 활짝 벌려진 사타구니 사이에서 돌연 생살이 찢어지는 듯한 엄청 난 고통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무쇠처럼 단단하고 불덩이같이 뜨거운 장대한 이물질이 그녀의 여린 살의 좁은 균열로 무자비하게 밀려들어온 것이다. 그녀의 처녀성을 지켜주던 여린 막이 일거에 찢기며 너무나도 격렬한 통증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그만! 아파...흐윽! 제발....!] 온몸의 뼈가 빠져버리는 듯한 그 엄청난 고통에 여인은 사내에 게 매달리며 애원을 했으나 사내는 아랑곳 않고 거칠게 자신의 육 괴를 여체의 균열로 밀어넣었다. 사내의 그것은 너무도 장대하여 마치 끝이 없을 듯이 여인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사내의 그 단단한 흉기가 뱀이 동굴을 찾아 들 듯 집입할 때마다 불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이 단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없을 듯이 길던 진입이 끝났다. 여인은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예민한 동굴이 너무도 생생 히 사내의 그것을 느끼는 것을 깨달았다. 사내를 감싼 그녀의 깊은 동굴은 그것의 형태와 강도, 뜨거운 열기와 맥동하는 이질감까지 생생히 느끼는 것이다. 한치의 틈도 없이 자신의 욕망의 상징을 밀어넣어 여체를 정복 한 담사는 잠시 흥분과 만족감을 즐기는 듯하더니 이윽고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두살의 나이에 이미 여자를 경험했던 그는 노련하기 이를데 없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느릿하면서도 거칠게 그는 여인에 게 돌진해 왔다. 아랫배를 짓누르며 움직이는 사내의 행위에 여인은 자신이 지금 죽어간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가장 여린 부분을 유린하는 사내의 실체는 흡사 새파랗 게 날이 서린 칼날같이 느껴졌다. 사내의 그 새파란 칼날은 여신 그녀의 상채기를 가르고 비며대었다. 그 엄청난 고통과 충격에 뇌리는 텅 비어 하얗게 탈색되고 뜨거 운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녀의 축 늘어진 육체는 그저 사내 가 노를 젓는데 따라 무기력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헌데, 어느 한 순간 그 아리한 고통 속에서도 기이한 쾌감이 사 지백해로 번지기 시작했다. 간지러움같고 현기증같은 그 쾌감은 그 녀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흔들어대는 사내의 몸짓에 따라 여인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 렸다. 전신이 나른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녀는 어릴 때 뛰어놀던 초원이 생각났다. 끝없이 푸른 벌판, 진한 청록빛 천공, 가까와졌다가 멀어지면 다시 눈앞에 다가왔다 또 멀어져 갔다. 담사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졌다. 미녀는 문득 거대한 창공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난 생 처음 느끼는 기이한 쾌감에 짐승 같은 신음성을 질렀다. 언제였는지 마혈이 풀어진 그녀의 사지는 열렬히 담사의 건장한 몸을 휘감고 허리와 둔부는 교태로운 율동을 일으켜 사내의 행위 에 동조를 했다. 작은 불꽃이 여인의 뇌리로 명멸하기 시작했다. 그 불꽃은 급격 히 밝아지고 터지는 간격은 좁아졌다. [좀더....좀더...!] 화려한 폭발을 꿈꾸며 여인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녀으 두 손은 사내의 탄탄한 엉덩이를 연신 끌어당겨 더욱 깊은 결합을 갈 구했다. 새로운 열락의 세계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 담사의 움직임이 일순간에 뚝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미녀는 자신의 몸 안에 가득히 번지는 뜨거운 이물 질의 폭발을 느끼며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녀를 짓누른 담사의 몸이 한껏 경직되어있고 한치의 틈도 없 이 결합된 담사의 실체는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세찬 폭발을 일 으키고 있었다. 그 폭발은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자궁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그 뜨거운 이물질의 폭발을 여인은 너무도 생생히 느낄 수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깊은 동굴이 열렬히 그 폭발을 반기며 ㅎ,ㅂ입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 실이었다. {내가.... 내가... 흐흑....!} 미녀는 자신의 육체가 보이고 있는 그 음란한 방응에 격렬한 수 치심과 절망감을 느끼고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여운까지 즐긴 담사가 천천히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 순간 느껴지는 아리한 통증과 허전한 상실감에 여체는 움찔 경 련을 일으켰다. 느릿하게 여체에서 일어선 담사는 무표정하게 옷을 입었다. 하지 만 여인은 능욕당한 자세 그대로 누운 채 두눈을 꼬옥 감고 회한 의 눈물을 흘 뿐이었다. 그녀의 하체에는 파과의 흔적과 방금전 그 녀가 느꼈던 열락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었다. 잠시 후 옷을 완전히 입은 담사는 무참한 자세로 누워있는 미녀 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흐흐! 네년도 별 수 없는 암컷이었어.} 담사의 비릿한 조소가 순간 여체를 예리한 작살처럼 찔러버렷다. 감았던 눈을 부릅뜬 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의 눈은 치욕과 모멸감으로 찢어질 듯이 치떠졌다. [주인집 딸년과 하나도 다를게 없었어! 흐흐! 고고한 척 해봤자 그 짓에 좋아하는 꼴이라니...! 발정난 암캐가 따로 없더군!] 담사는 냉혹한 눈에 비웃음을 담고 치떠진 미녀의 두 눈을 지그 시 응시했다. 그것은 너무도 잔혹한 결정타였다. 담사의 조소로 가득한 시선에 접한 미녀의 두 눈이 분노와 비탄으로 크게 떠졌다. 그 눈에는 공 포와.... 절망과..... 저주의 빛이 하나로 뒤엉켜져 있었다. {호호호!}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극도의 절망과 증오가 서린 웃음이었다. [호호호! 날 보고 암캐라고? 호호호!] 날카롭게 웃는 여인의 발작적인 웃음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눈 물은 이제 뺨을 적시고 그녀의 옷자락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호호홋... 호호.... 홋...} 사당묘를 빠져 나오는 담사의 등 뒤에서 미녀의 처절한 웃음은 계속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담사의 등은 웬지 고독하면서도 어깨가 무겁게 보였다. 날은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담사의 신형은 흐릿한 그림자와 함께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5 인시(寅時)말 무렵, 쏴_____ 아!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아직 어둠의 그늘이 남아있는 새벽의 숲 속을 쓸고 지나갔다. 자운유의 시신은 수림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부릅뜬 두 눈은 아직 못다한 말이 남았는지 비분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 껴졌다. 오른 손이 팔목 아래로부터 두부처럼 으스러져 있고 가슴 또한 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 다섯사람이 둘러서서 비분에 떨리는 눈으로 자운유의 그 무참한 시신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무림맹 감찰전주인 막대 승을 비롯하여 조중, 장차수, 사공표 그리고 남장을 한 황보가혜 등이었다. 금룡장 앞의 장원에 매복한 자운유를 만나러 갔던 장차수는 그 곳에서 자운유 때신 송대호라는 자운유의 수하만을 발견할 수 있 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송대호는 누군가에게 죽은 후였다. 장차수는 불길한 느낌에 다급히 자운유를 찾았다. 허나 장차수는 금료장 주위에서 자운유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 하고 급히 지부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막대승 등 무림맹의 무사들 과 밤새 수색을 하다 지금에야 그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운유 이 사람, 자네가 죽다니.....} 장차수는 허물어지듯 자운유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경악과 분노로 떨리는 입술,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운유, 말 좀 해보게.} 장차수는 울먹이며 외쳤다. 그는 솟구치는 슬픔과 비분에 말이 채 나오지도 않고 그저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장차수에게 있어서 자운유는 친구이며 동료였다. 때로는 형제이 기도 했고 그들의 진한 우정은 피를 나눈 혈육보다 더 진한 것이 었다. {운유, 편안히.... 눈을 감게....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자네의 원한 은... 이 두 손으로 꼭 갚고 말겠네.} 사공표가 가만히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장형, 진정하시오.} 나직이 위로를 하지만 그 역시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혀 있 었다. 황보가혜는 차마 더 이상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렸고 막대 승과 조중은 탄식을 흘렸다. 막대승은 침통한 얼굴로 자운유의 시신을 살폈다. (어떤 자가 손을 쓴지는 모르지만 매우 강력한 수법에 내장까지 완전히 으스러졌다. 이러한 수법은 혹시.....) 다음순가나 그의 생각은 채 이어지지 않고 입에서 경악성이 튀 어나왔다. {소림의 격산타우(擊散打牛)!} 한 순간, 중인들의 눈빛이 놀라움에 커졌다. 격산타우라니...? 이것은 소림의 백보신권(百步神拳)의 최절정수법이다. 그렇다면 소림의 고수가 자운유를 죽었단 말인가? 중인들은 믿 어지지 않는 현실에 망연자실하여 자운유의 시신을 들여다 보았다. 비록 무림맹이 구파일방과 원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하지만 서 로의 요인을 죽고 죽일 정도로 험악한 관계는 또 아니다. 그러나 자운유의 시신에 나타나 있는 소림절기의 사인(死因)은 대체 어찌된 것인가? 헌데 중인들이 당혹과 충격으로 굳어져 있을 때였다. {그것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오.}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딱딱하 면서 스산한 목소리였다. 중인들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음성이 들린 쪽을 향했다. 그들의 눈에 한 구의 시신을 떠메고 수림을 헤쳐 나오는 삼십대 초반의 황삼을 입은 사나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쭉 찢어진 듯한 눈매에 얇은 입술, 바싹 마른 얼굴이 살모사처럼 잔인한 인상을 풍기는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등에 메고 있던 시신을 자운유 시신 옆에 내려놓았다. {철혈무정 석무심!} 시신의 얼굴을 알아본 사공표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황삼인은 빙그레 웃었다. {이 자를 알고 있으니 말하기가 한결 편안해지겠군.}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막대승은 예리한 눈빛으로 황삼인을 살펴보면서 물었다. {젊은이는 누군가?} {천갈(天蝎) 냉유도가 본인이오.} 황삼인은 담담히 대답을 했다. {무명소졸이라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인들의 눈빛은 놀라움에 커졌다. {당신이 천갈이란 말이오?} 사공표가 매우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삼인은 약간 의외라는 듯 사공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천갈 냉유도라는 사람이오만 어떻게 나를 아시 오?} 사공표는 조중을 일별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별호는 들은 적이 있소이다.} 6 -천갈(天蝎) 냉유도! 그는 바로 전날 월하루에 나타나서 월화(月花)와 정사를 나누던 바로 그 사나이였다. 일개 창기였던 월화가 청부살인업에 뛰어들어 단 시일내에 혁혁 한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천갈이란 섬득한 별호를 지 닌 이 신비고수의 도움 덕분이 아니던가? 냉유도는 사공표가 자신을 알아보자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거 영광이오. 무림맹의 영웅들이 저 같은 무명소졸의 이 름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그의 말은 비록 겸손하지만 그의 표정으로 보아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젊은이가 철혈무정을 죽였나?} 막대승이 담담히 물었다. 냉유도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막전주께서는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그의 말은 겸손했지만 막대승은 충분히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즉 그의 말뜻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철혈무정을 살해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막대승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의 눈은 아직까지 녹슬지는 않았네. 철혈무정의 무예가 비록 높다고 해도 젊은이는 충분히 그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 이네.} 냉유도는 태연히 말했다. {저를 그렇게 보아 주? 감사합니다.} 그는 가볍게 머리를 숙인 다음 말을 이었다. 실로 능청스러운 태 도였다.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을 풀기 위해서는 이들의 죽음을 설명해 야 되겠지만... 설명이 길어질 듯하니 어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중인들은 그의 말에 일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자의 태도로 보아 이들의 죽음과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이 번 사건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간에 이곳에서 말을 나누기에는 불편하니 우선 이 자의 말대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잠시 생각을 한 막대승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당주, 뒷처리를 하게 나는 이 사람과 먼저 지부로 돌아갈테 니.} 중인들은 막대승의 말에 움찔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곧 돌아갈 준비를 했다. 잠시 후, 막대승을 위시하여 조중 황보가혜와 냉유도가 먼저 출 발을 했다. 뒤에 남은 사공표와 장차수는 비통한 표정으로 자운유의 시신과 철혈무정의 시신을 수습했다. 동이 틀 무렵, 휙! 한 줄기 인영이 귀영(鬼影)처럼 숲속을 쏘아갔다. 그 인물이 펼 치는 신법의 빠름은 흡사 번갯불 치듯 신속했다. 그 인영이 향하는 곳은 담사가 한동안 머물렀던 황폐한 사당묘 였다. 우당탕_____ 탕! 낡아 빠진 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면서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단번에 사당묘의 문을 부수고 뛰어들어온 그 인 영은 두 눈에 초조한 빛이 가득찬 모용천위(慕容天威)였다. {화련(華蓮)!} 사당묘로 들어선 순간 모용천위는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토했다. 그런 그의 얼굴이 처절하게 일그러지면서 전신을 사시마누처럼 부 르르 떨었다,. 갑자기 무서운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우뚝 굳어져 버렀다. 창가로 비추어 드는 희끄무레한 햇살 아래 한명의 여인이 처참 한 몰골로 신탁 앞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있었다.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긴 수발은 산발한 채 헝클어져 있고 입가 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다. 그리고 벌거벗다시피한 전신 에는 푸른자국이 여기저기 나있엇다. 누가 봐도 그것은 심하게 얻 어맞은 자국이었다. 거기에다 그녀의 몸에는 걸레처럼 찢겨진 옷이 아무렇게나 걸쳐 져 있었다. 찢긴 의복 사이로 육중해보이기까지하는 젖가슴과 미끈 한 허벅지가 고스란히 들어나보였다. 특히 어떻게든 가려보려고 애쓴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는 여인 의 가장 부끄럽고 은밀한 곳이 어쩔 수 없이 들어나 보였다. 새하 얀 피부와 대조적으로 짙은 수림지대가 자리한 그곳 일대에는 사 내의 분비물과 함게 선연한 핏자욱이 묻어있었다. 여인의 그같은 무참한 모습은 삼척동자라도 그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여인의 움푹 꺼진 두 눈에는 끝없는 절망과 허무에 사로잡혀 있 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그 무참한 모습을 본 모용천위의 경련하는 입 술에서 비통한 절규과 새어나왔다. {화련..... 이럴 수가....} {....!} 여인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를 향했다. 일순 모용천위를 알아본 여인의 동공이 벌어지면서 입술을 달싹 거렸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주르르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 그녀는 상 처입은 어린 사슴처럼 어둠 속에서 가련하게 떨고 있었다. 모용천위의 눈꼬리에도 가느다란 이슬이 맺혀졌다. 분노에 앞서 사랑하는 여인의 그 절절한 고통이 그의 가슴에 너무도 생생히 느 껴졌다. 가만히 여인 앞에 다가선 모용천위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 깨를 감싸안았다. 한 순간, 여인은 겁먹은 듯 흠칫했다. 모용천위는 따뜻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화련, 이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해, 그 누구도... 언제나 나는 너와 함께 있을테니까.} 자신에게 맹세하듯 말하는 모용천위, 그의 두 눈에서 쇠라도 녹 일 듯한 무서운 광채가 폭사되었다. {천위오빠.... 흐흑... 흑!} 여인은 무너지듯 그의 품 속에서 안겨들면서 오열을 터트렸다. {화련,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는 없이, 너는 다만 악몽을 꾼 것 뿐이야....} 모용천위의 손가락은 가만히 그녀의 수혈(垂穴)을 짚었다. 여인은 문득 쏟아지는 졸음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모용천위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여인의 잠든 얼굴은 군데군데 푸른 멍집과 입가에 맺혀진 핏물, 그리고 눈가에 맺힌 눈물로 인해 너무나도 애처롭게 보였다. 모용천위는 하늘을 쳐다보며 부르짖었다. {화련을 이렇게 만든 자! 죽이리라! 설사 그놈이 지옥의 끝에 있 다 하더라도 쫓아가서 죽일 것이다.} 그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랑 하며 아껴온 여인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요, 자신의 분신이었다. [으아아아!] 고요한 산중에 모용천위의 증오에 찬 목소리는 멀리 울려퍼졌다. 第 二十一 章 少惡魔의 誕生 항주성에 자리한 무림맹 절강지부의 대청, 지금 팔선탁 주위로 팔 인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막대승을 위시한 조중, 장차수, 사공표, 학만궁, 황보가혜, 냉유도, 그리고 초췌한 표정의 팽노대였다. 중인들의 시선은 모두 냉유도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 냉유도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이야기는 한 자객의 과거였다. 십년 전 엄동설한(嚴冬雪寒)의 한겨울, 중상을 입은 두 명의 노인이 북경(北京)에 숨어들어왔다. 한 명 은 마른 몸집에 키가 큰 장대 같은 인물이었고 또 한 명은 툭 튀 어나온 배에 얼굴이 넓은 노인이었다. -유령쌍사(幽靈雙邪)! 그 두 사람은 유령쌍사라고 불리우는 감형(甘衡), 감전(甘塡) 형 제였다. 이들 감씨 형제는 사도(邪道)에서도 악명 높은 흉마(凶魔)들로써 살인, 겁탈, 강탈 등 온갖 극악한 짓을 도맡아 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용문(龍門)에 위치한 무림명가 검부(劍府)의 무사들에 의 해 중상을 입고 도주하여 북경으로 숨어 들어왔던 것이다. 허나 검부의 무사들은 추격의 발길을 멈추지 않고 북경까지 따 라왔다. 당황한 유령쌍사는 숨어 있던 객잔을 황망히 빠져나와 빈민가로 들어갔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이곳 뒷골목의 빈민가는 북경의 화려함에 비해 너무나 지저분한 곳이었다. 게딱지처럼 더덕더덕 붙은 판자집이 초라하게 늘어 서 있고, 진 흙탕이 길가에는 굶주림에 누렇게 마른 얼굴과 지저분한 옷을 걸 친 어린아이, 한 푼의 은자에 사타구니를 벌리는 창부, 건달패 등 이 득실거렸다. 유령쌍사는 끈길긴 추격에 빈민가로 들어왔지만, 이곳에 처음인 그들은 한동안 막연한 눈으로 거리를 살폈다. 그때였다. {아저씨들은 은신처를 찾으세요?}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유령쌍사는 크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낡은 처마 밑에 한 소년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십 사오 세 가량이나 되었을까? 허름한 옷에 얼굴에 때 가 묻은 비쩍 마른 몰골의 이 소년은 비록 볼품없는 모습이었으나 무언가 기이한 느낌을 주는 한쌍의 눈은 얼음같이 차가움을 풍겼 다. 유령쌍사중 형인 감형(甘衡)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우수 를 뻗었다. 한달음에 소년의 목줄기를 잡은 그는 냉랭히 소리쳤다. {네놈은 어떤 종자냐?} 첫말부터 그의 입에서 상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기세는 흉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소년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담사(潭邪)라고 해요. 이곳에서 살고 있어요.} 담사(潭邪)-! 그렇다. 소년은 바로 담사였다. 이년전, 자신을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을뻔 했던 주인집 딸을 능욕하고 죽인 그는 고향을 떠나 이곳 북경의 빈민가로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버러지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빈민들의 소굴인 이 곳이 천대받는 것에 익숙해진 담사에게는 오히려 편하고 정겨운 곳이었다. 감형은 흉악한 눈빛으로 담사를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우리가 은신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담사는 목을 움켜쥔 감형의 손에 숨이 탁 막혔으나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나는 성문에서부터 아저씨들을 봤어요. 그 후 가슴에 용이 새겨 진 수십 명의 무사들이 몰려왔고 나는 그들이 아저씨들을 쫓고 있 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담사는 유령쌍사의 흉악한 기세에 조금도 겁먹은 기색없이 당당 히 말했다. {그래서 아저씨들이 숨을 곳을 찾는다는 것을 알았고 저는 아주 은밀한 장소를 알고 있어요.} 담사의 대범한 말에 유령쌍사는 흠칫 놀랐다. {네놈이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를 도우려고 하느냐?} 험악하게 말하면서도 감형의 손은 어느덧 담사의 목에서 떨어져 나왔다. 유령쌍사도 바보가 아니다. 그들이 수년 동안 온갖 흉악한 일을 다 저지르면서도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무예도 고절했 으나 귀계(鬼計)에도 뛰어난 데가 있었다. 담사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아저씨들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거래를 하고 싶어요.} {거래를 한다고!} 유령쌍사는 멀뚱한 눈빛으로 이 당돌하기 이를데 없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감형이 의아로운 눈을 물었다. {나는 아저씨들을 한동안 은밀히 숨겨주고 북경성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주겠어요. 그 대신에 아저씨들이 저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세요.} 담사의 말에 유령쌍사는 일순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막연한 표 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놈아, 무예를 가르쳐 주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네놈이 무슨 재주로 우리를 북경에서 빠져나가게 도와준다는 말이냐?} 담사는 힐끗 대로 쪽을 일별한 다음 말했다. {이제 곧 그들이 올 거예요. 선택은 두 분에게 달려 있어요. 나 를 믿고 따르거나 아니면 그들의 손에 잡히든가?} 유령쌍사는 담사의 시선이 향한 쪽을 쳐다보면서 눈알을 굴렸다. (염병할, 천하의 유령쌍사가 이따위 꼬마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 다니...) 감형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으나 이 영악한 소년의 말을 믿어 보 기로 결심했다. {좋아! 네놈을 믿어보겠다.} 담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빨리 좁은 골목을 들어서면서 말 했다. {나를 따라오세요.} 유령쌍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춤 주춤 담사의 뒤를 따라갔다. 빈민가의 좁은 골목은 지저분하기도 했지만 미로처럼 사방으로 수많은 길이 나 있어서 유령쌍사는 갈수록 놀라움을 느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담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곳은 나무 벽이 흙담과 함께 옆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이었다. 담사가 재빨리 한쪽의 나무를 당기자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만 한 좁은 공간이 생겼다. 담사는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안쪽으로 들어간 다음 급히 유령쌍 사에게 말했다. {어서 이리로 들어오세요.} 유령쌍사는 한 순간 서로 마주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빨리요. 다른 사람이라도 보면 큰일나요.} 멈칫하던 유령쌍사는 고소를 내음과 주향이 코를 찔렀다. {두 분 어른! 돈가진 것 있어요!} 감형은 인상을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돈은 있지만 왜?} {헤헤.... 이곳은 사실 옥방루(玉房樓)라는 홍루(紅樓)인데 이곳의 여자들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긴단 말이예요.} 홍루라면 창기가 몸을 파는 곳이다. 유령쌍사는 움찔 놀랐다. 이런 두더지 굴같은 곳이 홍루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곳이 정말 홍루란 말이냐?} 감형이 의심스럽다는 듯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요. 이곳은 다른 홍루와는 달리 싼 편이고 은밀한 곳이기 때문에 절대로 안전한 장소예요.} 담사는 말하면서 때묻은 손을 내밀었다. {우선 이곳에서 삼 일 정도 있어야 하니까 은자 여섯 푼만 줘 요.} 유령쌍사의 동생인 감전(甘塡)이 말없이 한 냥 정도의 은자를 주 었다. 한 순간 담사의 눈빛에 탐욕의 빛이 스쳤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어 그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감전이 재빨리 담사를 잡으려고 했으나 감형의 말에 손을 멈추 었다. {그만둬! 저 놈이 도망가려고 했다면 이곳까지 우릴 데리고 오지 도 않았을 거야.} 감전은 무슨 말을 할 듯 우물거렸지만 그냥 말없이 주저앉았다. 검부의 고수들과 싸우다가 검상을 입은 다리에서 통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유령쌍사는 운기조식을 하면서 담사를 기다 렸다. 문득 나직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유령쌍사는 재빨리 자리 에서 일어나 문쪽에 붙었다. 위험에 처한 무인들의 본능적인 동작 이었다. 삐______ 꺽! 문이 떨리고 붉은 홍등이 창고 안을 밝히면서 사람이 들어왔다. 순간 유령쌍사는 귀신같이 움직여 그 인물을 덮쳤다. {아악_______!} 순간 여인의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안되요, 두 분 어른!} 동시에 담사가 황망히 외치며 뛰어들며 외쳤다. 유령쌍사는 담사의 목소리에 급히 손을 멈추었다. 땅에 떨어진 홍등이 어둠을 환히 밝혔다. 그 불빛을 빌어 유령쌍 사는 비로소 담사와 함께 나타난 인물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두 명의 여인이었다. 얼굴에 분가루를 바르고 모양을 냈 는데 제법 그럴 듯한 생김새였다. 두 여인의 목줄기는 유령쌍사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두 분 어른! 이 여자들은 삼 일 동안 두 분을 모실 거예요. 아 무 걱정 마시고 저를 따라오세요.} 담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유령쌍사는 담사의 일방적인 행동에 노기가 솟구쳤으나 말없이 따라나갔다. 그 날부터 유령쌍사는 옥방루의 구석진 방에서 상처를 치료하면 서 여자들과 뒹굴었다. 삼 일 후, 두 개의 관(棺)을 실은 마차가 북경 동문으로 빠져나갔다. 마차 의 마부석에는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덮인 노인과 꾀죄죄한 차림 의 십사오세 가량된 소년이 앉아있었다. 백여 장 정도 갔을까? 갑자기 길 양옆에서 십여 명의 무사가 튀 어나오면 외쳤다. {멈추어라!} 그들의 가슴에는 용(龍)자가 새겨져 있는데 말을 끌고 있던 소 년, 즉 담사는 그들이 용문검부(龍門劍府)의 무사들이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얼굴에 점이 난 건장한 체격의 무사가 살벌한 표정으로 물었다. {관 속에는 누가 있느냐?} 마부석에 앉아 있던 마부노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가장(宋家莊) 노부부 시체인데 공동묘지에 묻으러 가는 길입 니다요.} 장한은 냉랭한 눈빛으로 관을 쳐다보며 주위에 있던 무사들에게 말했다. {관을 열고 확인해 봐라!} 말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즉시 마차 옆으로 다가섰다. {아이고 나리들 왜 이러십니까요? 죽은 사람을 욕보이시려 하다 니요.} 노인은 애원을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곧 관뚜껑이 활짝 열렸다. 순간 검부의 무사들은 깜짝 놀라 기겁 을 하며 물러났다. 코를 찌르는 시체 썩는 냄새와 반쯤 썩은 듯한 시체를 보는 순 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점이 난 거구의 무사도 힐끗 관 속의 시체들을 쳐다본 후 갑자기 손을 흔들었다. 피핑! 그러자 두 자루의 비도(飛刀)가 섬전같이 두 구의 시신 가슴을 파고들었다. 실로 무서운 비도술(飛刀術)이었다. 마부석에 늙은 마부와 함께 앉아있던 담사는 그가 비도를 언제 뽑아 던졌는지 뻔히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다. 거한의 무사는 자신의 단도가 꽂혔음에도 시체들이 아무런 미동 도 없자 우수를 밀었다가 다시 당겼다. 순간, 시신에 박혀 있던 두 자루의 비도가 소리없이 빠져나와 끈 이라도 달린 듯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능공섭물(凌空攝物)-! 허공을 격하여 진기로써 물체를 끌어 당기 는 절세기공이었다. 거한 무사의 신비로운 무예에 마부노인과 담사는 한동안 얼이 빠졌다. {가도 좋다.} 거한 무사의 말에 문득 노인과 담사는 정신이 들었다. {이럇....!} 노인은 공포에 찬 얼굴로 급히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는 단숨에 이 리나 달린 후에야 천천히 달렸다. 잠시 후 마차가 북경 외곽의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노인과 담사는 다급히 주위를 살펴본 다음 관을 내렸다. 이어 두 사람은 다시 마차바닥을 뜯기 시작했다. 삐꺽_____ 삐거덕_____ 마차의 바닥에 깔려 있던 나무를 드러내자 그 안에 웅크린 채 들어누워있던 유령쌍사가 쓰디쓴 고소를 흘리며 일어났다. 감형은 담사를 쳐다보면서 감탄성을 터뜨렸다. {네놈의 방법이 정말 절묘하군!} 담사는 그 말에 무표정히 대꾸했다. {제가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는 두 분 어른이 약속을 실행할 차 례입니다.} 감형은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 좋아, 약속을 지켜야지.} 말과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우수를 한쪽에 서 있던 노인에게 뻗 었다. 우두둑! 어느 새 노인의 목줄기를 움켜잡은 그는 힘을 주자 뼈가 바스라 지는 소리와 함께 노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흐흐..... 죽은 놈만이 말이 없지.} 실로 잔인한 독심(毒心)었다. 마부는 어떻게 되었던 간에 그를 도와준 은인이 아닌가? 담사는 문득 이들의 잔인한 손속에 오싹 소름이 돋았으나 태연 히 웃었다. 감형은 노인을 죽이고 난 다음 담사를 쳐다보았다. {네놈은 내가 저 노인을 죽여서 독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겠 지?} 담사는 그 말에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어른이 저 늙은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제가 직접 죽였을 거예요. 입이 싸서 결 코 믿을만한 인간이 못되거든요!} 담사의 태연한 말에 유령쌍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놈 봐라! 우리도 천하의 악종이라는 소리를 들지만 이놈은 악 마의 자식이다.) 그들은 문득 담사의 말에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감형은 한동안 막현히 담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시시각각 으로 변했다. 담사는 감형의 눈빛에서 살기와 아깝다는 듯한 마음 등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손을 쓰기만 하면 담사 자신도 마부노인과 똑같 은 신세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담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두 분 어른께서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 화(禍)보다는 이(利)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귀잖은 일은 전부 저에게 시키시면 되거든요!} {흐흐... 네놈은 살고 싶으냐?} 감형은 담사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냉랭히 물었다. {짐승도 죽음에 처하면 살고자 발버둥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 인 저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흐흐..... 좋아, 당분간 네놈을 살려두지.} 감전이 갑자기 말을 했다. {형님, 이놈을 그냥 죽여 버리는 게...} 감형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저놈은 나에게 맡겨라. 나에게 생각이 있으니까.} 감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힐끗 담사를 쳐다보았다. {자, 시체를 묻고 빨리 가도록 하자.} 감형의 말에 감전은 말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북경을 떠난 유령쌍사와 담사는 북쪽으로 도망갔다. 검부의 추적이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유령쌍사는 아예 만리장성 을 넘어 변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사실 유령쌍사가 검부와 원한을 맺게 된 것은 단순한 사건에서 크게 벌어진 것이었다. 일 년 전, 유령쌍사는 용문 근처에서 술을 마시다가 용문검부의 제자들과 시비가 벌어졌었다. 그때부터 유령쌍사에게는 괴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이백 년의 전통을 지닌 용문의 검부는 제자 수가 많지는 않았으 나 구파일방에 못지 않은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당금의 부주인 탕마일자검(蕩魔一字劍)은 성격이 편협하고 악을 원수같이 싫어하는 인물이다. 용문검부의 추격은 끝이 없이 그들을 쫓아왔고, 유령쌍사는 결국 북경까지 도주해 와 담사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감형은 처음에 며칠 간 담사를 데리고 다니다가 죽여 버릴 생각 이었다. 아무리 그도 악인(惡人)이었지만 자신들을 도와 주기까지한 담사 를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며칠 데리고 다니다가 마음이 내키면 죽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며칠 같이 행동을 하는 동안 담사는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 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 유령쌍사는 남들이 자신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히 싫어했 다. 그래서 무림에 자신들의 친구는 아무도 없었고 아직도 독신들 이었다. 담사라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에 가든지 유령 쌍사에게 필요한 음식이나 술, 편안한 잠자리 등을 제공하는 것이 다. 예를 들자면, 길을 잘못들어 산 속에서 노숙을 하게 되면 동굴이 나 절간 등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재빨리 찾아서 안내를 하고, 술이나 한 잔 들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면 어디선가 담사는 술을 구해 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유령쌍사와 담사는 친밀해졌다. 만리장성을 넘 었을 때는 때때로 무공까지 전수해 주는 사이로 발전했다. 담사는 무예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남들이 한달 걸린 다면 그에게는 십 일이면 족했다. 유령쌍사는 흡족함을 느끼며 열심히 그에게 무예를 전수했다. 원 래 제자가 총명하고 똑똑하면 가르치는 사람도 기쁜 법이다. 하지만 유령쌍사가 무예를 전수하는 방법은 매우 거칠은 것이었 다. 한 가지 수법을 하루 동안 가르쳐서 그 다음 날 바로 실전에 응 용시키는 것이었다. 실전이라는 것은 감전과 담사가 직접 겨루는 것이었다. 감전은 싸움에서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수법이 조금이라도 틀리 면 그때마다 담사의 몸에 상처가 생겼다. 유령쌍사 감씨형제는 사실 백 년 전에 멸망한 유령문(幽靈門)의 후예였다. 유령문은 중원에 뿌리를 둔 문파가 아니고 서역(西域)에서 들어 온 이족의 문파였다. 한때 그들 유령문이 저 서장(西藏) 성숙해(星 宿海)에 자리한 나후마교(羅吼魔敎)의 지파(支派)라는 소문이 나돌 기도 했다. 즉, 유령문의 조사 유령천사(幽靈天邪)는 마교의 장로였는데 후 계자 싸움에 밀려 중원으로 도망쳐들어왔다는 것이 그 소문의 진 상이었다. 하여간 유령문은 기오막측한 무공과 사이한 술법으로 한때 막강 한 대강남북에 세력을 떨쳤었다. 하지만 본래 근본이 사악한 이 문파는 세력을 얻게 되자 그 악 행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유령문의 문도들은 살인 방화는 말할 것도 없고 백주대로에서의 겁탈도 주저없이 자행하였 다. 유령문의 이같은 악행은 곧 전 무림의 공분(公憤)을 불러일으켰 으며, 마침내 구파일방이 주축이 된 강호무림의 여러문파들이 일제 히 유령문을 공격하여 멸망시켜버렸다. 그것이 지금부터 백 년 전의 일로써 유령문이 무림의 공분을 사 서 멸망할 때 문중의 고수들은 대부분 추살당했고, 그 때문에 유령 문의 절정수법은 거의 다 절전(絶傳)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유령문의 제자이면서도 비전수법을 오할도 얻지 못한 유령쌍사의 무예는 강호의 이류(二流) 고수의 수준이었다. 허나 매우 기억력이 뛰어난 유령쌍사는 강호를 방랑하며 각대문 파의 수법을 훔쳐 배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유령쌍사는 강호에서 훔쳐 배운 수법들과 유 령문의 무예를 접목하여 자신들 나름대로 독특한 무예를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실전무예였다. 오로지 살상을 위주로 한 무예였다. 담사는 지독한 독종이었다. 그렇게 상처를 입어가면서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착실히 무예를 익혀나갔다. 유령쌍사는 검부를 두려워 하여 중원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 다. 그 대신, 그들은 담사를 데리고 서장, 천축(天竺), 대막(大漠), 신 강(新疆)등 변황 오지 등을 오년 동안 함께 돌아다녔다. 제버릇 개 못준다는 말이 있듯이, 중원에서 악한 짓을 자행하던 유령쌍사는 변방이라고 해서 참을 리가 없었다. 자연 담사도 그들 일에 끼여들었고 자연 그의 손에서는 피가 마 를 날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파국의 날이 왔다. 그것은 담사가 유령 쌍사를 만난 지 오 년이 되어 열아홉살이 되던 해로써 그때 유령 쌍사와 담사는 돈황(敦荒)을 지나고 있었다. 이노일소(二老一少), 그 동안 오년의 세월이 흘러서 이마에 잔주름이 늘고 귀 밑에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였지만, 두 명의 노인은 유령쌍사 감씨 형제 였다. 그 뒤를 무표정히 따르는 소년은 이제 십 구 세 가량으로 뚜렷 한 이목구비에 전신에서 야수 같은 기질을 풍기는 그는 전날 북경 에서 유령쌍사를 따라온 담사라는 소년이었다. 돈황의 땅은 거칠다. 거친 황사풍(黃沙風)에 건조한 날씨, 붉은빛이 나는 황토의 황량 한 고원은 끝이 없다. {제기랄, 오늘은 허허벌판에서 밤을 지세워야 하겠군.} 쌍사의 첫째인 감형은 거친 황사풍에 진저리를 치며 투덜거렸다. 길을 잘못 들은 탓에 그들은 벌서 이틀째 황량한 고원을 헤매고 있었다. {이놈아, 그따위 밀랍 같은 표정은 짓지 말고 어디 동굴 같은 곳 이나 찾아 봐라.} 둘째인 감전은 독오른 시선으로 담사에게 화풀이하듯 노성을 질 렀다. 담사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히 주위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저놈의 마귀새끼는 요즈음 들어 더욱 반항적인데 마음에 안들 어. 어디 오늘 밤 적당한 잠자리를 찾지 못하면 저놈에게 화풀이나 해야겠군.) 감전은 내심 악독한 생각을 굴렸다. 사실 오 년 동안 담사는 유령쌍사의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난 궂은 일은 그의 차지였고, 혈전의 벌어질 때도 유령쌍사는 자신 들이 불리하면 담사야 죽든 말든 상관치 않고 도주를 했다. 그로 인해, 담사는 몇 번인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었지만 타고 난 임기응변과 독기로 겨우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간혹 기분이 뒤틀리면 무예를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무차별 공격했다. 그때마다 담사의 몸에서 상처가 나고 때로는 혼 절한 적도 있었다. 문득, 담사의 눈에서 서늘한 광채가 스쳤다. {저쪽에 쉴만한 동굴이 있을 것 같읍니다.} 유령쌍사는 담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황사풍 사이로 거대한 바위산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보자!} 감형이 소리치며 걸음을 빨리했다. 바위산은 생각보다 훨씬 멀리 있었다. 거의 두 시진 동안을 달려 온 끝에 겨우 바위산 아래 도착했다. 회색으로 물든 바위산은 음산 한 느낌을 주었다. 얼마나 헤매었을까? 담사가 바위산 중턱에서 유령쌍사를 돌아보 며 황망히 외쳤다. {여기 동굴이 있읍니다!} 유령쌍사가 급히 달려왔다. 그것은 제법 큰 동굴이었는데 바닥에 구르고 있는 오래된 사람 의 뼈조각을 보아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형은 동굴 안을 살피며 눈을 빛냈다.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 볼까.} 나직이 중얼거리며 화섭자에 불을 붙였다. 들어가면 갈수록 동굴은 넓어졌는데 군데군데 사람의 손길이 닿 은 듯한 흔적이 있었다. 돌연 감형의 눈이 커졌다. 장방형의 동굴은 분명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이다. 동굴에는 각가지 가재도구가 널려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되 어 썩어 있었다. 게다가 동굴바닥에는 십여 구의 해골이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데 상태로 보아 최소한 백 년은 넘은 것 같았다. 녹슨 장검, 도 등의 병장기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무인들이 분명했다. {이런 황량한 오지에 무림인들이 살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 군.} 감형은 놀란 듯이 중얼거리며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 다. 한동안 동굴 안을 살피던 감형은 무언가를 찾아들고는 놀란 듯 이 외쳤다. {유령비(幽靈匕)! 유령비다.} 감형은 미친 듯이 외쳤다. {유령비.... 유령비, 이것이 이 동굴 안에 있다니.....} 감형이 쳐든 것은 한 자 두 치의 묵빛 단검이었다. 기이하게도 칼날이 온통 은은한 흑광(黑光)을 띠우고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 음에도 칼자루에만 약간 녹이 슬었을 뿐 날에는 한 점의 흠도 없 었다. 감전도 그것을 쳐다보며 기쁜 듯이 외쳤다. {유령문의 신물(神物)을 이곳에서 보다니...!} 그는 치밀어 오르는 격동에 말을 잇지 못했다. 담사는 그들의 미친 듯한 행동을 무표정히 쳐다보면 한쪽 구석 에 가만히 주저 앉았다. 순간 엉덩이에 무언가 딱딱한 느낌이 전해졌다. 손으로 땅바닥을 문지르자 딱딱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 가만히 손끝을 움직이자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에 전해지면서 길쭉한 것이 손에 잡혔다. 담사는 힐끗 그것을 살펴보고 난 다음 유령쌍사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바닥에 널린 시신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담사는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얼른 품 안으로 감추었다. 쌍사에 게 들킨 다면 꼼짝 없이 빼앗기고 말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이내 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이틀 동안 잠을 제 대로 자지 못한 그는 너무도 피곤했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그는 갑자기 무릎 뼈에서 번지는 고통에 눈을 떴다. {일어나, 이놈아!} 감형이 그의 무릎을 발끝으로 친 것이다. 담사는 그의 말에 느릿하게 일어섰다. 감형의 얼굴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놈아,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감형은 우수에 들린 흑색단검을 흔들며 물었다. 담사는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감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경멸 어린 눈으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놈아, 이 어른이 설명을 해 줄테니 귀를 뚫고 잘 들어라.} 그의 말은 희열에 들떠 있었다. {우리는 유령문의 제자들이다. 백 년 전 유령문은 구파일방의 연 합 세력에 의해 멸망했지만, 당시 문주와 칠 명의 제자만이 간신히 살아났어.} {...!} 감형은 잠시 말을 멈추고 힐끗 돌침상을 바라보았다. 이미 먼지 가 깨끗이 제거 된 돌침상 곁에는 희미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죽은 시신들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유언이었던 모양이다. 감형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비록 살아남기는 했지만 무당파와 화산파의 추격에 이곳까지 도주해 왔지. 겨우 한숨을 놀린 그 분들은 이곳에서 상처를 치료하 며 복수를 계획했는데....} 감형은 말을 멈추고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무당파 화산이 고수들이 석 달 만에 이곳까지 쳐들어와 문주와 일곱제자들을 모두 죽이고 돌아갔어.} 감전이 냉랭하게 말했다. {형님, 그놈은 우리의 제자도 아닌데 그런 것을 알려 주어서 뭘 합니까?} {무슨 소릴, 이놈도 우리의 무공을 배웠으니 유령문의 제자나 마 찬가지, 이놈도 알 것은 알아야 돼.} 감전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감형을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감형은 개의치 않고 계속 담사에게 설명했다. {이것은 유령비(幽靈匕)라는 것으로 유령문의 이대신물(二大神 物)중 하나다.} 감형은 흑색단검을 흔들며 말했다. {이것은 금석을 무우 베듯 자르며 어떤 호신강기(護身 氣)라도 뚫어버린다. 그리고 이 유령비의 어딘가에는 한 가지 신법(身法)과 일초의 검법(劍法)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찾지 못했어.} {.....!} {또 하나의 신물은 절명사침(絶命死針)이라는 것인데 손바닥만한 적룡(赤龍) 모양으로 한번 발사되면 방원 오 장 내의 생명은 모조 리 죽고 말지.} 감형은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힐끗 담사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이놈아, 알아 들었느냐?} 담사는 무표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형은 담사의 표정 없는 얼굴에 욕설을 퍼부었다. {염병할, 하기야 네놈이 알면은 무얼하겠나? 개잡종 같으니라 구.} 그는 돌침상으로 걸어갔다. 감전은 담사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멍청히 쳐다보기는 뭘 쳐다보느냐. 이곳에서 며칠 묵을 테니 네놈은 나가서 음식이나 구해와.} 담사는 말없이 일어나서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른한 오후, 두 다리를 쭉 뻗고 등을 바위에 기댄 담사는 햇빛을 받으며 눈 을 감고 있었다. 바위산은 무서울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 담사는 눈을 천천히 떴다. 따뜻한 햇빛에 눈이 부신 그는 몇 번이나 깜박이다가 가만히 일 이어섰다. 그 순간, 담사는 무언가 생각이 떠오른듯 다시 주저앉았다. 이어 품 속에서 무언가 꺼내들었다. 그것은 길이는 손바닥만하고 엄지손 가락 정도로 굵은 피리모양인데 은은한 묵광을 띠었다. 담사는 한동안 자신의 옷자락으로 닦았다. {음.....} 담사는 신음성을 흘리며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이 감늙이가 말하던 유령문의 이대신물중 하나인 절명사침 이란 말인가?) 내심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치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깨끗이 닦은 피리모양의 물건 겉면에 자그마한 글씨로 절명사침 (絶命死針)이라는 글귀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담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더욱 세세히 살폈다. 절명사침은 그 외 별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침(針)자 옆에 두 개의 조그만 흑 같은 것이 솟아 있었다. (감형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침통의 장치다. 앞의 것을 누르면 우모독침(牛毛毒針)이 하나씩 튀어나오고 뒤에 것을 누르면 수백 개가 동시에 나온다고 했지.) 담사는 절명사침을 들어 한쪽 바위를 향했다. 쉬잇! 순간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침이 소리없이 파고들었다. 소털같 이 가느다란 우모독침(牛毛毒針)은 바위 속을 반이나 파고들었다. (으음..... 절명사침, 과연 죽음의 암기이군!) 담사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떠올렸다. (이것으로 두 늙은이를 암습한다. 그 동안 무예를 배웠지만 요즈 음 들어 더 이상 별다른 초식은 가르쳐 주지 않아.) 담사의 눈빛이 한동안 흔들렸다. {....!} 이윽고 담사는 무언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절명사침을 꽉 쥐 었다. {으아악!} {크윽!} 유령쌍사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들의 두 눈은 공포와 분노에 부릅떠져 있었다. 쌍사중 둘째인 감전의 몸에는 우모독침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 었다. 하지만 반응이 좀더 빨랐던 감형의 몸에는 감전과 달리 단지 몇 개의 우모독침이 박혀 있을 뿐이었다. {크으으.....!} 우모독침의 세레를 받은 감전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서 절명했 다. 하지만 요행히 치명상은 피한 감형은 경악과 분노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담사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 다. 담사의 우수에는 절명사침통이 들려져 그들 형제를 향하고 있었 다. {절..... 절명사침!} 하눈에 절명사침통을 알아본 감형은 비틀거리면서 경악성을 내 뱉었다. (우라질! 이 늙은이는 쥐새끼같이 빠르군!) 겉으로는 득의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 담사는 감형의 섬 전 같은 신법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기회를 엿보아 절명사침을 발사했을 때 유령쌍사는 유령비 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헌데 감형은 순간적으로 신속한 신법을 전 개하여 치명상을 피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성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모독침을 몇개 밖에 맞지 않은데다 그의 절륜한 공력으로 독기를 막고 있기 때문이었 다. {찢어죽일 놈, 감히..... 우리를 암습하다니...} 동생이 죽는 것을 본 감형은 흉신악살같은 표정으로 이를 갈며 담사에게 다가섰다. 담사는 그자가 다가서자 급히 절명사침을 눌렀다. 허나 이미 한 번 발사된 침통 안에는 우모독침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담사는 이를 악물었다. (더러운 늙은이 명도 길군. 보아하니 중상을 입은 것 같은데 도 주해야겠군.)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달아날 작정을 했다. 비록 우모독침을 맞긴 했으나 감형을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 이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감형이 수중에 들고 있던 유령비를 벼락같 이 던졌다. {죽어랏!} 담사는 갑자기 유령비가 날아오자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슈_____ 욱! 유령비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스치고 돌벽에 깊숙히 파고 들었다. 파앗! 그와 동시에 감형의 몸이 갑자기 신속무비하게 동굴 밖으로 쏘 아나가는 것이 아닌가? 사실 감형은 모든 내공을 독기가 퍼지는 것을 막는데 쓰고 있는 탓에 담사를 상대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해서 일단 허장성세를 부 려 담사를 주눅 들게 해놓고는 그대로 달아난 것이다. 담사는 감형이 꽁지가 빠지게 도주하자 그제서야 그같은 내막을 알게 되었다. {빌어먹을! 내가 저 늙은이게게 속았군.} 이를 갈면서 벌떡 일어선 그는 급히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담사가 급히 동굴 밖에 뛰어나갔을 때는 이미 감형의 신 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더러운 늙은이! 꼭 잡아 죽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평생 불안 속에 살아야 하니까.} 독백하는 담사는 바위산과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한나절 동안이나 찾았지만 감형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담사는 다시 동굴로 들어왔다. 담사는 동굴 안을 살펴보고는 감전의 시신을 뒤졌다. 그자의 품 에서는 두 권의 책자와 은자, 그리고 조그만 나무갑이 나왔다. 나무갑을 열어보자 그 안에서는 역용에 필요한 각가지 도구가 들어 있었다. 이어 담사는 책자를 살폈다. 한동안 책자를 훑어본 담사는 냉랭 하게 중얼거렸다. {더러운 늙은이들, 자신들의 무예를 나에게는 오할도 가르쳐 주 지 않았군.} 두건의 비급 중 한 권은 유령쌍사가 익혀온 유령문의 무공비급 이었고, 또 한권은 각대문파의 수법에 대한 설명과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전에 대한 실전무예가 수록되어 있었다. 담사는 유령비(幽靈匕) 등 챙길 것은 모두 챙기고 동굴을 떠났 다. 이윽고 담사의 신형이 저멀리 황사풍 사이로 완전히 자취를 감 추자 동굴 속에 자리한 돌침상이 흔들이며 윗부분이 옆으로 밀렸 다. 돌침상 안에는 조그만 공간이 있는데, 백지장차럼 창백한 안색의 감형이 힘겹게 밖으로 나왔다. [헉헉!] 숨어있던 은신처에서 빠져나온 감형은 구르듯이 바닥에 드러누 었다. 사실 그는 동굴을 뛰쳐나가는 척 하면서 동굴 입구의 천정에 몸 을 붙였었다.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인지라 그대로 달아났다가는 꼼짝없이 담사에게 추격당할 것임을 아는 때문이었다. 다행히 담사는 미처 그를 보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그를 찾아나 섰고, 그 후 감형은 재빨리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와 미리 보아두 었던 침상 안의 비밀 공간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배은망덕한 놈! 내 기필코 네놈을 찢어죽이고 말겠다!] 동생 감전의 시신을 돌아본 감형은 이를 부득 갈고는 운기조식 에 들어갔다. 第 二十二 章 魔敎三寶의 傳說 대청 안의 중인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천갈 냉유도를 주시하 고 있었다. 냉유도는 중인들의 표정을 담담히 쳐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감형은 그 후 우모독침을 빼고 상처를 치료하려고 했으나 침에 발린 독기로 인해 결국 일년 만에 죽었읍니다.} 막대승이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젊은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나?} 냉유도는 차분히 대답했다. {감형은 중상을 입은 채로 청해(靑海) 지방에까지 왔지요. 그때 제가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읍니다.} 황보가혜가 입을 삐죽였다. {그 일과 우리 자당주의 죽음이 무슨 연관이 있는가요?} 냉유도는 황보가혜의 아름다운 모습을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 았다. 그러자 황보가혜의 눈꼬리가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 서 음심을 발견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흐흐흐 아직 나의 말은 끝나지 않았으니 더 들어 보시지요, 소 저!} {흥!} 그녀는 냉랭히 코방귀를 터뜨렸다. 냉유도는 감형을 묻어 주고 담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돈황의 동굴을 거쳐서 천하 각지를 떠돌았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냉유도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출신 내력부터 샅샅이 조 사하기 시작했다. 담사는 하북성(河北省) 송호현(松湖縣) 출신으로 그의 모친은 기 녀 출신이고, 그의 부친은 건달이었다, 그들은 담사는 낳고난 다음, 가난에 못이겨 담사를 부자집에 종 으로 팔았다. 그로부처 일 년 후, 담사의 모친은 가난에 못이겨 도망을 갔고, 그의 부친은 술로 지새우다 거리에서 죽었다. 냉유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어 목이 마른지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 후 담사는 팔려간 집에서 갖은 학대를 받다가 삼 년 만에 열 두 살의 나이로 당시 열여섯인 주인집 딸을 강간 살해하고 북 경성으로 도망을 갔읍니다!} {열두살 짜리가 강간 살인을....!} [으음!] 냉유도의 말에 중인들은 절로 신음을 흘렸다. 한창 철부지일 나 이인 열두살에 이미 강간에다 살인까지 저지르다니...! 평범한 사람 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북경에 도착한 담사는 빈민촌에서 창녀들의 심부름을 하거나 손님들을 소개했고 나중에는 도둑질까지 하다가 유령쌍사를 만나 게 되었던 것입니다.} 냉유도의 긴 이야기가 끝이 났다. 중인들은 문득 한 인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 [....!] 실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담사라는 이자는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독 종중의 독종인 것이다. 잉윽고 침묵을 깨고 조중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사라는 자가 철혈무정 석무심과 자당주를 죽인 흉수란 말인 가?} 냉유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담사는 그들을 죽인 자가 아니라 범천대공을 살해한 자객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중인들의 눈이 한 순간 휘둥그래졌다. 수쌍의 눈빛에는 경악과 놀라움에 차 있었다. 한 순간 뒷머리에 둔중한 쇠망치를 맞은 듯흔 표정들이었다. 막대승이 제일 먼저 침착을 되찾았다. {어떻게 해서 담사라는 자가 범인이라고 생각을 하는가?} 냉유도는 빙그레 웃었다. {저는 그를 삼 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를 쫓고 있읍니다. 그리고 범천대공의 호신강기를 뚫고 그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병기는 천 하에서 아마 단 하나 유령비(幽靈匕)뿐일 것입니다.} 막대승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천대공 연대강의 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다. 보통의 무기나 벼기로는 그의 강 력한 호신강기를 어찌 해볼수가 없다! {그래서 젊은이가 연공자의 시신을 보겠다는 조건을 내세웠군.} 냉유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아직 자당주와 철혈무정을 살해한 흉수에 관하여 말하 지 않았어요.} 황보가혜가 싸늘히 말했다. 냉유도는 히죽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라도 그 웃음이 조롱 섞인 미소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보가혜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에서 매서운 광채를 띠며 벌 떡 일어섰다. 막대승이 손을 흔들었다. {소저, 잠시만 참으시오.} 황보가혜를 진정시킨 그는 냉유도를 주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젊은이는 아직 할말이 남았겠지?} 냉유도는 태연한 신색으로 힐끗 황보가혜의 성난 표정을 일별하 면서 말했다. {저는 어제 저녁 무렵 금룡장에 도착했지요. 헌데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위를 살펴 보았는데 구석진 곳에 몇 구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어젯밤 저녁 무렵, 냉유도는 금룡장 부근에서 개방의 방도와 무림맹 무사의 시신을 발견하고 흉수를 뒤쫓았다. 교자가 지나간 듯한 발자국을 찾은 그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 렸다. 자운유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진 후였는데 자운 유의 시신을 살핀 그는 매우 놀랐다. 시신의 상처는 그로서 상상하기 힘든 절정의 내가중수법(內家重 手法)에 당한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 수법도 그렇지만 무림맹의 당주급 인물을 단 수초 만에 살해하다니.....} 냉유도는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숲 속은 시간이 이미 한밤 중인 이경(二更) 무겹이라 칠경같이 어두웠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겠다는데 우선 이 부근 을 살펴보아야겠군. 가만이 부근에 원각사라는 절이 있지.} 그는 독백하며 비조처럼 신형을 날렸다. 불영탑에 도착한 그는 곧 철혈무정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똑같은 수법에 당했군. 수법으로 보아 소림의 수법 같은데....}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멀리서 은은히 들리는 장소성에 급히 몸을 날렸다. 어두운 숲속을 달리던 냉유도의 표정은 갑자기 무섭게 굳어졌다. 하나의 섬전처럼 나는 인영을 발견한 때문이다. 냉유도는 처음에 그것이 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번갯불처럼 어둠 속을 질주하는 인영은 분명 사람이었다. 그의 신법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신환허(神還虛)의 경지 였다. 냉유도는 숨을 죽였다. 눈앞에서 달리고 있는 이인물의 무공은 절정고수인 냉유도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경지에 도달해있었기 때 문이다. 그 인물의 입에서 장소성이 터질 때마다 온 산이 뒤흔들렸다. 인영은 잠시 어둠 속을 헤매다 동쪽으로 질주했다. 냉유도는 황 망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일다경이 흘렀을까? 젖먹던 힘까지 발휘해 그를 따랐으나 냉유도는 점점 공력이 딸 렸다. 바로 그때, 앞서 달리던 인영은 폐허가 된 사당묘 속으로 사라졌 다. 냉유도는 그제서야 잠시 멈추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온통 옷을 적시는 땀, 냉유도는 황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제기랄... 이 무슨 고생인가?} 나직이 투덜거리면서 천천히 사당묘를 향해 접근했다. 하지만 앞 에 들어간 인영의 가공할 무위를 생각 할 때 등골에 식은땀이 솟 았다. (가까이 접근했다가 그 자의 청력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나로서는 적수가 될 수 없다.) 냉유도는 감히 가까이 접근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동정을 살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당안에서 나직한 여인의 흐느낌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 한명의 삼십 전후의 사내가 만신창이가 된 여 인을 안고 걸어나왔다. 그 사나이를 발견한 냉유도는 그 인물의 전신에서 뻗어나오는 패도적인 기도에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냉유도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를 다시 보았을 때, 이미 그의 신 형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데신법의 빠름은 그로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냉유도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경공이었읍니다. 반 리도 가지 않아서 그를 놓쳐 버렸지요.} 중인들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냉유도를 쳐다보았다. 막대승은 냉유도의 무공 수위가 결코 자신에 못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냉유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경신술을 구 사하는 고수가 존재하다니...! 그말이 사실이라면 그 청년의 무공은 무림맹의 삼태상(三太相)에 비교해도 결코 아래가 아닐 것이다. 그것도 불과 삼십 전후의 나이 로....! {젊은이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믿기 어려운 점이 있네.} 막대승의 침중한 이 말에 냉유도는 가식적인 미소를 띄우며 손 을 뻗었다. {저로서는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나를 의심한다 해도 할 수 없 는 일입니다.} 막대승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나는 두 가지 의문이 있네. 하나는 담사라는 자를 쫓는 이유와 자네의 사문(師門)을 모르고 있네.} 냉유도는 이 말에 흠칫했다.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고 하더니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게 되었 군.) 그는 중인들을 쳐다보았다. 냉유도는 그들의 눈빛에서 섬뜩함을 느끼고 어깨를 흔들며 담담 히 말했다. {담사를 쫓고 있는 이유는 저의 사적인 일이니 말씀 드리기가 어렵고, 저의 사부님은 청해존자(靑海尊子)라는 분입니다.} 그가 솔직히 말을 하자 중인들은 다시 놀라운 표정이 되었다. 냉유도를 자객으로 알고 있던 막대승을 위시한 중인들, 그들에게 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청해존자(靑海尊子) 오합율(烏合律)!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무림의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기인(前代奇 人)으로써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나이가 백 살은 넘었을 것이다. 청해제일인(靑海第一人)이라고 불리우는 그가 청해의 해심산(海 深山)에 은거한 것은 오십 년 전이다. 정(正)도 아니고 사(邪)도 아닌 그는 매우 괴퍅한 인물로 소문이 나있었다. 막대승은 약간 놀라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분 오노선배께서는 아직 정정하신가?} 냉유도는 막대승의 놀란 모습에 득의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하하! 사부님께는 앞으로 오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저 에게 말씀 하셨읍니다.} 막대승은 쓰디쓴 고소를 지었다. 냉유도가 청해존자의 제자라면 함부로 다룰 수 없다. 사실 무림 매으이 공동맹주들인 우내삼기(宇內三奇)라고 해도 그 앞에는 한 수 양보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청해존자다. 그 청해존자의 제자라면 배분상으로 우내삼기와 대등하다고 해 야할 것이다. 막대승은 냉유도의 언행이 다소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나, 그가 범인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자네가 오노선배님의 제자라니 당분간 자네를 믿겠네.} 이어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며, {연공자의 시신을 보는 일은 시간이 필요하니 조금 기다려 주어 야 하겠네.} 돌연 이때, 사람의 폐부를 휘젓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애의 시신을 확인할 필요는 없어. 그 애의 심장을 찌른 것은 유령비가 확실하니까 아니, 천마비(天魔匕)라고 해야 옳겠지.} 중인들은 깜짝 놀라며 음성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대청의 입구에는 한명의 노검사(老劍士)가 천년 고목같은 자태로 조용히 서있었다. 노 검사의 두 눈은 고요하리만큼 깊은 심해(深海)를 보는 듯했 다. 일신에는 새하얀 백색장포를 입고 있고 허리에는 한 자루의 고 검이 걸려 있었다. 노검사의 전신에서 뻗어나오는 기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 이 막히는 압박감을 주었다. 흡사 몸 전체가 한자루의 잘 벼린 보검같이 느껴지는 인물! 이같 은 기도를 풍길 수 있는 검사는 천하를 통틀어도 단 한명 뿐이라 고 해야할 것이다. 냉유도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신검황(神劍皇).... 연주백(燕州栢)!} 그렇다. 거짓말처럼 대청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 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고 무림맹 삼태상 중의 일인인 심검황 (神劍皇) 연주백이었다. 냉유도와 황보가혜를 제외한 중인들은 황망히 허리를 숙이고 절 을 했다. {삼가 태상을 뵙읍니다.} {백부님.} 황보가혜가 급히 연주백의 손을 잡고 응석부리듯 말했다. {백부님, 언제 오셨어요?} 연주백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좌수를 흔 들었다. {모두들 일어나게.} 한 가닥 무형의 경력이 중인들을 일으켜 세웠다. 중인들이 몸을 바로 세우고 정중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자, 연 주백은 가만히 냉유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젊은이가 담사라는 자객을 쫓는 것은 마교삼보(魔敎三寶)중의 하나인 천마비(天魔匕)때문이겠지?} 단번에 속셈이 들킨 냉유도는 핏기없는 창백한 표정으로 장읍을 취했다. {말학후진 냉유도가 연대공께 인사 드립니다.} 이어 그는 끄 짧은 시간에 침착한 자세를 되찾으며 침중하게 말 했다. {이미 아시고 계시니 부인하지는 않겠읍니다.} -천마비(天魔匕), 이는 서장(西莊) 성숙해(星宿海)에 자리한 마교(魔敎)의 삼대신물 (三大神物) 중 하나이다. 나후마교(羅吼魔敎)라고도 불리는 마교가 세력을 일으킨 연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지금으로부터 오백 년 전 마니(魔尼)라고 불리우는 서역의 마승(魔僧)이 마교의 조사가 아닌가 믿어질 뿐이었다. 마승 마니(魔尼)는 광명신(光明神)과 암흑신(暗黑神)의 대립으로 이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믿는 서역 배화교(拜火敎)의 마지막 전인 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그는 광명신의 피조물인 이 세상을 정화하려면 암흑신의 권화(權化)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과 독선을 없애야한다는 과격한 교리를 신봉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마승 마니는 암흑신의 힘이 담겨있다는 세 가지의 신물(神物) 을 지닌 채 중원의 각대문파를 찾아다니며 무예를 겨루었었는데 그의 무서운 손속 아래에서 수많은 고수가 모조리 격패당하는 일 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당시 중원 무림계는 발칵 뒤집혔다. 단 일 년, 단 일년 만에 소림을 제외한 각 문파가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니승은 출도 일 년후에 소림을 찾아간 지 이틀 만에 다시 소림사의 산문을 나와서 영원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마니승은 마교를 중원에 세우고 각대 문파의 무예를 비교하던 중 소림사를 찾아갓다가 그곳에서 소림사 제육대방장(第六代方丈)에게 패해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흔히 육조(六祖)라고도 불리는 당시 소림사 장문인 혜능(慧能) 선사는 그 불법의 깊이뿐만 아니라 선문신공(禪門神功)의 성취에 있어서도 초조(初祖) 달마(達磨)의 재래로 일컬어지던 뛰어난 분이 셨다. 제 아무리 지옥(地獄)의 권화(權化)라는 삼대마물을 지닌 마니였 지만 육조 혜능의 금강부동신공(金剛不動神功)에는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던 것이다. 마교의 삼대신물이란 것은 바로 그 마승 마니가 지니고 있던 세 가지 기물로써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십팔마령(十八魔令)! 이것은 마교의 종사령(宗師令)이다. 십팔천마(十八天魔)가 새겨진 손바닥 만한 옥부(玉符)로써 이것 은 당시 마니승이 소림사로 난입하여 육대방장 혜능선사와 싸울 때 패해 가루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첩혈마황검( 血魔皇劍)! 금석을 두부 베듯 하는 보검으로 검 전체가 피를 머금은 듯 핏 빛의 광채를 띠고 있는 마검(魔劍)중의 마검이다. 본래의 검명은 마황검(魔皇劍)인데 일단 검집을 한 번 빠져나오 면 피를 보지 않고는 절대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첩혈마황 검이란 끔찍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첩혈마황검의 검집에는 한 가지 사악한 마공심결(魔功心訣)이 새 겨져 있다고 하는데 아직 누구도 그 사실을 확인해 본 사람은 없 다. 첩혈마황검은 백 년 전 의문스럽게 사라진 후 강호에 나온 적이 없었다. -천마비(天魔匕)! 한 자 두치의 단검으로 먹물을 칠 한 듯 묵광(墨光)을 띤다고 전 해 오는데 천마비에도 마교의 가장 무서운 비밀마공이 담겨져 있 다고 한다. 이것은 마니승이 사라지면서 함께 없어졌는데, 그 이후 강호에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마교 최대의 보물이다. [....!] 신검황 연주백은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중인들은 연주백의 침묵에 엉거주춤 그의 눈치을 살폈다. 냉유도는 짐짓 태연한 표정이었으나 내심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 이 담사를 쫒는 이유룰 신검황 연주백은 한눈에 간파한 때문이다. 담사가 지닌 유령비(幽靈匕), 아니 천마비(天魔匕)를 얻어 그 안 의 비밀을 푼다면 그 옛날 마승(魔僧) 마니(魔尼)처럼 천하를독패 (獨覇)할 수 있는 것이다. 연주백이란 존재 때문에 냉유도는 질식할 것만 같은 압박을 느 꼈다. 연주백은 그로서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높이 솟은 거암절벽과 같은 거물이었다. 냉유도는 자신이 연주백 앞에서는 어린 아이 같 은 느낌이 들었다. 대청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항주성 북쪽에 위치한 고당산(高唐山), 산중턱의 수림 속에 은밀한 장원이 세워져 있었다. 바로 모든 음 모의 발원지인 금룡장(金龍莊)이었다. 금룡당의 깊은 곳에 자리한 한칸의 방. 서재인 듯한 이 방에 지 금 금룡장의 장주인 전육당이 침중한 눈빛으로 모용천위를 쳐다보 고 있었다. 모용천위의 표정은 전날과는 달리 전혀 생기가 없었고, 빛나던 그의 두 눈은 무기력하고 힘이 없으며 고뇌에 가득 차 있었다. {네가 화련(華蓮), 그 아이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을 말리지는 않 겠다.} 전육당이 침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담사라는 그 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찾겠다는 것이냐?} 모용천위의 턱밑 근육이 실룩거렸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 자의 이름 뿐,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 자를 찾는다는 것은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이 걸려도 잡기가 어려울 것 이야.} 전육당이 말하자 모용천위는 단호히 대답했다. {십 년이 걸리든 백 년이 걸리든 상관 없읍니다. 그 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전육당은 내심 침음성을 삼켰다. (이런 곰 같은 놈, 무예는 동생 천엽보다 뛰어났지만 머리는 반 도 따라가지 못하니...) 잠시 생각해 잠긴 전육당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좋다! 네 의지가 정 그렇다면 나도 모르 ㄴ척 할 수야 없지. 사 실 나에게는 그 자를 단 시일 내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이 한가지 있다.} 순간 암울하던 모용천위의 눈이 일순 번쩍 빛을 발했다. {방법이라시면....?} {그 놈이 가져간 전표에는 모두 고유번호가 새겨져 있다. 그것을 무림맹에 알려 주는 거지.} 전육당은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자가 가져간 전표는 화룡전장(火龍錢莊)에서 발행한 전표들 이지.} 모용천위는 그렇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화룡전장의 지점이 비록 강남북 칠 개 성에 오십여 군 데가 된다지만 황금 일천 냥 짜리의 거액 전표를 바꿀 수 있는 곳 은 각성의 칠 개 분점 뿐이다.} 이 말에 모용천위는 전육당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읍니다.} 모용천위는 감탄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 {그 일곱 지점만 감시한다면 언제인가 전표를 바꾸기 위해 그 자가 올 것이니 그때 그를 잡는다는 계획이군요.} {그렇지. 허나 그를 제거하는 것도 좋지만 놈을 잡는 것은 우리 가 아니라 무림맹이다.} 전육당이 말하자 모용천위는 의아해졌다. {우리는 아직 정체를 드러낼 수 없고, 설혹 감시를 한다 해도 문 제점이 많아. 그러니 이것을 무림맹에 자연스럽게 알려서 그들이 그 자의 종적을 발견하면 우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이야.} 차도살인! 그것은 실로 절묘한 묘계(妙計)였다. 모용천위는 감탄성을 터뜨렸다. {실로 절묘한 계략입니다!} 전육당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이길로 장원에 돌아가서 이 일을 처리하겠으니 너는 화련, 그 아이를 데리고 곡(谷)으로 돌아가거라.} 모용천위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담사 그 놈을 제 손으로 죽일 때까지는 곡으로 돌아가지 않겠읍니다.} 단호한 말투에 전육당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보다도 모용천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전육당은 더 이상 말을 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마비(天魔匕)! 한 자 두치의 단검으로 먹물을 칠 한 듯 묵광(墨光)을 띤다고 전 해 오는데 천마비에도 마교의 가장 무서운 비밀마공이 담겨져 있 다고 한다. 이것은 마니승이 사라지면서 함께 없어졌는데, 그 이후 강호에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마교 최대의 보물이다. [....!] 신검황 연주백은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중인들은 연주백의 침묵에 엉거주춤 그의 눈치을 살폈다. 냉유도는 짐짓 태연한 표정이었으나 내심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 이 담사를 쫒는 이유룰 신검황 연주백은 한눈에 간파한 때문이다. 담사가 지닌 유령비(幽靈匕), 아니 천마비(天魔匕)를 얻어 그 안 의 비밀을 푼다면 그 옛날 마승(魔僧) 마니(魔尼)처럼 천하를독패 (獨覇)할 수 있는 것이다. 연주백이란 존재 때문에 냉유도는 질식할 것만 같은 압박을 느 꼈다. 연주백은 그로서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높이 솟은 거암절벽과 같은 거물이었다. 냉유도는 자신이 연주백 앞에서는 어린 아이 같 은 느낌이 들었다. 대청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항주성 북쪽에 위치한 고당산(高唐山), 산중턱의 수림 속에 은밀한 장원이 세워져 있었다. 바로 모든 음 모의 발원지인 금룡장(金龍莊)이었다. 금룡당의 깊은 곳에 자리한 한칸의 방. 서재인 듯한 이 방에 지 금 금룡장의 장주인 전육당이 침중한 눈빛으로 모용천위를 쳐다보 고 있었다. 모용천위의 표정은 전날과는 달리 전혀 생기가 없었고, 빛나던 그의 두 눈은 무기력하고 힘이 없으며 고뇌에 가득 차 있었다. {네가 화련(華蓮), 그 아이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을 말리지는 않 겠다.} 전육당이 침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담사라는 그 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찾겠다는 것이냐?} 모용천위의 턱밑 근육이 실룩거렸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 자의 이름 뿐,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 자를 찾는다는 것은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이 걸려도 잡기가 어려울 것 이야.} 전육당이 말하자 모용천위는 단호히 대답했다. {십 년이 걸리든 백 년이 걸리든 상관 없읍니다. 그 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전육당은 내심 침음성을 삼켰다. (이런 곰 같은 놈, 무예는 동생 천엽보다 뛰어났지만 머리는 반 도 따라가지 못하니...) 잠시 생각해 잠긴 전육당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좋다! 네 의지가 정 그렇다면 나도 모르 ㄴ척 할 수야 없지. 사 실 나에게는 그 자를 단 시일 내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이 한가지 있다.} 순간 암울하던 모용천위의 눈이 일순 번쩍 빛을 발했다. {방법이라시면....?} {그 놈이 가져간 전표에는 모두 고유번호가 새겨져 있다. 그것을 무림맹에 알려 주는 거지.} 전육당은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자가 가져간 전표는 화룡전장(火龍錢莊)에서 발행한 전표들 이지.} 모용천위는 그렇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화룡전장의 지점이 비록 강남북 칠 개 성에 오십여 군 데가 된다지만 황금 일천 냥 짜리의 거액 전표를 바꿀 수 있는 곳 은 각성의 칠 개 분점 뿐이다.} 이 말에 모용천위는 전육당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읍니다.} 모용천위는 감탄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 {그 일곱 지점만 감시한다면 언제인가 전표를 바꾸기 위해 그 자가 올 것이니 그때 그를 잡는다는 계획이군요.} {그렇지. 허나 그를 제거하는 것도 좋지만 놈을 잡는 것은 우리 가 아니라 무림맹이다.} 전육당이 말하자 모용천위는 의아해졌다. {우리는 아직 정체를 드러낼 수 없고, 설혹 감시를 한다 해도 문 제점이 많아. 그러니 이것을 무림맹에 자연스럽게 알려서 그들이 그 자의 종적을 발견하면 우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이야.} 차도살인! 그것은 실로 절묘한 묘계(妙計)였다. 모용천위는 감탄성을 터뜨렸다. {실로 절묘한 계략입니다!} 전육당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이길로 장원에 돌아가서 이 일을 처리하겠으니 너는 화련, 그 아이를 데리고 곡(谷)으로 돌아가거라.} 모용천위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담사 그 놈을 제 손으로 죽일 때까지는 곡으로 돌아가지 않겠읍니다.} 단호한 말투에 전육당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보다도 모용천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전육당은 더 이상 말을 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림맹 절강지부의 대청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황보가예는 지루함을 느끼는 듯 몇 번인가 연주백의 얼굴을 보 았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굳어져 있는 것 같아서 입술만 삐죽거렸 다. 더 이상 참지 못한 황보가혜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 순간 마침 내 연주백이 눈을 떴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냉유도를 응시했다. 그 순간 냉유도는 자신의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눈빛에 전신 이 오싹해졌다. {천마비는 인세의 마물(魔物)이지. 그것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는데...} 날카로운 표정으로 말을 하던 연주백은 갑자기 뒷말을 흐리면서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르륵_______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들어선 사람은 바로 무림맹 절강성 지 부장인 원이광이었다. 그는 연주백에게 정중히 절을 한 다음 말했다. {한 장한이 연공자님을 살해한 자객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막전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합니다.} 막대승은 흠칫 놀라며 연주백에게 시선을 향했다. 연주백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오게.} 연주백의 승낙을 얻은 막대승의 말에 원이광은 급히 밖으로 도 로 나갔다. 잠시 후, 원이광이 한 명의 마의(魔衣) 대한을 데리고 왔다. 나이는 이십 칠팔 세로 행색을 보아 시중의 건달처럼 보였는데, 그는 대청에 들어오자 많은 사람을 보고는 겁먹은 듯한 불안한 표 정이 되었다. {내가 막대승이네.} 막대승이 말하자 마의대한은 황망히 허리를 숙여 그에게 절을 했다. {전이호(田二虎)가 막대인에게 인사 드립니다.} 비굴한 표정으로 연신 절을 하는 모습에 중인들은 눈살을 찌푸 렸다. 막대승은 연주백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막대승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 날 보자고 한 용건이 무언가?] 막대승의 물음에 마의대한은 한동안 굽신거리고 나서 품 속에 들어 있던 봉투를 꺼내들었다. {이것을 제가 얻었는데.....} 그는 말하면서 봉투를 원이광에게 주었다. 원이광은 다시 그것을 열어 안에 든 것을 꺼내 막대승에게 건네 주었다. {....!} 봉투 안에는 한장의 지편(紙片)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들여다보 던 막대승은 갑자기 눈빛이 흔들렸다. {자네! 이것을 어디서 얻었나?} 막대승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전이호는 겁먹은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주었읍니다} 막대승은 벌떡 일어나면서 버럭 외쳤다. {그 사람이 누군가?} 막대승의 기세에 전이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글쎄..... 그 사람은 처음보는 사람인데...} 전이호는 횡설수설했다. {그만 두게 막전주.} 연주백이 사내를 닥달하려는 막대승을 말리며 손을 내밀었다. 막대승은 즉시 지편을 공손히 연주백에게 바쳤다. {원광, 그에게 백 냥을 주어서 돌려 보네게.} 그 지편을 읽어본 연주백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막대승은 흠칫했다. {태상, 그는...} {막전주, 그는 아무것도 모르네.} 연주백이 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이것을 보낸 자들이 단서를 남길 리가 없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황보가혜가 궁금한 눈빛으로 지편을 쳐다보았다. {.....!} <범천대공 연대강을 살해한 자객은 담사(潭邪)라는 인물이오. 현 재 그 자의 수중에는 화룡전장에서 발행한 전표를 가지고 있느니 그 자를 잡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전표발행 일자와 전표의 고유번호, 액수 등 이 자세히 쓰여져 있었다. 글씨는 조잡했으나 그 뜻은 분명히 알 수 있었고, 보낸 이나 그 밖의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보가혜는 기쁜 듯이 외쳤다. {이것만 있으면 흉수를 잡겠어요.} 연주백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막대승을 향해 말했다. {막전주, 이것을 누가 보냈다고 생각하오?} {살인을 청부했던 자가 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막대승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이미 정체가 노 출된 철혈무정 석무심과 자객을 살해하려고 했으나 석무심만 죽이 고 자객은 놓쳐 버린 것입니다. 이에 우리의 힘을 빌어 그 자를 찾 으려는 것 같읍니다.} 연주백은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전주의 생각은....?} 조중은 자신에게도 질문이 오자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되 었다. {저의 생각도 전주님과 같읍니다.} 조중이 차분히 말했다. {강남 칠개성의 화룡전장 일곱 지점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막대 한 인력이 필요하고 치밀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살인은 청부했던 자들은 인력도 인력이겠지만 자신들의 정체를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으니 우리의 힘을 빌어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것 같읍니다.} 조리정연한 조중의 연주백은 나직이 말했다. {그 말은 곧 그자들의 우리 무림맹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언 제나 알 수 있다는 뜻도 되지. 그것은 바로 맹에 첩자가 있다는 말...} 연주백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스쳤다. {막전주, 이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막대승은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태상.} 막대승은 비롯한 조중 등 감철전의 요인들은 감격한 표정이 되 었다. 그런데, 지금 연주백의 말은 이번 일로 공을 세워 실패를 보상하 라는 말이니 그들로서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第 二十三 章 金龍莊의 劫火 그날 밤, 항주에 자리한 무림맹 절강 지부의 내실에서는 오 인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연주백을 위시하여 막대승, 조중, 지부상, 이원장, 그리고 흑건추 혼대(黑巾追魂隊)의 대주(隊主)인 엽곡(葉曲)이란 인물었다. 흑건추혼대의 총령인 엽곡은 이제 사순 가량의 추괴한 사나이로 그의 전신에서는 섬뜩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염황도(閻荒刀)라고도 불리우는 엽곡의 무예는 일파장문에 못지 않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추괴한 얼굴 때문에 성품이 괴퍅하지만 본시 선량한 마음을 지 닌 사나이였다. 연주백의 눈에서 무서운 광채가 피어올랐다. {한 시진 후 금룡장을 공격한다. 지부장은 수하들을 이끌고 주변 을 포위하고 막전주는 동쪽에서, 나는 흑건추혼대와 함께 공격하겠 다.} 막대승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상, 금룡장에는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인데...} 연주백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어젯밤 항주에 도착해서 내 나름대로 금룡장에 대하여 살 펴보았네.} {...!} {금룡장주를 보지는 못했으나 장원은 용담호혈이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니네. 만일 나의 예측대로라면 우리의 희생도 작지는 않을 것 이야.} 뒷말을 흐린 연주백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밤이 깊었다. 오늘따라 달빛마저 짙은 먹구름에 가려 주위는 먹물같이 어두워 졌다. 비라도 올 것인가? 쏴_______ 아! 차가운 바람이 금룡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바로 이때 수십 명의 인영이 병장기를 들고 금룡장의 높은 담을 유령같이 뛰어넘었다. 흡사 검은 파도같은 그들의 신법은 신속무비 한 것이었다. {으악______!} {크아악_______!} 갑자기 처절한 비명이 어둠을 찢었다. {어떤 놈들..... 으악!} 한 명의 경비무사가 소리를 지르다 목이 날아갔다. 금룡장을 지 키던 경비무사들은 침입자들의 고절한 수법에 추풍낙엽처럼 쓰러 져 갔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금룡장, 차창! {으_____ 아악!} 도처에서 격렬한 혈전이 벌어졌다. 금속음이 요란하게 터지고 피가 튀었다. 비명! 또 비명... 수십 명이나 되는 침입자들의 공격은 무자비했으며 잔인했다. 그 들의 일사분란하고도 신랄한 공격에 금룡장의 호원무사들은 제대 로 대항도 못해보고 거꾸러졌다. 도살(屠殺)! 이것은 싸움이 아니리 완전히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장당주, 나는 안채로 먼저 가겠다.} 황망히 외치며 몸을 날리는 사람은 막대승이었다. 장차수는 연신 수중의 장도를 휘두르면서 대답했다. {전주님! 여기는 걱정마십시오.} 츠츠____ 츳_____ 츠츳! 장차수의 천광도법(天光刀法)은 현란한 도광을 뿌렸다. 그때마다 여지없이 피가 튀었다. 그 옆에는 사공표가 철비단수(鐵臂斷手)로서 무차별 금룡장 경비 무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문창필 학만궁, 귀견수 조중, 팽노대 등의 모습도 눈 에 띄었다. 경비무사들의 수효는 이들에 비해 두 배나 많았으나 아예 상대 가 되지 않았다. 헌데 이때였다. 스스슷.... 어둠 속에서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십여 명의 인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흑의에 복면을 한 자들이었다. 눈빛에 일점의 감정 도 실려있지 않은 복면인들은 빠른 동작으로 격전장에 뛰어들었다. 조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새로이 전장에 뛰어든 이자들의 기세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그때 두 명의 복면인이 조중을 향해 덮쳐왔다. {음....} 한 순간 조중은 신음성을 흘리며 쌍장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복면인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럽 장풍을 피하며 공격해 왔다. 한 명은 낭아곤(狼牙棍)을 들었고 또 하나는 귀두도(鬼頭刀)를 사용하여 괴이한 수법으로 공격해 왔다. (이 자들의 수법은 음침독랄한 것이 중원의 무예와는 판이하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복면인들의 수법은 지극히 괴이하면 서도 악랄했다. 조중은 손발이 절로 어지러워졌다. 생전 처음 대하는 수법에 당황한 그는 어느 새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낭아곤에 해연히 놀라며 유연출소(柔燕出巢)의 신법으로 재빨리 피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조중의 일갈에 복면인들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우리가 누군지는 알 필요없다. 다만 당신은 죽어 주면 돼!} 조중은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이런 죽일 놈들.....} 조중은 노성을 지르며 벼락같이 쌍수를 회전시켰다. 그의 성명절 기인 제풍장(除風掌)중 풍뢰돌기(風雷突起)의 절초가 펼쳐진 것이 다. {아____악!} 흑의복면인 한 명이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졌다. 그러자 또 한 명은 당황한 듯 귀두도를 휘두르며 뒤로 주춤 물 러섰다. 싸움은 치열했다. 장차수는 흡사 사자처럼 망연히 좌우충돌 하는데 두명의 복면인 을 상대로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제일 위험한 상대는 팽노대였다. 그는 비록 한때는 살수행을 하 면서 수많은 격전 속을 헤쳐나온 백전노장이었지만 세 명의 복면 인에 의해 몰리고 있었다. 이때, {크_____흑!} 팽도대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는데 팔뚝이 잘려져 분수 같은 선혈이 쏟아졌다. 그가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순간, 한 명의 복면인이 신속하게 검 으로 그의 심장에 구멍을 뚫었다. 조중이 급히 달려왔지만 팽노대는 그대로 쓰러졌다. 칠십 평생 숱한 악전고투를 헤치고 살아남았던 이 늙은 자객은 난전 중에 이 름모를 상대에게 허망하게 최후를 마친 것이다. {죽어랏!} 팽노대의 죽음을 본 조중은 분노성을 외치며 제풍장을 벼락같이 발출했다. {크_______ 악!}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머리가 바수어져 그대로 즉사했다. 한편, 서쪽으로부터 금룡장을 공격한 연주백과 흑건추혼대 이십 인들은 순식간에 경비무사를 헤치우고 안채로 뛰어들었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금룡장의 안채는 어 둠에 잠긴 채 쥐죽은 듯 조용했다. [크악!] [컥!] 두 명의 흑건추혼대 무사가 안채의 대청으로 뛰어든 직후, 처절 한 비명을 지르며 도로 튕겨나왔다. 두 명의 무사는 땅에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죽었는데, 한 명은 가 슴이 완전히 파열되었고 또 하나는 얼굴이 으스러져 있었다. 헌데 그들의 상처에서는 전혀 피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대신 푸 르스름한 손바닥 자욱이 상처에 깊숙히 새겨져 있엇다. {명옥장(冥玉掌)! 과연 마교(魔敎)와 관계가 있었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연주백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한눈 에 두 장한을 격살한 수법이 오래전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서장 나후마교의 수법임을 알아본 것이다. 이때 안채에서 갑자기 수십 개의 불빛에 의해 장내가 환히 밝아 졌다. 그와 동시 연주백이 어느 새 검을 뽑아들고 몸을 날렸다. {들어간다!} 말이 끝났을 때 이미 그의 몸은 대청 안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엽곡 등 흑건추혼대 무사들이 화살처럼 뒤를 따랐다. 연주백이 대청에 들어왔을 때, 갑자기 한 명의 복면인이 튀어나 오며 벼락같이 쌍장을 뻗었다. {흥! 명옥장이군.}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검집만으로 장풍을 간단히 막았 다. 그리고 좌수로 느릿하면서 비쾌하게 복면인의 가슴을 후려갈겼 다. {펑_____!}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복면인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우욱!} 복면인은 가슴이 파열되는 통증과 함께 눈앞이 캄캄했다. 찌이익____ 어느 새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연주백이 복면을 낚아챘다. 나이는 오 가량이나 될까? 염소수염을 길렀는데 극히 잔인해 보이는 인상 이었다. 연주백의 장력에 의해 가슴이 으스러진 그는 입에서 분수 같은 선혈을 뿌렸다. {네놈은 마교의 인물이냐?} 연주백이 싸늘히 물었다.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연주백을 쳐다보 며 경악성을 흘렸다. {당... 당신은 신검황.... 당신이... 직접 오다니....} 그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꺾었다. {이 자는 중간급 인물인 것 같은데...} 차차차창! 이때 요란한 금속음이 터졌다. 연주백은 급히 안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따라 흑건추혼대도 노 도처럼 움직였다. 대청을 벗어나자 잘 꾸며진 후원이 나타났다. 후원에 자리한 인공연못의 정자 옆에서는 감찰전주인 막대승이 몇명의 복면인에 둘러싸여 혈전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자에는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복면인이 혈전을 지켜 보고 있었다. 노인은 바로 금룡장의 주인인 전육당이었다. {멈추어라!} 연주백이 노성을 지르자 장내가 찌르릉 울렸다. 순간 혈전을 벌 이던 사람들은 고막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에 자신들도 모르게 싸 움을 멈추었다. 막대승은 연주백을 보자 급히 몸을 날려왔다. 헌데 전육당은 연주백의 출현에 두 눈을 부릅뜨고 전신을 부르 르 떨었다. 그의 눈에는 원한과 증오, 그리고 공포의 빛이 뒤엉켜 있었다. (연주백! 네놈이 직접 쳐들어오다니!) 전육당은 치밀어 오르는 원한에 이를 악물었다. 그는 신검황 연 주백과는 풀지 못한 철천지한이 있는 것이다. 연주백의 어깨가 흔들리자 문득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땅 위를 스치며 정자 앞에 멈추어 섰다. {당신이 금룡장의 장주요?} 연주백이 물었다. 전육당은 최대한 자신을 억눌렀다. (전육당아 전육당아! 참아야 한다. 원한이란 언제라도 갚을 수 있는 것!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소. 내가 이곳의 주인이요. 당신들이 누군데 함부로 나의 집에 와서 살상을 벌이시오?} 연주백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 자의 눈빛으로 보아 나를 알고 있다.) 재빨리 생각을 하면서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연주백이라는 사람이오.} [신검황 연주백!] 그러자 전육당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연주백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금룡장주라는 이 자가 자신을 알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하 무림맹의 연대협께서 저희 집에 왕림한 것을 몰랐소이다.} 내심의 격동을 누른 전육당은 장읍을 취하며 연주백에게 인사를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후후! 왕년의 전륜교(轉輪敎) 막하 통사단주(通師團主)께서 언제 부터 상인으로 변했는지 모르겠군.} 한줄기 냉랭하면서도 스산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전육당을 비롯한 중인들은 놀란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수백 년은 됨직한 느릅나무의 가지에 앉아 있 는 천갈 냉유도였다. 그는 중인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민첩하게 내려섰다. 냉유도는 태연한 얼굴로 연주백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연대공!} 연주백은 그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힐끗 그를 쳐다본 후 말없이 전육당을 주시했다. 그의 가슴 속에 일었던 의혹을 천갈 냉유도가 확연히 해소시켜주었던 것이다. 전육당은 냉유도가 나타날 때부터 그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 져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전육당이 싸늘히 묻자 냉유도는 실소를 지었다. {저는 냉유도라는 사람입니다, 전단주!} 그는 말할 때 단주라는 부분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전육당의 얼굴은 불그락 푸르락 거렸다. {네놈이 무슨 이유로 노부를 전륜교의 통사단주이니 뭐니 한단 말이냐?} 냉유도는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훔에서 하나의 지편을 꺼냈다. {이것은 내가 조금 전에 지하밀실에서 찾아낸 것인데 연대공께 서 한 번 보시겠읍니까?} 연주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편은 매우 오래되어 삭아 있었지만 쓰여진 글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어느 여인이 전육당에게 보낸 연서(戀書)였는데 이 내 용에서 그가 삼십 년 전 사라진 전륜교의 통사단주 모용청(慕容淸)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용청, 아니 지금의 전육당은 저 삼십년전 천하를 광란의 도가 니로 몰아넣었던 전륜교(轉輪敎)의 제이인자였으며 교주인 전륜천 존(轉輪天尊) 모용황(慕容皇)의 친동생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십오년전 전륜교가 무림맹에 멸망당할 때 그와 전륜천존 모용 황의 아내의 시신만이 끝내 발견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난전(亂戰)중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이 훼 손되었을 것으로 믿어졌던 전륜교의 제이인자 모용청이 지금 버젓 이 살아서 나타난 것이다. (실수로다. 저것은 나의 아내의 편지다. 처녀시절 나에게 준 편지 로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육당은 후회를 했으나 무릇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 다. 상대의 신분을 확인한 연주백은 담담히 말했다. {전단주! 이십 오 년만에 만나는구료.} 전육당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한동안 미친 듯이 대소를 터뜨리던 전육당은 갑자기 뚝 멈추었 다. {연주백, 정확히 이십 삼 년 오 개월만이다.} 전육당은 굳은 어투로 말했다. {나의 아내를 죽이고 형님까지 죽인 네놈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연주백은 침울히 말했다. {당신의 형인 전륜천존(轉輪天尊)은 죽어 마땅한 자였고, 당신의 아내는 당시의 상황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닥쳐라! 나의 아내는 무공도 모르는 착한 여자였어. 그런데 네 놈이 무참히 죽였단 말이야.} 처절히 말하는 전육당의 두 눈에서 원한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어차피 네놈과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겠지.} 이를 갈면서 전육당은 품 속에서 핏빛을 띠운 만자탈(卍字奪)을 꺼냈다. {모조리 죽여랏!} 전육당은 싸늘히 외치며 벼락같이 연주백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장내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전육당이 휘두르는 만자탈(卍字奪)의 위력은 가공스러울 정도였 다. 피빛의 만자탈이 닿기도 전에 강력한 경풍이 먼저 산을 허물 듯이 밀려왔다. 연주백의 옷자락이 무섭게 휘날렸다. 허나 연주백은 고요한 눈빛 으로 만자탈을 응시하며 미동이 없었다. 만자탈이 그의 미간을 쪼개듯이 들이닥쳤다. 그 순간 연주백은 신형을 뒤로 활처럼 굽히면서 검을 잡고 있던 우수를 떨쳤다. 스르릉____ 검이 검집을 벗어나면서 한 가닥 서릿발 같은 검광을 뿌렸다. 카캉____ 캉! 만자탈과 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을 튕겼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재빨리 물러섰다 싶자 다시 벼락같이 뒹어켰다. 만자탈이 혈광을 뿌리면 그 뒤를 이어 시퍼런 검광이 푹죽터지 듯 어둠을 밝혔다. 용호상박! 두 사람의 결전은 너무나 치열해서 주위에서 혈전을 치르던 중 인들은 급급히 물러났다. 전육당의 만자탈 수법은 사이하면서도 기묘했고, 연주백의 신검 팔초(神劍八招)는 정묘하면서도 패도적이었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혈전은 압도적으로 무림맹이 우세했다. 뒤에 참전한 흑의복면인들의 수법이 괴이막측하긴 했지만 막대승, 엽곡, 그리고 냉유도의 무예는 초결정고수의 수준이다. 거기다가, 수적으로도 중과부적인 흑의복면인들이 아닌가? {으_____ 아_____ 악!} {캐_____ 액!} 그때에도 두 명의 목이 날았다. 처절한 비명은 쉴 새없이 이어졌다. 또한명이 옆구리에서 선혈을 뿌리며 쓰러졌고 특히 냉유도의 검 이 스치는 곳에는 어김없이 피가 튀었다. 아비규환, 장내는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화려한 내실, 한폭의 그림처럼 앉아 창 밖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는 여인이 있 었다. 그녀는 이 세상의 미(美)란 미는 한 몸에 갖춘 듯한 아름다 움 미녀였다. 일신에는 단순한 백의을 입었는데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화려한 꽃보다도 오히려 더욱 미려하면서도 고귀한 기품이 어울려 미를 더해 주고 있었다. 적용화련(狄容華蓮)-! 그녀는 바로 황폐한 사당묘에서 담사에게 겁탈당한 복면여인이 었다. 그녀의 차고도 서늘한 눈빛은 한없는 절망과 아련한 슬픔이 담 겨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늘이었다. 이 며칠간, 그녀는 한없는 고뇌와 절망, 그리고 증오에 시달려왔 다. 아니 하루하루가 그녀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뜰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들도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너는 별 수 없는 여자였어! 너도 별 수 없는 여자였어! 조소어린 미소로 말하던 담사의 모습과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적용화련의 눈에서 뜨거운 이슬이 흘러내렸다. 피라도 낼 듯 입 술을 꼬옥 깨무는 그녀의 얼굴은 희다못해 회백색으로 변했다. {화련!}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들어온 것은 모용천위였다.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안았다. {화련, 밤새 한잠도 자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눈을 붙이도록 해 라.} 문득 적용화련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벌떡 일어선다. {나는 괜찮아요.} 힘없이 말하며 모용천위의 품에서 빠져나와 창가에 기대어섰다. 모용천위는 적용화련을 감싸안았던 두 손을 천천히 내리며 나직 이 한숨을 쉬었다. {화련, 우리는 곡으로 돌아가면 곧 혼례를 올리게 될 것이다. 나 는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다.} {...} 적용화련의 눈빛이 일순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막연한 시선으로 창 밖의 먼 하늘을 그저 마냥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문득, 모용천위의 얼굴에 쓰디쓴 고소가 어렸다. {화련, 너의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네가 나를 원치 않는다 는 것도.....} 그는 시선을 천정으로 향했다. 그의 두 눈은 가득 고뇌의 빛이 서려 있었다. 적용화련이 무슨 말을 할 듯 꿈틀했지만 눈물만 흘릴 듯 말이 없었다. {나는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너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지. 허나 너 는 그때 이미.....} {그만해요, 오빠!} 갑자기 적용화련이 소리치며 울먹였다. {흑흑..... 제발 저를 혼자 있게 해주세요.} 모용천위는 굳어진 눈빛으로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흘렸다. {휴...!} 그의 강인한 얼굴은 납덩어리처럼 창백해졌다. (천위야, 천위야! 너는 사내대장부가 아니야. 무엇을 주저하는 것 이냐? 그녀는 지금 상처입은 가련한 사슴, 너만이 그녀를 다시 행 복하게 해줄 수 있어.) 모용천위는 내부에서 질타하는 소리에 전신을 떨었다.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순간 적용화련은 흠칫했으나 조금 전처럼 몸을 피하지는 않았다. 모용천위 가슴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흡사 어린 아이가 죄지 은 것처럼, 그는 떨린 손으로 적용화련의 육감적인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애무했다. 그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적용화련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자신이 이미 이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그 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어 루만져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이래선 안되어요 천위오빠! 난 오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더 러운 몸이에요!) 자신의 풍만한 둔부를 더듬는 모용천위의 뜨거운 손길을 느끼며 적용화련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차마 모용천위의 손 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모묭천위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느껴지고 그의 손길이 그녀 의 옷깃을 파고 들었다. 모용천위의 손이 맨살에 닿자 적용화련은 벌건 숯덩이에 닿기라도 한 듯 움찔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쾅쾅쾅! 갑자기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받은 모용천위는 노성을 질렀다. 그러자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상(武相)어른! 큰일났읍니다. 지금 금룡장이 공격을 받고 있읍 니다.} 순간 모용천위는 벼락처럼 튀어나갔다. 아비규환의 금룡장, 연이어 터지는 단말마의 비명은 밤의 정적을 산산이 깨어부수고 있었다. 쐐애액! 그 금룡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오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인영은 흡사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빨랐다. 실로 불가사의한 신법을 펼치며 날아오는 그는 바로 모용천위였 다. 지금 그의 얼굴에는 가득 초조한 빛과 두 눈에 시퍼런 광채가 귀화(鬼火)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숙부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지금 가고 있습니다.} 모용천위는 이를 악물며 신형을 날렸다. 헌데 그의 신형이 금룡장의 외곽에 도착했을 때였다. {멈추어라!} 사나운 외침과 함께 십여 명의 무사들이 어둠 속에서 뛰쳐나오 며 그를 가로 막았다. 순간 그들이 걸친 복장으로 그들이 바로 무림맹 소 속의 고수들 임을 알아차린 모용천위는 사나운 노성을 터뜨렸다. {비켜라!} 말과 동시에 그의 쌍수가 앞으로 쭉 뻗었다. {으_____ 악!} {크아악_____!} 퍼펑!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졌다. 모용천위의 쌍수가 스치는 곳에는 아무것도 거칠 게 없었다. 검을 막으며 그대로 바수고 대감도로 막 았지만 그것마저 산산히 부서지면서 무사들은 쓰러져갔다. 순식간에 십 명의 무사가 쓰러지고, 모용천위의 신형은 섬전같이 장원 안으로 쏘아갔다. 부근에 있던 무사들이 그를 발견하고 고함을 질렀다. {적이다. 저 자를 막아라.} 무림맹의 고수들이 급히 달려왔으나 이미 모용천위의 신형은 유 성처럼 한달음에 장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장원 곳곳에 쓰러져 있는 경비무사와 흑의복면인들을 발견한 모 용천위는 터질 듯한 분노에 장소성을 질렀다. {우_____} 용이 울부짖는 듯한 장소성은 지축을 뒤흔들고 항주성 전체로 퍼져나갔다. 갑자기 다섯 명의 흑의무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바로 무림매의 최강 고수들인 흑건추혼대 소 속의 고수들이었다. 가로 막는 자들을 본 모용천위의 두 눈에 살광(殺光)이 번뜩였 다. {죽어랏!} 그의 쌍수가 시퍼런 인광에 덮인 채 벼락같이 펼쳐졌다. {조심해라. 고수다!} 한 명의 무사가 고함을 지르며 비쾌하게 장도를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다른 네명의 무사들도 사면으로 빠르게 공격해 왔다. 카캉____ 캉! 장과 검이 부딪치면서 검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 파편들은 통기 듯이 몸 속을 파고 들었다. {크_____ 아악!} 그것을 시작으로 오 인의 무사들은 마치 썩은 짚단처럼 고꾸라 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상상도 못한 가공할 무위였다. 흑건추혼대 소 속의 무사들이 어떤 인물들인가? 일당백의 무공을 소유한 강호무림 최 강의 조직이 안니가? 헌데 둘만 모여도 어떤 고수도 막을 수 있다고 알려진 흑건추혼 대 소속의 고수들이 다섯명이 나섰음에도 제대로 상대도 못하고 참살당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동표들을 도우려 달려온 무림맹의 무사들은 경악과 불신의 눈빛으로 모용천위를 쳐다 보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삼십대의 무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허나 모용천위는 살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말없이 이들을 노려보 았다. (무예가 보통이 아니다 했는데 역시 이들은 흑건추혼대이다. 그 렇다면.....)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그는 이를 갈았다. {금룡장주는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그 직후 한 명의 무사가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 자는 우리의 적이다. 죽여라!} 모용천위는 검이 날아오자 슬쩍 어깨를 흔들며 금나수법으로 목 줄기를 움켜잡았다. 무사는 급히 피하려고 했으나 너무도 빠른 수법에 피하지 못하 고 목줄기가 잡혀 숨이 꽉 막혔다. {말해라. 금룡장주께서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때였다. 스악! 한 줄기 섬뜻한 도광이 벼락같이 그의 어깨를 자를 듯이 날아왔 다. 모용천위는 흠칫 놀라며 자신의 손에 잡힌 무사를 그대로 도광 에 부딪쳐갔다. 순간 도를 날린 인물은 급히 도를 꺾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으_____ 악!} 날아든 도는 무기대신 휘둘러진 무사의 가슴으로 무자비하게 파 고들었다. {이런 악랄한 놈!} 놀라듯이 외치는 사람은 비명을 듣고 달려온 장차수였다. 그때 장내에는 학만궁, 사공표, 막대승등이 달려왔다. 장차수가 살기를 띠우며 도를 휘두르자 막대승이 손을 저으며 그를 막았다. {나는 막대승이라는 사람이네. 젊은이는 누군가?} 모용천위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천쾌수(震天快手) 막대승이라면 무림맹의 감찰전주! 이 자까 지 왔다면 이미 숙부님은...) 돌연, 모용천위의 눈빛이 음산해졌다. {훗훗..... 무림맹의 개들!} 막대승을 위시한 중인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젊은이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군!} 모용천위는 그 말에 대답도 않고 음산하게 웃었다. 그의 두 눈은 마치 어둠의 공간에서 솟아나오는 빛처럼 스산한 광채를 띠었다. {흐흐흐 오늘 금룡장에 들어온 무림맹의 개들은 한 놈도 살려두 지 않겠다.} 이때, 장차수가 버럭 노성을 질렀다. {미친 새끼!} 번_____ 쩍! 평소 자랑하던 그의 천광도법(天光刀法)이 불을 뿜듯 비쾌하게 모용천위를 배어갔다. 그때 모용천위의 눈빛에 섬뜩한 살광이 피어올랐다. 다음 순간 그의 우수가 허리춤에 닿는자 싶자, 문득 한줄기 핏빛 광채가 전광(電光)처럼 어둠을 갈랐다. 카_____ 캉! [크아아악!]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는 순간 동시에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장차수의 보도가 반동강이 나면서 핏빛의 광채는 그대로 그의 육신도 갈라버렸다. 어깨에서 반대편 허리까지 그대로 갈라진 장차수의 시신은 땅바 닥에 무참히 두 조각이 되어 나뒹굴었다. 역겨운 선혈이 장내에 확 퍼졌다. 단 일초 뿐이었다! 무림맹 감찰전의 삼대고수의 일인이었고 숱한 사파의 거마대효들을 거꾸러뜨렸던 장차수가 모용천위의 단 일초 를 받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저럴수가.....!} 막대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피를 나눈 친혈육보다 더 가까운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목 도한 사공표가 미친 듯이 노호를 지르며 모용천위를 공격했다. {장당주를 죽이다니! 죽어랏.} 철비단수(鐵臂斷手)-! 무쇠처럼 변한 그의 쌍수는 그대로 벼락같이 모용천위 가슴과 머리를 향해 후려갈겼다. {안돼! 사공당주 물러서게.} 막대승이 다급히 외치며 사공표를 막았다. 그러나 막대승의 선형이 닿기 전에 다시 한줄기 전율스런 핏빛 광채가 현란한 빛을 뿌리며 사공표를 쓸어버렸다. 사공표는 그 강렬한 핏빛광채가 눈앞을 가리자 흠칫 놀라며 쌍 수를 들었다. 사______ 삭! 사공표의 철비단수는 금석도 부순다는 절정무공, 그러나 핏빛광 채가 스치자 그의 쌍수는 무우처럼 싹둑 잘리고 그의 목마저 그대 로 잘라버렸다. {크_____ 악!} 혼백이 육신을 떠나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사공표의 시신도 둘로 분리되어 처참히 뒹굴었다. {그것은..... 첩혈마황검( 血魔皇劍)!} 심음하는 막대승의 눈빛은 무섭게 떨렸다. [첩....첩혈마황검이라고!] [마...마교의 삼대신물중 하나인....!] 중인들은 경악어린 눈으로 모용천위의 오른수에 들린 핏빛 광채 를 띠는 검을 보았다. 모용천위의 허리띠 속에 숨겨져 있던 석 자 두 치의 연검(軟劍)! 검날은 종이짝 같이 얇은데 흡사 핏물에 담갓다가 꺼내기라도 한 듯이 시뻘건 색을 지녔다. 웅! 웅! 지금 이순간 공포스런 진동을 발하는 그 피빛의 검신에서는 소 름을 오싹 돋게하는 혈광(血光)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악령같은 피빛의 광망을 피워올리는 그 혈검의 검신에는 그러나 벌써 두명의 몸을 베었음에도 한 점의 핏물도 묻어 있지 않았다. -첩혈마황검( 血魔皇劍) 그렇다! 한 번 검집을 빠져나오면 반드시 피를 마셔야 다시 들어 간다는 마교의 수호마검(守護魔劍) 첩혈마황검이 실로 백년만에 세 상에 그 모습을 들어낸 것이다. {젊은이는.... 마교(魔敎)의 제자인가?} 한눈에 모용천위의 수중에 들린 첩혈마황검을 알아본 막대승의 경악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던 무림맹 감찰 전주인 그의 음성도 지금 이 순간만은 공포와 경악으로 떨리고 있 었다. 막대승의 물음에 모용천위는 음침하게 말했다. {진천쾌수 막대승! 당신은 알 자격 없소. 무림맹의 인물들이라면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것만 알면 되오!} 다음 순간 첩혈마황검의 끝이 약간 움직였다. 그리고 언 듯 피빛 의 검신 끝에서 벼락의 흔적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피...피해랏!] 무언가 깨달은 막대승이 비명같은 외침을 발하며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늦....었다!] 그 순간 모용천위가 악귀같이 사납게 외치며 일학충천(一鶴沖天) 의 신법으로 허공에 치솟아 오르며 첩혈마황검을 뻗어내었다. 파츠츠_______ 츠츳! 내뻗힌 첩혈마황검으로부터 수십 가닥의 핏빛 광채가 폭죽처럼 터지며 장내로 쏟아져 내렸다. {아_____ 악!} {캐_____ 액!} {크아아아악!{ 연속적으로 비명과 함께 십여명의 흑건추혼대 무사가 피보라 속 에 나뒹굴었다. 작렬하는 피빛의 섬광에 스치면 사람의 육신과 병 장기가 한꺼번에 무 토막처럼 잘려 나갔던 것이다. 막대승은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막아랏!} {으핫핫핫....} 모용천위의 입에서 광소가 일어났다. {이 하늘 아래 그 어떤 자가 나를 막는지 보겠다!} 버_____ 번_______ 쩍! 츠츠_______ 츳______ 츠! 핏빛 검기가 소용돌이치며 유성처럼 쏘아갔다. 그에 따라 처절한 비명이 계속 터져나왔다. 지옥의 아수라들이 호곡하듯... 비명, 비명, 비명.... 피가 튀고... 목이 나르고... 팔다리가 땅에 뒹굴었다. 핏빛 검기가 스치는 곳에 어김없이 비명이 터지고 피보라가 일어났다. 어른과 어린 아이의 싸움,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차라리 일방적 인 도살이었다. [으아아!] [멈춰!] 문창필 학만궁과 막대승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모용천위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학만궁은 채 오초도 되지 않아 복부가 베어져 오장을 쏟은 채 죽어버렸고, 막대승 역시 왼팔이 어깨부터 싹둑 베어져 피분수 가 쏟아졌다. 전율(戰慄)-! 백년만에 세상에 모습을 들어낸 첩혈마황검의 위력은 가공 전율 이란 말 외에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검신에서 내뻗히는 피 빛의 검기(劍氣)는 어떤 무기 어떤 수단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장내에 살아남은 것은 한팔이 잘린 막대승과 흑건추혼대 고수 삼 인(三人)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목숨도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첩혈마황검이 다 시 한 번 휘둘러지면 그들도 장차수나 학만궁처럼 불귀고혼이 되 고 말것이다. 헌데 바로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으아아아!] 갑자기 금룡장의 뒤쪽 숲속으로부터 누군가의 고통스런 노호성 이 터져나왔다. 막 막대승과 세명의 생존자에게 검을 휘두르려던 모용천위는 그 폭갈을 듣는 순간 안색이 홱 변했다. {숙부님이시다.} 쐐애액! 뇌리에 그같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의 신형은 이미 허공을 날 고 있었다. 갑자기 모용천위가 사라져 버리자 살아남은 막대승과 삼 인은 넋을 잃었다. {오오... 오... 인간도 아니다.} {그 자는..... 악마야... 악마....} 그들은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 하늘 아래.... 단연코 이런 교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뼈저 리게 느끼고 있었다. {마교의 저주(詛呪)... 첩혈마황검( 血魔皇劍)이 나타나다니...!.} 막대승의 처참한 얼굴로 망연자실하여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막대승의 무예는 일파 종사에 못지 않은 수 준이다. 그런데 그는 십초도 되지 않아 한 팔이 잘렸으니..... 사실 막대승은 모용천위가 사용한 초식조차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둠이 깔린 울창한 숲속! 두 명의 흑의복면인과 금룡장주 전육당이 천갈 냉유도, 염황도 엽곡, 그리고 심검황 연주백과 어울려 치열한 격전을 벌리고 있었 다. 격전장의 주위에는 흑건추혼대의 무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이곳은 금룡장과 이리(二里) 정도 떨어진 한적한 숲속인데, 금룡 장에서의 결전이 전육당의 도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두 명의 복면인과 싸우는 냉유도와 엽곡은 막상막하였다. 역시 제일 격열한 싸움은 전육당과 연주백의 싸움이었다. 전육당의 무공은 만자탈을 이용한 마교의 수법으로 비록 그 기 세가 궤이정박했지만, 역시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신검황 연주백 의 성명절학인 신검팔초(神劍八招)에는 한 단계 낮은 것이었다. [크악!] 문득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냉유도의 신랄한 손길에 피분수를 토하며 비명을 토했다. {크흑.... 노천강조(怒天剛爪)!} 비명을 토하며 꺼구러지는 그의 가슴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뚫 려 핏물이 분수처럼 흘러나왔다. 어떤 호신강기라도 뚫어버린다는 이 신랄한 조법(爪法)은 청해존자(靑海尊者)의 독문절기였다. 연주백과 팽팽히 맞서던 전육당은 수하인 흑의복면인이 죽어가 며 내지른 비명에 일순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치명 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무릇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 조금의 방심도 승패에 직결되는 것이다. 특히 그들 같은 초절정고수에 있어서 두말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쉬잇! 연주백의 신검은 전육당의 이목이 잠깐 분산되는 그 찰라의 틈 을 놓치지 않고 섬전같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신검뇌우(神劍雷雨)!} 정심한 내공이 깃들인 일갈과함께 연주백의 보검에서 수십 가닥 의 검기가 뇌전같이 일어나 어둠을 찢었다. 캉______ 카강! {으윽_______!} 요란한 금속음과 동시에 고통에 찬 신음성이 들렸다. 주춤주춤 물러서는 전육당의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길게 베어져 뜨거운 선혈 이 스며나왔다. 퍽_____ 동시에 만자탈이 땅에 떨어져 반이나 땅 속에 막혔다. 마침내 격 렬했던 이 일전은 전육당의 패배로 끝난 것이다. 연주백은 삽시에 하체가 피로 물들어가는 전육당을 보면서 태연 한 표정으로 검을 늘어뜨렸다. 다시 일검을 가한다면 전육당의 혼 백은 구천으로 사라지겠지만 연주백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공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전육당은 이미 연주백 자신의 무형검기에 오장육부가 토막나고 여러곳의 사혈이 끊어진 상태였다. 이제 대라신선이 온다해도 그를 살리기는 어려울 것이 다. {네 놈을... 죽이기 위하여 수십 년 동안을 고련해 왔는데 또 패 하다니!} 쩍 갈라진 상구를 통해 선혈과 함께 꾸역꾸역 흘러나오려는 내 장을 밀어넣으며 전육당은 일그러진 얼굴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연주백! 비록 내가..... 죽더라도.... 결코 네놈도 그리 오래 살지 는 못할 것이다.} 전육당의 그 말에 언 듯 연주백의 눈가로 침울한 빛이 스쳐갓다. {모용청! 마교(魔敎)가 다시 부활했다는 것인가?} 전육당이 묻자 모용청, 즉 금룡장주 전육당은 득의에 찬 표정이 되었다. {크크! 물론이다 연주백! 마교는 곧 중원을 피로 물들인다. 곧 혈 풍(血風)이 불어온단 말이다.} [그렇게 너희들 뜻대로는 되지 않은 것이다!] 연주백은 고개를 설레 저으며 말했다. [무림맹은 지난 이십오년간 끝없이 힘을 길러왔다. 이제는 그 어 떤 세력이 준동한다고 해도...!] 갑자기 연주백은 말문을 닫았다. 흘깃 옆을 바라보는 연주백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아주 미세한, 그래서 연주백 정도의 고 수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파공성이 그의 예민한 귀에 느껴진 때 문이다. {절세고수다. 오십 장..... 이십 장.... 정말 빠르군.} 그는 더 이상 모용청은 보지 않고 좌측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의 독백에 천갈 냉유도등도 급히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 직후였다. [숙부님!] 돌연 비통한 목소리가 장내로 울렸다. 쐐애애액! 동시에 한 줄기 인영이 빛살처럼 장내로 날아내려 전육당을 부 축했다. 장내의 중인들은 일제히 놀라운 눈빛이 되었다. 신검황 연주백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 인영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몰랐기 때문 이다. 퍼펑! 그때 전육당 측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흑의복면인이 자신과 맞 서 싸우던 염황도 엽곡에게 맹렬히 장풍을 뻗어 물러나게 한 뒤 급히 전육당쪽으로 날아갔다. {무상(無相)께 인사드립니다.} 흑의복면인은 착지하자마자 급히 나타난 인물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나타난 인영은 바로 전신에 피로 물들인 모용천위였다. 모용천위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복면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전육 당의 상세를 살폈다. {숙부님, 괜찮읍니까?} 황망히 묻는 모용천위의 눈빛은 무섭게 떨렸다. 옆구리가 쩍 갈 라진 전육당의 상처로 보아 극히 중상 아닌가? {천.... 천위야! 네가 왔구나.} 안색이 밀납같이 창백해진 전육당의 목소리에 가득 반가움이 서 려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육당의 눈에서는 생기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었다. 한눈에 정육당이 회생하기 어려운 중상을 입었음을 알아본 모용천 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여기에 있는 놈들은 모조리 죽이고 말겠읍니다.} 그는 분노에 차 흑의복면인에게 전육당을 맡기고 중인들을 향해 홱 몸을 돌렸다. 그의 몸에서 폭풍같이 일어나는 살기는 일순 장내 를 싸늘하게 얼려버렸다. 이미 한번 모용천위의 신위를 본 적이 있는 냉유도는 물론 평생 두려움이란 몰랐던 염황도 엽곡조차도 부지불식간에 부르르 몸을 떨며 물러설 정도였다. [천위야! 지금은 안된다.] 하지만 흑의복면인에게 부축되어있던 전육당이 급히 그를 말렸 다. [숙부님...!] [어서....어서 나를 장으로 데려가다오!] 돌아보는 모용천위에게 전육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모용천위는 일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복수를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전육당의 상처가 너무 위중하다. 어쩌면 지 금이라도 응급처치를 하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생각을 굴린 모용천위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알겠읍니다, 숙부님.} 이어 그는 전육당을 자신의 등에 업었다. {내 오늘은 그냥 가지만 이 원한은 절대 잊지 않겠소. 그리고...!} 중인들을 향해 차갑게 외치던 모용천위 입술이 갑자기 굳어진 듯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신검황 연주백!} 모용천위는 경악성을 발했다. 그는 그제성야 장내에 무림맹의 삼 태상중 일인이고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검 신검황 연주백이 있 음을 발견한 것이다. <제2권 완> 제 24 장 魔敎의 復活 1 [그렇다! 그 자가 바로 신검황 연주백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모용천위의 등에 업힌 전육당이 침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모용천위는 무서운 눈빛으로 연주백을 노려보기만 할 뿐 바닥에 뿌리가 박히기라도 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 무릇 부모를 해친 원수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한다고 했다. 모용천위에게는 한시도 한세상에 공존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신검황 연주백은 바로 모용천위의 아버지를 해친 세명의 원수중 한명이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고 심장의 박동이 천둥소리처럼 커졌다. 이를 악문 모용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한걸음 신검황 연주백에게 로 다가섰다. [....!] 말없이 지켜보던 신검황 연주백의 짙은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이 청년의 몸에서 터져나와 자신을 휘감는 것 을 느낀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검! 그는 일점의 흔 들림도 없이 태산같이 버티어 서서 자신에게 다가서는 모용천위를 바라보았다. [천위야 제발....!] 일촉즉발인 그때 모용천위의 등에 업힌 전육당이 고통스런 음성 으로 신음했다. 순간 모용천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자신의 등에는 하늘 아래에서 가장 가까운 친인 중 한명이 죽어가고 있다. 복수에 눈이 멀어 그 친인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만(萬)노인! 갑시다!] 결심을 한 모용천위는 살아남은 흑의복면인에게 외치며 벼락같 이 몸을 허공에 띄웠다. 복면인도 급히 신형을 날려 그를 따라 날 아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젊은이가 너무 무례하군!} 쩌어엉! 연주백이 싸늘히 외치며 벼락같이 날아오르며 검을 뻗어내었다. 몸과 검이 한덩이가 되어 표적을 무찔러가는 신검합일(身劍合一) 의 최상승 검초가 시전된 것이다. 쐐애액! 차가운 한망에 덮인 연주백의 보검이 흡사 유성처럼 모용천위의 배후를 향해 무찔러갔다. {신검팔초(神劍八招)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허공을 날아오르던 모용천위는 차갑게 외치며 날아드는 연주백 의 신검을 향해서 우수를 벼락같이 내뻗었다. (미친 놈인가? 감히 맨 손으로 나의 검을 막으려 하다니....!) 연주백은 내심 흠칫하면서도 내뻗은 검에 가일층 진기를 주입시 켰다. 직후 금석을 흙베듯하는 연주백의 보검과 모용천위의 육장 (肉掌)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캉_____ 카캉! 헌데 연주백은 자신의 보검과 모용천위의 손바닥이 부딪히는 순 간 흡사 쇠덩어리를 친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손목이 찌르고 저 려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철렁했다. {천마산수(天魔散手)!} 경악서린 외침을 발하며 연주백은 급히 물러섰다. [오늘의 빚은 반드시 돌려받겠다!] 그 순간 이를 부득 가는 모용천위의 신형을 복면인과 함께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멈춰라!] [어딜...!] 주위에서 지켜보던 중인들이 폭갈을 터트리며 급히 모용천위를 추적하려고 신형을 날렸다. {그만 두어라!} 하지만 그때 연주백이 침중한 일갈로 그들을 막았다. 그러자 다 시 바닥에 내려선 염황도 엽곡등 흑건추혼대의 고수들은 의아한 눈으로 연주백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연주백은 아무런 말도 없이 암흑천공(暗黑天空)을 바라 보며 혼자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천마산수를 익힌 자가 세상에 나오다니....!} 그의 표정은 침중히 굳어갔다. 방금전 그의 신검합일 일초를 맨 손으로 받아낸 모용천위의 장법은 바로 마교(魔敎)의 전설적인 마 공 천마산수였던 것이다. * * * 석소구(石小丘)-! 개봉(開封)에서 서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동쪽에 위치한 이곳 은 황하(黃河)의 물줄기를 접한 구릉지대다. 이 석소구 아래의 강 변에는 번화한 선착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석착장에는 한 척의 범선이 상류로 출발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두두두_____ 두! 저녁무렵,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동시에 수 명의 인마가 관도를 달려 선착장을 향해 질주해 왔다. 모두 여섯 필의 준마에는 사남이녀(四男二女)가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먼 길을 달려온 듯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앞장 선 마상의 인물은 녹색(綠色)의 우아한 나삼(羅衫)을 걸친 젊은 여인으로 머리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챙이 넓은 죽립에 망 사를 둘러 쓰고 있었다. 그 비단 망사를 통해서 엿보이는 여인의 얼굴은 가히 천향국색 (天香國色)이라 할만한 빼어난 미모였다. 녹삼여인 옆의 말에도 역시 여인이 타고 있었는데 앞의 여인과 똑같은 죽립을 쓰고 있었다. 불이 타는 듯 새빨간 홍색(紅色) 경장 에 등에는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는 그녀의 청순한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왼쪽편에는 검은 색 장포를 입은 칠순 가량의 노인이 마상에서 내리고 있었다. 노인은 검은 빛이 감도는 얼굴, 탁하고 흐린 왼쪽 눈 아래에 두 가닥의 검상이 나 있어 음침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 뒤로 세 명의 황삼무사들은 일률적으로 장도를 차고 가슴에 는 뇌전(雷電) 모양의 문양이 세겨져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태양혈이 돌기하고 눈빛이 매서운 것이 내외공 을 익힌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 일행이 마상에서 일제히 내지라 배의 선주인듯한 오순 가 량의 중노미가 급히 나왔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뇌(雷)소저!} 그는 녹삼여인에게 황망히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선실에서 백(白)공자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제가 안내를 하겠읍 니다.} 앞장섰던 녹색(綠色) 나삼을 입은 여인이 말했다. {당(唐)공자도 왔나요?}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청아한 옥음은 어딘가 약간 차가움을 풍 겼다. {당공자께서도 어제 도착하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좋아요. 앞장 서세요.} 뇌(雷)씨 성의 녹삼여인은 오연하게 말하고는 도도한 걸음걸이 로 범선에 올라갔다. 잠시 후, 범선은 황하의 탁류를 가르며 서서히 출발했다. 범선은 강 위로 불어오는 북서풍(北西風)을 돛뒤로 받아 미끄러지듯 하류 로 흘러내려갔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오자 문득 서늘한 바람과 함께 가느다란 빗 줄기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가는 범선의 선상(船上) 으로 비바람이 들이닥치자 갑판에서는 선부(船夫)들만 급히 움직 일 뿐 범선을 탄 손님들은 대부분 선실에 들어가 틀어박혔다. 그런데 배의 후미에서 이남이녀(二男二女)가 가느다란 빗줄기를 맞으며 강변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인은 오늘 오후 무렵 배에 올랐던 녹삼여인과 홍색경 장의 두 미녀였다. 그리고 그녀들과 함께 서있는 두명의 사내는 둘다 이십 이삼 세 가량의 청년들로써 헌앙한 기도에 준수한 얼굴을 지닌 미장부들이 었다. 몸에 배인 자신감과 시원시원한 표정으로 보아 이들이 명문 의 자제들임을 알 수 있었다. {뇌(雷)소저! 비바람이 거세어질 듯한데 그만 들어가시는 게 좋 겠소이다.} 두 청년중 남의(襤衣)를 입은 청년이 녹색 나삼을 걸친 차가운 인상의 미녀에게 정중히 말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괜찮으니 두 분께서 먼저 들어가세요.} 녹의(錄衣)를 걸친 뇌씨성의 여인이 말하자 남의청년은 고소를 흘렸다. {하하 소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 수 없군요. 그럼 저는 이 만 실례하겠읍니다.} 그는 힐끗 홍의여인을 일별한 후 선실로 들어갔다. 그의 시선을 받은 홍의여인의 두볼이 살짝 홍조로 물들었다. 녹의여인은 두 남녀가 주고 받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녹의미녀는 문득 배의 한쪽에 시선을 멈추었다. 왼쪽의 뱃전에 기대어 흡사 장승처럼 서 있는 이십 세 중반의 청년이 그 녀의 시선을 잡아끈 장본인이었다. 그는 몸에 허름한 장삼을 걸쳤고 등 뒤에는 작은 봇짐을 지고 있는데 그의 전신에서 암울한 고독이 풍기고 있었다. 무기력한 표 정에 힘없는 눈동자를 진 그의 전신은 온통 빗물에 젖어 있었다. 녹삼여인은 그 허름한 사내의 몸에서 풍기는 고독과 우수에 자 신도 모르게 그를 유심히 주시했다. 그 청년에게서 어딘가 모르게 자신과 유사한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그때 녹의여인의 시선을 느껴서인지 청년의 시선이 느릿하게 여 인쪽으로 돌려졌다. 일순간 청년과 남의미녀의 시선이 스쳐지났다. 문득 남의미녀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극히 일순간이었으나 남의 미녀는 청년의 검은 동공에서 무언가 섬뜩한 불길함을 읽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기이한 전율감이 었다. 흡사 나약한 인간이 절대적인 힘 앞에 선 느낌이랄까? 그녀는 한동안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넋을 읽고 서있었다. 허 름한 청년의 시선은 이미 다시 누런 강물쪽으로 던져져 있었다. {뇌소저!} 녹의여인은 문득 옆에서 들린 낭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 었다. 그녀를 부른 것은 일행인 백의(白衣)의 청년이었다. 그는 녹삼여인이 한쪽에 선 허름한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 을 깨닫고는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저 사람을 아십니까?} {아.... 아니예요. 잠시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허 름한 청년의 신형은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 짧은 사이에 선실로 들어가버린 모양이었다. 녹의여인은 왠지 모를 아쉬움에 앵두빛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다 시 강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빗물이 그녀의 옥용을 타고 흘러내렸다.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 에 옥으로 빚은 듯한 섬세한 이목구비, 입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 것이 고집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아름다왔다. 조금 큰키와 굴곡이 또렷한 몸매는 더욱 그녀의 미모를 더해 주 었다. -북천일미(北天一美) 뇌옥연(雷玉燕)! 이것이 녹삼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바로 서북(西北) 무림의 실질적인 맹주인 북천뇌보(北天 雷堡)의 보주(堡主) 뇌천도제(雷天刀帝) 뇌승(雷丞)의 무남독녀였 다. 무림맹의 소맹주인 범천대공 연대강과의 혼례를 목전에 두었다 가 그 연대강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졸지에 홀몸이 되어버린 비운 의 여인이었다. 물론 혼례를 치루지 않아 미망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약혼자였 던 연대강의 죽음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혼례식을 올리러 태산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그녀는 졸지에 시 아버지가 될 뻔한 신검황 연주백을 위로하러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와 동행한 홍의(紅衣) 여인의 이름은 홍나찰(紅羅刹) 필소청 (必素淸)으로 북천뇌보의 제이인자인 검군(劍君) 필대방(必大房)의 딸이다. 그리고 선실로 먼저 들어간 청년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소보 주인 당송(唐松)이고, 백(白)공자라고 불리운 청년은 용문검부(龍門 劍府)의 후계자인 백상천(白上天)이었다. 3 쏴______아! 밤새 비바람은 거세게 몰아닥쳤다. 그 때문에 황하의 물결이 파도치듯 일렁였고 범선은 상당히 심 하게 요동을 쳤다. 하지만 상당한 크기인 이 범선은 끄덕도 않고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쉬지 않고 달린 범선은 그 다음 날 황혼이 강변을 물들일 때 서 서히 제남(齊南)에 도착했다. 제남의 선착장에서 남으로 백여리만 내려가면 태산에 닿을 수 있다. 황하의 물줄기가 발해(渤海)로 빠지기 직전에 자리한 가장 큰 시진인 제남성의 선착장은 온갖 상선, 어선 등이 함께 몰려 왁자지 껄 소란스러웠다. 뇌옥연 일행이 탄 범선이 선착장의 기둥에 밧줄을 동여매자 기 다리기라도 한듯 한 대의 사두마차가 서서히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 사두마차는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운남에서 생산되는 오 목나무로 만든 것이 매우 단단해 보였다. 잠시 후 뇌옥연을 위시하여 그녀의 일행들이 배에서 내리자 두 명의 무사가 급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뇌소저! 마차에서 태상(太相) 어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를 향했다. 이윽고 뇌옥연이 마차 속으로 들어가자 합쳐진 중인들은 한 무 리로 되어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길모퉁이에선 봇짐을 맨 허름한 청년이 뇌옥 연을 태운 마차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마차는 분명 무림맹의 삼태상 중 한명인 태허천존(태虛天尊) 의 마차다. 그렇다면 어제 배에서 보았던 그 녹의 여인이 바로 범 천대공 연대강의 정혼녀였던 뇌옥연이란 말인가?) 청년의 무심해보이는 눈가로 언 듯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가에 일순 고소가 스쳤다. (휴우! 어떻게 되었든 나는 이제 강호를 떠날 몸!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그는 묵묵히 격음을 옮겼다. 그는 지금 모든 생각을 지워 버리고 오직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다. 지금 그가 만나러 가는 손씨모녀,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지금 그에게는 문제였다. 지금까지의 그의 행동 방식대로라면 이곳에서도 깨끗이 자신의 흔적을 지워야만 한다. 인정에 끌려 남긴 작은 흔적이 치명적인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 는 것이다. 손씨모녀를 해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해도 이대로 영원 히 그녀들의 주변에서 사라져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항주에서의 일을 무사히 마 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곳 제남으로 발길이 끌린 것이다. 그가 비록 비정한 자객이었으나 손씨모녀의 마음을 다한 헌신과 애정은 그의 마음에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마음만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현재 그의 수중에는 황금 만 오천 냥이란 거금이 있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자객 일을 하며 모아둔 돈도 이만냥에 가깝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어디서든 평생을 호화롭고 여유있게 살 수 있다. 이곳 제남에서 며칠을 보내며 손씨모녀의 문제를 매듭지은 뒤 멀리 천축이나 아니면 동해나 남해 등지로 가서 편안히 살 생각이 었다. 염두를 굴리던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의 두 눈에 손 부인이 경영하는 아담한 다점(茶店)과 자신을 향해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손아유의 귀여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손씨모녀는 석달만에 돌아온 그를 보자 반가움에 눈물부터 흘렸 다. 청년은 바로 손부인의 은인이며, 새로운 남편이기도 한 하복생 (河福生)이었다. 아니, 그는 하복생이면서도 비정의 자객 담사(潭邪)였다.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폭염도 한풀 기세가 꺽이기 시작했다. 항주 금룡장의 혈겁이 있은 지도 벌써 세 달이 지났다. 무림맹은 웬일인지 연대강을 암살한 자객을 찾기 위해 중원각지 로 내보냈던 수하들을 모두 총단인 태산(泰山)으로 회군시키고 침 묵을 지켰다. 꽝!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한 마디 소문이 호수에 돌이 떨어진 듯 조그만 파문이 점점 커졌다. -마교(魔敎)의 출현(出現)! 피와 공포의 대명사인 마교가 백여년만에 부활했다는 소문이 퍼 지기 시작하자 무림은 숨을 죽였다. 강호의 밥을 조금이라도 먹는 사람이라면 어찌 마교의 공포를 모르랴! 마교의 수호마병인 첩혈마황검( 血魔皇劍)과 천마산수(天魔散 手)가 항주에 나타나 무림맹 감찰전 소속의 숱한 고수들을 살상했 다는 소문은 단번에 대강남북에 퍼져나갔다. 홍무(洪武) 팔년(八年)의 늦여름은 그렇게 공포와 폭풍전야의 고 요함에 지나가고 있었다. 태행산(太行山) 천학봉(天鶴峯)-! 하북성(河北省)을 남북으로 가르는 이 거대한 험산준령의 주봉 인 천학봉의 중턱에는 폐허가 된 거대한 사원의 흔적이 풍진에 시 달리고 있었다. 깨어진 기왓장, 검게 그을린 석가래,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백 골, 이곳은 바로 이십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천하(天下)에 이름을 떨치던 전륜교(轉輪敎)의 본산이었다. 무림맹과의 치열한 격돌 이후 전륜교는 패망했다. 지금은 전륜혈사(轉輪血事)라고 불리우는 태행산의 결전은 전륜 교의 교주인 전륜천존(轉輪天尊) 모용황(慕容皇)이 우내삼기(宇內 三奇)에 의해 쓰러지는 것으로 칠 년 동안의 혈전이 끝이 난 것이 다. 사망자의 수 오만(五萬)이라는 전대미문의 참사를 내고 전륜교 의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윙이_____ 이잉! 산봉의 바람은 거세다. 때는 아직 늦여름이건만 높이가 무려 구 천척(九千尺)에 이르는 태행산의 아득한 산봉 위를 휩쓰는 산바람 에는 한 겨울의 삭풍과도 같은 한기가 배어있었다. 문득 이 강풍을 뚫고 기이한 행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핏빛교자(轎子:가마의 일종)였다. 앞 뒤 네명씩 모두 여덟명의 거한이 메는 화려한 이 교자의 양 옆으로는 이십여명의 건장한 대한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밀랍처럼 창백한 살겹에 스산함을 풍기고 있었다. 이윽고 움직이던 교자가 멈추었다. 그곳은 그 옛날 전륜교가 성세를 떨칠 때 한꺼번에 천 명을 수 용하던 대전(大殿)이 있던 자리였다. 허나 대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이미 불타 버리고 보기 흉하게 검게 그을린 기둥만이 그 옛날의 웅장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치리링! 문득 교자의 오색영롱한 구슬로 만들어진 주렴이 흔들리더니 한 명의 헌칠한 몸매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나이 오십여 세 가량으로 보이는 그 여인은 일신에 혈의(血衣) 를 입고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그녀의 표정에도 은은한 핏빛 노을이 서려 있었 다. 뿐만 아니라 이 중년여인은 괴이하게도 눈썹 또한 타는 듯이 붉은 적미(赤眉)였다. 아마도 그녀는 특이한 무공을 익혔고 그 때문에 안색과 눈썹에 혈광이 배어나오는 듯 했다. 허나 섬뜩한 안색과 눈썹 색과는 별개로 그녀의 얼굴은 인세에 보기 드문 미모였다. 너무나 아름다워 요기가 느껴질 만큼 빼어난 용모를 여인은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비록 오십대로 보이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보면 이십대 로 보이기도 하는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전신에 핏빛 일색인 그녀의 전신에 섬뜩하도록 사이함마저 풍겼 다. 혈의여인은 한동안 희의 어린 눈빛으로 폐허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처절한 원한과 감회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전륜교의 영령들이시어!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옵소서! 무림맹 삼태상의 목을 여러분의 영전에 바칠 것이옵니다!] 혈의여인은 합장을 하며 한서린 음성으로 축원을 올렸다. 4 윙이잉_____ 그때 마침 강한 산풍이 매섭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그 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혈잠(血簪:비녀)이 머리가 날림에 따라 드 러났다. 핏빛을 띠운 그 혈잠이 한 순간 햇빛을 받자 은은한 핏빛 광체를 띠었다. 바로 그때 돌연 어딘선가 누군가의 경악성이 나직이 들렸다. {혈마옥잠(血魔玉簪)-!} 한 순간 혈의여인의 눈빛이 핏빛으로 변했다. 순간 새하얀 섬섬옥수가 한쪽을 가리켰다. 치잇! 식지와 중지와 꼿꼿이 뻗치며 핏빛으로 변해간다 싶자 두 줄기 지풍이 경악성이 들린 곳으로 벼락같이 쏘아갔다. {혈마지(血魔指)로군!} 다시 들려온 그 나직한 목소리는 침중했다. 쐐애액! 그와 동시 허물어진 석벽에서 한 줄기 인영이 벼락같이 튀어나 와 산 아래로 날아갔다. {대붕전시(大鵬展翅)! 개방( 幇)의 무영신개(無影神 ) 동(董)늙 은이였군.} 혈의여인은 스산한 미소를 흘리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달 아나는 인물이 펼치는 신법만 보고도 상대의 신분을 알아본 것이 다. 그때 여인을 수행한 흑의인들이 그 인영을 추적하려고 하자 그 녀는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놔둬라! 너희들이 쫓아가서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 사이 의문의 인영은 어느 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실로 빠르기 이를데 없는 경신술이었다. 혈의여인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폐허로 시선을 돌 렸다. 바로 이때였다. 휙! 휙! 휙!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고 이내 삼 인(三人)이 내려섰다. {어머님께 인사드립니다.} {삼가 교주(敎主)님께 인사드립니다.} 세 사람은 한꺼번에 말하면서 절을 했다. 앞장 선 백색문사의를 입은 청년은 바로 일전 철혈무정 석무심 에게 문상(文相)이라고 불리우던 모용천엽(慕容天葉)이란 인물이었 다. 문상 모용천엽의 뒤에 선 두 명은 회색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한 사람은 사척단구의 키에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한 추물노인이 었고, 또 한 사람은 통통한 몸에 가느다란 눈과 매부리코, 그리고 허리에는 은사슬이 달린 낫모양의 삭(索)이 매여져 있었다. 두 명의 노인은 전신에서 기이한 마기(魔氣)를 물씬 풍기고 있 었다. {두 분 장로님은 오랜만에 뵙는군요.} 혈의여인은 두 노인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두 노인은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동안 오 년이 흘렀읍니다 교주(敎主)님! 그래도 이렇게 다시 뵈오니 우리 두 늙은이는 기쁘기 한량없읍니다.} 추물노인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노인에게서 교주라고 불린 혈의여인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저는 언제나 두 분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어요.} 두 노인은 그저 감격에 찬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혈의여인은 시선을 문상이란 준미한 청년에게로 돌렸다. {천엽(天葉)아! 너는 그 동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더구 나.} 혈의여인의 질책에 모용천엽의 준미한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하지만 금룡장의 일은 저로서는 의외의 일 이었읍니다.} [쓸모없는 놈 같으니...! 너는 언제나 변명만 할 셈이냐?]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왔다. 모용천엽은 그녀의 노화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전날 철혈무정 석 무심 앞에서 보였던 자신에 찬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저 꾸중받는 어린 아이처럼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 네 형 천위(天威)가 이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종적을 감 추고 화련(華蓮), 그 아이는 자살소동까지 벌인 일도 그냥 의외의 일이란 말이냐?} {그것은...!} {닥쳐라!} 모용천엽이 무어라 변명을 하려고 하자 혈의여인은 냉랭히 외쳤 다. {천위 그 놈이야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화련 그 아이는 태상노 조(太相老祖)께서 얼마나 아끼는 아이인데 그런 일을 당하게 하느 냐? 대체 일을 어떻게....!} 그녀는 말을 잊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한동안 노기띤 눈으로 모용천엽을 응시하던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지금 화련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모용천엽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그게....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곡(谷)에 머물고 있읍니 다.} {무슨 소리냐? 그 애가 또 자살을 시도하기라도 한 것이냐?} 어머니인 혈의여인의 말에 모용천엽은 황망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화련 누이도 그때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이후로는 포 기한 듯 합니다. 이번일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모용천엽은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듯이 우물거렸다. 그러자 듣고 있던 혈의여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너는 또 이 어미에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모용천엽의 안색이 싹 변했다. {아닙니다 어머님! 제가 무슨 거짓말을...} 그녀는 변명하듯 말하는 둘째 아들 모용천엽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를 대동한 추물노인에게 물었다. {사(史)노인! 어떻게 된 일이예요?} 불똥이 자신에게 튀자 추물노인은 흠칫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그것이.... 저...!] 사씨 성의 추물 노인도 대답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러자 혈의 여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마도 아들과 수하들의 태도에 몹시 분노한 듯 했다. {천엽아! 정말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장같이 차가왔다. (어머님이 진짜 노하셨구나. 하기야 어차피 곡으로 돌아가면 알 게 될 일.....) 모용천엽은 등골에 식은땀이 솟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친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그 자신은 모친을 존경하면서도 몹시 두려워 하고 있었다. 모용천엽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련매가 어젯밤.....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지금 찾고 있는 중입 니다.} 혈의여인은 일순 차디찬 눈으로 모용천위를 노려보았다. 모용천엽은 죄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 너무 염려마십시오. 곡의 전제자들을 풀었으니 곧 연락 이 있을 것입니다.} 철삭을 찬 노인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혈의여인은 문득 꺼질 듯한 탄식을 쏟았다. {휴... 이 일을 태상노조께서 아신다면....} 그녀는 생각하기도 싫은 듯이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렸다. {곡으로 가자.} 모용천엽은 황망히 말했다. {제가 앞장 서겠읍니다.} 그는 급히 교자에 달려가 주렴을 들었다. 혈의여인은 문득 교자로 들어가면서 한 마디 했다. {너는 그 동안 아부만 늘은 것 같구나.} 목소리는 냉랭했으나 그 속에는 흐뭇함이 담겨 있었다. 모용천엽은 말없이 히죽 웃었다. 칭찬받은 어린 아이처럼 그는 환히 웃었다. 第 二十五 章 刺客之路의 끝, 그러나... 1 내실(內室), 이곳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하면서도 소박함을 풍기는 여인의 규방이었다. [여...여보! 흐윽!] 지금 이 내실의 한쪽에 놓인 나무 침상 위에서는 한쌍의 남녀가 벌거벗은 나신으로 뒤엉켜 있었다. 흐드러진 풍만한 몸매의 중년여 인과 온몸이 근육으로 뭉쳐진 청년의 육신이 하나가 되어 열락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의 구리빛 동체가 힘차게 움직일 때마다 그 아래 깔린 중년 여인은 짐승 같은 신음성을 토했다. 일순 사내의 동체가 무섭게 빨라졌다. 악문 입술, 거칠게 뿜어지 는 숨결, 근육으로 뭉친 사내의 하체는 세차게 여인의 흐드러진 하 체를 압박해대었다. [하악!] 갑자기 격렬해진 사내의 행위에 여인은 두눈을 하얗게 치뜨며 숨가쁜 비음을 토해내었다. 자신의 깊은 균열을 그득 메운채 격렬 하게 출입하는 정인의 뭄가락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녀였 다. 그 격렬한 마찰에 몸의 열기가 급격히 뜨거워지고 여인은 자신 이 머금은 정인의 일부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팽창하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오색의 불꽃이 찬연하게 명멸했다. 여체의 동 굴은 뜨거운 꿀물을 흠신 토해내며 정인의 맥동하는 일부를 마구 휘감아 조여대었다. 그와함께 박속같이 희고 흐드러진 중년여인의 사지가 자신을 짓 누른 사내의 육체에 꽃뱀처럼 감겨들었다.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지다 못해 가닥 가닥 끊겨버리는 것같았다. 등골을 쩌르르 울리며 훑고 지나는 그 격렬한 쾌감의 질주에 여인 은 눈앞이 흐릿해졌다. 다시 한 번 여인은 정인의 사랑을 견디다 못해 아득한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져내렸다. 그와함께 여인은 비몽사몽간에 자신의 자궁 깊은 곳에서 터지는 뜨거운 폭류(瀑流)를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침내 자신의 육체로 정인을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여 인은 한없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아득했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흠신 땀에 젖은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아직도 희열의 여진이 남아있어서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십여살이나 차이가 나는 두 남녀는 그래서 한층 더 서로에게 잘 어울렸다. 손부인은 여자로서의 욕구가 가장 왕성한 삼십대 중반의 나이고, 반면 담사는 양기가 절정에 이른 이십대 중반의 나이다. 게다가 한없이 헌신적이고 착하며 또한 육감적인 관능을 지닌 손부인의 육체는 담사로 하여금 아무리 안아도 질리게 하는 법이 없었다. 오늘밤에만 해도 손부인은 담사의 절륜하면서도 집요한 욕정에 벌써 몇 번인가 혼절했었다. 쾌감을 견디다 못한 그녀의 몸은 온통 땀에 젖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그런 그녀의 넉넉한 육체를 역시 땀에 젖은 사내의 몸이 푸근하 게 끌어안고 있었다. 사내의 손은 여인의 큼직한 유실을 말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천정을 보는 그의 눈빛은 방금전 쾌락을 맛본 사내 답지 않게 우울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떠나야하는데...! 정(情) 따위를 남기면 우리 모두에게 불행해질 뿐인데....!) 사내의 입가로 소리없는 한숨이 흘렀다. 그것을 알리 없는 여인은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 쉬어 숨을 고 르더니 가만히 일어나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하는 사 내에게 흠뻑 사랑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포만감에 젖어 고혹한 미 소를 띄고 있었다. 사내는 바로 담사(潭邪)였고, 중년여인은 그의 정부(情夫)인 손 부인(孫婦人)이었다. 항주를 떠난 담사는 무림맹과 전륜교의 추적을 피해 멀리 사천 (四川) 지방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북상하여 장안(長安)으로 갔었 다. 장안에서 배를 타고 이곳 제남으로 돌아온 지 벌써 세달째, 그동 안 그는 달리 하는 일 없이 손부인을 도와 다점을 돌보기만 했다. 손부인과 그녀의 딸 손아유만 만나보고 그녀들이 자신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한 뒤에 영원히 중원에서 떠나버리려고 결 심했던 담사였다. 하지만 하루가 열흘이 되고 열흘이 석달이 되었다. 담사가 자신들 모녀를 영영 버리리려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이 없는 손씨모녀는 그의 귀향을 얼마나 기뻐하고 반가워하는지...! 담사는 자신을 친 아버지처럼 따르는 손아유와 그를 정말 남편 인 듯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손부인을 차마 매정하게 떨쳐버릴 수 가 없었다. 매일밤 이제는 얘기를 해야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뜨겁게 휘감겨 드는 손부인의 격정에 반응하다 보면 또 기회를 잃곤 하는 그였다. 무릇 자객을 업으로 삼는 자는 사람에 대해서 정(情)을 품으면 안된다. 오직 살상과 이용의 대상인 인간을 자신과 똑같이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여기게 되면 살인에 망설이게 되고 결행에 주저하게 되는 때문이다. 그 작은 망설임과 주저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지 누 구보다도 잘 아는 담사다. 하지만 범천대공 연대강을 암살 한 것으로 스스로 자객의 길에 서 떠났다고 믿은 탓인지 담사의 결단력은 예전만 못해져 있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아예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설령 돌아왔다고 해도 냉혹비정하게 손씨모녀를 살해하여 자신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이 이 착한 모녀와의 평범하나 아늑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닫고 쓴웃음을 짓곤 했다. 그가 지금껏 맛보지 못한 가족(家族)이란 존재가 그들 모녀에게 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떠나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직감(直感)은 그렇게 불길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무림맹의 총단에서 멀지 않은 이곳 제남은 결코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비록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나, 무림맹은 절 대 그를 찾기 전에는 추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살인을 청부했던 자들마저 그를 쫓고 있다. 이제 중원은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곳이다. 담사는 수삼 일 내 로 남해(南海)로 갈 것을 결심했다. 2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담사의 몸위에 올라탄 채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손부인이 상체를 일으키며 촉촉한 눈빛으로 연하(年下)의 남편을 응시했다. 무엇때문인지 그녀의 표정이 일순 부끄러움에 눈을 내리 깔았다. 눈앞에서 출렁이는, 오늘 따라 유달리 풍만하고 팽팽해보이는 한 쌍의 젖무덤을 어루만지며 담사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그녀를 쳐 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접한 손부인의 달덩이같은 얼굴이 한층 더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한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며 수줍은 목소 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아이를..... 가졌는가 봐요.} [!] 순간 담사의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그는 흡사 망치로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듯 아연한 표정이 되어 손부인을 올려다 보았다. [죄....죄송해요!] 경악과 불신으로 두눈을 부릅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담사의 시 선을 느낀 손부인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주르르! 영문을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복받혀 그녀의 두눈에서 뜨거운 이슬이 굴러 담사의 가슴 팍에 떨어졌다. {아..... 아이를 가졌단 말이오?} 가슴에 떨어진 손부인의 눈물에 퍼뜩 정신을 차린 담사는 떨리 는 목소리로 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둔 눈을 부릅든 그의 표정은 엄청난 충격으로 창백해졌다. 손부인은 그런 그의 표정을 훔쳐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하지 않았소?} 담사는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저도 그런 줄만 알았어요.] 손부인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자신이 불임(不姙)이 된 처절한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삼년전, 녹림도들의 산채로 끌려간 손부인은 하루에도 수십명의 산적들에게 겁탈을 당해야만 했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몇번이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손부인은 아이를 지우려고 했고, 사실 그녀가 지우지 않 아도 아이는 그녀의 뱃속에서 오래 자라지를 못했다. 그녀가 임신 을 했건 말건 산적들은 그녀를 서슴없이 겁탈하여 욕정을 풀었기 때문이다. 산적들이 인정사정없이 겁탈을 하는 바람에 자연히 뱃 속의 아 이는 유산될 수 밖에 없었고, 몇차례인가 그런 과정이 반복되자 언 제부터인가부터는 아예 임신되는 일 조차 없어졌다. 지나친 폭행과 반복되는 유산으로 그녀 육체는 임신할 능력을 잃어버린 때문이다. 헌데 천만 뜻밖에도 그녀는 삼년이 지난 지금 담사의 아이를 갖 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몸매는 담사가 떠나기 전과 다소 달라보였 다. 좀더 살이 올라 풍만해졌고 특히 임신으로 유선(乳線)이 확장 된 듯 젖가슴이 더 커지고 팽팽해져 있었다. 담사는 손부인의 변한 모습에도 단지 그녀가 그동안 살이 좀 쪘 구나하고 생각했었다. [대...대체 언제...!] [돌아오신 그날밤... 수태된 것같아요!] 담사의 물음에 손부인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담사가 돌아온 날밤에도 두사람은 당연히 격렬한 관계를 갖었었 다. 만일 그때 수태를 했다면 이미 임신 삼개월 이상이 되었다. 임신했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그러고 보니 손부인의 아랫배는 상 당히 불러보이기까지 했다. [당신이 떠나신 후에 백운사(白雲寺)에 들렸다가 노스님으로부터 약을 얻어 먹었는데... 그게 수태를 도와준 모양이예요!] 손부인은 행복한 표정으로 자신의 제법 불룩해진 아랫배를 쓰다 듬었다. [백운사의 늙은중이라니?] 담사가 당혹해하며 묻자 손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날 당신과 함께 백운사 연화동(蓮花洞)을 구경갔을 때 만났 던 스님말이예요.} 그녀의 말에 담사도 이내 그 추례한 노승을 떠올렸다. (아! 그때 십팔연화문을 보고 있던 노승이 있었지!) 새삼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던 노승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사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 노승에게서는 왠지 담사 자신과는 아주 대조 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던가? 손부인은 담사가 잠시 아무 말이 없자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자 신이 아이를 가진 것을 담사가 탐탁치 않게 여긴다고 지레 생각한 것이다. {죄....죄송해요. 당신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줄 알았으면 굳이 약 까지 먹지는 않았을텐데....!} 주르르! 고개를 떨군 손부인의 두눈에서 다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새삼 자신의 신세가 서글퍼지는 그녀였다. 자신은 숱한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던 더러운 몸! 어떤 사내가 그런 자신이 아이를 낳 아주는 것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그 순간 담사는 흠칫 놀라며 황망히 말했다. {아..... 아니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당신이 나의 아이를 갖다니!} 담사는 감희어린 눈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고맙소 부인! 정말 고맙소!] [당....당신....!] 담사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끌어안자 눈물로 얼룩져있던 손부인 의 옥용이 달덩이같이 환해졌다. (나에게도 아이가 생기다니...! 바로 내 아이가...!) 손부인을 굳게 끌어안은 담사는 무언가 표현하지 못할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오직 증오와 비정만을 배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따뜻이 대해준 적은 없다. 심지어는 낳아준 부모마저 그를 버렸었다. 굶주린 야수, 담사는 바로 황야의 고독한 야수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아이가 생겼다니...! 담사는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격과 열기가 치밀어올랐다. (나의 아이가....! 나의 아이가 생겼단 말이지! 오오 하늘이시 여...!) 그는 치밀어 오르는 희열과 격동을 누르기에 안간힘을 썼다. 야 수에게도 어쩔 수 없이 부정(父情)은 있는 것인가? 아니 그토록 삶이 고독했기에, 외로웠기에 더욱 더 자신의 피붙 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의 어머니가 여러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던 손부인이란 사 실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상처를 지닌 손부인이기에 자신의 아이를 낳아줄 자격이 있는지도 모른다. 또 담사 자신도 자신의 이세를 낳아줄 여 인으로 손부인 외에는 상상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담사는 자신이 이 가엾고 무한히 헌신적인 이 여 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3 손부인을 보듬어 안은 담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 가엾은 여인을 팽개쳐두 고 떠날 수는 없는 일! 이렇게 되면 함께 여길 뜨는 것으로 계획 을 바꾸어야 한다.) 그는 재빨리 생각을 하면서 손부인에게 말했다. {나는 멀리 남해(南海)로 가서 살고 싶은데 당신의 생각은 어떻 소?} 손부인은 흠칫 놀랐다. {남해로 가다니요?} {내겐 제번 모아둔 돈이 좀 있소. 사실 이런 이야기는 하려고 했 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하지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하 루라도 더 지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손부인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동안 장사를 하면서 본의 아니게 어떤 사람과 원수를 맺게 되었소. 언젠가 그 자가 찾아올 줄 모르니 저 멀리 남해나 동해 쪽 으로 가서 살았으면 하오.} 손부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행복한 표정으로 웃을 뿐 이었다.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전 어디든지 따라 가겠어요.} [고맙소!] 담사는 힘주어 그녀를 안았다. {내일 전표(錢票)를 줄 테니 그것을 소액전표와 금은(金銀)으로 바꾸어 필요한 물건들을 사놓도록 하시오. 그 사이에 나는 배편을 알아보러 선착장에 갔다오겠소.} {그렇게 빨리.....?} 손부인이 놀란 듯이 말하자 담사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 다. {어차피 갈 길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담사는 말과 동시에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아이.... 또....!.} 그녀는 짐짓 도리질하는 척 했으나 막상 담사의 혀가 자신의 입 술을 헤집고 들어오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의 목을 마주 끌어당 겼다. 손부인의 임신이 계기가 되어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 두 남 녀의 육신은 급격히 달아올랐다. 손부인의 살오른 계곡은 다시 뜨거운 홍수를 일으켰고 담사의 순양지물도 이미 철주(鐵柱)처럼 단단해져있었다. 허벅지 안쪽에 닿는 정인의 뜨거운 실체를 느낀 손부인은 뜨거 운 비음을 토하며 한껏 하체를 벌려 세웠다. 그녀의 깊은 중심부는 원색의 파동을 일으키며 낭군의 강인한 몸가락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 손부인의 몸안으로 자신의 불덩이같은 일부를 진입시 키려던 담사는 갑자기 멈칫 몸을 멈추었다. [하아.... 왜...?] 몸이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손부인이 신음하며 담사를 올려다 보았다. 담사는 그런 그녀의 제법 불룩한 아랫배를 손으로 어루만져보았 다. [내 욕심에 이놈에게 너무 부담을 주었군! 그만 참고 자도록 하 겠소!] 담사는 미소를 지으며 손부인의 배를 다독거렸다. [당신....!] 순간 손부인의 두눈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배속에서 자라 고 있는 아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담사가 그녀는 더할 수 없이 고마웠다. 그같은 관심과 애정은 손아유를 갖었을 때 첫 남편에게 서도 받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가슴 벅찬 감격과 행복이 그녀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참....참으실 필요 없어요!] 손부인은 뜨거운 숨결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라면...아기에게도 무리가 가지 않을거예요!] 이어 손부인은 얼굴을 모닥불같이 붉히며 담사에게 등을 보이더 니 무릎과 두 손으로 침상 바닥을 짚고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담사의 몸으로 부르르 경련이 스쳐갔다. 자신에게 등을 보 인 채 네발로 엎드린 손부인의 자태는 실로 도발적인 것이었다. 물 론 담사가 반강제적으로 뒤에서 안은 적은 있지만 손부인이 자진 해서 그같은 도발적인 체위를 취한 적은 이제껏 없었다. [어....어서...!] 손부인이 부끄러움과 흥분으로 할딱이며 담사를 재촉했다. 눈앞에서 출렁이는 달덩이같이 흐드러진 손부인의 둔부를 바라 보는 사이 담사의 욕망의 상징도 다시 뜨겁게 충혈되어있었다. 담사는 흥분으로 몸을 떨며 손부인의 뒤쪽에 무릎을 꿇었다. 그 리고는 두손으로 그녀의 살 오른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용트림 하는 실체를 달덩이같은 손부인의 둔부 사이로 밀어붙여갔다. 손부인의 온몸이 지진이 난 대지처럼 요동치고 신음했다. 너무도 깊고 강렬한 그 진입의 감촉에 손부인은 한껏 머리를 치켜든 채 원색의 신음을 토해내었다. 정인의 뜨겁게 맥동하는 몸가락을 받아 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환희의 극치를 맛볼 수 있엇다. 이윽고 끝이 없을 듯한 진입이 끝나고 담사의 육체가 뒤로부터 손부인의 육체와 한치의 틈도 없이 결합되었다. 손부인의 육체의 동굴은 아우성을 치며 침입자를 옥죄고 흡입해대었다. 담사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허리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의 부드러운 율동에 따라 손부인의 쪽을 푼 검은 머릿결이 물결 같이 춤추었고 가슴에 무겁게 매달린 한쌍의 육봉은 탄력있게 출 렁거렸다. 어느 새 손부인의 온몸도 뒤로부터 압박하는 담사의 움직임에 뜨겁게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손부인은 실로 뜨거운 몸을 지닌 여 인이었다. 애정과 쾌락이 녹아드는 밤의 열기는 끝이 없을 듯이 계속되었 다. 4 무림맹의 제일중지(第一重地) 불령각(佛靈閣)! 이곳은 우내삼기(宇內三奇)의 첫째이고 사실상 무림앵의 맹주인 철불(鐵佛) 혜천대사(慧天禪師)의 거처다. 무림맹 내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이곳은 평소에는 아무 도 근처에 범접하지 않는다. 혜천대사는 소림사에서 파문(波門)을 당한 후에도 언제나 회색 의 승복을 입고 다녔다. 또한 무림맹이 창립된 후 어언 삼십 년이 지났지만, 혜천대사는 불령각에 은신하다시피 하여 무림맹의 대소사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오시(午時) 무렵, 스읏! 하나의 빛살 같은 인영이 소리없이 불령각 안쪽으로 사라졌다. 불령각을 지키는 경비무사들도 다만 희끗한 그림자만 보았을 뿐 아무도 그것이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저렇게 빠를 수는 없을 테니까, 사방 오 장가량의 불전(佛殿)같은 방, 정면의 단상 위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모셔져 있고 사방의 벽에 는 몇 폭의 탱화가 걸려 있었다. 실내에 은은히 감도는 단향, 그리 고 몇 권의 불경(佛經) 등은 흡사 절간의 대웅전을 축소한 것 같 은 모습이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불상 앞에 앉아 금강경(金剛經)을 낭송하는 노승이 한명 있었다. 칠순 전후로 보이는 이 노승은 나이답지 않게 건장한 몸에 회색빛 가사를 입고 있는데 목에 걸린 백팔염주가 따뜻한 햇살 아래 은은 히 묵광을 발한다. 각진 얼굴에 보통사람보다 휠씬 큰 두 귀, 그리고 어린 아이의 그것같은 붉으레한 동안(童顔)에 수려한 오관, 한쌍의 두 눈은 맑 고도 고요하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혜천대사(慧天大師)! 삼십 년 전, 소림이 전륜교에 의해 참화를 당하자 비분을 참지 못해 속세에 뛰어들어 무림맹을 창립하여 전륜교를 이 땅에서 멸 망시킨 인물! 지금 금강경을 외우고 있는 이 인물이 바로 우내삼기의 수좌이 자 무림맹 삼태상의 첫째로 보통 철불(鐵佛)이라고 불리우는 혜천 대사였다. 스르륵____ 문득 창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그와함께 한줄기 지독한 술냄새가 풍기며 이제 팔순도 더 되어 보이는 늙은 노화자(老化子) 방안으 로 들어섰다. 그 노화자의 등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즐어진 채 업 혀져 있었다. 노화자, 즉 늙은 거지의 몰골은 실로 가관이었다. 파뿌리 같은 머리는 산발한 채 아무렇게나 흘러내려와 있고 더 덕더덕 수십 번씩 기운 옷은 원래 황색인 것 같았으나 지금은 때 에 절어 검은빛이 번들번들하다. 조그만 얼굴에 전체를 다 차지한 것 같은 큰 납작코는 주독이 올라 붉게 변해 있고, 작달만한 체구에 꼭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거지노인이었다. 소리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늙은 거지의 몸은 흡사 연기처 럼 가벼운 것 같았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투덜거렸다. {제기랄, 이 나이에 내가 다리가 부르트도록 천하각지를 돌아다 녀야 하다니..... 에그 늙으면 그저 빨리 죽는 게 복인데.....} 연신투덜대면서 신세타령 하는 것이 그대로 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아미타불... 동(董)시주 어서 오시오.} 철불 혜천대사는 늙은 거지가 나타나자 담담한 표정으로 두 손 을 합장했다. 하지만 거지노인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인상을 연신 찌푸렸 다. {어서오시오 좋아한다. 이 땡추야 이걸 좀 봐다오.} 거지노인은 투덜대며 등에 업고 있던 여인을 내려놓았다. 백삼나의를 입은 그 여인은 옷은 비록 더러워져 있고 얼굴은 먼 지가 잔뜩 묻어 제대로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적용화 련(狄容華蓮)이었다. 담사에게 겁탈당하고 모용천위에 의해 전륜교의 비밀 총단으로 보내졌던 그녀가 어떻게 이 거지노인에게 업혀온 것일까? 혜천대사는 흠칫한 표정으로 적용화련의 상태를 살폈다. {아미타불..... 동시주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그.....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거지노인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땡초야, 내가 친구 하나 잘못 둔 죄로 풍상을 무릅쓰고 마교 인지 마귀인지 하는 놈들을감시하는 것은 좋다고 치자. 그런데...} 거지노인은 문득 눈빛을 야릇하게 빛내며 혜천대사를 주시했다. 혜천대사는 그의 뜻이 실린 눈길에 담담히 웃었다. {웃어?} 거지노인은 분통이 터지는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래 이 땡초야,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렇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의 마누라가 나를 죽이려고 설치니 이 무슨 개 같은 경 우가 다 있느냐?} [....!] 순간 혜천대사의 표정이 밀랍같이 창백해지고 전신을 부르르 떨 었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기라도 한 듯이....! 헌데, 둘도 없는 친구의 마누라라는 것이 설마 혜천선사의 자신 아내를 뜻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팔십 평생을 엄격한 계 율 속에서 살아온 이 일세신승이 설마 파계를 했단 말인가? 5 거지노인은 혜천선사의 표정을 훔쳐보면서 씨부렁거렸다. {이놈아, 이곳을 봐라. 그 무슨 혈마지(血魔指)인가 지랄지인가는 모르지만 내가 삼십 년 동안을 입어온 이 소중한 옷에 구멍을 내 었으니 이놈 땡초야, 네가 물어내라.} 거지노인이 가리키는 그의 어깨쪽에 손가락만한 두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혜천대사는 침중히 불호를 외웠다. 허나 그의 표정은 점점 희다 못해 회백색으로 변해갔다. 아! 실로 믿지 못할 일이 아닌가? 거지노인의 말대로라면 혜천 대사에게 마누라가 있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그리고 혈마지(血魔指)라면 태행산(太行山) 천학봉(天鶴峰學)에 서 전륜교의 교주로 불리우던 혈의중년부인이 시전하던 지법이다. 그렇다면 이 거지노인이 바로 태행산 전륜교의 폐허에서 사라진 의문의 인물이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이 괴상망칙하게 생긴 늙은거지가 바로 개방의 전대장로(前代長 老)인 무영신개(無影神 ) 동추평(董秋平)이었다. 일생을 풍진 속에서 해학과 술, 그리고 정의를 위해 싸워온 동추 평은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세상을 장난처럼 살아온 풍진기인이 었다. 특히 경신술에 조예가 깊은 그를 따라잡을 신법의 소유자는 존 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령각을 지키던 무림맹의 경 비무사들이 그가 들고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무리 가 아니었다. {동시주.... 정말 그녀였는가?} 혜천대사는 불호를 그치고 고뇌어린 눈길로 동추평을 주시했다. {내가 언제 자네를 속였나?} 동추평은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눈빛 은 애처럽게 변했다. (이놈아. 내가 왜 너의 마음을 모르겠나. 하지만 이제 그들이 복 수를 위해 강호에 나왔으니.) 동추평은 내심 친구의 불행에 가슴이 아팠다. 허나 그의 말은 마 음과는 반대로 퉁명스럽기만 했다. {그녀의 아들놈도 보았는데 천엽인가 천위인가는 모르겠지만, 땡 중 네놈보다는 휠씬 잘 생겨 먹었더군.} 헤천대사의 눈에 일순 애틋한 빛이 스쳤다. {아미타불.... 그래 이 여시주는 누구인가?} 잠시후, 혜천대사는 동추평의 관심을 돌리려는 듯 동추평이 업고 온 적용화련을 돌아보며 물었다. 동추평은 무어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한 숨을 쉬었다. (하기야 네놈도 그녀의 말을 자꾸만 들으면 괴롭겠지.) 내심 안스러움을 느끼며 힐끗 적용화련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지 금까지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꼬옥 감고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마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네가 마 곡(魔谷)을 조사하러 갔을 때 이 아이가 자살을 하려고 그러는지 갑자기 절벽에서 뛰어 내리더군.} 동추평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 마침 내가 절벽 아래로 지나는 터라 겨우 살리기는 했는 데 상처가 중해서 어쩔 수 없이 이리로 데려 왔네.} 혜천대사는 가만히 적용화련의 섬섬옥수를 잡고 진맥을 했다. {아미타불... 아이까지 가졌군.} 그는 약간 놀라운 눈으로 자세히 적용화련을 살폈다. 한눈에 적 용화련의 몸에 태기(胎氣)가 있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과연 적용 화련의 아랫배는 상당히 불룩해보였다. 물론 그녀가 갖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물론 자명한 일이 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담사는 대략 한달을 사이에 두고 두 여인에게 자신의 아이를 잉태시킨 것이다. 임신한 기간은 적용화련 이 손부인보다 한달쯤 빨라 대략 사개월 전후였다. 적용화련은 담사에게 겁탈당한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자 신이 그 늑대같은 자의 씨를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 엄청난 충격과 수치를 떨쳐버리지 못한 적용화련은 자 살을 기도했었는데 마침 그녀가 몸을 던진 절벽 아래를 지나던 무 영신개 동추평이 그녀를 구해낸 것이다. 곧 혜천대사의 손이 스치듯이 적용화련의 몸을 위를 스치며 삼 십육중혈(三十六重穴)을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추궁과혈을 했다. 한순간 기식이 엄엄하던 적용화련의 안색이 불그스름해지고 호 흡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이제보니 땡추의 무예가 이미 화경에 달했군!} 동추평이 비꼬는 듯이 말했으나 그 내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 다. 혜천대사는 차분히 말했다. {이 여시주는 육체의 상처도 그렇지만 마음의 상처가 더 큰 것 같군. 한 달 정도는 요양을 해야 되겠어.} {땡초야,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야. 혈옥잠(血玉簪)이 나타났 으니 마교의 출현은 기정사실이고 천마산수에 죽은 자까지 나타났 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할 셈이냐?} 동추평이 싸늘히 외쳤다. {이게 다 네놈이 저질러 놓은 일이니 네가 책임을 지고 해결을 해야 돼. 그러나 그 와중에 또 얼마나 수많은 생명이 사라질지...} 동추평은 생각도 하기 싫은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미타불... 마교의 천마산수는 나의 금강복마수(金剛伏魔手)로 막을 수는 있지만... 만약 천마비(天魔匕) 마저 그들의 손에 들어간 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네.} 혜천대사는 침중히 말했다. {이런 때에 법공(法空) 사숙조 어른을 만나 뵐 수만 있다면...} {아니, 그 분 법공 노대사께서 아직도 살아 계신단 말인가? 그게 정말이라면 벌써 세수 일백오십세가 넘으셨을텐데....!} 혜천선사의 말에 동추평이 놀라운 목소리로 물었다. 헌데 자타가 공인하는 정파제일기인인 철불 혜천선사에게도 사 숙조뻘이 되는 인물이 현존한단 말인가? {아미타불... 십 년 전 그 분을 제남(齊南)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네만...} 혜천대사는 망연히 창 밖을 주시했다. {법공사숙조께서는 이미 속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분, 그 분 이 원치 않는다면 아무도 그 분을 만날 수 없다네.} 동추평은 쓰디쓴 고소를 지었다. {젠장, 염병할 노릇이군.}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래, 강아를 암살한 놈의 소식은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나?} 혜천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는 것 같네.} {쓸모없는 놈들, 내가 바쁘지만 않아도 벌써 잡았을 것인데... 헌 데 그놈이 천마비를 가지고 있다면서?} 동추평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렇다고 들었네만 확실한 것은 아니니... 동시주는 마교의 동태 만 살펴 주게.} 혜천서산의 말에 동추평은 고소를 지었다. {제기럴, 네놈 때문에 내가 이 무슨 고생이냐?} 화난 듯이 투덜거리며 발끝을 차자 그의 몸은 연기처럼 허공에 떠올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우는 혜천대사의 표정은 고뇌에 가득차 있었다. 동추평과 혜천대사의 밀담에 담긴 뜻은 과연 무엇인가? 혜천선 사는 마교의 신물인 혈옥잠(血玉簪)을 지닌 혈의여인과 깊은 관계 가 있는 듯 하지 않은가? 그리고 전대의 기승(奇僧) 범천신불(梵天神佛) 법공(法空)대사의 법명(法名)이 나오고, 비운의 여인 적용화련의 앞날은 또 어찌 될 것인지....? 그리고 강호는 바야흐로 마교(魔敎)의 출현으로 인해 난세로 접 어들고 있었다. 제 26 장 千慮一失, 발각난 正體 1 제남성내에 자리한 화룡전장(火龍錢莊)의 분점(分店). 미시(未時) 무렵, 손부인은 대나무로 엮은 큼직한 바구니를 들고 설레는 표정으로 화룡전장에 들어갔다. 화룡전장 제남분점에서 집사의 일을 보는 방임유(坊任有)의 눈 빛이 흔들렸다. 지금 그의 손에는 손부인이 건네준 황금 일천냥 짜 리 전표(錢票)가 들려있었다. {부인! 이 전표는 워낙 액수가 커서 확인을 해야 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손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벽쪽에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방임유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탁자 앞에 앉아있던 오순가량의 노인이 방 임유가 듥 들어온 전표을 확인하고는 급히 말했다. {빨리 무림맹 제남지부로 연락해라! 찾고 있던 전표를 가지고 온 사람이 왔다고!} 그의 목소리는 흥분에 떨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손부인은 소액의 전표와 금은으로 가득 든 묵직한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꼭 끌어안고 화룡전장을 나섰다. 황금 일천냥이라는 엄청난 거액을 처음 접해보는 그녀의 발걸음은 흥분으로 들떠있었다. 그녀의 신형이 화룡전장 왼쪽의 골목으로 꺽어 돌자, 두 명의 황 삼대한이 급히 화룡전장에서 나와 그녀의 뒤를 따라붙었다. 이윽고 제남성을 나온 손부인이 자신의 다점 안으로 들어가자 한 장한이 긴장한 표정으로 동료에게 빠르게 말했다. {상도(上道), 내가 감시할 테니 자네는 빨리 지부장에게 알리게.} {알았네. 조심하게.} 왼편에 서 있던 장한이 말과 동시에 급히 걸음을 왔던 길로 옮 겼다. 한 마리의 전서구가 무림맹의 감찰전으로 날아들었다. 전서를 받아든 독비노인(獨臂老人), 그는 바로 항주 금룡장(金龍 莊)에서 모용천위의 첩혈마황검( 血魔皇劍)에 한팔을 잃은 무림맹 감찰전주 진천쾌수 막대승이었다. 전서구에 의해 전해진 전문을 읽어내린 순간 그의 두눈에서 벼 락같은 신광이 뻗혔다. 다음순간 그는 밖을 향해 버럭 노성이 터졌 다. {부전주, 놈이 나타났네.} 그의 목소리는 증오와 격동에 차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신검황(神劍皇) 연주백을 위시한 막대승, 조중 등을 태운 백여 필의 인마가 무림맹의 총단을 빠져나와 무섭게 북쪽으로 질주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태산 북쪽의 황하변에 자리한 제남(齊 南)이었다. 모용천위는 일 주일 전부터 개봉(開封)에 은밀히 설치된 마교의 비밀분타 소홍루(少紅樓)에서 매일 술로 지새우고 있었다. 탁자 위에 가득히 널린 술병, 방 안은 술내음으로 가득 차 있고 거슴츠레한 눈으로 벽에 기대어 술잔을 들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 이 주정뱅이였다. 담사에게 무참히 강간당한 후 자신에게 기대려던 적용화련이 갑 자기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거기다가 자살소동까지 벌린 이후 돌 연 실종되어 소식이 없는 지 벌써 보름째였다.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대로 지친 것이다. 모용천위는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에 채워져있던 독주가 목구멍 을 넘어가며 찌르르 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미 상당히 취한 눈앞의 흐릿해지면서 하나의 희미한 영상이 떠올랐다. 그에게 끝없이 번뇌를 안겨주는 존재! 바로 적용화련이 었다. 적용화련이 담사에게 겁탈당했든 어쨌든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철이 들 때부터 함께 자라온 이 아름다운 종매(從妹)를 그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평생 함께 살아갈 배 우자로 적용화련외에는 상상도 못해본 모용천위였다. 그러나 그의 그같은 꿈은 한명 더러운 늑대같은 자에 의해 산산 히 부서지고 말았다. (죽여버린다! 네놈이 십팔층 지옥 밑바닥에 숨어있더라도 기필코 찾아내어 죽이고 말 것이다!) 담사를 떠올릴 때마다 모용천위는 주체할 수 없는 살기에 진저 리를 치곤 했다. 자신의 인생을 암울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린 그 짐승같은 놈을 처단하지 않고는 그의 생에 기쁨이란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는 모용천위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한 명의 장년무사가 황급히 뛰어들어 왔다. {무상(武相)님! 무림맹에 잠입해있는 첩자로부터 연락이 왔읍니 다!} 모용천위의 거슴츠레한 눈이 부릅떠졌다. 장년인은 황망히 말했다. {신검황 연주백을 위시하여 수십 명의 고수들이 제남으로 출발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용천위의 신형이 벼락같이 창문을 박살내면서 화살처럼 쏘아 나갔다. {제남에 있는 요원들에게 연락해라. 내가 간다고.} 우뢰 같은 목소리가 끝났을 때 모용천위의 신형은 오십 장 밖을 날고 있었다. 노을이 희미하게 사라지고 제법 서늘한 북풍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쳤다. 후두둑! 후두둑! 이어 가느다란 빗줄기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기 시작했다. 가을을 재촉하는 이 비가 그치면 짙을 대로 짙어진 녹음도 원색의 물이 물게 될 것이다. 쏴_____ 아! 가느다란 세우(細雨)는 날이 어두워져감에 따라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고 바람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때 비바람을 뚫고 몇 줄기의 인영이 서서히 손부인의 다점 주 위를 은밀히 포위하기 시작했다. [....!] [....!] 한결같이 검은 흑삼에 검은 머리띠를 두른 자들인데 가슴에는 금빛으로 혼(魂)자가 새겨져 있다. 흑건추혼대(天雄黑鐵團)-! 이들은 바로 무림맹의 대외척살조인 흑건추혼대이었다. 그들은 소리없이 주위 백장 내를 완전히 포위하고 일반 행인들 을 차단시켰다. 몇몇 행인들이 갑작스런 이들의 행동에 항의를 하 려고 했으나 흑건추혼대의 험상궂은 표정과 살벌한 기세에 말도 해 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곳인가?} 신검황 연주백은 맞은 편 건물의 처마 아래 서서 손부인의 다점 을 노려보면서 수하들에게 물었다. [에! 틀림없습니다 태상!] 사순 가량의 건장한 중년인이 나서서 장읍을 취하며 깊이 고개 를 숙였다. 그는 제남성의 무림맹 지부장인 육합신장(六合神將) 고 천기(高天基)란 인물이었다. 무림맹 총단을 지척에 둔 제남성의 지부를 관장하고 있는 때문 에 육합신장 고천기는 대단히 유능하고 빼어난 무공의 소유자였다. 2 {지난 하루 동안 은밀히 조사한 결과 다점의 주인은 손씨부인으 로 되어 있으며 하복생이라는 정부와 같이 살고 있읍니다. 또 손부 인에게는 전 남편 소생으로 이름이 손아유인 십 이세 난 딸이 하 나 있습니다!} 고천기는 공손한 자세로 그동안 자신이 탐문하여 얻은 사실을 연주백에게 보고했다. {손부인의 동거인인 하복생이라는 자는 포목장사를 한다고 하는 데 한 번 집을 비우면 보통 이삼 개월 사라졌다가 나타난다고 합 니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보건데 하복생이란 이 자가 틀림없이 연 공자님을 살해한 흉수일 것입니다} 고천기는 손으로 얼굴의 빗물을 닦으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화룡전장의 집사 말에 의하면 우리가 찾던 전표도 하복 생이란 자의 수중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연주백은 두 눈에서 정광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이 말에 고천기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태상. 지금 제남일대는 개방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포위를 완료했읍니다.} {됐네.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자네들은 밖에서 기다 리게.} 신검황은 무겁게 말하고는 다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아유는 손님이 들어오자 귀엽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연주백을 위시한 막대승, 조중, 염황도 엽곡 그리고 남장여인 황 보가혜는 다점으로 들어서서 말없이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손부인이 계산대에서 급히 나와 손님들을 맞았다. {이리로 앉으세요.} 연주백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런 손부인을 주시했다. 손부인은 그들이 아무런 말이 없자 흠칫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한동안 비를 맞은 듯 하나같이 전신이 젖어 있는 오 인의 모 습은 매우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손부인은 문득 이들의 눈빛이 매 우 무섭다고 느꼈다. 문득 연주백의 시선이 주방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담사가 막 찻잔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손부인은 자신의 남편을 발견한 순간 갑자기 이들 다섯 손님의 전신에서 무서운 기운이 뻗어 나온다는 것을 느끼며 깜짝 놀랐다. {!} 연주백 일행을 발견한 순간 담사의 몸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추어 서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수들이다.) 담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위험을 느꼈다. 연주백의 일행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담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손부인은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목구멍이 막힌 듯 말 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연주백의 일행과 남편 담사를 불안한 눈빛 으로 번갈아 볼 뿐이었다. {자네가 하복생이란 자인가?} 연주백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젙은 살기가 서려 있 었다. {그렇읍니다만 손님들께서는....?} 담사는 어색한 얼굴로 대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는 연주백이라는 사람이네.} 순간 담사는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신검황... 연주백!) 그의 심장은 무섭게 두방망이질쳤다. (이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담사는 일순간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하지만 더이상 전후를 생각 할 필요도 없이 이들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자신을 잡으러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생각은 느렸지만 동작은 빨랐다. 패액! 담사의 어깨가 움찔 흔들린다 싶자 이미 그의 신형은 벼락같이 주방쪽으로 도로 튕겨져 들어가고 있었다. {놈!} 쉬악! 하지만 그 순간 연주백의 몸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붙으며 우 수를 내뻗고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분명 삼장이 넘었고 몸을 먼저 움직인 쪽은 담사였음에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연주백의 손바닥은 이미 담사의 등을 벼락같이 파고 들고 있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신법이고 공격 이었다. 담사가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시도를 해봤으나 연주백의 공격은 가차가 없었다. 그의 무지막지한 장풍은 강력한 힘을 실고 그대로 담사의 등을 강타했다. 퍼펑! {크으윽!} 콰장창! 명문혈(命門穴)을 장풍에 맞은 담사는 피분수를 쏟으면서도 화 살처럼 벽을 뚫고 튀어나갔다. {이런 교활한 놈!} 담사가 자신의 장풍의 힘을 빌어 오히려 더 빨리 밖으로 날아나 가자 연주백은 노기를 터트렸다. 그는 노성을 터뜨리며 자신도 벼 락같이 벽을 뚫고 쏘아나갔다. 꽝_____! 콰꽝! 그 뒤를 따라 막대승 등 오 인은 황망히 뒤를 따랐다. {아악!} {꺄아악!} 손씨모녀와 가게안에 있던 몇몇 손님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 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모두 공포에 질린 것이다. 평범한 사람 들이 언제 이런 무서운 일을 보았겠는가? 손부인은 처절히 외쳤다. {하랑! 하랑!} 그녀는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왔지만 무림맹의 무사들에 의해 다시 다점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밖으로 튕겨져 나온 담사를 향해 다점을 포위하고 있던 흑건추 혼대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휘청하며 몸을 세운 담사는 아무 말도 없이 벼락같이 쌍 수를 흔들었다. 쉬이익____ 쉬익! 갑자기 수십 개의 암기가 그의 몸에서 폭사되었다. 흑건추혼대의 무사들이 암기를 보았을 때는 이미 그 암기들이 그들의 몸 속에 파고들고 있었다. 3 {으악!} {으_____ 아악!} 처절한 비영이 터지고 순식간에 서너 명이 뒹굴었다. 허나 흑건추혼대들도 숱한 나날을 혈전 속에서 보낸 백전노장의 고수들! 그 짧은 찰라에 두 자루의 검이 담사의 허벅지와 옆구리 를 훑고 지나갔다. 피부가 쩍 갈라지고 피분수가 일었다. 그러나 담사는 살을 후비 는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용수철같이 튀어올라 신법을 전개했다. 연주백이 밖으로 나왔을 때 담사의 신형은 이미 이십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지독한 놈! 그러나 네놈은 절대 도망가지 못한다.} 내심 이를 갈며 연주백은 두 발에 공력을 집중했다. 휙_____! 그의 신형은 쏘아낸 화살처럼 날아갔다. 다점 옆 가게의 지붕을 타넘은 담사는 골목길로 뛰어내렸다. 그 러자 두 자루의 대감도(大坎刀)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향해 베 어갔다. 동시에 담사의 몸이 돌풍처럼 회전을 하면서 쌍수를 좌우로 후 려갈겼다. 대감도가 아슬아슬하게 담사의 몸을 스치며 지나가는 순간 그의 쌍수는 그대로 한 명의 머리를 강타함과 동시에 옆에서 베어오던 또 다른 한 명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으____ 아____ 악!} 한 명은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잘익은 수박처럼 부서 졌고 다른 한 명은 옆구리가 뻥 뚫린 채 옆으로 쓰러졌다. (제남 일대는 완전히 무림맹에 의해 포위되었다. 그렇다면... 일 단 그곳으로 가자.) 두명을 쓰러뜨린 담사는 골목길을 달리며 재빨리 상황을 판단하 고 결심을 했다. 비록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이미 그는 평 범한 상인에서 한 마리 야수같은 자객으로 변신해있었다. (환전하라고 화룡전장에 보낸 전표가 문제였다! 더러운 청부자놈 들! 날 제거하려고 전표의 일련번호를 무림맹에 제보한 것이다!) 달리면서 담사는 이를 갈았다. 청부자측에서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제거하려는 줄은 미처 생 각못했다. 자신이 청부자측의 계집을 겁탈한 것이 원인이었을까? 아니다! 그자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남긴 모든 흔적을 지울 생각 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조금만 주의했어도 생각할 수 있었던 파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아무리 후회를 해봐야 소요없는 일이다. 지금 해야할 일은 포위망을 빠져나가 목숨을 건지는 일이다. 손 씨모녀가 걱정이 되긴 하지만 놈들도 그녀들이 자신의 정체를 전 혀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참한 짓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무림맹은 정의를 표방하는 자들이니까! 담사는 손씨모녀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일에 집중했 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한다! 일단 이 위기를 빠져나가기만 하 면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꽈르르릉! 허공에서 갑자기 한 줄기 장풍이 산을 무너뜨린 듯한 기세로 들 이닥치는 것이 아닌가? 흠칫한 담사는 재빨리 땅바닥에 몸을 굴렸다. 뇌려타곤( 驢打棍)-! 하오문(下五門)의 인물들도 수치스러워 하는 신법을 구사한 것 이다. 바로 게으른 당나귀가 뒹군다는 모습이라 해서 이름이 뇌려 타곤이다. 어느 새 지척까지 쫓아온 연주백은 자신의 장풍이 빗나가자 잠 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실로 여우보다 더 교활하고 잔인한 놈이군.) 뇌려타곤의 신법으로 몸을 피한 담사는 연주백이 주춤하는 사이 민첩한 고양이처럼 담을 타고 도주했다. 이때, {백부님, 뭐하세요?} 뒤따라온 황보가혜가 외쳤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은 연주백 은 급히 몸을 날렸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호각성이 분분히 일고 수많은 검은 그림자들 이 담사가 달아난 곳으로 질주해가고 있었다. 밤이 된데다가 짙은 비구름까지 끼어 천지(天地)는 온통 먹물 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담사는 부호(富豪)들의 거대한 장원이 운집해 있는 제남의 금화 로(金花路)로 쪽으로 쏘아갔다. 전신은 피로 얼룩져 있고 얼굴에는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연 주백의 일장을 맞은 등판의 상처가 척추를 부술 듯이 아파왔다. 한채의 웅장한 전각의 지붕 위에 내려서자 담사는 재빨리 숨을 들이키며 사방을 살폈다. 몇개의 인영이 그가 온 쪽에서 쏘아오는 것이 보였다. 담사는 다시 몸을 허공에 띄우며 섬전같이 서쪽을 향해 날아갔 다. 그때였다. {죽어랏!} 고막을 진동시키는 대갈성이 터짐과 동시에 뒤쪽으로부터 한 가 닥 시퍼런 검광이 벼락같이 쏘아왔다. 웅_____ 우웅! 공기를 파열시키는 듯한 고음이 어둠을 찢었다. 놀란 눈빛으로 돌아본 담사는 경악성을 흘렸다. {어검술(馭劍術)____!} 그 시퍼런 검광은 보았다 싶자 어느새 눈앞에 다가왔다. 누군가 먼거리에서 날린 한자루 보검이 시퍼런 광채에 휩쌓여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담사는 벼락같이 우수를 품 속에서 연주강을 살해할 때 쓴 흑색 단검을 꺼내어 검광을 막았다. 창! 요란한 금속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 시퍼런 검광은 다시 온 곳으 로 튕기듯이 되돌아갔다. 어검술로 날아든 보검을 막아내는 순간 담사는 엄청난 반탄력에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비록 빠른 임기웅변과 수중에 들린 유령비의 위력 덕분에 어검 술로 날아든 보검을 막기는 했으나 그 보검에 실린 검기(劍氣)가 단검을 타고 흘러들어 그의 오장육부를 온통 뒤흔들은 것이다. 게다가 우수에 실린 단검은 놓치지 않았지만 손아귀는 파열되어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담사의 신형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어둠 속을 질주했다. 실로 초인적인 몸이요, 정신력이지 아닐 수 없었다. 4 {....!} 연주백은 수중에 들린 장검을 보면서 넋이 빠졌다. 비록 절세의 신병은 아니었으나 수십 년 동안을 간직해 온 자신 의 애병이 아닌가? 헌데, 그 장검이 두 치나 싹둑 잘려져 있었으니 그는 한동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자실해졌다. {천마비(天魔匕)! 천마비의 위력이 이렇듯 가공하다니.....} 자신의 공력이 주입된 검은 무엇이든 잘라버리는 절세신병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놈을 놓칠 수는 없다.) 연주백은 이를 악물며 몸을 날렸다. 이때 담사의 신형은 어둠에 싸인 거대한 장원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연주백의 신형은 비조처럼 그 장우너의 담장을 넘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어떤 놈이 감히 관부(官府)를 침입하느냐?} 노기에 찬 호통이 터지고 햇불이 이곳저곳에서 밝혀졌다. 이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검을 찬 관인들이 몰려나왔다. (이럴 수가.... 여기가 관부란 말인가?) 연무장인 듯한 곳에 내려선 연주백은 자신을 포위하는 관병들을 쳐다보며 쓰디쓴 고소를 띄웠다. 그가 담사를 쫓아 뛰어든 곳은 바 로 제남성의 관부였던 것이다. 그때 연주백의 뒤를 따라오던 막대승 일행도 연주백 옆에 내려 서면서 멍청한 표정을 띄었다. 예로부터 무림과 관부는 절대 상관치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관부의 추적을 받게 되면 평생을 피해다녀 야 한다. 무림인이 제아무리 무예가 높다 해도 나라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모조리 포박해라. 도적놈들이 감히 겁도없이 관부에까지 침입하 다니!} 관병들 중 부장인 듯한 자가 외쳤다. {이놈들!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잠깐만!} 연주백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한 순간 관병들은 고막을 진동시키는 듯한 천충 같은 노성에 흠 칫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나는 연주백이라는 사람이오.} 연주백이 차분히 말했다. {조금 전 이곳으로 나의 아들을 살해한 자가 숨어들었소. 그래서 그 자를 쫓아들어 왔을 뿐 여기가 관부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당신이 신검황... 연주백이란 말이오?} 부장인 듯한 관인이 놀라운 목소리로 외쳤다. 조금이라도 무예에 발을 들여놓은 자 그 누가 있어 천하제일검 연주백을 모르겠는가? 연주백은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소. 내가 연주백이오.} 부장은 곤혹에 찬 눈빛으로 연주백을 쳐다보았다. 연주백이라면 거물 중의 거물이다. 그로서는 도저히 상대조차 할 수 없는 무림의 절세기인이 아닌가? 그때 문득 한채의 건물에서 불이 밝아졌다. 이어 오순 가량의 뚱 뚱한 노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나왔다. {무슨 일이냐, 문강(門講)?} 부장이 황망히 허리를 숙였다.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그와 동시 관병들도 급히 허리를 숙였다. 나타난 인물은 바로 제남성의 지부대인(支部大人)인 안여출(安如 出)이란 자였다. 다점에서는 담사가 도주한 후 손씨 모녀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들을 둘러싼 무림맹의 무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손부인은 무사들의 거친 행동에 딸을 품에 안 고 벌벌 공포에 떨 뿐이다. 무림맹 제남지부장인 육합신장 고천기는 그런 손씨모녀를 쳐다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기랄! 이들 모녀는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인 데..... 허나 어쩔 수 없이 우선 지부로 데려가댜 하겠군.) 고천기는 무공도 모르는 모녀를 핍박해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했 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별다른 것은 없느냐?} 고천기가 수하들에게 외쳤다. {예! 그 자의 봇짐 하나밖에는 찾은 것이 없읍니다.} {좋아! 이들 모녀를 데리고 돌아간다.} 고천기는 빗발이 거세어지는 밖을 쳐다보면서 몸을 돌렸다. 돌연 이때 갑자기 다섯 명의 사나이가 다점으로 들이닥쳤다. 오 인은 하나같이 짙은 흑삼에 먼 길을 달려온 듯 비에 온통 젖어있 었다. 맨 앞장선 인물은 삼십 세 가량으로 강인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모용천위(慕容天威)-! 그는 바로 개봉에 있던 모용천위였다. 그는 담사의 종적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루만에 개봉으로부터 이곳 제남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었다. 고천기는 이들의 험악한 기세에 흠칫 놀랐다. {당신들은 누구요?} 고천기는 물었지만 모용천위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손씨모 녀를 노려보았다. {호대(戶大)! 저 모녀가 담사의 처자인가?} 호대라 불리운 자는 검은빛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른 장한인데 황망히 대답했다. {예, 무상어른!} 모용천위의 입가에 잔인한 살소가 피어올랐다. {모조리 죽여랏!} 말과 동시에 모용천위가 벼락같이 쌍장을 뿌렸다. [무...무슨 짓이냐?] 고천기는 갑작스런 공세에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모용천위의 무예는 무림맹 내에서 유수한 고수인 그로써 도 도저히 상대조차 할 수 없는 절정의 수법이었다. 퍼어엉! 고천기의 방어 검식이 채 펼쳐지기도 전에 천근 같은 모용천위 의 장력은 그대로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으악!} 고천기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쳐박혔다. 그 뒤를 이어 모용천위를 따라온 네 명의 장한은 재빨리 흩어져 무림맹의 무사들을 덮쳤다. 지휘자인 고천기의 어이없는 죽음에 경악하던 무림맹 고수들도 즉각 무기를 뽑아들며 맞섰다. 어쨌든 숫적으로는 그들이 열배 이 상 많았다. {빌어먹을! 놈들은 겨우 다섯뿐이다} {뒈져라!} 차_____ 창! 양진영의 고수들이 충돌하며 피가 튀었다. 네명뿐인 모용천위의 수하들은 오십명이 넘는 무림맹 고수들과 치열하게 격돌했다. 모용 천위의 수하들도 빼어난 고수들이지만 워낙 숫적인 차이가 나는 바람에 일시에 결판이 나질 않았다. 그걸 본 모용천위가 갑자기 맹렬히 쌍수를 휘저었다. 그는 그야 말로 전광석화 같은 기세로 무림맹의 무사들을 공격했다. 5 천마산수(天魔散手)-! 이 절세의 마공 앞에는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크____ 악!} {아____ 악_____!} 머리가 부서지고 가슴이 파열되고, 어깨가 파열되었다. 무림맹 고수들은 그의 손이 흔들릴 때마다 한꺼번에 십여명씩이나 황천객 이 되어 버렸다. 실로 무자비한 도살극이었다. 슈우슉____ 슈슉! 다시 몇차례 그의 손이 번뜩이는 순간, 썩은 짚단 무너지듯 수십 명의 무림맹 무사가 불귀고혼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눈부신 빠르기였다. 또한 불가사의한 수법이요, 잔인한 살수였다. 반다경도 되기 전에 고천기를 비롯하여 오십여 명이나 되는 무 림맹의 무사가 모조리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다점 안은 완전히 지옥이 되었다. 자욱한 피비린내, 여기저기 나 뒹구는 시체와 주인 잃은 팔다리 등이 공포스런 장면을 연출해내 었다. 손부인은 눈앞에서 벌어진 이 끔찍한 장면에 절로 구역질이 치 밀어 올랐다. 그녀는 그저 딸을 끌어안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담사와 관계 있는 자는 한 놈도 살려두지 않는다.} 모용천위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손씨 모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마 음 속에는 증오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네년이 담사의 계집이냐?} 손부인은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용천위의 눈빛이 잔인해졌다. {흐흐... 아니라고? 하나 네년이 그 자의 무엇이든 상관없이 죽기 는 매일반이니...!} 그의 눈에서 살기를 느낀 손부인은 애원했다. {저의 부군은 하복생이라는 분이예요. 담사라는 사람은 몰라요. 제발 믿어주세요} 손부인의 애원을 들은 모용천위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흥! 실로 철저한 놈이로군! 자신의 처에게도 신분을 속이다니... 그러나 누구든지 그 자가 상관있는 자는 모조리 죽여야 돼.} 그의 손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순간 한 줄기 노도 같은 잠력(潛 力)이 손씨모녀를 휘감았다. {아____ 악!} {악!} 손씨모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토하며 쓰러졌다. 무림의 절정고수 들도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잠력이 가엾은 두 모녀의 오장육부를 그대로 으스러뜨린 것이다. 꼭 끌어안은 채 한덩어리가 된 두 모녀는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아무 죄도 없는 두 생명, 아니 손부인의 뱃 속에서 자라고 있던 태아까지 합쳐 세 생명이 너무도 무참하게 죽 음을 당한 것이다. {가자!} 처참한 손씨모녀의 시신을 일별한 모용천위는 대갈성을 외치며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다점에는 살아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엇 다. 오직 처참한 주검과 피비린내만이 감돌고 있을 뿐...! 쏴____ 아! 돌연 비바람이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하늘도 이 비운의 모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인가? 제남성 지부대인 안여춘은 신검황 연주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 다. {알겠소 연대협. 그 자가 그리 흉악한 자라면 당연히 잡아야지 요.} 안여춘은 이어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당부장, 연대협을 도와 관부를 샅샅이 수색하게.} {감사합니다, 대인.} 연주백은 정중히 장읍을 취하며 급히 몸을 돌렸다. 이윽고 관부는 요란스럽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횃불이 어 둠을 대낮처럼 밝히고 놀란 부녀자의 비명, 왁자지껄한 소음 등이 관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지부대인 안여춘은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그의 방은 온통 돈으 로 치장한 듯 바닥에는 천축산 양탄자가 깔려있는 것을 비롯하여 옥탁, 고급가구, 진귀한 고서화 등 화려함의 극치였다. {무림맹 삼태상의 한사람인 연주백이라면 함부로 건드릴 수 없 지. 어쨌든 도적을 빨리 잡아야 할 덴데...!} 안여춘은 나직이 투덜거리며 방 안을 들어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읏! 목젖에 섬뜩한 느낌이 들며 문 뒤에 숨어있던 누군가가 방아능 로 들어선 안여춘의 상투를 뒤에서 움켜쥐었다. [히익!] 갑자기 당한 일에 안여춘은 사색이 되었다. 언 듯 돌아본 그자의 눈에 온몸이 피로 물들고 두눈이 야수처럼 번득이는 사내의 모습 이 들어왔다. {조용히 해라. 떠들면 너의 목을 잘라 버리겠다.} 귓가에 음산하게 속삭여지는 냉혹한 음성에 안여춘은 공포에 질 려 부르를 떨었다. 그의 목젖에 대어진 단검은 기이하게도 칼날이 마치 먹물에 담갔다가 꺼낸 듯이 새까만 색이었다. {누... 누구요?} 안여춘은 사지를 벌벌 떨며 물었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 괴한의 말은 나직했으나 안여춘에게 그 목소리는 공포의 속삭임 이었다. {조용히 문을 닫아. 빨리.} 괴한이 싸늘히 외치며 단검에 힘을 주자 목젖부분에 한가닥 혈 흔이 생겼다. 안여춘은 두 다리를 사시나무 떨 듯이 바르르 떨면서 방문을 닫 았다. {좋아, 그대로 뒤로 와서 침상에 앉아.} 괴한은 안여춘을 침상 위에 앉혔다. 그는 물론 연주백의 추격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단사였다. 제 아무리 무림맹의 위세가 높다 고 해도 역시 관부에는 어느 정도 꺼리는 바가 있을 것임을 계산 에 넣은 행동이었다. 6 비단 침구가 깔린 침상에는 이제 이십여 세가량의 여인이 실오 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반드시 누워 있었다. 동산 같은 젖무덤, 새하얀 살결, 그리고 미끈한 두 다리 사시에 검은 숲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실로 풍만한 육체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안여춘의 일곱째 첩 중 제일 요염한 소향(蘇香)이었다. 이미 혈도가 점혈당한 그녀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공포에 질 린 눈으로 입술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안여춘은 전신에서 피를 흘리는 악귀 같은 모습의 괴한을 쳐다 보면서 물었다. {무..... 무엇을 원하시오?} 괴한은 힐끗 창 밖을 주시하면서 냉랭히 말했다. {내가 연주백이 찾고 있는 인물이야. 너 같은 놈은 이 손가락 하 나으로도 죽일 수 있지.} 담사는 손가락으로 안여춘의 목줄기를 꾹 찔렀다. 안여춘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핏기없는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 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소.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 {살고 싶으냐?} 안여춘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렇소. 제발..... 목숨만.....} {좋아, 살려 주는 데에 조건이 있어. 나를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 갈 수만 있게 해 준다면 살려주지.} 담사는 문득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지런한 흰 치아가 드러나 는 그의 웃음은 섬뜩하도록 사이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면 너는 나와 같은 죽는 거 야. 알겠어?} 담사는 그의 목줄기를 힘껏 조였다. {커억..... 컥.... 알... 았소.} 안여춘은 숨이 막혀 캑캑거렸다. {좋아, 나를 여기서 빠져 나가게 해줄 방법을 강구해 봐. 만약 생각을 하지 못하면 너는 죽는 거야.} 담사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무서운 위협이 담겨 있었다. (이놈은 만약 내가 그를 도피시키지 못한다면 진짜 나를 죽일 것이다. 연대협의 아들을 죽인 놈이 무슨 짓이든 못하겠는가?) 안여춘은 생각할 수록 오싹 소름이 돋았다. 원래 소인배들이 그렇듯 자신의 생명은 지독히도 아낀다. 하기야 왕후장상이라도 죽음 앞에서야 똑같은 인간이 아니겠는가만은..... {이 방에 비밀통로가..... 있소이다.} 안여춘이 말하자 담사의 눈비치 번쩍 빛이 났다. {그곳이 어디냐?} 담사는 다급히 외쳤다. {나를..... 살려 주는 것이지요?} 안여춘은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되물었다. 퍼억! 다음순간 담사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안여춘의 명치에 틀어박혔 다. 명치를 강타당한 안여춘은 엄청난 고통에 숨이 턱 막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비밀통로의 입구가 어디냐?} 담사는 다시 안여춘의 목줄기를 움켜잡으며 외쳤다. 아파도 너무나 아팠다. 안여춘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처럼 무 서운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 다. 담사는 안여춘을 개처럼 끌며 고서화(古書畵)가 걸린 벽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 담사가 차갑게 말하자 안여춘은 괴로운 표정으로 족자를 들추고 벽을 힘껏 눌렀다. 스르륵_____ 그러자 갑자기 벽 밑바닥이 소리없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드러났다. 담사의 눈에 회심의 빛이 스쳤다. (하늘이 나를 도왔군. 연주백, 두고 보자. 이 수모는 꼭 갚고 말 겠다.) 내심 이를 가는 담사는 침상으로 다가섰다. {흐흐! 네년의 몸을 안아보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이다. 아깝 긴 하지만 할 수 없지.} 나직이 괴소를 흘리며 우수를 뻗었다. 순간 나신의 여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담사의 손이 그녀의 목을 조였던 것이다. 안여춘은 담사의 잔인한 행동에 얼이 빠졌다.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말은 목구멍에서 맴돌 뿐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연주백은 두 눈을 빛내며 외쳤다. {막전주, 아직도 찾지 못했소?} 막대승은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놈은 이미 빠져나간 것 같읍니다.} 관부 구석구석을 이잡듯이 뒤졌지만 담사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연주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놈이 귀신이 아닌 이상 절대 빠져나갈 수는 없네. 안 뒤진 것은 없나?} 조중이 다가서면서 말했다. {지부대인의 처소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뒤졌읍니다.} {그 놈은 교활하기 짝이 없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고 관부 로 숨어 들어온 것만 해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일인 데... 지부대인의 처소로 가자.} 연주백이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두 쌍의 눈이 제남성 지부의 관저를 주시하고 있었 다. 꽝____ 꽈르릉____ 꽝! 갑자기 뇌전(雷電)이 울리자 한 순간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다시 짙은 어둠으로 덮였다. 하지만 그 찰라의 섬광으로 두 인물의 모습이 언 듯 들어나 보였다. 담장 아래 서 있는 그 두 사람중 한명은 천갈(天蝎) 냉유도였고, 그와 같이 서있는 사람은 머리에 무량관(無量冠)을 쓴 도인차림의 노인이었다. 나이는 구순 가량이나 될까? 이마에 거미줄같이 주름살이 나 있 고 가느다란 두 눈에 싸늘한 기광이 일렁였다. 바싹 마른 얼굴에 대나무처럼 마른 몰골, 보통 사람보다 휠씬 키 가 컸다. 노도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옥척(玉尺)을 들었는데 비바람이 몰 아치고 있으나 그의 몸에는 한 점의 물기도 묻어 있지 않았다. 빗줄기가 그의 몸에 떨어질 때마다 벽에 부딪힌 듯 퉁겨 나갔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선천강기(先天 氣)를 시전할 수 있는 절정의 고인이 분명했다. {사부님,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안 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듯합니다.} 냉유도가 힐끗 주위를 살피며 근심스러운 듯 말했다. 도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너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안으로 들어가 보자.} 카랑카랑한 쇠소리의 목소리로 말하며 슬쩍 어깨를 흔들자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스르르 날아서 순식간에 관부의 담장을 넘었다. 부운등공(浮雲騰空)의 절정신법이 아닌가? 냉유도는 내심 탄복을 하면서 그도 재빨리 몸을 날렸다. 헌데 그들이 관부 안으로 사라진 직후, 스슷! 홀연히 두 명의 인영이 조금 전 냉유도가 있던 자리에 귀영처럼 내려섰다. 약간 키가 큰 인영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흠.... 청해존자(靑海尊者)까지 나타났군.} 그의 말은 나직했으나 침중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여기로 천위(天威)가 들어간 것이 틀림없겠지?} 키가 작은 인영이 황망히 대답했다. {그렇읍니다 장로님. 분명 반시진 전에 이곳으로 들어 갔읍니 다.} {좋아, 우리도 들어가자.} 일순 두 명의 인영은 소리없이 관부 안으로 빨리듯이 사라져갔 다. 제 27 장 迷路 속의 血鬪 1 비바람을 뚫고 한 명의 늙은 승인(僧人)이 손부인의 다점을 들 어서고 있었다. {웬놈의 비가 이리도 심하게 내릴꼬. 아미타불...} 나직이 중얼거리며 다점을 들어선 승인의 얼굴이 한 순간 얼어 붙었다. {아미타불! 죄악이로다... 죄악이로다.} 승인은 연신 불호를 외우며 중얼거렸다. 승인은 한동안 망연한 눈길로 다점 안의 처참한 광경을 둘러보 았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무림맹 수하들의 처참한 시체들, 그리고 한족에 서로 꼭 껴안은 채 죽은 손씨모녀의 무참한 시신 을 보는 순간 늙은 중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탄식을 흘렸다. {아미타불... 이럴 수가!} 이제 칠순가량이나 되었을까? 아니 어찌보면 휠씬 더 늙은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휠씬 젊게도 보이는 것 같았다. 자비로운 표정에 허름한 가사, 그리고 한 쌍의 눈은, 수십 년을 고행 속에 속세에 풍진을 달관한 듯한 한점의 칠정오욕도 보이지 않는 심유한 눈빛이었다. 이 노승은 바로 전날 손씨모녀와 담사가 백운사 연화송에 들렀 을 때 만났던 괴승이었다. 당시 괴승은 손부인으로부터 한 냥의 은자를 시주받고 한 마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괴승은 쭈그리고 앉아 손씨모녀를 살폈다. {....!} 일순 괴승의 눈에 이채가 스쳐지났다. {천마산수(天魔散手)!} 이어 그는 믿을 수가 없는 듯 경악성을 토했다. 노승은 한눈에 손씨모녀를 살해한 것이 마교의 천마산수임을 알아본 것이다. {아미타불! 이 저주의 마공이 다시 인세에 나타나다니 부처님이 시여! 이 일을 어찌 하라고....!}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괴승, (아미타불! 손부인의 몸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으니 잠시 말을 들을 수 있겠군.) 괴승은 손부인의 단전에 손바닥을 붙이고 진력을 주입시켰다. 잠시후, 이미 숨이 끊어진 것같았던 손부인의 몸이 문득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어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오고 느릿하게 눈을 떴다. {아미타불! 여시주, 시간이 없으니 남기고 싶은 말만 하시오.} 손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숨이 간신히 붙어있는 상태에서도 그녀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본 것이다. {스님, 저의... 부군을... 구....구해주세요. 악한들이... 그를. ... 쫓... 쫓아 갔어요. 제발...!} 손부인은 마지막 생명을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이 처절한 상황에 서도 그녀는 강적들에게 쫓기고 있을 남편만을 걱정하고 있는 것 이다. 실로 처절한 애정이고 헌신이 아닐 수 없었다. 괴승은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아무런 걱정마시오.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노납이 구하리다.} {고... 고마와요, 스...님.} 노승의 말에 비로소 안도의 표정이 된 손부인은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꺾었다. 칠공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그녀의 처 절한 표정에는 한가닥 안도의 미소가 맺혀 있었다. 괴승은 문득 전날 손부인의 행동이 생각났다. 네달전 어느 날 혼자서 백운사에 찾아온 그녀는 자신의 처절한 과거를 그에게 이야기하고는 새 남편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애원 을 했다. 괴승은 말없이 한재의 약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며칠전, 그녀는 갑자기 음식과 적은 돈이나마 가지고 나 타나 덕분에 아이를 가졌다고 하며 얼마나 기뻐했던가? 손부인...!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역경을 딛고 겨우 행복을 잡은 그녀였다. 그런데 그 행복이 며칠 가지도 못하고ㅓ 이토록 무참한 주검이 되다니....! (아미타불... 가련한 여인이여, 내 그대의 부탁만은 꼭 들어 드리 리다.) 괴승은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헌데 그 직후 괴승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돌연 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한 바퀴 회전을 그린다 싶 자 온데간데 없이 홀연 사라져 버렸다. -어선부운(御旋浮雲)! 한 모금의 진기로 천리를 난다는 전설의 경공신법이 아닌가? 이토록 초라한 괴승의 몸에서 개세의 신법이 발휘되다니...!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이다. 2 짙은 먹물 같은 어둠 속의 지하통로, 한 사람 정도 지나갈만한 비좁은 지하통로에는 한 줄기의 빛도 없어서 힘껏 두 눈을 떴지만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 개의 횃불을 든 지부대인 안여춘은 떨리는 걸음걸이로 느릿 느릿 걸었다. 그 뒤로 담사가 고통이 잔뜩 배인 얼굴로 바싹 붙어서 그 뒤를 따랐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동서로 한참 가던 지부대인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앞에는 육중한 돌문이 앞을 막고 있었다. 지부대인은 나직이 말했다. {이 문을 나서면 세 개의 통로가 있소. 그 중 왼쪽의 통로로 나 가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오.} 담사는 주위를 살펴보면서 물었다. {이곳은 보아하니 백 년도 더 넘은 것 같은데?} {그렇소. 이곳은 내가 알기로 진시황(秦始皇) 때 누군가가 난 (亂)이 일어나면 피하기 위해 이곳에다 비밀통로를 만든 것 같소.} 지부대인의 말에 담사는 뇌리를 굴렸다. (이곳에 여기저기 뻗어 있는 통로와 석실로 보아 비밀통로로서 만 만든 것 같지 않은데?) 지부대인은 한동안 돌문을 살피다가 한쪽을 가만히 눌렀다. 크르릉_____ 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돌문이 서서히 안으로 열렸다. 두 사람이 돌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하나의 석실(石室)이 나타났 다. 담사는 석실의 모습이 괴이하여 자세히 살폈다. 앞쪽이 좁고 뒤쪽이 넓어서 사다리꼴로 동쪽은 반원이고 서쪽에 는 세 개의 통로가 나 있었다. {이쪽으로 나가면 성 밖으로 나가는 길이오.} 지부대인은 왼쪽 통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는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제 나를 돌려보내 주시 오.} 담사는 차가운 눈길로 지부대인을 주시했다. {나는 약속을 지킨다. 허나 내가 당신을 풀어 주는 것은 이 통로 를 완전히 빠져나간 다음이야.} 지부대인은 이 말에 일순 공포에 질린 눈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 었다. {대협... 이제 다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닥쳐, 어서 길이나 앞장 서.} 담사는 악귀 같은 얼굴로 버럭 외쳤다. (이놈은 통로를 다 빠져나간 후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필시 나 를 죽일 것이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 지부대인은 문득 섬뜩한 느낌에 간이 오므라 들었다. 이 짐승같 은 자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혀 저항을 못하는 자신의 애첩을 거리낌없이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그 자신 역시 애첩 소홍의 꼴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무 언가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안여춘은 그같은 속마음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필사 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다!) 무언가 생각을 굳힌 그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통 로 앞으로 다가섰다. 담사는 그 자의 약간 뒤쪽에 서서 따라갔다. [에잇!] 바로 그 직후 지부대인은 갑자기 홱 돌아서서 횃불을 담사에게 던지고는 재빨리 중간 통로로 뛰어들었다. 실로 눈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나 담사는 예상을 하고 있기라도 한 듯 슬쩍 고개를 젖혀 횃 불을 피했다. 그리고는 차갑게 웃었다. {흐흐..... 죽고 싶다면 할 수 없지.} 말과 동시에 우수를 뻗치자 그의 소매에서 한 줄기 백광이 화살 처럼 통로로 쏘아 들어갔다. {크으악!} 처참한 비명이 터지고 어둠속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음이 그 뒤를 이었다. (놈이 피하려고 생각했다면 길을 제대로 가르쳐 줄 리 없지. 그 렇다면 놈이 중간 통로로 뛰어 들었으니 길이 이곳일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횃불을 집어든 담사는 재빨리 생각을 한 지부대 인이 뛰어든 중간통로로 걸어들어갔다. 몇걸음 못 가서 그는 지부 대인 안여춘이 등에 작은 수림검이 박힌 채 엎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거의 일 리는 온 것 같은데 통로는 미로처럼 얽혀진 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담사는 일순 상처에서 막중한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털 썩 주저앉았다. (수많은 생사고비를 넘겨 왔었는데 이런 지하 미로속에서 뼈를 묻어야 하다니....!) 담사는 갑자기 죽음이 생각나자 마음이 처량해졌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저벅저벅! 나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기 사작했다. (연주백이 뒤를 쫓아왔구나! 하지만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담사는 상처의 고통이 심했으나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횃불을 꺼버리고 비틀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다시 얼마나 갔을까? 문득 희미한 빛이 어둠 속을 밝히기 시작 했다. (밖인 모양이다!) 담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3 통로를 따라 두 번이나 꺾자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다. 헌데 그 석실로 들어선 순간 담사의 눈이 갑자기 부릅떠졌다. 그 석실은 바로 담사가 안여춘을 죽였을 때 있었던 바로 그 석실이었 다. 담사는 미로를 돌고 돌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고 만 것이 다. 그런데 누가 횃불을 밝혀 놓았는지 지금 석실 안은 벽쪽에 세 개의 횃불이 환히 타오르고 있었다. 담사는 황망히 사망을 살펴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냣?} 스악! 한 줄기 날카로운 교갈이 일며 벼락같이 한 자루의 검이 그를 찔러왔다. 불빛에 반사된 삼엄한 검기가 현란하게 담사의 눈을 어 지럽혔다. 담사는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위급한 김에 더 생각할 필요 도 없이 우수에 들린 흑색단검으로 막았다. 차_____ 앙! [커억!] 금속음이 터지고 담사는 울컥 입에서 피를 쏟으며 서서히 주저 앉았다. {호호... 내가 악적을 잡았다.} 소리치는 여인은 바로 태허천존 황보승의 외동딸인 남장여인 황 보가혜였다. 보통 때 그녀는 사내처럼 변성음을 내었으나 너무도 기쁜 탓인 지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픈 여인의 옥음으로 변해 있었다. 휙! 휙! 일순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리고 그가 나왔던 통로에서 몇 명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백부님, 제가 악적을 잡았어요!} 황보가혜는 날아든 인영들을 돌아보며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틀....렸다!) 나타난 인물들을 본 담사는 절망에 빠졌다. 새로이 장내에 나타난 그 인물들은 바로 신검황 연주백을 비롯 한 막대승, 귀견수 조중, 염황도 염곡, 등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즉시 담사를 사방에서 에워싸며 무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젊은이가 담사라는 자객인가?} 신검황 연주백이 앞으로 나서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부님, 물어볼 것도 없어요. 이 자가 틀림없이 연오빠를 죽인 흉수예요.} 황보가혜가 매섭게 외쳤다. 담사는 처참한 몰골로 변한 얼굴을 들었다. 산발한 머리, 땀에 젖은 얼굴 그리고 입가에 잔뜩 피가 묻은 그의 모습은 악귀처럼 보였다. {크흐흐.....} 담사는 괴소를 흘렸다. {그렇소. 바로 내가 연대강을 죽인 사람이오. 그를 죽인 것은 사 실이지만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나의 일이었을 뿐이오. 바로 살인 이 나의 직업이니까.} 담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개나 소를 잡듯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중인들은 그의 말에 흠칫했다. 그 동안 수많은 괴사와 많은 종류의 인간들을 보아왔지만, 지금 까지 이토록 철저히 교활하면서도 잔인하고 비정한 인간은 처음 본 것이다. (실로 철저한 마귀로다.) 연주백은 새삼 다시 담사를 쳐다보며 싸늘히 말했다. {아무리 인면수심의 흉악한 자라도 사람이 가지는 최소한의 양 심을 가지고 있는 법인데 젊은이는 구제할 수 없는 악도로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노기에 연주백은 차가운 눈길로 노려보았 다. 담사는 문득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연대협! 괜한 동정은 필요 없소이다. 내가 당신 아들을 죽였으 니 금전의 빚은 금전으로 갚고 피의 빚은 피로 갚은 법, 나는 이미 각오가 된 몸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그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연주백은 비롯한 중인들은 일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래도 사 람이면 일말의 죄책감이나 무언의 표시가 있을 법인데, 담사의 말 과 행동은 그들로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잔인한 독심의 인간 아닌가? {이런 천하에 악적같으니.} 황보가혜가 더 참지 못하고 다리를 날려 담사의 옆구리를 걷어 찼다. 퍽!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담사는 땅바닥을 굴렀다. 비록 그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지만 한 마디의 신음도 내지 않고 무서운 눈빛으로 황보가혜를 노려보며 말했다. {흐흐..... 네년의 몸매가 일품이군. 내 몸만 이렇지 않다면 너의 고운 입에서 즐거운 비명이 쏟아지게 만들어 줄 텐데.....아까운 일 이야!} 황보가혜는 담사의 음탕한 말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이... 악적, 죽어랏!}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벼락같이 검을 떨쳤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검광을 피우는 그녀의 검은 신녀검(神女劍)이라는 절세이기로 무 산(巫山) 신녀문(神女門)의 지보(至寶)였다. 신녀검이 담사의 목을 찔러왔으나, 담사의 표정은 한 점의 동요 도 없었다. 다만, 핏발 서린 눈으로 그녀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 다. 바로 그 절대절명의 순간 차앙! 갑자기 연주백이 손을 휘두르며 신녀검을 막았다. {잠깐, 그를 아직 죽이면 안된다.} 황보가혜는 연주백의 손속에 신녀검의 방향이 틀어지자, {백부님, 이 자는 마귀와 같은 놈이예요. 저를 말리지 마세요. 백 부님!} 그녀는너무도 화가 치밀어 다시 신녀검을 휘둘렀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잉! 갑자기 한 줄기의 유령같은 인영이 벼락같이 담사를 덮쳐갔다. [물러서라!] 연주백은 순간 미처 돌아볼 사이도 없이 풍뢰급전(風雷急傳)의 수법으로 장풍을 뿌렸다. 일순 담사를 덮쳐들던 인영도 재빨리 연주백 쪽으로 몸을 틀며 우수를 저었다. 4 꽈르릉! 두 가닥의 강맹한 장력이 부딪치면서 굉음과 함께 연주백이 휘 청 두 걸음 물러섰다. 암습한 자도 허공에서 재주를 넘으며 뒤로 훌쩍 날아갔다. 하지만 그자는 몸이 벽에 부딪친다 싶자, 훌쩍 재주를 넘으며 벽 을 박찼다. 이어 쌍수를 흔들며 다시 연주백에게 덮쳐들었다. 연주백은 갑자기 현란한 손그림자가 무수히 허공에 난무하자 해 연히 놀라며 그도 팔보간선(八步 蟬)의 신법으로 몸을 날리며 쌍 장을 뿌렸다. 퍼펑! 쌍장이 교차하면서 굉음이 석실 안을 진동했다. 두 사람은 다시 퉁기듯이 뒤로 두 걸음씩 물러섰다. (이 자의 장력이 굉장히 강력하군.) 연주백은 은은히 손이 저려오는 통증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전신에서 강인해 보이는 기세를 무럭무럭 흘려내는 삼십대의 흑 삼인! 그는 바로 다점에서 손씨모녀를 죽이고 급히 달려온 모용천 위(慕容天威)였다. {젊은이는....?} 연주백은 모용천위의 모습에 경악성을 흘렸다. 산대는 몇 달전 금룡장의 사건 때 만났던 청년 아닌가? 한눈에 상대를 알아본 연주백의 눈빛이 아주 침중해졌다. 스슷! 중인들은 모용천위를 포위했다. 연주백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금룡장에서 모용천위의 무서운 무 예를 두 눈으로 직접 본 막대승과 조중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 다. 하지만 자신들의 수하가 이 자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생각을 하 자 두 사람의 눈에 원한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갑자기 귀견수 조중이 대갈성을 지르며 장풍을 날렸다. {이놈! 차수와 운유의 목숨을 내놔라!} 장차수, 자운유, 사공표등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세명의 심복을 잃은 조중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하여 득달같이 모용천위를 덮쳐갔다. {안되네 부전주!} 이미 한차례 모용천위의 무서움을 치가 떨리도록 경험한 감찰전 주 막대승이 흠칫 놀라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조중의 몸은 모용천위의 지척에 이르고 있 었다. 모용천위는 조중의 공격을 본척도 않다가 그가 내뿜은 장풍이 바로 지척에 이르자 그제서야 슬쩍 손을 저어 조중의 장풍을 맞받 아쳤다. (허억!) 조중은 자신의 장풍이 모용천위의 오른손과 부딪히는 순간, 갑자 기 장풍이 바닷 속으로 빠진 듯 그 힘이 소실되는 것을 느끼고 질 겁했다. 그때서야 깜짝 놀란 조중은 황급히 몸을 옆으로 날렸다. 퍼펑! 하지만 어느 새 한 가닥 무서운 강력이 파고 들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바로 마교의 저주마공 천마산수(天魔散手)였다. {아____ 악!} 처절한 비명을 지른 조중의 몸은 뒤로 튕기듯이 날아가 모질게 벽에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부전주!] 막대승이 비통하게 외치며 바닥에 나뒹군 조중에게 달려갔다. 조 중의 가슴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푹 함몰되어 부러진 갈비뼈 가 살갖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막대승과 함께 조중에게 달려온 황보가혜는 그 끔찍한 모습에 절로 고개를 돌렸다. 막대승은 급히 응급처치를 하고는 조중의 상세를 상세를 살폈다. 조중은 늑골이 부러진 것 뿐만 아니라 온몸의 기맥과 근골이 끊 어지고 부러져 있었다.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설령 살아난다고 해도 폐인(廢人)이 되고 말 중상이었다. 무림맹내에서도 유수한 고수인 감찰전의 부전주 귀견수 조중이 실로 어이없게도 단 일초에 사경을 헤매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이놈! 감히 부전주를 해치다니....!] 그때 모용천위의 옆구리로 또 다시 강맹한 경력이 파고들면서 연주백의 노한 목소리가 울며 퍼졌다. 갑작스런 연주백의 공격에 모용천위는 침착하게 우수로 회전을 그리며 두 발을 교차시켰다. 직후 펑 하는 소리와 동시에 연주백은 손바닥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에 다급히 물러섰다. (천마산수! 과연 절세의 마공이다.) 내심 가슴이 철렁함을 느끼며 연주백은 검을 뽑아 벼락같이 찔 러갔다. 쩌어엉! 한 줄기 검기가 횃불의 불빛에 번적 빛을 뿌렸다. 신검팔초 중의 신검뇌성(神劍雷星)이라는 수법이었다. 모용천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우수를 회전시키면서 검을 막 아왔다. (이놈의 손은 강철보자 더 단단하다.) 이미 두 차례나 천마산수를 격어본 연주백은 입술을 꽉 깨물며 찔러가던 수법을 옆으로 꺾으며 배심을 배어갔다. 모용천위는 갑작스런 연주백의 변초에 크게 놀라서 급히 손을 움츠리며 맹렬히 발끝을 찼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서 연주백의 칼끝은 그의 하복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모용천위는 흠칫 놀라며 내려다보았다. 아랫배 부근에 두 치 가 량 옷이 배어져 있는 그 사이로 가느다란 핏물이 스쳐나왔다. 비록 중상은 아니었으나 모용천위는 문득 등골에 식은땀이 솟다 났다. (과연 검으로 적수가 없다는 신검황의 명성이 명불허전이군. 하 나 네놈은 어머님의 원수..... 죽인다.) 모용천위는 이를 갈다가 돌연 기합성을 토했다. {탓!} 그의 우수가 일순 은은한 녹광을 띠었다. 그와 동시에 모용천위 의 우수가 기이한 각도를 그리며 연주백의 기문혈을 쪼개왔다. 연주백은 갑작스런 모용천위의 괴이무쌍한 수법에 날카로운 눈 빛으로 일시에 살검을 쳐냈다. 츠츠_____ 츠츳_____츠! 칼날 같은 검기가 유성처럼 쏘아갔다. 카캥_____ 캥! 장과 검이 부딪치자 요란한 소음이 터지고 두 사람은 물러선다 싶자 다시 무섭게 뒹어켰다. 중인들은 연신 전개되는 두 고수의 절세적인 수법에 손에 땀을 쥐었다. 두 사람의 싸움이 하도 치열해 감히 도운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방원 오 장 내에 스치는 검기와 장력에 중인들은 오히려 분분히 물러섰다. 모용천위의 천마산수는 괴이하기 짝이 없었으며 교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에 비해 연주백은 검식을 정묘한 가운한 간간이 쏟아져 나오 는 검기는 패도적인 기운을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환영처럼 몸을 날리며 수십 초를 교환했다. 돌연 모용천위의 우수가 검을 퉁겨 내면서 좌수가 벼락같이 연 주백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5 연주백은 갑자기 옆구리에 강력한 장력이 밀어닥치자, 비응전시 (飛鷹展翅)의 신법으로 맹력히 도약을 하며 검끝을 아래로 세우고 모용천위의 뇌문혈을 찔러왔다. 순간 모용천위는 두 발을 땅에 굳게 딛고 우수를 위로 쳐냈다. 그의 우수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경력(勁力)을 최대한 주입시켰다. 카캉! 장과 검이 맹렬히 부딪치는 순간 연주백의 보검이 유리깨지듯 파열되었다. 연주백의 검기보다는 모용천위의 천마산수쪽이 미세한 차이로 우세를 점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퍼퍼퍽! 박살난 보검의 파편은 폭발하듯 위로 퉁기어 올라가 순식간에 연주백의 전신에 파고들었던 것이다. [큭!] 수십개의 부서진 검편(劍片)이 몸에 박히는 순간 연주백은 둔탁 한 신음성을 흘리며 실 끊어진 연처럼 돌바닥에 추락했다. {백부님!} 황보가혜가 찰라에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 뾰죽한 교갈을 외쳤다. {크으...} 연주백은 바닥에 무사히 내려 섰지만 입으로 선혈을 내뿜으며 서서히 무릎을 꿇다가 돌바닥에 고꾸라졌다. 황보가혜는 소스라치게 놀라 연주백을 부축했다. {백부님! 괜찮으세요, 백부님!} 조중을 위시한 염곡 등은 다급히 연주백을 호위했다. 연주백은 입에서 붉은 선혈을 흘리며 말했다. {혜아야, 빨리 피해라..... 쿨럭..... 저 자의 천마산수는 오직 혜천 대사만이 받아 낼 수 있으니 빨리 그 분에게...} 연주백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신검황 연주백! 그가 이 연원을 알 수 없는 지하미로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 한 것이다. {백부님..... 흑흑..... 백부님....} 황보가혜는 연주백의 시신을 끌어안고 처절히 흐느꼈다. 한편 모용천위는 간발의 차이로 연주백을 죽일 수 있었으나 그 역시 연주백이 내친 무형검기(無形劍氣)에 오장육부가 상해 기혈 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으음! 연주백, 역시 신검황이란 별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이다.) 모용천위는 내심 자신의 상처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주위를 살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연주백을 죽이다니 역시 천마산수는 무서운 마공이군.} 목소리는 걸걸하면서도 음침했다. 모용천위는 고막을 울리는 뇌전 같은 목소리에 한기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의 일노일소(一老一少)가 석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갈 냉유도와 무량관을 쓴 음산한 인상의 노도인이었다. 이 노도인의 표정은 얼음같이 냉랭했는데 쏘아보는 눈빛은 뇌전 같이 번쩍거렸다.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무서운 안광.... 저 도인은 신검황을 능가하는 절정고수다.) 모용천위는 노도인을 살피며 내심 침음성을 삼켰다. 문득 노도인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쪽에 주저앉아 있는 담사의 오른손에 멈추었다. 담사는 여전히 칼날이 먹물에 담갓다가 꺼낸 듯 새까만 유령비(幽靈匕)를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천마비(天魔匕)가 저 놈의 수중에 있었군.) 순간 도인의 눈에 일순 탐욕의 빛이 스쳐지났다. 가느다란 전음성이 냉유도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도아야! 사부가 천마산수를 쓰는 놈을 상대할 테니 그 틈을 타 서 천마비를 수중에 넣어라.> 냉유도는 힐끗 담사를 주시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인은 무심한 눈으로 한 사람씩 쳐다본 다음 모용천위의 얼굴 에 멈추었다. {어린 아해야, 넌 혁사군(赫史君)과는 어떤 관계냐?} 모용천위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 늙은이가 누구인데 혁어른을 알고 있지?)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혁어른이 강호에서 활동한 것은 단 두 번, 그것도 모두 오십 년 전의 일인데.) 도인은 냉랭히 외쳤다. {이놈아, 노부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모용천위는 도인의 거친 어조에 짙은 검미를 찌푸렸다. {노도인은 누구시오?} 그의 어조는 못마땅한 듯 퉁명스러웠다. {이런 버릇 없는 놈! 나 청해존자가 네놈의 말버릇을 먼저 고쳐 주마!} 노화가 치밀어 오른 도인은 벼락같이 우수를 뻗었다. 손가락을 기이하게 구부리고 모용춴위의 어깨를 낚아채오는 수법은 느린 듯 하면서도 빨랐고 독락하면서도 변화무쌍했다. 노도인의 그 일초를 본 모용천위는 경악성을 토했다. {탈명음풍조(奪命陰風爪)!} 그러면서도 그는 우수를 회전시키며 재빨리 비룡번신(飛龍飜身) 의 신법으로 물러났다. 탈명음풍조는 사도의 악랄한 지공(指功)으로 이미 백 년 전에 절전된 수법이다. 손가락의 힘은 금석을 종이같이 뚫고 또 손가락에 응축되어 있 는 독기는 냄새만 맡아도 정신을 잃게 하는 실로 극악한 지공이다. 이것에 맞설 지공으로는 소림의 탄지신공(彈指神功)이나 마교의 혈마지(血魔指) 뿐이다. 모용천위는 밀랍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싸늘히 외쳤다. {노선배님이 청해존자(靑海尊者) 오합률(吳合律)이란 분이시군 요.} 그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 속에는 비웃는 듯한 빛이 담겨 있었다. 노도인 즉, 청해존자 오합률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다시 우 수를 흔들며 공격해 왔다. {노부의 이름이 네놈이 부르라고 있는 것인 줄 아느냐? 못된 놈 같으니라구.} 모용천위는 중상을 입은 바람에 제대로 천마산수를 펼칠 수가 없었다. 천마산수는 높은 공력을 필요로 하는 마공으로 내상을 입어 공 력이 탕감된 모용천위로서는 어쩔 수 없이 마영신보(魔影神步)를 밟으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6 마영신보-! 이겅는 마교의 괴이막측한 신법으로 조금만 진기가 남아 있어도 절세고수를 상대하여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기묘한 보법이었다. 청해존자는 자신의 손속을 모용천위가 기이한 보법으로 미꾸라 지처럼 빠져 나가자, {흥, 마영신보였군. 어디 이것도 한 번 피해 봐라!}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수중에 들린 좌장을 벼락같이 후려쳤다. 일순 굉장히 부챗살같이 펴지면서 수십 자루로 늘어나 강력한 경풍과 함께 방원 이 장 내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 {첨사십팔법(添死十八法)!} 첨사십팔법은 청해존자의 독문절예다. 모용천위로서도 상처를 입지 않아도 받기가 힘들 판인데 지금 상처입은 그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모용천위는 일순 이를 악물고 전신의 공력을 운집시키고 우수에 실려 후려갈겼다. 그것은 극도의 위험에 처해 죽기를 각오한 동귀 어진의 수법이었다. 돌연 이때였다. {천위야, 물러서라!} 노쇠하면서도 고막을 찌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싶자 한 줄기 인영이 갑자기 뛰어들었다. 카캉_____ 캉! 요란한 굉음이 터지고 석실이 진동을 일으켰다. 이어 자욱한 먼 지가 가라앉자 새로 나타난 인영이 드러났다. 나이는 청해존자보다 몇 살은 더 되어 보이는데 짙은 흰 눈썹이 눈을 덮다시피 하고 얼굴색은 붉으레한 자색빛을 띠고 있었다. 몸에는 갈색장포를 입고 있는데 전신에서 음산한 기운이 피어오 르고 있었다. {흥! 미친 놈.} 갑자기 나타난 이 갈색장포의 노인은 갑자기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귀영같이 한쪽으로 덮쳐갔다. 천갈 냉유도는 기회를 보고 있던 중 돌연 귀신 같은 자가 나타 나자 재빨리 담사의 수중에 있던 흑색단검, 즉 천마비를 낚아채갔 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갈색장포 노인이 유령같이 자신의 앞을 악으 며 먼저 천마비를 낚아채지 않는가? [비켜!] 냉유도는 다급히 장풍을 쳐냈다. 허나 갈색장포노인의 좌수가 흔들린다 싶자 눈앞이 캄캄해짐과 동시에 어깨가 부서지는 고통에 신음성을 토하며 뒤로 퉁기듯이 날아갔다. {도아야.} 청해존자는 다급히 경호성을 발하며 냉유도를 받았다. 냉유도의 어깨뼈가 으스러졌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 일거수 일투족에 천마비를 낚아채고 냉유도 같은 고수를 물리치는 갈색장포노인의 번갯불 튀는 듯한 신속무비한 수법은 중 인들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청해존자는 냉유도를 벽쪽에 앉혀 놓고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 은 짙은 살광을 띠고 갈색장포노인을 노려보았다. 이때 모용천위는 안도한 표정으로 갈색장포의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혁어른께서 오셨군요.} 그의 말은 담담했으나 존경의 빛이 담겨 있었다. {위아야, 상처가 심한 것 같구나.} 갈색장포노인의 말은 비록 음산했지만 그 누구라도 그의 어조에 는 손자에게 말하는 듯 따뜻한 기운이 서려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혁 늙은이, 네가 감히 내 제자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그때 청해존자 오합률이 버럭 노성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청해존 자의 눈빛은 갈색장포 노인의 우수에 들린 천마비를 향하고 있었 다. {흐흐.... 오합률, 불만이 있다면 여기에서 오십 년 전의 빚을 청 산해 볼까?} 혁노인이라 불리운 갈색장포노인은 비웃듯이 말했다. {혁사군! 어디 네놈의 절명장(絶命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 자.} 청해존자는 노갈을 터뜨리며 수중의 괴장(拐杖)을 휘둘렀다. 그러자 혁씨 노인도 쌍장을 좌우로 교차시키며 마주 장풍을 쳐 냈다. 두 줄기 음울한 장풍이 기이한 각도로 괴장을 치며 가슴을 파고 들었다. 청해존자는 괴장으로 돌바닥을 치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혁노인이 한 발 앞으로 중궁을 밟으며 다시 쌍장을 후려제꼈다. 갑자기 수십 개의 손그림자가 꽃잎이 바람에 날리어 쏟아지듯 청해존자의 각 요해대혈을 노리고 쏘아왔다. {절명화우(絶命花雨)... 왕년의 그 수법이었군.} 청해존자가 싸늘히 외치며 괴장을 비껴들고는 혁노인의 양 손 맥문을 찔러갔다. 괴장은 본시 무겁고 거북한 병기로써 휘둘러 부수는게 용이한 병장기였다. 그러나 청해존자가 공력을 주입시키자, 괴장은 칼처럼 변해 출초가 가뿐하면서도 날렵해졌다. 혁노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그대로 자신의 장풍을 발산 하면 청해존자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의 양 손도 병신이 되어 버릴 것이다. 결코 남의 생명과 자신의 두 팔을 바꾸고 싶지 않은 혁노인은 손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청해존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디 나의 첨사박룡(添死縛龍)의 수법을 받아 봐라.} 이것은 첨사십팔법의 절정수법으로 찌르고 후려치는 변화가 포 함되어 있었다. {그따위 캐캐묵은 수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혁노인도 마주 고함을 지르며 쌍장을 엇비스듬히 회전시켰다. 슈슈슉! 카캉____ 캉! 장과 괴장이 무서운 힘을 동반하고 석실을 무너질 듯 뒤흔들었 다. 일순 두 사람의 신형은 똑같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이것으 로 보아 이 두 사람의 공력은 백중지세임이 분명했다. 7 (이 노마두는 그 동안 굉장히 공력이 늘었군. 이렇게 되면 천마 비를 뺏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안돼. 절대 천마비를 놓칠 수는 없어.) 청해존자는 내심 결단을 내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좋아, 혁사군. 누가 죽고 살든지 간에 결판을 내자!} 이를 간 청해존자는 괴장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혁사군도 냉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쌍장을 쳐들었다. 헌데 바로 이 긴박한 순간, {아미타불....} 돌연 나직한 불호성이 들리고 세 명의 노인이 장내에 나타났다. 그들은 회색가사를 걸치고 고뇌 서린 얼굴을 한 철불(鐵佛) 혜 천(慧天)대사와 태허천존(太虛天尊) 황보승, 그리고 개방의 무영신 개(無影神 ) 동추평이었다. 세 기인을 발건하자 연주백의 시신을 지키고 있던 황보가혜가 제일 먼저 반가움에 울먹였다. {흐흑..... 대사백! 아빠!} 그녀는 황망히 아버지인 태허천존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출현에 제일 놀란 사람은 혁사군과 모용천위였다. 철불 혜천대사만 해도 혁노인에 못지 않은 절세의 고수, 거기다 가 황보승과 동추평까지 나타났으니 그들로서는 낭패한 심정이었 다. 그러나, 청해존자와 냉유도는 이들의 출현을 몹시 반겼다. {무림말학 냉유도가 삼가 세 분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삼 인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연주백의 죽음에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혜천이 오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청해존자는 혜천대사가 가볍게 인사를 하자, {허헛! 대사도 오십 년 전, 전전대 방장이시던 법호(法護)대사를 따라 다닐 때 소사미였는데 그 사이 이렇게 늙었다니....!} 청해존자는 문득 감회가 치밀어 오르는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혜천대사는 청해존자에게 합장을 해보인 뒤 혁사군과 모용천위 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미타불! 두 분 시주께서 마교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혁노인은 나직이 괴소를 흘렸다. {흐흐! 네가 철불이라는 소림의 땡중이냐?} 그가 무례하게 말하자 중인들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혜천대사가 무림에서도 얻도 있는 신뢰와 존경은 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이다. 헌데, 이토록 혜천대사를 무시하는 어조로 말 하니 막대승을 위시한 무림맹의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는다면 오히 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닥쳐라! 마교의 노물아. 감히 누굴 보고 그 따위 망발을 지껄이 느냐?} 혜천대사를 성불처럼 여기고 있는 염황도 염곡이 노성을 터뜨렸 다. 순간 혁노인의 시선이 염곡을 향했다. 그러자 염황도 염곡은 그의 찌르는 듯한 무서운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염곡은 흑건추혼대의 단주로 그의 무예는 일방의 주인에 못지 않은 고수이다. 하지만 혁노인의 마공(魔功) 같은 눈빛은 도저히 정면으로 바라 볼 수 없었다. {크흐흐! 이런 쥐새끼 같은 놈, 감히 노부를 모욕하다니.....} 혁노인은 분통이 터진 듯 괴소를 터뜨리며 우수를 뻗었다. 한 줄 기 소리없는 암경이 순식간에 염곡의 코 앞에 다가왔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손을 멈추시오.} 하지만 어느 새 혜천대사가 염곡의 앞을 막으며 소맷자락을 저 었다. 순간 퍽 하는 둔탁한 소음이 터지고 혁노인은 주춤 한 걸음 뒤 로 물러섰다. {수미강기(須彌 氣)!} 수미강기라면 불문의 진산비예 아닌가? 불문에서 이 우주의 중 심지를 일컫는 수미산(須彌山)처럼 그 위력이 무겁기 한량없는 내 가신공이 바로 수미강기다. 혜천대사가 수미강기를 대성한 사실을 알아본 혁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위축되었다. 무릇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 한 걸음 물러선다는 것은 패함과 다름이 없었다. 혁노인은 경악과 수치심이 뒤엉킨 눈빛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 다. {좋아, 좋아, 너 땡추가 법공(法空)의 수미강기까지 이어받았구 나. 어디 노부가 최근에 익힌 절명장(絶命掌)의 절명구환(絶命九 環)의 수법을 받아 봐라!} 그는 이를 갈면서 쌍수를 회전시키며 후려갈겼다. 순간 아홉 개의 손그림자가 원을 그리면서 소리없이 혜천대사의 구대사혈을 향해 무섭게 쏘아왔다. 원래 절명구환이라는 수법은 절명장법의 마지막 초식으로 혁노 인도 오 년 전에서야 겨우 억힌 천하무쌍의 오묘한 장법이었다. 혜천대사는 창졸간에 손그림자의 경풍에 휩쌓였다. {아미타불... 이제보니 시주께서는 서장(西藏) 일대에서 위명을 떨치시던 절명마존(絶命魔尊) 혁(赫)선배였구료.} 그러면서도 불호를 외우며 우수로 가볍게 반원을 그려 앞으로 반듯이 밀어내었다. 그 순간, {혁어른 물러나십시오. 금강복마수(金剛伏魔手)입니다.} 모용천위가 다급히 외치며 전권에 뛰어들었다. 콰꽝_____ 쾅! 광열한 폭음이 터지고 세 사람의 신형은 뒤로 튕기듯이 물러났 다. {아미타불... 천마산수가 다시 인세에 나타나다니...} 혜천대사는 약간 창백한 안색으로 합장하며 모용천위를 쳐다보 았다. 혁노인의 품에 안긴 모용천위의 입가에 검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천위, 이놈아 괜찮으냐?} 황망히 말하는 혁노인의 표정은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혁어른, 나는..... 괜찮읍니다.} 모용천위는 괴로운 표정으로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청해존자가 벼락같이 혁노인을 덮쳐갔다. 그는 괴장으로 혁노인의 오른손 맥문을 찌르며 왼손은 갈고리처 럼 오므려 천마비를 낚아 채 갔다. 신법의 빠름과 금나수법은 번갯 불처럼 눈부시게 빨랐다. 제 28 장 佛家第一尊, 梵天神佛의 登場 1 {오합률, 네놈이 치사하게 암습을 하다니?} 혁씨노인은 갑작스런 청해존자 오합률의 암습에 경악성을 터뜨 렸다. 그는 다급히 오른손을 움츠리며 몸을 피했으나 청해존자의 암습은 너무나 빨랐다. 혁노인은 꼼짝없이 청해존자의 암습에 당할 판이었다. 헌데 청해존자의 왼손이 벼락같이 천마비를 집었다 싶은 순간이 었다. 번쩍! 갑자기 한 줄기 핏빛 광채가 작렬하며 청해존자의 팔목을 베어 오는 것이 아닌가? 이제 천마비를 잡아 채면 되는데 갑자기 혈광이 쏘아오자 청해 존자는 경호성을 지르며 급히 왼손을 움츠렸다. {첩혈마황검( 血魔皇劍)!} 경악성을 토하며 청해존자는 뒤로 삼 장이나 물러섰다. 어느 틈에 몸을 세운 모용천위가 한자루 핏물을 칠한 듯 시뻘건 검신을 지닌 연검을 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청해존자는 모용천위의 수중에 들린 핏빛 광채의 연검이 무엇인 지 한눈에 알아보고 탐욕의 눈빛을 지었다. 허나 그의 마음은 조금 전 첩혈마황검의 위력에 새삼 섬뜩해져 왔다. [첩혈마황검!] [으음... 저것이...!] 중인들은 첩혈마황검이란 말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첩혈마황검을 바라보았다. 핏빛 첩혈마황검은 음산한 광채를 띠며 흔들거렸다. 문득 혜천대사가 떨리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시주의 성을 알려줄 수 없겠나?} 무엇때문인지 그의 두눈은 격동에 차있었다. (정말 닮았어! 역시 저놈이 그녀의 아들인가?) 무영신개는 연신 철불 혜천대사와 모용천위를 번갈아보며 게슴 츠레한 눈을 빛냈다.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는 인물이라면 혜천대사 와 모용천위의 얼굴이 어딘가 닮았다는 사실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혜천대사의 물음에 모용천위는 피묻은 입가를 쓰윽 훔치며 대답 했다. {나의 성은 모용이요.} 그는 혜천대사를 쳐다 보지도 않고 담사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헌데 그 순간 모용천위의 눈빛이 놀라움에 크게 벌어졌다. 모용천위를 애닲은 눈빛으로 쳐다보던 혜언대사를 위시한 중인 들도 그의 놀라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한결같이 놀라운 눈 빛이 되었다. 한 명의 허름한 노승(老僧)이 그곳에 있었다. 담사의 옆에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한명의 노승이 쭈그리고 앉아 중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담사의 전신을 살피고 있었다. 석실에 있는 중인들은 하나같이 중원무림에서 절정의 고수들이 다. 이들은 십 리 밖의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 로 청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 노승은 감쪽같이 들어와 있으니 참으로 눈뜨고도 믿 지 못할 괴이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노승을 주시하던 청해존자와 혁사군 그리고 혜천대사 의 눈빛이 무섭게 떨렸다. 그와 동시 한결같이 삼 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범천신불(梵天神佛)!} {법공(法空)대사!} {사숙조(師叔祖)!} 맨 마지막의 경악성은 혜천대사가 발한 것이었다. 이어 혜천대사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소림 십칠대제자 혜천이 사숙조를 뵈옵니다.} 그의 목소리는 격동과 경건함에 가득 차 있고 이마에 피라도 낼 듯 연신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 [으으!] 반면 혁노인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덜덜 떨더니 다음순간 모용 천위의 손을 잡아채며 말없이 옆의 밀로의 어둠속으로 몸을 날렸 다. 혁노인의 갑작스런 행동에 모용천위가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으 나 혁노인은 재빨리 그의 수혈을 점혈하고는 그대로 쏜살같이 석 실 밖으로 날아갔다. 청해존자는 혁사군처럼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리며 황망히 냉유도를 데리고 밖으로 달 려나갔다. 이윽고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석실 안은 기이한 침묵에 사로 잡혔다. 태허천존 황보승과 무영신개 동추평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다음 말없이 경건한 얼굴로 허름한 노승을 주시했다. 황보가혜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꿇어엎드린 혜천대사의 엄숙 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과 자신의 부친 태허천존, 그리고 동추평의 숙연한 표정에 말문을 닫고 말았다. 백 년 전, 어느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숭산 (嵩山) 소림사(少林寺)에 수백명의 무리가 침입했었다. 그자들은 저 서장 성숙해(星宿海)에 근거지를 둔 마교(魔敎)의 마인들이었 다. 그들은 옛날 자신들의 개파조사인 마승(魔僧) 마니(魔尼)가 소림 의 육조(六祖)의 혜능(慧能)에게 패한 설욕을 하기 위해 소림사를 야습한 것이다. 당시 소림의 장문방장은 각생(覺生)대사로서 그날 밤 침입자에 의해 숨을 거두고 오 명의 장로를 비롯 이백여 명에 가까운 제자 들이 죽어갔다. 실로 소림 개사 이래 최대의 치욕이었다. 그로부터 삼일 후, 법자(法字)의 항렬인 소림십팔나한(少林十八 羅漢)이 소리없이 숭산을 빠져나와 서장(西藏) 성숙해(星宿海)까지 머나먼 길을 떠났다. 그리고 소림혈사가 벌어진 후 만 한 달째인 어느날, 성숙해의 한 계곡에서는 소림십팔나한이 수백 명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기 시작 했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안의 거대한 성채의 정문 처마 밑에는 핏빛 의 글씨로 마교(魔敎)라는 현판이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교(魔敎)! 그렇다! 이곳이 바로 오백년전 마승(魔僧) 마니(魔尼)가 창건한 나후마교(羅吼魔敎)의 성지라고 불리우는 성숙해(星宿海)의 마애곡 (魔崖谷)이었다. 당시 마애곡에 머물던 마교의 제자들은 수천을 넘었으나 한 몸 으로 변한 듯 소림십팔나한의 나한진(羅漢陣)은 가히 철벽이었다. 거기다가, 이들의 일신에서 펼쳐지는 소림의 칠십이종 절예는 강 혼하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변화무쌍했다. 마교의 마공은 괴이하고 기묘했지만 이들 앞에는 추풍낙엽이었 다. 풍차같이 일정하게 회전을 그리며 십팔나한의 수중에 들린 계도 가 번뜩일 때마다 어림없이 피가 튀고 팔다리가 떨어졌다. 쌓이고 또 쌓이는 시신 그리고 핏물이 내를 이루어 흘러내렸다. 소림의 제자는 실로 강하고 또 강했다. 2 삼주야(三晝夜), 인간이 신(神)이 될 수 없듯이 십팔나한도 피와 혈육으로 된 사 람이었다. 그들은 지치고 또 지쳤다. 하나 끊임없는 마교의 제자들의 공격 이 끊임이 없으니 그들의 백색가사에도 피로 얼룩져 가기 시작했 다. 돌연 이때, 십팔나한의 입에서 동시에 장엄한 범창(梵唱) 소리가 울러퍼졌다. {아제바라....} 일체의 사악을 쫓아내는 범창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마침내 용이 울부짖는 듯 마애곡을 뒤흔들었다. 문득 그 순간, {아미타불... 소림의 영광이여!} 일성의 대갈성과 함게 십팔나한은 꽃잎이 흩날리듯 사방으로 비 산했다. 그리고, 성난 황소가 초원을 질주하듯 마교의 제자들 속에 뛰어 들었다. 살신성인(殺身成仁)____ 내 몸을 바쳐 소림의 영광을 찾는다. 죽이고 또 죽이고 그리고 죽어갔다. 그 이튼날 새벽, 피투성이의 승인 한명이 비틀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_____! 이곳은 인세가 아니라 아비지옥이었다. 여기저기 팔다리를 부여잡고 신음성을 발하는 중상자들, 그리고 말없는 참혹한 시신들... 중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법공(法空)이 무슨 죄를 저질렀읍니 까?} 그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느릿느릿하게 새벽의 안개 사이로 사라져 갔다. 자신을 법공이라고 말한 승인은 그날로부터 영원히 자취를 감추 었다. 후세 사가에 의해 소림십팔천불(少林十八天佛)로 불리운 소림십 팔나한..... 소림사가 배출한 최강의 아라한들로 일컬어지는 그들의 신화는 그렇게 해서 하나의 비사로 전해져 온 것이다. 그들 중에 단 하나 마애곡에서 살아나온 승인이 바로 후일 범천 신불(梵天神佛)이란 지고의 이름을 얻게 된 법공(法空)대사였던 것 이다. 그는 혜천대사의 사조가 되는 전전대 소림방장 법호(法護)대사 의 바로 손 아래 사제이기도 하다. 허름한 이 노승은 바로 손부인의 임종을 지켜본 노승이었다. 헌 데 그가 바로 소림십팔천불의 일 인인 범천신불 법공대사였단 말 인가? {....?} 장내는 숨막히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법공대사는 담사는 가만히 안았다. {아미타불... 부처님이 말하시는데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며 누가 가리 라고 말씀하셨지.}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리며 슬쩍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 자 그의 신형은 담사와 함께 온데간데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한 동안 막연해졌다. 전대의 고인들만 법공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 막대승을 비롯한 현세의 인물들은 그의 모습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 혜천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미타불! 사숙조님의 금과옥언을 깊이 명심하겠읍니다.} 그는 법공선사의 독백에 뜻을 깨달은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태행산(太行山)-! 심마니의 발길도 닿은 적이 없는 태행산의 깊디 깊은 곳에 자리 한 어느 계곡, 계곡의 어둡고 짙은 그늘 속에 하나의 거대한 장원(莊園)이 묻 혀 있었다. 네 개의 기둥에 사천마왕(四天魔王)이 조각되어 있는 웅장한 대 전(大殿)-! 정면 단상에는 지옥을 관장한다는 나후명왕(羅吼明王)의 석상(石 像)이 흉측한 모습으로 대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전의 입구 문 주위에는 전륜대전(轉輪大殿)이라는 현관이 붙 어 있고, 대전은 극히 음산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전륜교(轉輪敎)! 그렇다! 이곳이 바로 이십오년전 무림맹에 의해 명망한 전륜교 의 새로운 총단이었다. 전륜교가 서장(西藏) 성숙해(星宿海)에 자리한 나후마교(羅吼魔 敎)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은 옳은 것이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전륜교는 마교가 중원에 진출하기 위해 내세 운 허수아비였다. 전륜교의 전대 교주 전륜천존(轉輪天尊) 모용황(慕容皇)은 바로 서장 나후마교의 장문제자(長門弟子)였던 인물이었다. 그 전륜천존 모용황이 우내삼기의 수하에서 고혼이 된지 어언 이십오년, 옛 전륜교 총단의 터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새로운 전륜 교의 총단, 즉 나후마교의 중원분단(中元分團)이 세워져 있는 것이 다. 어둑하던 대전의 등불들이 하나 둘씩 밝아지고 수 명의 인영이 대전 중앙에 놓인 거대한 팔선탁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상석(上席)에는 언젠가 태행산에서 보았던 혈교자의 혈의여인이 오연한 자태로 앉아서 차가운 신색으로 주위를 일별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문상(文相) 모용천엽과 무상(武相) 모용천위가 앉아있 고, 그들의 왼쪽 편에는 절명마존 혁사군과 또 한명의 청수한 용모 의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문득 혈의여인 시선이 모용천위의 창백한 얼굴에 멈추었다. {너는 이길로 천마비(天魔匕)를 가지고 성숙해로 돌아가도록 해 라.} 그녀는 청아한 옥음으로 말했다. {태상노조(太相老祖)께 범천신불이 다시 출현했다고 전하면 그 분이 너에게 무언가 지시할 것이다. 화련의 일은 이 애미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너는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해라.} 모용천위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였으나 나직이 한숨을 쉬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의 분부대로 곧 출발하겠읍니다.} 그는 일어서 절을 하고는 힘없는 걸음으로 대전을 나갔다. 혈의여인은 모용천위가 완전히 나가자 문득 두 눈에서 애틋한 빛이 스쳤다. {교주, 너무 심려 마십시오. 천위는 강인한 아이니 성숙해를 다 녀온다면 천마비의 마공을 익혀 천하에 그 적수가 없을 것이외다.} 혁노인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혈의여인은 희민한 미소를 띄웠다. {저 놈은 다 좋은데 인정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허허.... 교주, 사내 대장부라면 독하고 비정한데가 있어야만 되 나, 화련은 외인이 아니라 천위의 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혁노인은 담담히 말했다. {그 일은 그렇다치고 문제는 철불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 중놈이 우리가 강호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단 시 일내 이곳까지 올 것이외다.} 혈의여인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일에 대하여 생각해 둔 것이 있어요.} 그녀가 자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자 혁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그 동안 정체를 숨긴 것은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지만 무림맹과 소림의 힘을 의식했기 때문이예요. 비록 지금은 어느 정 도 세력이 확보되고 계획대로 이루어 졌으나, 범천신불의 출현은 실로 예상치 못했던 변수예요. 그가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를 의식 하고 있는 것....} 3 문득 혈의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현재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어요. 태상노조도 범천신불이라면 거리낌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 니... 지금으로서 우리의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어요.} 혈의여인은 눈빛에 일순 기이한 광채가 스쳤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해요. 천마비가 우리의 수중에 들어온 이상 반 년만 이 상태로 유지한다면 태상노조께서 충분히 범천신 불을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실 거예요.} 청수한 중년인이 담담히 말했다. {교주께서는 막북동맹을 이용할 생각입니까?} [호호... 역시 총관(總管)의 혜지는 속일 수는 없군요.] 혈의여인은 요염한 교소를 지었다. [그래요.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막북동맹을 끌어들여 무림 맹의 신경을 그쪽으로 쏠리도록 하는 거예요. 어차피 막북동맹은 우리를 위한 희생물이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예요.] {흐흐.....} 혁노인이 혈의여인의 말을 듣고는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 태양제(太陽帝)인가 뭔가하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중원 을 자기집 안방처럼 여기는 모양인데 이번에 그 놈이 혼줄이 나겠 군.} 이 말에 중인들은 한꺼번에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호호호....} 음모! 전륜대전에서 이루어진 음모는 장차 중원을 피로 물들이는 전주 곡이었다. 막북동맹(漠北同盟), 수십 년 동안 중언에 진출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온 변 방의 세력이 아닌가? 이들은 그 막북동맹을 끌어들여 무림판도에 일대 파란을 불러올 작정을 한 것이다. 과연 이들의 음모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애꿎은 인명이 희생될 런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그리ㅏ고 다시 새해가 밝아오자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무림맹의 움직임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수십기의 파발마가 중원 각처로 달려가고 무림맹의 본산이 지척 에 있는 태산 산록의 상가현(桑家縣)에는 수많은 무인들로 들끓었 다. 작년에 벌어진 제남성의 사건, 발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처음에는 조그만 일이 구르고 굴러 나중에는 산더미같이 커졌다. 백 년 전 이 땅에서 사라졌던 마교가 부활했다. 그리고 전대의 고인 청해존자의 출현과 수 년 동안 은거하다시 피 하던 혜천대사와 태허천존이 강호에 나왔으며, 삼태상의 일인인 신검황 연주백의 죽음은 삼십 년 이래 평화를 유지해온 중원을 난 세로 몰아 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세상이 달라져 있더라는 말이 있듯이, 제남 성의 사건으로 두 명의 이름이 중원 전역에 퍼졌다. -흑마수(黑魔手) 모용천위! -지옥혈룡(地獄血龍) 담사! 지옥혈풍은 범천대공 연대강을 암살한 의문의 자객인 담사를 지 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불가제일존인 법공(法空)대사의 이름은 그 누 구도 거론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고 묻는 사람도 없었으나 이미 전설 속에 묻힌 그 이름이 나온다고 해서 현세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일월(一月)의 엄동설한, 무림맹은 쏟아지는 폭설 속에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철불 혜천대사의 거처인 불령각(佛靈閣)의 문이 열리고 창백한 표정의 적용화련(狄容華蓮)이 찻잔이 올려진 소반을 들고 들어섰 다. 그녀의 배는 이미 상당히 부풀어올라 있었다. 이제 산월이 그리 멀지 않은 그녀였다. 적용화련은 무영신개에 의해 이곳으로 온 이래 혜천대사의 시중 을 들고 있었다. {대사님, 차 드세요.} 문득 청아한 옥음이 들리자 혜천대사는 자비로운 시선으로 적용 화련을 주시했다. (허허!. 이렇게도 착하고 아름다운 아이가 기억을 상실하다니.....) 혜천대사는 내심 안스러움을 느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적 용화련은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지난 일은 아무것도 기 억하지를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신이 기억하기 싫어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련(蓮)아, 추운데 몸조리나 하지 않고서는..... 자 이리로 앉도록 해라.} 혜천대사의 따뜻한 말에 적용화련은 아련한 슬픔이 담긴 눈망울 을 깜박이며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너의 기억은 곧 돌아올 것이니 너무 깊이 생각지 말고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무리를 하면 안된다.} 적용화련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련아야, 나는 며칠 있으면 떠나야 한다. 그 전에 너 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구나.} 혜천대사는 문득 창 밖에 내리는 눈을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극히 침중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소림사에는 한명의 혈기방장한 청년 승이 있었지.} 나직이 말하는 혜천대사의 표정은 우울해 있었다. 당시 삼십 팔 세였던 이 청년승은 자신의 동문 사형제들이 혹세 무민하던 사교도(邪敎徒)들의 침입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복수를 하기 위해 속세로 나오게 되었다. 그 후 의인들을 규합, 사교의 무리들을 소탕하던 중 그는 우연히 중상을 입은 한 명의 여인을 구했고, 그것이 그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회한을 안겨주게 되었다. 원래 음공(陰功)을 익힌 여인은 원수가 펼친 극양(極陽) 수법에 당해 생사가 지척에 달렸고, 그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양강의 무 공을 익힌 고수가 필요했다. 그 당시 청년승은 동정지체에다 양강의 무공을 수십 년 동안 수 련한 사람이라 그는 즉시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인의 상처는 엄중했고 음양합벽(陰陽合壁)의 방법이 아니면 도저히 치료될 수가 없었다. 승인은 불문의 제자가 아닌가? 이어 승인은 한 동안 갈등을 했으나 결국 그녀를 살리기로 결정 했다. 불경에도 이르기를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칠층보탑(七층寶 塔)을 쌓는 것보다 더한 공덕이라고 하질 않았던가? 결국 그 청년승은 여인과 음양교합을 하여 그녀를 사경에서 구 하게 된다. 그 후 상처가 치유된 여인은 모든 사실을 알고는 그 승인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떠한 신분이시든간에 저의 생명을 구해 주고 저의 몸 을 가졌으니 신첩으로서는 당신을 지아비로 모실 수 밖에 없읍니 다.} 그렇게 말하고는 절을 했으나 승인은 거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사문을 뛰쳐나와 살계를 어겼으니 파문됨은 당연한 일, 허 나 그의 마음 속은 영원히 사문의 제자였으며, 그는 불문의 제자였 다. 이에 여인은 그의 마음을 들릴 수 없음을 알자 피눈물을 뿌리며 저주를 퍼붓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헌데 그로부터 일 년 후 여인은 한 명의 아이를 안고 다시 그를 찾아왔다. 여인은 아이를 안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청년승에게 애 원을 했다.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예요. 자식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환속에 서 저와 함께 살아주세요.} 그러나, 이번에도 청년승은 자신이 불문의 제자라는 이유로 그녀 의 애원을 물리치고 말았다. 4 혜천선사의 눈에 뿌연 막이 덮였다. {아미타불..... 그 후 그 승인은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왔지. 그 당시의 일을 후회하면서....} 적용화련은 이야기의 청년승이 바로 혜천대사 본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 여자분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적용화련이 묻자 혜천대사는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토했다. {그 후의 일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그들 모자(母子)는 당시 세상을 도탄에 빠트렸던 사교(邪敎) 무리의 수뇌였던 지아비 와 부친의 원한을 갚겠다고 그 승인에게 검을 겨누고 있지.} 말을 끝낸 혜천대사는 차분한 표정으로 적용화련을 주시했다. {련아야,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만약이라도..... 너의 지아비가 천하에 몹쓸 사람이라도 그를 포용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들려준 것이다.} 적용화련의 눈망울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저의 신세에 관해....}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사람의 앞일이란 예측할 수 없는 법 너의, 관상으로 보아 사내로부터 괴로움이 많을 것 같기에 노파 심에서 한 소리니 깊이 생각지는 말아라.} 적용화련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대사님의 금과옥언을 명심하겠읍니다. 헌데 그 여자분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한 순간 혜천대사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지그시 두 눈을 감은 그는 한 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적용화련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쓸데없는 것을 물어서.....} 문득 혜천대사가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아니다. 그녀의 이름은 연운설(燕雲雪)이었지.} 이 말에 적용화련은 일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혜천대사는 적용화련의 행동에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련아야, 왜 그러느냐? 몸이 아픈 것이 아니냐?} {아..... 아니예요. 다만 그 이름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요.} 적용화련이 황망히 대답하자 문득 혜천대사의 눈에 이채가 스쳤 다. 문득 이때,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문 밖에서 나 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사, 황보승입니다.} 혜천대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적용화련이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태허천존(太虛天尊) 황보승을 위시하여 여장을 한 청 초한 모습의 황보가혜, 수려한 미모에 약간 매서운 기질을 풍기는 북천일미(北天一美) 뇌옥연, 그리고 당문의 소보주 당송과 용문검 부의 백상천이 서 있었다. 태허천존을 제외한 네 사람은 적용화련의 미모에 흠칫 놀랐다. 흑요석같이 빛나는 애절한 눈망울, 옥으로 빚은 듯한 섬세한 이 목구비... 아름답다. 한 떨기 난초와 같이 청초하면서도 기품을 간직한 그녀의 자태 에 당송과 백상천은 한 동안 얼이 빠졌다. 비록 아이를 가져 배는 불러있으나 그 가련한 자태가 한결 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황보가혜의 미모와 뇌옥연의 미모도 절세적이지만 적용화련에 비한다면 어딘가 모자람을 느끼게 만들었다. 중인들이 들어오자 적용화련은 말없이 물러갔다. 황보가혜는 적용화련이 나가자 재빨리 물었다. {백부님, 저 언니는 누구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미타불..... 나도 저 아이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동시주 가 우연히 그녀를 구해 데려왔는데 기억은 상실했기 때문에 과거 의 일은 하나도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쩜 그럴 수가...!} 황보가혜는 동정어린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 {그럼 저 예쁜 언니는 과거를 하나도 모른다는 말이예요.} 혜천선사는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잘 대해 주도록 해라.} {호호..... 염려 마세요, 백부님. 나에게 이렇게 예쁜 언니가 생기 다니? 이름이 어떻게 되요?} {글쎄, 이름도 기억을 하지 못해서.... 당분간 수련(水蓮)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황보가혜가 벌떡 일어섰다. {련언니라.... 나는 련언니와 이야기 하겠어요.} 그녀는 재잘대다가 밖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실로 천진난만한 행 동이었다. 태허천존은 혜천대사를 보며 고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 놈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소리 말게. 혜아야 말로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 아 닌가?} 혜천대사의 칭찬에 태허천존은 내심 흐뭇함을 느꼈다. 문득 뇌옥연을 위시하여 백상천과 당송이 공손히 혜천대사에게 절을 했다. {삼가 대사님께 인사드립니다.} 혜천대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만 두게.} 한 가닥 부드러운 잠력이 삼 인의 허리를 세웠다. 세 사람은 절 을 하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세웠다. 혜천대사는 뇌옥연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었다. {뇌소저에게는 내가 무어라고 할 말이 없구나.} 뇌옥연은 문득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예요. 대사님은 최선을 다하셨어요.} 뇌옥연이 말했다. {지금은 비록 연공자님을 살해한 흉수가 달아났지만 결코 저의 손을 피할 수는 없을 거요.}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으음.... 이 아이의 원한이 극에 달하니 장차 이 일을... 헌데 사 숙조님께서 왜 그 자를 데리고 가셨는지...} 혜천대사는 내심 의문을 느꼈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 다. {백시주께서는 안녕하신가?} 백상천은 낭랑히 대답했다.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언제나 대사님의 염려에 강녕하십니다.} 혜천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송에게도 안부를 물은 후 태허천 존에게 차분히 말했다. {연락은 다 전해졌는가?} 그때 두 여인이 조용히 실내로 들어섰다. 바로 황보가혜와 적용 화련이었다. 그녀들의 수중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들려 있었 다. {가만....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야지.} 혜천대사는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황보시주, 우리는 자리를 옮기지.} 태허천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대사님의 거처도 빼앗았군..... 하하...} 그는 유쾌히 웃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웅대전(千雄大殿)! 무림맹의 의사청인 이곳에는 지금 이십여 명의 승(僧), 도(道), 속(俗)의 사람들이 다섯 개의 둥근 탁자 주위로 앉아 있었다. 그 천웅대전으로 혜천대사와 태허천존이 들어왔다. 대전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십대가 넘게 보이는 사람 들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강호의 명숙들이었다. 이들은 혜천대 사와 태허천존이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천대사는 전 실내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늙은 사람이 비록 부처님의 자비로 그 동안 편안한 생활을 해왔으나 결국 속세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치게 되니 민망스런 마음 한량 없읍니다.} 혜천대사가 정중히 합창 배례를 했다. 그러자 중인들은 강호에서 유명한 정도명숙들이고 일파의 장문 이지만 강호무림인들이 존경하는 혜천대사에게는 이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모두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이 열화같고 한 자루의 칠환도(七環刀)로 명성을 떨치는 갈 원(葛院)이 말했다. {노선사께서 중원무림을 위해 무림첩(武林帖)을 발부하셔서 중 지(衆智)를 모으자고 하셨으니 이것은 무림동도들로부터 추앙을 받을 일입니다.} 혜천대사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 늙은이는 다만 중원의 평화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될까해서 여러분들을 초청한 것인데 갈대협께서 이렇게 칭찬 하심은 설 곳 을 모르게 하십니다, 그려.} 그는 잠간 말을 끓더니 다시 계속한다. {우선 시장하실 터이니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혜천대사는 먼저 자리에 앉았다. 혜천대사는 먼저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늙은이의 청을 받고 이렇게 와 주신데 대하여 우선 이 잔으로 여러분의 노고에 치하를 드리고 싶읍니다.} 이에 여러 사람들도 일어나 몸을 굽혀 각기 자기 앞에 놓인 술 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킨다. 이어 잠시 서로 수인사가 오갔다. 실내에는 무당파의 장로 태극도인(太極道人)을 위시하여 구파일 방의 고수들과 동추평, 북천뇌보의 총관 천남검(天南劍) 뇌종의(雷 宗義), 용문검부의 창룡검옹(蒼龍劍翁) 등, 평소에 보기 힘든 고수 들도 있었다. {여러분, 이 늙은이가 이렇게 여러분들을 초청하게 된 것은 다름 이 아니고....} 잠시 말을 멈춘 혜천대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막북에서 웅거하고 있던 태양제(太陽帝) 막리극이 변황무림인 (邊荒武林人)들을 규합 중원을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사실 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읍니다.}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혜천대사는 말을 중단하고 다시 한 번 모든 사람들을 한 번 훑 어보고 다시 말했다. {이에 이 늙은이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어 막북동맹을 물리치기 위해 여러분의 도움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태극도인이 일어서며 말문을 열었다. {막북동맹은 중원무림의 적, 우리 무당은 온 힘을 기울여 혜천대 사의 명에 따르겠읍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 동조를 표했다. 초경 무렵부터 시작된 천웅대전의 회의는 밤새 계속 진행되었다. 막북동맹이 중원을 침입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태양제를 주측을 막북 대소십이파가 연합된 막북동맹은 일류고 수만도 수백 명, 그 외 수하들까지 합쳐 일만에 달하는 강력한 세 력이었다. 이들은 현재 하북성과 사천성의 경계에 포진하고 있는데 사천성 에는 벌써 사천장문을 주축으로 아미(蛾嵋), 종남(終南), 청성(靑 城) 삼파의 고수가 막북동맹과 부딪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현재 대치하고 있다. 第 二十九 章 뜻밖의 福綠 1 숭산(嵩山) 준극봉(俊極峯) 중턱,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단애 중반에 하나의 동혈(洞穴)이 있었다. 동혈 안은 원래 천년동굴인 듯했으나 인공의 흔적이 있는 두 개 의 석실로 되어 있었다. 석실의 크기는 두 개가 일정한 한 곳에는 고서가 수십 권이 돌 탁자 위에 쌓여 있고, 또하나의 석실에는 돌침상과 간단한 식기가 한쪽에 놓여 있었다. 돌침상 위, 한 명의 청년이 막연한 시선으로 누워 있었다. 갈가리 찢어진 옷은 피로 얼룩져 있고 오랫동안 세면을 하지 않 은 얼굴은 푸석한데다 피까지 묻어 있어 실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는 바로 법공선사에 의해 구함을 받은 담사였다. 한 쌍의 두 눈은 옛날과 달리 무기력하고 생기가 없으며 깊은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담사는 법공선사에 의해 생명은 구했으나 제남지부의 지하미로 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육대주맥(六大主脈)이 파괴되고 왼팔마저 으스러져 폐인이 되었다. 주맥(主脈)이 파괴 되었으니 공력마저 운기할 수 없다. 하나 따 지고 보면 그의 막중한 상처로 인해 살아있다는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마 법공대사 같은 절정의 고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목 숨은 이미 염라전(閻羅殿)의 명부에 벌써 올라갔을 것이다. 범공선사는 담사를 여기다 데려다 놓고 떠난 지 세 달이상이 지 났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났고 담사도 마찬가지로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담사는 법공선사가 떠난 다음 여기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동혈 밖 아래는 만장(萬丈)의 단애요, 하늘 역시 마찬가 지니 공력마저 잃은 그로서는 도저히 이곳을 빠져나갈 재간이 없 었다. 음식 문제가 동혈 안에서 자생하는 황균(黃菌:버섯 종류)과 지하 수로 버틸 수는 있었으나, 어릴 때부터 방랑하던 기질과 지루함으 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담사는 일순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천천히 동혈 밖으로 걸어나오자 한 줄기 햇살이 따갑게 그의 눈 을 파고 들었다. 담사는 입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밑에는 깎아지르는듯한 단애, 그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 려다 보았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절묘한 경공을지닌다 해도 이곳 에서 떨어진다면 박살이 날 것이다. 문득 담사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담사, 무엇을 주저하는 거냐. 무공을 잃고 한쪽 팔마저 잃은 병 신이 되지 않았나. 이렇게 살아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보고 살 것 이냐... 그래 뛰어내리는 거야. 아주 간단한 일이지. 그래 뛰어내 려.) 담사의 어깨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래 뛰어내려. 너는 잘 알고 있지 않아. 세상이 얼마나 비정하 고 냉혹하다는 것을. 너는 이제 아무 폐인이야..... 폐인!) 담사의 입술이 피라도 날 듯 붉어졌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단 애로 떨어졌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한 줄기 흡력(吸力)이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갈!} 곧이어 대갈성이 터지고 준엄한 호통이 그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못된 축생(畜生) 같으니! 짐승도 죽음에 처하면 살려고 발버둥 을 치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고 하다니.... 이놈!} 순식간에 동혈로 빨려들 듯이 들어논 담사는 갑자기 뺨에서 격 렬한 고통이 일어났다. 그러나 담사는 한 마디의 신음성도 내지 않고 이를 악물며 들었 다. 눈앞에 준엄한 표정의 범공선사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손부인만 불쌍하게 죽었지. 이런 축생도 지아비라고 나에게 부 탁을 하고 죽었으니.....} 생각하면 할 수록 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얼굴을 붉으락푸르 락했다. 이 말에 담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죽었단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힘없이 울려나왔다. 짧은 순간에 그의 뇌리로 손부인의 여라가지 형상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초췌하기 이를데 없던 병악한 모 습, 가게를 마련해 주었을 때 기뻐하던 모습, 침상에서의 그 열정 적인 자태, 그리고 영영 못 갖을 줄 알았던 아기를 수태했을 때 한 없이 수줍고 기뻐하던 일... 손부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의 한구석이 따스해지던 담 사 였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 모든 기억들이 하 나하나 예리한 파편이 되어 그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그녀...흐흐....그녀가 죽었다고?] 담사의 악문 입술 사이로 상처입은 짐승의 그것같은 신음이 흘 러나왔다. {왜.... 그녀의 복수를 위해 또 살인을 하겠다는 말이냐?} 처절한게 이지러지는 담사의 얼굴을 보며 법공선사가 호통을 쳤 다. {크훗훗훗! 크하하하!} 갑자기 담사의 입에서 괴소가 터져나왔다. 상처입은 늑대가 울부 짖는 것인가, 지옥의 악마가 부르짖은 것인가? 허공을 우러르며 광 소를 토하는 담사의 얼굴에는 그러나 뜨거운 눈물이 비오듯 쏟아 지고 있었다. 한없이 가여운 손부인, 초롱초롱한 눈매가 별같던 손아유,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어미와함게 죽어버린 자신 의 아기...! 담사의 가슴은 끓어오르는 안타까움과 분노로 터질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웃어대지라도 않는다면 미처버릴 것만 같은 담사 였다. 그런 담사를 보며 법공선사는 고개를 돌렸다.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이놈도 사람일진데 내 어이해 세상의 불행은 이놈에게만 있는 것인지...) 이미 담사의 출신내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법공선사는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러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해서 그것을 타인에게까지 전가시킬 수는 법, 담사의 악업은 용서받지 못할 성질의 죄악이었다. 강간, 약탈을 한 숫자만 해도 무수하고 게다가 직업이라고는 돈 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자객이었으니.... 그의 죄상을 다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담사도 태어날 때는 선량한 인간이었다. 그도 따뜻한 피와 살로 된 인간인 것이다. {이놈, 그래도 아직 인간의 심성은 남아 있는가 보구나. 뱃속의 자식이 죽은 것을 슬퍼할 줄도 아니.} 법공선사의 호통에 담사의 고개가 느릿하게 들려졌다. 무심하게 법공선사를 주시하는 담사의 눈은 극도의 무기력함만 이 느껴지는 생기없는 눈빛이었다. {그래 네놈은 네가 저지른 죄악의 보상을 받지 않는 줄 알았더 냐? 이놈아, 그 모든 게 인과응보인 것이다. 못된 축생 같으니...} 법공선사는 더 이상 말을 하기에 지쳤는지 몸을 돌렸다. 담사는 법공선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담사의 입에서 우욱, 하는 신음성과 함께 한 사발의 피를 토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처절한 내적인 고통이 그의 오장육부를 뒤틀어놓은 때문이었다. 2 담사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석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나는 죽을 수 없어.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나의 자식의 원수를 갚아야 해.) 담사는 일순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밖으로 나온 담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법공선사가 서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문득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는 축생이로군. 그렇게 당했으며 정신을 차릴만도 하 건만 또다시 피를 그리다니.... 아미타불.... 하늘의 섭리는 어쩔 수 없단 말인가?} 법공선사는 애석한 눈빛으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독치독(以毒治毒)이라 악인이 악인을 죽인다는 것은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천마비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 것도 하늘의 뜻, 네놈이 나와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일지이니.} 자탄하듯이 하는 말에 담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놈아! 그런 썩어빠진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앉거라!} 법공선사의 호통에 담사는 말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네놈은 비록 공력이 전폐 되었다고 생각을 하지만 치료할 방법 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담사의 표정에 일순 놀라운 빛이 스쳤지만 그것은 극히 찰나간 의 일, 그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법공선사는 그의 표정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네놈의 무예가 비록 나이가 젊지만 그 무예는 대단하다. 그러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고 기묘한 실전무예는 놀랄만 하나 고수자 (高手者)를 만나면 너의 치졸한 무예로는 십초도 견디지 못한다.} 담사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이 중은 한 번도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 게 그것을 알고 있을까?) 내심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표정은 한 점의 변화도 없 었다. 그런 담사를 법공선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같은 눈으로 바 라보았다. (현재 천하의 대세를 논하자면 마교가 중원에 검은 먹구름을 몰 아오고 있다. 마교는 석년에 비해 두 배의 세력으로 중원에 혈풍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지나간 일들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들어 한참 동 안 깊이 깊이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살기가 천지간에 충만하나 노승은 이미 속세에 일에는 상관 않 기로 맹세를 했으니 나의 힘은 미치지 못한다.} 법공선사는 문득 말을 멈추고 담사를 응시했다. {사악이 이 세상에 만연하여지는 것을 그냥 두는 것보다는 차라 리 악은 악으로써 사악한 무리들을 빨리 없애고 창생을 복되게 하 는 것이 낫겠지!} 자탄하듯이 말을 하는 법공선사의 말은 담사로서 하나도 뜻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말이었다. {너는 무공을 회복하고 싶겠지?} 갑자스런 법공선사의 물음에 담사는 마음 속에 느낀 바 있으나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교활한 축생 같으니라구. 마음 속의 무슨 생각이 있으면서도 왜 말을 하지 않지?} 담사는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그러나 자신은 상관치 않겠다는 태도 아닌가? {이놈, 어디에서 어른이 말을 하는데 그 따위 버릇을 가르치더 냐?} 법공선사는 분기가 치밀어 오른 듯 버럭 호통을 쳤다. 하나 담사는 한 점의 변화도 없이 요지부동이었다. 법공선사는 탄식처럼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어쩔 수 없는 중생이로다. 기민하고 총명해서 일이 야 잘 처리하겠지만 이놈이 워낙 심성이 독랄하고 혹독해서 한편 으로는 은근히 두렵기도 하군.}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전신을 떨며 얼굴 표정을 격동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난문제를 풀려고 무단히 애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약 일각(一刻)의 시간이 지닌 후에 법공선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는 두 눈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초리로 담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현하의 강호무림에서 대란(大亂)이 이미 싹트고 있다. 이 늙은 이가 비록 자비심을 갖고 있을지라도 살계(殺戒)를 어길 수는 없 으니.....} 그는 잠시 말 끝을 흐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이 늙은이가 너의 무공을 회복시켜 주고 너에게 몇 가지 의 절기(絶技)를 전수해 줄것이다.} 돌연 법공선사의 얼굴이 엄숙한 빛을 띠우고 목소리도 엄중하게 변했다. {그러자면 너는 이 늙은이에게 네 가지의 조건을 꼭 약속하여야 한다.} 담사는 피식 고소를 흘렸다. {그 네 가지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내가 만약 승락하지 않는다면 어떡 하시겠소?} 조롱하듯이 말하자 법공선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너에게 선택의 여지도 없겠지만, 너는 꼭 그것을 지키게 될 것 이다.} {어쨌든간에 그 조건이라는 것을 들어 봅시다.} 담사의 어조는 무례했으나 법공선사는 따지지 않고 한동안 생각 에 잡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첫째 조건은 앞으로 강호에 나간 후 절대 선량한 사람을 죽 여서는 안된다.} 담사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어떤 사람이 선량한 사람이라는 거요?} {이놈아, 그것은 네놈이 악인이니 더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너같은 종자 몇몇을 빼면 이 세상 인간은 다 선량하다고 할 수 있 는게다!} 법공선사는 버럭 호통을 치며 힘차게 말했다. {둘째 조건은 이 땅에서 마교를 몰아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조건은.} 그는 말을 멈추고 담사의 왼팔을 주시했다. 이미 팔목이 으스러진 왼팔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이 땅에서 마교가 사라진 후 너의 왼팔을 자르는 것이다.} 담사는 흠칫했다. {왼팔은 이미 병신이 되었는데 그것이야 간단한 일이 아니겠읍 니까, 대사님.} 그의 목소리는 잔뜩 조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범공선사는 못들은 척 말을 이었다. {네 번째 조건은 네가 무예를 익힌 후 그 누구에게도 무예를 전 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담사는 문득 생각했다. (이 노승은 무엇 때문에 나에게 무예를 전수하려는 것일까? 네 가지 조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필이면 왜 나 같은 놈에게.....) 법공선사는 담사의 표정을 살피며 냉랭히 말했다. {이놈아, 네가 왜 너 같은 축생에게 무예를 전수하느냐 하는 것 이 궁금하겠지?} 담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실로 귀신 같은 중이로군. 사람의 눈만 보고도 그 사람의 마음 을 알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법공선사에 대하여 탄복을 했다. {나에게는 별다른 시간도 많지 않고 마졸들이 곧 강호에 몰려 나올 것이다. 거기에다, 네놈의 골격은 상선지재(上善之材)로서 무 예를 익히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것이지.} 법공선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네놈의 심보가 악랄하니 마졸들을 상대 하기에는 더 할 수 없이 적격인 것이야.} 법공선사는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그럴 염려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마교와 너는 견원지간이니 그 들과 싸우게 될 것이고 네가 한시라도 딴 마음을 먹는다면 그 날 로 너의 무공은 내가 거두어 들일 것이다.} 그의 뒷말은 극히 엄중했다. {너의 마음 쓰는 품이나 성격을 보아서 결코 무예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지만은 일의 여건으로 인해 너에게 인간 구실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잘 생각을 해서 행동을 하도록 해라.} 여기까지 말한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동안 동혈 안은 짙은 정적에 사로잡혔다. 문득 범공선사의 두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어떠냐? 마음의 결정을 내렸느냐?} 담사는 무기력한 눈빛으로 유심히 법공선사를 주시하며 말했다. {어차피 내가 거절한다 해도 선사는 나에게 강요할 것이고, 나로 서도 장차 일이야 어찌되든 무공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 나에게 좋고 말고가 어디 있겠소이까?} 법공선사는 빙그레 웃었다. {허허..... 그래도 총명하기는 하군.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으니..... 잘 들어라!} 법공선사는 신중히 말했다. {너에게 금강복마수(金剛伏魔手)와 연화십팔법(蓮花十八法)을 전 수해 줄 것이다. 금강복마수는 너의 왼팔을 벌근세수로 치료하면서 개정대법으로 단 시일 내에 습득하게 될 것이고, 육대주맥이 파괴 된 것은 이원전신대법(移元傳神法)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공력을 높일 것이다.} 이윽고 벌떡 일어선 그는 석실로 들어갔다. 돌침상에 누운 담사는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단전에 닿아 있는 법공선사의 우수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몸 안 으로 흘러들어 단전(丹田)에서 곧장 가슴 위로 치밀어 올라옴 동 시에 관절요행이 부러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기도 모르게 전신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맥 이 풀리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전신이 분산된 듯이 뼈와 사 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품 안에 일절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어느 새 들어왔는지 법공선사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내 려다 보았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군!} 그리고는 법공선사는 그의 왼팔 관절 부근을 잡았다. {너의 몸에는 지금 노승이 수십 년 동안 공들여 쌓아올린 진원 지기(眞元之氣)를 활용해서 네 전신의 혈맥을 뚫고 상습급 내공의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 법공선사는 그의 관절을 세세히 살피며 말했다. {팔목의 뼈도 이제 복구되었으니 오늘은 하루 쉬고 내일부터 수 련에 들어간다.} 이어 법공선사가 가만히 손가락을 퉁기자 한가닥 지풍이 담사의 임독양맥을 파고 들었다. 그러자 담사는 한 순간 몸이 가뿐해지면서 몸 안에 전력이 충만 해지는 것을 느꼈다. 담사는 일순 돌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어 재빨리 책상 다리 를 한 채 운기조식을 취했다. 진력이 일주천(一週天)하자, 문득 단전에서 모인 진력이 맹렬히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향해 치솟아 오르고 그것은 쉽게 양대혈을 통과하여 이내 사지백해로 퍼져나갔다. 잠시 후, 가만히 눈을 뜬 담사는 땅까지 가만히 휘둘러보고 전과 다름없 이 쓸 수 있다는 것을 느끼자 한동안 어처구니 없다는 눈빛으로 법공선사를 쳐다보았다. 왼팔을 고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임독양맥이 타통된 것은 그 로서 도저히 믿기 힘든 기적 같은 사실이었다. 한 사람이 양대혈을 타통시키기 위해서는 평생을 노력해도 성공 하는 예가 국히 드물고, 잘못하면 주화입마라는 경우도 조종 있는 것이다. {이놈아, 무얼 그리 일이 빠진 눈으로 쳐다 보느냐?} 버럭 호통을 친 법공선사는 무어가 그리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 푸렸다. {네놈은 오늘부터 음식은 물론이고 음식 등 자질구레한 일을 다 해야 한다. 그리고 하루에 꼭 한 권의 불경도 읽고 그에 대한 노승 의 설법을 들어야 한다.} 잠시 말을 멈춘 법공선사는 두 눈에서 형형한 광채를 띠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만 만약 나의 말을 시행치 않을 경우에 는 무서운 고통이 뒨따를 것이다.} 말을 마친 법공선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담사의 신형이 신속무비하게 손 끝을 칼날같이 세우며 법공선사의 명문혈을 찔러갔다. 수법의 신속함과 빠름은 번갯불 치 는 듯했다. 담사는 자신의 우수가 명문혈에 닿자 최대한 진력을 주입시켰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눈빛이 굳어졌다. 법공선사의 몸은 손뭉 치처럼 부드러웠고 담사의 우수는 명문혈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가 발출한 진력은 물이 모래에 스며드는 듯 흔적도 없 이 사라지고, 갑자기 자신의 우수를 통해 뜨거운 열기가 몸 안으로 흘러든다 싶자 수천 개의 바늘이 사지백해를 쑤시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크아아악!] 그는 그 엄청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혼절 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뜬 담사는 힘없는 눈으로 가만히 주위를 살폈다.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석실에는 혼자 뿐이었다. 문득 담사는 조금 전의 고통을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수한 고통에 단련되어 왔지만 이러한 고통 은 생전 처음이었다. 담사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4 사천성(四川省) 최북단에 위치한 고랍대평원(古拉大平原)! 몰아치는 북풍(北風)은 마치 칼날처럼 예리했다. 대지는 철판처럼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듯한 한파는 마치 세상 에 있는 모든 물건을 얼릴듯이 냉기를 띠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북방 특유의 황사풍은 묵묵히 서 있는 사 람들을 먼지로 덮어 버렸다. 문득, 약간 쉰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침중히 황사풍을 뚫고 또렷 이 울려퍼졌다. {당문평(唐文平)이 사천성을 대표해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무 릅쓰고 우리를 돕기 위하여 달려오신 강호 동도 여러분께 감사드 립니다.} 말을 맺은 인물은 허리를 숙였다. 당문평이라면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문주(門主)가 아닌가? 그의 앞에는 약 오십 인의 승도속 인물들이 모여 있는데 한결같 이 두 눈에서 정광이 이글거리고 태양혈이 우뚝 솟아 올라 있는 것이 내외공을 극도로 익힌 고수임을 말해 주었다. 이 중에는 무림맹 천웅대전에 참석했던 태극도인 등 십여 명의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 뒤로 비록 복장은 달랐지만 한결같이 이마에 흰 띠를 두른 무사들이 굳건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는데, 약 삼천여 명 정도 되어보였다. 이들은 사천무림의 대소문파 제자들로 이번 막북동맹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무인들이었다. 당문평의 목소리는 힘차게 울려퍼졌다. {현재 막북동맹의 무사들은 모두 오백에 달하고 그 중 고수만도 오십을 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호동도들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 이상, 우리는 간단히 그들을 이 땅에서 물리칠 것입니다.} 그가 말을 끝내자 장내에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잠시 후 사천무림의 무인들은 일제히 황사풍을 뚫고 앞으로 전 진했다. 하북성(河北省)에 위치한 북천뇌보(北天雷堡), 뇌천도제(雷天刀 帝) 뇌승은 북천뇌보의 보주(堡主)로서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무림맹을 도와 전륜교를 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가전의 비전으로 내려오는 뇌천도결(雷天刀訣)은 가히 산악을 가르고 천근의 암석을 가루로 만드는 양강의 도법(刀法)이다. 성격이 열화같기는 하나 의리를 중히 여기고 악인에 대해서는 냉혹할 정도로 잔인한 면이 있다. 현재 나이 칠순으로 그의 슬하에는 두 명의 아들과 뒤늦게 얻어 북천일미(北天一美)라는 미명을 얻은 외동딸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고 은거한 상태이긴 하나, 금번 막 북동맹의 침입으로 뇌전신은 다시 도(刀)를 잡게 되었다. 뇌천도제 뇌승-! 그는 혜천대사와 그의 사제인 혜오대사 그리고 십여명의 강호 명숙들을 맞아 가득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대사, 이게 몇 년 만이오?} {아미타불... 뇌시주께서는 언제나 정정하시다니 심히 부처님의 은덕인가 합니다.} 혜천대사가 차분히 대답했다. {하하... 별말씀을, 어찌 되었든 대사가 이렇게 오셨으니 태양제 단자도 이제 끝이 난 것 같소이다.} 뇌전신은 통쾌히 웃으며 말했다. 북천뇌보의 대청은 한동안 강호맹숙들과 하북성 무림의 동도들 이고 서로 수인사를 나누느라고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내는 곧 조용해졌다. 뇌승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말했다. {우선 한 잔의 술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러자 실내의 중인들도 한결같이 술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마셨 다. {현재 막북동맹은 태양제를 중심으로 막북팔기(漠北八騎)와 질 풍흑기대(疾風黑騎隊)가 가장 강력한 주력입니다.} 한동안 뇌승의 차분한 설명이 실내를 울렸다. 그날 밤 북천뇌보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수백 필의 인마가 쏟아 져 나와 북으로 치달렸다. 맨 앞에는 뇌승을 위시하여 혜천대사와 혜오대사, 소림십팔나한 중 오나탄 등 강호명숙들, 그리고 호북도상의 무림인들과 북천뇌보의 제자들이었다. 마교의 교주인 혈의여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눈꼬리가 파르 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화가 치밀은 듯 했다. {그래, 철불이 은밀하게 강호명숙들을 끌어모아 하북성으로 갔단 말이지.} 모용천엽은 쓰디쓴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읍니다. 철불이 열흘 전 극히 은밀히 일을 추진, 구파일방 과 강호명숙 이십 인을 초청해 비밀리에 막북동맹을 상대하기 위 해 서천과 하북으로 반을 잘라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혈의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림맹에 잠입해 있는 첩자는 무엇을 했기에 이토록 중요한 일 을 이제서야 보고 한단 말이냐?} 모용천엽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우리가 투입했던 첩자는 열흘전 은밀히 살해당했읍니다. 그래서.....} {됐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기묘한 눈빛을 띠며 손을 흔들었다. {이왕지사 일은 벌어진 것이니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우리는이 기회를이용해 무림맹을 친다. 현재 철불은 하북으로 갔으 니 무림맹은 종이 호랑이. 너는 지금 즉시 관에게 말해 준비를 하 도록 해라.} 혈의여인, 즉 마교의 당대 교주인 그녀의 지모는 실로 한치의 빈 틈도 없었다. 현재 무림맹은 신검황 연주백이 죽은 후 그 세력은 다소 약화되 었다. 거기다가 혜천대사가 몇 명의 고수를 데리고 하북성으로 떠났으 니 무림맹의 본산은 종이 호랑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은 사람이 도모하지만 그 승패는 하늘의 뜻에 달린 것, 앞날의 일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5 두두두_____! 지축을 온통 뒤흔드는 말발굽소리가 평원의 정적을 깨뜨렸다. 자욱한 황진이 마치 구름처럼 지평선을 뒤덮는다. 수백 기의 기마대(騎馬隊)-! 그들은 엄청난 굉음을 내며 산을 허물릴 듯한 기세로 평원을 가 로 질러왔다. 말 뿐만 아니라 그 위에 탄 기사들까지 온통 흑(黑) 일색인 기마대였다. -질풍흑기대(질풍黑騎隊)! 막북동맹의 중추세력으로 그 힘은 일개 문파를 쓸어 버릴 수 있 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두두두_____ 두두! 말발굽 소리가 천둥치듯 요란했다. 이들이 평원의 중간쯤에 도달했을 때에 순간, 갑자기 암석과 잡 림 속에서 수백 명의 인영이 벼락같이 쏟아나와 이들을 공격했다. 하나같이 날렵하고 그들의 수중에 들린 병장기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적이다!} {조심해라! 이들은 고수들이다!} 질풍흑기대의 인물 중 몇 명이 경악성을 외쳤지만 순식간에 수 십 명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으아악!} {히이잉!} {크______악!} 사람과 말의 처참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갑작스런 충격에 우왕좌왕하는 질풍흑기대의 무사들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쓰러져 갔다. 피가 투고 팔다리가 뒹굴었다. 질풍흑기대는 발악이라도 하듯 미친 듯이 날뛰었으나 중원무림 이 명숙들의 고강한 무예에 하나 둘 제대로 반항조차 못하고 나뒹 굴었다. 혈전장으로부터 서쪽에 위치한 구릉 위에는 두 명의 인물이 처 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뇌천도제 뇌승과 혜천대사였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혜천대사는 나직이 불호성을 외웠다. {대사, 그들은 당연한 대가를 받는 것 뿐이오. 너무 죄스러워할 것은 없소이다.} 뇌승이 담담히 말했다. {저들이 중원을 침입한 이후 수천 명의 일반 백성이 죽어갔소. 이 일은 불문에서 말하는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듯이 당연한 귀결 인 것이오.} 혜천대사는 우울한 눈길로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거의 세 시진이 지났을까? 치열했던 혈전은 서서히 질풍흑기대의 전멸로 끝나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수백 줄기의 인영이 마치 수십 마리의 비 조처럼 평원을 스치듯이 날아갔다. 남은 것은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널려진 시신들, 주인 잃은 말들 만 한동안 서성거리다 북쪽으로 서서히 달려갔다. X X X 담사는 법공대사의 손동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동작 한동작마다 기묘한 변화, 미묘한 구석이 있었으나 담사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법공대사는 손동작을 끝내자, {이놈아, 이것은 연화십팔법의 연화불유(蓮花佛遊)라는 초식이다. 연화십팔법은 모두 십팔초에 지나지 않으나 일초에 세 가지 변식 이 포함되어 있고 모두 합해 오십 사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을 마친 법공대사는 힐끗 담사의 표정을 살폈다. 담사의 표정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이런 못된 축생같으니, 그 동안 내가 가르쳐 준 것을 제대로 익 혔는지 보자.} 일성의 호통과 동시에 법공대사의 우수가 기이한 호선을 그리며 담사의 가슴을 후려쳐 왔다. 순간 담사는 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비켜나면서 우수를 가슴 에서 뒤로 치켜올렸다. {놈! 연화회목(蓮花廻木)의 수법은 제대로 익혔군. 허나 아직도 멀었다.} 그의 목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법공대사의 우수는 교묘히 담사 의 우수를 비껴가면서 그의 어깨의 관추혈을 격타했다. 담사는 일순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풀썩 넘어졌다. {아미타불.... 이것이 아홉 개의 초식으로 천라회륜(天羅廻輪)이 다.} 법공대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담사를 내려다 보았다. {무공일도라는 것은 단숨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깊은 조예 에 도달하려면 천부(天賦)가 과인(過人)됨이 있어야 하고 재질이 탁월하여야 하며 뼈를 깎는 수련이 있어야 한다. 네놈이 연화십팔 법을 정식대로 익히려고 하면 오십 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 {그러나, 내가 너에게 다 가르쳐 줄 수는 없고 아홉 가지 수법만 해도 충분히 마존들을 소장할 수 있으니 단 하루라도 게으름을 피 우지 말고 열심히 수련을 해라.} 법공대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사는 법공대사가 나가자 가만히 한숨을 쉬며 털썩 주저 앉았 다. 무예를 전수받기 시작한 지 어언 이개월, 그 동안 다섯 가지의 수법을 익혔으나 제대로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세초식 뿐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가면 갈수록 한 초 식마다 수법의 변화와 정묘함은 무궁무진해서 한 가지 동작을 수 백 번씩 반복하기를 몇 차례, 그나마도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익힌 것 뿐이었다. 공력이 회복하고 나서 한 달 간 몇 번이나 법공대사를 죽이려고 암습 또한 시도했지만 그는 무슨 신선(神仙)처럼 완벽한 인물이었 다. 거기다가, 한 번씩 암습이 실패로 돌아갈 때마다 그에게 무서운 고통이 뒤따랐다. 그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담사는 법공대사에 대하여 두려움과 그의 고강절륜한 무예에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법공대사가 그에게 전수하는 것은 단 두 가지 수법이었다. 금강복마수와 연화십팔법, 금강복마수는 법공대사의 개정대법으로 단숨에 오 장까지 끌어 올릴 수가 있었으나 연화십팔법의 수법은 한초 한초가 변화무쌍하 고 현묘해서 이개월이나 되었지만 겨우 세 초식 밖에 익히지 못했 다. 사실 담사로서는 모르고 있지만, 연화십팔법은 불문의 무상선공 으로 이미 삼백 년 전 절전된 것을 법공대사가 백운사 연화동에서 십 년을 고련하여 최근에 완성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담사는 자신의 재질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빌어먹을, 나도 남에게 비해 총명한 줄 알았는데...} 그는 나직이 투덜거리면서 벌떡 일어서 조금 전에 보았던 연화 불유의 수법을 연준하기 시작했다. 무심한 세월은 말없이 흘러갔다. 제 30 장 漠北同盟의 敗北 1 하북성 북단의 봉타구(峯駝丘), 거대한 황야에 마치 흑처럼 솟아오른 구릉, 경사는 완만했으며 수복 또한 듬성한 곳이었다. 새벽 여명... 안개가 자욱이 퍼져나가는 여명의 봉타구 정상에 한 황포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태양제(太陽帝) 막리극! 초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는 그는 바로 막북동맹의 맹주 막 리극이었다. 그의 주위는 온통 시산혈해였다. 태반이 그의 수하들이었으며 나 머지는 중원무림의 무인들과 북천뇌보의 무사들로 뒤섞여 있었다. 처절한 싸움의 흔적이 역력한 이곳, {.....} 막리극의 표정은 극히 침통한 얼굴이었다. 지난 밤의 일은 정녕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는 악몽의 밤이었다. 갑작스레 들이 닥친 중원의 고수들의 무예는 하나같이 고강했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의 무예는 그에 못지 않은 절정고수들이 섞여 있었다. 이에 막리극은 어쩔 수 없이 수하를 후퇴시켰지만 중원의 고수 들은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 시간이 흐를 수록 막리극은 속에서 불이 난듯 초조해졌다. 그가 봉타구에 온 지 한 시진이 지났으나 연락을 보낸 자신의 수하들은 타나나지도 않고 더우기 공격해 오던 중원의 고수들도 갑자기 공격을 멈추었다. (왜 아무도.... 소식이 없단 말인가?) 막리극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십 년이나 더 늙게 보였다. (우리를 도운다는 마교 놈들은 한 놈도 오지를 않고... 질풍흑기 대 또한 어디레 있는가?) 막리극, 그는 육십 평생 오늘같이 초조한 기분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십 년을 막북에서 패자로 군림하여 거칠 것이 없었던 태양제 막리극은 항상 위풍당당하고 화려했던 생애였다. 허나 지금은, 시산혈해 가운데 초췌한 표정으로 초조히 수하를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극히 외로와 보였다. 문득, 자욱한 안개 사이로 수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천천히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해 걸어왔다. 저벅저벅... {.....!} 막리극은 안력을 집중시켰다. 한 순간, 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 지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앞장 선 두 명의 인물, 혜천대사와 뇌천도제 뇌승, 그리고 그 뒤 로 중원의 유수한 고수 명숙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가왔 다. 막리극은 신음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철불 혜천대사!} 혜천대사의 표정이 담담했다. 그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막리극의 면전에 이르자 가만히 멈추 어 섰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순간 막리극은 일순 가슴에 압박감을 느꼈다. 그의 평생에서 두 번째 느끼는 타인에 대한 압박감이었다. 첫째 대상은 마교의 교주 혈의여인이었다. 그 외에 막리극은 천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종류의 기도를 느껴보지 못했다. 이때 혜천대사는 막리극을 응시하며 나직이 불호성을 발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태양제라 불리우는 막시주입니까?} 막리극은 무겁게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대사께서 바로 철불 혜천대사시오?} 혜천대사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미타불.... 불미한 소승이 혜천이외다. 막시주께서는 이미 형세 를 파악하고 계실 터 이대로 회군하심이 어떻읍니까?} 막리극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대사, 막리극이 살아 있는 이상 절대 항복이란 있을 수 없소.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나 백리극은 막북의 제자로서 정중히 대 사에게 결투를 청하오.} 혜천대사는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막시주의 심정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싸움이란 결 국 무의미한 것, 모쪼록 소승은 막시주의 마음을 돌렸으면 합니 다.} 막리극은 비감 어린 표정이 되었다. 이어 잠시 생각을 하는 표정으로 침중히 말했다. {대사의 성망은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소이다. 언젠가 대사와 한 번쯤은 무예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바, 차라리 잘된 것 같소이다.} 막리극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자신의 수중에 들린 금사창(金蛇 槍)을 불끈 움켜쥐었다. (아미타불... 도저히 마음을 돌릴 수는 없겠구나.) 혜천대사는 그의 마음이 굳은 것을 짐작하고 차분히 말했다. {막시주의 말씀이 그러하니 소승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구료. 하 나, 막시주께서 만약 패하신다면 살아 있는 동안은 절대 중원을 침 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 주시오.} 막리극은 일순 움찔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사. 내가 이 싸움에서 패한다면 그 약속은 지켜질 것이 오.} 혜천대사는 합장을 하면서 말했다. {그럼, 소승은 한쌍의 육장으로 응대해 드리겠소이다.} 그는 자세를 바로 했다. {조심하시오, 대사. 나의 연자창은 인정이 없으니까.} 휘리릭_____ 금사창이 금빛 광망을 발산하며 무섭게 쇄도해 왔다. 혜천대사는 정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창끝을 주시하며 가볍게 우 수를 가슴 앞에서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꺾었다. 순간, 한 줄기 태산을 허물어 버릴 듯한 장력이 금사창에 부딪쳐 갔다. 막리극은 장력이 비쾌하게 그의 창을 쳐오자 갑자기 손목을 비 틀며 창끝을 아래로 내리면서 그대로 혜천대사의 단전을 찔렀다. {아미타불..... 막시주의 금사창법(金蛇槍法)은 과연 일절(一絶)이 요.} 혜천대사는 경탄성을 내면서 발끝을 찼다. 순간 그의 몸이 백학향시(白鶴向翅)의 신법으로 허공에 솟아올 랐다 싶자 그대로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쌍수를 들끊으며 소용돌 이쳤다. 2 {대력신장(大力神掌)____!} 막리극은 경악성을 지르며 급히 창끝을 움직였다 싶은 순간 이 미 전광석화처럼 혜천대사의 정수리를 찔러갔다. 실로 불가사의한 빠름이었다. 파파팟! 창과 창이 부딪치자 금속음과 파공음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금사창은 휘어질 듯이 휘청거리고 혜천대사는 다시 허공으로 치 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 비룡번신의 신법으로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혜천대사 는 벼락같이 십팔장을 한꺼번에 격출했다. (대단하구나! 맨손으로 나의 금사창을 받아내다니.....) 하나 생각은 느리고 그의 손은 빨랐다. 금불광망이 유성처럼 쏘아져 갔다. 파팟______ 팟______ 파! 귀를 찢는 듯한 파공성이 연신 터져 나왔다. 막리극은 손에 은은히 전해 오는 통증에 가슴이 철렁했다. (과연... 철불이란 명호는 명불허전이군.) 새삼 혜천대사의 무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막리극, 하나 그 는 절대로 물러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이 한판의 결전에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쐐애_____ 액_____ 금사창이 그의 손에서 무섭게 회전을 그렸다. 마치 돌개바람이 일 듯, 풍차가 급회전하듯 태산을 부슬 듯이 가공할 기세였다. 단 한 번이라도 여기에 스친다면 무엇이든 산산이 부서질 것 같 은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하나 상대는 철불이었다. 그는 쌍수를 기묘하게 교차시키면서 창 끝을 모조리 붕쇄시켰다. 싸움은 엄청난 격돌이었다. 주위 오 장 내는 이들의 몸에서 쏟아지는 막강한 경풍에 먼지가 돌풍에 말린 듯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중인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 섰다. 어느 새, 날이 훤히 밝아오고 찬란한 햇살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 었다. 막리극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벌써 세 시진이 지났을 것이다. 그 동안 수백초가 교환되었지만 혜천대사의 공수는 갈수록 엄밀해지고 수법의 변화는 현묘하게 그 를 핍박했다. 하나 막리극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싸움의 승패는 좀처럼 변함이 없었다. 막리극이 호랑이라면 혜천대사는 용(龍)이었다. 그러나 막리극은 싸우면 싸울 수록 내심 한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갈수록 그의 기력이나 초식 면에서 뒤떨어지고 있었던 것 이다. 다시 수십 초가 지났다. 그래도 두 사람은 조금도 지칠 줄 몰랐다.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뇌승은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태양제란 자가 혜천선사에 조금도 끌리지 않은 무예를 지니고 있다니, 변방의 무예수준도 우습게 볼 것이 아니군.}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며 자신과의 무예를 비교했다. 막리극은 일순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결국 나의 패배다. 위험하겠지만 모험 을.....) 다음 순간, 막리극은 창을 벼락같이 앞으로 뻗으며 좌정을 벼락 같이 펼쳤다. 그의 좌수는 평소보다 두 배나 커졌는데, 그 손에서 소리없는 암 경이 칼날같이 하반신을 노리고 뻗어왔다. {아미타불..... 밀종(密宗)의 대수인공력(大手印功力)!} 혜천대사는 경악성을 발하면서 사상보법(砂上步法)으로 몸을 피 했다. 그와 동시, 좌수로 연자창을 봉쇄하며 우수에 극고의 공력을 주 입시키고 대갈성을 외쳤다. {금강불연(金剛佛蓮)_____!} 순간 막리극의 좌수와 혜천대사의 우수가 무섭게 격돌했다. 꽝______ 꽈꽝______! 두 사람의 신형이 섬전같이 부딪친다 싶자 빠르게 갈라졌다. 연자창을 땅에 집고 비틀거리는 막리극, {으..... 금강복마수.... 울컥!} 그는 말을 하다 갑자기 입에서 한사발의 피를 토했다. {아미타불... 막시주의 양보하심에 소승이 감사드립니다.} 혜천대사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막리극은 처참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막리극은.... 패했소. 약속대로 내가 살아 있는 한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오.} 하고는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모두..... 돌아간다!} 혜천대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막시주는 강했소. 아마 내 평생 당신 같은 고수는..... 다시 만나 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막리극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대사,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일순 말을 멈춘 막리극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눈으로, {대사의 정의지심에 알려 드리리다. 원래 나는 마교와 합작으로 중원에 들어온 것이요, 헌데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소.} 혜천대사를 비롯한 중원의 고수들은 움찔 놀랐다. 막리극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구파일방과 무림맹을 중원에서 잡아놓기로 했고 응원군 을 보내 주기로 했소.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으니 내 생각으로는....} 한 순간 장내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지금은 중원의 세력이 반감된 상태로 마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요.} 혜천대사의 표정이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아미타불.....} 혜천대사는 연신 불호를 외우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막시주의 도움을 잊지 않겠소이다.} 그는 벼락같이 신형을 날렸다. {중원으로 돌아갑시다!} 이 말이 끝났을 때 수십 줄기의 인영이 비조처럼 남쪽으로 날아 갔다. 3 무림매의 천웅대전-! 실내는 고요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팔선탁자 주위로 오 인이 굳은 표젖으로 앉아 있는데 하나같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태허천존을 위시하여 동추평, 황보가혜, 내당총관 호불감(胡不甘), 그리고 용문검부의 장손인 백상천이 앉아 있었다. {.....!} 태헌천존은 중인들의 얼굴을 일별한 다음 말문을 열었다. {마교의 동태를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실정입니다.} 동추평이 쓴웃음을 띄웠다. {황보선생, 너무 초조히 생각할 것 없소. 이틀 후 연노제의 초상 을 치를 때 아마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이니 방비나 단단히 해야 될 것이오.} 태헌천존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크아아악!] 돌연 처참한 비명이 어둠을 찢었다. 대전 밖 뜰에는 단단히 무장한 백여 명의 장한들이 서 있고 그 들이 둘러싼 가운데에는 핏빛을 띠운 교자(轎子)가 하나 놓여 있 었다. 그리고 그 혈교자 뒤로는 준미한 모습의 모용천엽과 혁사군이 냉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방금 비명을 지른 듯한 사람은 목줄기에 구멍이 뚫려 쓰러져 있 는데, 그 주위로 분노에 찬 무림맹의 무사들 수백명이 무서운 눈빛 으로 혈교의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태헌천존이 천웅대전에서 나오자 무림맹의 무사들은 급히 허리 를 숙였다. 그는 손을 흔들며 물러나라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혈교를 노려보며 침중히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인데 야밤에 남의 집에 침입해서 살인을 한단 말 이요?} 문득 혈교 안에서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은방울 굴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 황보승, 옛날보다 훨씬 나아졌군요.} 문득 황보승의 눈빛이 무섭게 떨렸다. {혹... 시..... 당신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자 일순 교자의 주렴이 떨어지고 그 사이로 혈의여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요염하면서도 냉기를 풍기는 혈의여인은 바로 마교의 교주였다. 태헌천존은 혈의여인을 멍하니 넋을 잃은 채 쳐다보았다. {당신은... 연운설(燕雲雪)...!} 가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격동에 떨리고 있었다. {호호..... 황보승!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나요?} 혈의여인이 냉랭하게 웃으며 물었다. {내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소? 당신을 만났던 때가 어제인 것만 같은데.....} 태허천존은 처연한 신색으로 말 끝을 흐리며 한숨을 쉬었다. 문득 혈의여인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랐다. {흥!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군 요.} 그녀가 비웃듯이 말했다. 태허천존은 고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십 오 년 전 미모의 여인이 아이를 안고 처절히 애원하는 모 습을 본 것은 태허천존이었다. 그는 혜천선사의 앞에서 울부짖는 여인의 모습에 의문을 느꼈지 만, 당시 그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녀를 마차에 태워 멀리 변방 까지 보내어 주었던 것이다. {부인, 그때의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요.} 태허천존의 말에 혈의여인은 교갈을 터뜨렸다. {닥쳐요, 황보승! 인면수심의 당신들을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예요.} 돌연 이때 황보가혜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흥, 귀신같이 요사한 여자가 감히 누구에게 망발을 하느냐?} 그녀는 신녀검(神女劍)을 휘둘렀다. {안된다, 혜아야!} 태허천존은 깜짝 놀라며 급히 몸을 날렸다. 황보가혜는 부친이 앞을 가로막자 잔뜩 원망에 찬 표정으로 외 쳤다. {아버니! 저 요사한 여자와 무슨 말을 할 게 있다고.....} {닥쳐라! 이 일은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태허천존이 노기띤 목소리로 말했다. 혁사군이 괴소를 흘리며 앞으로 나왔다. {흐흐.... 교주, 더 이상 말을 할 것이 있소? 그냥 쓸어 버리지.} 그는 음침한 시선으로 중인들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마교의 인물이 아니오?} 동추평이 제남성의 일을 기억하며 혁사군에게 소리쳤다. {흐흐.... 거지놈! 너 같은 놈이 그런 것을 알아서 무얼하겠느 냐?} 혁사군이 냉랭히 소리치며 우수를 벼락같이 떨쳤다. 그의 무예가 무섭다는 것을 잘 아는 동추평은 다급히 몸을 피하 며 개방의 절기인 타구봉법을 펼쳤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리자 한쪽에 서 있던 모용천엽이 찢어질 듯 한 휘파람소리를 냈다. 그 순간, 갑자기 사방에서 수많은 흑의인들이 신속하게 뛰쳐나오 며 도검을 휘둘렀다. 태허천존은 갑작스런 사태에 다급히 외쳤다. {모두 당황하지 말고 침착히 응전해라!} 이어 그도 검을 뽑아들었다. {부인, 결국 피를 봐야 하겠소?} 혈의여인은 갑자기 섬섬옥수를 뻗으며 외쳤다. {흥, 오늘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조리 죽인다!} 태허천존은 갑자기 새하얀 옥수가 칼날처럼 뻗어오자 재빨리 검 을 들어 막았다. 순간 혈의여인의 옥수가 가볍게 회전을 그리며 금나수법으로 검 을 낚아채 왔다. 태허천존은 흠칫 놀랐다. (미쳤구나. 감히 맨손으로 검을 잡으려고 하다니..... 그러나 이 여자를 상하게 할 수는 없다.) 다음 순간, 태허천존은 검을 움추리며 다급히 물러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옥수가 붉게 물드는가 싶자 두 줄기 피빛 지풍이 벼락같이 천돌혈과 미간을 향해 쏘아오지 않는가? 4 {혈마지(血魔指)!} 태허천존은 다급히 경악성을 지르며 몸을 피했으나 혈지의 빠름 은 불가사의했다. {으윽!} 태허천존은 나직이 신음을 흘리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미간을 쏘아온 혈지는 피했으나 천돌혈을 피하지 못해 목줄기에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어져 가느다란 피가 흘러나왔다. 비록 호신강 기 덕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나 심각한 중상이었다. 이것을 본 백상천이 다급히 몸을 날려왔다. {노선배님!} 그의 몸이 태허천존을 가로막으려는 순간, {물러서라!} 모용천엽이 차갑게 외치며 빠르게 덮쳐왔다. 우수를 부챗살처럼 펼치고 어깨를 잡아오는데 그 수법의 현묘함은 필설로 형언할 수 가 없는 것이었다. 순간 백상천은 검을 뽑아 전광석화같이 앞으로 내찔러 왔다. {흥, 용문검부의 회풍검법(廻風劍法)이군!} 모용천엽은 냉랭히 외치며 손을 거두어 들임과 동시 허리춤에서 한쌍의 묵환을 꺼내들었다. 원형의 동그란 묵환은 은은한 검은 빛이 번들거리는 일견해 보 아도 범상치 않은 병기같이 보였다. 백상천은 그의 병기를 주시하며 장검을 가슴 앞으로 치켜들었다. 이때 태허천존은 황보가혜의 부축을 받아 대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헌데, 혈의여인은 웬지 그를 쫒아가지 않고 서늘한 눈길로 사방 을 둘러보았다. 장내에는 무림맹의 무사들과 흑의인들이 격돌을 하고 있는데, 무 림맹의 무사들은 흑의인들의 기묘하고 독랄한 수법에 점차 밀리고 있었다. 동추평은 혁사군을 맞아 고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혁사군은 이미 백 살이 넘은 대마두요, 그의 절명장은 극히 사이 하고 악랄했다. 모용천엽은 백상천의 신중한 자세에 묵환을 가슴 앞으로 세우고 그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검술일도(劍術一道)라는 것은 모든 무학(武學) 중에서 조예를 쌓 기가 가장 힘든 무공이다. 전적으로 정신집중에 의거하여 기로써 수련을 하는데, 대성의 경 지에 이르면 단 일순간의 허점이라도 재빨리 포착해서 순간적으로 찌르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어검술(馭劍術)의 경지에 이르면 수장 밖에서 적을 살상할 수 있다. 백상천은 타고난 천품과 뛰어난 재질로 이미 가전의 검법을 십 성 익힌 상태, 그의 한 동작 한 동작에는 놀라울 정도의 매서움이 담겨 있다. 돌연 백상천이 회풍낙안의 수법으로 모용천엽의 어깨를 찔러갔 다. 그 순간 모용천엽은 찰나에 왼쪽으로 두 자 정도 비켜서면서 좌 수에 들린 묵환으로 막으며 우수를 앞으로 뻗쳤다. 백상천은 모용천엽의 신속한 응전에 급히 팔을 굽혀서 검을 일 단 거두어 들이고 뒤로 물러서는 순간 우수에 들린 묵환이 앞가슴 에 닥쳐왔다. 백상천은 검을 횡소오악(橫掃五嶽)의 수법으로 그어내어 묵환을 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백상천은 문득 자신의 검이 미끄러진다고 느끼며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그 순간 어느 새 모용천엽의 좌수에 들린 묵환이 신속하게 백상 천의 어깨를 쳤다. {크흑!} 백상천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황망히 물러섰다. 어깨뼈가 묵 환에 부러진 것이다. 그 위기의 순간, {백형, 피하시오.} 사천당문의 자제인 당송이 어느 새 나타났는지 재빨리 당문의 갈미침(蝎尾針)을 모용천엽에게 쏘아내며 백상천의 앞을 가로막았 다.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컥!] 당송은 갑자기 머리에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리며 앞으로 고꾸라 졌다. 마교 교주인 혈의여인이 어느새 다가와 혈마지(血魔指)를 날려 당송을 죽인 것이다. [당형!] 당송의 어이없는 죽음에 백상천이 어깨를 부여안은 채 처절하게 외쳤다. {천엽아, 어서 그 놈마저 처리하고 뒤따라 오너라!} 혈의여인은 혈마지로 당송을 죽이고 나서 대전을 향해 몸을 날 렸다. 대전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혈의여인은 사방을 살펴보며 안채로 난 통로에 들어섰다. 순간 한 자루의 장도가 벼락같이 그녀의 머리를 쪼개왔다. {흥!} 그녀의 냉랭한 코웃음이 들리고 하얀 섬섬옥수가 부챗살처럼 펼 쳐치며 가볍게 장도를 낚아챘다. 장도를 뻗은 무사는 내당의 경비무사도 다급히 힘을 주었으나, 어느 새 장도가 소리없이 부러지고 한 줄기 뜨거운 열기가 장도를 타고 몸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싶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혈의여인이 자신의 유유한 진력으로 무사의 오장육부를 으스러 뜨린 것이다. 혈의여인은 그대로 안채로 뛰어들었다. 조그만 인공자단에 연못, 그리고 한 채의 정자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그녀는 매죽헌(梅竹軒)이란 현판을 쳐다보며 왼쪽 통로에 접어 들었다. 그 순간 문득 다섯 명의 무사가 정원에서 튀어나왔다. {멈추어라!} 다섯명의 무사들은 제각기 도검을 들고 순식간에 그녀를 포위했 다. 돌연 이때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들려오며 갑자기 모용천엽이 비조처럼 날아왔다. {어머님! 이 자들은 나에게 맡기고 들어가세요.} 모용천엽은 말과 동시에 묵환을 쳐냈다. {으악!} {캑액!} 혈의여인 앞을 막고 있던 두 명의 무사는 갑자기 날아온 묵환에 의해 머리가 부서져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혈의여인은 길이 뚫리자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남은 삼 인의 무사는 모용천엽의 무위에 혼비백산했다. 단 일초에 자신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본 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 했다. 그들로서는 모용천엽 같은 고수는 처음 상대해보는 것이다. 5 -불령각(佛靈閣)! 철불 혜천대사의 거처인 이곳은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과 아우성 이 요란했지만 주위는 비교적 조용했다. 혈의여인은 불령각을 노려보며 증오에 찬 눈빛이 되었다. (혜천, 당신이 나의 애원을 뿌리치고 내 모든 것을 망쳤으니 당 신은 나와 철천지 원수..... 하지만...) 문득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혜천, 나는 꼭 당신이 나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을 보고 말 것이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증오의 불길을 태우며 걸음을 옮겼다. 휙! 휙! 돌연 불령각 주위에서 십여 명의 무사들이 재빠르게 달려나왔다. 그들은 불령각을 지키는 경비무사들이었다. 그 순간 혈의여인 눈빛이 붉어지면서 쌍수를 뻗었다. 츠츠_____ 츠츳! 붉은 장영이 갑자기 수십 개로 늘어나면서 무사들을 덮어씌웠다. {크악!} {으악!} 비명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십여 명의 무사들은 제대로 손발 한 번 움직이지 못한 채 머리가 으깨지고 가슴이 파열되어 쓰러져 갔 다. [그만둬요!] 바로 그때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과 함게 불령각의 문이 열리며 하나의 여인이 나타났다. 순간 혈의여인은 그녀를 쳐다보며 경악성을 토했다. {련아야!} 불령각에서 나온 여인은 적의에 찬 눈으로 혈의여인을 노려보았 다. 그녀는 바로 적용화련(狄容華蓮)이었다. 헌데 그녀의 배는 동산만큼 부풀어 올라 있고 얼굴은 핼쓱했다. 한눈에 보아도 만삭(滿朔)임을 알 수 있었다. 혈의여인은 한동안 막연한 눈길로 적용화련을 쳐다보았다. {네가... 이곳에 있다니..... 그리고 임신까지...}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더듬거렸다. 적용화련은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에 흠칫 놀랐다. {당신은 누구예요, 나를 아세요?} 그녀가 불안한 눈으로 묻자 혈의여인은 눈을 부릅떴다. {네가 나를 모른단 말이냐?} 혈의여인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외쳤다. 적용화련은 떨리는 눈으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기억을 못해요.} 그녀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혈의여인의 눈빛이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소리냐? 기억을 못하다니....?} 적용화련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위에 널려진 시신을 훑어보았 다. {이들은 모두 좋은 사람인데 당신은 왜 이들을 죽였나요?} 혈의여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적용화련의 표정을 살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이 아이는 정말 나를 모르는 것 같은데...) 그녀는 기이한 눈빛으로 적용화련에게 다가섰다. 움찔한 적용화련은 주춤 물러서며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문득 이때 모용천엽이 신속하게 날아왔다. {어머님...!} 하고 외치던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화련누이!} 적용화련은 갑자기 나타난 준수한 청년이 자신을 보며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겁먹은 눈빛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누구예요?} 모용천엽은 이 말에 망연한 눈으로 혈의여인을 보았다. {어머님!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혈의여인은 복잡한 시선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잘은 모르겠다만 저 아이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모용천엽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적용화련을 주시하며 말했다. {화련, 나는 모용천엽요. 나를 모르겠소?} 적용화련은 겁먹은 눈빛으로 나직이 되뇌었다. {모용천엽..... 모용천엽.....!} 혈의여인은 아미를 찌푸렸다. {엽아야, 지금 이곳에서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련아를 데리고 가 자!} 모용천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화련, 곡으로 갑시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갔다. 순간 적용화련은 재빨리 물러서면서 날카롭게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는 당신들을 따라가지 않겠어요.} 모용천엽은 그녀가 겁먹은 얼굴로 재빨리 물러나자, {화련, 우리는 당신과 잘 아는 사이요. 당신 할아버님에게 데려 가 줄 테니 우리를 따라갑시다.} 돌연 이때, {우____ 우____!} 마치 용이 울부짖는 듯한 장소성이 은은히 들려왔다. 혈의여인은 두 눈을 빛내며 급히 말했다. {장소성을 보아 나에 못지 않은 고수다. 련아의 혼혈을 짚어 데 리고 가자!} 모용천엽은 이 말에 황망히 우수를 뻗었다. 순간 적용화련은 급히 몸을 피했으나 만삭이 된 몸으로 신속한 모용천엽의 지풍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쓰러지자 모용천엽은 황망히 그녀를 껴안고 몸을 날렸다. 무림맹은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에서 화광이 일어나고 매운 연기가 코를 찔렀다. 곳곳에 널려 있는 시체와 고통스런 신음을 발하는 중상자들, 그 리고 타오르는 불길은 주위를 아비지옥으로 만들었다. {이럴 수가.....!} 두 명의 인영이 망연한 눈길로 사방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바 로 청해존자(靑海尊者) 오합률과 그의 제자인 천갈 냉유도였다. 第 三十一 章 돌아온 野獸 1 홍무(洪武) 구년 십일월, 무림맹이 폐허로 변한 지 벌써 팔개월이 흘렀다. 하북성에서 돌아온 혜천선사는 혈마지에 입은 상처 때문에 숨진 태허천존 황보승의 주검 앞에 사십 구일제를 지낸 후 홀연히 자취 를 감추고 말았다. 마교 또한 무림맹을 폐허로 만든 후 웬일인지 그 자취를 감추었 다. 그리고 무림맹이 사라진 후 갑자기 강호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 다. 그 동안 무림맹의 위세에 눌려 살던 중원대소문파와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강호 곳곳에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호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만은 웬일인지 전날과 다 름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숭산(崇山)에서 제남(齊南)을 향하는 관도(官道)는 철판처럼 꽁 꽁 얼어 붙어 있었다.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함박눈은 산처럼 쌓여 끝이 없는 은색 (銀色)의 색을 이루고,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폭설과 싸늘한 바람 도 끝이 있는 듯 천천히 멈추었다. 이때 한 명의 외롭게 보이는 인영이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옮기 고 있었다. 그는 일신에 매우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지금은 엄동설한의 한겨울, 머리 위에 쌓였던 눈이 서서히 녹아 그의 목줄기를 타고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조금 도 떨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겨 갔다. 마치 돌로 만든 몸뚱이를 지녔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라도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짙은 눈썹에 생기없는 두 눈, 얄퍅한 입술이 굳게 닫혀 있는 이 십대 전반의 사나이였다. 게다가, 우뚝 솟아 있는 날카로운 콧날이 더욱 얼굴을 야위어 보 이도록 했다. 이런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철 같은 강인함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물론,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비정하면서 독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나이의 두 눈은 매우 특이했다. 그의 눈동자는 무기력한 가운데 탁하고 흐릿해 보였다. 마치 죽 은 생선의 눈이랄까? 어떻게 보면 파충류의 눈알처럼 섬뜩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의 발걸음은 느릿하기는 했지만 정지하거나 빠르지도 않고 일 정했다. 담사(潭邪)-! 그렇다. 그는 바로 숭산(崇山) 준극봉(俊極峰)을 떠나온 담사였 다. 일 년여 동안 준극봉의 동혈에서 지내며 법공선사에 의해 가르 침을 받은 그는 전날과는 달리 많이 변해 있었다. 예리함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으나 타인에 대한 적의나 사나운 기세는 많이 갈무리 된 상태였다. 마치 한 마리 늑대에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자로 변했 다고나 할까?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노인이 담사와 걸음을 같이 하고 있었다. 깡마르고 추악한 얼굴, 그리고 코가 어찌나 큰지 두 눈이 마치 귀 옆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초리는 매우 괴이했다. 가늘게 찢어진 눈에서 번뜩이는 눈동자 는 마치 흔들리는 수양버들처럼 부드럽고 영활해 보였다. 장대같이 큰 키에 회색장삼을 입었는데 그의 몰골은 담사에 못 지 않게 초라해 보였다. 노인은 슬그머니 담사의 표정을 훔쳐보며 실실거렸다. {헤헤.... 우리는 또 만났군.} 그의 목소리는 탁하고 흐렸지만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담사는 이 말에 대꾸도 않고 묵묵히 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보니, 삼 일 동안 우리는 일곱 번이나 만났으니 이것은 필시 전생의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손뼉까지 처가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하나 담사는 여전히 거들떠 보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제길, 이놈은 얼음을 삶아먹었나, 구어먹었나, 삼 일 동안 따라 다니면서 온갖 수작을 다해 보았지만 저 동태 눈깔만 희번뜩거릴 뿐 한 마디의 말도 없으니.... 나도 미친 놈이지. 이따위 놈이 뭐가 좋다고.) 내심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표현하지 못했 다. 다만 다시 은근의 담사의 표정을 살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젊은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내 성안으로 들어가면 술 을 한 잔 사지 어떤가?}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사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힐끗 그를 주시했다. {다시 한 번 말을 하지만 나를 더 이상 귀찮게 한다면 나의 검 이 참지 않을 것이오.} 그의 손이 가만히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으로 옮겨졌다. 그것은 시중 어디에서나 흔히 구입할 수 있는 싸구려 철검이었다. 담사의 손은 얼어붙어서 인지 모르지만, 손가락이 매우 길고 여 인의 속살처럼 보드라우면서도 탄력을 지니고 있었다. 노인은 황망히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젊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그냥 자네가.....} 또다시 너스레를 떨던 노인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담사의 눈초리가 마치 반짝이는 독사의 눈처럼 그를 주시했다. {으음..... 알았네. 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질색한 표정으로 헤푼 웃음을 지었다.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도 없는 법, 담사는 말없이 걸음을 움직 였다. 두두두! 이때 문득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대의 마차가 관도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달려왔다. 수북이 쌓 인 눈 위를 구르는 마차 바퀴 소리가 마치 얼음 부서지는 소리처 럼 들리며 음산하게 분명히 들려왔다. 마차는 두 필의 준마가 더운 김을 뿜어내며 끌고 있는데 전체가 붉은색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마부석에는 텁석부리 수염을 기르고 날카로운 눈초리에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마차가 서서히 담사 곁을 스쳐 지나갔다. 노인은 마차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나직이 주절거렸다. {염병할, 어느 놈은 이런 날씨에 편히 앉아서 여행하고 나 같은 노인은 이렇게 다리가 부러져라 걸어야 되니 이 무슨 개팔자인 가?} 자탄하는 듯이 신세타령을 늘어 놓는 노인은 문득 움찔했다. 천 천히 달려가던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담사와 노인은 서서히 마차 옆을 지나쳤다. {노인은 마차에 타고 싶나요?} 갑자기 들려온 청아한 옥음에 노인은 일순 걸음을 멈추고 고개 를 돌렸다. 마차 안에는 이제 이십여 세 가량의 여인이 타고 있는데, 찬바람 이 일 듯한 냉기를 풍기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2 -북천일미(北天一美) 뇌옥연!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의 정혼자를 죽인 흉수를 찾아 중원을 헤 매는 북천일미 뇌옥연이었다. 노인은 한 순간 히죽 웃었다. {너의 마음은 갸륵하나 이 늙은이는 볼 일이 있어서.....} 말을 하던 노인은 갑자기 주위로 시선을 돌리고는 급히 뛰어갔 다. {젊은이, 같이 가세. 사람이 어찌 그리 무정한가.} 담사를 쫓아온 노인은 투덜거렸다. 뇌옥연은 눈에 이채를 띠며 노인이 뒷모습을 주시했다. (노인의 말은 분명히 전음지술을 이용한 육합전음(六合傳音)이었 다.) 육합전음이라면 최소한 일갑자의 공력을 지녀야 시전할 수 있다. {철송(鐵宋) 가자.} 그녀는 나직이 말을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조부님에 못지 않은 고인인데 나의 견식이 짧아서인지 저런 노 인의 모습을 가진 인물은 아직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심 그녀는 의문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림맹은 폐허로 변했고 혜천대사마저 종적을 감추었으니 어디 가서 연대가를 해친 흉수를 찾는단 말인가?) 뇌옥연을 비록 연대강을 몇 번밖에 보지는 못했으나, 미혼처로서 그의 죽음에 복수를 해야 된다는 굳센 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 강호를 돌아다녔으나 아직 아무런 단서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그녀는 자객이란 자객은 다 찾아다니며 매정하게 죽였다. 그로 인해 그녀에게 새로운 별호가 붙었으니..... 나찰옥녀(羅刹玉女)라면 중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객잔 앞에 있는 주루에는 양피로 된 외투를 입은 대한들이 때때 로 출입을 하고 있었다. 술을 마신 몇몇 사람들은 큰소리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일부 러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뇌옥연이 주루에 들어 오자, 한 동안 떠들썩하던 주루는 일순간 조용해졌다. 이 주루는 사실 주루라기 보다는 주막으로 건달이나 거친 사람 들이 많이 오는 곳이기도 했다. 뇌옥연은 수십 쌍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한 점의 부끄러움 도 없이 차디찬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왔다. 실내에는 모두 여섯 개의 탁자가 있었는데 모두 손님이 꽉차 있 었다. 그녀는 힐끗 실내를 살펴본 다음 거침없이 창가에 있는 탁자로 다가섰다. 그곳에는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는 청년가 멀대같이 키만 껑 충한 추괴한 용모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물론 담사와 그를 따라 다니는 이상한 노인이었다. {실례하지만 합석을 하시면 어떻겠어요?} 담사와 같이 앉아 있던 노인은 뇌옥연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 자 두꺼운 입술을 벌리고 히죽 웃었다. {헤헤..... 낭자 같은 미녀가 합석을 한다면 대환영이지. 그렇지 않은가, 젊은이?} 담사는 노인이 갑자기 물어오자 힐끗 뇌옥연을 쳐다보고는 말없 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말은 없었으나 분명히 싫다는 행동이었다. 뇌옥연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그녀가 태어난 이래 아직까지 그녀를 보고 공손하지 않은 사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헌데, 담사의 이 무례한 행동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 지만 기묘한 마음도 들었다. 뇌옥연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노인은 흠칫했으나 실실거리며 수작을 걸었다. {헤헤.... 낭자, 나는 조노이(趙老二)라고 하네만.} 뇌옥연은 살풋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녀는 뇌옥연이라고 해요.} 조노이의 표정이 놀라움에 가득찼다. {낭자가 나찰옥녀라는 뇌옥연!} {호호..... 노인께서 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그녀는 교염이 웃으며 말했으나 조노이란 이 노인이 결코 진심 으로 놀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짐짓 놀라는 척 하는 것 뿐이었다. 담사는 그녀의 이름이 나왔을 때 눈빛이 흔들렸으나 그것은 순 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조노이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의외인 걸! 이 돌부처 같은 놈이 이 아이를 알고 있다니 그렇다 면...) 조노이는 내심 음흉한 생각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당금무림에서 나찰옥녀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이 늙은이도 귀가 있으니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말하며 그는 담사를 주시했다. {젊은이도 잘 알고 있겠지?} 담사는 조노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않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뇌소저에게 팽대상(彭大上)이 인사 드립니다.} 조노이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이십대 후반의 위맹해 보이는 사나이가 정중히 장읍을 취 했다. 남색피풍을 걸치고 있는데 등 뒤에 한 자루의 장도를 메고 있었 다. 먼길을 온 듯 약간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동안의 살결에 건장한 체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뇌옥연은 일순 고운 아미를 찡그렸지만 나직이 인사를 했다. {팽공자, 오랜만에 보는군요.} 팽대상-! 그는 산서성(山西省) 팽문(彭門)의 소문주였다. 산서팽문은 예로부터 도법의 명인들을 배출한 집안이다. 북천뇌 보의 뇌천도결과 산사팽문의 풍뢰도법(風雷刀法)은 중원에서 명서 을 떨치고 있다. 팽대상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저잣거리에서 소저의 마차를 보고 혹시나 해서 달려왔 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 인연이 깉은 것 같읍니다.} 그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일순 뇌옥연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팽공자는 언제부터 농담을 즐기셨나요?} 비꼬는 듯이 차갑게 말을 하자 팽대상은 소탈한 표정으로 말했 다. {그 말이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그가 가볍게 허리를 숙이자 뇌옥연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원 래부터 팽대상의 마음이 충후하고 가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뇌옥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팽대상은 그녀가 웃음을 띄우자 미소르르 지으며 담사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3 {실례하겠소. 소생은 팽대상이라고 하오. 형씨는?} 그는 담사에게 말을 건넸다. 순간, 담사는 천천히 일어서며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무시 당했다고 생각한 팽대상은 재빨리 일어나서 담사의 어깨를 잡았다. {친구, 갑자기 일어날 것까지는 없지 않소?} 순간 팽대상은 움찔했다. 갑자기 담사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팽 대상의 손길을 피하며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팽대상은 미묘한 표정으로 훌쩍 몸을 날려 다시 담사의 어깨를 낚아챘다. 처음에는 그냥 그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금룡박수 (禽龍搏手)라는 금나수법으로 손을 뻗었다. 담사의 표정이 순간 냉랭해졌다 싶자 몸을 옆으로 제끼며 좌수 를 들었다. {윽!} 팽대상은 고통의 표정으로 황망히 손을 움추리고 물러났다. 그의 손이 담사의 좌수와 부딪치는 순간 마치 철벽을 때린 듯 손가락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을 느낀 것이다. 조노이와 뇌옥연은 찰나에 벌어진 상황에 눈을 크게 떴다. 팽대상은 비록 무림에는 별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무예는 약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단 일수에 그가 물러나다니... 팽대상이 아픔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담사의 신형은 주막에서 보이지 않았다. 팽대상은 뇌옥연 앞에서 창피를 당하자 치미는 혈기에 황망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뇌옥연과 조노이의 눈이 마주치고 그들은 황망히 밖을 나갔다. 거리는 한산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눈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는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팽대상은 담사를 막아섰다. {친구의 무예가 대단히 고강하구료. 내 비록 무예는 보잘것없으 나 이 한 자루의 도로써 친구의 가르침을 받겠소.} 그는 등 뒤의 도를 뽑아들었다. 담사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팽대상을 주시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순간 팽대상은 가슴이 철렁함과 동시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 만 같았다. 독사의 눈알처럼 번들거리는 눈초리에 그는 자신이 문 득 굶주린 야수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담사는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고 그냥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 다. 촤____ 아_____ 한 줄기 냉풍이 휩쓸고 지나쳤다. 팽대상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문득 자신이 들고 있는 도가 천근같이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담사의 눈에서 시퍼런 살광이 솟구쳤다. 돌연 뇌옥연인 두 사람의 가운데에 뛰어들며 말했다. {팽공자, 도를 거두세요.} 팽대상은 붉그락 푸르락 하는 얼굴로 볼멘 소리를 했다. {뇌소저, 이 일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뇌옥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는 조그만 일로 싸움을 벌이는 소인배가 팽공자님은 아니라 고 믿고 있어요.} 팽대상은 턱 밑을 씰룩거리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도를 거두었다. 담사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뇌옥연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녀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꿈틀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조노이는 힐끗 뇌옥연을 향해 히죽 웃고는 급히 담사를 따라갔 다. 팽대상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고소를 지으며 뇌옥연에게 고 개를 숙였다. {뇌소저의 도움으로 내 생명을 구했으니 이 은혜는 잊지 않겠 소.}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온 길을 되돌아 갔다. (팽공자도 아예 그의 적수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군.) 뇌옥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대치상태를 지켜보 면서 팽대상이 담사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고수들의 결투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다. 그런데, 팽대상은 초식을 펼치기도 전에 이미 정신력에서 압도당하고 있었 던 것이다. 거기다가, 팽대상이 호흡을 조절할 때 드러낸 허점을 담사는 놓 치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 순간 뇌옥연이 전권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아마 팽대상 은 명년이 제사날이 있을 것이다. 뇌옥연은 철송이 마차를 끌고오자 가만히 마차에 올랐다. {철송, 아까 그 두 사람을 따라가자.} 마차는 서서히 출발했다. 4 제남성 북쪽에 위치한 석고산(石高山), 수많은 무덤이 곳곳에 걸려 음산한 계곡에 담사와 조노이가 무 표정히 하나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이미 날은 저물어 갈 때라 간간이 불어오는 차가운 눈바람과 노 을이 귀신이라도 나올 듯 스산한 풍경이었다. 살얼음이 덮인 크고 작은 두 개의 무덤은 묘비조차 보이지 않았 다. 담사는 가만히 성안에서 사온 조화와 향에 불을 붙였다. 담담한 향연이 피어오르자, 한결 스산함이 가시는 것만 같았으나 그것은 생각 뿐 계곡은 어둠이 깔림에 따라 음침함마저 풍겼다. 한동안 무표정히 무덤을 응시하던 담사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조노이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담사의 음울한 태도에 벙 어리 냉가슴 앓듯이 끙끙거렸다. (빌어먹을, 다 늙은 나이에 내가 망령이 들었지, 이 무슨 궁상이 란 말인가?) 내심 당장이라도 제 갈길을 갔으면 했으나 어쩐지 그의 발걸음 은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아아악!]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계곡을 메아리쳤다. 조노이는 움찔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비명은 뾰족하면서도 가느다란 것이 여인의 비명임이 분명했다. 담사는 일순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것도 일순간, 그는 느릿느릿하게 온 길을 되돌아갔다. 조노이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황망히 말했다. {젊은이, 아무래도 여인의 비명 같은데 한 번 가보지 않겠나?} 그러나, 담사는 못 들은 척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왔던 길로 걸 어갔다. (이런 무정한 인간 같으니라구, 나도 망령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 지, 이 따위 음침한 놈을 내가 무엇이 좋다고 이 고생을 한단 말인 가?) 내심 투덜거리며 연신 뒤를 바라보면서 담사를 따라갔다. 얼마나 걸어 내려 왔을까? 차차차창! 갑자기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한 대의 녹색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옆에는 한 명의 여인이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있고, 그 앞 에 삼남일녀(三男一女)가 두패로 나뉘어 치열한 사람을 벌이고 있 었다. 삼남일녀중 여인은 뇌옥연이었고, 그녀와 상대하고 있는 자는 깡 마른 체격에 검고 가느다란 장검을 휘두르는데 그 수법이 심히 괴 이하면서도 악랄했다. 그 옆에는 마차를 몰던 텁석부리 대한과 뇌옥연과 상대하고 있 는 인물과 비슷한 장한이 결전을 벌이는데, 텁석부리 대한은 고전 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텁석부리 대한은 한 자루의 장도를 웅후에게 휘두르지만, 상대방 의 가느다란 장검은 독사의 혓바닥처럼 악랄하게 사혈을 교묘히 핍박해 왔다. 돌연 텁석부리는 대한의 팔에 상처를 입자 괴성을 지르며 장도 를 벼락같이 상단으로 쳐올렸다. {흐흐..... 뇌전도법이 비록 무림일절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 림도 없다!} 장한은 스산하게 외치며 장검을 부르르 떨었다. 쩌어엉! 그러자 그자의 검끝에서 일순 검기가 솟아 나오면서 신속하게 장도를 베듯이 쳐냈다. 창! 장검은 장도를 막음과 동시에 미끄러지듯이 칼등을 타고 순식간 에 목줄기를 스쳤다. {으악!} 텁석부리 대한은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주춤 물러선다싶지 무릎 을 꿇고 꼬꾸라졌다. 갑작스런 비명에 놀란 뇌옥연은 수중의 검을 재빨리 거두고 물 러섰다. {철송!} 그녀는 이름을 부르면서 텁석부리 대한을 부축했으나 이미 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변해 있었다. {흐흐.... 뇌소저 순순히 저 여자를 우리에게 넘겨준다면 더이상 귀찮게 굴지는 않겠소.} {닥쳐라! 네놈들이 철송을 죽인 이상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뇌옥연은 교갈을 지르며 검을 고쳐 잡았다. 왼쪽에 서 있던 장한이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뇌소저, 벽혈쌍사(碧血雙蛇)는 북천뇌보와 원한을 맺고 싶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는 말 끝을 흐리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뇌옥연은 이 말에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벽혈쌍사는 십 년 전부터 강서(江西) 일대에서 흉명을 떨치는 자들로 무림맹의 추격에 삼 년 전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렇게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과 부딪쳐쳐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자가 흑사(黑蛇)고 안색이 붉은 자가 혈사(血 蛇)라 했다. 흑사가 흉측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우리를 알고 있다면 순순히 저 여자를 내어 주는 것 이 좋을 것이오.} 뇌옥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흥, 무림맹이 건재할 때는 쥐새끼처럼 숨어다니던 자가 이제 그 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다시 날뛰다니. 내 그들을 대신해서 당신들 을 응징하겠다.} 벽혈쌍사는 수치와 노기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들의 치부를 들추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특히 벽혈쌍사 같은 잔독한 자들에게 있어서 두말 하면 뭐하 랴..... {씹어 죽일 년....! 우리가 북천뇌보를 무서워 해서 양보하는 줄 알고 있느냐?} 혈사가 이를 갈며 외쳤다. {이렇게 된 이상 네년을 능욕한 다음 가랑이를 찢어 죽이겠다!} 그들은 장검을 치켜들며 악다구니를 쓰다가 갑자기 흠칫하는 표 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담사와 조노이가 느릿하게 장내에 나타났던 것이다. 뇌옥연은 그들을 보자 내심 안도의 숨을 들이마셨다. {노선배님, 마침 잘 오셨어요.} 그녀는 조노이를 보고 외쳤다. 갑자기 조노이의 안색은 그야말로 썩은 돼지의 간 색깔처럼 변했다. 뇌옥연의 말에 벽혈쌍사의 음산한 눈초리가 조노이를 향했다. 혈사가 조노이의 표정을 보면서 음침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이제보니 고인(高人)께서 오셨군.} 흑사도 덩달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인장, 미인을 위해 힘쓰기에는 너무 늙은 것 같은데.} 그들은 담사와 조노이의 초라한 모습에 한껏 비웃음을 터뜨렸다. {헤헤..... 염려는 고맙지만 내 소형제는 원래 독사를 잡는데 전문 이지. 그렇지 않은가 소형제?} 갑자기 조노이가 말을 하면서 담사를 물고 늘어졌다. 담사는 힐끗 조노이를 쳐다보면서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벽혈쌍사의 시선이 담사를 향했다. 그의 옷은 축축히 젖어 있었으며, 많이 젖은 곳에는 뻣뻣하게 얼 음까지 얼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대나무처럼 꼿꼿했고 그의 얼굴에는 더할 수 없는 고독감이 감돌고 있었다. 벽혈쌍사가 유심히 담사를 응시하는 순간 그들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무심히 보았지만, 보면 볼수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황야를 누비는 한 마리 고독한 늑대의 모습이랄까? 벽혈쌍사는 문득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5 흑사는 굳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는 어느 도상의 인물이요?} 담사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너의 친구가 아니다.} 이 말이 끝났을 때 담사의 몸은 천천히 그를 지나가고 있었다. 흑사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만한 말투에 그를 무시하는 행동, 흑사는 음침한 괴소를 흘렸 다. {흐흐흐..... 건방진 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흑사는 말과 동시에 그의 검은 싸늘한 검광으로 변하면서 담사 를 찔러왔다. 순간 담사의 신형이 비틀거리자 흑사의 검이 귀밑을 간일발의 차이로 스치고, [커억!] 담사의 손이 번뜩인다 싶자 그의 검은 어느 틈에 검집을 빠져나 와 흑사의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시키고 있었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빨라던지 모든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담사는 심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흑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를 건드린 것이 너의 실수다.} 흑사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을 우물거렸지만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더니 입에서 선혈이 주르르 쏟아지면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 다. 이 무렵, 혈사는 이미 수중의 검을 치켜들고 있었으나 감히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담사의 수법이 그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 기 때문이다. 혈사가 들고 있는 검이 떨리는 가운데 그의 얼굴은 비지땀으로 온통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때, 담사는 심장에 박혀 있는 검을 서서히 빼냈다. 그러자 흑사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지더니 고개를 눈쌓인 땅에 처박았다. 담사는 힐끗 혈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혈사는 몸 뿐만 아니라 파랗게 지릴 입술까지 파들파들 떨고 있 었다. 자신을 비웃는 듯한 자조 어린 미소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혈사 에게는 그것이 죽음의 미소처럼 보였다. 혈사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담사는 말없이 몸을 돌리고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돌연 혈사는 동료의 시선을 쳐다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왔던 길 로 달려갔다. {.....!} 조노이는 한동안 입을 벌리고 얼이 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가 문 득, {소형제, 같이 가세.} 그는 급히 담사를 향해 뛰어갔다. 이윽고 조노이까지 완전히 사라지자 뇌옥연은 나직이 한숨을 쉬 며 마차 옆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부축했다. {이것 봐요, 몸은 어때요.}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여인은 뇌옥연이 몸을 흔들자 두 눈을 힘겹게 뜨면서 더듬 입을 열었다. {이것을... 낙양(洛陽) 금화장(金花莊)에... 전해...} 여인은 말 끝을 잊지 못하고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피묻은 손에는 하나의 죽통(竹桶)이 들려 있었다. 뇌옥연은 죽통을 품 속에 간직하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낭자 편히 눈을 감아요. 틀림없이 금화장에 이것을 전해 줄테 니.} 이어 그녀는 재빨리 장력으로 구덩이를 판 다음, 철송과 여인을 묻었다. 뇌옥연은 마차를 맹렬히 몰았다. 두두두..... 두..... 거의 일 리 가량 갔을까? 그녀의 눈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 다. 마차는 서서히 느려지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었다. {노선배님, 어디로 가는 것이예요?} 조노이는 뇌옥연이 외치듯이 묻자 넉살스럽게 웃었다. {헤헤.... 내 발길 닿는대로 가는 거지.} 그는 언제나처럼 헤푼 웃음을 흘리며 나직이 대꾸했다. {좋아요. 가시는 곳까지 태워다 드릴 테니 마차를 몰아 주세요.} 그러자, 조노이는 담사에게 말했다. {소형제, 그냥 무작정 걷는 것보다 마차도 가는 것이 어떤가?} 담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가 거절할 줄 알았던 조노이는 입이 벌어졌다. {헤헤헤.... 자 뇌소저는 마차로 들어가게.} 그가 마부석에 턱하니 앉자 담사는 말없이 조노이 옆에 앉았다. 뇌옥연은 담사가 마차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했지만 그가 마부석 에 앉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는 제남성을 벗어나 서쪽 관도를 향해 서서히 달려갔다. 6 쏴_____ 아_____ 눈바람이 관도를 스쳤다. 요염한 달빛이 은색의 대지를 희미하게 밝혔다. [....!] 마부석에 묵묵히 앉아 있던 담사의 눈빛이 일순 섬뜩하게 빛났 다가 찰라에 사라졌다. 담사의 고삐질에 마차가 서서히 멈추어섰다. 뇌옥연은 마차가 멈추자 의아로운 눈으로 휘장을 젖혔다. {무슨 일이예요?} 조노이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차 앞에 시체가 놓여 있구만.} 뇌옥연은 즉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시체는 완전히 얼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시체를 보는 순간, 뇌옥연은 안색이 급변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앗! 이건 혈사의 시체가 아닌가요?} 과연 그 시체는 벽혈쌍사중 혈사의 시체였다. 별다른 상처는 보 이지 않고 미심에 조그만 핏자국이 맺혀 있는데 그것이 그의 생명 을 앗아간 치명상인 것 같았다. 조노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뇌옥연에게 물었다. {뇌소저는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알겠는가?} 뇌옥연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소형제는 어떤가?} 담사는 유심히 시체이 미간을 응시하며 나직막이 중얼거렸다. {미간에 난 상처는 검기에 당한 것 같군. 솜씨로 보아 검도의 고 수같은데...} 뇌옥연과 조노이는 그의 모습은 찬 눈으로 담사를 주시했다. 얼음같이 차디찬 그의 모습은 딱딱하게 보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지혜와 치밀함, 그리고 재빠른 반응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노 련한 강호의 고수도 따르기 어려운 것이다. 담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흉수는 우리가 탄 마차가 이곳을 지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이곳에 놓아 위협하는 것이군,} 조노이는 자세히 시신을 살폈다. 뇌옥연이 돌연 말했다. {검기로 미간을 찌를 수 있는 검도(劍道)의 고수는 당금무림에 세 사람 뿐이예요.} 담사가 싸늘한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세 사람이 아니라 다섯은 되지만 미간을 노리는 자는 단 한 명, 일점홍(一點紅)뿐이지.} 잠시 말을 멈춘 담사는 숲 속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숲 속에서 음랭한 괴소가 터져나왔다. {흐흐흐.....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이 있다니 내 자네만은 살려 주 겠네.} 눈이 덮인 길 왼쪽 숲 속에서 한 명의 장한이 천천히 걸어나왔 다. 원숭이처럼 긴 팔에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누르스름한 얼굴에 매부리코를 지닌 사순의 중년인이 걸어나왔다. 그러나 담사는 일점홍이란 그자는 거들며 보지도 않고 냉랭한 눈길로 숲 속을 응시했다. 그러자, {크흣흣흣..... 그 놈 제법 청력이 대단하군.} 스스스! 문득 쇠를 깎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뒤이어 거대한 노송 뒤에서 한 노인이 소리없이 낙엽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뼈에다 가죽만 씌운 듯한 깡마르고 작달만한 노인은 두터운 모 피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먼저 나타났던 일점홍이란 자는 이 노인을 보자 안색이 싹 변했 다. 그것은 그가 진작부터 숨어 있었지만 나무 위에 이 노인이 숨 어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뇌옥연은 이 두 사람을 보다 깜짝 놀라며 외쳤다. {일점홍(一點紅)과 신행귀사(神行鬼死)!} 일점홍은 관외에서 우는 아이도 웃음을 그친다는 악명 높은 인 물이었다. 그리고 신행귀사 우관(友關)은 십 년 전에 자취를 감춘 거마로 경공술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자는 흑도의 인물로 십 년 전만 해 도 황야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킬킬 애송이가 노부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아본 것을 기특하게 여겨.....헉!] 담사를 보며 키득이던 신행귀사 우관은 문득 그의 옆에 선 조노 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 다. 기고만장하던 그자의 표정은 삽시에 밤중에 귀신이라도 본 듯이 공포에 질려버렸다. 이때, 신행귀사 우관의 귀에 가느다란 전음성이 파고들었다. {이놈아, 끽소리도 말고 한쪽에 조용히 있거라. 만약 한 마디라 도 말을 하면 네놈의 주둥아리를 찢어 놓을 테니!} 우관은 무슨 말을 할 듯 입을 벌리다가 엉거주춤 그 자리에 굳 어진 듯 멍청이 섰다. 일점홍은 우관의 기이한 행동에 의아로운 눈으로 말했다. {우선배, 오랜 만이외다.} 우관은 그를 쳐다보고 쓴디쓴 고소를 인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우선배도 그 물건 때문에 오신 것 같은데....?} 말 끝을 흐리는 일점홍의 눈빛은 번쩍 빛이 났다. 우관이 천만 뜻밖에도 그의 말에 무섭게 고개를 흔들었기 대문이다. 일점홍의 표정은 일순 기이해졌다. {서로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모른 척 할 것까지는 없지 않소이 까?} 우관은 힐끗 조노이를 훔쳐보며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표 정은 불신과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일점홍은 우관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힐끗 조노이를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것을 느낄 수는 없었 다. 7 {당신이 일점홍라는 사람인가요?} 뇌옥연이 싸늘히 물었다. 일점홍은 그녀의 물음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그렇소. 소저가 북천일미 뇌옥연 소저요?] [그래요. 내가 뇌옥연이예요. 나에게 무슨 할말이라도 있나요?} 그녀가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일점홍은 담담히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뇌소저, 이화선자(梨花仙子)에게서 받은 물건을 돌려 준다면 감 사하겠소이다.} 뇌옥연은 의아로운 눈으로 말했다. {이화선자라니요, 그녀가 누구죠?} 일점홍은 갑자기 눈에서 무서운 안광을 발산했다. {뇌소저, 괜히 딴소리 마시오. 죽어가던 여자에게서 받은 것이 있지 않소?} 이 말에 뇌옥연은 잠시 생각하는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석고산 기슭에서 만났던 여자 말인가요?} {그렇소. 그녀가 이화궁(梨花宮)의 이화선자요.} 뇌옥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놀라운 듯이 말했다. {이화궁이라면 요녀들의 집단 아니예요.} -이화궁(梨花宮)! 여인들만으로 이루어진 문파(門派)로써 제자들이 하나같이 사악 하며 음탕하다고 소문이난 음악한 집단의 단체이다. 제자들은 주로 기녀출신과 고아들을 끌어모아 이들을 수련시킨 후 강호각처에 내보낸 다음 비밀탐지와 정보수집 등 일종의 첩자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점홍은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어서 그 계집에게서 받은 것을 내놓으시오!} 그러자 뇌옥연은 싸늘히 말했다. {그 물건은 어떤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물건인가요?} 일점홍은 그녀의 빠른 걸음에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것은... 그것에 대한 것은 말할 수가 없소. 만약 그것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나는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소.} 뇌옥연은 일순 냉랭한 표정이 되었다. {일점홍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요. 어디 당신의 검법을 구경 해 볼까요?}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외쳤다. {관외의 검법이 얼마나 무서운가는 모르지만 나의 검도 만만치 는 않을 것이예요.} 일점홍은 그녀의 태도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흐흐.... 뇌소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요.} 하고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우수로 검자루를 잡았다. 순 간, 그의 몸에서 강렬한 예기가 뻗어나왔다. 창! 뇌옥연은 어느 새 검을 뽑아 벼락같이 일점홍의 가슴을 찔러갔 다. 그러자 일점홍은 중궁보법을 밟으며 옆으로 피한다고 느끼자 갑 자기 한 줄기 싸늘한 검광이 번쩍하고 빛이 났다 순식간에 사라졌 다. 쾅! 금속금과 동시에 뇌옥연은 퉁기듯이 뒤로 물러서며 연자초수의 수법으로 다시 맹렬히 공격해 갔다. 일점홍은 일초가 실패하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헌데, 뇌옥연이 성난 암코양이처럼 다시 빠르게 공격해 오자, (나찰옥녀라는 이름이 허언이 아니었군.) 내심 놀라움을 느끼며 수중의 검을 아래서 위로 그녀의 손목을 베어갔다. 순간 뇌옥연은 찔러가던 검세를 변화시켜 교묘히 비틀었다. 그러자 두 자루의 검이 다시 부딪치며 불꽃을 퉁겼다. 뇌옥연은 검이 부딪치자 그 반응을 이용하여 다시 허공에서 재 주를 넘으며 순식간에 삼검을 쳐냈다. 일점홍은 그녀의 변초가 이렇게 재빨리 변화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황망히 철판교의 신법으로 몸을 누이며 검을 쳐올렸다. 카캉______ 캉! 다시 금속음이 터지고 일점홍은 땅 위를 구르듯이 미끄러지면서 삼 장이나 뒤로 날아간 다음, 겨운 두 발을 땅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자신의 우수를 쳐다본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솟 구쳤다. 팔뚝부터 손목까지 옷깃이 길게 배어져 살갗이 드러났다. 게다가 피부가 약간 베어져 피가 스며 나오지 않은가? 일점홍은 무서운 눈빛으로 뇌옥연을 응시하면서 검을 고쳐 잡았 다. {팟!} 갑자기 벼력 같은 기합성을 토하며 검과 몸이 일체가 된 듯 벼 락같이 뇌옥연을 향해 쏘아왔다. 뇌옥연은 검도 채 닿기도 전에 검 끝에서 폭사된 한망(寒芒)이 자신의 몸을 쑤시는 것 같은 느낌에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했다. 허나 일점홍의 검은 눈이라도 달린 듯 방향을 꺾으며 그녀의 미 간을 향해 찔러왔다. 뇌옥연은 직감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일점홍의 검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름을 지니고 있었다.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라 자유스럽지 못하니 그녀로서는 도저히 피 할 길이 없었다. 일순, 뇌옥연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와 동시 그녀의 우수로 검을 막았다. 생명을 잃기보다는 한쪽 팔을 희생하기로 결심한 것 이다. 일점홍의 검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뇌옥연은 그만 눈을 꼬옥 감고 말았다. 그녀는 비록 담대하고 사 내처럼 거칠은 면이 있기는 했으나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第 32 章 나를 건드리지 마라! 1 헌데 바로 그때였다. 뇌옥연은 갑자기 부드러운 경력이 그녀의 몸을 밀친다고 느끼는 순간, 팔을 자를 듯이 날아오던 검미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 그녀의 눈에 일점홍이 고통스런 얼굴로 물러서는 것 이 보였다. 그리고, 눈앞에 태산같이 듬직한 사내의 등이 눈앞을 가렸다. 한 순간, 그녀는 사내의 등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담사, 그는 뇌옥연이 위험에 처하자 갑자기 번갯불처럼 싸움에 뛰어들 어 그녀를 밀어냄과 동시에 그의 검이 일점홍의 팔까지 베어 버린 것이다. 일점홍은 급히 혈도를 점혈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게 한 다 음, 원한에 찬 눈길로 말했다. {나의 복수가 두렵지 않다면 이름을 밝히시오.} 담사는 일순 흠칫한 표정으로 일점홍을 노려보았다. 무기력한 힘없는 시선, 한 올의 생기도 실리지 않은 동공은 도대 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점홍은 문득 팔뚝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보다 더욱 기이한 공 포에 사로잡혔다. {저 놈의 눈빛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악마의 눈이다.... 야수 같 은 놈....} 내심 심장이 오므라드는 공포에 일점홍은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 다. 돌연 담사의 입이 열렸다. {담옥(曇玉)!} 마치 아무런 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허무하게 들렸다. 일점홍은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면서 걸어갔다. 점점이 뿌려지는 핏방울, 일점홍라는 이름은 이것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뇌옥연은 일점홍이 어둠 속에 묻히자 그때서야 번쩍 정신디 들 었다. 신행귀사 우관은 어느새 사라졌는지 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조노이만 그녀를 보고 헤벌쭉 웃었다. {헤헤, 이것 날씨도 추운데 빨리가야 따뜻한 방에서 쉬지.} 그는 급히 마부석에 올라갔다. {자, 빨리 타라고..... 제길 이놈의 날씨는 왜 이렇게도 춥나.} 조노이는 담사가 말없이 옆에 앉자 급히 길을 재촉했다. 멀리서 은은한 불빛이 보였다. 거의 두 시진 동안 혹독한 북풍을 맞으며 달려온 조노이는 급히 말을 몰았다. 관도 옆에 먼길을 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듯 허름한 주막이 있었다. 주막은 초라했다. 네 개의 탁자와 주인인 듯한 노인이 계단에 앉아 졸고 있었다. 담사의 일행이 들어서자 계산대에 졸고 있던 노인이 눈을 부비 면 급히 일어났다. {헤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먼길을 가다니, 자 어서 이리로 앉으십시오.} 노인은 혀를 차며 중간에 회로가 놓인 옆자리에 그들을 안내했 다. 조노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외쳤다. {주인장, 여기 죽엽청 세 명과 그 무엇이더라..... 아 그렇지. 오향 육(烏香肉), 그래 오향육하고 적당히 다른 것도 섞어서 빨리 가져 오시오.} 노인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황망히 말했다. {헤헤... 손님, 저의 집에는 그런 비싼 고급음식은 없읍니다. 다만 면과 닭 뿐입니다.} 조노이가 무어라고 소리치려고 하자 뇌옥연이 말했다. {노선배님, 이런 벽지에서 무얼 구하겠어요.} 그녀는 주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술부터 먼저 가져오고 음식은 아무거나 갖다 주세요.} 주인은 재빨리 허리를 숙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뇌옥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막 안에는 그들 외 두 사람이 손님이 더 있었는데, 그녀가 그 들을 쳐다보자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은 장사꾼 차림으로 탁자 위에 봇짐이 놓여 있는데 그녀 가 볼 때에는 아무래도 상인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담사의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지라 별다 른 생각없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술이 나오자 조노이는 단숨에 술병을 입에 대고 들이 마셨다. {추위가 싹 가시는구나!} 조노이는 감탄성을 토했다. 담사는 힐끗 주위를 쳐다본 후 그도 술을 한 잔 따라 코에 갖다 댔다. 오래 묵은 술인 듯 주향은 매우 향기로웠다. {정말 좋은 술이군.}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면서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예, 손님. 부르셨읍니까?} 크게 외치며 나온 주인은 담사를 향해 말했다. {이 술은 적어도 오 년은 지난 것 같은데 어디서 구한 것이오?} 주인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헤헤... 소님께서 술에 일가견이 계시군요. 이 술은 제자 특별한 비법으로 빚어 오래전부터 저장해 둔 것으로 옥호춘에 못지 않은 것이지요.} {이렇게 좋은 술을 우리만 들기에 아까우니 주인장도 한 잔 하 시오.} 담사가 잔을 내밀자 노인은 정중히 사양을 했다. {아닙니다. 어찌 제가 손님의 술을....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손님 들께서나 많이 드십시오.} 그는 급히 몸을 돌렸다. {잠깐, 나는 이 술을 꼭 주인장에게 주어야 하겠소.} 담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에는 무언가 뜻이 담겨 있었다. {헤헤... 손님 저는 괜찮으니.....} 주인은 비굴한 표정으로 사양을 했지만 담사는 그의 말을 가로 채듯이 말했다. {나의 말이 끝날 때까지 술을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후회하게 될 것이오.} 이 말에 주인의 표정은 창백해졌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내면에는 위협이 담겨 있지 않은가? 뇌옥연과 조노이는 담사의 행동에 흠칫 놀랐다. {담공자, 주인장이 술을 들지 않겠다는데 꼭 마시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녀가 주인장을 위해 말을 하자 담사는 그 말에 대꾸도 않고 술잔을 주인의 얼굴 가까이에 들었다. {주인장, 나는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오.} 돌연 주인을 음흉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네 놈의 눈치가 제법 빠르구나. 그러나 이곳에 들어온 이상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2 그토록 담이 작고 연약헤 보이던 주인이 순식간에 사람이 달라 졌다. 주인의 초라한 얼굴에 붉은 혈색이 감돌고 눈에서는 강한 신 광까지 발산했다. 이때, 장사꾼차림의 두 손님도 재빨리 일어나 주인과 어깨를 나 란히 했다. {호호..... 조용히 술만 먹고 죽었으면 시신은 보존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늦었다!} 주인은 괴소를 흘리며 품 속에서 하나의 연검을 꺼내들었다. 연 검이 녹광을 띠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독을 입힌 것 같았다. 그와 동시 두 명의 장사꾼도 주막 주인의 연검과 똑같은 연검을 꺼내들었다. 조노이와 뇌옥연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하나 담사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백독삼사(百毒三蛇)의 수법은 잔인하기로 이름이 나 있지. 허나 당신들은 상대를 잘못 택한 것 같지 않은가?} 스악! 가...하는 소리와 동시에 담사의 신형은 앉은 자세 그대로 벼락같 이 허공에 튀어오르며 좌수를 뻗었다. 백독삼사는 갑작스런 그의 공세에 다급히 몸을 피했지만, 담사의 공세는 전광석화였다. {으악!} {으____ 아악!} 두 마디의 짤막한 비명이 터지고 주막 노인의 목은 어느새 담사 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뇌옥연은 바닥을 쳐다보는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 아 손으로 급히 입을 막았다. 두 명의 장사꾼차림의 사나이는 머리가 부서져 뇌수와 선혈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주막의 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들의 형제가 일류고수는 아닐지라도 이토록 허망하게 당하다 니.... 그의 뇌리는 경악과 공포에 하얗게 탈색되었다. 거기다가 목을 조이는 듯한 고통에 전신의 힘이 쭉 빠지고 눈앞이 개구리처럼 툭 튀어 나왔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공포에 몸이 굳어진 듯 아무런 저항도 할 수 가 없었다. {해독제(解毒劑)는 어디 있느냐?} 담사는 냉랭히 물었다. 주막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목이 졸려 말을 못하니 그는 다급 히 고개만 흔들 뿐이다. {죽고 싶다면 간단한 일이지.} 담사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그와 동시 좌우 를 칼날같이 세워 주막주인의 어깨를 내리쳤다. 퍽! 둔탁음 소리와 함께 팔 하나가 마치 면도칼에 잘린 듯이 성둥 베어져 나갔다. 주막 주인의 얼굴은 고통에 얼굴이 썩응 돼지간처 럼 누렇게 변하고 이를 딱딱 마주쳤다. {아직도 모르겠지.} 담사는 차분히 말하면서 다시 좌수를 치켜들었다. 순간 주막주인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남은 한쪽 팔로 급히 속에서 하나의 붉은 색 옥병을 꺼내들었다. 담사는 무표정히 옥병을 받아들고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받으시오, 조노인.} 조노이는 망연한 표정으로 옥병을 받았다. 담사는 말없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일순 주막노인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지고 콧구멍이 크게 벌어졌다. {형제가 한꺼번에 저승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는 혼자처럼 중얼거리며 손을 풀었다. 순간 주막노인은 힘없이 풀썩 바닥에 고꾸러졌다. 뇌옥연은 아미를 찌푸리며 냉랭히 소리쳤다. {너무 잔인하군요. 죽일 필요까지 없을 텐데.....} 담사는 가만히 뇌옥연의 얼굴을 응시했다. {내가 독에 중독되었다면 아마 이 자들보다 더 비참하게 당했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일부러 알면서도 조선배님 이 술을 마시도록 한 것은 당신이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이유를 만 들기 위해서 아닌가요?} 뇌옥연이 따지듯이 말을 하자 담사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 담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였소.} 그는 자신에게 말하는 듯 중얼거리면 주방인 듯 휘장쳐져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노이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나이에도 술 속에 독이 들어 있었는지 모르고 주책을 부리 다니.... 젠장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투덜거리는 조노이는 일순 뇌옥연을 기이한 시선으로 쳐다보았 다. {그런데, 뇌소저의 말투로 보아 담공자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 었다는 말인데 그럼 왜 진작 소저가 나를 말리지 않았소.} 뇌옥연은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저는 백독삼사가 우리에게 암수를 쓴 것은 그만두고 담공자가 이 일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어요. 다 만..... 담공자의 행동에서 문득 그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헌데, 담공자가 어떻게 저들이 술 속에 독을 탓다는 것을 알았 을까요?} 조노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겠소. 다만 누구든지 그를 건드린다면 십중팔 구 죽는다는 사실 뿐이오.} 말을 하던 그는 힐끗 주방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 한 번도 소형제가 남을 위해 나서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쩐 일인지 뇌소저와 일점홍이 싸움을 할 때 그는 소저를 도왔단 말이오.} 조노이는 기이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뇌소저가 여인이고 아름다우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할 수 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말 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조노이, 뇌옥연은 일순 얼 굴이 붉어졌다. {조선배님께서 저를 놀리시는 것 같군요.} 조노이는 히죽 웃었다. {헤헤, 놀리다니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뇌소저 같은 미인을 노부 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것이지. 아암.}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너스레를 떨었다. 이때 담사가 말없이 주방에서 걸어나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뒤이어 오순 가량의 노인이 급히 음식과 술을 들고 나왔 다. 노인은 시체들을 보고 공포에 눈을 크게 떴으나 급히 음식을 탁 자 위에 놓고 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저 사람은 누군가?} 조노이가 의아로운 눈으로 묻자 담사는 담담히 말했다. {이 주막의 주인이오.} 3 뇌옥연은 담사의 표정을 살피며 재빨리 물었다. {담공자는 어떻게 해서 저들이 백독삼사고 술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알았죠?} 그녀의 말은 조금 전보다는 부드러웠지만 아직도 냉랭했다. 원래 무림 명문의 집안에 태어난 그녀로서는 담사의 손속이 너무 잔인 하다고 생각했다. 담사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는 일 년 전 이곳을 지나친 적이 있었소. 당시 주인은 음식을 가져온 노인이었고, 내가 알기로는 주인이 일 년 사이에 바뀔 리는 없다고 생각했소.} 돌연 담사는 술잔에 술을 따르고 가만히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백독삼사는 비록 그럴 듯이 변장을 했지만, 나는 전날 한 번 그들을 본 적이 있으니 나를 속일 수는 없었던 것이오.} 이어 술을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그것만으로 어떻게 그들이 술 속에 독을 풀었을 것이라고 생각 했어요?} 뇌옥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자, 담사는 술잔을 내려놓으 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오. 백독삼사의 주특기는 독이오. 게다가 백 독삼사의 신분으로 이런 장사를 할 리는 없고, 이 추운 날씨에 그 들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들 뿐이었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힐끗 시체를 일별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노리고 있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조노이가 화난 듯이 외쳤다. {아니 이놈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노리고 있지? 우리는 아무 런 죄도 짓지를 않았는데.} 담사는 느릿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조노인, 우리가 아니고 뇌소저요. 다만 우리는 재수가 없었을 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담사의 말에 뇌옥연은 흠칫했다. {무슨 소리예요. 나는 일견수나 백독삼사들은 아직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자들이예요.} 그녀가 교갈을 지르자, 담사는 그녀의 말에 흥미가 없다는 듯 그 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보물(寶物)에게 죄가 있는 것 이지.} 그의 말은 나직했으나 조노이와 뇌옥연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조노이의 시선이 뇌옥연을 향하고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 었다. {나에게 무슨 보물이 있다고...} 일순 뇌옥연은 말 끝을 흐리며 품 속에서 조그만 죽통을 꺼내들 었다. {혹시... 이것... 때문에...} 그녀는 죽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죽통은 어른 손바닥 길이 정도 되는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 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뇌옥연은 조노이와 담사의 얼굴을 일별한 후 죽통의 뚜껑을 떼 어냈다. {...!} 죽통 안에는 하나의 오래된 서화(書畵)가 들어 있었다. {한당추흥도(閒堂秋興圖)!} 그 서화를 본 순간 조노이가 신음하듯 경악성을 터뜨렸다. -한당추흥도(閒堂秋興圖)! 이것은 백 년 전 일대 화성(畵聖)이요, 천하제일도(天下第一盜) 이기도 한 도화선(盜畵仙) 유한(柳寒)의 그림이었다. 이 한당추흥도 안에는 도화선 유한이 평생 도적질한 수많은 금 은보화와 영단묘약이 숨겨져 있는 것을 표시한 지도가 그려져 있 다고 알려져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칠십 년 전, 한당추흥도가 강호에 나타난 적이 있었지만 그 당시 이것을 가 지고 있던 금화부인(金花婦人)이 의문의 피살을 당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뇌옥연은 다급히 물었다. {이것이 도화선의 유물인 한당추흥도란 말이예요?} 조노이는 가늘게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어, 석년 노부가 들은 말에 의하면 이것은 틀림없는 진품 이야.} 그는 단언하듯 말하며 그림을 세세히 살폈다. 담사의 표정에도 보기 드물게 경악의 빛이 스쳤다. (이것이 한당추흥도라니... 이것만 있다면...) 내심 그는 입 안이 말랐다. 도화선 유한이 평생 도적질한 보물은 일개성을 사고도 남음이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영단묘약도 있다지 않은가? 담사의 눈에도 일순간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이때 뇌옥연이 재빨리 그림을 거두어 들었다. {이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이 물건의 주인으로부터 부탁을 받 았으니 금화장에 갖다 줄 거예요.} 이어 그녀는 담사와 조노이를 경계의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조노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힐끗 담사를 주시했다. 담사는 이때 뇌옥연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갈 등과 탐욕에 뒤엉켜 이글거렸다. 뇌옥연은 순간 입술을 꼬옥 깨물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 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담사도 따라서 느릿하게 일어섰다. 한 순간 실내는 질식할 듯한 침묵이 흘렀다. 담사의 걸음이 한 발 두 발 뇌옥연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녀는 담사의 기세에 두려운 듯 교갈을 지르며 재빨리 검을 뽑 았다. 담사는 걸음을 멈추고 음침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_______ 두!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순간 조노이가 자연스럽게 뇌옥연의 앞으로 가로막듯이 서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헤헤... 소형제, 사내가 여인에게 그렇듯이 인상을 쓰며 나처럼 홀아비 신세밖에 안될 것이네.} 우스게 소리를 하면서 뇌옥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뇌소저, 이해하게. 소형제는 원해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돼서 여자에게는 조금 거칠게 보이지.} 이때 문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자 이내 몇 사람들이 들어왔다. 앞장선 노인은 동안의 살결에 부리부리한 눈, 몹시 화려한 금색 장포를 입었다. 그 옆에는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승이 그 뒤를 수명의 무사들이 들어왔다. 뇌옥연은 이들을 보자 반갑게 외쳤다. {아버님!} 말과 동시에 그녀는 금의(金衣)노인 품에 한 마리 새처럼 훌쩍 날아 안겨 들었다. 그녀의 부친이라면 바로 북천뇌보의 주인인 뇌천도제 뇌승밖에 없질 않은가? {이놈, 다 큰 놈이 어리광은... 어서 해오대사님께 인사드려라!} 뇌천도제 뇌승은 껄걸 웃으며 늦게 얻는 딸의 머리를 자애롭게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말에 움찔한 그녀는 급히 몸을 바로 하고 노승에게 인 사를 했다. {아미타불...} 노승은 가만히 합장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막 안을 둘러보며 백독삼사의 처참한 시신에 황망히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뇌승도 힐끗 조노이와 담사를 주시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4 석고산 계곡의 공동묘지, 살을 에일 듯한 한풍(寒風)이 귀견수(鬼見手) 조중의 몸을 얼어 붙일 듯 불어왔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떨리는 눈길로 무덤 앞에 놓 인 조화와 타다 남은 향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결국 나타났구나 담사! 무림맹은 비록 멸망을 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나 조중의 생명이 살아 있는한 지옥 이라도 네놈을 쫓아갈 것이다.} 절규하듯 중얼거리는 조중의 행색은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동안 그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오직 한 가지의 일에만 혼신 의 힘을 다했다. 지옥혈룡(地獄血風) 담사-! 무림맹의 멸망을 초래한 장본인이요, 결과적으로 자신을 폐인으 로 만든 자, 그의 종적을 찾는데 몰두해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일년만에 그는 세상에 다시 나온 담사의 종 적을 발견한 것이다. 조중은 지난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비분이 치솟아 오르는지 이 를 악물었다. {그래, 네놈도 인간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언젠가 손 씨모녀의 무덤 앞에 나타나리라고 생각을 했지. 비록 며칠간 다른 일로 이곳을 비워 네놈을 놓쳤지만 네가 중원에 다시 나타난 이상 결코 나의 추적을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나직이 독백을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뇌옥연은 담사와 조노이를 힐끗 살피면서 말했다. {이야기를 하려면 길어지니 우선 자리에 앉도록 하세요.} 돌연 이때 담사는 벌떡 거들떠 보지도 않고 침착히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있던 무사들은 일순 움찔했다. 그것은 그를 막아야 할지 아니면 나가도록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조노이도 이때 벌떡 일어나지 급히 담사의 뒤를 따랐다. 뇌옥연은 담사가 갑자기 나가려고 하자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였으나 그의 굳어진 표정에 재빨리 외쳤다. {길을 비켜줘요!} 무사들은 부천뇌보의 제자들로 뇌승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뇌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사들은 이내 양쪽으 로 물러서고 담사와 조노이는 어둠 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뇌옥연은 문득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가슴이 텅 빈 듯 허전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 잠시 후, 무사들이 재빨리 시체를 치우고 중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뇌승은 뇌옥연의 얼굴을 살피면서 담담히 물었다.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이냐?} 그의 목소리는 다분히 질책이 담겨 있었다. 뇌옥연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오히려 물었다. {그보다도 아버님께서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어요?} 뇌승은 일순 혜오대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아비는 한 가지 물건 때문에 이곳까지 왔다만 너는 그 동안 집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강호를 떠돌아 다니다니.... 그리고 철송의 죽음은 또 어떻게 된 일이냐?} 뇌옥연은 두 눈을 빛내며 차분히 말했다. {아버님이 찾고 있는 물건은 혹시 한당추흥도가 아니예요?} 이 말에 뇌승과 혜오대사는 움찔 놀랐다. {너도 그것을 알고 있었구나.} 뇌승이 말했다. {이 아비는 그것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만, 그런데 너 는...?} 말을 하던 그는 뇌옥연의 수중에 들린 것을 보고 경악에 찬 눈 으로 외쳤다. {그것은... 한당추흥도!} 뇌옥연은 한당추흥도를 펼치면서 말했다. 담사를 만났던 일과 지금까지 겪어온 일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이윽고, 뇌옥연의 긴 이야기가 끝이 나자 실내는 조용해졌다. {아미타불...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조금 전 그 조노이라고 불리 우는 노시주는 아무래도...} 혜오대사는 말을 멈추고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뇌옥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오대사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노이라는 노인을 알고 계신가요?} 그녀가 참지 못하고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다급히 물었다. {아미타불.... 장담할 수는 없겠으나 노승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그 노시주는 사십 년 전 자취를 감추었던 비천신괴(飛天神怪) 조 일(趙日) 노시주일 거외다.} 뇌승과 뇌옥연은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비천신괴(飛天神怪) 조일(趙日)! 청해존자(靑海尊者) 오합률과같은 배분의 전대기인으로 사십 년 전만 하더라도 그의 명성은 사해를 진동시켰다. 성격이 괴퍅하고 정보다는 사에 치우친 듯한 사람이었으나 손속 이 잔입했을 뿐 결코 사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그의 독문경공인 비천부영(飛天浮影) 신법은 석년 도화선 의 무형표(無形飄)에 못지않는 절세적인 경공신법이었다. {대사! 혹시 그 담옥이라는 청년이 마교의 흑마수(黑魔手)라는 자가 아닐까요?} 뇌천도제 뇌승이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비 천신괴 조일마저 쩔쩔매는 무공을 지닌 청년이라면 마교의 소교주 인 흑마수 모용천위에에는 떠오르지 않은 때문이다. 하지만 혜오대사는 나직이 불호성을 외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잘은 모르겠으나 조금 전 백독삼사의 시체로 보아 천마산수에 의한 것은 아니었소이다. 다만 백독삼사가 당한 상처로 그 청년도 흑마수에 못지 않은 고수인 것 같소이다.} 뇌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의 정세는 갈수록 흉험하기만 한데.... 요즈음 갈수록 괴이 한 인물들이 나타나니 이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그는 가득 염려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허나 다행히도 한당추흥도 찾았으니 우선 금화장으로 가도록 하지요.} 혜오대사는 동의하듯 끄덕였다. 바깥에는 혹독한 눈바람이 몰아치고 있지만 동굴 안은 타오르는 모닥불로 훈훈했다. 담사는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못된 축생같으니라구. 그래! 이놈아! 산을 내려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또다시 살인을 한단 말이냐? 갑자기 법공선사의 호통이 그의 귓전을 파고드는 느낌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이 나를 먼저 건드렸을 뿐이오. 나도 참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소.} 담사는 무엇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아이고, 소형제! 여기에 있었군.} 조노이가 어느 새 동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한동안 헤 매인 듯 얼굴은 추위에 새파랗게 얼어붙어 있었다. 담사는 그를 보자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조노인, 이제 연극은 그만두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서 피어오르는 차디찬 안광은 마치 독사가 먹이를 노리는 듯한 음사한 눈초리였다. 조노이는 담사의 흉험한 기세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히죽 웃었 다. {헤헤... 소형제, 갑자기 무슨 소린가?} 이때 불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품 속에서 술병과 유지로 싼 보 따리를 꺼냈다. {노부에 관하여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의심을 풀 게. 나는 절대 소형제와는 적이 될 수 없는 사이 아닌가?} 그는 묘한 뜻이 담긴 말을 하면서 유지를 풀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이 나왔다. {빌어먹을! 주막에서 무언가 뱃 속을 채우려고 했지만 그 놈의 중대가리와 냄새나는 놈들 때문에 제대로 배를 채우지 못했으니 자, 좀 들게!} 조노이는 투덜대고는 닭다리를 쭉 찢어 담사 면전에 내밀었다. 담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음산한 눈길로 조노이를 노려보았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조노이의 눈빛은 일점의 가 식도 없고 따스한 기운만 서려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래! 이 노인이 누구든 좋다. 나는 지금 외롭지 않는가?) 담사는 무표정히 닭발을 잡았다. 순간, 조노이는 입이 활짝 벌어졌다. {헤헤... 역시 소혈제는 이 늙은이의 마음을 알아 주는군.} 그는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술을 마 셨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그에 따라 담사의 표정도 음울해졌다. 第 三十三 章 불같은 女人, 뜨거운 밤 1 금화장(金花莊)의 객사, 담사와 조노이와 안내된 곳은 깨끗한 방과 정원이 딸린 조용한 별채였다. 담사는 침상에 걸터 앉아 조노이를 쳐다보았다. {조노인, 이곳에 억지로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요?} 문득 조노이의 표정이 전날과 달리 엄숙해졌다. {소형제,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한당추흥도는 석년 마교(魔敎)의 적용군(狄容君)이라는 자가 금화부인(金花婦人)을 죽이고 탈취해 갔었네.} 담사는 달라진 조노이의 말과 행동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무심 했다. 조노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그 당시에 노부도 한당추흥도를 보았던 적이 있지. 헌데 마교에서 가져갔던 그것이 지금에야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무언가 마교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조노이는 말을 멈추고 담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말은 없지만 내가 무엇 때문에 그 동안 자네의 뒤 를 따르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형제나 나는 마교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네.} 담사의 표정은 더욱 무심해졌다. 생기없는 무기력한 동공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조노이는 담사의 태도를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마교는 일 년 전 무림맹을 초토화 시킨 후 아직 한 번도 그들 의 행적을 노출시킨 적은 없었네. 그런데 이런 마당에 한당추흥도 가 나타났다는 것은 강호의 혼란을 일으키고 도화선의 은거지였던 태행산으로 무림인들을 유언하여 한꺼번에 몰살시키려는 계획인 것 같네.} 담사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그 일과 금화장에 우리가 들어온 것은 무슨 상관이요?} 조노이는 담담히 말했다. {금반산은 마교에 지대한 원한을 품고 있네. 금화부인은 그의 할 머니였으까. 게다가 그의 부친마저 오십 년 전 모친의 원한을 풀기 위해 마교를 추적하다 시체로 발견 되었지.} 조노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둠에 싸인 창 밖을 쳐다보았다. [금반산이 한당추흥도를 찾기 위해 동문서주한 것은 마교의 음 모를 폭로하기 위한 것... 이 일을 마교에서 알고 있다면 내일 벌어 질 연회는 항우가 유방을 죽이려다 놓친 홍문연(鴻門宴)같이 되고 말 것이네.] [...!] [금화장이 비록 암중으로 힘을 기르고 수많은 고수들이 몰려오 겠지만 그들로서는 마교의 적수가 될 수 없네.] 조노이는 문득 몸을 돌려 담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당금 무림에서 천마산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세 사람 뿐이 네. 철불과 소형제 그리고 또 한 분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자네가 잘 알고 있을 걸세.} {흐흐흐.... 나보고 위선자들을 위해 싸우란 말이군.} 담사는 괴소를 흘리며 나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노이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물론 위선자들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진정으로 무림의 장래를 걱 정하고 정의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휠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하 네.} 조노이는 자기 할말을 다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문 밖으로 옮겼 다. {내일보세, 소형제.} 조노이가 나가자 담사는 침상에 벌렁 누웠다. 사위가 조용해지고 고독이 몰려오자 잔잔하던 담사의 가슴에 지난날의 회상과 우너한 이 서서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손부인과 아유는 천마산수의 막강한 잠력에 오장육부가 파괴되 어 죽었다고 했다!) 담사의 눈이 살기로 이글거렸다. 그는 법공대사에게서 손씨모녀 의 사인을 들어알고 있었다. (그들 모녀를 죽인 놈은 전날 제남에서 본 그 자가 틀림없다. 흑 마수(黑魔手)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놈!) 담사는 자신도 모르게 부득 이를 갈았다. 고독하게 살아온 이십칠년이다. 그 짧지 않은 세월동안 담사 자 신에게 진정으로 애정을 다 베풀었던 사람은 이 세상을 통틀어도 오직 손씨모녀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담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따 르고 의지했다. 세상에 모든 인간은 그의 적이거나 타인이었다. 오직 가엾은 손 씨모녀만이 그의 편이었고 가족이었다. 그런 그녀들을 빼앗아간 것은 담사에게서 세상 전부를 빼앗아간 것과도 같았다. 담사 자신도 세월이 지나면 그녀들에 대한 감정도 흐려질 줄 알 았다. 하지만 정 반대로 세월이 지나면서, 또 자신이 이 세상에 오직 혼자라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그녀들이 그리웠다. 사무치게 그리웠다. 손아유의 그 천진난만한 눈망울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고 손 부인의 그 헌신적인 손길이 너무도 생생하여 그를 상처입은 짐승 처럼 신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세상에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죽은 자신의 아이...! 그런 그녀들을 해친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절대 용서할 수가 없 다. 삶의 목적이나 기쁨 따위가 있을 리 없는 담사의 유일한 갈망이 있다면 사랑하는 그녀들을 자신에게서 빼앗아간 우너흉을 가장 잔 인하고 처절하게 죽여 복수를 하는 것뿐이다. 담사가 이곳 금화장에 온 이유도 결국 원수와 만나기 위해서였 다. (흐흐! 기다려라, 흑마수. 다른 것은 몰라도 네놈만은 결코 살려 두지 않겠다.) 담사는 치밀어오르는 복수심에 이를 악물었다. 흑마수, 즉 모용 천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신경은 오그라들고 온몸은 살기 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법공대사의 말에 의하면 나를 팔아 넘긴 놈들도 틀림없 이 마교의 무리들이지. 흐흐.... 법공대사 당신은 사람을 죽이지 말 라고 했지만.... 이 손에서 피가 마를 날은 내 복수가 다 끝나는 그 날뿐이다!) 담사는 법공대사를 생각할 때마다 답답한 기분이 되었다. 도저히 올려다 볼 수 없는 무예와 바다처럼 넓은 자비심... 담사는 언제나 법공대사를 떠올릴 때면 경외심과 반발 그리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담사의 눈빛이 문득 날카로와졌다. (발걸음소리를 보아 여자인 것 같은데...) 담사는 장검을 베개 밑에 넣고는 눈을 감았다. 2 잠시 후, 나직한 발걸음소리와 동시에 문을 가만히 두드리는 소 리가 들렸다. 그러나 담사는 못 들은 척 그대로 누워 있었다. 바깥의 인영은 한동안 기척이 없자 가만히 문을 밀었다. 순간 잠 기지 않은 문은 스르륵 소리없이 열렸다. 소리없이 들어선 인영은 한동안 문간에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 다. 실내는 한동안 질식할 듯한 침묵이 흘렀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영은 담사의 침묵에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청아한 옥음에 담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등잔 불빛 아래 청의(靑衣)를 입은 뇌옥연이 차디찬 눈길로 그 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뇌소저?} 담사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뇌옥연은 문득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싸늘히 말했다. {당신의 이름이 정말 담옥인가요?} 담사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결국 올 것이 왔군. 하나 지금은 내 정체를 밝힐 때가 아니다.) 그녀의 말뜻을 깨달은 담사는 무표정히 대꾸했다. {담옥이 아니라면 누구이겠소?} 뇌옥연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사! 지옥혈룡이라고도 불리우는 사람이 아닌가요?} 담사는 이 말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다. {낭자의 상상력이 풍부하군. 나는 졸려서 이만 자야겠으니 나가 주시오.} 이어 그는 다시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 뇌옥연의 입술이 새파래졌다. {호호호...} 그녀는 일순 나직막이 교소를 흘렸다. {네놈이 나의 정혼자를 죽였으니 원수를 갚겠다!} 말과 동시에 그녀는 품 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들고 재빨 리 찔러왔다. 하지만 이미 준비가 되어 있던 담사는 침상에서 몸을 한 바퀴 굴리며 바닥에 내려섰다. 뇌옥연은 자신의 초식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친 듯이 다시 공격 해 왔다. 비수에는 서릿발 같은 예기가 감돌고 눈을 부시게 만드는 것이 신물이기임기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수법은 날카로우면서도 매우 오묘했다. 어깨를 찌 른다 싶으면 어느 새 옆구리를 파고들고 그녀의 좌수 또한 기이한 각돋로 뻗어왔다. 담사는 그녀의 현묘한 수법에 당황했다. 설마 뇌옥연의 무예가 이토록 현묘할 줄이야 생각도 못한 일 아닌가? 그가 경각심을 느끼고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어느 새 그녀의 비 수는 그의 어깨를 스쳤다. 찌이익! 어깨의 옷이 찢어지면서 핏물이 스며나왔다. 순간 냉정하던 담사 의 눈에 야수의 그것같은 광기가 벼락같이 일어났다. {흐흐.... 나를 원망마라!} 담사는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냉랭히 소리쳤다. 그와 동시 그의 좌수가 기묘한 원을 그리며 쏘아왔다. 뇌옥연은 갑자기 연화모양의 환영이 눈앞을 가린다 싶자 맥문이 담사의 손아귀에 바싹 조여지면서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놓아요. 이 악마!} 그녀는 팔이 뒤로 제껴지는 동시에 자신의 얼굴이 침상에 파묻 히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뇌옥연은 숨이 막혔다. 담사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 기 때문이다. {흐흐.... 나는 정인군자가 아니야. 네가 나를 먼저 건드렸으니 그 만한 각오는 되어 있겠지.} 담사의 음성은 냉랭했으나 그 속에는 무언가 뜻이 내포되어 있 었다. 뇌옥연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안돼, 이 악마 같은 자...! 내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녀는 소리를 질렀으나 말은 채 나오지도 않았다. 담사가 그녀 의 아혈(啞穴)을 찔러버린 것이다. 뇌옥연을 벙어리로 만든 담사는 그녀의 양 팔을 뒤로 제껴 한손 으로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저고리 사이로 밀어넣었다. 날씬한 몸매와는 달린 뜻밖에 풍만하고 탄력있는 젖가슴이 담사 의 섬세한 손아귀 가득 잡혀졌다. {흐흐.... 정말 좋은 좋은 가슴이군.} 담사는 지금껏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이 없는 뇌옥연의 젖가슴 을 물켸하고도 거칠게 주물러대었다. 뇌옥연은 그의 손길이 자신의 젖가슴을 희롱할 때마다 치욕과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이미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녀로서 는 그저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돌연 등잔불이 갑자기 꺼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달 은 뇌옥연은 사력을 다해 바둥거렸으나 움직일수록 양 손목에 오 히혀 고통만 더 심해졌다. 문득 그녀는 아랫도리가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담사가 치마끈 을 와락 뜯어 치마를 벗겨버린 것이다. 달덩이같이 희고 탐스런 둔부가 어둠속에서 요동치며 모습을 들 어냈다. 이어 뇌옥연은 자신의 비소를 가린 짧은 고의까지 벗겨져내리는 것을 느끼고 두 눈을 부릅떴다. (안돼... 이 악마... 안돼... 아악!) 뇌옥연은 내심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이 악몽같은 상황에서 벗 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허공으로 쳐들린 채 요동치는 자 신의 흐벅진 엉덩이가 사내의 욕정을더욱 달굴 뿐이라는 것을 그 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악!) 이불에 얼굴이 파묻힌 뇌옥연의 두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뗘졌다. 엉덩이 뒤쪽에 닿는 무언가 뜨겁게 맥동하는 살덩이를느낀 때문 이다. 흡사 달군 쇳덩이같이 뜨거운 그 이물질은 뒤쪽으로부터 그 녀의 달덩이같은 엉덩이 가운데로 서서히 밀려들었다. 당연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그녀의 여리고 비좁은 살틈으로 그 무쇠같이 단단한 이물질이 강제로 밀고 들어왔다. 3 생살이 찢어지며 그 틈으로 무언가 둥근 부분이 삽입되었다. 예 리하게 벼린 비수로 생살을 찢는 듯한 화끈한 둔통이 뇌옥연을 반 실신하게 만들었다. 살속 깊이 파고 드는 그 거대한 이물질의 느낌 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푸른 혈맥이 툭툭 불거진 사내의 순양지물은 마치 뱀이 굴을 찾 아들 듯 뇌옥연의 비좁은 동굴 속으로 서서히 그러나 조금도 멈춤 없이 진입해들어갔다. 그에 따라 몇가닥의 선혈이 뇌옥연의 백옥같이 희고 매끄러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마침내 끝이 없을 것만 같던 담사의 진입이 끝났다. 생살이 찢기 는 끔찍한 고통에 뇌옥연의 작살에 맞은 인어처럼 축 늘어졌다.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담사의 뜨겁게 맥동하는 실체 를 너무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전혀 이물질을 받아들여본 적 이 없는 그녀의 민감하고 여린 깊은 동굴은 이제 자신을 처음으로 정복한 사내의 존재를 각인하듯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윽고 담사의 몸은 그런 그녀의 육체를 뒤에서부터 힘차게 압 박하기 시작했다. 뇌옥연은 어느덧 손이 자유로워 졌으나 이미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뇌리는 텅 비웠고 전신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엉 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이불에 묻은 자세로 엎그려 사내의 움직임 이 있을 때마다 고통에 이를 악물고 있을뿐이었다. 담사는 무릎꿇는 자세로 그녀를 차근차근 공략해 갔다. 그의 자 세는 숙달되어 있었고 조금도 멈춤이 없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허리를 끝없이 교묘하게 움직임과 동시에 그의 두 손도 쉬지 않 았다. 그의 섬세한 손은 엎드린 자세에서도 늘어지 않는 팽팽한 젖 무덤과 자신의 흉칙한 일부를 머금은 그녀의 중심부 맨 윗쪽에 자 리한 야릇한 돌기부분을 쉴 새 없이 어루만지고 비틀어대었다. 그 복합적이고 교묘한 자극에 뇌옥연은 문득 문득 기묘한 쾌감 을 느끼며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자신도 모르게 사지가 부르르 떨 리고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특히 자신의 중심부를 어루만지는 담사의 손길에는 온몸이 자지 러드는 듯한 쾌감에 짐승같이 신음했다. 그러던 어는 순간 돌연 담사의 자세가 바뀌었다. 뇌옥연은 자신의 몸이 침상에 반듯이 눕혀지는 것을 느끼며 반 항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녀는 눈을 찢어 져라 치뜨며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본 것이다. 흐릿한 어둠속에 떠오르는 생경하고도 기괴한 남성의 실체를...! 천정을 향해 용트림하는, 푸른 핏줄이 지렁이처럼 휘감긴 그 거 대한 육괴를 직시하는 순간 뇌옥연은 절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거대한 것이 자신의 몸에 다 들어갔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두 다리를 담사는 거침없이 움켜쥐어 쳐들었다. 자 신의 귀여운 발이 사내의 어깨에 걸쳐지는 것을 느끼며 뇌옥연은 전율했다. 발이 담사의 양어깨에 걸쳐진 탓에 위로 쳐들린 그녀 자신의 중 심부로 담사의 그 생경하고도 징그러운 일부가 내리꽂히는 것을 뇌옥연은 겁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튿어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천만 뜻밖에도 첫경험이고 비좁기 이를데 없는 그녀의 비 동은 별 무리없이 담사의 그 웅대한 실체를 모두 받아들였다. 단지 첫 삽입때 약간의 통증이 느껴진 정도였다. 담사가 다시 자신의 살속에 깊숙이 파고 들자 그녀는 자신도 모 르게 그의 목을 껴안았다. 이 순간 뇌옥연은 자신이 담사에게 정복당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담사를 흡수하고 옭아매엇다는 느낌이 더 강렬하게 그녀의 뇌리에 새겨졌다. 담사가 제 마무리 거친 척 날뛰어봤자 결국은 자신의 몸에서 폭 발하고 죽어버릴 가엾은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뇌옥연이었다. 마땅 히 그녀는 이 가엾은 침입자를 얼르고 보살펴주어야만 한다. 그녀 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 위에서 헐떡이는 담사의 머리를 쓰다듬었 다. 뇌옥연은 보통 여인에 비해 늘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 가, 겉은 비록 차가왔지만 그녀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담사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그녀는 적극적으로 그의 몸에 감겨들 었다. 마치 뼈가 없는 듯 나긋나긋한 여체가 뱀처럼 그의 몸을 휘 어감았다. 고무처럼 탄력 있는 싱싱하면서도 뜨겁게 달아오는 여체 였다. (굉장한 여자군...) 담사는 그녀의 정열에 내심 놀라움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그 녀의 입술을 덮었다. 순간 뇌옥연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호응해 왔다. 마주치는 입술, 뇌옥연의 입술은 뜨거웠다. 두 사람의 몸은 한치의 틈도 없이 뒤엉켜 있었다. 그것은 끝없는 광란이요, 열락의 폭풍이었다. 담사는 힘차게 노를 저었다. 그의 전신에서 송글송글 땀이 맺히 고 일엽편주는 끝없는 파도를 헤치며 나아갔다. 뇌옥연은 난생처음 느끼는 엄청난 희열에 온몸을 떨었다. 그녀는 사내의 등을 힘차게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문득 전신의 힘이 사라짐을 느끼고 까닭없이 눈물이 치 솟았다. 직후 그녀는 자신의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분출이 이는 것을 느끼 고 담사를 와락 끌어안았다. 담사 역시 우는 듯 신음하며 필사적으 로 뇌옥연에게 매달렸다. 이윽고 짧은 여운도 끝나고 담사는 말없이 뇌옥연의 몸에서 빠 져나왔다. 뇌옥연은 담사가 자신의 몸에서 이탈하는 것을 생생히 느끼면서 망련자실한 표정으로 누워있엇다. 엉겁결에 당한 겁탈, 그 와중에 서 느꼈던 죽을 것만 같았던 희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지었다. 담사는 한숨을 쉬며 그런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순간 뇌옥연은 처녀의 수치심으로 그를 밀어버리려고 했지만 담 사의 완강한 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뇌옥연은 무너지듯 그 의 넓은 가슴에 안겨들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여자야.} 담사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이 한마디 말에 비참한 심정이던 뇌옥연은 갑자기 흐뭇해 졌다. 무어라고 형용할 수는 없었으나 담사의 그 말 한 마디가 그 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뇌옥연은 말없이 그의 가슴에 안겨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물은 사라지고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녀를 담사는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손 에 죽은 범천대공 연대강, 그의 미혼처가 지금 자신의 풍에 안겨 새근거리고 있는 것이다. 한가닥 죄책감과 함게 묘한 충동이 다시 그의 몸을 뜨겁게 달구 었다. 담사의 품에 안겨있던 뇌옥연은 두 사람의 몸 사이에 축 늘어져 있던 살덩이가 다시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느끼며 바르르 몸을 떨었다. 곧 그것은 전보다 더 단단하고 뜨겁게 자라났으며 담사는 말없 이 다시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왔다. 뇌옥연은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이내 뜨겁게 신음하며 그의 몸 에 매달렷다. 뜨거운 밤(夜), 밤은 그렇게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4 금화장은 아침무렵부터 수많은 무림인들로 시끌벅적했다. 담사와 조노이는 한 명의 호원(護園)무사를 따라 느릿하게 걸었 다. 월동문을 지나서 전청에 들어서니 이미 그 곳에는 약 오십 명 쯤 사람들이 각기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안내한 호원무사는 담사와 조노이를 맨 구석 탁자에 안내라고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갔다. 이 전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담 사로서는 처음보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장삼을 걸치고 있고 어떤 이는 경장을 했으며 가지각 색의 옷모양과 승인, 도인 등 각양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담사는 일견해 보아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범상치 않음이 무림계의 호걸명숙들이라고 느꼈다. 조노이는 나직막이 담사에게 말했다. {저쪽 상석에 앉은 무량관을 쓴 늙은 도사가 청해존자라는 오늙 은이인데 혹시 부딪치게 된다면 조심하도록 하게... 그리고 보자.} 문득 조노이가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쪽에는 제수씨가 있구만.} 담사는 그의 말에 움찔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석인 듯한 그곳에는 담사도 이미 알고 있는 무영신개 동추평 과 한 명의 늙은 승려, 그리고 청해존자와 두명의 노인이 앉아있었 고, 그 옆으로 약 십여 명의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주천강을 비롯하여 금산혜, 백상천, 황보가혜, 냉유 도 그리고 뇌옥연이었는데, 뇌옥연은 담사의 시선이 자신을 쳐다보 자 수줍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노인이 어젯 밤의 일을 알고 있었군.) 담사는 고소를 지으며 뇌옥연에게서 눈을 돌려버렸다. 조노이는 그런 담사의 옷소매를 당기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흐흐 소형제, 저쪽 황색장포를 걸친 노인이 바로 북천뇌보의 보 주인 뇌천도제 뇌승이라네. 잘 기억해두는게 좋을 게야!} 담사는 힐끗 조노이를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아직 금화장주는 나오지 않았소?} 조노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나오지는 않았는 것 같은데. ..} 말 끝을 흐리는 조노이는 일순 두 눈을 크게 떴다. 밖으로부터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세 사람이 들어왔던 것이다. 실내의 중인들은 그들을 보자 모두 일어섰다. 다만 청해존자와 동추평 그리고 담사와 조노이만 앉아 있을 뿐 모두 일어나 숙연한 표정이 되었다. 앞장서서 들어오는 풍채좋은 몸에 화려한 금포를 입은 노인이 바로 금화장주 금반산(金盤山)이었다. 천하제일부호인 금반산은 가느다란 눈에 돼지처럼 살찐 노인이 었다. 하지만 사람좋아보이는 얼굴에는 가식없는 미소가 서려있어 절로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금반산의 옆으로는 무거운 표정의 철불 혜천대사와 한 명의 황 의(黃衣)의 중년부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중년부인의 나이는 대략 마흔 정도로 보이는데 소녀같이 발 그레한 살결에 수려한 이목구비를 지녀 젊은 시절 그녀의 미모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조노이는 그 중년부인을 보자 소태 씹은 표정이 되었다. {빌어먹을, 저 할망구가 여기에 나타나다니 실로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담사는 조노이의 중얼거림에 중년부인을 자세히 살폈다. (조노인이 아는 여인이라면 보통 여인이 아니겠군.) 중년부인의 모습은 약간 기품 어린 모습 외에는 별다른 특징은 없었지만 그녀의 손목에 한쌍의 옥환(玉環)이 햇살에 영롱한 광채 를 뿌리고 있었다. (음... 이제보니 노부인은 석년에 무산신녀(巫山神女)라고 불리우 던 전모(戰母)였군.) -전모(戰母)! 그녀는 청해존자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나이가 이미 구순이 넘었 을 것이다. 그럼에도 뛰어난 내공과 주안술 덕에 이제 겨우 사순으 로 보이지 않았다. 성품이 지극히 독선적이며 그녀의 손목에 걸고 있는 옥환을 오 십 년 전만 해도 사도의 인물들에게는 공포의 살병(殺兵)이었다. 자기 자리에 선 금반산은 장읍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강호동도 여러분께서 이렇게 저의 집을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 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전실 내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우선 여러분들은 어서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이내 중인들이 자리에 앉자 그는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소개를 했다. 한 사람씩 이름이 나오자 실내를 한동안 소란해졌다. 모두가 하 나같이 전대의 고인들이 아닌가? 게다가 혜천대사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한동안 실내는 정적이 흘렀다. 혜천대사는 담담히 포권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금반산은 소개가 끝나자 차분히 말했다. {이 늙은이가 여러분을 이렇게 모시게 된 것은 오랫 동안 강호 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한당추흥도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임을 여러 분은 아마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금반산은 말을 중단하고 모든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고 나서 다 시 말했다. {칠십여 년 전, 강호에는 갑자기 도화선이 남긴 한당추흥도가 출 현하여 얼마나 많은 무예계의 동료들이 죽어갔는지 모릅니다. 당시 이 몸은 나이가 어렸던지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몸의 조모이신 금화부인께서도 그때 돌아가셨읍니다. 저의 선친께서도 한당추흥도 를 찾아 헤매였지만, 결국 마교의 인물들에게 의문의 피살까지 당 했던 것입니다.} 그는 지나간 일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깊 이 생각을 하다가 말을 잇는다. {이 사람은 이번 한당추흥도의 출현에 한 가지 의문을 느꼈읍니 다. 그것은 원래 한당추흥도는 그 당시 마교의 적용군(狄容君)이라 는 인물에게 넘어갔는데 어떻게 해서 다시 이 강호에 나왔는가 하 는 것입니다.} 돌연 왼쪽의 좌석에 앉아 있던 홍면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 다. {조금 전 장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한당추흥도가 적용군(狄容君) 이라는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 었는지 말해 주시겠읍니까?} 5 금반산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협께서는 누구신지....?} {나는 귀주(貴州)에서 온 홍면신(紅面神) 종노방(終老房)이라는 사람입니다.} 종노방의 말에 금반산은 담담히 말했다. {이제보니 귀주의 종노영웅이셨구료.} 종노방의 이름은 귀주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명 을 떨치고 있다. 금반산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그 일을 알게 된 것은 석년 저의 조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에 저의 앞으로 서찰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일은 지금 여 기에서 다 자세히 설명은 할 수 없고, 다만 제가 그 동안 조사한 결과 적용군이란 인물은 마교의 수뇌로서 일 년 전의 무림맹 혈사 에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 말을 듣자 자리에 앉아 있던 중인들은 깜짝 놀랐다. {금장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미 마교에서 도화선(盜畵仙)의 보 물을 차지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한 명이 소리치자 실내는 일순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한 줄기 불호성이 중인들의 귓전을 우뢰처럼 진동시켰다. {아미타불.... 여러 시주들께서는 잠시 금장주님의 말씀을 더 들 어 보십시오.} 혜천대사가 나직이 외치자 실내는 일순 조용해졌다. 이때 청해존자가 일어서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소이다.} 이 말에 모든 중인들의 시선은 청해존자에게 집중시켰다. {석년 이 늙은이는 당시 이십 세의 나이로 사부와 함께 한당추 흥도를 찾기 시작했소.} 그는 천천히 시선을 금반산에게 돌리고 말했다. {한당추흥도는 처음 골동품 상점에서 발견되었는데 수십 명의 고수들이 죽은 끝에 금화부인의 손으로 들어갔소. 헌데 금화부인은 이틀 만에 의문의 피살을 당하고 한당추흥도는 사라졌소이다. 이에 나의 사부는 흉수를 쫓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태행산(太行山) 기슭 에서 그 흉수를 만날 수가 있었소이다.} 돌연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런데 당시 나의 사부와 나는 그 자를 공격했으나 백초도 지 나지 않아 오히려 사부가 그자의 독수에 중상을 입어 우리는 도망 칠 수 밖에 없었소이다. 그로 인해 사부는 일 년 만에 돌아가시고 나는 그때부터 그 흉수의 행적을 추적했지요. 그러나 당시 나의 무 예는 보잘것이 없었고 그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옛날의 일을 회상하는지 이를 악물었다. {그 자의 무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괴이하고 악독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소. 세상에 듣도 보지도 못한 수법이었고 거기에다 한 자루 의 절세보검까지 가졌으니, 나로서는 도저히 상대 할 수 없는 인물 이었소.} 금반산이 나직이 말했다. {그 자가 바로 적용군이라는 사람이었지요.} 청해존자는 이 말에 침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그 자가 적용군이란 자로 마교의 장문 제자였소이다.} 이때 돌연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한당추흥도가 다시 강호에 나온 것은 마교의 음모라 는 말씀입니까?} 이에 중인들이 바라보나 약 육십 세의 노인으로 앞가슴에 허연 수염을 기른 점창파(點蒼派)의 명숙인 일검추혼(一劍追魂) 곡외명 이었다. 금반산이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읍니다. 제가 그 동안 한당추흥도를 찾은 것도 이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저는 사실 오십 년 전부터 저의 집 안의 원수인 마교를 조사해 왔읍니다. 그 동안 물론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하늘이 무심치 않아 이번에 그들의 꼬리를 잡게 된 것입 니다.}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혜천대사를 위시하여 뇌승 등 상석의 거 웅들을 일별하면서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한당추흥도는 뇌천도제 뇌대협의 힘으로 찾았으며 고 인들의 도움으로 마교에 대한 몇가지 단서를 얻을 수가 있었읍니 다.} 숙연해진 중인들, 실내의 중인들 중 마교의 악명을 그 누가 모르 겠는가? 금반산의 낭랑한 목소리가 전청을 울려퍼졌다. {제가 그 동안 조사한 바로는 마교의 중원총단(中原總壇)은 태 행산(太行山)에 있으며 그곳은 바로 석년에 도둑들의 왕 도화선이 한당추흥도에 표시해 놓은 은신처입니다. 한 마디로 마교의 무리들 은 한당추흥도로서 강호에 대혼란을 조성하고 무림동도를 태행산 으로 유인 암수와 귀계로서 그들은 무림인들을 전멸시키려고 음모 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돌연 황보가혜가 일어섰다. {마교는 천하에 해를 끼치는 흉악무도한 집단으로 저는 마교에 의해 저의 백부님과 아버님을 잃었어요. 일 년 전 무림맹이 그들에 게 당한 것은 무예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풀어놓은 첩자와 암수에 의해 대부분이 그때에는 독에 중독되어 제대로 힘을 쓸 수 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혜천대사는 이 말에 침통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고, 금반 산은 가만히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읍니다. 마교는 언제나 암수와 귀계로써 중원무림을 농락해 왔읍니다. 이번 한당추흥도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계략으로서 빙산 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저는 한당추흥도를 공개하 여 여러분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마교와 일전을 불사할 것입니다.} 말을 멈춘 금반산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신 강호동도들께서 저희들의 이같은 뜻을 잘 아셨을 테니 돌아가시게 되면 이 사실을 널리 알려서 마교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점창파의 일검추혼이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 곡외명은 한 사람의 무인으로 마교와의 결전에 참가하고 싶 읍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여러 중인들은 충격을 받아 일시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지며 너도나도 결전에 힘을 합치겠다고 외쳤다. 혜천대사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아미타불... 여러분 중에서 탕마멸사의 대열에 참가하시고 싶은 분들께선느 잠시 후 금장주께서 따로 말씀이 계실 터이니 그때 다 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장내는 일시에 조용해졌다. 문득 청해존자 오합률이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담사와 조노이를 노려보며 금반산에게 물었다. {금장주, 저 두 사람은 누구요?] 그의 물음에 금반산은 물론 장내의 모든 이목이 담사와 조노이 에게 쏠렸다. <제 3권 끝> 제 34 장 魔敎의 來襲 1 {저 두 사람은....!} 청해존자(靑海尊者) 오합률의 물음에 담사와 조노이를 바라보던 금반산은 말끝을 흐리며 딸인 금산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금산혜 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청해존자는 담사와 조노이를 가리키면서 장내의 여러사 람에게 물었다. {여러분들중에 저 두 사람을 아시는 분이 있읍니까?}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중인들의 의혹에 찬 시선 이 모두 담사와 조노이에게 집중되었다. 금반산은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말했다. {저분들은 한당추흥도를 찾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로...} 그는 금산혜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혜아야 저 분들은 네가 모시고 오지 않았느냐?} 금산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저 분들은 제가 모시기는 했지만 아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다 만 뇌언니와 알고 있다는 것 외에는요.} 이에 청해존자의 시선이 북천일미 뇌옥연을 향했다. 뇌옥연을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분들은.... 우연히 만났는데...}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담사와 조노이 에 대해 내력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몰 랐던 것이다. 금반산은 그런 뇌옥연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뇌낭자는 저 두 분을 어찌 알게 되었는가?} [그것은...!] 뇌옥연은 자신이 담사와 조노이를 만났던 경과를 재빨리 이야기 했다. 뇌옥연의 이야기를 들은 금반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뇌낭자는 그만 앉아 주게.} 이어 그는 천천히 담사와 조노이가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섰다. {미거한 제가 금화장의 장주를 맡고 있는 금반산입니다. 두 분에 게 몇마디 여쭈어 볼 말이 있읍니다.} 금반산의 정중한 어조에도 담사는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는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노이는 금반산의 말에 모른 척 할 수 없어 어색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말 했다. {금장주가 할 말이 있다면 얼마든지 하시게.} 금반산은 조노이의 거침없는 하대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정중히 물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묻겠읍니다만, 두 분의 사문내력이 어떻게 되 시는지?} 조노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힐끗 청해존자를 쳐다보 았다. 그의 표정은 못마땅하다는 듯 잔뜩 찌푸러져 있었다. 금반산은 자신을 안중에 두지 않는 듯한 조노이의 행동에 일순 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꾹 참으며 다시 말했다. {노인장께서는 저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읍니다만....} 그러자 조노이는 짐짓 비굴한 표정으로 굽신거렸다. {헤헤! 노부는 조노이라는 무명소졸이고 이 청년은 노부의 소형 제요.} 그는 담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형제의 내력이래야 별 볼게 없고 다만 몇 수의 잔재주를 익히고 있을 뿐이외다.] 조노이는 그렇게 간단히 말하고는 제자리에 그냥 앉아 버렸다. 이에 금반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담사와 조노이를 노려보았다. 담사와 조노이는 금반산이 지그시 자신들을 노려 보았지만 못본 척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그같은 안하무인한 태도에 장내는 삽시에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저자들은...?] [혹시 마교의 첩자 아닌가?]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보다 못한 뇌옥연이 황급히 일어서며 금반 산에게 말했다. {장주님, 이 분들은 절대 마교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제가 보 증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금반산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뇌낭자의 말은 믿고 싶네. 하지만 노부는 주인 된 입장에 서 이 분들의 내력을 반드시 알아야만 하네. 마교의 무리들은 교활 하면서도 요사한 무리들이라 나로서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 으니 뇌낭자는 이해하시게나.} [하지만....!] 뇌옥연이 다시 담사와 조노이를 위해 변호하려고 하자 그녀의 아버지 뇌천도제 뇌승이 나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연아야! 너는 가만히 있거라.} 그의 음성은 엄중했다. {아버님, 저 분들은 저의 생명을 구해 주신 분들이예요. 저 분들 은 절대 마교와 관계가 없어요.} 뇌옥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뇌승은 엄중히 말했다. {알았으니 넌 자리에 앉도록 해라.} 뇌옥연은 수심 어린 눈으로 담사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담대가! 저는 아무런 힘이 될 수 없군요.) 그녀는 내심 괴로움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그녀는 지난밤 담사에게 처녀를 바쳤고 이제 담사는 그녀의 낭군인 것이다. 문득 청해존자가 냉막히 외쳤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뒤가 구린다는 것! 늙은이의 무예를 보면 알 수 있겠지.} 휘익!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해존자의 좌수가 벼락같이 조노이의 어깨 를 잡아갔다. 하지만 그 순간 조노이의 신형은 앉은 자세 그대로 떠밀리듯이 표연히 물러났다. 청해존자는 자신의 일초가 실패하자 냉소를 터트렸다. {흥! 역시 한수가 있기는 있었군.} 그는 손가락을 부챗살처럼 펼치며 맹렬히 찔러갔다. 변초의 빠름 과 수법의 신랄함은 전광석화였다. 조노이는 일순 양발을 교차시키며 바람에 날리듯이 표연히 삼 장 밖으로 피하며 우수를 밀었다. 그러자 갑자기 청해존자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비천장(飛天掌)-!} 그는 다급히 물러서며 놀라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보니 비천신괴(飛天神怪) 조늙은이였구료!} 청해존자의 이 말을 듣자 중인들은 깜짝 놀라며 일제히 자리에 서 일어나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2 -비천신괴(飛天神怪) 조일(趙日)! 그는 비록 한때 이름을 크게 떨치긴 했었어도 너무 일찍 무림에 서 종적을 감추었으므로 그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 나 그의 명성은 결코 청해존자 오합률에 못지 않는 것이었다. 조노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오늙은이가 나를 알아보다니 차라리 다행한 일이군.} 이어 중인들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자! 이제 노부의 정체를 알았으니 계속 회의를 진행하자고... 우 리에게는 신경을 것 없으니까!} 그는 털썩 주저앉아 술잔을 들었다. 조노이의 정체를 안 금반산이 정중히 포권을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조선배님이 오셨는 줄을 모르고 실례를 범했 으니 이 일을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노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이 늙은이에게 마음 쓸 필요는 없네. 쫓아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니...} 그는 더 이상 말을 하기 싫은 듯 술을 들이켰다. 금반산은 그의 괴퍅한 성질에 관해 들은 적이 있는지라 재빨리 말했다. {선배님의 분부가 그러하시니 그럼 실례하겠읍니다.} 그는 조노이에게 다시 한 번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금산혜는 옆에 앉은 뇌옥연에게 나직이 말했다. {뇌언니, 미안해요. 괜히 저 분들을 의심해서...} 그녀가 죄스런 표정으로 말 끝을 흐리자 뇌옥연은 쓴웃음을 지 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도 저 분의 내력을 알고자 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 야!} 말과 동시에 그녀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매, 잠시 저 분들에게 갔다 올께.} 뇌옥연이 급히 담사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금산혜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였으나 그냥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금산혜 에게 황보가혜가 민망한 얼굴로 사죄를 했다. {금소저 미안해요. 원래 이 일은 내가 꾸민 일인데... 나 때문에 괜히 곤란을 당했으니 무어라고 사죄를 해야될지 할 말이 없군요.} 담사의 정체가 못내 의심스러워진 황보가혜가 청해존자를 충동 질하여 조노이와 담사의 신분을 다그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금산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아니예요. 나도 뇌언니처럼 저 분들의 배력이 궁금했으니까요.} 이어 그녀는 시선을 담사의 탁자로 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담옥이라고 했지. 비록 뇌언니에게 선수를 빼앗겼으나 결코 나 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내심 야무진 생각을 하는 그녀의 눈빛은 밝게 빛났다. 이제 겨우 세 번째 보는 것이지만 담사의 인상은 금산혜의 뇌리에 너무도 강 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 뇌옥연은 담사의 표정을 살피며 그의 앞자리에 앉으면서 감미로 운 미소를 머금었다. 담사는 그녀가 허락도 받지 않고 대담하게 자신의 앞 자리에 앉 자 실소를 지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저도 한 잔 주시겠어요?} 그러자 뇌옥연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내밀었다. 그녀의 담대한 말에 담사는 흠칫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일순 뇌옥연은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담사는 말없이 뇌옥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뇌옥연은 술잔을 두 손으로 들고 한 모금 입 안으로 넘겼다. 순간 목 안에서 일어나는 화끈한 기운에 그녀는 급히 입을 막았다. 담사는 그녀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뇌옥연은 요염하게 눈을 굴리며 툭 쏘았다. {웃긴 왜 웃어요!} 담사는 그녀의 악탈에 일순 마음에 훈훈해짐을 느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뇌옥연은 담사의 미소에 무한한 애정의 광채를 눈동자에 담뿍 담고는 다정히 그를 응시했다. 그 얼굴에는 기쁨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 멀리서 이들을 지켜보던 뇌승을 눈살을 찌푸렸다. (저 애가.... 그 동안 연대강의 죽음으로 슬픔에 싸여 있었는데 담 옥이라는 젊은이가 무예도 고강하고 조노선배의 의동생이라면 사 위감으로 나쁘지는 않지.) 그는 내심 생각을 굴리며 담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비록 냉막 한 인상이긴 했으나 사내다운 용모에 어딘가 그늘이 져 있지만 한 번 좋게 생각하니 그것마저 좋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딸자식을 둔 부정(父情)의 발로인가? 뇌승은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금화장의 호원무사 한 사람이 황망이 대청으로 달려들어왔다. 그는 총총히 달려와 정중히 장읍을 하더니 금반산에게 귓속말을 몇마디 전하고 뒤로 물러선다. 이 돌연한 변화에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히 금반신에게 향했다. 왜냐하면 금반산의 표정이 한 순간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금반산은 잠시 마음의 격동을 가라앉히려는지 숨을 깊이 들이마 시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수하의 말에 의하면 지금 정문에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나타나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하니 제가 잠시 나가보아야 하겠 읍니다.} 금반산은 장읍을 취하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장내의 중인들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웅성거렸다. [아악!] 헌데 금반산이 대청을 나간 직후 갑자기 멀리서 한마디 단말마 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이에 중인들은 놀라운 눈길로 서로 마 주보았다. 돌연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아무래도 오늘 금화장에 적이 쳐들어 온 것 같으니 나가봅시 다.} 그자가 외치고 급히 밖으로 나가자 중인들은 호응을 하며 모두 밖으로 나갔다. 3 금화장 넓직한 앞마당, 그곳에는 하나의 피빛 교자(轎子)가 서있는데, 그 피칠을 한 듯 섬뜩한 교자를 중심으로 금화장 호원무사 삼백여명이 빙 둘러싸 포위하고 있었다. 이 피빛의 교자는 바로 마교의 신임교주인 신비한 혈의여인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혈교(血轎)였다. 지금 그 혈교 앞에는 몇명의 금화장 호원무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혈교를 포위를 하고 있는 호원무사들은 공포에 질 린 표정으로 혈교를 노려보고 있었다. 혈교의 바로 앞에는 마교의 문상(文相)인 모용천엽(慕容天葉)이 수중에 한 자루의 섭선을 들고 우뚝 서 있었다. 아마도 금화장의 호원무사들을 해친 장본인은 모용천엽인 모양이었다. 오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용천엽의 뒤로는 항주 금룡장의 장주였던 전육당, 아니 모용청(慕容靑)이 서장의 거마 절명마존(絶 命魔尊) 혁사군이 서있었다. 그 외에도 백포를 입은 백지장 같은 창백한 안색의 시체 같은 노인이 혈교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혈교 뒤로는 약 백여 명의 대한들이 병기를 들고 서 있는데, 일 률적으로 짙은 흑색경장에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의 대한들이었 다. 아마도 그들이 혈교를 수행한 마교의 정예들인 모양이었다. 금반산은 장내의 상황을 재빨리 둘러보고는 혈교를 응시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가 냉막한 목소리로 묻자 혈교 앞에 서있던 모용천엽은 빙그 레 웃으며 말했다. {금장주, 나는 모용천엽이라는 사람으로 마교의 문상(文相)이오.} 이 말에 금반산은 충격을 받았는지 눈빛이 흔들리며 놀라운 듯 외쳤다. {당신들이 마교의 사람들이요?} 모용천엽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이다. 마교의 전인은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지요.} 그는 비웃는 어조로 말을 하며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때 마침 전청 안에 있던 중인들이 물러나왔다. 그 중 혜천대사는 혈교를 발견하고 불호성을 외웠다. {아미타불... 금장주, 저들은 마교의 무리들이 확실하오.} 철불 혜천대사의 목소리는 침중히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는 무엇을 확인하려는 듯 주렴이 처진 혈교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금반산은 무거운 눈길로 모용천엽을 주시하며 말했다. {마교에서 무슨 일로 나의 집을 방문하고 무차별 살상을 저지르 시오?} 모용천엽은 태연히 중인들의 얼굴을 한 차례 일별하며 대꾸했다. {금장주, 모르는 척 시치미 뗄 것은 없소. 장주께서 우리의 일에 방해를 한 것은 명백히 마교와 적대시하겠다는 것, 마교는 절대 적 을 용서하지 않소.} 이때 돌연 금산혜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당신이 마교의 문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무상(武相) 도 있겠군요?} 모용천엽은 의외의 눈빛으로 금산혜를 쳐다보았다. (금반산에게 절세미모의 손녀가 있다고 하던데.... 이 낭자가 금산 혜인 모양이군.) 그는 내심 금산혜의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야릇한 시선으로 금산혜를 쳐다보던 모용천엽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금화장에 옥녀(玉女)라는 가인이 있다고 하던데 소저가 금산혜 라는 분이시오?} 금산혜는 냉랭한 눈으로 쌀쌀히 외쳤다. {그래요. 제가 금산혜예요. 혹시 흑마수(黑魔手)라는 인물이 당신 네 무상이 아닌가요?} 모용천엽은 순간 놀랐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 소저의 지혜가 출중하다고 들었는데 과연 소문처럼 놀랍구 료!} 금산혜는 모용천엽이 긍정의 뜻으로 말하자 교소를 지으며 말했 다. {호호호... 솔직이 말을 해 주시니 고맙군요. 헌데 지옥혈룡(地獄 血龍)이라는 사람도 마교의 인물인가요?} 담사는 자신의 별호가 거론되자 움찔 놀라며 모용천엽을 쳐다보 았다. 그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모용천엽은 기이한 눈빛으로 금산혜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것은... 소저의 상상에 맡기겠소이다.} {그렇다면 지옥혈룡이 마교의 인물들이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말 인가요?} 모용천엽은 묘한 미소를 띄우며 혜천대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철불이라는 스님이시오?} 혜천대사는 그의 무례한 어조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미타불... 소시주, 내가 혜천이오만?} 그는 비록 노시가 치솟아 올랐으나 침통히 말했다. 그때 돌연 황보가혜가 신녀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아버님의 원수, 죽어라!} 그녀는 불현듯 부친의 죽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감연히 모용 천엽을 찔러갔던 것이다. 순간 교자 뒤에 서 있던 대한 중 한 명이 신속하게 날아와서 황 보가혜를 막아서면서 귀두도를 쳐냈다. {흐흐... 감히 문상어른께 검을 휘두르다니... 나 좌명(左命)이 네 버릇을 가르쳐 주마!] 그자는 음소를 터트리면서 귀두도를 좌우로 쳐내는데 그 수법의 신속함과 발휘하는 도풍(刀風)이 매우 무서웠다. [저자가 섭혼도(攝魂刀) 좌명!] [저자마저 마교에 투신하다니...!] 좌명이란 사내를 알아본 무림명숙들은 신음을 흘렸다. -섭혼도(攝魂刀) 좌명(左命)! 이자는 십여년전만 해도 하북일대에서 악명을 떨치던 대도였다. 비록 흑도의 인물이었으나 십팔로(十八路) 섭혼참백도법(攝魂斬魄 刀法)은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뒤어난 절기였다. 헌데 한동안 소식이 없던 그자가 마교의 교도가 되어 다시 강호 에 나타난 것이다. 황보가혜는 비통스런 마음에 신녀검을 재빨리 휘둘렀지만 이미 마음이 산란해진 그녀로서는 제대로 검법의 운용을 살릴 수 없었 다. 채 십초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손발은 어지러워졌다. 그 순간 보 다 못한 용문검부의 후계자 백상천이 전권에 뛰어들면서 외쳤다. {혜매, 물러서시오. 이 자는 내가 상대하겠소.} 4 그는 어느 새 검을 뽑아 좌명의 귀두도를 막으며 황보가혜 앞을 막아섰다. 그때였다. {혁늙은이, 전날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니 여기서 가리는 것도 좋 겠지!} 말과 동시 청해존자가 벼락같이 혁사군을 향해 공격했다. 혁사군도 좌수로 절명장을 후려갈기며 외쳤다. {청해존자! 죽고 싶다면 할 수 없지.} 그러자 청해존자는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 쌍수를 구부리고 튕기자 지풍이 일어나며 혁사군의 요혈을 쏘아 갔다. {탈명음풍지 따위로는 어림도 없지.} 가소로운 듯 말하며 혁사군은 쌍수를 교차시켜 절명장을 후려제 꼈다. 순간 지풍은 장력에 의해 무산돼 버리고 음유한 경력이 닥쳐오 자 청해존자는 다급히 뒤로 물러서며 오지를 순식간에 쳐냈다. 담사는 한쪽에서 무표정히 응시했다. 지금 장내에는 싸움이 벌어 지고 있지만 그는 거기에 관심이 없고 혈교 안의 사람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뇌옥연은 가만히 그런 담사의 허리춤을 당겼다. 담사가 움찔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자, 뇌옥연은 수줍은 듯 얼 굴을 능금같이 붉히며 맑고 애정이 충만한 눈빛으로 나직이 말했 다. {혈교 안에 있는 사람이 마교의 교주인가요?} 담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겠소. 허나 혈교 안에 있는 사람은 매우 무서 운 고수일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뇌옥연은 살포시 미소를 띄우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전날과 달리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차 갑던 표정에 훈풍이 맴돌고 눈망울에는 애정의 빛이 담뿍 담겨 있 었다. 조노이의 표정이 문득 무섭게 굳어졌다. 이때 한 명의 노인이 혈교 안에서 천천히 나오고 있는데, 적색장 포에 키가 휜칠한 노인으로 그의 전신에서는 무서운 기도가 흐르 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구순 가량 되어 보였으나 실제 나이가 얼마나 되는 지는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귀 밑까지 내려온 허연 눈썹에 매부리코, 가느다란 눈에서 간간 이 녹광이 번쩍거렸다. 그는 천천히 장내의 중인들을 훑어보면서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 다. 적색장포의 노인의 눈과 마주친 중인들은 저도 모르게 뱃 속까 지 파고드는 듯한 안광에 심장이 바짝 얼어붙는 듯 소름이 오싹 끼쳤다. 문득 그의 시선이 금반산의 얼굴에 멈추었다. {네가 금화부인(金花婦人)의 손자 아이냐? 목소리는 나직막했으나 금반신의 귓전에 닿았을 때는 천둥치듯 크게 고막을 울렸다. 금반산의 나이는 칠십 이 세이다. 그런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듯한 괴노인의 말에 그는 분노가 치밀었으나 문득 느껴지는 생각에 침중히 말했다. {노인장께서는 혹시...?} 적색장포의 노인은 입가에 오만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흐흐! 그렇다! 노부는 너의 추측대로 적용군(狄容君)이라는 사람 이다.} [적....적용군!] [저자가 바로 마교의 태상호법인 적용군...!] 순간 장내에 격동과 공포의 신음이 흘렀다. 적용군이라면 칠십여년전 금화부인을 살해하고 한당추흥도를 강 탈한 장본인이 아닌가? 사실 그는 백년전 서장 성숙해의 나후마교가 법공선사등 소림십 팔천불(少林十八天佛)에게 멸망당할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마교의 몇 명 생존자중 한명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마교의 마경(魔經) 몇권을 지닌 채 멀리 신강으로 달아나 마교를 재건하기 위해서 절치부심을 했다. 그 결과 사십여년전에는 전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상당한 정 도로 마교의 세력을 복구했으며, 그 마교의 힘을 은밀히 중원으로 들여보내 중원무림을 암중에 제패할 독계를 꾸몄으니 그것이 바로 전륜교(轉輪敎)였다. 전륜교의 교주였던 전륜천존(轉輪天尊) 모용황(慕容皇)은 서장 나후마교의 종손이었으며 그 모용황을 가르친 실질적인 사부가 바 로 이자 적용군(狄容君)인 것이다. 백년전 마교가 멸망할 당시 이미 중년의 나이이던 적용군은 살 아있다면 이미 일백삼십세를 넘었을 것이다. 헌데 그 이야기로만 전해오던 마교의 거물이 버젓이 살아서 이 곳 금화장에 나타난 것이다. [적용군!] 절명마존 혁사군과 싸우던 청해존자 오합률의 입에서도 경악성 이 터졌다. [물러나라 혁가야!] 다음순간 혁사군은 버럭 노성을 지르며 쌍수를 벼락같이 내쳤다. 수비따위는 아예 도외시한 그 무지막지한 청해존자의 일격에 혁 사군이 급히 몸을 피하자 청해존자는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화살 처럼 적용군을 향해 쌍장을 쳐냈다. {적용군! 죽어라!} 그의 목소리는 원한에 가득차 있었다. 청해존자는 칠십여년전 적 용군에게 사부를 잃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의 원한을 갚기 위해 사력을 다해 적용군을 공격해갔다. 적용군은 자신에게 득달같이 덮쳐오는 청해존자를 힐끗 쳐다보 면서 우수를 가볍게 뻗었다. 그의 이 손짓은 비록 느릿하게 보였지 만 어느 새 청해존자의 장력을 막음과 동시 그의 앞가슴을 쳐가고 있었다. 청해존자는 갑자기 자신의 장력이 무산되고 한 가닥 암영이 가 슴으로 들이닥치자 급히 신형을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어느 새 가 슴에서 격렬한 고통이 일어났다. {으악!}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기듯이 물러났다. 적 용군의 일장은 호신강기고 뭐고 할 것없이 그대로 무너뜨리며 청 해존자의 가슴을 강타한 것이다. 5 [사부님!] 천갈 냉유도가 경악성을 토하며 급히 청해존자에게 날아가 그를 부축했다. [크흑!] 청해존자는 나직한 신음성을 흘리며 입에서 주르르 선혈을 흘렸 다. [아미타불!] 혜천대사가 재빨리 적용군을 막아서면서 합장을 하고는 불호성 을 외웠다. {소승은 혜천이라고 합니다. 방금 노시주의 수법은 천마재림(天 魔在臨)의 수식인 것 같은데....} {흐흐... 철불이라는 중놈이 바로 너였군.} 적용군은 혜천대사를 쓸어보며 스산한 괴소를 흘렸다. {킬킬! 너는 따로 상대할 사람이 있으니 오늘은 목숨만을 살려 주겠다.} 말과 동시에 적용군은 우수를 느릿하게 쳐냈다. 보기에는 느린 듯했지만 어느 새 은은한 녹광이 서린 그의 우수는 혜천대사의 어 깨를 쳐왔다. 순간 혜천대사는 훌쩍 몸을 피하며 선장을 들어 적용군의 우수 를 후려쳤다. 혜천대사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림맹이 마교에 의해 참화를 당한 때문에 극도의 비분함을 느끼고 있는지라 그의 선장에는 극 고의 공력(功力)이 실려 있어 마치 뇌성벽력이 일어난 듯했다. 적용군은 감히 선장을 맞받지는 못하고 훌쩍 몸을 날리며 우수 를 기묘하게 쭉 뻗었다. 혜천대사는 일초가 실패로 돌아가자 선장을 재빨리 거두어 들였 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적용군의 우수가 금나수법으로 선장을 낚아 채 오는 것이 아닌가? 혜천대사는 그의 괴이한 수법에 당황한 표정으로 선장을 회전시 켰다. 순간 적용군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스쳤다. 직후 갑자기 낚아 채던 적용군의 우수가 칼날같이 선장을 후려쳤다. 탕! 요란한 소리와 동시에 혜천대사의 선장이 반으로 잘리고 말았다. 혜천대사는 내심 손아귀에 찢어질 듯이 고통이 오자 다급히 물 러섰다. 적용군은 혜천대사가 물러나자 그림자같이 따르며 좌수를 갈구 리처럼 구부리고 왼쪽어깨를 찍어갔다. 혜천대사는 일단 선기를 빼앗기자 계속 수세에 몰렸다. 적용군의 수법은 찌르고, 후려치고, 찍는 등 극히 괴이하면서도 현묘하게 혜천대사를 핍박해 왔다. 혜천대사는 선장이 잘린 것이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한 순간 방 심한 것이 선기를 빼앗기고 연신 뒤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앗!} 돌연 혜천대사의 입에서 대갈성이 터졌다. 반토막의 선장을 팔방 풍우(八方風雨)의 수법으로 휘두르며 좌수로서 반원을 그렸다. [금강복마수(金剛伏魔手)로구나!] 은은히 금빛으로 물드는 혜천대사의 왼손바닥을 본 적용군의 눈 이 번쩍 빛을 발했다. [킬킬! 허나 정수가 빠져 겨우 삼성(三成) 수준도 되지 않는 금 강복마수로는 노부의 적수가 될 수 없지.] 하지만 적용군은 이내 비웃듯이 소리치며 우수로 선장을 막고 좌수를 찍듯이 쳐냈다. 퍼펑! 혜천대사는 적용군의 좌수와 그의 금강복마수가 부딪치자 정신 이 일순 찌르르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적용군의 좌수에 담겨 있는 기력은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했다. 혜천대사는 일순 눈앞에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주춤 두 걸음이 나 물러섰다. 가슴에 기혈이 들끓고 혈기가 치밀어 올랐다. 적용군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좌수를 뻗어왔다. 이때 혜천대사의 위급함에 금반산이 재빨리 전권에 뛰어들었다. {대사, 조심하시오.} 말과 동시에 금반산은 한 줄기 웅후한 장력을 쳐냈다. 적용군은 두 눈에 안광을 번뜩이면서 훌쩍 뛰어올라 적포를 펄 럭이면서 연기처럼 장력을 피하며 쌍장을 벼락같이 쳐냈다. 펑! 펑!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터지고 적용군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 솟아 오른다 싶자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머리를 땅으로 향하며 순 식간에 삼십육장을 쳐냈다 금반산과 혜천대사는 뒤로 물러서다가 갑자기 수가닥의 장력이 마치 대해를 가를 듯이 몰아쳐오자 다급히 수비를 취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적용 군의 공력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전신을 강타했다. [컥!] [크윽!] 혜천대사와 금반산은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주르르 물러섰다. [대사!] [금장주!] 즉시 무산신녀 전모(戰母)와 뇌천도제 뇌승이 달려나왔다. 무산신녀의 부축을 받은 금반산은 한사발의 피를 울컥 토하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고, 뇌승의 부축을 받은 혜천대사는 힘겹게 겨 우 버티고 섰다. 하나 혜천대사의 몸이 휘청거리는 것이 극히 중대한 상처를 입 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혜천대사와 금반산이 적용군의 공격을 몇초 받아내지도 못하고 패하자 장낸의 중인들은 사색이 되었다. 우내삼기의 첫째이고 정파 무림 제일기인인 철불 혜천대사마저 패배시킨 이 전대 거마를 누 가 있어 상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죽어라 노마!] 바로 그때 돌연 사나운 일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적용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바로 청해존자였다. 혜천대사가 적용군을 상대하는 사이 운 기요상하여 상세를 어느 정도 다스린 청해존자가 적용군을 공격해 갔던 것이다. [으아아!] 극도의 수치심과 원한에 복받친 청해존자의 공격은 생사를 도외 시한 듯 마치 태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광폭한 기세였다. {오늙은이, 너의 상대는 여기에 있다!} 그때 지켜보던 절명마존 혁사군이 조롱을 하며 어느 새 그의 앞 을 막고 쌍장을 후려갈겼다. 두 사람이 무섭게 뒤엉켜 들자, 무산신녀는 금반산을 금산혜에게 넘겨 주고는 재빨리 옥환을 들고 적용군을 향해 공격했다. 한 쌍의 옥환이 부딪치며 청아한 소리를 내었다. {전모(戰母)! 네 상대는 여기 있다.} 한쪽에 말없이 서 있던 시체 같은 노인이 낭아곤(狼牙棍)을 흔들 며 옥환을 부딪쳐 왔다. 무산신녀는 낭아곤의 맹렬한 위세에 감히 맞받지는 못하고 버들 가지 같은 허리를 살짝 비틀면서 재빠르게 뒤로 다섯 자나 물러섰 다. {흥, 이제보니 음산(陰山)의 상문신(喪問神) 사(史)늙은이였군.} 무산신녀는 어여쁜 얼굴에 냉소를 떠올리며 비웃었다. 6 -상문신(喪問神) 사준(史俊)! 이자는 음산파(陰山派)의 후예인 전대의 거마로서, 성격이 흉폭 하고 아이라도 자신의 비위를 거슬리면 찢어 죽인다는 절세의 흉 마였다. 그자는 오십년전 부녀자를 겁탈하다가 무산신녀에게 걸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네년에게 당한 오십 년 전의 수모를 갚아 주마!} 상문신은 석년에 무산신녀에게 당한 패배가 생각이 나는지 흉맹 하게 낭아곤을 휘둘렀다. 무산신녀는 계속되는 그자의 공세에 다시 어깨를 슬쩍 움직여서 옆으로 옥환을 기묘하게 떨쳐냈다. 한 쌍의 옥환이 기이한 소음을 내며 좌우로 쏘아오자 완년에 한 번 당한 적이 있던 상문신은 광풍노소(狂風怒嘯)의 한 수로 낭아곤 을 후려쳤다. 순간 무산신녀는 자신의 독문신법으로 뒤로 훌쩍 신형을 날리며 옥환을 암기처럼 쏘아내었다. 일직선으로 쏘아가는 옥솬이 낭아곤 과 부딪치자 미끄러지듯이 퉁기며 상문신의 어깨와 옆구리를 무섭 게 파고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상문신은 노성을 지르며 발끝을 박차자 그의 신형이 회전을 그 리며 뒤로 미끄러지듯이 물러났다. 순간 한 쌍의 옥환은 목표를 잃자 원을 그리며 다시 무산신녀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이어 다시 두 사람의 신형이 교차되면서 박 투를 벌렸다.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적용군은 모용천엽을 보면서 외쳤다. {천엽아! 모조리 죽여랏!} 말과 동시에 그의 몸은 벼락같이 중인들을 덮쳐갔다. 모용천엽 역시 뇌천도제 뇌승을 덮쳐가며 외쳤다. {마교의 제자들은 모조리 이들을 죽여랏!} 그러자 혈교 뒤에 서 있는 흑의대한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살 수를 쳐냈다. 장내는 순식간에 혼전으로 변했다. 뇌승은 혜천대사를 보호하고 있다가 갑자기 모용천엽이 공격해 오자 자신의 병기인 칠환도(七環刀)를 뽑아 마주쳐 나갔다. 모용천엽은 십선을 접었다 폈다하면서 교묘히 칠환도를 피하며 요혈을 찔러왔다. 뇌승은 현란하면서 괴이한 모용천엽의 수법에 뇌천도결을 암송 하면서 한 수, 한 수 극히 신중한 자세로 시전하기 시작했다. 뇌천도결은 강(强)을 위주로 한 도법으로 칠환도가 혼들린 때마 다 도풍이 미치 노도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모용천엽의 수법은 강유(剛柔)를 겸하고 있어서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전광석화같이 사혈을 공격해 왔다. 적용군은 마치 양떼 속에 뛰어든 한 마리 늑대를 연상케 했다. 그의 쌍수가 뻗어나올 때마다 여지없이 한두 명씩 피를 토하며 쓰 러져 갔다. 무영신개 동추평, 소림사 달마워　 원주인 혜오대사, 점창파의 명숙 일검추혼등 고인들이 필사적으로 적용군을 막았지만 그는 교 묘히 몸을 피하며 연신 장력과 지풍을 뻗었다. 그때마다 옆에서 싸움을 벌이던 중인들은 처참한 비명을 토하며 쓰러져 갔다. 동추평은 일 년 전 무림맹의 참화 때 입은 상처가 완전히 치유 되지 않아 자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혜오대사는 혜천대사에 비해 무예가 비해 한 단계 낮은 탓 에 겨우 겨우 버틸 수 있을 뿐이다. [으악!] [크악!] 그 사이에도 적용군의 독수가 휘둘러지는 대로 처절한 비명이 일면서 연신 중인들이 피를 토하며 꺼꾸러져갔다. [아미타불!] 보다못한 혜오대사가 돌연 한마디 노호성을 지르며 계도(戒刀)로 써 독벽화산(獨劈華山)의 한 수를 전개하여 맹렬히 적용군의 머리 를 내리쳤다. 순간 적용군은 좌수로 막으며 우수로서 동추평의 옆구리에 일장 을 쳐냈다. 이때 일검추혼이 검을 유성(流星)같이 휘두르며 적용군의 다리를 찔러온다. 단번에 찔러 버릴 듯한 검끝이 비쾌하게 쏘아오자 적용군은 왼 쪽 발로 벼락같이 검신을 쳐내며 좌수를 앞으로 쭉 뻗었다. 순간 혜오대사의 계도가 산산이 부서져버렸고, 그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부서진 계도의 파편과 적용군의 막대한 암경에 격타 당하고 말았다. {크_____ 아악!} 다음순간 혜오대사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널브러졌다. 온몸에 계도의 파편이 박히고 적용군의 암경에 가슴부분이 강타당해 함몰 한 혜오대사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한차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고 개를 꺾었다. [이 노귀야!] 혜오대사의 죽음을 본 무영신개 동추평은 비분을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적용군에게 달려들었다. 무차별 공격하는 것이 이미 생사를 잊은 듯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적용군에게 부딪쳐 왔다. 적용군은 감히 그의 흉폭한 위세에 맞부딪치지 못하고 재빨리 옆으로 여덟 자나 멀찍이 피하고는 등 뒤에서 달려들던 금화장의 무사를 향해 일장을 뿌렸다. 그와 동시에 무사가 쓰러지든 말든 거들떠 보지도 않고 훌쩍 허 공으로 몸을 날리며 일검추혼을 향해 창날같은 지풍을 쏘아냈다. 일검추혼은 갑자기 두 줄기 지풍이 신속하게 쏘아오자 허리를 굽히며 검을 위로 쳐올렸다. 순간 적용군은 검등을 발끝으로 살짝 차면서 허공으로 솟아올랐 다. 이때 동추평이 벼락같이 대붕전시의 신법으로 허공을 날으며 쌍 장을 뻗었다. {그렇게 죽고싶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비렁뱅이!} 적용군은 사납게 외치며 쌍수를 후려갈겼다. 퍼펑! 장풍이 부딪치자 작용군의 신형은 더욱 높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고, 동추평은 이 장이나 날아가 실끊어진 연처럼 허공에서 추 락했다. 돌연 이때 갑자기 두 줄기의 인영이 섬광같이 장내로 쏘아왔다. 그들은 바로 담사와 비천신괴 조일이었다. 조일은 땅에 떨어지려는 동추평의 몸을 잡아갔고 담사는 좌수를 기묘하게 회전시키면서 적용군의 가슴을 쳐갔다. 적용군은 허공에서 훌쩍 재주를 넘으며 내려오다가 갑자기 기이 한 힘이 닥치자 별 생각없이 우수를 뻗었다. 헌데 그는 그 직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자신의 우수가 부러질듯이 꺽어지면서 한 가닥의 웅후한 암경이 여지없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지 않는가? [크윽!] 적용군은 팔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에 나직한 신음성을 흘리며 발끝을 박차고는 다급히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날아든 그 막강한 힘의 일부 가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 드는 것을 느꼈다. [커억!] 적용군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격통을 느끼며 지상에 추락하듯 이 내려섰다. 척추가 부러져나가는 것같고 전신이 비틀리며 목구멍으로 뜨거 운 기혈(氣血)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는 억지로 눌러 삼켜 버렸다. [오오! 적용군을 일격에 물리치다니...!] [저 청년은 대체 누구지?] 일방적으로 몰리던 군협들은 갑자기 뛰어든 담사가 일격에 적용 군을 곤경으로 몰아부치자 경악과 희열에 찬 환호성을 터트렸다. 제 35 장 떨치는 神威 1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다. 완벽한 암수였는데도 상처 하 나없이 피하다니...!) 중인들의 환호와는 달리 이 순간 담사의 가슴은 이 순간 싸늘해 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켜보기만 하던 그는 전직 자객답게 절호의 기회를 노려 적용군을 암습했었다. 헌데 그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버린 것 이다. 담사는 조금도 방심할 수 없어 재빨리 바닥에 내려서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적용군은 무서운 눈빛으로 담사를 노려보았다. (저 놈의 수법도 분명 금강복마수(金剛伏魔手)였다!) 그는 내심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놈의 금강복마수는 최소한 육성(六成) 수준을 넘는다. 그렇다 면 혹시 법공(法空)대사의 전인이란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적용군의 마음은 놀라움에 가득찼다. 방금전 그를 암습한 담사의 수법도 철불 혜천대사의 그것과 똑 같은 금강복마수였다. 하지만 수련의 정수(精髓)를 얻지 못해 겨우 삼성 수준인 혜천대사의 금강복마수와 담사의 그것은 너무도 현격 한 차이가 있었다. 법공대사에게 제대로 금강복마수를 배운 담사의 성취는 그야말 로 경천동지할만한 것이었다. 금강복마수는 위력이 막강한 대신 그 수련은 지극히 어렵다. 이 미 깨우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깨우치려면 평생 을 가도 연마해내지 못하는 것이 금강복마수인 것이다. 오백년내의 기재라는 소리를 들은 혜천대사조차도 독학으로 배 운 탓에 겨우 삼성수준에서 멈췄을 정도다. 그리고 불과 삼성에 불 과한 그 금강복마수로 혜천대사는 삼십년간 무적을 구가해왔었다. 천여년에 이르는 소림 역사를 통틀어도 오직 육조(六祖) 혜능(慧 能)과 법공대사만이 금강복마수를 십성 경지로 연마해내었으며, 그 둘을 제하면 현재 육성에 이른 담사의 성취가 그 다음이었다. 불과 일년여의 짧은 시간에 담사가 그같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 던 것은 물론 그의 자질이 뛰어난 때문도 있지만 십성 익혀낸 법 공대사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냉막하게 묻는 적용군의 목소리는 그러나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백수십년을 살아온 이 거마에게도 육성에 이른 금강복마수는 충분 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담사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담담히 말했다. {담옥!} {담... 옥이라고!} 적용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네놈은 소림의 제자냐?} 문득 담사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스쳤다. 자신을 비웃는 듯한 아니 자조하는 듯한 기이한 미소였다. {노인장은 내가 소림의 제자로 보이시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무언가 억압된 느낌을 주었다. 적용군은 담사의 기이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의 태도로 보아 소림의 제자는 아닌 것 같은데.... 하긴 이놈 이 법공의 제자라면 비겁하게 암수를 쓸리야 없지. 헌데 이놈의 금 강복마수는 또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그는 내심 머리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와 동시 일순 가슴에서 일어나는 통증에 침음성을 삼켰다. (으음.... 내상이 가볍지는 않군.) 그는 자신의 기맥이 몇군데 끊어진 사실을 감지하고 다시 한 번 금강복마수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전율했다. 헌데 그가 내상의 고통으로 정신이 분산되는 찰라였다. 쉬잇! 돌연 눈앞이 희끗한다 싶자 어느 새 담사의 장(掌)과 검이 벼락 같이 자신의 미간과 가슴을 쏘아오지 않는가? 남의 위기를 틈타 급습하는 이런 수법은 결코 정파백도의 무사 가 취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담사는 개의치 않고 또 다시 암습 을 가했으며, 그 공격의 빠르기는 전광석화같고 신랄하기는 독사의 공격처럼 치명적이었다. 적용군은 예상못한 이 갑작스런 공세에 이를 악물었다. {이놈... 또다시 암습을 하다니....} 내심 분통이 치밀어 올랐으나 자신의 생명이 먼저였다. 적용군은 재빨리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담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검을 갑자기 암기처럼 내던 지며 그 뒤를 따라 좌수를 기묘하게 뻗어갔다. 적용군은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상대가 검을 암기삼아 던져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무릇 무사된 자가 병기를 버리는 것은 죽음을 각오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담사는 아무 거리낌 없이 검을 그저 암기 삼아 던진 것이다. {헉!} 이 예측을 불허하는 애송이의 공격에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 장 적용군도 헛바람 소리를 토하며 재빨리 철판교의 신법으로 허 리를 굽혔다. 스악! 담사가 던진 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갓다. 하지만 위기를 모면한 적용군은 안도의 숨을 몰아쉴 여유도 없 었다. 꽈르릉! 이미 금빛으로 물든 담사의 좌수가 은은한 우뢰성을 일으키며 바로 앞으로 들이닦치고 있었던 것이다. 복마금강수로 내친 그의 이 일장에는 땅을 꺼트리고 바다를 뒤엎어버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암경이 실려있었다. 대경실색한 적용군은 재빨리 몸을 바닥에 굴렸다. 하오문의 무리 들조차 창피하다고 쓰지 않는 뇌려타곤의 수치스런 신범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임기웅변이 비록 재빨랐지만 담사의 좌수는 더욱 빨랐다. 그는 내려치던 왼손을 벼락같이 휘돌려 옆으로 쓸어 내었다. [컥!] 바닥에 굴렸던 몸을 일으키려던 적용군은 갑자기 어깨에 극렬한 고통이 닥치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을 토했다. 금강복마수의 암경이 그의 어개를 쓸어버린 것이 다. 그러나 적용군은 어쨌든 희대의 마두다. 그는 엄청난 고통에 정 신이 아찔한 그 순간에도 반사적으로 전신에 호신강기를 유포시키 면서 좌수를 벼락같이 위로 떨쳤다. 마침 그때 담사는 적용군의 몸 위를 스치던 때라 여지없이 그 일장을 넓적다리에 맞고 말았다. 적용군의 일장을 맞은 다리로부터 부러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오자 담사는 이를 악물었다. 2 꽈르릉! 그는 비연천림(飛燕穿林)의 신법으로 재빨리 땅바닥에 구르듯이 스치면서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는 적용군이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쌍수를 후려갈겼다. [헉!] 적용군은 악귀처럼 덮쳐오는 담사의 이같은 공세에 혼비백산하 여 또다시 몸을 땅에 굴리며 멀찌감치 피했다. 담사는 자신의 두 번째 공세마저 실패하자 부상을 입은 다리의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내려섰다. 주위에서 어울려 싸우던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무서운 결전에 멀찌감치 물러서서 넋을 잃고 있었다. 그들중 누가 상상이라도 했던가? 이 무명의 청년이 철불 혜천대 사조차도 몇초밖에 감당하지 못한 무서운 거마 적용군을 이토록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부칠 줄을...! 특히 장내에 있는 여협들의 눈은 놀라움과 선망으로 휘둥그래졌 다. 담사가 보인 신위는 그녀들이 감히 상상도 못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미 담사에게 몸을 허락한 뇌옥연은 놀라움과 함게 뿌듯 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저 신룡(神龍)같고 맹호(猛虎)같은 신 위를 보이는 사내가 자신의 지아비인 것이다. [으으으!] 적용군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어처구니 없다는 눈빛으로 담사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이 야수같은 애송이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성취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담사는 두 눈에서 시퍼런 광채를 띠며 적용군을 주시했다. 무표 정한 그의 얼굴에서는 그러나 이글거리는 살기와 투혼이 느껴져 적용군으로 하여금 절로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다. (으음... 이놈은 실로 야수와 같은 놈이군.) 담사의 흉폭한 기세에 적용군은 등골에 식은 땀이 솟았다. 그는 재빨리 장내의 상황을 둘러보면서, (내가 중상을 입은데다 길게 시간을 끌면 좋을 게 없다. 오늘은 이만 철수를 하고 후일을 기약해야 되겠군.) 내심 결단을 내렸다. 돌연 그의 입에서 우뢰와 같은 노성이 터졌다. {모두 멈추어라!} 한 순간 여기저기서 벌어지던 혈전이 갑자기 멈추고 장내는 고 요해졌다. 담사는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의 칼날 같은 눈초리는 오직 적용군의 일거일동을 노려보고 있었 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굶주린 야수처럼....! 헌데 바로 그때였다. 쉬잇! 돌연 담사와 제일 가까운 지점에 있던 모용천엽이 소리없이 섭 선으로 그의 등을 찔러갔다. {천엽야! 안된다!} 그것을 본 적용군은 갑자기 비명처럼 외치며 벼락같이 담사를 향해 쌍수를 뻗었다. 모용천엽은 자신의 섭선이 담사의 명문혈(命門穴)에 닿으려 하자 내심 득의만면했다. (별 것도 아닌 놈이 태상노조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그러나 다음순간 입가에 미소마저 감돌던 모용천엽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스읏! 하나의 손이 마치 환상처럼 떠올라 막 담사의 명문혈을 찌르려 던 그의 섭선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모용천엽이 그 손이 마치 여자의 손처럼 손가락이 매우 길고 섬 세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의 섭선은 박살이 나고 가슴에 무서운 고 통이 일어났다. {으악!} {크흑!} 비명이 연이어 터지고 세 사람이 순간적으로 갈라졌다. 모용천엽은 삼 장이나 날아가다가 재빨리 몸을 날려 그를 받아 안은 혁사군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분수 같은 선혈이 쏟아지고 가슴이 피로 물 들은 채 안색이 희다못해 시퍼헐게 변했다. 적용군 역시 휘청거리며 물러서다가 급히 모용천엽에게로 가서 그의 상세를 살폈다. {생명이 위험하다.} 생각은 느리고 동작은 빨랐다. 혁사군에게서 모용천엽을 건네받 으며 그는 다급히 외쳤다. {철수한다!} 한 소리 폭갈과 동시에 그의 신형은 번갯불처럼 쏘아갔다. 담장 에 내렸다 싶자 어느 새 그의 신형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마교의 인물들도 재빨리 원형을 그리며 천천히 물러선다 싶자 신속하게 사라져갔다. 장내의 중인들은 그들을 막고 싶었지만 하나같이 상처를 입었는 지라 그냥 멀건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몇 쌍의 눈빛만은 마교가 사라지든 말든 거들떠 보지도 않고 경악게 찬 눈으로 담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무표정이 서 있던 담사는 마교의 무 리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문득 가늘게 몸을 떨었다. {우욱!} 다음순간 돌연 그는 신음을 흘리며 울컥 피를 토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도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먼저 적용군의 일장을 다리에 맞앗고, 그 후 모용천엽을 구하려 고 적용군이 사력을 다해 발휘한 일격에 내부가 진탕되었던 것이 다. {담상공!} {소형제!} 담사가 피를 토하며 휘청이자 조일과 뇌옥연이 급히 담사에게 달려왔다. 두 사람의 외침에는 무한한 관심과 격동이 담겨 있었다. 헌데 담사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리며 싸늘히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그의 목소리는 스산하면서도 음침했다. 조일과 뇌옥연은 굳어진 듯 멈추어 섰다. 담사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빛바랜 장삼은 피로 젖어 스산했고 일그러진 그의 얼굴과 입가에 흘러내리는 그의 몰골은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3 상처입은 야수! 그렇다. 그는 한 마리의 상처입은 이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조일은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담사의 기세에 나직이 탄 식을 흘릴 뿐이었다. 누구보다도 그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자신이 아닌가? {그 동안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불신하고 증오 하는 마음은 여전하군.} 조일은 내심 침울해졌다. 뇌옥연은 전신을 떨며 두 눈에 가득 눈물을 글썽거렸다. {담상공... 상처가 심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려나왔다. {담상공.... 옥연은 이미 당신의 것이예요. 상공이 누구든 옥연은 영원히 곁에 있을 거예요.} 담사의 입에서 문득 음침한 괴소가 터져나왔다. {흐흐흐... 좋아, 영원히 나의 것이란 말이지. 내가 악마라 할지라 도....}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주르르 입가에서 피를 흘렸다. {소형제, 자네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네. 누가 무어라고 해도 소 형제는 좋은 사람이네.} 조일은 침중히 말하자, {큿큿큿...} 담사는 마치 이리가 울부짖는 듯 괴소를 터뜨렸다. 한동안 괴소를 터뜨리던 그는 느릿하게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초췌한 표정의 혜천대사, 뇌승, 황보가혜 등 모두 상처를 입은데 다 피곤한 모습이었으나 그들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감격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혜천대사가 정중히 합장 배례를 하며 말했다. {담시주의 도움에 혜천은 중인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리오. 아미타 불....} 그러자 중인들도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문득 담사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가 언제 남에게 이같은 진심이 담긴 감사와 경의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야릇한 감회와함께 견디기 힘든 자조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한 대 자신을 짐승처럼 사냥하려던 자들이 지금 이 순간 공경을 다해 인사를 하고 잇는 것이다. 파앗! 다음순간 그의 신형이 갑자기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그리고 치솟았다 싶자 이미 허공에서 곡선을 그리며 화살처럼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담상공!} {소형제, 같이 가세!} 뇌옥연과 조일이 다급히 외치며 몸을 날렸다. 중인들은 갑자기 담사가 사라지자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장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혜천대사는 한동안 막연한 시선으로 담사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 했다. {아미타불.... 담시주의 무예는 분명 본문의 비전수법인 금강복마 수였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불현듯 그의 뇌리를 스치는 법공선사와 담사의 얼굴, 문득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미타불....} 혜천대사는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피비린내 나는 장내에 혜천대 사의 낭랑한 불호성이 퍼져나갔다. 태행산(太行山)-! 태행산의 이름모를 계곡에 드넓게 펼쳐진 푸른 초지 가운데에는 조그만 연못이 미풍에 넘실거리고 있고, 그 연못 옆으로 세원진 정 자 주위에는 이름모를 기화이초가 활짝 피어 있었다. 아마 선경(仙境)이 있다면 이런 곳이었다. 그리고 여인, 이 세상의 미란 미(美)를 한몸에 갖춘 듯한 아름다 운 미녀가 정자위에 그림같이 서 있었다. 적용화련(狄容華蓮)-! 그녀는 바로 적용화련이었다. 담사에게 겁탈당하고 그 한 번의 행위로 인해 아이까지 갖게 되었던 비운의 여인...! 일년이 지난 지금 어딘가 수척해 보이는 그녀는 전과는 달리 약 간 마른 듯하면서도 더욱 완숙한 기품의 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흑요석처럼 맑디맑은 눈망울은 아련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것 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것 같은 그늘이었다. 한때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동추평에게 구함져서 철불 혜천대사 와 함께 지내던 그녀는 마교 교주 연운설(燕雲雪)에 의해 만삭(滿 朔)의 몸으로 이곳에 왔다. 그후 한달 만에 이곳에서 해산(解産)을 한 그녀는 아기를 낳는 그 처절한 고통과 함께 잊고 싶었던 모든 기억을 되찾게 되었다. 기억이 돌아오자 그녀는 담사에게 겁탈당한 일이 떠올라 몇 번 인가 죽음을 결심했었다. 하지만 이제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보 는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모정(母情)은 세상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감정인 것이다. 비록 원 하지 않은 생명이긴 하지만 자신의 핏줄인 아기를 보는 순간 그녀 는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느끼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아이와 함께 이곳에 칩거한 것이다. 지난 일 년 간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만나 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들어온 이후 그녀의 생활은 오직 외로움과 번민 으로 점철되어 왔으나 사랑하는 아기와 함께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헌데 며칠 전 강호로 나갔다가 돌아온 자신의 조부 적용군(狄容 君)으로부터 담옥(潭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의 이야기를 듣는 순 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바로 담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로부터 그녀는 갈증과 증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도 똑같은 계집이야! 눈앞을 스치는 담사의 조소어린 표정과 조롱섞인 목소리...! 그 무자비한 겁탈...! {....!} 적용화련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그녀는 아무리 담사를 증오하려고 했으나 어느 새 자신도 모르 게 증오보다는 그를 향한 그리움에 애를 타는 자신을 느끼고 질겁 을 하곤 했다. 자신의 이같은 마음이 못내 저주스러운 적용화련이 었다. 하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증오보다는 외로움과 그리움만이 더해만 갔다. 특히 자신이 낳은 아기를 볼 때마다 더욱 담사의 모습이 그리워 지는 것이다. 비록 강압에 의해 몸을 허용했지만 이제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4 {화련, 오랜만이구료.} 문득 상념에 잠긴 적용화련의 등 뒤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 다. 그녀는 흠칫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등 뒤에는 언제인가 한명의 청년이 서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강인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전신에 부드러운 기 운을 흘리는 청년, 모용천위(慕容天威)-! 그렇다. 그는 바로 일 년 전 마교의 성지가 잇는 성숙해(星宿海) 로 떠났던 모용천위였다. 그의 모습은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적용화련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부드러움과 따뜻한 애정이 흐르고 있었다. {화련,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은 들었소.} 모용천위의 말은 그럴 수 없이 부드러웠다. 순간, 적용화련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천위오빠... 사부님을 아직 만나지 않으셨나요?} 모용천위는 흠칫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님은.... 아직 만나지 못했소. 성숙해에서 지금 막 도착했으 니까. 그것보다도 아이를 보여주지 않겠소?} 적용화련은 일순 눈물을 글썽이면서, {천위오빠. 저는 기억을 되찾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모두 사실을 알고 있어요.} 모용천위는 순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원래 적용화련이 겁탈당한 일은 모용천위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가 기억을 상실하고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자 그는 뱃 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공표했던 것이다. 모용천위는 한 순간 안색이 변했으나 곧 태연한 표정으로 담담 히 말했다. {화련, 누가 무어라 해도 그 아이는 나의 아들이요.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변할 수 없소.} {...!} {만약... 이 일을 그 누구라도 부정한다면 나는 그가 설사 황제라 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쇠를 자르는 듯 단호한 말에 적용화련은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안돼요.... 그것은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오빠의 마음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어요.} 모용천위는 눈빛이 무섭게 흔들렸다. {화련, 나는 절대 포기할 수 없소. 설혹 내 생명을 잃는다해도 당신을 포기할 수는 없소.} 적용화련은 세차게 도리질했다. {오빠... 그럴 수는 없어요.} 말과 동시에 그녀는 몸을 돌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순간, 모용천위는 그녀를 쫓아가려고 한 걸음 내디뎠지만 다음순 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며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화련,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돌리면서, {화련, 나는 결코 그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기다릴 것이오. 당신이 나의 품 안에 돌아올 때까지 그것이 십 년이든 이 십 년이든 나는 기다릴 것이오.} 나직이 독백하는 그의 목소리는 절대 굽힐 수 없는 신념이 서려 있었다. 어둠이 내렸다. 한 줄기 삭풍이 대지를 할퀴고 지나치자 산중은 더욱 스산해졌 다. 낙양 서쪽에 위치한 숲 속에는 황량한 폐묘(廢廟)가 한채 서있었 다. 담장은 산산히 부서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잡초가 무성히 돋 아 있었다. 석가래는 불에 그을려서인지 새까맣게 번들거리고 문은 반이나 부서져 삭풍에 흔들거렸다. 토지신의 목상은 목이 부러진 채 바닥에 널려 있고 한쪽 구석에 는 짚단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타탁_____ 타! 나무가 불꽃을 튀기며 타올랐다. 담사는 등을 벽에 기댄 채 무심한 눈길로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 다. 피에 젖은 장삼은 여기저기 찢어져 너덜거리고 그의 안색은 백 지장같이 창백해 보였다. 금화장을 나온 지 벌써 세 시진이 흘렀다. (빌어먹을! 내가 왜 금화장에서 도망치듯 나와 버렸지? 내가 왜 죄인처럼...)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십칠년의 일생이 피와 어둠 속에서 비정과 고독으로 철검되어 온 담사였다. 그는 남을 증오하고 음모와 세상의 비정함에 익숙해 있지만 남 을 사랑한다거나 도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 었다. 담사에게는 금전과 힘이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었고 그 무엇보 다도 그것을 숭상해 왔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살아온 인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로 일순간이었으나 뇌옥연의 따뜻한 애정과 사람 들의 감격에 찬 시선은 그를 당혹하게 만들고 거부감을 느끼게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비록 그는 잔혹한 자객이었고 비정한 자임에 틀림없으나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인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담사는 망연한 눈으로 불꽃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 5 문득 넓적다리에서 통증이 일어나자 이를 악물었다. (제길 상처가 보통이 아니군. 최소한 한달을 치료해야 되겠는 데...) 내심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흐흐.... 나같은 놈에게 무슨 인정이 있다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남을 도와 주다니 나도 미친 놈이지.) 담사는 가만히 발을 쭉 뻗었다. 한결 통증이 가시자 문득 허기를 느끼며 고소를 지었다. 돌연 이때 담사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와 동시 벌떡 일어서면서 재빨리 문 옆에 붙었다. 그의 동작은 마치 고양이처럼 날렵하면서도 일점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로 보아 여자인 것 같은데... 한 명 뿐인 것 같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순간 담사는 재빨리 금나수법으로들어온 사람의 백문을 잡으며 좌수로 목을 움켜쥐었다. {아악!} 뾰족한 비명이 터졌다. 담사가 재빨리 목줄기를 움켜쥐며 힘을 주자 여인은 숨이 막히 는지 발버둥을 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 이 말에 들어온 여인은 잠잠해졌다. 담사는 그녀가 반항을 포기하자 여인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 낭자는...?} 그는 한 순간 망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우선 이 손을 놓아 주세요!} 얼굴을 붉히며 외치는 여인은 바로 금화장주 금반산의 손녀딸인 금산혜(金珊慧)였다. 그녀는 담사의 품에 안긴 듯이 껴안긴 상태인지라 퀴퀴한 땀내 음과 사내의 채취를 느끼자 몹시도 당황한 듯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담사의 망연했던 표정도 잠시였고 그의 눈빛은 이내 음 침하게 변했다. 목을 잡았던 손은 풀었지만 그대로 맥문을 잡은 채 냉랭히 물었다. {이곳을 어떻게 왔지?} 대뜸 하대를 하는 담사였다. 이 무례에 금산혜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뜨고 담사를 노려 보았 다. 하지만 그의 무표정한 안색에 시선이 닿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 게 눈을 내리깔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담공자...를 찾으려고...약을 가지고 왔어요.} 담사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손을 놓고는 말없이 불 옆에 털 썩 주저앉았다. 금산혜는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 정시켰다. 담사는 그녀를 거들뗘 보지도 않고 벽에 등을 기대어 지그시 눈 을 감았다. 흔들리는 불빛이 그의 옆 얼굴을 비치며 음영을 드리웠 다. 그것은 우수요, 고독이 깃든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창백한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입가에 맺힌 핏자국, 황량한 폐묘와 더불어 그의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숨막힐 듯한 고독감을 풍기고 있었다. 여인이 가진 모성의 본능이랄까? 문득 금산혜는 그의 머리를 가 슴에 안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당신은 강하고 차가운 사내지만 마음은 춥고 외로운 사람이예 요. 산혜는 당신을 위해 주고 싶어요.) 금산혜는 가만히 걸음을 옮겨 담사에게 다가섰다. 이어 품 속에 서 조그만 옥병을 꺼내어 담사의 눈 앞에 내밀이었다. {이것은 만년삼왕(萬年蔘王)과 천년하수오(千年河首烏)를 합해 만든 보천영액(補天靈液)이예요. 내상에는 신통한 효과가 있으니 어서 드세요!} 담사는 놀라운 눈빛으로 눈을 떴다. 만년삼왕만해도 세상에서 보기드문 영약인데 거기에다 천년하수 오라니...? 금산혜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무림인이라면 꿈에서도 갈구하는 영약(靈藥)이 아닌가? 담사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옥병을 빼앗듯이 낚아채 뚜껑을 열 었다. 순간 한 줄기 청량한 한기가 폐묘를 덮었다. 담사는 향기만 말아도 들끊는 기혈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진품이군. 이것을 먹는다면 내상은 그만 두고라도 최소한 오십 년의 공력은 더 얻을 수가 있겠어.)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금산혜를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귀한 영약을 줄려고 했지?} 그의 목소리는 냉막했다. 금산혜는 문득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담공자님은 저희들을 도와 주시다가 상처를 입었으니 약을 드 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예요.} 담사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한 동안 냉막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옥병을 입 에 대고 들이 마셨다. 향기로운 액체가 목 안을 타고 넘어가자 가 슴이 탁 트인 듯이 시원해졌다. 담사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하고 운기요상을 시작했다. 단전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 오르더니 사지백해로 퍼지면서 전신을 일주 천하자 다시 임독양맥을 지나 단전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 금산혜는 맑은 눈빛으로 담사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누군가를 기다려 왔어요. 그 사람이 누군인 가는 확실치 않았으나 당신을 본 순간 나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확신했어요. 습관처럼 되어 버린 당신의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세상을 증오하는 듯한 눈빛 등 당신은 산혜의 마음을 모조리 앗아간 것이예요.) 그녀는 살며시 담사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홀린 듯한 시선으로 그를보면서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것이예요. 산혜는 어릴 때부터 내가 좋아 하는 것은 절대 놓쳐 본 적이 없어요.) 야무진 꿈을 꾸는 그녀는 뜨거운 눈길로 담사를 응시했다. 제 36 장 뜨거운 女人들 1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우우! 문득 어디선가 은은한 산짐승이 부르짖는 괴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흠칫 눈을 뜬 담사의 눈빛이 문득 가늘게 떨렸다. 그의 눈 앞에 금산혜가 팔베개를 하고 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 듯한 이목구비에 백옥 같은 살결, 감겨진 두 눈에 속눈썹이 길게 나와 있다. 그리고 오똑한 코와 그 아래 붉디붉은 조그만 입 술....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금산혜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는 담사의 눈동자에 일순 욕정의 불길이 피 어올랐다. (정말 아름답군. 전날 적용화련이라는 여자에 못지 않은 미모다.) 그는 입 안에 가득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주천강(朱天岡)이라고 했지. 그자와 이 여자의 모습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어. 거부의 딸과 왕손이다.) 담사는 처음 금산혜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낙양왕부의 후계자 주 천강과 함께였다. 선남선녀같은 두 남녀의 화려하고 행복했던 모습 을 상기하면서 담사의 가슴 속에 깊이 잠들어있던 과거의 야수같 은 본능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흐흐! 이 여자는 나와 다른 별종인간이다. 나로서는 꿈꿀 수 조 차 없는 고귀한 인간이단 말이지. 하나 여자는 다 똑같은 음탕한 동물이야. 그래 다 똑 같은 인간이란 말이야.] 짐승처럼 키득이는 담사의 머리가 천천히 숙여졌다. 가늘고 긴 손가락은 느릿하게 금산혜의 가슴을 움켜 잡았다. {무... 무슨 짓을...!} 가슴에 느껴지는 압박감에 퍼뜩 잠이 깬 금산혜의 얼굴이 두려 움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담사의 얼굴이 거칠 게 덮어왔다. 담사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치자 금산혜는 한 순간 맹열히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담사는 무서운 힘으로 그녀를 누르며 교묘히 두 팔을 뒤 로 제껴 옴죽달쭉도 못하게 만들었다. {음....} 두팔이 뒤로 돌려져 제압된 금산혜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담사의 입술은 집요하면서도 뜨거웠다. 담사의 혀는 온통 금산혜의 입 안을 헤집었다. 그러자 금산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에 힘이 쭉 빠지고 정신이 몽롱 해졌다. 그의 혀는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교묘히 그녀의 중추신경을 자 극해 왔다. 귓부리를 스친다 싶자 목덜미를 타고 어느 새 저고리가 풀어헤쳐져 들어난 봉곳이 드러난 젖무덤에 멈추었다. 눈부시게 뽀얀 살결은 눈을 부시게 하고 봉곳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은 수치감과 놀람으로 인해 작은 유실이 경력능 일으켰다. {음.... 안돼요. 담공자님! 제발... 아.... 아악!} 금산혜는 문득 담사의 거칠은 손이 치마를 들추고 아랫도리로 깊숙이 파고들자 비명을 질렀다. 천하제일부호의 금지옥엽인 그녀 가 언제 이런 무례한 짓을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하지만 담사의 손은 거침없고 교묘하게 그녀의 은밀한 곳에 침 입하여 유린했다. 우유가 응결된 듯 보드랍고 매끄러운 허벅지 속 살을 주무르던 담사의 손은 곧 그 허벅지가 모이는 곳으로 파고들 었다. [하악! 안돼요!] 금산혜는 담사의 손이 자신의 속곳을 들추고 은밀한 계곡에 침 입하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 무성하다고는 할 수 없는 보드라운 방초의 둔덕을 더듬고 내려간 담사의 손가락이 문득 보 드랍고도 깊은 슾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금산혜는 사내의 손가락이 자신의 수치스럽고도 소중한 틈 사이 로 밀려들어가자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평생 오직 한 사람에게 만 허용해야할 그곳에 지금 짐승같은 사내의 손가락이 파고들어 헤집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충격과 부끄러움에 연신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은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담사의 손가락은 비좁고 려린 살틈에서 교묘하게 움직였다. 오돌 돌한 작은 돌기를 누르고 쓰다듬는가하면 점막으로 이루어진 비좁 은 동굴안으로 두세개가 한꺼번에 들어가 움직여대기도 했다. 그 부끄럽고도 생경한 담사의 행위에 금산혜는 숨이 헉헉 막혔 다. 분명 수치스럽기 이를데 없는 짓을 당하고 있지만 기이하게도 담사의 손가락이 교묘하게 자극을 해댈 때마다 금산혜는 이제껏 맛보지 못한 야릇한 희열에 전신을 떨었다. 삽시에 그녀의 여린 점막 사이에서 뜨거운 이슬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와함께 악문 그녀의 입술 사이로는 지슴같은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금산혜가 혼미경을 헤메고 있는 사이 담사의 다른 손에 의해 그 녀의 치마가 벗겨지고 고의가 달아났다. 그러자 이제껏 단 한 번도 타인의 눈에 들어내 본적이 없는 금산혜의 하체가 적나라하게 들 어나보였다. 한줌 밖에 안되는 허리에서 흘러내린 둔부의 선은 갑자기 굵어 지며 동그랗게 호선을 이루다가 두다리에 이르러 매끈하게 흘러내 렸다. 밝은 햇살 아래 들어나 본적이 없는 그녀의 속살 피부는 매끄럽 다 못해 손이라도 닿으면 묻어날 듯 부드러웠다. 도독히 살이 오른 둔덕과 그 아래의 깊은 계곡일대에는 너무도 가늘고 보드라운 방초가 보송보송 덮여있었다. 금산혜의 방초림은 별로 무성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나치게 보드 라워 반투명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발육상태가 좋은 그녀의 육 체는 아직 덜 성숙한 소녀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여리고 그나마 별로 무성하지 않은 수림이 가늘게 떨리는 사이 로 분홍빛을 띈 작고 정갈한 옹달샘이 촉촉히 젖은채 수줍게 경련 을 일으키고 있었다. 2 담사는 금산혜의 그 정갈하고 청순한 옹달샘을 목도하자 갑자기 목이 타는 듯 갈증을 느꼈다. 그는 보드랍고 탄력넘치는 금산혜의 허벅지를 좌우로 개방하고 는 그 가운데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분홍빛의 옹달샘으로 얼굴을 가져가 파헤쳤다. 금산혜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속살을 외간 사내 에게 내보인 것도 부족해서 이제 그곳을 사내의 입과 혀가 뜨겁게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거칠게 헤집고 흡입해대는 사내의 입술 과 혀, 가장 예민한 곳에 가해지는 가장 강도높은 자극에 금산혜는 주체할 수 없이 경련하며 몸을 비틀었다. 유린을 당하고 있는 아랫도리가 제멋대로 퍼득이고 요동치며 엄 청난 충격에 몸부림쳤다. 견디기 힘든 강렬한 자극에 달아나고 싶었지만 사내의 두 손은 그녀의 허벅지를 찍어눌러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 는 일이라고는 발정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담사의 머리를 움켜쥐 고 흔드는 것 뿐이었다. 눈 앞이 흐릿해지고 연신 선명한 불꽃이 명멸했다. 피가끓어오르 며 전신의 모세혈관이 짜릿해져서 그녀는 음란한 창부같이 신음을 흘렸다. 처녀의 몸이면서도 담사의 가혹한 희롱에 금산혜는 삽시에 몇번 인가 까무라쳤다가 다시 깨어나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금산혜는 담사의 머리가 자신의 하 체에서 떨어져 다시 위로 올라와 입술을 덮는 것을 느꼈다. 담사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탐하는 순간 금산혜는 뜨거운 교 성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섬섬옥수로 담사의 목을 끌어안았다. 열열히.... 그리고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 의 보드라운 허벅지 안쪽에 무언가 뜨겁게 맥동하는 단단한 물체 가 닿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지만 담사의 입맞춤이 주는 황홀한 쾌감에 정신이 팔린 금산혜는 저항의 몸짓도 보이지 않았 다. 오히려 여자로서의 본능에 눈을 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하체 를 꿈틀거려 그 흉칙한 침입자를 환영하는 몸짓을 보였다. [악!] 하지만 다음순간 몽롱하게 들떠 있던 금산혜의 눈이 찢어질 듯 이 커졌다. 소녀의 그것처럼 청순하고 채 여물지 않은 옹달샘으로 뜨겁고 단단한 이물질이 천천히 그러나 거침없이 삽입돤 것이다. 한치의 틈도 없이 가득 메우고 진입하는 사내의 그 엄청난 순양 지물에 소녀의 육체는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생살이 찢기는 엄청난 고통으로 숨을 멈추며 담사에게 매달렸다. 개구리다리처럼 벌어진 그녀의 미끈한 두 다리는 담사의 육중한 하체에 깔려 바들바들 떨고 있엇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은 아랑곳 않고 소녀의 여린 살을 무자비하 게 뚫고 들어오는 사내의 실체는 조금도 멈춤이 없이 깊게 파고 들었다. 금산혜는 하체의 중심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과 알지못한 슬픔에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두 줄기 눈물이 감긴 눈가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마침내 끝이 없을 듯하던 진입도 끝났다. 금산혜는 담사의 실체 가 자신의 몸안에서 뱀처럼 꿈틀대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꼈 다. 그의 장대한 실체는 흡사 그녀의 내장을 다 뚫고 올라와 목구 멍까지 치미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입이 끝났다고 고통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몸 에 가해지는 생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은 갈수록 더심해졌다. 사내 가 출입을 시작한 것이다. 담사의 숨결은 거칠어져 갔고 그에 따라 금산혜의 하체를 출입 하는 담사의 행위도 점점 더 격렬해져갔다. 금산혜는 자신의 몸이 산산히 부서진다고 느꼈다. 담사의 강건한 하체가 세차게 내리꽂힐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무쇠절구공이 절구질을 당하는 절구통이 된 기분이었다. 담사의 강인한 실체가 금산혜의 비좁은 옹달샘을 거칠게 출입할 때마다 점점 혈화(血花)가 바닥에 깔린 금산혜의 치마 위에 피어올 랏다. 광란의 파도가 눈앞을 덮쳐오고 이내 멀어졌다 싶으면 다시 노 도처럼 밀려왔다. 파도는 점점 거세지면서 그녀는 전신을 파도에 띄웠다. 폭풍의 바다, 광란의 파도는 끊임없이 몰아쳐 왔다. 사내의 움직임은 끝이 없었다. 몸속 깊숙이 뜨거운 분출이 느껴 져서 이제 끝났나보다 싶으면 여전히 그녀의 몸안 에 수용되어있 던 담사의 실체는 다시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쉬어 숨을 고른 담사는 또다시 그녀의 몸위에서 질 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과는 사는 세계가 너무도 다른, 어쩌면 장차 황족의 귀비가 될지도 모를 금산혜였다. 그녀의 신분은 설령 그녀가 장차 이 나라 의 황후(皇后)가 되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금산혜의 처녀를 창녀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이 차지했다는 사실이 그를 극도로 흥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고귀한 신분 의 소녀를 지치지 않고 유린하여 욕심을 채웟다. 그리고 어느 새 금산혜 자신도 그에 못지않게 전신을 뒤틀며 열 락의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파과의 고통따위는 그 격렬하고도 생경한 쾌감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은 것이었다. 가녀린 그녀의 육체는 끝이 없는 열락의 폭풍에 한없이 빠져들 고 있었다. 3 금화장의 후원에 자리한 객사(客舍), 비천신괴 조일은 침울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담소형제는 분명 십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인데... 금화장의 수 하들이 그를 찾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당분간 기다려 볼 수 밖 에...) 그때 문득 방문이 열리며 한 미녀가 들어왔다. {노선배님...} 그 미녀는 초췌한 표정의 뇌옥연이었다. 조일은 순간적으로 표정을 부드럽게 고치며 물었다. {그래 그를 찾았나?} 뇌옥연은 서글픈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는가 봐요.} 그녀의 말에 조일은 침통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고 잔에 넘치게 따랐다. {제길, 이 밤 중에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단숨에 술잔을 입 안에 들이 부었다. 뇌옥연은 우울한 눈길로 그런 조일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 노선배님, 그 분의 내력을 저에게 말해 주실 수 없나요?} 순간 조일은 흠칫했다. {그것은....글쎄....!}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뇌옥연의 시선을 피했다. {미안하지만.... 아직 그의 내력을 밝힐 수는 없네. 이해해주시게 나!} 그러자 뇌옥연이 그의 말을 가로 채듯 말했다. {노선배님, 그 분은... 저의 지아비예요.} 하지만 그 말을 한 직후 그녀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푹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담상공이... 설사 천하의 대죄인이라도 지금은 나의 낭군이예 요.}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애잔한 눈빛으로 조일을 바라보았다. {노선배님, 그러니 제발.... 그 분의 내력을 알려 주세요.} 조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것은 예전에 전연 그에게서 볼 수 없는 심각하고 신중한 표정이었다. 돌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서성거렸 다. {...!} 그는 일순 돌아서서 뇌옥연을 쳐다보며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그를 진정 좋아하는가?} 뇌옥연은 눈을 빛내며 거침없이 말했다. {그래요. 이미 그 분과는 절대 헤어질 수 없는 관계까지 맺었어 요. 저는 이제 그 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요.} 조일은 그녀의 말에 쓰디쓴 고소를 지었다. (제길, 요사이 아이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니까.) 너무나 노골적인 어조에 그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으나 차분히 말했다. {뇌낭자는 진정 그를 따르고 싶은가?} 뇌옥연은 확고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분은 이미 저의 낭군인 걸요.} 조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직이 탄식을 하면서 자리에 앉았 다. {...!} 조일은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뇌옥연은 두 눈을 빛내며 말없이 그런 그를 응시했다. (하긴 이미 생쌀이 익어 밥이 되었으니... 이 아이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당연히 소형제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겠지.) 조일은 뇌옥연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문득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 며 말했다. {뇌낭자, 평생을 두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 이야기를 해주지. 그러나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야 해.} 뇌옥연이 야무지게 대답했다. {네. 절대로 노선배님의 말씀은 비밀을 지키겠어요.} 조일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담소형제는... 작년에 연대강을 죽인 바로 그 자객이야. 본래 이 름은 담사라고 하지.} [!] 뇌옥연은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갑자기 뒷머리에 쇠로 된 둔기에 맞은 듯 그녀는 한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연대강은 뇌옥연 자신의 약혼자였지 않 는가? 헌데 그 연대강을 죽인 자객에게 자신의 정조를 바치고 말 았으니...!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일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바진 뇌옥연을 보며 씁쓸한 표정 으로 고개를 설레 저었다. (괜히 말을 한 것 같군.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은지도 모르는 일인데.) 내심 후회를 했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 아닌가? 헌데 뇌옥연의 표정이 점점 평온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 물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 분의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싶어요.} 비록 목소리는 무거움을 느끼게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다. (호오! 생각보다 의지가 강하군.) 조일은 내심 감탄을 하며 담담히 말했다. {노부는... 석년에 법공(法空)대사님에게 구명의 은혜를 입은 적 이 있었네. 그 때 느낀 바가 많아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었었지. 헌 데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갑자기 법공대선사님의 명에 의해 담소 형제에 관해 모든 것을 조사하고 그를 감시하게 되었네.} 이어 그는 자신이 알아낸 담사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장한 이후의 행적까지 자세히 늘어놓았다. 한동안 긴 이야기를 끝낸 조일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비록 비정한 인간이 되었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 지.} 그는 감회서린 눈길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뇌옥연은 문득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담상공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지금은 저의 사람이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세상이 그 분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 분은 나의 사람이예요.} 자신에게 말하듯이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 조일은 애처로운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위로 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질식할 듯한 침묵이 흘렀다. 문득, 뇌옥연은 가만히 일어서 조일에게 날아갈 듯이 전율했다. {노선배님, 그 분을 도와 주셔서 고마와요.} 조일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쓴웃음을 지었다. (담사! 네놈은 정말 복도 많은 놈이다. 이렇게 의지견정한 여자 를 얻게 되었으니...!) 조일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담사를 떠올렸다. 그 담사가 지금 뇌옥 연이 아닌 다른 소녀를 유린하고 있음은 꿈에도 모른채...! 4 아침의 따뜻한 햇살이 대지를 포근히 감쌌다. 금산혜는 서늘한 추위에 눈을 떴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신이 금화장의 아늑한 침실에 누워있다고 생 각했다. 하지만 눈을 뜬 시야가 점점 밝아오면서 빛바랜 천정과 부 서진 창문 등 스산한 풍경이 들어오자 비로소 이곳이 어딘가를 깨 닫게 되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악!} 그 순간 그녀는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다시 풀썩 바닥에 주저앉 고 말았다. 하반신에서 일어나는 얼얼한 통증과 야릇한 이질감이 어젯밤에 있엇던 격렬했던 정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담사의 잔인한 행위와 그에 호응하여 자신이 보였던 음 란한 치태가 생각나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실내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어젯밤의 일을 말해 주는 듯 자신의 옷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고 짚단 위에는 점점이 핏자국이 나 있었다. {담상공!} 그녀는 갑자기 부르짖으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의 처녀를 앗 아간, 그래서 이제는 결코 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금산혜가 한동안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담사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농락당한 뒤 버려진 것이다! 금산혜는 부인할 수 없는 이 무참한 현실에 눈물을 글썽이며 입 술을 깨물었다. 한 줄기 햇살이 눈을 부시게 했지만 솟구치는 눈물 은 억제할 길이 없었다. {담상공! 산혜는 절대 당신을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에게 맹세하듯 중얼거리며 발길을 옮겼다. 힘없이 걸 어가는 금산혜의 등 뒤로 한 줄기 따뜻한 햇살이 촉복이라도 하는 듯이 빛났다. 금화장의 아침! 웅장한 전청에는 아침부터 혜천대사, 금반산, 동추평 등 십여명 의 무림명숙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미타불! 여러분들이 어제 만났던 인물들은 마교의 핵심고수들 이긴 하나 그 세력은 마교 전체의 반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혜천대사는 천천히 좌중의 사람들을 일별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마교가 다시 당당히 모습을 들어낸 것은 무림을 석권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증거! 앞으로 강호의 장래가 심히 절망적입 니다. 마교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수단이 잔혹하고 무예마지 괴이음 독하여 방비가 쉽지 않읍니다.} 이때 문이 열리며 뇌천도제 뇌승이 침울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는 좌중의 사람들을 향해 읍을 하고 말했다. {조노선배님께서는 떠났읍니다.} 금반산이 다급히 물었다. {조금 전만 해도 계셨는데... 언제 떠났다는 말씀입니까?} 뇌승은 쓴웃음을 띄웠다. {조금 전 제 딸아이와함께 담공자를 찾아 말없이 떠난 것 같읍 니다.} 금반산은 몹시 안타까운 듯, {그 분께서 떠나시다니... 그럴 수가...} {아미타불.... 조시주께서는 원래 행적이 그런 분, 뇌시주는 앉으 십시요.} 혜천대사는 뇌승이 앉자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마교를 이대로 좌시만 하고 있다가는 앞으로 그들의 손 에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도 한당추홍도가 우리의 손 에 들어오고 그들의 음모를 파악했으니 힘을 합쳐 마교의 흉계를 사전에 분쇄해야 될 것입니다.} 혜천대사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침묵이 흘렀다. 문득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문이 열리고 한 명의 무사가 들어와서 절을 하는둥 마는둥 다급히 외쳤다. {장주님, 개방의 방주님과 공동파의 장문인 그리고 무당의 태극 도인께서 오셨읍니다.} [오오 개방과 공동파의 장문인께서...!] 금반산은 활짝 웃으며 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따라 중인들 도 반가운 표정으로 나왔다. 금화장의 정문에는 약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서 있는데, 맨앞에 는 무당의 태극도인(太極道人)과 공동장문 진산자(鎭山子), 그리고 온몸에 누더기를 걸친 칠순 가량의 노화자(老化子)가 서 있었다. 이 노화자는 보통 사람보다 휠씬 건장한 체구에 허리까지 내려 오는 탐스런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가 바로 당금 개방의 방주인 백염호개(白髥虎 ) 진방산(陣方 山)이었다. 그 뒤로 공동파의 제자들과 무당의 제자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들은 금화장주와 혜천대사를 보자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잠시 동안 수인사가 오가고 일행은 모두 금화장으로 모두 들어 갔다. 개방방주와 진산도인 등은 어제 있었던 혈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하나같이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개방의 방주 진방산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마교의 소식을 듣고 도우려고 왔는데 늦은 것 같군요.} {무슨 말씀을... 이렇게 와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금반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청해존자 어르신과 전모(戰母) 선배님께서는 중상을 입고 현재 치료 중이라서 이곳에 왔읍니다. 잠시 후 제가 그 분들께 여러분을 안내하겠읍니다.} 이 말에 진방산과 함께 온 진산도인 그리고 태극도인은 흠칫 놀 랐다. 5 {그 분들께서도 오셨읍니까?} 진산도인은 놀란 듯이 물었다. {아미타불.... 그렇읍니다. 그 분들께서 마교의 무리들과 싸우시다 중상을 입어서 지금은 안채에서 치료 중에 있읍니다.} 진방산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혜천대사께서는 장차 마교를 어떻게 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혜천대사는 쓸쓸히 고소를 지었다. {허허... 소승도 지금 그 일을 의논하던 중이였으나 나로서도 시 실 암담한 일입니다.} 백염호개 진방산은 힐끗 동추평을 주시했다. {동장로께서는 그 동안 마교의 일에 잘 알고 계실 터이니 이 일 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동추평은 가만히 혜천대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로서는 이 일을 소림에서 주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읍니 다. 이런 말을 하면은 우리의 사기를 꺾는다고 말할지는 모르겠으 나 솔직이 말해서 한 방파의 세력으로는 도저히 마교와는 상대가 될 수 없읍니다.} 이어 그는 적용군 등 마교의 인물들께 대하여 설명했다. {백 년 전 법공대선사님의 업적을 생각해서라도 마교에 대한 일 은 무림맹이 무너진 지금 응당 소림에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중인들 중 귀주의 명숙 홍면신(紅面神)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그렇읍니다. 이런 일은 응당히 소림에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찬성을 표했다. 홍면신은 신이 난 듯 외쳤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여기서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당장 소림으 로 가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뇌승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그 말에는 적극 찬성입니다.} 그러자, 중인들이 분분히 일어서면서 외쳤다. {소림으로 갑시다!} {혜천대사께서 앞장 서십시오!} 장내가 소란해졌다. {아미타불... 여러분, 잠시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혜천대사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중론이 그렇다면 소승은 여러분들을 소림으로 안내하겠읍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읍니다.} 이 말에 중인들은 조용해졌다. {소림은 백 년 이래로 강호사의 일에는 될 수 있으면 중립을 지 켜 왔읍니다. 거기에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마교의 일에는 확실히 모르고 있는 상태이니 만큼 우선 여러분들께서 자파로 돌아가시어 이 일을 알리고 앞으로 두 달 후 소림에서 만나기로 하는 것이 어 떻겠읍니까?} 한동안 중인들의 의견이 분분해졌다. 금반산이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혜천대사님의 말씀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여 러분들께서는 자파로 돌아가시어 준비를 하시고 그 동안 저와 혜 천대사님은 소림으로 가서 모든 준비를 진행하겠읍니다.} 그러자 몇몇 중인들은 반대를 했으나 결국 금반산의 의견대로 하자고 결정이 되었다. 동추평이 혜천대사에게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네. 자네가 소림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강호 의 위급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소림이 아니면 그 누구도 마교와 상 대할 수가 없네.} 혜천대사는 괴로운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아미타불... 동시주의 뜻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너무 자책지 마 시게...} 그는 문득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혜천대사는 일찌기 소림에서 파문당한 몸 아닌가? 그 동안 마교 의 일도 은밀히 혜오대사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제 혜오대사는 어 제의 혈전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그의 마음은 못내 침울해졌다. 강소성(江蘇省) 남통현(南通縣)-! 양자강(楊子江), 즉 장강(長江)의 하류에 자리한 번화한 시진이 다. 남통현은 장강과 북경(北京)을 잇는 대운하(大運河)의 남쪽 종 점으로 웬만한 해안포구에 못지 않을 정도로 번화하고 큰 항구도 시다. 정오무렵, 대운하를 따라 내려와 남통현의 선착장을 향해 들어오는 한 척 의 범선이 있었다. 화려한 범선이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돛 폭은 길이만도 십 장을 넘고 화려한 오색깃발을 나부끼고 있었다. 잠시 후,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배에서 건장해 보이는 흑삼인 들이 재빨리 내려와 배를 고정시키고 배와 선착장을 연결하는 가 교를 갖다 붙였다. 이들의 동작은 하나같이 숙달되어 있었고, 허리에 일률적으로 긴 장도를 차고 있었다. 이어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재빨리 양옆으로 나뉘어 공손 한 표정으로 섰다. 6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두두! 돌연 하나의 화려한 사두마차가 배에서 천천히 굴러나왔다. 마차 를 끌고 있는 말들은 하나같이 관외의 천리준마들로써 한 필의 값 만 해도 족히 천 냥은 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금칠이라도 입혔는가? 마차는 온통 햇살에 황금빛으로 눈부신데 자세히 보면 창문과 주렴은 옥과 마륵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이 화려한 마차에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마차가 선착장에 내려서자 흑의인들은 급히 배에서 끌려 나온 말을을 타고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갑판에 서서 망연한 눈빛으로 마차가 간 방향을 지켜보고 있는 사나이가 한명 있었다. 헌앙한 자태에 은은히 사람을 위압하는 패기를 몸에서 흘리는 삼십대 초반의 청년! 흑마수(黑魔手) 모용천위(慕容天威)-! 그는 바로 흑마수 모용천위가 아닌가? 침울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사두마차를 바라보고 있는 모용천위 의 입가에 쓸쓸한 고소가 스쳤다. {화련(華蓮)! 당신의 부탁대로 중원을 유람하는 것을 허락했지 만.... 갑자기 당신을 영원히 잃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구 료.}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나 내가 살아 있는 이상 그 누구도 내게서 당신을 데려가지 못할 것이오.} 자신에게 맹세하듯 중얼거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천위, 그만 출발을 하도록 하자.} 가만히 그의 어깨를 위로하듯 두드리는 노인이 있었다. 혁사군! 그는 바로 서장무림의 거두인 절명마존(絶命魔尊) 혁사 군이었다. 모용천위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혁사군은 모용천위의 굳건한 등을 보면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할 텐데... 이번에 남해(南海) 로 가는 길은 잘못 될지도 모르겠구나.) 배는 느릿하게 하류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데 선착장의 한쪽에서 떠나는 모용천위의 배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허름한 회색가사에 가늘게 뜬 눈, 꾀죄죄한 몰골의 이 늙은 중은 다름아닌 불문제일존 법공(法空)대선사였다. {아미타불...} 그는 나직이 불호성을 외우며 사두마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느릿 하게 걸음을 옮겼다. {남해의 바람은 사납기만 하지. 아미타불.... 너희들의 발길은 헛 수고가 될 것이다.} 나직이 읉조리는 그의 말은 깊이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 다. 남통현을 떠난 사두마차는 남쪽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했 다. 두두두_____ 두두! 황진을 일으키며 달리는 마차는 반나절을 달려 강소성을 벗어나 절강성(折江)으로 들어섰다. 다시 반나절쯤 더 달리면 절강성의 성 도이고 무림의 운명을 뒤바꾸어놓은 음모가 발생했던 고도 항주(杭 州)에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황혼의 노을이 대지를 물들이고 어둠이 서서히 내 리고 있었다. 어두운 밤길을 마차로 달릴 수는 없는 일, 사두마차는 곧 남통과 항주의 중간쯤에 자리한 가흥현(嘉興縣)으로 들어갓다. -천화루(天花樓)! 가흥현에서 음식맛으로 손꼽히는 객점이었다. 사두마차가 서서히 문 앞에서 멈추자 점소이가 달려나와 급히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들....} 점소이는 말을 하다 갑자기 입이 굳어진 듯 크게 벌렸다. 마차문이 열리고 노파가 나오는데 그 뒤를 따라 한명의 여인이 내려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노을빛을 받아 더욱 눈부신 미모가 도저히 인간같지가 않았다. 숱한 미녀가인을 보안온 점소이건만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볐다. (아이고... 내가 헛것을 보았지.) 내심 소리치면서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봐도 분명 꿈에서나 볼 수 있던 미녀였다. 새햐얀 백의로 몸을 두르고 약간 수척한 듯 마 른 얼굴은 차가움과 기품이 어려 있었다. 문득 점소이는 옆에서 느껴지는 무서운 시선에 정신이 번쩍 들 었다. 세모꼴의 음사한 눈꼬리를 지닌 노파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지 않는가? 파충류의 눈알처럼 번뜩이는 눈빛과 시체처럼 창백한 살결, 그리 고 오관이 얼굴 가운데 모여 있는 듯한 노파의 인상은 점소이로서 평생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이었다. 마치 살모사와 같은 인상이랄 까? 점소이는 일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놈아, 어서 우리를 안내하지 않고 무얼하느냐?} [예! 예! 이리로 오시지요!]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호곡성과 같은 노파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점소이는 황망히 앞장 섰다. 이들이 들어서자 왁자지껄하던 장내는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맨 앞에 노파가 걷고 그 뒤에 백의미녀가 따르는데 그녀의 품 안에는 이제 겨우 한 살 가량된 아기가 맑은 눈을 뜨고 신기한 듯 눈동자를 움직인다. 그리고 그 옆으로 두 명의 흑삼인이 그녀를 보호하듯 따르고 있 었다. 천화루에 있던 손님들은 이 괴이한 일행에 넋을 잃었다. 일행이 이층에 올라가자 아래층보다 품위가 있는 듯한 손님들 또한 입을 다물 줄 몰랐다. 7 송방춘(宋芳春), 그는 가흥현에서는 거물급으로 통하는 인물로서 강호에서도 제 법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재산도 가흥현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거부(巨富)이기도 했다. 그는 오십 년의 생애 동안 수많은 미인과 절세가인들을 보아왔 다고 자부했지만 눈 앞의 백의미녀를 보자 문득 그는 자신이 그 동안 헛살아 왔다고 생각했다. 북경의 제일미인이라고 불리우는 담운공주(潭雲公主)도 미인이 고, 항주의 가화(佳花) 소향(少香)도 미녀라지만 눈앞의 미녀에 비 한다면 보름달에 반딧불을 비교하는 격이었다. 송방춘은 자신도 모르게 넘어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 함께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두 사람은 가흥현에서도 아니, 중원에서도 거물급 인물이었다. 단천금(丹川金), 나이 이십 오 세로 광동성(廣東省) 단씨세가(丹氏世家)의 소가주 다. 단씨세가는 거상(巨商)의 집안으로 수뱁 년의 전통과 대대로 관부 그리고 상계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으로 금화장의 금 반산도 한 수 양보하는 집안이다. 유주강(流周江), 나이 삽십 사세인 그는 황궁(皇宮) 어영위(御營衛)의 부장(副將) 이며 북경 유주장군부(流周將軍府)의 삼대손이다. 이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당금 명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귀족의 후손들이 아니겠는가? 그런 그들도 백의여인을 보는 순간 막연해졌다. 송방춘은 두 사람을 주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쩝.... 저 뇌쇄적인 미모에 두 사람도 넋이 나갔군. 하긴 이 늙은 나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는데.) 그는 내심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며 담담히 말했다. {백의소저는 정말 인세에 보기드문 미녀이구료.} 순간 단천금과 유주강은 끔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번적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단천금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송대인, 소생이 비록 많은 미녀를 보아왔지만 저토록 아름다운 소저는 처음입니다.} 유주강도 힐끗 백의여인 좌석을 훔쳐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공자, 나도 북경에서 담운공주 전하를 뵈오긴 했어도 이렇게 가슴이 떨리지는 않았소이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허탈감 때문일까? 그는 못내 아쉬운 듯 고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오늘까지만 해도 천하제일미인은 담운공주라고 생각 을 했으나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새삼 느끼게 되었소이다.} 송방춘은 일순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허허... 보아하니 두 분께서 마음이 동하시나 본데 어떻읍니까? 우리가 저 미녀를 청하는 것이...?} 이 말에 한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것 매우 좋은 생각이십니다.} 단천금이 들뜬 목소리로 찬성을 하자 유주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송방춘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두 분의 생각이 그러하시니 그럼 송방춘이 한 번 나 서 보겠읍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말을 드리도록 해 보지요.} 갑자기 단천금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며 벌떡 일 어서 걸음을 옮겼다. 송방춘과 유주강은 갑자스런 단천금의 태도에 흠칫했으나 기대 에 찬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단천금은 눈앞에 백의여인의 모습이 들어오자 가슴이 어린 아이 처럼 두근거렸다. 그는 한 순간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제 다섯 걸음 정도면 백의여인 좌석에 갈 수 있으리라. 단천금은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헌데 채 두 발자국이나 갔을까? 갑자기 자신을 가로막는 흑삼 인의 냉막한 모습에 그는 흠칫했다. 흑의인은 삼십대 전반으로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굴강해 보이 는 사나이였다. 그는 말없이 팔짱을 낀 채 단천금을 노려보았다. {소생은 단천금이라는 사람으로 저분 소저에게 할 말이 있소이 다.} 그는 이 흑의인이 백의여인의 수하무사라고 생각을 하며 말했다. 헌데 흑의인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한 점의 표정도 없이 무표정히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단천금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다시 한 번 정중히 말 했다. {나는 광동 단씨세가의 단천금이라는...} 돌연 한 마디 차가운 일성에 단천금은 입을 다물었다. {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너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다.} 흑의인의 목소리는 낮고 높음의 고저도 없이 스산하게 들려왔다. 단천금은 일순 두 눈에서 안광을 발산했다. {무례한 놈이군. 감히 하인주제에 주인에게 할 말이 있다는 사람 을 박대하다니.} 그의 목소리는 위엄이 있었고 당당하면서도 기품이 담겨 있었다. 흑의인의 눈에서 갑자기 한 줄기 불길이 피어올랐다. 매우 격분한 듯그의 어깨마저 가늘게 떨렸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감히 누구에게.} 소리와 동시에 흑의인의 우수가 벼락같이 단천금의 배심을 찔러 왔다. (다짜고짜 살수를 쓰다니... 무예도 굉장하군) 단천금은 생각과 동시에 뒤로 재빨리 둘러서려는 순간, {등백(等白)! 그만 둬요.} 한 줄기 청아한 옥음이 들린다 싶자 흑의인의 우수는 나올 때보 다 더 빨리 제자리로 돌아갔다. 단천금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공력을 자유자재로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이 자가 상승의 무예를 익혔다는 것, 도대체 저 여인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이런 고수들을 수하로 부린단 말인가?) 그는 더욱 백의여인에게 신비감을 느끼며 그에 따라 마음은 더 욱 기울어진다. 백의여인은 시선을 돌리고 단천금을 쳐다보았다. 우수에 잠긴 서럽도록 아름다운 눈동자, 수려한 미모는 눈이 부 셨다. 8 적용화련(狄容華蓮)-! 그렇다. 그녀는 바로 태행산을 떠나온 적용화련이었다. 그녀는 교중의 일로 남행하는 모용천위를 졸라 함게 이곳 절강성으로 돌 아온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뒤바뀐 항주를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싶어서...! {소생은 광동성의 태생으로...} 단천금은 재빨리 적용화련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일갈이 그의 귀를 울렸다. {이놈아, 그 말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네놈의 내력 따위는 알 바 없으니 할 말이나 빨리 해라.} 단천금은 이 말이 적용화련의 앞자리에 앉은 추괴하게 생긴 노 파가 하는 말이란 것을 느끼며 고소를 지었다. 노파의 어조는 무례 한 데다가 대뜸 욕설까지 이지 않았는가?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더욱 입을 열었다. {노부인께서는....?} {이놈아, 내가 누구인 줄은 알아서 뭐해! 잔소리 말고 할 말이나 빨리 해봐!} 윽박지르듯이 말하는 노파의 목소리에 단천금은 소태씹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괜찮으시다면 합석을 하면 어떨까 해서...} 단천금은 말 끝을 흐리며 적용화련을 주시했다. {이놈아, 우리가 왜 네놈과 합석을 한단 말이냐. 이런 미친 놈을 보았나?} 노파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욕설을 하자, 단천금도 은근히 울화 가 치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이 노파도 백의여인의 유모 정도인 것 같은데 평소에 남으로부터 존경만 받아오던 그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적용화련이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대로가 편하니 사양하겠어요.} 그녀는 냉랭히 고개를 돌렸다. 단천금은 적용화련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무시 당했다는 수치 심과 굴욕감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이대로는 도저히 그냥 물 러설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다시 말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제가 여기 앉아서 몇 마디만 나누면 어떻겠읍 니까?} 적용화련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다만 노파만이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싸늘히 말했다. {흐흐.... 이놈아, 헛소리 말고 목이 성하기 전에 빨리 꺼져라.} 단천금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무어라고 말을 하긴 해야 되겠는데 말이 목구멍에서 뱅뱅 돌 뿐 치미는 울화와 모멸감에 전신을 사시나무같이 부르르 떨었다. 단천금을 지켜보고 있던 송방춘과 유주강은 사태가 험악해지자 재빨리 일어서 다가왔다. 송방춘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이 늙은이는 송방춘이라고 합니다. 단공자께서는 저의 손님으로 소저에게 호의로써 말한 것이니 실례된 점이 있더라도 용서하십시 오.} 노파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놈이 금태세(金太歲) 송방춘이라는 아이냐?} 송방춘은 노파의 물음에 쓰디쓴 고소를 지었다. 자신의 나이 금년으로 오십 이 세, 오십이 넘은 아이도 있는가? 송방춘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들의 내력이 범상치 않음을 느 끼고는 담담히 말했다. {제가 송방춘입니다만.... 노부인께서는 누구신지?} {이놈아, 노신의 내력을 알고 싶거든 송전홍(宋錢紅)에게 물어 보아라.} 일순 송방춘은 경악에 찬 눈으로 멀건히 노파를 쳐다보았다. 송전홍이라면 자신의 조부로 이미 십 년 전 죽은 사람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분은 저의 조부님이신데... 이미 삼십 년 전.... 돌아 가셨읍니 다.} 노파는 흠칫한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 늙은이가 벌써 죽었나... 하긴 지금쯤 살아 있다면 백 이십은 넘었을 테니까.} 그녀는 회한에 잠기 눈빛으로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송방춘은 그녀의 독백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말 투로 보아 자신의 조부와는 잘 아는 듯하지 않는가? (혹시 이 노파는...!) 다음순간 송방춘의 눈이 한 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 대 여마를 떠올리고는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그는 무언가 염두를 굴리고는 노파에게 공손히 포권을 했다. [조부님의 지인(知人)이시라면 제게는 윗분이나 마찬가지! 부디 후배가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송방춘의 공손한 말에 노파의 추괴한 얼굴에 득의의 표정이 떠 올랐다. 9 우르르릉_____ 꽝____ 꽈꽝! 뇌성벽력이 갑자기 어둠을 밝히고 천지를 진동했다. 쏴_____아! 뇌성폭우는 한겨울의 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절강성 태우현(太禹縣) 외곽, 한 명의 인영이 느릿하게 폭우 속을 걷고 있었다. 다 낡은 파립 (破笠)을 쓰고 있기는 했으나 어디 그것으로 비를 가리겠는가? 전신이 온통 흥건히 젖은 그는 주점으로 들어가 말없이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장검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은자 두 냥, 오늘 아침 옷을 사입고 나니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 말없이 두 냥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파립을 벗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기력한 눈동자는 마치 썩은 생선의 눈알을 보는 듯 일점의 생기도 없었다. 담사, 그는 바로 금화장을 떠나온 담사였다. 그는 무표정히 바깥을 쳐 다보며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준극봉을 떠난 이후부터 담사에게는 한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것은 손씨 모녀를 살해한 흉수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흉수를 찾기는 고사하고 괜한 사건에 끼어들어 마음의 갈등만이 가득찼다. 그를 잡기 위해 중원을 방황하던 뇌옥연과 황보가혜, 그리고 자 신을 친손자처럼 대해 주던 조일 등 그 모든 것이 그를 변하게 만 들었다. 그는 우울한 시선으로 마침 다가온 점소이에게 착 가라앉은 목 소리로 말했다. {안주는 필요없으니 돈만큼 술을 갖다 주게.} {알겠읍니다, 손님.} 점소이는 그의 행색과 탁자 위에 놓인 장검을 번갈아 쳐다보며 재빨리 은자를 챙기고는 아첨을 흘렸다. {헤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 잠시 후 술이 오자 담사는 술을 마셨다. 그는 마치 물마시듯 술을 마셨다. 독한 죽엽청이 세 병이나 바닥 이 나자 담사는 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담사는 마시면 마실 수록 마음 속의 고뇌는 더욱 커져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흐흐.... 내가 마음이 약해졌나, 빌어먹을... 담사 네놈은 누구냐? 바로 천하에서 제일 비루한 자객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네놈이 무 슨 사치스런 고뇌란 말이냐...) 그의 두 눈은 자꾸만 안으로 깊이 침잠되어 가고 있었다. 밤이 깊었다. 뇌성은 그쳤지만 폭우는 조금도 그칠 줄 모르고 그 기세를 더해 갔다. 쉴새없이 술을 마시는 담사 앞의 탁자 위에는 이미 빈 술병들이 열몇개나 쌓여있었다. 담사는 생애 처음으로 거나하게 취하고 있었다. 자객으로서 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그는 이제껏 이토록 많은 술을 마셔본 적 이 없었다. 주점 안에 있던 주객들은 언제 떠났는지 남아 있는 손님은 담사 하나 뿐이었다. 점소이는 볼멘 표정으로 힐끗 담사를 주시하며 내심 투덜거렸다. (제기랄, 저 자가 빨리 가야 문을 담고 춘앵(春櫻)이 년의 엉덩이 를 만질 것인데...) 점소이는 내심 애인의 희멀건 둔부를 상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헌데 문득 이때였다.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비바람이 주점 안으로 몰아치고 한 무리 의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왔다. 하나같이 짙은 흑포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죽립을 쓴 흑의인들 이 들어왔다. {헤헤... 손님들 오늘은 장사가 끝났으니... 으악!} 점소이는 말을 하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한족 구석에 쳐박혔 다. 한 명의 흑의인이 거친 주먹으로 점소이의 배심을 후려갈긴 것 이다. 점소이는 잠시 꿈틀거리다가 이내 쭉 뻗어 버렸다. 담사는 갑작스런 비명에 취기가 깨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명의 흑의인이 죽립을 치켜들었다. 비에 젖은 죽립 아래에서 나타나는 백지장같이 창백한 얼굴에 무표정한 얼굴, 그는 바로 금 화장에 나타났던 음산파 출신의 전대거마(前代巨魔) 상문신(喪問 神)이었다. 제 37 장 追跡者들 {....!} 담사는 청해존자나 비천신괴, 절명마존 혁사군 등에 버금가는 거 마 상문신을 발견하는 순간 가슴이 싸늘히 식는 듯한 느낌을 받았 다. (이 자들이 나를 뒤쫓아 왔군. 내가 이렇게 방심을 했다니....) 내심 후회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점 안에는 상문신 이외에 하나같이 출중해 보이는 삼십 여명 의 대한들이 벌려서있었다. 그리고 주점 바깥에도 수십 명의 흑의 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완전히 포위를 당했군.) 이때 상문신은 음침한 시선으로 낭아곤을 흔드려 스산한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흐흐...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놈이 마교를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담사는 느릿하게 장검을 잡으며 일어섰다. {늙은이, 잔소리는 필요없어. 싸움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문득 담사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온몸을 감도는 취기에 몸이 천 근만근으로 무겁게 느껴지는 그였다. 상문신의 입꼬리에 스산한 미소가 스쳤다. {킬킬! 전날 네놈이 암습으로써 태상노조에게 상처를 입혔으나 오늘은 네놈의 차례다.} 그자는 사실 오래전에 담사의 종적을 발견했었다. 하지만 천성이 음험하고 독랄한 상문신은 담사가 물마시듯 술을 마시는 것을 보 고는 지금껏 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흐흐흐.... 늙은이, 두고 보면 알겠지만 암습을 하는데도 그만한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금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우수가 벼락같이 앞으로 뻗치면서 몇 가닥의 한광이 날아왔다. 그리고 담사의 선제공격에 상문신이 움찔하는 순간 담사의 신형 이 신속하게 천정을 뚫고 튀어나갔다. {으악!} 한 명의 흑의인이 한광을 피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상문신은 설마 그가 천정으로 도피할 줄은 몰랐는지라 다급히 고함을 지르며 날아갔다. {쫓아라, 저 놈을 죽여도 좋으니 무조건 잡아랏!} 천정으로 날아나온 담사는 급히 저쪽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세 가닥의 검광이 재빨리 그를 쑤셔왔다. 하지만 그 순 간 담사의 신형이 돌연 아래로 쑥 꺼지면서 장검을 위로 쪼개듯이 후려쳤다. {으악!} {크아악!} 두 가닥의 비명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담사는 발이 땅에 닿자 그대로 다시 신형을 날리며 좌수를 앞으 로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좌수에서 수 가닥의 한광이 폭중이 터 지듯 사방으로 뿌려졌다. {피해랏! 흑사침(黑死針)이다.} 상문신이 비쾌하게 담사를 향해 덮쳐가며 외쳤다. 쐐_____ 액! 낭아곤은 팔십 근이 넘는 중병기로서 가공할 기세로 날아왔다. 담사는 검을 들이 막았다. 캉______ 카캉! 요란한 금속음이 터지면서 담사는 손아귀가 찢어질 듯이 고통이 왔다. 순간 그는 이를 악물며 옆으로 재빨리 피하고는 좌수를 휘둘렀 다. (금강복마수! 부딪칠 수는 없지...) 생각은 느리고 동작은 빨랐다. 상문신은 재빨리 낭아곤을 회수하 면서 좌수를 슬쩍 피하고는 중지를 꼿꼿이 세워 찔렀다. 펑! 한 가닥의 지풍이 공기를 가르며 전광석화같이 담사의 가슴을 쏘아왔다. 담사는 상문신의 변초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거기에다, 그 는 술기운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풀려 있는 상태였다. 담사는 다급히 몸을 뒤로 눕히며 옆으로 굴렀다. 그 순간 지풍은 피했지만 주위에서 그를 노리고 있던 흑의인들 이 검, 도, 삭 등으로 재빨리 공격해 왔다. 누운 자세 그대로 담사는 우수로 검을 휘둘러 도를 막고 좌우로 현란하게 흔들었다. 좌수에서 세찬 암경이 일었다. [크악!] [컥!] 두 명의 흑의인이 피를 뿌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 담사는 뱀이 기는 듯 미끄러지듯이 나가면서 다시 삼 검 오장을 쳐냈다. 그가 쓰는 수법은 신랄하면서도 악랄했다. 더구나 좌수에서 금석 이라도 부술 듯이 쏟아지는 금강복마수의 위력은 경인할 기세였다. 상문신은 분노성을 지르며 낭아곤을 맹렬히 휘둘렀다. {이런 죽일놈!} 담사는 몸을 일으키는 순간 낭아곤이 태산을 무터뜨릴 듯이 날 아오자 우수로 땅을 치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이때 옆에서 그를 보고 있던 흑의인들이 무섭게 공격해 왔다. 담사는 갑자기 장검을 풍차처럼 회전시키면서 대갈성을 질렀다. {연화불유(蓮花佛流)!} 츠츠_____ 츠츳_____ 츠! 일순간 검광이 파도치듯 일어나며 연화모양의 형태로 터져나갔 다. 연화십판법은 원래 십팔반의 병기로 사용할 수도 있고 장법으로 도 쓸 수 있지만 원래는 계도로서 전개하는 불문의 절정수법이었 다. 담사는 공력은 옛날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법공대선사가 개정 대법(開頂大法)으로 전수해준 정심한 내공에다가 얼마 전 금산혜로 부터 받아먹은 영천신액(靈天神液)의 효능덕분으로 그의 내력은 가 일층 진보된 상태이다. 그리고 연화십팔법의 구초는 불문의 절전비예로 웅후하면서도 정묘한 변화는 흑의인들로서 감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때문에 담사의 수중에서 연호십팔법이 전개되자 금강복마수와 더불어 그의 수법은 갈수록 위력을 더해갔다. 허나 시간이 지날 수록 상문신의 공격과 끊임없이 악귀처럼 달 려드는 흑의인들의 공세에 쇠로 만든 사람일지라도 지치지 않을 수 없다. 싸움은 점차 담사에게 불리해져 갔다. 폭우는 조금도 수그러 들 줄을 모르고 하늘에서 물을 쏟아 붓듯 이 쏟아져 내렸다. X X X 적용화련 일행은 송방춘의 예의를 다한 초청에 그의 장원으로 들어갔다. 장원은 거부의 저택답게 넓고 호화로왔다. 그런데 적용화련과 노파는 대청을 들어가는 순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대청 안을 자세히 살폈다. 대청에는 모두 이십여 명 가량의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가지각색의 복장을 한 늙은 사람, 젊은 사람, 도인, 여인등도 섞 여 있는데 적용화련의 일행이 들어서자, 모두가 냉막한 눈빛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노파는 매서운 눈빛으로 중인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입술을 깨 물었다. (청해존자, 개방방주, 철불... 으음 함정이었구나.) 그녀는 내심 가슴이 철렁함을 느끼며 괴장을 불끈 움켜쥐었다. 혜천대사는 적용화련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 이제 기억을 찾으셨나 보군.} 적용화련은 처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대사께서 전날 저를 도와 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도움으로 여시주의 기억을 찾았으니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혜천대사는 감회 서린 눈으로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귀파(鬼婆), 당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구료.} 청해존자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 끝을 흐렸다. -귀파(鬼婆) 손예랑(孫藝浪)! 청해존자와 같은 연배의 여마두로써 그녀의 산화지법(散花指法) 은 무림일절이었다. 석년 그녀는 한때 청해존자와 사랑을 했으나 절명마존시 혁사군 이 나타나 청해존자를 패배시키자 혁사군을 따라 사라져 버리고 말았었다. 손대랑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청을 둘러보면서 외쳤다. {송방춘, 네놈이 감히 노신을 속이다니!} 말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기자 세 가닥의 지풍이 소리없이 사혈 을 쏘아갔다. 송방춘은 슬쩍 옆으로 피하면서 황망히 말했다. {노선배, 마교는 중원무림의 적입니다. 그리고 신검황(神劍皇) 연 대협은 소생의 매부였소.}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호호... 좋다. 이놈들 어디 이 노신이 모조리 상대해 줄 테니 한 꺼번에 덤벼 보아라!} 손예랑은 노성을 질렀다. 청해존자가 나서며 말했다. {예랑, 당신을 유인한 것은 싸움을 하자고 한 것은 아니오. 다만 일이 끝날 때까지 당신들은 소림사로 가서 몇 달 간 손님으로 있 으면 되오.} {닥쳐라. 오가야, 네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손예랑은 흉광을 띠며 괴장을 치켜들었다. 청해존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소를 지었다. {예랑, 당신은 도저히 우리를 당할 수가 없소. 당신 외에 이십 명의 대한이 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수들이오. 순순히 우리를 따른다면 절대 해를 끼치지는 않겠소.} 적용화련이 우울한 눈빛으로 혜천대사를 보았다. {대사님, 저는 비록 마교의 사람이지만 더 이상 강호의 일에 상 관치 않겠어요. 그러니 저희들을 그냥 돌아갈 수 있게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읍니다.} 돌연 한 소리 차가운 교갈이 터졌다. {닥쳐라! 요망한 계집, 우리는 너의 정체를 다 알고 있어!} 황보가혜가 매서운 눈빛으로 외쳤다. {적용화련! 마교의 태상노조(太相老祖)라고 불리우는 적용군(狄 容君)의 손녀이고 담사라는 자객을 청부해 오빠를 살해한 요부가 아니냐?} 이 말에 적용화련의 안색이 처연하게 변했다. [가혜 동생! 그래도 한때 언니 동생하던 사이인데 너무 매정하구 나!] 그녀는 무림맹 불령각에 머물 때 자신을 친 언니처럼 따르던 황 보가혜가 대뜸 욕부터 하고 나서자 서러움에 절로 눈시울을 붉혔 다. 하지만 황보가혜에게는 그것조차 가증스런 가식으로만 보였다. 그녀는 이를 부득 갈며 적용화련을 노려보았다. [누가 네년의 동생이란 말이냐? 네년은 년오라버니를 해치고 그 것도 모잘라 내게서 아버닌마저 빼앗아간 마교의 요녀일뿐이다!] 듣다 못한 손예랑이 버럭 노성을 질렀다. {아니 요 조그만 계집아이가 감히 누굴 보고 욕지거리냐?} 그녀가 황보가혜에게 괴장을 휘두르려하자 적용화련은 급히 손 을 저어 말렸다. {예랑 잠시만 참으세요.} 이어 적용화련은 황보가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가혜 동생! 황보선생의 일은 정말 유감이야.}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한때 내가 철없이 저지른 일도 부인하지 않겠어. 허나 나는 지 금 그저 하나뿐인 자식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외에는 없어! 그러니 제발 나를 용서해줘!] [호호! 용서해달라고? 오냐! 너희 마교의 독수에 죽은 분들을 살 려낸다면 내 기꺼이 용서해주마!] 간절한 적용화련의 애원에도 황보가혜는 이를 바득 갈며 독살스 럽게 외쳤다. 적용화련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어 청해존자쪽을 바 라보았다. [전 이미 강호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몸이예요! 제 자식을 잘 키 우기 위해서라도 소림사로 가자는 여러분의 뜻에 순응할 수는 없 어요 용서하세요!.} 단호히 말한 그녀는 품 속에 안겨 있는 아기를 소중스럽게 꼬옥 껴안았다. {낭자, 혹시 그 아이는 담사라는 자객의 아들이 아니오?} 그때 좌중에서 한 사람이 나서며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적용화 련의 표정을 살폈다. 일순 적용화련은 창백한 표정으로 전신을 떨었다. 몹시도 큰 충 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당... 당신은.... 누구예요?} 사순 가량의 나이에 사람좋아 보이는 동안, 그러나 반면 아주 날 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는 인물! 귀견수 조중-! 그는 바로 무림맹의 감찰전 부전주 귀견수(鬼見手) 조중이었다. {나는 조중이라는 사람이오. 나는 낭자가 일 년 전 항주에 나타 났던 철혈무정 석무심과 복면여인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이 다. 그리고 사당묘에서 당신이 지옥혈룡이라고 불리우는 자객과 관 계가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소.} 조중은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일 년 동안 지옥혈룡을 추격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얻을 수도 없었소. 그러나 나는 마교에서도 그 자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하던 중 이것을 발견했소.} 그는 품 혹에서 하나의 붉은 옥패를 꺼내들었다. 어린 아이 손바 닥만한 혈옥패는 전면에 천마상이 조각돼 있고 그 뒤로 중앙에 마 (魔)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조그만 글씨로 적용화련(狄容華蓮)이라는 이름 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알기로 이것은 마교에서 혈마령(血魔令)이라고 불리우며 두 개밖에 없는 물건인 줄 알고 있소. 하나는 흑마수 모용천위란 자가 가지고 있고 또 하나 바로 이것, 낭자의 것이지요.} 조중의 눈빛은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를 응시했다. {그 날 사당묘에서 일어난 사건과 저 아이의 나이로 보아서 나 의 짐작이 틀리기는 않을 것이오.} 적용화련은 한 점의 핏기도 없는 창백한 표정으로 주춤 뒤로 물 러섰다. 사람이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가 제일 당황하는 법이다. 특히 그녀같이 자존심이 강한 미녀에게는 더욱 그러 할진데.... 적용화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대협, 당신은 나에 관해서 많은 것을 조사했군요. 그래요. 이 아이가 그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그래서 당 신은 제게 무엇을 원하시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지만 무섭게 굳어 있었다. 조중은 한 차례 중인들을 일별하고는 냉랭히 말했다. {나는 지옥혈룡의 거처를 알고 싶소. 당신은 그 자의 행방을 알 고 있을 것이오.} 그는 차분히 그녀를 주시했다. 적용화련은 문득 망연한 눈빛으로 쓸쓸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그 사람의 행적을 몰라요. 사당묘 사건 이후로 아직 한 번도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었어요.} 조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싸늘히 소리쳤다. {무슨 소리요. 당신은 그 자의 아들까지 낳고서도 모른다는 말이 오?} 손예랑이 갑자기 괴장을 휘둘렀다. {닥쳐라. 이놈아 모른다면 모르는 것이지 네놈이 감히 누구에게 망발이냐!} 괴장이 들이 닥치기도 전에 강맹한 경풍이 조중의 옷자락을 날 렸다. 조중은 비록 고수이긴 했으나 전대의 여마두인 손예랑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일전 모용천위의 천마산수에 부상을 당 해 원기가 많이 소진 당한 상태였다. 그는 다급히 몸을 뒤로 날리며 제풍장을 쳐냈다. 퍼펑! 괴장과 장력이 부딪치자 조중이 팔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에 재 빨리 삼 장이나 물러섰다. {아미타불... 손을 멈추시오.} 혜천대사가 나직이 외치며 장풍을 쳐냈다. {호호.... 모조리 덤벼라, 이놈들아!} 손대랑은 음침하게 웃으며 벼락같이 개창망월(開槍芒月)의 일식 으로 괴장을 휘두르며 지풍을 튕겨냈다. 혜천대사는 괴장과 동시에 지풍이 닥치자 팔보간선의 신법으로 재빨리 옆으로 여덟 걸음이나 피하며 금강복마수를 전개했다. 순간 손예랑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겨우 삼성 수준밖에 안되는 어줍잖은 금강복마수로군. 그럼 어디 이것도 받아 봐라!} 그녀의 손이 갑자기 붉게 물드른다 싶자 식지와 중지에서 두 가 닥의 혈지(血指)가 비쾌하게 쏘아나왔다. {혈마지(血魔指)!} 혜천대사는 가득 경악성을 토하며 물러섰지만 한 가닥의 지풍이 그의 팔을 찔렀다. {으윽!} 그는 나직이 신음성을 노하며 급히 팔을 쳐다보았다. 팔목에 손 가락만한 구멍이 뚫려 피가 흘러나왔다. {호호... 혈마지의 위력을 보고 싶은 자는 누구든지 나오너라!} 손예랑은 괴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자 개방방주 백호염개 진방산이 타구봉을 들고는 앞으로 나 섰다. {손선배께서 혈마지로 너무 큰소리 치는구료. 어디 나의 타구봉 법을 한 번 받아보시겠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나무로 된 죽장이 현란하게 날아왔다. {이런 건방진 놈, 네놈의 사부 개선( 仙)도 나에게 무례하지는 않았거늘 감히 네가 날뛰어?} 손예랑은 노성을 외치며 괴장을 휘둘렀다. 그녀의 괴장은 백년정강으로 만든 것이라 무겁기도 했으나 그녀 의 공력이 주입되어 천 근의 암석이라도 박살낼 듯이 위맹스러웠 다. 전방산은 감히 괴장을 맞부딪치지는 못하고 괴장과 죽장이 부딪 치는 순간 공력을 회수하며 비끼듯이 옆으로 당겼다. 순간 괴장은 목표를 잃고 바닥을 쳤다. 꽝! 천둥치듯 굉음이 터지고 대청이 진동을 일으켰다. 단단한 청석바 닥이 산산이 부서졌다. 실로 무서운 공력이요 완력이 아닐 수 없 다. {요런 쥐새끼 같은 놈!} 손예랑은 욕설을 지르며 재빨리 괴장을 황기운룡의 수법으로 휘 둘렀다. 진방산은 신묘한 보법으로 교묘히 괴장을 피하며 죽장을 후려쳤 다. 적용화련은 문득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흘렸다. 가만히 아기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담사는 이를 악물었다. 벌써 세 시진 동안 그는 얼마나 죽였는지 기억도 없다. 그저 눈 앞을 막는 것이라며 무조건 금강복마수로 후려쳤다. 쏴아아.... 폭우는 계속 쏟아졌다. 산중은 짙은 먹물 같은 어둠에 싸여 방향 을 분갈할 수가 없었다. 담사는 지칠대로 지쳤다. 전신이 피로 목욕한 듯 피로 얼룩져 있 고 빗물에 씻겨질 때마다 새로운 피가 솟아나왔다. 돌연 세 자루의 강전이 빗살처럼 쏘아오자 담사는 벼락같이 검 을 휘두르며 좌수를 후려쳤다. {으악!} 한 명의 흑의인이 머리가 박살이 나 널브러졌다. 그와 동시 담사 의 신형은 다시 강전을 활에 대는 세 명의 흑의인 앞을 스치고 있 었다. 검광이 번쩍 빛이 나자 어김없이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펑! 펑! 두 개의 철질려(鐵疾犁)가 호선을 그으며 날아들자 퍽하고 터지 며 수많은 우모독침(牛毛毒針)이 튀어나와 담사의 전신을 향해 덮 어 씌웠다. 순간 담사의 신형이 풍차처럼 회전을 그리며 쌍수를 뿌렸다. 항마일세(降魔一勢), 연화십팔법의 세 번째 수법으로 불타가 마를 친다는 것으로 장 풍이 우모독침과 부딪치자 산산이 퉁기어 비산되었다. 다시 네 자루의 마왕전(魔王箭)이 소리없이 사대요혈을 파고들었 다. 담사의 좌수가 연화모양의 원을 그리며 사각을 쳐냈다. 불보사연(佛寶四蓮), 네 개의 연화가 부처님의 발을 받친다는 것으로 마왕전이 좌수 에 비딪치자 가루로 변해 버렸다. 그와 동시 발끝을 박차고 호선을 그리며 유룡번신의 신법으로 삼검칠장을 순식간에 쳐냈다. 츠츠츠____ 츠츳! 번적! 강맹한 장력, 서릿발 같은 검광이 숲 속을 파고들었다. {으_____ 아악!} {으윽!} 비명이 연신 터져 나오며 흑의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상문신(喪問神)은 피곤한 표정으로 숲 속을 응시했다. (믿을 수가 없군. 한 마리 늑대 같은 놈에게 수십 명의 수하를 희생하고도 아직 그놈을 죽이지 못하다니...) 그는 기가 막혔다. 마교의 정예중의 정예 백여명을 동원하고도 단 한명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쏟아지는 폭우와 어둠 탓도 있겠지만 한명을 없애는 것으로는 희생이 너무나 컸다. (그놈은 인간이 아니다. 한 마리 이리라고나 할까... 이토록 험한 날씨에다 숲 속에서는 절대 그놈을 잡지는 못해, 잡기는 고사하고 잘못하면...) 그는 생각도 하기 싫은지 고개를 흔들었다. 허나 그렇다고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설혹 수하들을 다 희생하더라도 하는데까지 해보아야 한다. 그냥 이대로 돌아간다면 나중에 교주에게 무어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소교주나 따라가는 것인 데....) 내심 후회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이제는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 그들은 쏟아지는 비에 흠벅 젖어 있었다. 묵묵히 서 있던 상문신의 오른팔과 같은 우경(牛鯨)이 침중히 말 했다. {사어른, 아무래도 수하들을 불러 모아 다시 재정비를 해서 추적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읍니다.} 상문신은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지금에 와서 그럴 수는 없어.} 일순 그의 두 눈에서 귀화 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놈이 죽든 내가 죽든 결판을 낸다.} 우경은 쓰디쓴 고소를 지으며, {하나, 그놈은 극히 잔인하면서도 교활합니다. 무조건 이 숲 속 을 뒤지다가는 오리혀 당할수도 있지 않겠읍니까. 그러니....} {그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러나 만약 여기 서 그놈을 놓친다면 어디에 가스 그놈을 잡겠는가?} {....} 우경은 그 말에 인정을 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묵묵히 입을 다 물고 걸음을 옮겼다. 상문신은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며 칠벅거리는 숲길을 내디뎠다. 그러나, 불현 듯 그의 가슴에서 회의감을 느꼈다. (그놈은 야수와 같은 놈... 과연 그놈을 죽일 수 있을까?) 그는 문득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가만히 한숨을 쉬 었다. 얼마나 갔을까? {....} 상문신은 눈을 크게 떴다. 숲 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흑의인들, 어떤 자는 목이 달아났고 또 어떤 자는 배심이 갈라져 오장이 참혹하게 나와 있었다. 머리가 쪼개진 자, 가슴이 부서진 자 등 시체는 가지각색이었지 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과 부릅뜬 눈에 서린 믿을 수 없다는 경악에 찬 눈이었다. {누구냐?} 우경이 벼락같이 노성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쏟아지는 폭우 사이로 누군가가 한 명의 검은 인영이 비틀거리 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 용케 걸음을 옮기는 인영, 그는 문득 눈 앞의 우경을 발견하자, 갑자기 긴장이 풀어진 듯 주저 앉듯이 무릎 을 꿇었다. 머리는 산발한 채 비에 젖어 흘러내렸고, 가슴에는 어깨부터 배 심까지 길게 베어져 오장이 삐죽이 드러나 피와 함께 흘러나오는 모습은 실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머리를 땅에 쳐박았다. {사어른.... 모두... 모두 죽었읍니다. 그 자는.... 그 자는 악마... 악....} 인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옆으로 나뒹굴었다. {고형제!} 우경이 다급히 인영을 부축했으나 이미 그는 세상사람이 아니었 다. 상문신은 막연한 눈빛으로 짙은 어둠 속에 감싸인 숲을 응시했 다. {모두... 모두 죽었단 말인가?} 그의 목소리는 비분에 떨리고 있었다. {백팔명의 금우당(金牛堂) 제자들이 모두 죽었단 말이지?} 우경은 흠칫한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 {사어른, 진정하십시요. 그놈이 가까이 있읍니다.} 이때, 상문신의 두 눈에는 타오르는 분노로 인해 불길이 솟아오 르고 있었다. {으악....} 그는 돌연 짐승이 울부짖듯 외치며 쏜살같이 숲 속으로 날아갔 다. {사어른, 안됩니다!} 우경은 다급히 외치며 그의 뒤를 따랐지만 숲 속을 뛰어드는 순 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외치며 몸을 날렸다. {사어른! 사어른!} 쏴아아아! 내리는 폭우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우경의 전신은 온통 흙탕물과 나뭇가지에 걸려 여기저기 옷이 찢어져 넝마가 되었다. 우경의 눈 빛은 초조와 공포에 휘번뜩거리고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 었다. [으으!] 그러다가 우경은 문득 어디선가 들리는 미약한 신음이 이는 것 을 들었다. 우경은 즉시 비쾌하게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그는 곧 아람드리 거목 아래 두명의 마교 제자가 거꾸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어 머리는 반대쪽에 나뒹 구는데 몸통에서는 아직도 더운 피가 빗물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목이 잘린 그자 옆에는 한명의 흑의인이 얼굴을 진흙탕 에 처박고 신음을 흫히고 있었다. 우경은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아직 살아 있었군.} 그는 반가운 듯 흑의인을 부축하면서 얼굴을 보았다. 다음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너는... 으악!} 그는 말도 채 하지 못하고 뒤로 퉁기듯이 날아가 툭 떨어졌다. 움켜쥔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핏물이 스며나왔다. [물론 마교의 마졸따위는 아니지!] 흑의인은 느릿하게 일어섰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분명 담사의 음성이었다. 우경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네놈은... 바로 지옥혈룡...!} 그는 비로소 자신들이 쫓고 있는 이자가 누군지를 깨달은 것이 다. 하지만 그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고개를 꺾었다. 그래도 마교 내에서 유수한 고수 중 한명인 그였건만 담사의 간단한 변장에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어이없이 죽은 것이다. {이제 상문신이란 늙은이 혼자만 남았군.} 우경의 주검을 돌아본 담사는 중월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 한이 없었다. 그 역시 연이은 악전고 투로 지칠대로 지쳐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 수록 상문신은 살기와 증오에 이를 갈았다. 벌써 두 시진이나 헤매었으나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과 곳곳에 쓰러진 그의 수하들 뿐 담사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더우기 우경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직 어둠과 폭우만이 눈앞을 가렸다. (설마.... 우경도 죽었단 말인가?) 상문신은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 를 스치고 있엇다. 그는 몇 시진 사이에 부쩍 더 나이가 들어보이 는 것 같았다. (실수였다. 그 놈이 태상노조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했는데... 그냥 태우현에서 결판을 냈어야 했는데....) 상문신, 그는 백 년을 살아오면서 오늘같이 초조한 기분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득 그는 오늘따라 자신이 무척 외롭다는 것을 느꼈다. 마교의 힘은 상상를 불허하는 힘을 가졌고, 그 동안 마교 내에서 오인좌의 위치로 군림해오면서 강호를 제패할 것만 기다려 온 그였다. 허나 지금은 수하를 모두 잃고 상가집 개 모양 비에 흠뻑 젖은 채 초조와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다. 문득 쏟아지는 폭우 사이로 인영이 어른거렸다. 그 인영은 천천히 어둠 속을 헤쳐나오고 있었다. 느릿느릿하면서 도 간간이 비틀거리는 것이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상문신은 안력을 집중시켰다. 행여나 그의 충복 우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인영이 천천히 다가오자 그의 눈빛이 점점 밝아졌다. 인영은 고 개를 푹 숙이고 걸어오는데 그 차림으로 보아 우경은 아니었지만 그의 수하가 틀림없었다. [큭!] 걸어오던 인영은 문득 고통스런 신음과함께 힘없이 주저앉았다. 장도를 우수에 들고 좌수로 배심을 움켜쥐고 있는데 그 사이로 희끗하게 보이는 것이 내장과 피가 분명했다. 상문신은 흠칫 놀라 그 인영의 일 장 앞에 멈추어 섰다. {너는 누구냐?} 상문신의 물음에 인영은 신음성을 흘렸다. {으... 저는... 으윽...}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상문신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천천히 다가갔다. {상처가 심하군.} 나직이 말하며 그 인물의 팔을 잡아가던 상문신의 손이 갑자기 우수를 벼락같이 앞으로 펼쳐졌다. {눈치가 빠르군!} 순간 인영이 냉랭히 외치며 마주 좌수를 뻗었다. 순간 비릿한 내음과 동시에 사람의 오장인 듯한 것이 눈 앞에 닥치자 상문신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그 사이 인영 은 벌떡 일어나서 스산한 눈빛으로 상문신을 노려보았다. {네놈... 이었군.} 상대를 확인한 상문신은 흉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씹어뱉 듯 이 외쳤다. {죽일 놈, 네놈이 용케 나의 수하들을 죽였지만 이제 나에게 걸 린 이상 어림도 없다.} 이때 담사는 비 묻은 얼굴을 훔치며 그를 주시했다. 그의 두 눈 은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의외로 말이 많은 늙은이로군. 나는 늙은이와 원한은 없어. 허 나.... 늙은이가 나를 먼저 건드린 것이 불행을 초래한 것이야.} 상문신의 두 눈이 분노에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는 분노로 인 해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 놈... 너를 갈기갈기 찢어죽일 것이 다.} 쿠르르______! 공기가 무섭게 들끓으며 빗방울이 퉁겨나갔다. 상문신이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낭아곤을 휘두른 것이다. 담사는 냉소를 띠우며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순간 그의 신형은 환영처럼 옆으로 미끄러지 듯이 낭아곤을 피하면서 들고 있던 장 도(長刀)를 아래에서 위로 엇비스듬히 쳐올렸다. 슈아앗! 장도가 한 번 움직이자 그 예리한 도풍이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상문신은 흠칫 놀라며 신형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장도를 독사의 혓바닥처럼 따 라오면서 그의 하반신을 베어왔다. 상문신은 벼락같이 낭아곤을 아래로 쳐내며 허공에서 재주를 넘 었다. 낭아곤과 장도가 부딪치려는 순간 장도가 뚝 멈춘다 싶자 그의 팔목을 노리고 재빨리 쏘아왔다. 상문신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몸은 허공에서 원 을 그리는지라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이놈의 수법이 이토록 빠르다니...) 등골에 식은땀이 쏟아졌다. 그러나 상문신은 일대의 거마였다. 갑자기 긴 손목이 줄어들면서 장도는 낭아곤과 부딪쳤다. {축골공(縮骨功)!} 담사는 경악성을 토하며 재빨리 몸을 옆으로 틀었다. 장도는 찔러가던 중이라 칼등에 낭아곤이 부딪치자 손목이 찌르 르 고통이 오고 장도는 반으로 뚝 부러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 상문신의 낭아곤이 그 여세를 빌어 무지막지하게 머 리를 쳐왔다. 담사는 이를 악물고 반토막의 장도로 낭아곤을 막았다. 캉! 금속음이 터지자 담사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주르르 미 끄러지면서 열걸음이나 물러나서 힘겹게 버티고 섰다. 공력으로 논하자면 수십 년 동안을 닦은 상문신의 정순한 공력 에 담사의 진력은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상문신은 일격에 기선을 잡자 추호도 지체하지 않고 공격해 왔 다. 휙! 휙! 낭아곤은 단번에 태산을 박살이라도 낼 듯이 몰아쳐 왔다. 담사는 이를 악물며 반토막의 장도를 번쩍 치켜들면서 쳐냈다. 순간 장도가 상문신의 요혈을 노리고 쏘아오는 것이 기묘하면서도 변화막측했다. 상문신은 갑자기 눈앞에 연화모양의 도광이 번쩍 빛나자, 낭아곤 을 풍차처럼 돌리며 옆으로 후려쳤다. 캉! 캉! 둔탁한 금속음이 터지고 담사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서 물러섰다. (이놈이 간간히 펼쳐내는 수법은 정대하면서도 매우 현묘한 변화 를 지니고 있다.) 상문신은 내심 담사의 수법에 크게 놀랐다. {타앗!} 돌연 담사가 대갈성을 토하며 도광을 일으켰다. {연화출운!} 이 초식은 연화십팔법의 일곱 번째 수법으로 날카롭고 맹렬한 가운데 은영중 온화하고도 자비로운 품위가 엿보이는 것이다. 상문신은 갑자기 눈 앞이 온통 검광으로 꽉 차며 사면팔방에서 자신을 노리고 오는 듯하여 허와 실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틈도 발견하지 못하자 횡소천군(橫掃千軍)이란 수법으 로 도광을 막아갔다. 연화십팔법은 비록 천고에 드문 절학(絶學)이긴 하지만, 이 수법 에는 수십 년의 공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담사는 오랫동안 격전 끝에 상처를 입은데다 지쳐 있는 몸이라 제대로 펼쳐낼 수가 없었 다. 카_____ 캉! 또다시 병기가 부딪치자 담사는 무서운 압력에 장도를 놓치고 말았다. 그와 동시 낭아곤은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담사는 재빨리 뒤로 다섯 자나 물러서면서 팔을 살폈다. 마치 날 카로운 쇠칼쿠리가 스쳐간 듯 네 가닥의 핏줄기가 솟구쳤다. 담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현재 나는 극히 지친 상태이다. 정상적인 상태라도 이 늙은이와 상대해서는 이기기는 힘이들다. 연화수법이 비록 절학이긴 하나 지 금 나의 공력으로는 제대로 펼쳐낼 수도 없으니 우선 이 자리를 피해야 되겠군.) 그렇게 결정을 한 담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하나 상문신이 그를 그냥 보내줄 리는 없었다. {이놈, 죽어랏!} 노성을 터뜨리며 벼락같이 낭아곤을 휘둘렀다. 한 줄기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경풍을 동반하고 곧장 담사의 옆구리를 후려쳐 왔다. 담사는 재빨리 몸을 날려 뒤로 일 장이나 물러서면서 쌍장을 쳐 냈다. 그러나 상문신은 이미 그가 뒤로 물러날 줄 예측했던지 쌍장이 발출하기도 전에 그림자처럼 따라 붙으며 낭아곤을 위에서 아래로 손목을 박살낸 듯이 쳐왔다. 실로 전광석화 같은 동작이었다. 담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왼발을 쑥 돌리며 좌우로 낭아곤 을 막았다. [컥!] 순간 담사는 신음소리를 내며 입에서 가득 선혈을 토했다. 상문신도 흠칫한 표정으로 재빨리 물러서며 낭아곤을 주시했다. 낭아곤에는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강철침이 박혀 있었는데 담사 의 좌수와 부딪친 부근은 모조리 구부러져 있었다. {금강복마수!} 그는 나직이 부르짖으며 재빨리 낭아곤을 다시 쳐냈다. 담사는 또다시 낭아곤이 날아오자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버티고 서 있기는 하지만 이미 내장이 뒤틀려 공력 을 끌어 올리기도 벅차고 좌수 또한 철근처럼 무거워서 또다시 금 강복마수를 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상태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오직 악만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담사가 아닌가? (늙은이, 결코 혼자서는 죽지 않겠다.) 그는 이를 악물며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려 좌수에 집중시켰다. (금강복마수로 동귀어진이다.) 눈 앞에 닥쳐오는 낭아곤을 쳐다보며 느릿하게 좌수를 들어올렸 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멈추어랏!} 한 줄기 노호성과 동시에 한 줄기 인영이 비조같이 날아오면서 상문신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상문신은 갑자기 등뒤에서 날카로운 장력이 밀어 닥치자 깜짝 놀랐다. 장력이 닿기도 전에 전신을 압박하는 듯한 기세에 그는 나 타난 인물이 결코 자신에 못지 않은 고수라는 것을 느꼈다. 이에 그는 재빨리 담사를 후려쳐 가던 낭아곤을 회수하면서 좌 수로 장력을 막았다. 헌데 갑자기 담사가 벼락같이 좌수를 휘두르지 않는가? 상문신이 경악성을 토하며 낭아곤을 다시 휘둘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퍼억! 다음순간 뒤에서 날아든 강력한 장력이 상문신의 좌수를 으스러 뜨리고 금강복마수가 실린 담사의 손이 그자의 머리를 쳤다. {으_____ 아악!} 상문신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삼 장이나 날아가 땅에 쳐박혔 다. [크으!] 이어서 담사 또한 나직이 신음성을 흘리며 허공을 날더니 나무 에 부딪쳐 떨어졌다. 최후의 기력을 다 짜내어 금강복마수를 발휘한 담사는 거의 기 절하다시피 눈앞이 캄캄하고 전신의 기력이 쑥 빠졌다. 그는 땅에 내려서자 마자 그대로 무너질 듯 주저앉았다. 그의 가 슴은 옷자락이 처참히 찢겨 있었고 그 사이로 선혈이 스며나왔다. 담사는 흐릿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상문신은 머리가 두부처 럼 으깨어져 즉사했고 그 옆에 비천신괴 조일이 쓰디쓴 고소를 지 으며 서 있었다. 조일은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 중의 고수다. 그런 그가 본의 아 니게 암습을 한 것이 되었으니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문득 이때, 한 줄기 갸날픈 인영이 날아오면서 외쳤다. {담상공!} 담사는 멀어져 가는 의식의 끈을 잡기 위해 눈을 껌벅거렸다. 눈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미녀, 쏟아지는 폭우에 옷이 젖어 전신 이 굴곡이 뚜렷이 드러나 사내의 음심을 자극했다. 북천일미 뇌옥연, 수려한 미모와 고혹한 몸매를 지닌 여인은 바로 뇌옥연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빗물과 섞여 주르르 흘러내렸 다. 상대가 자신의 적이 아님을 확인한 담사의 머리가 이내 느릿하 게 기울어져 갔다. 제 38 장 나타난 奇人 개방방주 백염호개 진방산은 흉험히 덮쳐오는 귀파 손예랑의 괴 장에 식은땀을 흘렸다. 이십여 초가 지나자 그는 손목이 저려오며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타구봉법이 비록 개방의 독문절기였지만 손예랑의 괴장은 음유 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기묘하게 휘어지는데 도저히 대적하기가 어 려웠다. 한쪽에서 지켜보던 청해존자가 담담히 외쳤다. {예랑, 잠시 손속을 멈추시오.} 손예랑은 힐끗 그를 쳐다보고 냉랭히 외쳤다. {늙은이도 마음이 동하면 덤비지 그래?} 그러면서 그녀는 재빨리 괴장을 독랄하게 휘둘렀다. (저 늙은이가 방해하기 전에 이 놈을 먼저 없애야지.) 손예랑은 내심 살기를 품으며 벼락같이 괴장을 유성간월의 수법 으로 후려치며 좌수를 재빨리 튕겼다. 순간 두 가닥의 지풍이 소리 없이 뻗어갔다. 청해존자는 손예랑이 지풍을 전개하자 다급히 외치면서 뛰어들 었다. {방주, 산화지(散花指)를 조심하시오!} 진방산은 그의 외침에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 청해존자의 장력이 지풍을 막으며 좌수로 금나수법을 사용해 괴장을 잡아갔다. {늙은이가 죽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손예랑은 분노성을 지르며 괴장을 회전시켰다. 순간 청해존자는 움찔하면서 손을 반듯이 치켜세우면서 칼날같 이 괴장을 쳤다. 탕! 장과 괴장이 부딪치자 둔탁한 소음이 터졌다. {이런 육시랄 늙은이!} 손예랑은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파오자 괴장을 좌수로 옮기며 재 빨리 혈마지를 쏘아냈다. 펑! 펑! 펑! 세 가닥의 혈마지가 섬전같이 쏘아오자 청해존자는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혔다. 목표를 잃은 혈마지는 기둥과 부딪치자 불길을 퉁겼다. 팟팟팟! 단단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한 치나 패여 들어갔다. 청 해존자와 중인들은 새삼 혈마지의 위력에 가슴이 철렁했다. {예랑, 혈마지가 비록 절세의 지공이지만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당할 수는 없을 것이요.} 청해존자는 재빨리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닥쳐라, 오가야! 네놈들이 떼거리로 덤벼도 이 노파는 눈하나 깜짝 안할 테니 헛소리 말고 이것이나 받아 봐라.} 괴장을 맹렬히 휘두르며 우수를 부챗살처럼 펼치며 오지를 쳐냈 다. 그와 동시에 손예랑의 전음술로 적용화련에게 말했다. {련아야, 아무래도 이들을 당하기는 무리이니 너라도 빨리 빠져 나가거라.} 적용화련은 흠칫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당대의 고수들이다. 나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나의 아이까지 있으니... 우선 여기를 피하고 보자. 손예랑이 잡힌 다 해도 이들은 그녀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니 먼저 피해야 되겠 어.) 그렇게 결정을 마음 속으로 내리자 그녀는 추호도 지체하지 않 고 몸을 밖으로 날렸다. 휙! 환영분광(幻影分光)의 절대적인 경공신법을 쓰는 그녀의 신형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린다 싶자 어느 새 그녀의 신형은 문을 지나 마당에 내려서고 있었다. {잡아랏!} 제일 먼저 그녀가 도피하는 것을 본 송방춘이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순간 손예랑은 청해존자에게 재빨리 장력을 쏟아내고 문앞을 막 아섰다. {이놈아, 내가 살아 있는 이상 아무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 다!} 그녀는 교갈을 지르며 괴장을 맹렬히 휘둘렀다. 송방춘은 그녀의 선풍같은 위세에 뒤로 물러났다. 이내 몇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 들었지만 문은 작고 손예랑이 지 키고 있으니 제대로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돌연 황보가혜가 몸을 날리며 외쳤다. {창문으로 나가라!}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몇 사람의 인영이 재빨리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손예랑은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당에는 적용화련을 따라온 흑의인들과 송방춘의 수하들이 손 발을 날쌔게 움직이며 맹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헌데 흑의인들의 무예가 하나같이 신랄하고 악랄하며 송방춘의 수하들은 상대가 되 지 않았다. 하지만 대청에서 백상천, 황보가혜, 냉유도 등이 달려나와 합세 하자 흑의인들은 반대로 몰리기 시작했다. {혜매,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빨리 그 마녀를 추적하시오!} 백상천의 이 말에 황보가혜는 맹렬히 검을 휘둘러 한 흑의인의 가슴을 찌르며 재빨리 몸을 날렸다. {먼저 갈 테니 빨리 따라오세요!} 황보가혜가 정문을 벗어나자 뒤따라나온 개방방주, 냉유도 등이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느 새 나온 송방춘, 단천금, 유주랑 등도 이들에 못지 않은 신 법을 전개하면서 뒤를 따랐다. 헌데 그 중 단천금의 신법은 마치 물 위를 스치듯이 나라가는데, 그것은 절정의 경공신법인 초상비(草上飛)임이 분명했다. 그가 땅을 디딘 부분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초상비의 경공 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혜천대사에 못지 않을 공력을 지 닌 것이 아닌가? 아무리 그가 광동성 명문집안의 출신이라 해도 그의 나이로 불 때 한갑자의 공력없이는 시전할 수 없다는 초상비를 시전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가흥현를 벗어나 동쪽으로 화살처럼 신형을 날리는 적용화련의 신법은 마치 바람같았다. 이미 날은 어둑해지는데 길가던 평인 몇 사람이 그녀를 보았지 만 그들의 눈에는 희끗한 그림자만이 스쳐자났을 뿐이었다. 한동안 관도를 달리던 그녀는 일순 관도 옆 숲 속으로 방향을 꺾었다. 하늘에는 어느 덧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먹구름에 가려져 떠오르는 달(月)도 사라지고 있었다. 숲 속은 갑자기 음산해지는 것 같았다. 휘이_____ 잉_____! 서늘한 바람(風)이 적용화련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녀는 초조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숙였다. 품 안 에 아기 수혈이 점혈되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문득 그녀의 봉황을 닮은 듯한 눈에 이슬이 맺혔다. (아이야. 너만은 곱디곱게 키울려고 했는데.... 어미를 잘못 만나 서....) 문득 이때, 멀리서 은은한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꿈 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써 쫓아 왔구나...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절대 붙잡힐 수 없다.} 그녀는 자신에게 외치듯이 중얼거리며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돌연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두... 처음에는 빗방울이 듬성하다가 곧 바람과 함께 차가운 비가 쏟 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사위는 먹물같이 어두워졌다. 쏴아_____ 아____!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숲 속은 자욱한 우연에 휩싸여 마치 장막에 덮힌 듯 뿌옇게 화했으며 천지가 온통 빗소리로 우울한 분 위기를 이루었다. 적용화련은 아기를 품 속에 꼬옥 껴안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문득, 한 소리 폭갈이 터져나왔다. {서랏!} 말과 동시에 한 줄기 검광이 벼락같이 날아왔다. 적용화련은 허공에서 재빨리 호선을 그리며 내려섰다. 천갈 냉유도, 일 년 전과 달리 그의 표정은 더욱 뜨겁고 잔인함을 풍기고 있 었다. 전날 마교에 의해 수모를 당한 그는 마교의 인물들에게 이를 갈고 있엇다. {흐흐.... 정말 예쁜 얼굴이야.} 그는 음흉맞은 괴소를 흘리며 말했다. {사내라면 한 번쯤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싶은 미모란 말이야. 하나 당신은 마교의 계집, 즐기는 거라면 몰라도 흐흐흐...!} 잠시 말을 멈춘 냉유도는 칙칙한 시선으로 적용화련의 몸매를 핥듯이 훑어봤다. {흐흐 물론 내가 당신을 원한다 해도 당신 같은 여인에게 나 정 도야 눈에 차지도 않겠지. 안그래?} 적용화련은 냉유도의 욕정에 천 눈초리에 치를 떨었다. {더러운 인간 같으니...!} 그녀는 차갑게 외치고는 재빨리 몸을 날리며 섬섬옥수를 뻗었다. {흐흐.... 진정하시지.} 냉유도는 비웃음을 흘리며 추파조란(推波助瀾)의 검식으로 검을 엇비스듬히 쳐냈다. 그러자 적용화련의 장력이 갑자기 사라지고 손목을 비틀면서 식 중이지를 뻗었다. 펑! 펑! 두 줄기의 혈마지가 섬광처럼 쏘아왔다. {혈마지!} 냉유도가 경악성을 터뜨리며 다급하게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혈마지의 성취는 귀파 손예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우욱!} 냉유도는 나직한 신음성을 흘리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의 왼 쪽 어깨에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려 피가 솟아 나왔다. 순간 적용화련의 신형은 비조처럼 숲속으로 사라졌다. 냉유도는 흠칫 놀라며 버럭 노성을 질렀다. {마녀가 동쪽으로 달아났소.} 외침과 동시에 그는 상처의 고통을 무릅쓰고 재빨리 뒤를 쫓았 다. 쏴아아...! 폭우는 여전히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전신에 비로 후줄근히 젖은 적용화련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나는 비를 맞아도 괜찮지만 아기만은 안돼. 어디 동굴이라도....) 그녀는 분노와 초조에 미칠 것만 같았다. [멈춰라 마녀!] 그때 싸늘한 외침과함께 갑자기 전면에서 두 개의 인영이 튀어 나와 그녀를 막아섰다. (개방방주와 송방춘!) 나타난 인물들을 확인한 적용화련은 내심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녀를 막아선 자들은 바로 개방방주 진방산과 송방춘이었던 것이 다. (이 두사람은 나 혼자로서 감당하기 힘들다!) 적용화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송방춘은 원한에 찬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요녀! 순순히 항복을 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요녀란 말에 적용화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닥쳐요. 간악한 늙은이, 감언이설로 함정에 빠드리다니 그래도 당신들이 정파백도를 자처하는 작자인가요?} 듣고 있던 진방산이 냉막하게 말했다. {마의 무리들에게 수단방법을 가릴 필요는 없겠지.} 원래 악을 원수처럼 증오하는 진방산은 냉혹하게 말하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섰다. {마교의 악마들은 수단이 잔혹하고 교활하니 그에 걸맞는 대응 을 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닥쳐라!] 적용화련은 참지 못하고 섬섬옥수를 뻗었다. 순간 두 줄기 피빛 섬광이 벼락처럼 전상방의 미간과 천돌혈을 향해 쏘아갔다. {혈마지로군!} 진방산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죽장을 휘둘렀다. 바로 그 순간 적용화련의 신형이 발도 움직이지 않고 무릎도 굽 히지 않은 채 몸을 꼿꼿이 허공으로 날렸다. 그녀의 목적은 진방산 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달아날 틈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딜....!] 진방산은 그녀의 가공할 신법에 내심 놀라면서도 그림자같이 그 녀의 뒤로 따라붙이며 죽장으로 하반신을 쓸어갔다. 그러자 적용화련은 몸을 허공에서 눕히며 우수로 질풍같이 일장 을 쳐냈다. 그녀의 이 장법은 눈부실 정도로 빨랐으며, 진방산은 자칫 오산으로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옆에 있던 송방춘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방주, 조심하시오!} 다급히 외치는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일장을 뻗었다. 순간 그의 장력이 적용화련의 장력과 부딪치자 그 사이 진방산은 재빨리 몸 을 피했다. 적용화련은 장력이 부딪치자 그 탄력으 이용해 비조같이 왼쪽 숲으로 날아갔다. {내려가라!} 헌데 그 순간 허공에서 노성이 터지면서 한 줄기 웅후한 장력이 쏟아졌다. 적용화련은 깜짝 놀라며 급히 일장을 쳐냈다. 퍼펑! 북치는 듯한 굉음과 동시에 그녀는 호선을 그리며 땅에 내려섰 다. 그와함께 몇줄기의 인영이 내려서면서 그녀를 포위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적용화련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천갈 냉유도를 위시하여 혜천대사, 황보가혜 등 모두 칠인이 그녀를 빙 둘러 싸고 있지 않는가? {아미타불....} 혜천대사가 나직이 불호성을 외웠다. {여시주, 아이를 위해서라도 순순히 우리를 따라가는 것이 좋을 듯하외다.} 적용화련은 문득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대사님, 호의는 고맙지만 나의 아들도 결코 어미가 순 순히 잡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예요.} 황보가혜가 날카롭게 외쳤다. {저런 요녀에게 사정을 둘 필요는 없어요. 이런 때 어린 자식까 지 들먹이다니 역시 마교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만사만악(萬邪萬惡) 의 악인(惡人)들 뿐이예요.} 송방춘이 동의하듯 말했다. {대사님, 그렇습니다. 마교의 무리들에게 조금도 사정을 둘 필요 가 없읍니다.} 혜천대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여시주, 이 늙은이는 더 이상 피를 원하지 않소. 손 선배는 이미 잡혔고 다른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응원군은 없을 것 이외다.} 적용화련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들이 모조리 죽고 손대랑마저 잡혔다니... 혜천대사는 결코 거 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 어!) 일순 그녀는 힐끗 주위를 살펴보면서 그 중 제일 약하게 보이는 황보가혜를 향해 번갯불처럼 비쾌하게 쏘아갔다.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적용화련이 공격해 오자 황보가혜는 재빨 리 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녀는 비록 검을 쳐올렸으나 초식이 반도 채 펼치기 전 에 어깨에 일장을 맞고 물러섰다. 그와 동시 적용화련의 신형은 바 람같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멈추어랏!} 옆에 있던 송방춘이 벼락같이 일장을 쪼개왔다. 적용화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뒤로 돌리며 지풍을 퉁겼 다. 이 수법은 그녀가 필사의 도주를 위해 전력으로 시전한 것이라 송방춘이 대경실색하면서 피하려고 했지만 한 가닥의 질풍이 그의 장력을 뚫고 미심을 파고 들었다. {으억!} 송방춘은 비명을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가 갑자기 죽어 버리자 중인들은 일순간 살기가 솟구쳤다. {죽어랏!} 냉유도가 벼락같이 외치며 검과 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적용화련 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신검합일(神劍合一), 어검술의 초보단계로 여기서 한 단계 올라 가면 백 장 밖에서도 검을 날려 적을 상상할 수도 있는 검도(劍道) 의 상승경지였다. 냉유도의 신형은 빛살처럼 빨랐다. 적용화련은 등 뒤로 부터 서릿발 같은 검기가 날아오자 서공에 서 재주를 넘으며 손끝을 칼날같이 세워 검을 후려쳤다. 쾅! 장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은 아래로 떨어졌다. 냉유도는 부딪치는 순간 쇠를 치는 듯한 느낌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천마산수(天魔散手)! 아미타불....} 혜천대사는 놀라운 듯 외치며 불호를 외웠다. 적용화련은 냉유도의 검을 막기는 했으나 공력을 이을 수가 없 어서 재빨리 내려서며 다시 발끝으로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순간 진방산의 죽창이 벼락같이 옆구리를 파고듬과 동시에 황보 가혜가 어느 새 득달같이 달려와 검으로 아기를 향해 찔러왔다. 적용화련은 미친 듯이 노했다. 설마 아기를 노리고 살수를 쓸줄 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녀였다. {비열한 수법을 쓰다니!} 적용화련은 노호성을 지르며 몸을 돌려 겨우 그녀의 검을 피했 다. 그러나 진방산의 죽장은 피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다급히 섬섬 옥수로 지풍을 쏘아내며 왼발로 죽장을 걷어찼다. 이같은 그녀의 수법은 실로 기묘하면서도 유효적절했다. 쏴_____ 아___ 아! 장대같이 굵은 빗줄기는 그칠줄 모르고 쏟아져 내렸다. 혜원대사는 폭우를 전신으로 맞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 다. 한 여인을, 그것도 아기를 안은 여인을 합공하는 눈앞의 사람 들을 지켜보는 그의 입가에 쓰디쓴 고소가 스쳤다. (아미타불! 정도인으로서 아무리 그녀가 마교의 사람이라지만 수 명이 협공을 하다니...) 그는 내심 죄책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헌데 혜원대사 말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적용 화련을 합공하는 군협들을 지켜보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들은 바로 광동 다씨세가의 소가주인 단천금과 황실 어영위의 부장인 유주강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장내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 을 뿐 아무런 행동도 없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오십여 합이 지났다. 진방산의 죽장은 정대하면서도 날카롭고 황보가혜의 신녀검은 서릿발같은 예기를 뿌리면서 악랄하게 아기를 노리고 찔러갔다. 적용화련은 절묘한 신법과 혈마지로서 대응하고 있지만 그녀는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사실 품에 어린 아기를 안고 한 손으 로만 두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 황보가혜의 눈빛이 돌연 매서워졌다. {죽어랏, 요녀!} 그녀는 증오서린 교갈을 외치며 신녀검을 휘둘렀다. 검끝은 정확 히 아기의 머리를 향해 베어갔다. 도저히 여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악랄한 수법이었다.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천진난만하고 순 진무구하던 황보가혜가 이니었던가? 허나 무림맹이 폐허로 변하고 그녀의 부친마저 잃은 지금 그녀 는 증오와 원한에 불타는 여인이 되어버렸다. 사실 누구라도 그녀의 입장이 된다면 욕할 수만은 없는 일이 아 닌가? 거기에다 내심 연대강을 사랑했던 그녀로서는 오히려 당연 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적용화련은 황망히 천마산수의 진결을 운기하면서 신녀검을 엇 비스듬히 후려쳤다. 그 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진방산의 죽장이 벼락같이 어깨를 후려쳐왔다. {으음!} 재빨리 몸을 허공으로 날렸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친 적용화련은 죽장을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다리에 맞고 말았다. 그녀는 실끊어진 연처럼 추락했다. {호호호. 요녀! 우선 네년의 얼굴에 멋진 상처를 만들어 주겠다.} 황보가혜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터뜨리며 좌장을 쳐내는 동시 신 녀검으로 적용화련을 베어갔다. 황보가혜의 장력이 아기의 몸을 향해 날아오자 적용화련은 비명 을 지르며 급히 몸을 틀어 아기를 감싸안았다. {안돼, 아기만은... 으윽!} 놀라 외치던 그녀는 그 바람에 신녀검에 어깨가 베어져 나뒹굴 었다. 산발한 머리는 아무렇게나 흘러내리고 전신은 피로 젖었다. 어깨 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아기의 얼굴을 적시자, 적용화련은 처참히 부르짖었다. [호호! 죽엇!]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황보가혜가 재차 일검을 뻗어왔다. 이미 중상을 입은 적용화련은 꼼짝없이 그녀의 일검에 베일 위기에 처 했다. 적용화련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차앙! 바로 그 위기의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면서 적 용화련을 베려던 황보가혜의 보검이 튕겨나갔다. 돌연 옆에서 날아 든 장검이 그녀의 신녀검을 막은 것이다. [단공자! 당신이...!] [무슨 짓이오?] 중인들은 눈을 부릅뜨며 황보가헤의 공격을 물리친 인물을 바라 보았다. 갑자기 손을 써서 적용화련을 구한 인물은 바로 광동 단씨 세가의 소가주인 단천금이었다. 적용화련을 막아선 단천금은그는 혜천대사 등 중인들의 얼굴을 일별하며 냉랭히 말했다. {그녀가 아무리 마도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정도인으로서 협공을 하는 것만해도 수치스런 일인데 하물며 어린아이까지 죽이려고 하 다니, 나 단천금 비록 정의협객은 아니지만 이런 부당한 일은 참을 수가 없소!} 그의 냉랭한 목소리는 의분에 떨리고 있었다. {단공자, 그녀는 마교의 요녀요.} 개방방주 진방산이 무슨 짓이냐는 듯이 외쳤다. 단천금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 내비록 우연히 이일에 말려들기는 했으나 공도에 어긋하 는 일에는 동조할 수없소.} 황보가혜는 경멸서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흥, 처음부터 그랬다면 왜 지금에서야 나서지요?} 단천금은 흠칫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왜요, 내 말이 가슴이 떨리는가요. 저 요녀가 미인이라서 나서 는 게 아니고 의분을 느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나서 지 그랬어요.} 황보가혜의 어조는 잔뜩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단천금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겁에 질 린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무어라고 해도 나는 상관치 않겠소. 허나 이 분 소저를 더 이상 핍박한다면 나 단천금은 비록 힘이 없으나 결코 이 일을 좌시하지 않겠소.} 혜천대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단시주, 시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라 이 일은 무림의 장래가 달려 있으니 저 분 여시주를 소림으로 데 려가야 하오.} {혜천대사님, 저는 평소 누구보다도 대사님을 존경해 왔읍니다. 헌데 아무리 무림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한 모자를 핍박하면서까지 무림의 장례를 위한다는 것은 저로써는 이해할 수가 없읍니다.} 단천금은 담담히 말했다. {이들 모자를 괴롭혀서 정의를 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 같습니다.} 혜천대사는 심히 괴로운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 었다. 진방산은 힐끗 적용화련의 모습을 주시하며 말했다. {단공자, 젊은 혈기에 의분을 느끼는 것은 이해하지만, 자네는 마교의 악랄함을 모르고 있네.} 황보가혜가 신녀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더 이상 말을 것도 없어요. 우리의 일을 방해한다면 그 누구도 살려둘 수 없어요!} 단천금은 신녀검이 벼락같이 날아오자 단천금은 송문고검(松紋古 劍)을 중상단으로 겨누며 바쾌하게 흔들었다. 순간 세 가닥의 한광 이 꽃잎처럼 퍼지면서 신녀검을 봉쇄했다. {삼황검법(三皇劍法)____!} 개방방주 진방산은 해연히 놀라며 외쳤다. {이제보니 단공자는 황궁의 무예를 익혔군!} 말과 동시에 그의 죽장이 비쾌하게 단천금의 손목을 후리쳐 왔 다. 삼황검법(三皇劍法)-! 이는 황궁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무예로 황실을 경호나는 무 인들이 익히고 있다는 삼황검법은 화려하면서도 현묘한 무예였다. 황보가혜는 단천금의 검법이 이렇게 기묘할 줄은 몰랐는지라 재 빨리 옆으로 피하면서 석자나 물러섰다. 이때 마침 진방산이 공격하자 그 틈을 놓칠세라 신속하게 적용 화련을 찔러갔다. 흠칫 놀란 단천금이 다급히 외쳤다. {유형, 그녀를 막으시오!} 이 말에 한쪽에 서 있던 유주강은 자신도 모르게 황보가혜를 막 으려고 몸을 날렸으나 이미 늦은감이 있었다. 신녀검의 검끝은 간신히 나무에 기대어 선 적용화련의 옆구리를 악랄하게 파고들었다. 이미 탈진할 대로 탈진한 적용화련은 그것을 피할 힘이 없었다. 시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한소리 천둥치는 듯한 불호성이 중인들의 귓전을 파고든다 싶자 황보가혜는 갑자기 한 가닥 부드러운 경력이 자신을 떠미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적용화련의 몸은 무엇에 딸려가듯 한쪽으로 홱 날 아갔다. 갑작스런 이 사태에 중인들은 모두 손을 멈추고 한쪽을 쳐다보 았다. 쏴아아! 폭우가 쏟아지는 나무 사이에 허름한 승포를 걸친 노승이 한명 표연히 서있었다. 하늘에서는 장대발같은 폭우가 세차게 쏟아져 내 리고 있지만 노승의 승포에는 한 점의 물기도 묻어 있지 않고 빗 물이 그의 몸에 닿을 때마다 퉁기듯이 비껴 내렸다. 무형의 기운에 딸려간 적용화련과 아기는 노승의 품에 안겨 있 는데 이미 수혈이 점혈되었는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중인들은 노승의 몸에서 펼쳐지는 무형의 선천강기에 경악의 눈 빛이 되었다. {사숙조님!} 바로 그 직후 혜천대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이마를 진흙탕에 박았다. 노승은 한 점의 탁기도 없는 고요한 시선으로 중인들을 둘러보 았다. {아미타불... 정도인으로서 마도와 똑같이 행동을 한다면 마도인 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중인들의 귓전에 닿았을 때는 천둥치듯 크 게 울렸다. 그러자 진방산, 황보가혜, 냉유도 등은 자신들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노승은 바로 범천신불(梵天神佛) 법공대선사였다. 그는 나직이 탄식을 흘리며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순간 그의 신 형이 솟구친다 싶자 어느 새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혜천대사는 한동안 망연한 눈빛으로 법공대선사가 사리진 방향 을 응시했다. 법공선사를 본 적이 없는 단천금과 유주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혜천대사를 쳐다보았다. {아미타불....} 혜천대사는 나직이 불호성을 외우며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중인들도 느릿하게 폭우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단천금과 유주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유형, 방금 그 노승이 누구인데 혜천대사 같은 분도 무릎을 꿇 는다 말이오?} 유주강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삼십대도 되지 않은 그들이 어떻게 해서 백년 전의 법공대선사를 알겠는가? 쏴아아아... 폭우는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담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뇌옥연의 수려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뇌옥연은 애정이 담뿍서린 얼굴로 그의 품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객방의 등잔 불빛은 꺼질 듯이 흔들거렸다. {조노인은 어디갔소?} {그 분은 소림으로 먼저 가셨어요?} 뇌옥연의 대답에 담사는 힐끗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노인이 말하기를 담랑께서도 소림으로 오면 했어요. 이번에 소림에서 마교와의 결전을 위해 강호 각대문파에 은밀히 무림첩을 배포했어요.} 담사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가슴에서 은은한 통증이 번 지자 이를 악물고 자세를 바로했다. {담랑,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조노인의 말로는 이틀 정도는 쉬 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녀는 급히 외치며 담사의 몸을 부축했다. {나는 괜찮소. 운기조식을 할 테니 주위나 살펴 주시오.} 담사는 냉랭히 말을 하며 책상 다리를 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뇌옥연은 무슨 말을 할듯 입술을 오물거렸으나 그의 엄숙한 표정 에 원망스러운 듯 눈을 흘기며 문쪽을 감시했다. 어느 새 폭우가 그치고 가느다란 빗줄기가 가끔 창문을 두드렸 다. 뇌옥연은 지루한 표정으로 힐끗 담사를 응시했다. 벌써 두 시진 담사의 자세는 일점의 움직임도 없이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문득 담사의 눈빛에 번쩍 빛이 났다. 그와 동시 나직이 깊은 숨 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자세를 고쳤다. 뇌옥연은 그가 눈을 뜨자 한 마리 제비처럼 훌쩍 날아 담사의 품에 안겨들었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담사는 차마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괜찮소. 그런데 나에게 무슨 약을 먹였소?} 뇌옥연은 요염한 미소　 지었다. {조노인이 대환단(大丸丹)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대환단이라면 소림사의 성약(聖藥)이 아니오?} 담사가 놀란 듯이 외치자 뇌옥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환단(大丸丹)-! 소림의 절세 신단으로 평범한 사람이 먹는다면 무병장수 하는 것은 물론이요, 무예를 익힌 사람이 복용한면 단숨에 삼십 년의 공 력을 높여주는 천하에 보기드문 절세 영약이었다. {조노인의 말로는 그 성약이 준극봉의 노신선에게 얻은 것이라 고 했어요.} 담사는 이 말에 고소를 지었다. (법공대사에게 받았는가 보군.) 그는 내심 법공대사의 모습을 그리며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뇌옥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밤이 깊었는데 어디로 가시려고...?} 담사는 움찔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밤새 그를 간호하느라고 약간 헬쓱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미모 는 조금도 손상이 없었다. 게다가, 애틋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자태는 실로 가련해하면서도 사내의 욕심을 자극시켰다. 담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담사에 의해 소녀에서 한명의 성숙한 여인으로 변한 뇌옥 연은 그의 눈빛을 받으며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담사의 손끝이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뇌옥연은 무너지듯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뇌옥연은 자신의 몸이 침상에 눕혀지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말 했다. {불을 꺼 주세요!} 담사는 피식 실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퉁기자 방안은 일순 어둠 에 잠겨 들었다. 담사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뇌옥연의 몸은 불같이 뜨거 웠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질 때마다 그녀는 온몸으로 흐느꼈다. 비록 그녀와 두 번째의 관계였으나 담사는 꽃뱀처럼 안겨드는 그녀의 율동에 새삼 여인의 정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혼신 의 힘으로 파고들었다. 뇌옥연은 사지백해로 번지는 황홀한 희열에 자지러지는 비음을 터뜨렸다. 여인으로서의 본능에 눈을 뜬 그녀는 끝없이 함몰되어 가는 분 홍빛 나락에 전신에 내맡겼다. 파도가 굽이쳐 올 때마다 그녀의 입 에서는 짐승같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담사 사내는 강했고 여인은 활화산이었다. 광란의 밤은 그렇게 깊이 긴밤을 지세우고 있었다. 제 39 장 恐怖의 魔 屍 -소림사(少林寺)! 당금 장문인은 혜비(慧悲)대사로 철불(鐵佛) 혜천대사에게는 사 형이 되는 고승었다. 소림은 천년 전 달마대사의 창건이래로 무림의 정신적인 지주고 그 위명을 오호사해(五湖四海)에 드날려왔다. 비록 삼십년 전 전륜교의 침입으로 한때 위명이 위축되었으나 소림의 힘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무림제일의 대파였다. 역근경(易筋經)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칠십이종 절기는 창건 이래 아직 그 누구도 완전히 습득한 이가 없고 범천신불 법공대선사도 그 중 겨우 삼십 육종의 절기를 익혔을 뿐이었다. 소림사(少林寺),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고 속세의 일에 관여를 하 지 않는 천 년 전통의 소림은 태산북두렸다. 승산 기슭에는 아침부터 많은 무림인들로 붐볐다. 소림사로 향하는 산길에는 가지각양의 인물들이 들끓고 있는데 그 중 두 명의 초라한 남녀가 주위 풍경을 살피며 느릿느릿 걸음 을 옮겼다. {호호. 이렇게 촌부로 변장하니 아무도 우리를 몰라 보는군요? 그 역용술을 어디서 배웠어요?} 여인이 기쁜 듯이 말하자 삼십대 가량의 청년은 희미하게 웃었 다. {연매가 배우고 싶다면 언제든지 다르쳐 주겠소.} {정말이예요, 담랑?} 그녀는 기쁜 듯이 말하며 그의 손에 매달렸다. 주위의 길가던 사람들이 이들의 모습을 흘깃흘깃 쳐다보았으나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내의 얼굴만 행복한 눈빛으로 응시 했다. 이 두 사람은 물론 담사와 뇌옥연이 변장을 한 모습이었다. 이곳 숭산까지 오는 동안 뇌옥연은 잠시도 그와 떨어지지 않고 같이 행 동해 왔다. 담사에 돤해 모든 것을 알고있는 뇌옥연으로는 그 동안 의 며칠은 정말 꿈같은 나날이었다. 뇌옥연은 눈부신 듯 담사의 얼굴을 주시하며 말했다. {이번 소림사의 일이 끝나면 우리는 심산에 은거하기로 해요. 저 는 피를 흘리는 강호생활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담사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앞을 주시했다. 웅장한 소림사 산문(山門) 앞에는 네 명의 승인이 사람들을 접대 하고 있었다. 담사가 그 네 승려를 바라보니, 모두가 엄숙한 표정에다가 눈빛 이 맑고 정광이 번쩍거리는 것이 내외공을 겸비한 고수들임을 짐 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소림 십팔나한(十八羅漢) 중 네 명의 승인이었다. 소림에 서는 이번 행사를 중요히 여겨 특별히 이들을 산문 앞에 베치한 것이었다. 산문 앞에는 약 오십 명 가량의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삼삼오오 짤을 지어 웅성거리고 있는데, 형세를 보아하니 그들은 소림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몹시 불만인 듯 투덜거리고 있었다. 담사와 뇌옥연이 접수대로 다가서자 사십대의 승인이 정중히 합 장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두 분 시주께서 청첩장을 가지고 계신지요?} 담사는 움찔한 표정으로 뇌옥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뇌옥연은 그를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저는 북천뇌보에서 왔어요. 저의 아버님이 이미 오셨을텐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승인은 의아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 며 말했다. {여시주가 뇌소저란 말씀입니까?}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자태를 훑어보았다. 지금 뇌 옥연의 모습은 영락없이 촌부차림이었던 것이다. {그래요. 내가 뇌옥연이예요.} 그녀가 소리치자 승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북천뇌보의 뇌소저는 북천일미라는 미명으로 그 자태가 수려하 고 미모가 출중하거늘 소저께서는 아무래도...} 승인은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문득 이때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동시에 수필의 인마가 들이닥쳤 다. 담사는 그들을 발견한 순간 움찔한 기색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 렸다. 모두 여섯 필의 말이 멈추어섰는데 금화장의 장주인 금반산을 위시하여 금산혜, 냉유도, 진령산등 금화장에 나타났던 중인들이었 다. 뇌옥연은 이들을 보자 황망히 금산혜를 불렀다. {혜매!} 금산혜는 허름한 촌부가 그녀를 부르자 흠칫한 표정으로 뇌옥연 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금산혜는 뇌옥연의 초라한 모습에 미간을 찡그리며 묻자, {혜매, 나는 뇌옥연이야.} 금산혜는 이 말에 뇌옥연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호호... 내가 변장을 해서 몰라 보는구나.} 뇌옥연의 옥음에 금산혜는 일순 다급히 외쳤다. {아니, 언니, 이게 무슨 꼴이예요?} 금산혜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뇌옥연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이 떠나더니... 어떻게 된 일이예요?} {설명을 하자면 말이 길어지니 우선 들어가기나 해.} 그녀는 말하면서 금산혜를 이끌고 그녀를 막아서던 승인들에게 말했다. {이제야 나를 알겠어요?} 승인은 멀쓱한 표정으로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승이 잠시 몰라뵈었읍니다. 암으로 들어가시지요.} 잠시 후 담사는 아무런 제시도 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산문 을 들어서자 군데군데 건물이 세워져 있고 승인들이 분주히 움직 이고 있었다. 그들 일행은 두 명의 사마승의 안내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소림사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쥐죽은 듯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다. 몇채의 전각을 지나 소로로 들어서자 한채의 전각에 도착했다. 전각 앞에는 수십 명의 중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전각 앞 단상 주위로 수십 개의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차와 음식이 차려 져 있었다. 담사는 일견해 보아도 여기에 모여있는 군웅들이 강호에서 명성 을 떨치는 고수들임을 알수 있었다. 그가 알 수 있는 사람만 해도 십여명은 넘었다. 단상 바로 아래 위치한 탁자에는 무영신개 동추평, 북천뇌보의 보주인 뇌승, 청해 존자 등이었고, 좌측 탁자에는 태극도인 등 구파일방의 종사인 듯 한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담사와 뇌옥연은 금산혜와 어울려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탁 자에 앉았다. 뇌옥연과 금산혜는 그 동안 지나온 이야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담사는 힐끗 금산혜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은 비록 즐거 운 듯했지만 간혹 주위를 살펴보며 눈가에 수심을 띠웠다. 땡! 땡_____ 땡! 문득 맑은 종음이 울리고 동편의 소로에서 몇 명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앞장 선 사람은 무림맹의 감찰전 부전주인 귀견수 조중과 태허 천존의 딸 황보가혜, 그리고 그 뒤로 무림맹의 살아남은 무인들이 이열로 걸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전각 안에서 창노한 불호성과 함께 두 명의 노승이 뒤로 수 명의 승인을 거느리고 나왔다. 두명의 노승 중 한명은 철 불 혜천대사였다. 그는 온후한 얼굴에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 가 유달리 큰 노승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들이 나타나자 군웅들은 모두 일어서서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귀가 큰 노승은 중인들의 인사에 합장으로 답례한 뒤 장내를 둘 러보며 말했다. {아미타불 여러분들이 이렇게 본사에 납시어 준데 대하여 소승 은 무어라고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할지 모르겠읍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수천 개의 종이 한꺼번에 울리는 듯 맑고 우렁찬 음성이었다. {소승이 이렇게 여러분들을 초청하게 된 것은 당금 무림에 마교 가 출현하여 많은 무예계의 동도들이 죽고 상하는 참사가 벌어지 고 있음에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함입니다.} 뇌옥연이 옆에 앉은 담사에게 속삭였다. {담상공! 저분이 소림방장선사인 혜비대사예요. 그 뒤에 서신 혜 천대사님은 상공도 아시죠? 그리고 좌측 탁자에 있는 사람이 무당 의 장문 청운진인(靑雲眞人)이고 그 옆에 있는 분은...!} 열심히 설명을 하던 뇌옥연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놀란 듯이 눈 을 크게 떴다. [방....방장님! 큰일입니다!] 갑자기 한 명의 승인이 피투성인 채로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던 것이다. [정오(正悟)야! 무슨 일이냐?] 혜비대사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정오라고 불리운 승인은 입에서 피를 쏟으며 더듬 입을 열었다. {마....마교에서 뒷산으로 쳐들어와... 우리가 감금하고 있던 귀파 (鬼婆)를 구출하고 갔읍니다.} 정오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고개를 꺾었다. 혜비대사는 일순 다급히 합장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 본사에 일이 생겼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혜천대사와 다급히 몸을 날렸다. 일이 심 상치 않음을 느낀 군웅들은 여기저기서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마교놈들이 쳐들어 온 모양인데 나도 가겠소.} 청혜존자의 외침을 깃점으로 너도나도 혜비대사의 뒤를 따랐다. 소림의 뒷산은 지세가 험악했다. 깍아지른 듯한 산벽을 굽이 돌 자 울창한 수림이 나타났다. 혜비대사는 침중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승인 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한결같이 가슴이 으깨어진 채 널 브러져 있었다. 차차창! 문득 멀리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혜비대사와 철불 혜천대사는 놀라며 황망히 걸음을 빨리했다. {마교의 사람들이 쳐들어온 것 같소이다.} 혜천대사의 말에 혜비대사는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 사제. 이들이 이토록 담대하다니... 소림의 위세를 뭘로 보고...} 그는 몹시 분노한 듯 나직이 외치다가 눈을 크게 떴다. 괴석 사이를 빠져 나가자 넓은 숲이 펼쳐지는데 한 명의 흑의인 이 십여 명의 승인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흑의인의 우수에 들린 핏빛 장검이 하늘을 날으는 것처럼 검광 을 번뜩거리며 자뭇 위세가 악랄하면서도 괴이했다. {멈추어랏!} 혜비대사가 벽력같이 호통을 치며 쏘아갔다. 흑의인은 혜비대사가 날아오자 갑자기 피빛을 띈 연검을 벼락같 이 좌우로 뿌렸다. 순간 살벌한 핏빛 광채가 유성처럼 중인들을 덮쳐버렸다. {으악!} {으____ 아악.} 비명이 연신 터지며 혜비대사와 혜천대사가 장내에 뛰어들었을 때는 승인들은 모조리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렇게 잔인할 수가...} 혜비대사는 제자들의 죽음에 비운을 참지 못하고 나직이 중얼거 렸다. {시주가 도대체 소림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렇게 잔인한 살상 을 저지르시오?} 혜비대사의 옆에 서있던 혜천대사가 복잡한 표정으로 흑의인을 주시하며 말했다. {사형, 저 청년이 바로 흑마수(黑魔手)라는 마교의 인물입니다.} 혜천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회한에 젖어 있었다. 혜비대사도 흑마수라는 이름을 듣고 있었다. {아미타불.... 시주가 소림에서 잃게 살생을 저질렀으니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겠구료?} 흑의인은 냉랭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 소림의 장문 혜비대사요?} 혜비대사의 나이는 팔십의 고령이었다. 헌데 이제 삼십도 채 되 지 않은 흑의인의 말투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흑의인은 바로 남 해로 떠났던 모용천위(慕容天威)였다. 모용천위의 무례한 말에 중인들은 분노의 표정이 되었으나 원래 수양이 깊고 아량이 넓은 혜비대사는 개의치 않고 침중히 대답했 다. {아미타불! 소시주, 노납이 바로 혜비외다. 노납에게 무슨 볼일이 라도...} 모용천위는 차갑게 말했다. {오늘 밤 삼경까지 시간을 주겠소. 그 안에 소림이 항복을 한다 면 살 수 있을 것이로되 그렇지 않다면 소림은 한 줌의 재로 변할 것이오.} 말과 동시에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날아올라 동쪽으로 쏘아갔다. {이놈! 멈추어랏!}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노호성이 터지면서 청해존자가 나타나며 모용천위의 앞을 막았다. {흥! 청해의 늙은이였군.} 모용천위는 한 줄기 음유한 장력이 날아오자 코웃음을 치며 벼 락같이 핏빛장검을 쳐냈다. {헉! 첩혈마황검( 血魔皇劍)!} 청해존자는 일순 자신의 장력이 소멸되면서 한 가닥 핏빛 광채 가 쏘아오자 놀라 외치며 옆으로 일장이나 물러섰다. {이제보니 네놈은 장안에 나타났던 그놈이었구나.} 비로소 모용천위를 알아본 청해존자는 놀라운 듯 외치며 손가락 을 부채살처럼 펼치며 자신의 성명절기인 투골음풍지(透骨陰風指) 를 쏟아냈다. {투골음풍지군. 어디 나의 천마산수(天魔散手)를 받아 보실까?} 모용천위는 비웃듯이 말하며 좌수를 뻗었다. 순간 그의 좌수가 팔목까지 녹광으로 물들고 마치 녹옥(綠玉)으로 만들어진 듯 팔목 이 은은히 광채를 띠우기 시작했다. {천마산수! 오시주, 부딪치면 안되오.} 혜비대사가 급히 외치며 선장을 뻗었다. 청해존자는 혜비대사의 외침에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재빨 리 자신의 지법을 거두어 들이며 해학승운(海鶴乘雲)의 신법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모용천위의 수법은 느린듯 했으나 실제는 불가사의할 정 도로 빨랐다. 청해존자의 신형이 허공을 치솟는 찰나 천마산수의 위력을 하반신을 휩쓸고 있었다. {으억!} 청해존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삼장이나 날아가서 내려섰다. 그러나 그는 비록 내려서기는 했으나 곧 무너지 듯 주저앉고 말 았다. 왼발이 무릎부터 완전히 칼로 베듯이 잘라져 나가 피분수를 쏟아내고 있었다. 혜비대사의 선장이 모용천위의 팔을 친 것은 너무나 늦었던 것 이다. 헌데 혜비대사는 선장이 모용천위의 팔과 부딪친 수간 손이 파 열된 듯한 고통에 하마터면 선장을 놓칠 뻔했다. (이럴 수가... 천마산수의 위력이 아무리 마교의 최고 무예라고는 하나 나의 십성공력이 담긴 선장을 맞고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니...) 혜비대사는 고통도 잊은 채 망연한 눈빛으로 모용천위를 주시했 다. 이때 멀리서 수 명의 인영이 날아왔다. 이들은 소림사에 온 군웅 들로 청해존자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모용천위는 그들을 주시하며 재빨리 몸을 날렸다. {잊지 마시오. 삼경이 지나면 소림이 쑥밭이 된다는 것을... 하 하....} 그는 위협하듯이 외치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혜천대사는 그가 사라지는 것을 고뇌서린 눈빛으로 망연히 쳐다 보았다. 하지만 이때 혜비대사는 청해존자의 상처를 보느라 혜천대 사의 모습을 살피지 못했다. 이윽고 중인들이 달려 왔을 때 모용천위의 그림자는 씻은 듯 사 라진 후였다. 승산 북쪽 기슭에 한떼의 무리들이 몰려 있었다. 한쪽에는 혈교(血轎)가 놓여 있고 그 주위로 적용군과 모용천위, 혁사군, 귀파, 적용군 등이 서 있으며 다시 그 주위에는 오백여명 의 흑의 무사들이 귀두도를 들고 숙연히 서 있었다. 어둠이 대지를 덮기 시작했다. 문득 교자 안에서 고혹적인 옥음이 흘러 나왔다. {혁장로, 지금 소림의 동태는 어때요?} 혁사군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현재 땡중놈들은 철통같이 나한진을 펼쳐 수비를 하고 있고 각 대문파의 놈들이 준비를 하고 있소. 하지만 교주의 명령만 떨어진 다면 단숨에 소림을 쓸어버릴 것이외다.} {혁장로, 우리의 목적을 잊지 마세요. 비록 우리가 나한진을 파 괴하고 소림을 침입함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힘이 그만큼 줄 어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요.} 교자안에서 흘러나오는 옥음은 신중했다. {일단 격전이 벌어지면 계획대로 독과 미혼향(迷魂香)을 살포한 다음 마강시(魔 屍)를 앞세워 적당히 소란을 피운 다음 추풍곡(秋 風谷)으로 유인을 해야만 되오.} 혁사군은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잘 알겠소이다 교주.} 그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몸을 돌리자 혈교안의 옥음이 다시 이어졌다. {천위와 태상노조께서도 혹시 법공이 나타날 줄 모르니 은밀이 뒤를 따르도록 하세요.} 무용천위는 무표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X X X 밤이 깊어지자 소림사 내에서는 수천 개의 횃불이 밝혀져 불야 성을 이루었다. 객관에 묵고 있던 담사는 주위를 살피면서 밝으로 나왔다. 오늘 따라 별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은 먹물같이 검게 보였으나 사방에 서 타오르는 횃불은 온천지를 대낮같이 밝혔다. (으음.... 이렇게 수비만 하는 것보다 차라리 공격을 하는 것이 나 을 것인데...) 담사는 묵묵히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홀연 한 줄기 향기로운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싶자 갑자기 금산 혜의 모습이 앞을 막았다. 담사는 그녀를 보자 한 순간 움찔했으나 그것도 극히 찰나일 뿐 그는 곧 태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산혜는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옆으로 옮기자 눈 한번 깜박이지 도 않고 기묘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담사의 신형이 그녀를 스치는 순간 금산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영렀다. {담상공, 산혜를 잊었나요?} 금산혜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담사의 표정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담상공, 뇌언니로부터 당신에 관한 말을 다 들었어요.} 한 순간 담사의 신형은 굳어진 듯 멈추어졌다. {나는 담상공이 지옥혈룡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담사의 신형이 느릿하게 돌아섰다. 금산혜의 반짝이는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담랑!} 그녀　 나직이 외치며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담사는 망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문득 이때 한 가닥 전음성이 들려왔다. {담랑, 혜매로부터 모든 것을 다 들었어요. 어차피 담랑이 그녀 를 건드렸으니 모든 것은 책임지셔야 해요. 전 그런 일로 질투를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담사는 쓰디쓴 고소를 지으며 왼쪽편 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뇌옥연이 애정에 찬 눈길로 살포시 미소를 머금고 서 있 었다. 담사는 담사의 무표정한 태도에 고개를 들다가 움찔 놀랐다. {언니!} 그녀는 뇌옥연을 발견하고 수줍은 듯 그녀에게 달려갔다. {호호.... 혜매, 담장의 가슴은 얼음이 가득 들었지?} 뇌옥연은 나직이 웃으며 금산혜를 껴안았다. {저이보다는 내 가슴이 휠씬 따뜻할 거야.} {몰라요. 언니는 날 놀리기만 하고....} 금산혜는 뇌옥연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이고 아파! 혜매, 언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니?} 뇌옥연은 엄살을 부리며 재빨리 금산혜를 꼬옥 껴안았다. 그때였다. {염병할, 요즘 젊은 것들은 못 쓰겠단 말이야.} 장난기서린 음성이 들리며 어둠속에서 한명의 노인이 불쓱 나타 났다. 바로 비천신괴 조인이었다. 조노인은 힐끗 담사를 주시하여 이죽거렸다. {담소형제, 요즘은 날씨가 좋지?} 담사는 그의 말에 피식 실소를 흘리며 담담히 말했다. {조노인은 언제부터 남의 뒷조사를 하였소?} {그게 무슨 소린가? 나는 담형제의 큰 형님이니 당연히 동생의 일을 아는 것은 당연지사요. 동생의 앞날을 위해 두 명의 제수씨를 얻어주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는 섭섭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순간 여인은 이 말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녀 들의 마음은 하늘을 날 듯 황홀하기만 하니... 조노인은 힐끗 두 여인의 표정을 살피며 짖궃은 미소를 지었다. {헤헤.... 두분 제수씨께서 언제 이 늙은이게게 국수를 먹여 주겠 소?} 뇌옥연과 금산혜는 이 말에 그만 고개를 들지 못하고 황망히 몸 을 날렸다. {두고봐요, 조노인...} 금산혜가 뾰족히 외치며 힐끗 담사를 쳐다본 다음 급히 뇌옥연 의 뒤를 따라갔다. 조노인을 악의없이 빙그레 웃으며 담사에게 말했다. {담동생은 여복도 많단 말이야. 이놈의 형은 아직 마누라도 얻지 못했는데....} 그는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담사는 말없이 그를 주시했다. 서늘한 그의 시선은 무언가 뜻이 서려 있었다. 조노인은 그가 말없이 노려보자 연신 미소를 띄우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게.... 그게 말이네. 물론 자네는 이 일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 겠지만 마강시는 소형제의 금강복마수가 아니면 격퇴하기 힘든 마 물이라서... 소형제는 이 일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담사는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마강시(魔 屍)는 지금 어디에 있소?} 조노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헤헤.... 역시 소형제는 시원하데가 있어. 내 그럴 줄 알았지. 나 를 따라오게.} 그는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비조처럼 날아갔다. -마강시(魔 屍)! 반인반시(半人半屍)의 괴물이다. 성한 사람을 일 년 동안 백 가지의 독과 사혼대법으로 심경을 제압해서 다시 일년 동안 음한지기가 가득한 지하에 넣어 단련을 시키면 금강불괴의 신체를 가지게 된다. 게다가 몸속에 주입된 독으로 인해 전신이 독으로 뒤덮이니 이 에 조금만 스쳐도 한줌의 독으로 변하고 마는 천하무적의 마강시 였다. X X X 은밀히 소림사를 빠져나온 조노인과 담사는 동북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얼마나 숲속을 헤쳐 나갔을까? 조노인은 두 눈을 빛내며 숨을 죽였다. {소형제, 저 앞이네.} 담사는 그의 손짓에 따라 어둠 속을 노려 보았다. 괴석이 음산하게 솟아나 있는 조그만 계곡에 전신에 흑포를 두 른 괴인들이 묵묵히 서 있었다. 약 백여 명이나 될까? 얼굴에도 검은 복면을 쓰고 있어 보이는 것이라고는 손과 퀭하니 뚫린 썩은 생선눈알처럼 생기가 없는 동 공 뿐이었다. 이들 앞에는 세 명의 괴인이 각기 손에 기이한 악기를 들고 있 는데, 이들의 모습은 마치 시체가 방금 무덤 속에서 튀어나온 듯 스산한 모습이었다. 조노인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소형제, 저놈들이 바로 구유삼귀(九幽三鬼)라는 희대의 마귀들 이지. 저 자들은 주로 강시공과 사악한 무예를 익혔는데 저놈들이 마강시를 조종하네.} 담사는 구유삼귀의 행색에 내심 찬바람을 들이켰다. -구유삼귀(九幽三鬼)! 오십 년 전 천남(天南) 일대에서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울던 아 이가 울음을 그친다는 흉명을 떨친 고수들이었다. 이들은 한 뱃속 에 태어난 형제들로 그 중 대귀는 사람의 피를 즐겨 마시는 흡혈 귀 같은 인간이었다. 지금은 이경에 가까운 한밤중인데다 마강시와 구유삼귀의 모습 은 마치 귀신과도 같아서 평소 담이 약한 자라면 기절을 할 정도 였다. 담사는 가만히 생각을 했다. (이들은 전대의 마수들로 그 동안 나의 공력이 증가했다고 하나 정면으로는 승산이 없다. 거기다가 마강시까지 합세를 한다면....) 그는 생각만 해도 간이 오므라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원래부터 담사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이었다. 연대강 의 살인도 기실 따지고 보면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그 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훌륭하게 해치웠지 않은가? 담사는 전신의 혈관이 세차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문득 불 같 은 투지심을 느꼈다.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한 줄기 미풍이 담사의 머리를 휘날 리고 스쳐지나갔다. 담사의 모습은 어느새 먹이를 찾는 듯한 한 마리의 야수처럼 기 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노인, 당신은 오른 쪽에 있는 자를 맡으시오. 나는 두 명을 처치하겠소.} 말이 끝났을 때 담사는 이미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괴석 사이를 날아가고 있었다. 조노인은 갑자기 담사가 움직이자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담사는 마강시들이 서 있는 뒷쪽으로 돌아가 태연히 걸음을 옮 겨 마강시 속으로 파고 들었다. {소형제, 미쳤나?} 조노인은 다급히 말했다. 담사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앞을 주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조노인, 이것들은 명령이 없는 한 절대로 움직이지 않소. 구유 삼귀에게 제일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은 이것 뿐이오.} 그는 말과 동시에 재빨리 마강이 사이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갔 다. 조노인은 할 수 없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마강시 사이로 걸 음을 옮겼다. (제기랄, 내 평생에 시체 사이를 걷는 일은 아마 오늘이 처음일 것이다!) 내심 등골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문득 이때, 멀리서 나직한 피리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순간 구유삼귀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각기 기이한 악기를 두드 렸다. 귀를 거스리는 기묘한 음이 들리자 마강시들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사와 조노인은 마강시가 움직이자 흠칫했다. {소형제, 이들이 행동하기 시작했네.} 담사는 구유삼귀를 주시하며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말했다. {조노인, 걱정할 필요 없소. 구유삼귀가 명령을 내리기 전 이들 은 우리를 해치지 않소.} 조노인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다급히 외쳤다. {하나 이놈들은 언제 공격할지 모른다 말일세!} {겁먹을 필요는 없소. 소림사에 도착하기 전에는 결코 손을 쓰지 않을 테니.} 담사는 말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조노인은 일순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탄 형세라 어 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제길,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 내심 자위를 하면서 마강시와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잠시 후 멀리서 소림의 전각이 눈에 들어오자 구유삼귀는 걸음 을 멈추었다. 이마에 흰대를 두른 대귀(大鬼)는 천천히 몸을 돌려 마강시를 주 시했다. 이어 눈에서 시퍼런 귀화를 발산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 했다. [헉!] 헌데 다음순간 그의 눈이 갑자기 경악에 가득찼다. 한 자루의 검 이 벼락같이 마강시 사이에서 튀어나오며 그의 천돌혈을 파고들었 던 것이다. {안돼_______ 크억!} 처절한 비명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담사의 검은 어느 새 이귀(二鬼)를 덮쳐들고, 그와 동시 조노인이 장력이 삼귀(三鬼)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실로 눈깜짝할 새에 벌어진 이 일련의 상황에 이귀와 삼귀는 기 겁을 하여 수중의 악기를 흔들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담사의 검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이귀를 떠나며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크악!] [크엑!] 이귀와 삼귀는 비명을 지르며 땅위를 굴렀다. 이귀는 심장에 박힌 검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더욱 입을 열었다. {너는... 너는 누구냐?} 조노인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 그는 나의 소형제인데 지옥혈룡이라고도 하지.} 이귀는 망연한 눈빛으로 담사를 주시하며 나직이 응얼거렸다. {네가... 지옥혈룡... 과연 절세의 자객이군. 허나 네놈들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귀는 사력을 다해 수중의 악기를 두들 겼다. 콰쾅... 쾅... 쾅.... 귀를 찌르는 듯한 탁음이 갑자기 마강시의 눈에서 흉흉한 살기 가 뻗어나왔다. 담사는 재빨리 일장을 쳐냈다. {지독하군. 심장을 찔리고도 아직 힘이 남았다니!} 그는 내심 놀라움을 느끼며 다급히 외쳤다. {조노인, 조심하시오. 마강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과연 장승같이 서있던 마강시들이 천천히 그들을 포위하면서 접 근하기 시작했다. 조노이는 나직이 부르짖었다. {소형제, 이놈들의 몸은 금강불괴라 금강복마수가 아니면 절대 죽일 수가 없네. 어서 이놈들을 모조리 처치하세.} 담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전력을 좌우에 집중시켰다. {금강파천(金剛破天)!} 그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지고 금빛으로 물들은 좌수는 벼락같이 마강시를 향해 날아갔다. 휙! 퍼______ 퍽! 금강복마수가 마강시와 부딪치자 마치 북치는 듯한 둔탁음이 터 지면서 마강시는 썩은 짚단처럼 쓰러져갔다. 이미 주인을 잃은 마 강시는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금강복마수는 불문의 비전절예로 강시만을 부순다는 천고의 절 예이다. 게다가 담사의 공력은 그 동안 영약의 도움으로 이미 이갑 자의 수준에 이르는 상태, 일다경이 지나자 마강시는 한 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쓰러져 한 줌의 독수로 녹아내렸다. 조노이는 아한 눈빛으로 담사의 신위를 지켜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 굉장하군. 오늘에야 내 시야가 활짝 튀였네. 그동안 말만 들었지 금강복마수의 위력이 이다지도 무서울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네.} 담사는 냉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눈을 크게 떴다. {소림사가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 같소.} 말과 동시에 그는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조노이는 흠칫한 표정으로 소림사가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소림사의 수많은 전각들 사이로 한줄기 시뻘건 화광(火光)이 허공 으로 치솟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그놈들이 다 몰려 왔나보군.} 조노이는 중얼거리며 급히 몸을 날렸다. {으악!} {크윽!} 소림사의 산문 부근은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흑의인들이 한 손에 귀두도, 한 손에 검은 침통을 들었는 데, 침통이 흔들릴 때마다 뿌연 안개가 수십 개의 우모독침이 쏟아 져 나오고 이에 해당하는 소림의 중인들은 제대로 손발 한 번 놀 리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사왕신침(死王神針)까지 나타나다니.} 조노이는 치가 떨리는 듯 외치며 다급히 혈전장에 뛰어들었다. 사왕신침(死王神針)-! 백년 전의 거마 사왕(死王) 임추(林추)의 독문암기로 사천당문의 암기도 이것에 비하면 어른과 아이 차이였다. 침통을 누르며 미혼 향과 우모독침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는데 향기만 맡아도 혼절하는 무서운 극독이 포함되어 있었다. 갑자기 장내에 담사와 조노이가 뛰어들어 살수를 휘둘렀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상황이 일변했다. 담사의 금강복마수와 조노이의 신법은 마치 귀영처럼 장내를 휘 저으며 흑의인들을 무차별히 죽이기 시작했다. 혁사군은 혜천대사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가 이들의 출현 에 대경실색했다.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온다고 하던 마강시와 구유삼귀는 보이 지 않고 어디서 이런 고수가 나타났단 말인가?) 마음이 어지러워지자 자연 손발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혜천대사는 당대의 일류고수, 이 틈을 놓칠세라 벼락같이 선장을 휘두르며 무섭게 공격해 왔다. 혁사군은 황망히 물러서며 절명장을 연속 오장이나 후려갈기며 몸을 날렸다. (제기랄 우선 피해야 되겠군!) 마음에 결정을 내리자 추호도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모두 후퇴한다!} 그 말이 끝났을 때 그의 신형은 어느 새 십장 밖을 날으고 있었 다. 순간 흑의인들은 썰물빠지는 듯이 신속하게 뒤로 물러서기 시작 했다. 그러나, 동료를 잃은 소림의 제자들은 악귀처럼 그들을 추적했 다. {아미타불... 제자들은 모두 멈추어랏!} 혜비대사가 침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장내는 한 순간 격 전이 멈추고 흑의인들은 재빨리 사라져 갔다. 혜비대사는 장내의 처참한 광경을 둘러보며 비통한 표정으로 불 호성을 외웠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담사는 힐끗 중인들을 둘러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혜천대사는 담사를 주시하며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우물거렸 지만 내심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저 청년이 사용한 무예는 분명 금강복마수인 것 같은데 그의 손 속은 잔인하기 짝이 없으니 당신 이 일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가 없군!) 혜비대사는 혜천대사를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사제, 그 젊은 시주를 아시는가?} {글쎄요. 수법은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데...} {사제, 그 시주가 쓰는 무예는 금강복마수가 틀림이 없네. 다만 그 수위가 백 년 공력을 넘어야만 시전할 수 있는 경지에 달했으 니... 이 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혜비대사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장문인,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지요.} 혜천대사가 말하자 혜비대사는 비통한 눈길로 주위를 새삼 둘러 보며 탄식을 토했다. {아미타불....} 혜비대사는 힘없이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X X X 담사는 피곤한 표정으로 객관을 들어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두 여인이 재빨리 달려나왔다. {담랑, 괜찮으세요?} 뇌옥연이 가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괜찮소. 헌데 무슨 일이오?} 금산혜가 나직이 말했다. {담랑이 조금전 격전을 벌인 일은 모두 알고 있어요. 단신으로 구유삼귀와 마강시를 죽이고 마졸들을 단숨에 물리친 사실을 모르 는 사람이 없어요.} 담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구유삼귀를 죽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 인데....} 금산혜는 자랑스러운 듯 담사의 얼굴을 주시했다. {조노인이 모두에게 이야기 했어요. 처음에는 모두 믿지 못했으 나 그들의 시체를 확인하고는 담랑에 대해 칭송이 자자해요.} 담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조노인이 왜 쓸데없는 늘어놓고 다니지?} 그는 냉랭히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이곳을 나가는 게 좋겠군.} 뇌옥연이 큰 눈을 껌벅이며 불안한 듯 말했다. {담랑,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세요.} 담사는 두 여인의 수려한 자태를 주시하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 다. {그대들은 나의 처지를 알고 있지 않소. 당신들이 나를 이해할 줄은 모르지만 내가 연대랑을 죽인 흉수라는 것을 안다면 무림맹 이나 군웅들은 결코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뇌옥연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담사의 말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만약 황보가혜나 조중이 이 를 안다면 결코 담사를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림사는 담사에게 있어서 호굴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뇌옥연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담랑이 가신다면 저도 따라가겠어요.} {나도 갈 것이예요.} 금산혜가 다급히 말했다. {우리 그냥 그대로 떠나가요. 괜히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까지 는 없으니까요.} 그녀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말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문득 이때, 나직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담사는 시선을 돌렸다. {아미타불... 소승은 지객원(知客院)의 원주직을 맡고 있는 정인 (靜仁)이라고 합니다.} 이제 오순 가량의 승인이 합장을 하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장문인께서 담시주를 만나고자 기다리고 계시니 가시도록 하시 오.} 담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장문인은 어디에 계십니까?} {장문인께서는 지금 방장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인대사의 말에 담사는 나직이 말했다. {앞장 서시지요.} {아미타불...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정인대사는 앞장 서 걸음을 옮기자 담사는 힐끗 두 여인을 주시 했다. {나중에 봅시다.}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제 40 장 野獸의 變化 몇채의 전각파 마당을 지나 담사는 거대한 대전(大殿) 앞에 당도 하였다. 정인대사가 한옆으로 비켜서며 공손히 말했다. {자, 들어가시지요.} 담사는 주저하지 않고 냉막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전 안으로 들 어섰다. 이 대전은 소림사의 제일 뒷쪽에 있는 대전으로써 왼쪽에는 바 로 달마원(達磨院)이 있고 뒤로는 장경각(藏經閣)을 위치하고 있었 다. 넓직한 대전에는 이미 네 상의 주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운데 좌석에는 소림의 방장 혜비대사와 혜천대사가 침중한 표 정으로 앉아 있고 그 옆으로는 청성파의 장문인 청운도장과 곤륜 파의 황기진인이 앉아 있고, 그외에 청포(靑袍)를 입은 한 노인과 전신에 백색 승포를 걸친 비구니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각가지 복장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무당의 태극 도언을 위시하며 뇌승, 무영신개 동추평, 개방방주 진방산 그리고 전날 담사가 보았던 백상천, 황보가혜, 냉유도 등도 차분한 표정으 로 앉아 있었다. 담사가 들어서자 몇몇의 중인들이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혜비대사가 급히 일어나 담사의 곁으로 다가와서 음성을 높혀 말했다. {이 분이 바로 소승이 이야기를 하던 담시주 입니다.} 대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초리가 일제히 담사에게 쏠렸다. 어떤 사람은 두 손을 마주잡고 어떤 사람은 인사를 하는 등 장 내는 잠시 소란이 일어났다. 혜비대사는 천천히 담사를 인도하여 가운데 주석으로 이끌었다. {담시주에게 무예계에서 고명하신 몇 분을 소개 하지요.} 덕망이 높은 장문인이 몸소 소개를 하니 냉랭한 눈빛으로 거만 하게 앉아 있던 각대문파 종사들이 부득히 몸을 일으켜 예의를 차 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분은 곤륜의 장문인이신 황기진인 이십니다.} 혜비대사는 일일이 한 사람씩 그에게 소개를 했다. 한 사람씩 소개를 할때마다 담사는 무표정히 가볍게 고개를 숙 일 뿐 별다른 말이 없다. 중인들은 담사의 그같은 오만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혜비대사는 내심 담사의 태도에 고소를 지으며 마지막 사람을 소개했다. 얼굴이 붙은게 동안의 소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적포차림 의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설산(雪山)파의 장로이신 경운검(耿雲劒) 제노선배님 이십니다.} 경운검 제우방(制牛方), 그는 설산파의 삼대 장로로써 청해존자에 못지 않은 기인이다. 그러나 담사의 표정과 태도는 여전히 변함없이 가볍게 허리를 숙일 뿐이다. 제우랑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이 늙은이가 수십 년 동안 강호계를 등졌더니 강산도 변하고 중원의 형세도 달라지고 인재가 속출하니 노부는 여기서 무례한 애송이도 만나보게 되는군!} 담사는 비꼬는 그의 말에 힐끗 그를 응시하고 말없이 시선을 돌 렸다. 혜비대사는 잘못 언쟁이 벌어질세라 급히 자기 앞에 놓인 찻잔 을 들었다. {여러분이 우리 소림사를 위하여 이렇듯 위험을 무릎쓰고 머나 먼 길을 달려와서 도움을 주었으니 소승은 실로 감격해 마지 않읍 니다. 우선 이 한 잔의 차로 감사를 표하겠읍니다.} 그는 찻잔을 먼저 쭉 들이켰다. 이에 중인들은 자신 앞에 놓인 차나 술잔을 들고 자리에 앉아 들이켰다. 제우방은 대전을 한 번 둘러보더니 혜비대사에게 말했다. {청해존자는 안 오셨소이까?} {그 분께서는 격전 중에 중상을 입었는지라 지금 상처를 치료하 고 계십니다.} 제우방은 경멸서린 표정으로 말했다. {노부는 오늙은이와 수십 년 전 겨루어 본 적이 있지. 별 수 없 는 무예로 설치다가 결국 크게 당하고 말았군. 그것도 어린 놈에게 당하다니 실로 수치스러운 일이야.} 그는 아마도 자기 신분을 높이려고 하는 것인지 좌중의 사람들 에 대해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냉유도는 자신의 사부에 대하여 모욕을 주는 언사에 벌떡 일어 섰다. {제노선배님, 그 말씀은 너무 사부님을 무시하는 어조가 아닙니 까?} 이 말에 제우황은 거드름을 피우며 냉랭히 말했다. {어린아해가 노부를 훈계하는 것이냐?} 냉유도는 분기를 띠우며 외쳤다. {아무리 무림의 대선배라고는 하나 나의 사부님을 모욕한다면 결코 나 냉유도는 참을 수 없읍니다.} 혜비대사는 주인된 입장에서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급히 나서서 말렸다. {제선배님, 잠시 고정하시지요.} 이어 그는 합장을 하며 말했다. {허허... 지금 우리가 마교와 대항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인터 사 사로운 감정이나 은원관계 당분간 미루어 주시기 바랍니다.} 혜비대사의 말에 냉유도는 자신이 더 이상 떠들어 보아야 이로 울 것이 없다는 것을 계산하며 자리에 앉았다. {후배가 잠시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제우방은 힐끗 냉유도를 노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혜비대사는 주위가 조용해지자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교의 침입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일어났으나 여러분의 도움으 로 큰사고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읍니다. 그동안 소승과 몇분 의 고인들이 한당추흥도를 연구해온 결과 몇가지 단서를 얻을 수 가 있었읍니다.} 이 말을 들은 중인들은 두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혜비대사는 장내의 군웅들을 한 차례 일별하고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한당추흥도가 가리키는 곳은 태행산의 한 계곡으로 그 동안 제 자들을 파견한 결과 그곳이 마교의 총단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읍 니다. 게다가 어제밤 마교에서 한 장의 서찰을 보내왔는데 언제라 도 복수를 원한다면 한당추흥도에 쓰여진 글씨대로 찾아오라는 것 이었읍니다.} 혜비대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이로보아 마교의 무리들은 이미 전열을 갖추고 우리를 유인한 다는 것이 확실한 바 소승은 이 일에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 니다.} 제우방이 돌연 나직이 외쳤다. {노부는 방금 도착했기 때문에 마교의 무리들에 대해서 아는 것 도 없지만, 아무리 그 자들이 무예가 높고 사악한 술수를 쓴다고 해도 이곳에 모인 군웅들이 일시에 쳐들어 간다면 무엇이 두렵겠 소.} 혜비대사는 답답한 눈빛으로 가벼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제시주님의 말씀은 이치에 타당하지만 결코 마교의 무리들은 무시할 수 없읍니다.} 그의 신중한 말에 제우방은 조소를 지었다. {장문인께서 너무 마교의 무리들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구료. 설혹 그 자들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더라도 나 제우방은 마교의 무리들을 모조리 격살하겠소.} 황기진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 좌석에서 제선배님이 제일 연장자이시고, 만일 제선배께서 앞장서시겠다면 우리 곤륜파는 기까이 뒤를 따르겠읍니다.} {나 조중도 기꺼이 무림맹의 동도를 이끌고 선배님의 뒤를 따르 겠읍니다!} 귀견수 조중이 일어서서 외치자 한 순간 좌중의 중인들이 일어 서며 외쳤다. {옳읍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마교의 소재 지가 드러났으니 직접 쳐들어 갑시다!} {옳소, 마교의 무리들이 제아무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나 결 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읍니다!} 중인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아미타불 여러분 잠시 고정하시고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혜비대사가 창노한 불호성을 외우며 소리쳤다. 중인들은 아무도 자리에 앉지 않고 시선을 혜비대사에게 집중했 다. {우리가 추혼곡을 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따른 제방상황을 논 의해야 하니 우선 여러분ㅇ들께서는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아 주십 시오.} 혜비대사의 간곡한 어조에 중인들은 하나 둘 자리에 앉았다. {아미타불... 그러면 우리가 마교의 소굴로 쳐들어 가기 전에 나 의 사제나 여러분들에게 몇가지 일을 이야기 할 것이니 들어주시 기 바랍니다.} 혜천대사는 혜비대사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서 합장했다. {여러분들 중에서 이미 마교의 힘을 체험한 분도 계실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 소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 은 그동안 제가 마교의 무리들과 직접 체험한 것이니 제 말을 참 고 삼아 앞으로 있을 격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혜천대사는 한동안 무림맹의 참사 사건부터 시작하여 그 동안 일으켰던 사건들에 관하여 나직이 자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중인들은 세삼 마교의 위세에 표정 이 침중해졌다. 이윽고 혜천대사의 설명이 끝났다. 제우방이 두 눈을 가늘게 뜨 며 입을 열었다. {대사의 말씀대로라면 그들이 대부분 석년 전륜교의 후예로 구 성되어 있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씀이오?} 혜천대사는 회한에 잠긴 눈길로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렇읍니다. 현재 마교의 수뇌부는 서장 성숙해에 자리한 나후 마교의 후예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중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은 전륜교의 후예인 듯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한동안 웅성거렸다. 마교의 부활만 해 도 놀라운 일인데 거기에다 전륜교의 부활까지 합치니 중인들의 놀람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우방이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마교든 전륜교든 우리의 적은 그들이니 더 이상 왈가왈 부할 것 없이 이 모임이 끝나는 대로 태행산으로 출발 합시다.} 이 말에 중인들은 모두 찬성을 했다. 혜비대사는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아미타불... 여러분들께서 정히 그러시다면 잠시 출발을 하겠으 니 각자 준비를 하셔서 대웅전 앞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중인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몰려 나갔다. 담사는 한동안 이들의 행동을 지켜본 후 그도 천천히 일어섰다. 순간 혜비대사가 나직이 말했다. {소승이 담시주에게 드릴 말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읍 니까?} 담사는 그의 표정을 주시하며 묵묵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윽고 중인들이 나가자 대전에는 혜비대사와 혜천대사, 제우방, 동추평 그리고 담사만이 남았을 뿐 중인들이 다 나간 대전은 쥐죽 은 듯 고요해졌다. 혜비대사는 제우방이 나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자 합장하며 물었다. {아미타불 제시주께서 무슨 할 말이라도 계신지요?} 제우방은 힐끗 담사도 일별한 다음 차분히 물었다. {소문에 의하면 법공대선사께서 전날 제남성에서 잠깐 모습을 보였다고 들었는데 이 일의 전부를 알고 싶소이다.} 혜비대사는 흠칫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시주께서 그 분의 행적을 아시고자 함은....?} {제가 팔십 년 전 우연히 그 분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지요. 사 실 이번에 내가 이번에 내가 속세에 나온 것도 그 분의 모습이나 마 보고 싶어서 나온 것이라오.} 제우방은 생각하는 표정으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을 하면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나 사실 그 분으로부 터 몇 가지 무예도 전수 받았으니 따지고 보면 나도 소림의 제자 라고 말할 수도 있소이다.} 혜천대사는 제우방의 표정을 주시하며 말했다. {소승이 전날 사숙조님을 뵈었지만 그 분의 행적을 알고 있지는 않읍니다. 그 분께서는 언제나 거취가 신비하니 도저히 우리로서는 그 분의 행적을 알 길이 없읍니다.} 제우방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분께서야 신선과 같은 분이시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헌 데 내가 알기로는 비천신괴라는 자가 그분의 수발을 들은 적이 있 다고 들었소만 그의 모습이 보지 못했으니....} {아미타불... 마교의 무리들을 물리친 뒤 우리들도 그분을 모시 려고 했으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는지라 모실 수가 없읍니다.} 혜비대사가 말을 멈추고 담사를 쳐다보았다. {담시주께서 조시주와 함께 나타나셨는 줄로 알고 있읍니다만 혹시...?} 담사는 혜비대사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술잔을 가만히 들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조노인의 행방은 모르고 있읍니다.} 제우방의 눈빛이 기이해졌다. {젊은이는 조가의 제자인가?} 담사는 힐끗 제우방을 일별했다. {나에게는 사부가 없소.} 그는 짤막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나는 이만 실례 하겠읍니다.} 담사는 인사도 없이 걸음을 밖으로 옮겼다. {잠깐!} 제우방이 외쳤다. 담사는 문 앞에 멈추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무슨 일이오, 노인장?} 순간 제우방은 담사의 무례한 어조에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이 방금 노부를 노인장이라고 불렀느냐?} 그의 목소리는 노기에 차 있었다. 담사는 처음부터 제우방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소이다, 노인장.} 그가 강조하듯 뒷말을 힘주어 말했다. 제우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노성을 외쳤다. {실로 무례한 놈이로고!} 말과 동시에 그는 소맷자락을 저었다. 한 가닥 막강한 냉풍이 소맷자락에서 일어나며 담사의 전신을 쓸어왔다. 담사는 몸을 기우뚱 하면서 발 끝을 놀리자 눈깜박할 순간에 미 끄러지듯 옆으로 일장을 물러섰다. 제우방은 담사가 자신의 일격을 손쉽게 피해내자 그만 얼굴이 뜨거워졌다. {제법 재간이 있는 놈이군.} 차갑게 외치며 손을 뻗어 곧장 담사의 어깨를 움켜 쥐려고 금나 수법으로 덮쳐갔다. 담사는 희미한 조소를 머금으며 왼발을 뒤로 제끼며 오른발로 중심을 주며 몸을 빙글 돌렸다. 순간 제우방의 손은 허공을 짚고 말았다. 담사의 몸놀림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으며 매우 유효적절했다. 제우방은 또다시 담사가 그의 손을 피하자 수치심에 얼굴이 붉 어졌다. 그는 한 순간 두 눈에서 안광을 발산하며 다시 오른손을 기묘하 게 뻗는 순간, 혜비대사가 급히 일어서며 말했다. {제시주, 잠깐만 고정 하십시오.} 제우방은 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이오? 이 젊은 놈이 존장을 무시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아야 한단 말이오.} 혜비대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시주는 저의 손님이시고 우리를 도와주러 오신 분이니 주인 된 도리로서 이 일을 묵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읍니까? 두 분께서 저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참으시길 바랍니다.} 제우방은 힐끗 담사를 주시하며 내심 생각을 했다. (이놈은 생각보다 제법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괜히 더 이상 나서봐야 좋을 것이 없겠군.) 그는 혜비대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노부가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놈이 너무 무례한 것 같 으니....} 돌연 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제가야! 그는 나의 소형제이니 그의 말투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 중인들은 움찔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대전 창문 쪽에 어느 새 나타났는지 조노이가 히죽거리며 서 있었다. 제우방은 조노이를 발견하자 흠칫 놀랐다. {조가야, 그게 무슨 소리냐?} {헤헤... 오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더니 그 동안 귀라도 막은 모양 이군. 담형제가 나의 소형제란 소리도 듣지 못하다니 흙 속으로 들 어갈 때가 다 되었군.} 조노이의 조롱 섞인 어조에 제우방은 놀란 듯에 물었다. {저 놈이 너의 소형제란 말이냐?} 조노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몇 번 말해야 알아 듣나. 아무래도 늙어서 망령까지 들었군.} 혜비대사와 혜천대사는 반가운 기색으로 합장했다. {아미타불... 조시주, 어서 오십시오.} 조노이는 더 이상 제우방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혜비대사에게 말했다. {장문인, 담소형제에게 물어본 말은 나중에 내가 대답 하겠소. 그러니 우리 형제는 지금 잠시 실레를 하겠소.} 말과 동시에, 귀영처럼 담사의 곁에 멈추어 선 그는 재빨리 말했 다. {소형제,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빨리 가세.} 담사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혜비대사가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문득 귓전에 들려오는 전음성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장문인, 담소형제의 무공에 관해 알고 싶은 모양인데 지금은 때 가 아니니 기다리시오.} 조노이의 전음에 혜비대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제우방은 냉랭히 두 사람의 등 뒤를 노려보며 소태 씹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는 조노 이에 대하여 거리낌을 갖고 있었다. 무예로 따진다면 비슷할지는 모르나 신법면에 있어서 그는 조노 이를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게다가 오십 년 전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한때 그와의 결 전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우방은 말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웅전 앞에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단단히 복장을 하고 병기를 든 채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주위로는 많은 소림사의 승인들이 각기 손에 병장기를 들고 삼 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어 대적과 결전을 시도할 태세였다. 담사와 조노이가 대웅전에 들어서자 각파의 종사들은 이미 자리 에 앉아 있고, 혜비대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합장을 했 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다시 이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이미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면 지금부터 곧 출발 할까 합니다.} 돌연 제우방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잠깐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이 있소이다.} 혜비대사는 의아로운 눈길로, {제시주께서 무슨 말씀이 계신지...?} {태행산이라면 여기서 오 일이나 걸리는 거리, 이렇게 한꺼번에 갈 것이 아니라 몇 사람씩 흩어져서 오 일 후 태행산 기슭에서 모 여 마교를 상대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혜천대사가 일어서며 말했다. {제시주의 말씀이 현명한 방법이긴 하오나 만약 여러분이 흩어 져 간다면 그 동안 길 가는 도중 마교의 암습을 받을 지도 모르고 시간 상으로는 오 일이 걸리지만 경신법을 전개한다면 이틀만에 태행산에 도착할 수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혜천대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마교에서는 우리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터 시간 을 끌기보다는 그들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여 그들에게 대비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우방은 이 말에 군웅들을 둘러보니 모두 찬동을 표하는 표정 이나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가 없는 일이었다. {대사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 방법이 더 나을 듯하구료.} 혜천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럼 제가 앞장을 서겠읍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대전을 나갔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서 나갔다. 맨 앞에는 혜천대사와 혜비대사가 앞장을 서고 그 뒤로 목발을 짚고 있는 청해존자, 제우방, 동추평 등 군웅들이 뒤를 따랐다. 소림 경내를 벗어나자 군웅들은 경신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인영이 마치 새가 떼를 지어 날으는 것처럼 신법을 전개하니 실로 장관이었다. 하루 종일 달린 군웅들은 천운현(穿雲縣)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천운현은 조그만 마을로 군웅들이 들이닥치자 세 개의 객잔이 꽉차고 말았다. 담사와 조노이는 혜비대사가 객잔에서 방을 내주었지만 호의를 사양하고 부근에 있는 사당묘에 머물게 되었다. 원래 담사는 정도인과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담사로서는 혜천대사를 위시하여 조중 등 무림맹의 인물들과는 따 지고 보면 원수 사이가 아닌가? 조노이는 담사의 처지를 알고 있기에 그를 데리고 사당묘로 왔 던 것이다. 담사는 벽에 기대어 조노이를 무표정히 바라보았다. 조노이는 사 당묘로 올 때 음식과 술을 잔뜩 준비해와 연신 술을 마시고 있었 다. 돌연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조노이의 표정이 갑자기 미묘해졌다. {그 아이들이 오는가 보군... 제길 요사이 젊은 아이들은 한시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 자 두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바로 남색 경장을 입은 뇌옥연과 녹 의를 입은 금산혜였다. 담사는 두 여인의 모습에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노인,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담사는 묻지 않아도 조노이가 두 여인에게 미리 약속했다는 것 을 알았다. {담랑, 조노인을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니까.} 뇌옥연은 다정한 눈길로 담사를 보며 말했다. {이제 담랑은 결코 혼자가 아니예요. 혜매와 나는 담랑과 일심동 체란 말이예요. 혹시라도 담랑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와 혜매 는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녀의 간곡한 어조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 담사는 문득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느끼며 쓸쓸히 웃었다. 금산혜는 살며시 그의 옆에 앉으며 보자기를 끌렀다. 그 속에는 몇 가지의 안주와 두 병이 술이 있었다. {담랑, 오면서 객점에서 사가지고 온 것이예요. 어서 드세요.} 그녀는 술잔에 술을 따루어 담사에게 내밀었다. {아니, 술향기로 보아 그것은 금릉의 옥호춘 같은데.} 조노이는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제길, 이거 마누라 없는 사람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다.} 금산혜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조노인은 지금까지 혼자서 드시고 있었잖아요.} {무슨 소리, 이것은 흔해빠진 화중에다가 안주는 소태 뿐이라구. 내가 소형제에게 권하기는 했지만 그가 먹지 않았으니 내 잘못은 아니야.} 뇌옥연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조노인 걱정 마세요. 제가 가져온 것도 있으니 어서 드시기나 하세요.} 그녀가 품 속에서 술병을 꺼내자 조노이는 헤벌쭉 웃었다. {헤헤... 역시 재수씨가 최고군.} 그는 재빨리 술병을 낚아 채며 입에 들이 부었다. 사당묘는 화기애애ㅎ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담사는 금산혜와 뇌옥연의 수려한 미모를 바라보면서 내심 흐뭇 함을 느꼈지만, 문득 떠오르는 적용화련의 희미한 얼굴에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인가 적용화련의 증오에 서린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났 다. 특히 뇌옥연과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가끔 그녀의 생각이 나고 는 했던 것이다. 사실 금산혜의 미모나 뇌옥연의 얼굴을 보기드문 미인이긴 했지 만 적용화련에 비한다면 무언가 모자람을 느끼는 담사였다. 뇌옥연이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나직이 물었다. {담랑,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요?} 담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 {연매, 아무것도 아니니 염려할 것은 없소. 내일 태행산에 도착 한다면 그대들은 금화장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일이 끝난 후 내 가 찾아갈 테니....} 금산혜는 뾰죽이 외쳤다. {싫어요. 담랑이 위험한 곳에 가는데 어찌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요. 언니와 저는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따라갈 거예요.} 담사는 그녀들의 표정에서 도저히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금산혜는 그가 더 이상 말이 없자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담랑이 가는 곳이라면 설사 지옥이라도 언니와 저는 따라갈 것 이예요.} 이어 담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졸리운지 눈을 감았다. 뇌옥연은 맑은 눈망울에 행복한 빛을 가득 띠우며 담사를 지그 시 응시했다. 조노이는 이들 남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띄었다. (대선사, 아무런 염려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읍니다. 이 아이들 이 저 놈의 곁에 모든 것은 대선사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 같읍니다.) 그 동안 담사를 지켜본 조노이는 최근에 달라진 담사의 행동에 뿌듯함을 느끼며 ........ 제 41 장 魔谷 進入 태행산(太行山)-! 하북성(河北省)의 등뼈를 이루는 태행산은 그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마다 기괴암석으로 이루어진 명산이다. 혜비대사를 위시한 군웅들은 태행산의 중턱에 도달하자 잠시 휴 식을 취했다. 이들 일행은 비록 숫자는 많지만 모두가 무예계의 일류고수들이 므로 걸음걸이가 재빠르면서도 조금도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혜비대사와 은연 중 군웅들을 지휘하는 제우방, 조노이 등은 한 당추흥도를 보면서 상의를 했다. 잠시 후 혜비대사는 선두로 군웅들은 전진을 계속했다. 산길은 가면 갈수록 험악하여 조그만한 소로는 천애절벽 중간에 꾸불꾸불 이어져 있었다. 쏴아아아... 산바람이 불어오자 소나무들이 우수수 소리를 내고 그들의 발자 국 소리에 산새들이 푸득거라며 날아오르기도 했다. 얼마나 갔을까? 그들은 아주 지세가 험악한 어느 골짜기 입구에 도착했다. 혜비대사가 발걸음을 멈추자 여러 중인들은 그의 주위로 몰려들 었다. 이때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둠이 미적미적 산중을 덮고 반짝이는 별들이 하나 둘 빛나기 시작했다. 골짜기는 깊은 정적에 싸여 있고 불어오는 산바람만이 가끔 소리를 낼 뿐 주위는 황량하기만 했다. 혜비대사는 한동안 주위의 지세를 살피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 우리가 찾고 있던 추흥곡(秋興谷)인 것 같읍니다. 제가 앞장 설 터이니 여러분들께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 선뜻 골짜기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계도를 든 승려가 재빨리 달려오더니 혜비대사를 보호하듯 따랐다. 골짜기 안은 대단히 황량한 곳으로 오십여 장 들어서자 곧 음산 한 바람이 그들을 에워싸듯 불어오고 스산함을 풍겼다. 이때 중인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긴장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전진을 계속했 다. 계곡을 한구비 꺾어 도니 형세가 일변하여 주위는 온통 깎아 세 운 듯한 절벽과 우뚝 솟은 산봉우리 뿐 가끔 비치던 달빛마저 사 라지니 더욱 어둠이 짙어만 갔다. 깊은 골짜기 안으로부터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은 계곡의 초목들 로 하여금 기이한 소리를 내게 하니 그럴 때마다 중인들의 등골에 식은땀이 솟았다. 이때 동추평이 경악성을 토했다. {어! 저것이 무엇이지?}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절벽 중간에 거대한 글씨가 핏빛으로 쓰여져 있었다. 중인들이 눈을 빛내며 절벽을 바라보니 은은히 네 글자가 드러 났다. <死亡之谷.> 사망지곡이라고 쓰여 있는데 어둠 속에서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 다. 이것은 이 골짜기의 분위기를 공포로 만들고 있었다. 혜비대사가 불호성을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이 골짜기의 형세로 보아서 이곳이 마교의 소굴인 것이 틀림 없는 것 같읍니다.} 그는 말을 하고는 재빨리 신법을 전개해 앞으로 날아갔다. 뒤를 따르던 중인들은 늦을세라 다급히 신법을 전개해 그의 뒤를 따랐 다. 중인들이 글씨가 쓰여진 절벽에 도착하자 혜비대사는 급히 사방 을 둘러보았다. 절벽 옆으로 조그만 길이 나 있고 그 사이로 울창한 수림이 끝 없이 펼쳐져 있다. 혜비대사는 천천히 숲 속을 접어 들었다. 숲 속에는 전부 무릎 위까지 차오르는 잡초와 하늘로 치솟은 나 무들이 원시림처럼 우거져 황량하면서도 앞뒤의 방향을 분간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혜비대사는 가끔 한당추흥도를 펼쳐보며 세심히 주위를 살피는 한편 별빛을 쳐다보며 숲 속을 헤쳐 나갔다. 거의 세 시진이나 숲 속을 헤맨 끝에 그들은 양쪽으로 절벽이 솟아있는 협곡에 도착했다. 양쪽 절벽은 이끼가 끼어 매끄럽기 짝이 없고 그 사이로 석 자 남짓한 넓이의 길이 어둠속에 묻혀 있었다. 혜비대사는 주위를 살펴보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적이 이 높은 계곡 양쪽에 매복해 있다가 우리가 이런 중간쯤 지날 때 급습을 한다면 아무리 무예가 절륜하다 해도 몸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리라. 그는 즉시 몸을 돌려 중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승이 먼저 이 협곡을 살 핀 연후에 다시 여러분들을 인도하겠읍니다.} 그러자 혜천대사가 말없이 협곡 안으로 몸을 날렸다. {사제, 내가 가겠네!} 혜비대사가 다급히 외쳤지만 혜천대사는 고개를 저였다. {아닙니다. 장문인께서는 군웅들을 통솔하는 분이시니 이 일은 당연히 제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그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빨리듯이 사라져 갔다. 중인들은 침중한 눈빛으로 협곡 안을 주시했다. 일순 혜천대사의 신형이 보인다 싶자 어느 새 다시 돌아온 그는 정중히 합장하며 말했다. {별다른 일이 없는 것 같지만 여러분들께서는 한 사람씩 협곡을 통과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는 다시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중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협곡을 살피며 한 사람씩 협 곡 안으로 들어갔다. 이 험악한 협곡은 약 오십 장이나 거리가 되는데 만일 적이 뇌 석이나 불로써 공격했다면 그들은 태반이 상하거나 죽었을 것이다. 협곡의 소로를 통과하자 형세가 다시 일변했다. 앞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데, 그 바위에는 아 수라마왕상이 새겨져 있고 그 옆으로 여덟 자의 핏빛 글씨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來行有經 去行無經, 올 때는 길이 있어도 갈 때는 길이 없느니라.> 중인들은 짙은 어둠 속에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등골이 서늘 하고 온몸이 바싹 조여드는 듯한 공포에 모두가 불안한 표정이 되 었다. 금산혜는 주위를 살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담랑, 이곳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담사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쥐며 나직이 말했다. {혜매, 이곳은 마교의 근거지이니 조금 음산하다 해도 이상할 것 은 없지. 허나 모두가 사람이 한 짓이니 겁먹을 필요도 없어.} 그의 위로에 금산혜는 안심한 듯 그에게 살며시 몸을 기대었다. 뇌옥연도 겁이 나는지 가만히 담사의 손을 쥐었다. 쏴아아! 골짜기는 계속 싸늘한 바람이 불어닥치고 밤은 점점 깊어만 갔 다. 그러다 편월이 구름을 뚫고 삐죽이 나오자 중인들은 안력을 돋 우어 앞을 주시했다. 헌데 인공(人工)의 흔적이 있는 듯한 사각형의 암석 위에 한 명 의 흑삼(黑杉)괴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혜비대사는 안광을 번뜩이며 괴인을 주시했다. [이놈!] 돌연 성격히 급한 황기진인이 두 줄기의 지풍을 재빨리 괴인을 향해 튕겼다. 순간 암석 위에 있던 흑삼괴인은 돌연 벌떡 일어서며 손에 든 낭아봉을 재빨리 지풍을 막아 버렸다. 황기진인은 일수가 무위로 돌아가자 재빨리 검을 뽑았다. 재차 검을 뻗으려는 찰나 혜비대사가 급히 외쳤다. {본인은 소림사의 주지로서 혜비라고 하오. 마교주가 보낸 서찰 을 받고 달려왔으니 귀공이 한 마디 통보해 주시오.} 흑삼괴인은 싸늘히 대답했다. {나는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오. 잔소리말고 이곳을 통과과하고 싶다면 누구든 솜씨를 보이시오.} 혜비대사는 얼굴을 엄숙히 굳히며 단호히 말했다. {귀공의 직책이 그러하다면 본인이 몸소 불민한 무예나마 펼쳐 보이겠소.} 순간 뒤에 서 있는 정인대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장문인께서는 귀한 분이시니 소승이 가르침을 받겠읍니다.} 말과 동시에 계도를 직도화악의 일식으로 쳐냈다. 한 줄기 막강 한 경력을 싣고 계도를 쾌속하게 뻗어갔다. 암석 위의 흑삼괴인은 돌연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에 든 낭 아봉을 비질하듯 옆으로 쓸어오면서 계도를 막았다. 창! 요란한 금속음이 터지자 정인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자신도 모르게 서너 걸음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때 흑삼괴인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맹렬히 낭아곤을 휘둘렀다. 그의 수중에 들린 낭아곤은 족히 팔십 근은 나갈 것 같 은 중병기인데, 맹렬하기 그지 없으며 자못 위세가 사나왔다. 정인대사는 해연히 놀라며 다시 옆으로 한 자나 피하고는 계도 로 옆구리를 향해 찔렸다. 흑삼괴인은 낭아곤이 빗나가고 옆구리를 파고들자 마치 날렵한 승냥이처럼 발 끝을 차자 그의 신형은 신속하게 뒤로 물러선다. 그와 동시 낭아곤은 아래서 위로 재빨리 계도를 향해 쳐갔다. 창! 다시 한 번 금속음이 터지고 계도가 허공으로 날았다. 정인은 나직이 신음성을 흘리며 자신의 손을 쳐다보는데, 그의 손바닥은 파열되어 선혈이 흘러내렸다. 흑삼괴인의 쾌속한 수법과 신법은 정인대사를 단 이초에 물리쳤 을 뿐만 아니라, 뒤에서 관전하던 중인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느끼 게 했다. 혜비대사는 진력을 암암리 끌어올리며 침중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정인, 물러나거라!} 정인은 자신이 도저히 적수가 안됨을 느끼고 핼쓱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이때 흑삼괴인은 낭아곤을 늘어뜨리고 태연히 중인들을 응시하 고 있다. 혜비대사는 선장을 비스듬히 들고 말했다. {소승이 한 번 그대의 공격을 받아보고 싶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흑삼괴인은 소리없이 낭아곤을 휘둘러 갔다. 쉬_______ 이익! 낭아곤에서 일어나는 강풍은 여간 맹렬한 것이 아니었다. 혜비대사는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에 뒤이어 흑삼 괴인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혜비대사 또한 그의 힘에 어깨를 두어 번 흔들더니 다시 선장을 역소오악(力掃五嶽)의 한수로 낭아곤을 쳐냈다. 다시 금속음이 터지고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은 맹렬히 뒤엉켰다. 다시 서로의 병기가 부딪치기를 수차례, 흑삼괴인은 조금도 물러 서지 않고 대응을 하는데, 중인들은 흑삼괴인의 놀라운 무예에 모 두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의 손에서 전개되는 수법은 한수 한수가 그 위력이 태산 을 허물고 성난 파도와 같았다. 이 강렬한 타법(打法)을 관전하는 중인들은 오랫동안 강호에서 무수한 격전을 치르고 수많은 결투를 보아왔지만 이런 맹렬한 박 투는 처음보는 것으로 모두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했다. 수양이 깊은 혜비대사건만 이렇게 수십초가 지나도록 그를 물리 치지 못하자 내심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소림의 장 문인 신분으로 관문사가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창피인 가? 한 순간, 혜비대사는 큰소리로 호통을 치며 선장을 높이 쳐들더 니 벼락같이 내리쳤다. 흑삼괴인은 돌연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선장의 기세는 너무나 빨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낭아곤을 휘둘러 선장을 막았다. 꽝! 굉음이 터지고 흑삼괴인은 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왁하고 한 사 발의 피를 토했다. 혜비대사는 그때서야 뒤로 물러서며 흑삼괴인을 바라보았다. 흑삼괴인은 몸을 약간 뒤로 제치고 암벽에 기대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 한수에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혜비대사는 원래 불문의 승인, 그는 나직이 탄식을 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이때 흑삼괴인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낭아곤을 번쩍 쳐들어 독랄같이 공격해 왔다. 혜비대사는 그가 갑자기 기습에 올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라 당 황하면서도 맹렬히 날아오는 낭아곤의 위세에 다시 울화가 치밀었 다. (이 자의 성정이 이리도 악랄하니 살려두면 결국 화를 부르리 라.) 속으로 생각하며 재빨리 선장을 가로 쳐들어 낭아곤을 막았다. 그리고는 그가 채 물러서기도 전에 선장을 뻗었다. 이번의 수법은 혜비대사의 공력이 집중된 것으로 그 위력은 태산을 허물어뜨릴 듯 맹렬했다. 흑삼괴인은 재빨리 낭아곤으로 선장을 간신히 막는 순간 낭아 곤이 혜비대사의 선장에 튕겨져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자는 다시 몇번 왁하니 선혈을 토해내더니 고통에 못이겨 몸 부림을 쳤다. 이어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앞으로 무너지듯 고꾸라졌다. {아무타불....} 혜비대사는 나직이 불호성을 외웠다. 이때 동추평이 재빨리 흑의괴인을 살피더니 놀란 듯이 외쳤다. {이 자는 이십 년 전 상강일대에서 흉명을 날리던 대력귀왕(大力 鬼王)이요.} 중인들은 이 말에 깜짝 놀랐다. {....!} 대력귀왕은 천성적으로 신력을 타고난 역사였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상강(湘江) 일대에서 적수를 만나지 못했는데 이렇게 이곳에 서 관문사자 노릇을 하다니.... 중인들은 내심 침중해졌다. 이런 고수가 겨우 관문사자라면 얼마 나 더 많은 고수들이 있단 말인가? 혜비대사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길 양쪽마다 기괴한 마귀상이 세워져 있는데, 중인들은 그 옆을 지날 때마다 한층 음산해지는 느낌에 모두 기분이 우울해졌다. 골짜기는 깊숙이 들어갈 수록 이들 괴형의 석상들이 더욱 공포 감을 조성하고, 음산한 분위기는 더욱 짙어 어둠과 더불어 이곳의 분위기는 중인들의 마음을 긴장에 몰아넣었다. 중인들은 모두가 무예계의 호걸들로 평생을 강호에서 편역하다 시피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와같이 기기괴괴한 분위기는 처음이었 다. 족히 일리 가량 달려왔으나 이미 만난 흑의괴인 이외는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다. 황량한 숲길에는 사박사박 중인들의 발걸음소리만 들리고 잔기 침 하나 하는 사람도 없었다. 돌연 은은한 송진의 향기가 산바람에 실려오는데 눈앞에 울창한 거송들이 앞을 막았다. 혜비대사가 눈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거송 하나하나가 쭉 하 늘로 뻗어 있었다. 가지와 솔잎들이 바람에 일렁이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는 아 무런 이상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혜비대사는 신중한 표정으로 혜천대사에게 말했다. {사제, 이 소나무 무슨 매복이라도 있을까?} 혜천대사는 숲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숲 속에 암기나 독기(毒器)들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밖에 서 보아서는 알 수가 없읍니다.} {...!} {하지만... 이 숲 속에는 무슨 진법이 설치되어 있지 않을 것 같 읍니다.} 돌연 제우방이 말했다. {곁에서 볼 때에 숲 속의 나무들은 적어도 오백 년은 됨직한데 사람이 인공으로 심은 것이 아니고 천연적으로 자란 나무들같소. 기껏해야 마교의 무리들이 수작을 부려 놓았겠지요.} 제우방은 오랫동안 산중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남보다 다른 안목 이 있었다. 혜비대사는 침중히 말했다. {이 소나무 숲이 어떤 기문진식(奇門陣式)이 아니라면 들어가 보 도록 하지요.} 말과 동시에 앞장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이 소나무 숲은 실로 울창하여 십여 장 정도 나아가자 도저히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띠리리링! 문득 기이한 악기소리가 중인들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담사의 눈빛이 한 순간 날카로워졌다. {조노인, 이 소저는 전날 마강시를 움직이던 구유삼귀의 악기소 리와 똑같은 것 같소.} 조노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것 같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악기소리가 강해지면서 비명이 터졌다. {으악!} {크아악!} 두 명의 무인이 갑자기 쓰러지는데 어느 새 주위에는 전신에 흑 포를 두르고 두 눈과 손만 내놓은 괴인들이 나타나서 중인들을 공 격해 왔다. 조노이가 다급히 몸을 날리며 외쳤다. {모두 조심하시오. 이것들은 마강시로 도검으로 상하지 않으니 두 눈을 찌르시오.} 중인들은 이 말에 모두 병기를 거두고 지공으로 눈을 찔러갔다. 그러나 마강시의 눈을 찌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비록 지각이 없고 행동이 둔했으나 전신이 독으로 뭉쳐져 있는데다가 도검에 상하지 않으니 중인들은 비록 무예가 뛰어났으 나 단숨에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처음 마강시는 눈이 찔려 쓰러져 갔으나 다시 악기음이 들려오 자 행동이 기민해졌다. 담사는 어둠 속을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두 사람은 절대 그들의 몸에 부딪치지 마시오.} 뇌옥연과 금산혜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몸으로 깊은 밤 이런 곳에서 마치 귀신 같은 마강시를 보아하니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담사는 주위를 가만히 둘러본 후 갑자기 신형을 날렸다. 그의 좌 수가 은은히 금광을 띄운다 싶자 어느 새 마강시의 곁을 스치고 있었다. 담사의 좌수가 뻗어갈 때마다 마강시는 충풍낙엽처럼 쓰러져 갔 다. 전날 마강시와 상대해 본 담사로서는 그들의 약점을 알고 있었 다. 마강시와 상대하던 중인들은 담사의 위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그는 독도 두렵지 않은 듯 그의 좌수가 마강시의 미심을 격타할 때마다 마강시는 풀썩 뛰어올랐다가 그대로 엎어졌다. 끄______ 아______! 끼아아______! 담사의 신법은 마치 비조처럼 빨랐고 그의 손속은 한 점의 실수 도 없었다. 순식간에 마강시는 담사의 위세에 반으로 줄어들고 혜비와 혜천 대사의 손길에도 무수히 쓰러져갔다. 허나, 숲 속은 짙은 어둠 속인데다 개중 무예가 낮은 사람들은 마강시에 의해 한 줌의 독수로 변해가고 있었다. 담사는 어느 정도 마강시가 쓰러지자 재빨리 악기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천 년이나 묵은 듯한 고송 아래 두 명의 기괴한 가면을 쓴 사람 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담사는 소리없이 쏘아가며 장검을 뻗었다. 순간 왼쪽의 괴인이 그를 발견하고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악기 를 들어 그의 검을 막았다. {좋아! 제법 솜씨가 있군.} 다음 순간 냉소성이 터지며 담사의 검이 악기에 부딪치려는 찰 나 교묘히 좌측으로 꺾이며 단전을 파고들었다. 괴인이 대경실색하며 몸을 피했으나 담사의 검은 불가사의한 정 도로 빨랐다. 이때 옆에 있던 괴인이 비파와 비슷한 악기로 옆에서 공격해 왔 다. 담사는 슬쩍 어깨를 흔들어 악기를 피함과 동시 검을 깊이 쑤셨 다. {으악!}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담사의 좌수가 벼락같이 뻗어 갔다. 순간 악기와 담사의 좌수가 부딪치자 악기는 산산히 부서지며 담사의 좌수는 그대로 괴인의 목을 후려갈겼다. {캐액!} 나머지 괴인마저 쓰러지자 담사는 냉막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소나무 숲 사이로 은은한 산의 모습이 보였다. 담사는 재빨리 방향을 정하고 몸을 날렸다. 숲을 빠져나오자 하나의 거대한 산이 안개 속에 싸인 듯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문득 이때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들리며 혜비대사를 위시하여 중인들이 날아갔다. {역시 소형제의 무예는 대단하단 말이야.} 어느 새 담사의 곁에 내려선 조노이는 감탄성을 토했다. {아미타불... 담시주의 도움으로 무사히 숲 속을 빠져나왔으니 정 말 감사하오이다.} 혜비대사가 정중히 합장하며 목례를 취했다. 담사는 무표정히 중인들을 응시했다. 몇몇의 고수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낭패한 표정으로 담사를 주시 했다. {담랑!} 뇌옥연이 기쁜 듯이 외치며 금산혜와 함께 달려왔다. 담사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중인들은 그가 말없이 두 여인과 걸음을 옮기자 일순 안색이 변 했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오만했기 때문이었다. 혜비대사는 중인들의 표정을 살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자, 여기서 지체할 것이 아니라 계속 가도록 합시다.} 돌연 이때 동추평이 외쳤다. {누가 오는 것 같읍니다!} 중인들이 앞을 바라보니 희미한 어둠 속에서 몇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이남일녀(二男一女), 앞장 선 청년은 관옥 같은 얼굴에 문사의를 입고 손에는 한 자 루의 섭선을 들었다. 그 옆에는 머리를 곱게 빗어 궁녀형의 머리를 한 백의미녀였고 뒤에는 약 칠순 가량의 적면노인이 무표정히 중인들을 노려보았다. 문사의를 걸친 준수한 청년이 두 손을 맞잡고 정중히 허리를 숙 였다. {소생은 모용천엽(慕容天葉)이라고 하는 사람으로 교주님을 대신 하여 여러분의 입산을 환영합니다.} 혜비대사도 정중히 합장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사의 주지로서 군웅들을 대표하여 마교 의 교주를 만나고자 합니다.} 모용천엽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교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 니 저를 따라 오시지요.} 이어 그는 천천히 몸을 돌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일마장 가량 걸었을까? 갑자기 그들 앞에 푸른 초원이 나타났다. 초원의 가운데 하나의 거대한 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있는데 그 주위로 수십 개의 횃불이 대낮처럼 어 둠을 밝혔다. 군웅들이 전각 앞에 도착하자 한 명의 노인이 천천히 마중을 나 왔다. 담사는 그를 보고는 전날 제남성에서 보았던 절명마존 혁사군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화려한 장포를 입 고 있었다. {여러분! 어서 오시오. 주석이 마련되었으니 우선 자리에 앉으시 지요.} 그는 정중히 말을 하며 군웅들을 안내했다. 주석은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각 앞에는 모두 열 개의 탁자 가 놓여 있는데, 중간의 탁자에는 마교의 태상호법인 적용군을 위 시하여 모용천위, 그리고 곡상봉(哭喪棒)을 들고 있는 헌 상복을 입은 산발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외에는 마교의 요인들인 듯한 흑의인들이 나뉘어 앉아 있었 다. 혜비대사는 나직이 말했다. {제시주 우선 자리에 앉아 이들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는 게 좋지 않겠읍니까?} 제우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흔들었다. {여러분, 우선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허나 탁자 위의 음식 은 절대 손대지 마시오.} 말이 끝나자 혜비대사는 성큼 걸음을 옮겨 적용군의 탁자와 마 주보는 좌석에 앉았다. 제우방과 혜천대사는 그 뒤를 따라 옆으로 앉았다. 조노이는 담사를 보고 말했다. {소형제, 우리도 아무데나 앉도록 하세.} 담사는 마교의 사람들을 주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조노인,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연매와 혜매를 부탁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전날과 달리 정중했다. 조노이는 흠칫하는 표정으로 담사를 보았다. 담사의 시선은 한쪽을 향하고 있는데 조노이는 그가 적용군과 모용천위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노이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소형제는 이미 손부인을 죽인 자가 누구란 것을 알았군.) 그는 내심 침음성을 삼키며 나직이 대답했다. {걱정말게. 이 늙은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두 분 재수씨는 구할 테니까!} 담사는 한 차례 두 여인의 모습을 일별하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장내에 중인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모용천엽이 일어났 다. 그는 술잔을 들고 낭랑히 말했다. {여러분! 먼 곳에서 이곳 추흥곡까지 오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읍 니다. 생사를 무릅쓰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 정신에 대단히 감탄을 했으니 먼저 술을 들어 주십시오.} 하고는 술잔을 쭉 들이켰다. 그러자 마교의 인물들은 술잔을 들이켰지만 중원의 군웅들은 그 냥 앉아 있을 뿐 누구도 술잔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혜비대사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담담히 물었다. {어느 분께서 마교의 교주이신지?} 모용천위가 재빨리 대답했다. {지금 제가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으니 할 말이 계신다면 저에 게 하셔도 무방합니다.} 혜비대사는 침중한 눈빛으로 모용천엽을 주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이곳까지 온 것은 그 동안 마교의 악랄한 수법 아래 죽 어간 무림동도의 억울함을 위함에서 온 것이요. 이 일은 교주와 상 의해야 될 일이니 교주를 만나게 해주시면 고맙겠소.} {장문인의 말씀을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렵군요. 강호의 생활은 언제나 피가 난무하는 법, 약자는 강자에서 죽음을 당한 것은 당연 지사가 아닙니까?} 모용천엽의 말에 제우방이 냉랭히 외쳤다. {마교가 강자라서 아무나 죽여도 된다는 말이냐?} 모용천엽은 경멸섞인 어조로 비웃듯이 말했다. {노인장은 설산의 제노선배 같은데... 이곳은 설산이 아니니 너무 큰소리 칠 것은 없읍니다. 잘못하면 이곳에 뼈를 묻을지도 모를 일 이니까요.} 제우방의 짙은 눈썹이 곤두섰다. {하하하.... 어린 아해가 입맛 살았구나.} 그는 노호를 터뜨리며 탁자 위에 놓인 젓가락을 튕겼다. {네놈의 무예도 어디 입처럼 단단한지 보자!} 모용천엽은 젓가락이 화살처럼 쏘아오자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순간 젓가락은 정확히 술잔 속에 박혔다. (이 늙은이 정말 내공이 보통이 아니군.) 모용천엽은 젓가락이 술잔을 뚫고 손바닥을 찌르자 내심 놀라움 을 느끼며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으며 젓가락을 뽑았다. {제선배님의 공력이 역시 명불허전이군요.} 제우방은 모용천엽의 태연한 말에 쓰디쓴 고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강호를 나오지 않았더니 어디서 이런 젊은 놈들이 나 왔단 말인가?)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전날 담사의 무예를 불현듯 떠올리 다 자신이 늙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혜비대사는 전각을 응시하여 내심 기이로운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전각을 놓아두고 밖에서 이렇게 연퇴를 벌리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게다가 교주마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으니...)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적용군을 주시했다. 약간 수심 어린 표정의 적용군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눈 을 뜨지 않고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문득 이때 전각 안에서 기이한 굉음이 들려왔다. 순간 적용군의 두 눈이 천천히 열리고 한 차례 중인들을 일별한 후 곧 혜비대사의 시선과 부딪쳤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 오늘 이곳까지 왔으니 무슨 계획이 있을 터 서슴치 말 고 말씀해 보시오.} 그가 입을 열자 모용천엽은 옆사람에게 무어라고 소근거린 후 곧 자리를 떴다. 혜비대사는 담담히 말했다. {소승은 지날 날 사부님으로부터 마교의 악행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읍니다. 헌데 오늘날 또다시 마교에서 무예계에 혈풍을 일으키니 소승은 비록 심이 없으나 전날 법공 사숙조님의 뒤를 이어 생명을 바쳐서라도 혈풍을 막을 작정입니다.} 일순 적용군의 가느다란 눈썹이 팔자로 치솟아 올랐다. {으핫핫핫...} 그의 입에서 갑자기 대소가 터져나왔다. 용이 울부짖는 듯 그의 대소는 중인들의 고막을 진동시키고 기혈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중인들은 재빨리 공격을 운행시키면서 살인적인 음파에 대항을 했다. 한동안 장내를 진동시키던 대소는 돌연 뚝 멈추고 적용군의 시 선은 혜비대사를 노려보았다. {법공이라고 했느냐... 법공! 그 놈은 백 년 전 마교에 씻을 수 없는 회한을 안겨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비분에 떨리고 있었다. {비록 전 날은 마교가 소림십팔천불의 비겁한 급습으로 무너졌 지만 이제 다시 부활한 이상 어느 누구도 우리의 앞을 막지는 못 할 것이다.} 제우방은 그의 광오한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 그렇게는 안될 것이외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온 이상 당 신의 야망이 얼마나 헛된 꿈인가를 명명백백히 알 수 있을 것이외 다.} 적용군은 조소 어린 표정으로 스산히 웃었다. {흐흐.... 오늘 이곳에 온 자들은 한 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 이다.} 뇌승이 차갑게 소리쳤다.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군. 장문인, 우리가 이곳에 올 때에는 생사문제를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여러 말 할 것 없이 싸 워서 승부를 겨루는 것이 좋을 것 같읍니다.} 그는 기이한 종음이 나온 후 마교의 무리들이 동태가 심상치 않 자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는 듯 일어섰다. 그러자 제우방을 위시한 중인들이 모두 일어서 그의 말에 찬성 하니 장내는 사태가 극히 험악해졌다. 적용군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흐흐...! 너희들이 싸우고 싶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그런데 한 사 람씩 싸우겠느냐 아니면 혼전을 벌리겠느냐?} 그의 목소리는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실상 고막을 진동시킨다는 것을 느끼고, 혜비대사와 같이 공격이 지고한 고수들은 좀전에 보 인 그의 대소를 상기하며 가슴이 덜컹했다. 중인들은 당장 싸울 듯이 일어섰으나 적용군의 말에 오히려 막 연한 눈빛으로 혜비대사를 주시했다. 혜비대사는 정도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극히 신분이 지고한 승 려이다. 신분을 생각하여 혼전을 하자는 말은 못하고 그렇다고 단독으로 싸우자니 적용군을 위시하여 몇몇 인물들의 무공이 범상치 않게 보인다. {아미타불, 당신들은 이미 모두 준비를 마치고...}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제우방이 호통을 쳤다. {당신이 마교에서 제법 높으신 분인 모양인데 어디 나와 한 수 겨누어 봅시다.} 적용군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제우방, 너는 노부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제우방은 안색이 싹 변하면서 오른 손을 재빨리 후려치며 입으 로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건방진 늙은이, 감히 나를 무시하니!} 그가 후려친 일장은 설산파(雪山派)의 독문장법으로 빠르기가 전 광석화 같았다. 적용군은 앉은 채로 슬쩍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펑! 둔탁한 굉음이 터지고 제우방은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이 늙은이는 불과 오륙십 세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데 단지 소 맷자락으로 나의 장력을 막고 또 물러서게 만들다니 도대체 이 자 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내심 놀라움을 느끼며 오른손을 뻗으며 식지와 중지를 꼿 꼿히 세워 적용군의 눈을 찔러갔다. 적용군은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중지를 뻗었다. 한 줄기 홍광이 벼락같이 제우방의 천돌혈을 향해 쏘아오자, {제시주, 조심하시오. 그것은 혈마지요!} 혜천대사가 다급히 외치며 우수를 떨쳤다. 순간 말없이 앉아 있던 모용천위가 벼락같이 막아서며 쌍장을 뻗었다. 혜천대사는 갑자기 모용천위가 앞을 가로막자 흠칫 놀라며 재빨 리 뒤로 일장이나 물러서 회한서린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돌연, 적용군이 좌수를 펼치며 일 장을 제우방에게 후려갈기면서 외쳤다. {모두 전각으로 들어가라!} 말과 동시 번갯불처럼 제우방에게 다시 쌍수를 쳐내고는 몸을 반듯이 누이며 뒤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폭음이 장내에서 터지며 자욱한 연기가 퍼 지고 일시에 수십 개의 횃불이 꺼져 버렸다. 당황한 중인들은 눈앞이 캄캄해지자 우왕좌왕 날뛰었다. 혜천대사가 버럭 노성을 외쳤다. {여러분, 모두 전각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날리면서 쌍장을 쳐냈다. 짙은 안개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나오고 어느 새 중인들도 자신 의 병기를 꼬나들고 혜천대사의 뒤를 속속 따라갔다. 담사는 중인들이 모두 안개 속으로 사라지자 그때서야 느릿하게 일어섰다. {담랑, 우리도 빨리 따라 가야지요.} 뇌옥연이 불안한 듯 말하자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 러보며 천천히 전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42 장 死 關 突 破 혜비대사와 혜천대사가 전각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두 명의 거 한이 감산도를 들고 빠르게 공격해 왔다. 그 즉시 혜비대사의 선장이 재빨리 감산도를 막으며 일 장을 쪼 갰다. 웅후한 장력이 들이닥치자 흑의거한은 도저히 피하지 못하고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때 혜천대사도 또 다른 거한의 어깨를 내려쳤다. 두 사람은 뒤 를 따라오는 중인들의 안전을 염두에 두고 무섭게 살수를 시전한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대전 곳곳에서 거한들이 몰려 나오며 득달같이 덮쳐왔다. 거의 백여 장이나 되는 대전을 순식간에 비명과 금속음으로 아 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혜천대사는 장내의 상황을 둘러보며 재빨리 외쳤다. {제시주, 저쪽 통로가 보이니 그리로 갑시다.} 말과 동시에 그는 옆에서 달려들던 거한의 옆구리에 일 장을 후 려치고 신형을 날렸다. 세 사람 정도 지날 날씬한 통로는 옆으로 꺽어져 있었다. 제우방은 힐끗 통로 안쪽을 살펴보며 통로로 들어섰다. 바로 그때 모용천위엽이 어둠속에서 소리없이 나타나며 재빨리 일 장을 쪼갰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제우방은 대갈일성을 토하며 쌍장을 뻗었다. 모용천엽은 마주치지 않고 슬쩍 뒤로 몸을 피했다. {늙은이, 용기가 있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말과 동시에 재빨리 통로 안쪽으로 달려갔다. 제우방과 혜천대사는 그가 갑자기 도망가자 황망히 몸을 날려 추적했다. 혜천대사가 중인들을 이끌고 통로에 들어서니 거대한 흑색문이 나타났다. 개방 방주 진방산과 황기진인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동시에 흑색 문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꽈____ 꽈꽝! 광음이 터지고 흑색문은 산산이 부서졌다. 진방산이 급히 안으로 뛰어들어 사방을 살폈다. 실내는 깜깜하여 그의 안력으로는 제대로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런 암흑 속에 마교의 무리들이 어떤 함정을 준비해 놓았는지 알 수 없군.) 그는 내심 생각을 굴리며 주 춤 물러서려고 할 때 홀연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들어왔으면 들어올 일이지. 무엇이 겁이 나는가?} 진방산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하여 재빨리 죽장을 펼쳤다. 순간 사방에서 상복차림으로 곡상봉을 든 괴인들이 돌연히 뛰쳐 나와 그를 공격해 왔다. 황기진인과 혜비대사가 재빨리 뛰어들며 외쳤다. {방주, 조심하시오. 이들은 보아하니 곡상문(哭喪門)의 귀졸들 같 소.} 어느 새 뒤를 따라 들어온 백상천, 황보가혜 등도 괴인들을 향해 공격했다. 어두운 실내는 한 순간 적야의 구분없이 뒤엉켰다. 괴인들의 무예는 기이하면서도 사이한 데가 있었다. 몸을 뻣뻣이 세우고 곡상봉(哭喪棒)을 휘두르는데 신법이 마치 귀영같이 빠르고 쳐오는 각도가 매우 기묘했다. 혜비대사는 어둠 속을 빠져나왔다. 그가 들어선 곳은 넓직한 대 전이었다. 혼전 중에 이리저리 움직이다 홀로 이곳에 이른 혜비대사는 주 위를 둘러보며 긴장된 표정으로 자세히 둘러보았다. 이곳은 사방이 오색천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벽쪽에 아수라상이 새겨져 있고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며 기이한 분위기를 간직 하고 있었다. 문득 이때 휘장사이로 네 명의 미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하나 같이 보기드문 미모를 지닌 이십대의 여인인데 수중에 연검을 들 고 있었다. 그녀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요염하면서도 눈에 불그레한 색기를 띠고 있었다. 혜비대사는 네 명의 여인들의 얼굴에서 음탕함과 요사함을 느끼 자 가슴이 철렁해졌다. (이 여시주들의 행색을 보자마자 은근히 울화가 끓어오르고 마음 이 설레이다니 실로 요상한 일이다.) 그는 은연중 금강경을 외우며 침중하게 외쳤다. {노승은 무고한 여시주들을 상하기 싫으니 어서 물러가시오.} 그의 말을 듣자 네 여인을 돌연 수중의 연검을 휘두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옷자락이 난무하고 검광이 번쩍번쩍했다. 점점 동작이 빨라질 수록 여인들의 허벅다리가 드러나고 은연중 사타구니 사이의 은밀한 밀지까지 보이는 것이다. 혜비대사는 당혹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소림에 입문하여 여인을 접촉한 적이 드물고 평생에 이런 황홀한 광경을 본 적이 없으므로 시간이 지날 수록 눈이 어지러워지고 정 신이 해이해졌다. 그러나 혜비대사는 일대의 고승이었다. 마음이 들떠 정신이 어지 러울지라 경각심을 느끼고 수중의 선장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선장이 강맹한 경풍과 함께 몰아치니 자못 그 위세가 맹렬했다. 네 명의 여인은 재빨리 물러섰다. 그녀들은 혜방대사의 선장이 날아오며 물러서고 다시 연검을 휘둘러 공격해 왔다. 혜비대사는 냉소하며 선장을 좌우로 몰아쳤다. 돌연 한 여인이 교소를 터뜨리며 왼손으로 상의를 벗자 곧 다른 여인들도 재빨리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옷이 한 가지씩 흘러내 릴 때마다 부드럽고 뽀얀 피부가 노출되었다. 이어 젖가리개와 고의마저 벗고 나니 혜비대사는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혜비대사는 태어난 이래 이런 광경 을 처음 본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기도 모르게 멍청해졌다.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소승이 살계를 저지름을 용서하소 서...) 정신이 분산되고 눈마저 감으니 그의 선장의 위세가 현저히 줄 어들었다. 그 사이 네 여인은 재빨리 연검으로 허점을 뚫고 요혈을 공격해 왔다. 혜비대사는 놀랐으나 급히 마음을 가다듬고 선장을 휘둘러 격퇴 시켰다. 그러나 나신의 여인들은 날쌔게 서로 교차하면서 수중의 연검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검광과 새하얀 나신이 사방을 뒤 덮고, 거기에다 여인의 입에서 희열에 들뜬 신음성마저 흘러나왔 다. 혜비대사는 처음에는 별로 느낌이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 이 이상해졌다. 이십 초나 넘어서자 여인들의 춤과 검술을 배합하여 덤벼드는 공세가 괴이할 뿐만 아니라 그 동작 하나하나가 사람의 음심을 자 극시키고 정신을 어지럽혔다. 시간이 흐를 수록 혜비대사의 선장은 노려지고 네 여인의 검술 은 익숙해졌다. 돌연 혜비대사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요사한 무리들 같으니 나를 원망치 말라!} 그는 재빨리 호통을 치며 십팔나한장법(十八羅漢掌法)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한장법은 그야말로 소림사의 무예 가운데 극히 위력한 절륜탄 수법이다. 혜비대사가 발휘한 그 위세는 강렬한 경풍으로 돌변하여 노도처 럼 사방으로 퍼져갔다. 그는 내심 금강진결을 외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로 인해 그 의 장세는 갈수록 위력을 더해갔다. 네 명의 여인은 돌별한 그의 공세에 분분히 물러서며 음탕한 비 음을 크게 내었다. 허나 이내 마음이 명경지수같이 진정된 혜비대사의 공세는 추호 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일순 호통을 치며 신룡택수(新龍擇首)의 수법으로 한 여인 의 연검을 쳐서 날렸다. 그와 동시 좌수를 이용하여 도전음양(倒轉 陰陽)의 장법으로 한 여인의 어깨를 강타했다. 이때, 차가운 일성이 터져나왔다. {너희들은 노승의 상대가 못되니 물러나라!} 여인들은 이 말을 듣자 재빨리 오색휘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실내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에 혜비대사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한편 담사와 두 여인 그리고 조노이는 전각(殿閣)을 들어섰다. 장내는 수 명의 시체가 널러져 있고 군웅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모두 저 안으로 들어간 것 같네.} 조노이가 대전 왼쪽에 나 있는 통로를 가리키며 외쳤다. 담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천천히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통로 군데군데에는 흑의인의 시체와 무인들의 시체가 아무렇게 나 나뒹굴고 있었다. 통로는 몇 번이나 돌자 은은한 도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호통이 들려왔다. {저 소리는 아버님의 목소리예요!} 뇌옥연이 황망히 외치며 신형을 날렸다. {연매, 조심하시오!} 담사는 재빨리 신형을 날려 그녀의 앞을 막았다. 순간 한 줄기 음유한 장력이 소리없이 날아오며 기괴한 복장의 인물이 앞을 막 았다. 담사는 슬쩍 장력을 피하며 검을 뻗었다. 그의 신법과 검을 재빨 리 뽑아 휘두르는 수법은 번갯불처럼 빨랐다. 괴인은 설마 그의 수법이 이다지도 빠를 줄은 몰랐는지라 피하 고자 생각했을 때는 이미 장검이 그의 가슴을 베고 난 후였다. {모두 조심하시오!} 암습한 적을 일검에 쓰러뜨린 담사는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미로 같은 통로를 벗어나자 조그만 대전이 보 이는데 이미 그곳에는 수 명의 시체가 쓰러져 있고, 뇌천도제 뇌승 과 청운도장 그리고 일부의 무림인들이 상복을 입고 곡상봉을 든 괴인들과 격전을 벌리고 있었다. 담사는 대전을 둘러보며 외쳤다. {조노인, 먼저 가겠소.} 그는 재빨리 검을 뽑아 한 명의 괴인을 처치하고 대전 안쪽에 나 있는 통로 쪽으로 달려갔다. 그 앞에는 뇌승과 청운도장이 곡상봉을 든 괴노인과 격전을 벌 리는데 둘이서 협공을 하지만, 망상막하의 싸움을 벌리고 있었다. 담사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통로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순간 괴노인은 곡상봉을 재빨리 휘두르며 담사를 향해 일 장을 후려쳐 왔다. 한 가닥 음유한 장력이 소리없이 밀려오는데 뼈를 에 일 듯한 냉기가 실려 있었다. {흥, 현음장(玄陰掌)이었군!} 담사는 냉소성을 터뜨리며 좌수를 가슴 앞으로 당겼다가 원을 그리며 다시 앞으로 내뻗었다. 괴노인은 갑자기 자신의 장력이 허무하게 무산되어 은은한 금광 이 서린 손이 날아오자,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그는 담사의 존재를 너무나 무시한 것이 그의 실수였다. 금강복마수는 마도의 무공과는 극성의 수법, 현음장은 석년 곡상 문의 독문절예로 그 위력이 놀라운데가 있었으나 금강복마수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 마공이었다. 담사의 손이 그의 손목을 친다싶자 괴노인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비쾌하게 통로로 물러섰다. 하나 이미 그의 손목은 으스러 져 창백한 그의 추괴한 얼굴은 일그러졌다. {금강복마수! 네놈은 누구냐?} {미친 늙은이군, 싸움 중에 상대의 내력을 알아 무엇하겠다고.} 담사는 조소를 흘리며 장검을 연화불유의 수법으로 쳐냈다. {이놈!} 괴노인은 울화를 참지 못하고 곡상봉을 휘둘러왔다. 창! 곡상봉과 장검이 부딪치자 불꽃을 퉁기며, 담사의 신형이 반동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통로 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이제보니 현음노괴(玄陰老怪)였군.} 조노이가 어느 새 날아오며 쌍장을 쳐냈다. 이 말에 흠칫 놀란 괴노인은 조노이를 발견하고 급히 물러섰다. {비천신괴(飛天神怪)!} 그는 경악성을 흘리며 다급히 안쪽으로 내달았다. 허나 조노이의 신법은 섬전같이 빨랐다. 어느 새 그자의 앞을 가 로막고 다시 쌍장을 쳐내자 현음노괴는 이를 악물었다. (평상시라도 이 늙은이를 당하기가 힘이 드는데 하물며 지금은 중상을 입었으니...) 그는 내심 공포를 느끼고 곡상봉을 휘두르며 주위를 살폈다. 뇌승과 청운도장은 갑작스런 사태로 잠시 멍청해 있다가 두 여 인이 달려오자 뇌승이 말했다. {연아, 이곳에는 오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뇌옥연은 황망히 말했다. {아버님,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예요. 어서 우리도 안으 로 들어가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금산혜와 안으로 달려갔다. 뇌승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현음노괴는 조노이의 비천장에 고전을 금치 못하고 있다가 뇌승 과 청운노인 그리고 뇌옥연 등이 몰려오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 정신이 흐트러진다면 그것은 죽음과 직 결되는 것이다. {타앗!} 조노이는 돌연 대갈일성을 지르며 벼락같이 쌍장을 좌우로 후려 쳤다. 현음노괴는 곡상봉으로 우장을 막고 나머지 좌장이 옆구리를 파 고들자, 자신도 모르게 부러진 왼손을 들었다. {크악!} 현음노괴는 순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벽에 부딪혔다. 왼손이 완전히 으스러지고 입에서 분수 같은 선혈을 뿜어내며 바닥에 엎 어졌다. 현음노괴가 죽자 뇌승을 위시한 중인들은 우르르 통로로 들어왔 다. {자, 두 분 제수씨, 어서 갑시다.} 조노이가 외치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뇌옥연과 금산혜는 얼 굴을 붉혔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외치며 그녀들은 부끄러 움을 느낀 것이다. 뇌승은 무슨 말을 할 듯 뇌옥연을 쳐다보지만 지금 형세가 위험 한지라 재빨리 말했다. {연아, 이곳은 매우 흉험한 곳이니 너희들은 우리의 뒤를 따라오 너라!} 뇌승은 청운도인과 급히 조노이 뒤를 따랐다. 조노이는 하나의 지하 동굴 앞에서 멈추었다. 사면이 뒤로 만들 어진 지하에는 돌계단이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는데, 주위에는 수 명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조노인, 그 분이 이 안으로 들어갔나요?} 금산혜가 재빨리 물었다. 조노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어두운 지하 암동을 살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그는 침중하게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암동으로 내려갔다. 뇌승을 비롯한 중인들도 곧 뒤를 이어 들어갔다. 지하암동은 캄캄하고 음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거의 백여 개의 돌계단을 내려오자 그때서야 울퉁불퉁한 바닥이 드러났다. 돌연 청운도인이 품 속에서 화풍을 꺼내어 불을 켜고 사방을 두 리번거리며 말했다. {화습자를 가리고 계신 분은 모두 불을 밝히시오!} 그러자 몇 명의 사람이 화습자에게 불을 붙였다. {이 굴은 오랫 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벽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군.} 조노이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뇌승은 깊이 조노이와 걸음을 함께 하며 말했다. {선배님, 이렇게 차가운 음풍이 불어오는 것으로 보아, 이 안에 는 지중(地中)의 한랭지기(寒冷地氣)가 고여있는 것 같습니다.} {뇌보주, 나의 경험으로는 이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한랭지기 가 아니라 인위적인 것 같소.} 그들이 말을 주고 받을 때 문득 차디찬 바람이 불어왔다. 이 한 줄기 냉풍은 음산하고 냉랭할 뿐만 아니라 피비린내까지 풍기고 있었다. 조노이가 공격을 운행하여 찬바람에 대항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이 음침한 동굴은 얼마나 긴지 알 수 없었다. 또한 꾸불꾸불해서 오 장 정도의 거리마다 길이 꺾어지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두 명 의 기괴한 복장을 한 시체들이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거의 일리 가량이나 왔을까? 모퉁이로 돌아서니 두 갈래로 갈라 진 동굴이 나타났다. 조노이는 발길을 멈추고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여기저기 얼굴에 기괴한 칠을 한 괴인들이 목이 잘리고 가슴이 벌어져 널브러져 있는데, 어떤 자는 머리가 부서지고 또 어떤 자는 입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쿵 쿵! 돌연 이때 왼쪽편 굴에서 희미하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거인이 먼 곳에서 이곳으로 향해 걸어 오는 듯했다. 조노이는 눈을 빛내며 왼쪽 굴을 응시했다. 그 굴에서는 비린내 가 확 풍겨와서 속이 메시껍고 구토증이 생길 것만 같았다. 웅! 웅! 동굴 안에서는 무언가 울리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오고 마치 절 벽에서 바위돌이 굴러내려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 다. {호흡을 정지하고 뒤로 물러서시오!} 조노이가 다급히 외쳤다. 청운도인이 갑자기 들고 있던 화섭자를 왼쪽 굴에 집어던졌다. 한 줄기 빛이 굴 안에 날아들자 탁! 하고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 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술잔만한 한상의 빛이 불빛에 번쩍거렸다. 뇌옥연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저게 무엇이예요?} 조노이는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음... 한 쌍의 눈이군.} {눈! 저렇게 큰 눈이면 굉장히 거대한 괴물이 아니겠어요.} 금산혜가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무슨 거대한 독물 같은데...?} 청운도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뇌승이 묵묵히 굴 안을 살펴보다가 비로소 말했다. {도형의 생각으로는 거대한 이무기일 것이라는 것이오.} 한 쌍의 시퍼런 눈알의 사람을 발견하자 눈알은 사방으로 굴렸 다. {만일 저것이 이무기라면 한 곳에 머물러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청운도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문득 오른쪽 굴에서 차가운 일성이 들려왔다. {죽고 싶은 자는 누구든지 이 안으로 들어오너라!} 순간 조노이의 신형이 벼락같이 오른쪽 굴 안으로 사라졌다. {조심하십시오, 선배님!} 뇌승이 재빨리 뒤를 따르며 외쳤다. 그러자 중인들은 재빨리 오 른쪽 동굴로 들어갔다. 얼마쯤 갔을 때 돌연 뜨거운 김이 확 끼쳐왔다. 마치 거대한 화 로 옆으로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앞장서 가던 조노이가 발을 멈추고 사방을 살피고는 심각한 표 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미 화산 쪽으로 들어 온 것 같소이다.} 그의 침울한 음성에 중인들은 매우 놀랐다. 뇌승과 청운도인이 재빨리 곁에 다가섰다. {어딘가 이 산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산 속에는 화산이 있군요.}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청운도인이 나직이 말하자, {맞읍니다. 저도 처음 이 산을 들어올 때 기이한 안개와 따사로 움을 느꼈는데... 화산지대인 것이 확실한 것 같읍니다.} 청운도인은 앞쪽을 살펴보며 말했다. {주위의 흔적으로 보아 앞서 가신 동도들이 이곳을 지난 것 같 은데 생사는 운명에 맡기고 계속 전진합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도인이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굴이 갑자기 넓어지며 뜨겁게 사람을 찌는 열기는 갈수록 더해 갔다. 양편의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돌연 청운도인이 대갈일성을 토했다. {누구냐?} 말과 동시에 일 장을 뻗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자세히 보니, 머리를 삭발한 괴인이 수중의 한 자루 칼로써 오른 쪽 굴 앞에 막고 있는데 왼쪽 굴은 벌겋게 타오르며 화암장이 부 글부글 끓고 있어서 그 열기는 사람을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괴인이 막고 있는 오른쪽 굴은 때때로 찬바람이 불어 나 와 열기를 해소시키고 있었다. [비켜라!] 청운도장은 이미 산발한 괴인에게 덮쳐가 싸움을 벌였다. 쌍방은 맹열히 공방전을 전개하며 허점을 노렸다. 산발괴인의 도법은 괴이하고 신랄했다. 청운도인의 검법은 정대 하면서도 현묘하기는 했지만 산발괴인의 도법이 한 수 위였다. {저 자의 도법이 매우 유명한데, 내가 도와야 겠군.} 뇌승이 재빨리 청운도인과 합세해 산발괴인을 공격해 들어갔다. 뇌옥연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조노인, 그 분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녀는 담사가 보이지 않자 초조한 듯 울상이 되었다. {걱정할 것 없어. 담사형제의 무예는 노부에 못지 않으니 별다른 위험이 없을 것이야.} 돌연 칼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며 뇌승의 장도는 뇌전 을 일으키며 몰아쳐 갔다. 산발괴인은 뇌승의 도법이 웅맹하자 당 황했다. 돌연 산발괴인은 좌장으로 연달아 삼장을 격출하며 훌쩍 없을 날려 동굴 속으로 달아났다. 뇌승은 도를 거두고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마교의 무리들이 하나같이 무예가 괴이하면서도 고강하고 이곳 의 형세는 험난하기 짝이 없으니 앞서간 동도들이 이미 화를 당했 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말을 끝내고 한숨을 쉬었다. 청운도인의 울적한 마음을 떨쳐 버리는 듯이 외쳤다. {마교의 무리들이 사악한 술수로써 음모를 꾸미고 있다해도 우 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이어 음침한 굴 속을 노려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제가 길을 트겠소이다.} 청눈도인은 수중의 검을 펼치며 단신으로 앞장서 몸을 날렸다. 그의 기개는 호호탕탕했으나 거동은 역시 신중을 기해 조심스럽게 살피며 전진했다. 냉기가 도는 굴 속에 들어서자 몸이 얼어붙을 듯이 추웠다. 음산 한 암흑 속이나 중인들의 초인적인 안력으로도 육칠 척 앞을 바라 볼 수 없었다. 이미 화섭자는 살인적인 냉기에 불이 꺼져 버리고 동굴 속은 오 직 암흑 뿐이었다. 중인들은 벌써 몇 번이나 좌절을 당해 의기소침한 심정으로 모 두가 경각심을 높였다. 조노인은 두 여인을 보호하듯 걸음을 옮기며 나직이 말했다. {만일 이 암흑 속에서 적이 급습해 오면 위험이 크니까 두 분 제수씨는 조심하십시오.} 뇌옥연과 금산혜는 아까부터 그가 자꾸만 제수씨라고 부르자 마 음 속은 흐뭇해졌지만, 그래도 수줍은지 금산혜가 나직이 말했다. {사람들이 있는데서 자꾸만 그러시면 어떡해요.} 조노인은 음흉맞게 웃었다. {호호.... 그 소리가 싫다면 나의 소형제가 싫다는 말이나 마찬가 지인 것처럼 들리는데.} 금산혜는 이 말에 움찔했다. {누가 무어라고 했어요? 다만....} {다만, 뭐지? 소형제에게 가기 싫다면 말만 해. 내 언제든지 이 야기 할 테니까.} 금산혜는 콧등을 찡그리며 화난 듯이 외쳤다. {몰라요! 조노인은 우리를 놀리기만 하고.} 아직도 천진한 금산혜는 뾰루퉁한 얼굴로 재빨리 앞으로 걸어갔 다. 돌연 조노인의 눈빛이 날카로워 졌다. {으악!} 갑자기 뒤를 따르던 점창파의 제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 어둠 속에서 또다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암기닷, 조심해!} 조노인은 벼락같이 몸을 날리며 쌍장을 좌우로 차냈다. 그의 맹 렬한 장력이 사방으로 날아드는 암기를 쳐내었다. 청운도인, 뇌승 등도 그에 보조를 맞추어 어둠 속을 향해 장력을 후려쳤다. {굴 속에 숨은 놈이 누구냐?} 뇌승이 호통을 치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뇌보주 조심하시오.} 청운도인이 외치며 다급히 몸을 날렸다. {크.... 으악!} {으.... 악!} 일순 어둠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오며 조용해 졌다. {빨리가자.} 조노인은 재빨리 뇌옥연과 금산혜의 손을 잡으며 달려갔다. 그들이 십여 장 정도 나아갈 때까지 아무런 암격도 없었다. 그들이 다시 앞으로 전진을 했을 때 뇌옥연이 갑자기 교음을 토 했다. 흠칫 놀란 조노인이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 {무슨 일이냐?} 뇌옥연이 다급히 외쳤다. {발 밑에 무엇이 있어요.} 이 말에 조노인이 안력을 돋구어 땅바닥을 살폈다. 마교의 수하 인 두 명의 괴인이 가슴이 베어진 채 쓰러져 있는데 이미 죽어 있 었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조노인은 시신의 상처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이곳으로 소형제가 지나간 것 같군.} 돌연 뇌승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모두 어디에 있소?} 뇌옥연이 다급히 외쳤다. {아버님, 여기예요.} 이 말이 끝났을 때 갑자기 뇌승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서 갑시다. 조금만 가면 광장이 있는데, 그곳에는 격전이 벌 어지고 있소.} 그는 말이 끝나자 마자 급히 되돌아 달려갔다. 이에 중인들도 속 속 뒤를 따라 선법을 전개해 빠르게 질주했다. 잠시후, 멀리서 은은한 금속음과 노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 갑자기 눈 앞이 밝아지고 거대한 지하광장이 눈 에 들어왔다. 약 천여 평은 족히 될 것 같은데 천정에는 종유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광장의 중앙에는 담사와 개방방주 진방산, 무영신개 동추평 그리고 태극도인 등 중원의 무인들이 오색의 기괴한 복장 에 마귀탈을 쓴 백여 명이 괴인들에게 포위를 당해 고전분투하고 있었다. 이들 중 담사와 오색옷을 입은 괴노인의 격전은 단연 치열했다. 그들의 주위에는 많은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데 괴인들과 중원무 인들의 시신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광장 안의 기온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았고 온화했다. 오른쪽 벽에는 벌집처럼 구멍이 많았는데 그 구멍으로 밝은 빛이 스면들 어 광장을 밝히고 있었다. {하하하....} 조노인은 대소를 터뜨리면 바람같이 담사를 향해 날아갔다. {소형제, 여기 있었군.} 그는 말과 동시에 쌍장을 무섭게 쳐냈다. 순간 중원무인들은 이들의 출현에 사기가 드높아졌다. 소림의 제자들은 장문인과 혜천대사가 보이지 않자 그들의 마음 이 초조해 연신 살수를 휘둘렀다. 다른 사람들도 이미 마교의 무리들에게 지독히 당한 터라 그들 의 수법은 모두 날카롭고 살기에 차 있었다. 뇌승이 장도를 휘두르며 뛰어들자 그 뒤를 따라 청운도인 등도 격전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괴인들도 귀두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담사는 중인들이 싸움을 벌이자 재빨리 전권에서 빠져나왔다. 돌연 조노이가 벼락같이 외쳤다. {모두 멈추어라!} 고막을 찌르는 듯한 그의 고성에 쌍방은 일순 싸움을 멈추고 서 로 갈라졌다. 조노이의 눈 앞의 괴인들을 일별하며 외쳤다. {누가 너희들 중 수뇌냐?} 순간 한 명의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소?} 낭랑히 말하는 청년은 바로 마교의 문상(文相)인 모용천엽(慕容 天葉)이었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수중의 섭선을 펼치며 조노이 를 응시했다. {우리 외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모용천엽은 중인들을 쓱 훑어보면 냉랭히 말했다. {소림의 장문인, 설산의 노괴 등 모두 죽거나 생사지난의 위험에 처해 있지요.}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일 그들을 구하고 싶다면 나를 따라오시지요.} 이 말에 중인들은 움찔했다. 모용천엽은 그 말을 끝으로 재빨리 몸을 돌리며 한쪽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괴인들도 그를 포위하며 물러갔다. 조노이는 마음 속으로 재빨리 생각을 했다. (이 놈의 말이 이렇게 당당한 것으로 보아 거짓이 아닌 것 같 다.) 그는 생각과 동시에 몸을 돌리고 중인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저놈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는 모르나 기왕지사 이곳 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 보겠소.}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를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따로 행동을 하시오.} 현재 이곳에서 그의 배분이 제일 높은데다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뇌승이 재빨리 말했다. {나는 선배님을 따르겠읍니다.} 조노이는 뇌승을 향해 히죽 웃어보이고 담사에게 말했다. {소형제, 저놈들이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 따라가 보세.} 일행은 모용천엽이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장을 빠져나가자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 저쪽에는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어드는데 아마 밖으로 나오는 길인 것 같았 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중인들은 이미 몇 시진이나 암흑 속을 헤매었는지라 재빨리 몰 려나갔다. 잠시 후 중인들이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햇살이 눈을 찔렀다. 담사는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은 천애절벽으로 둘러싸 여 있고 눈앞에는 거대한 고루전각이 그림처럼 세워져 있었다. 주위로는 파릇파릇한 잔디와 이름모를 기화이초가 향기로운 내 음을 풍기고, 기온이 봄날처럼 온화했다. 선경도원이 속세에 있다 면 이런 곳이리라... 중인들은 눈앞의 수려한 풍경에 어리둥절해졌다. {어마, 정말 아름다운 곳이예요. 이런 곳에서 한평생 살았으면.. ..} 금산혜는 기쁜 듯이 담사에게 나직히 말했다. 담사는 내심 이곳의 환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도원경(桃園境) 같은 곳이군. 허나, 이곳이 보아하니 마교 의 총단같은데.....) 거대한 대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데, 조노인을 비롯한 중 인들도 긴장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눈 앞이 환해지면서 빨간 꽃밭이 끝없이 펼 쳐지는데 짙은 꽃향기가 중인들의 코를 찔렀다. 이상한 것은 이 꽃 밭이 모두 붉은색으로 한 종의 꽃으로 이는 분명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꽃밭 가운데에는 하얀 돌로 깔아놓은 좁다란 길이 나 있었다. 중인들은 묵묵히 그 길로 접어들었다. 뇌옥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담랑, 이게 무슨 꽃이예요?} 담사는 꽃을 살펴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이 꽃에는 무슨 음모가 없는 듯한데.... 나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야.} 중인들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꽃밭을 벗어나자 눈앞에 삼 층고루거각이 나타났다. 거대한 돌사자가 정면에 버티고 서 있는데 그 밑에 피투성이의 노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담사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제우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주위에는 핏자국이 어지러히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바탕 격 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노인을 위시해 진방상 등 중인들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섰다. {제선배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개방 방주 진방산이 급히 그를 부축하여 물었다. 그는 우수를 그의 명문혈에 대고 진력을 주입시켰다. 한 줄기 중 후한 진력이 몸 안으로 들어오자 제우방을 힘겹게 눈을 뜨며 더듬 입을 열었다. {함정이네.... 꽃밭에 독이.... 돌에 모두 조심....} 그는 더이상 말을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미 오장육부가 자리 를 바꾸는 중상을 입어 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인들은 움찔 놀라며 급히 진력을 일주천했다. 암암리 기력을 조절해 보니 추호도 중독된 기미가 없으므로 그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괴상망칙한 악기음(樂器音)이 들려나왔다. 이어 고루거각의 속에는 이상한 괴인들이 천천히 몰려 나왔다. 맨 앞에는 네 명의 거한이 혈교(血轎)를 받쳐들고 천천히 나오고 그 뒤로 귀면탈을 쓴 사람들이 손에 기이한 악기를 불고 치고 하 면서 뒤따라 나왔다. 담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악사들 뒤로는 마교의 태상호법 적용군과 절명마존 혁사군, 모용 천위, 천엽형제가 나란히 서서 나오고, 그 뒤에는 모두 일신에 흑 의를 입은 건장한 대한들이 줄줄이 따라나왔다. 돌연 악기음이 그치자 흑의인들은 신속하게 사방으로 퍼지고 혈 교를 가만히 땅에 내렸다. 헌데 갑자기 붉은 꽃밭 속에서 수십 명의 괴인들이 뛰어나와 중 인들을 포위했다. 태극도인이 냉랭히 외쳤다. {무당의 제자들은 오행검진(五行劍陣)을 펼쳐라!} 순간 중인들 중 무당의 도인들은 재빨리 다섯 명씩 짝을 지어 검진을 형성하자, 소림의 승려들도 늦을세라 나한진법으로 돌진했 다. 조노인이 혈교를 응시하며 외쳤다. {그 안에 있는 분이 마교의 교주시오?} {기왕에 나왔는데 교주께서 그 안에 숨어 있을 필요가 무엇이 오?} 돌연 개방방주 진방산이 비웃음을 흘리며 일장을 혈교를 향해 후려쳤다. 순간 혈교 옆에 서 있던 거한들이 재빨리 막아서며 쌍장을 뻗었 다. 이들의 신법은 덩치에 비해 너무나 재빠르고 쌍수에서 쏟아지 는 장력이 강맹했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진방산은 이들의 위세에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죽장으로 개방의 타구봉법을 시전했다. 바로 그때 혈교 안에서 한소리 낭랑한 여인의 교갈이 들렸다. {물러나라!} 그 목소리는 극히 부드럽고 영롱하여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데 가 있었다. 말이 끝나자 마자 주렴이 흔들리며 온몸에 붉은 홍의를 걸친 미모의 여인이 천천히 나왔다. 진방산은 홍의여인이 나오자 재빨리 물러서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나이는 오십줄로 보였는데 얼굴은 초로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오관이 수려하고 살결이 옥같았으며 몸매는 수양버들같이 가늘었다. 옷밖으로 드러난 손목과 목의 피부는 백옥같이 뽀얗게 빛이 났다. 실로 절세의 미모가 아닌가? 중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미모에 멍청해졌다. 그녀는 바로 안창 산에 나타났던 연운설이었다. {당신이었군!} 무영신개 동추평은 그녀가 누군지 알아본 듯 놀란 듯이 경악성 을 토했다. 연운설은 냉막한 눈빛으로 중인들을 일별하며 요염한 교소를 흘 렸다. {호호... 동노인, 오랜만이군요.} 동추평은 굳은 표정으로 냉랭히 말했다. {혜천대사와 혜비대사는 어떻게 되었소?} 연운설은 그 말에 대답을 않고 조노이를 응시했다. {당신이 비천신괴라는 사람인가요?} 조노이는 그녀의 질문에 움찔 놀라며 태연히 대답했다. {그렇소만, 나에게 무슨 분부라도...?} 그의 눈빛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제길! 정말 절세우물이로군. 이 늙은 마음도 그녀의 눈빛을 보 다 마음이 두근거리니...) 연운설을 살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군웅들을 대표해서 말을 할 수 있나요?} 이 말에 조노이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 나는 다만 중원무림인으로서 이곳에 온 것이지 중인들의 대표는 될 수 없소.} 연운설은 이 말에 다시 고개를 돌리고 중인들을 바라보며 말했 다. {그럼 어느 분이 중인들을 대표해서 저와 이야기를 하겠어요.} 중인들은 한 순간 서로 마주보았다. 처음에는 혜비대사가 군웅들 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그가 없으니 중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돌연 진방산이 말했다. {황기진인께서 덕망이 높고 연륜을 따져도 우리 중에서 제일 높 으니 진인께서 말씀하십시오.} 그의 말에 청운진인도 찬성을 표하자 여러 중인들도 찬동을 표 했다. 황기진인은 곤륜파의 장문인으로 검술에 독특한 일가견이 있는 데다 나이만도 칠십이 넘었다. 중인들이 재촉하자 그는 할 수 없다 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당분간 중인들을 대표할 수 있으니 할 말이 있다면 하시 오!} 연운설은 미묘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좋아요. 현재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독에 중독되었으니 모두 항목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어요.} 중인들은 문득 가슴이 철컹함을 느끼며 진력을 운행하여 정말 중독되었는지 알아보았다. 연운설은 중인들의 표정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의 몸에 스며든 독은 색깔과 냄새가 없는 무형지독으로 꽃밭 속을 지날 때 모두 중독되었으니 살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항복을 해요.} 진방산은 공력을 일주천시켜도 아무런 이상이 없자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이 요부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웅후하고 얼굴빛이 불그레한 것이 추호도 중독된 기미가 없었다. 문득 연운설의 표정이 변했다. (이상한데... 이들이 곡에 들어오기 전 안개 속에 포함된 독과 홍 란화의 독이 상충되면 발작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는 내심 기이함을 느끼며 중인들을 세세히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나 중독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담사는 연운설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저 여인의 표정을 보아 중인들의 중독은 거짓이 아닌 듯한데... 그러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지 않은가?) 그는 내심 기묘함을 느끼며 말했다. {조노인, 누군가 독을 제거시킨 것 같은데 혹시....?} 조노이는 담사의 뒷말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은 나도 모르는 일이네... 그 분께서 오셨는지는 나도 모르 겠네.} 황기진인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재빨리 생각했다. (이들의 표정을 보아 독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누 군가 우리를 도우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밤이 길며 꿈이 많은 법이 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 마음 속으로 결단을 내리자 크게 외쳤다. {여러분, 더 이상 지체하다가 우리가 무슨 귀계에 당할지 모르니 즉시 공격을 합시다.} 그는 말을 끝내자 수중의 검을 높이 흔들며 다시 외쳤다. {곤륜의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자 곤륜의 제자들이 선봉으로 쳐들어갔다. 진방산도 죽장을 휘두르며 외쳤다. {개방의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는 동쪽으로 질풍같이 쳐들어갔다. 이에 동추평, 뇌승, 냉유도 등도 합세해 돌진해 들어가니 중인들 도 모두 함께 도검을 뽑아 물밀 듯이 공격해 갔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제 43 장 悲運의 戀人들 장내는 일순간 도검이 난무하고 피가 튀었다. 곤륜파 장문인 황기진인은 제일 먼저 적과 접촉하여 일 장의 결 전을 전개하니 검이 난무하고 장력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동추평은 재빨리 혈교를 덮쳐 갔지만 연운설은 어느 새 뒤로 물 러나 거각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그는 절명마존 혁사군을 맞아 쌍장을 후려쳤다. 조노이는 재빨리 마교의 태상호법인 적용군을 덮쳐가고 담사는 무표정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상천과 황보가혜는 서로 절묘한 합공으로 모용천엽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모용천엽의 섭선에서 쏟아지는 괴이한 수법에 두 사람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격전을 벌였다. 청운진인과 뇌천도제 뇌승 등 오 인이 둘러싸고 합공을 하는데 도 모용천위는 조금도 꿀림이 없이 태연히 첩혈마황검을 휘두르며 오히려 오 인을 핍박하고 있었다. 그 외에 중인들은 마교의 수하들과 뒤엉켜 싸우는데 원래 하나 하나가 각파에서 고른 고수들이다. 대부분 죽어가는 것은 마교의 무리들이었다. 그들 중 적용군은 조노이가 날아오자 재빨리 일 장을 갈기며 크 게 외쳤다. {천위! 여기는 천엽에게 맡기고 너는 안으로 들어가 봐라!} 이어 벼락같이 몸을 날려 뇌승과 청운진인에게 쌍장을 갈렸다. 모용천위는 이 틈을 이용해 급히 전각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 담사의 신형도 어느 새 허공을 쏘아갔다. 전각에 도달하자 문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괴인이 검을 들어 담 사를 막았다. 하지만 그 순간 담사의 우수가 벼락같이 검을 뽑아 발초익사의 수법으로 오른쪽의 괴한을 찌르면서 좌수로 금강복마수를 펼쳤다. {으악!} {크아악!} 그들은 검도 채 떨치지 못하고 한 명의 심장이 찢겨 쓰러졌다. 그와 동시 또 하나의 괴인은 머리가 두부가 으스러지듯 쪼개졌다. 거각 안으로 들어선 담사는 재빨리 사방을 살폈다. 대청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는데 바닥에는 부드러운 양탄자가 깔려 있는 대리석의 기둥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대청 정면에는 천마상이 안치되어 있는 그 뒤로 거대한 아수라 마황상이 벽에 부각되어 있었다. 그 앞에 거대한 향로에서 기이한 향기가 솟아올라 대청을 기이 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바깥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곳은 쥐죽은 듯 조용하 고, 먼저 들어간 모용천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담사는 일순 뒤쪽으로 나 있는 통로를 발견하고 재빨리 몸을 날 렸다. 두 사람이 지나갈 만한 통로에는 벽에 일 장 마다 등잔이 걸려 있는데, 한참 동안 달렸지만 통로는 미로처럼 얽혀 있어 길은 찾기 가 어려웠다. [아미타불....!] 문득 이때 은은히 불호성이 들려왔다. 담사는 불호성이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왼쪽으로 꺾어지자 말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담사의 신형이 귀영 처럼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방 오 장 가량의 방으로 벽면에 서책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 고, 귀한 자단목의 팔선형 탁자 옆에 연운설과 한 명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중년인은 청의를 입었는데 넓은 이마와 착 가라앉은 두 눈은 그 가 지혜롭고 침착한 성품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연운설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총사(總師)! 어떻게 그들이 지하감옥을 탈출해 나왔단 말이예 요?} 중년인은 침중한 표정으로 재빨리 말했다. {그게... 적용소저가 그들을 풀어준 것 같읍니다.} 연운설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그 아이는 실종되었는데 언제 돌아왔어요?} {세 시진 전에 갑자기 돌아왔는데 꽃밭에 장치된 무형지독(無形 之毒)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적용소저의 짓인 것 같 읍니다.} 연운설은 벌떡 일어섰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조금 전 내실에 있었는데 지금은....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 아이로 인해 이십 년에 걸친 대계가 무산되다니.... 비록 그 아이가 태상노조(太上老祖)의 손녀라도 결코 용서학 수 없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빛을 빛냈다. {좋아요.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을 각게 격파하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 철불과 혜비대사는 누가 막고 있어요?} 중년인은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삼장로가 막고 있지만 이미 그들은 마황전(魔皇殿)을 뚫고 나왔 으니 지금쯤 이곳으로 올것입니다.} 돌연 이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머님! 철불과 중원무인들이 정운각까지 왔읍니다!} 들어선 사람은 바로 마교의 무상인 모용천위였다. 묘용운설은 재빨리 신형을 날리며 말했다. {가자!} 세 사람은 급히 밖으로 나왔다. 담사는 재빨리 신법을 전개해 그들 뒤를 따랐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혜천대사와 혜비대사 그리고 아미장문인 유원신니 등 그 동안 보이지 않던 중원무인들이 연못이 있는 정자 주위에서 얼굴에 흉 칙한 귀면(鬼面)을 쓴 장한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원무인들은 하나같이 피투성이에 얼굴에 피곤한 빛이 역력한 데 그 동안 많은 고초를 겪은 것 같았다. 그들의 수법은 정대하면 서도 강맹했다. 귀면탈의 장한들도 무예가 낮지는 않았으나 분노한 중원무인들 은 하나같이 극강의 고수들, 장풍이 나르고 도검이 뿌려질 때마다 어김없이 피가 튀었다. {멈추어라!} 연운설이 차갑게 외치며 장내에 들어섰다. 순간 군웅들은 그녀의 호통에 재빨리 양편으로 물러섰다. 혜천대사는 연운설을 보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미타불... 역시 연시주였구료!} 나직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수만 가지의 감회가 서려 있었 다. {흥, 혜천! 나를 기억하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증오에 떨리고 있었다. {더러운 위선자, 나를 망쳐놓고 나의 어머님까지 죽인 철천지 원 수!} 연운설의 눈에서 증오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혜천대사는 참담한 신색으로 나직이 말했다. {소승은 아무런 할말이 없소이다.} 이어 나직이 탄식을 토하며 모용천위를 주시했다. {얘야, 네가 천위라는 아이냐?} 모용천위는 이 말에 흠칫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혜천선사의 표정은 매우 부드럽고 눈가에 기이한 빛이 흘렀다. 마치 자식을 보 는 듯한 따듯한 눈빛이랄까? 모용천위는 문득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닥쳐라, 혜천.} 연운설은 갑자기 싸늘하게 외치며 재빨리 혈마지를 쏘아냈다. 순간 혜비대사가 재빨리 소맷자락을 흔들어 지풍을 막았다. {아미타불.... 장문인 이 일은 내가 해결할 테니 잠시 물러나 주 십시오.} 혜천대사는 말과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혜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죄를 지었으니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이다. 허나 그것을 구실로 무예계를 어지럽히고 자식에 게까지 원한을 물려주는 것은 용서할 수 없소.} 그의 준엄한 말에 연운설은 일순 교갈을 터뜨렸다. {호호호.... 더러운 중 놈 같으니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 느냐?} {석년 전륜교는 사악한 방법으로 민심을 교란시키고 천하를 도 탄에 빠뜨렸소. 혜천은 전륜교를 패망시킨데 대하여 한 점의 가책 도 없소. 다만....} 연운설은 더 이상 참지 못하는 듯 날카롭게 외쳤다. {천위야 저 위선의 무리들을 모조리 죽려라!} 모용천위는 그녀의 말에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는 오른손에 첩 혈마황검을, 왼손은 천마산수를 시전하여 현란하게 휘둘렀다. 혜비대사가 다급히 몸을 날리며 선장을 쳐냈다. 꽈꽝! 굉음이 터지고 혜비대사는 주춤 두어 걸음이나 물러섰다. 모용천위는 혜비대사가 물러서자 그 여세를 빌어 벼락같이 군웅 들을 향해 첩혈마황검을 읍성같이 뻗었다. {조심하시오!} 혜비대사가 들끓는 기혈을 누르며 다시 몸을 날렸다. {으악!} 한 명의 고수가 점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뿌렸다. 모용천위는 한 명을 재빨리 선장을 피해 옆으로 좌수를 쳐냈다. 이어 다시 비명이 터지고 또 한 명이 쓰러졌다. 연운설은 재빠르게 혜천대사를 덮치며 외쳤다. {모조리 죽여라!} 순간 귀면탈의 괴인들이 득달같이 중원무인들을 향해 덮쳐들었 다. 장내는 다시 혼전을 벌렸다. 도검이 흔들릴 때마다 핏빛이 터지 고 피가 튕겼다. 모용천위의 무예는 실로 가공스러웠다. 첩혈마황검이 나르고 좌 수가 뻗을 때마다 어김없이 중원무인들이 쓰러져 갔다. 혜비대사는 총사라 불린 중년인과 부딪쳐 맹렬히 공방전을 벌이 는데 그의 수법이 매우 괴이했으므로 혜비대사는 연신 뒤로 밀렸 다. 담사는 장내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저 자의 무예는 정말 가공스럽군.) 그는 모용천위가 무섭게 날뛰는 것을 보며 내심 가슴이 서늘해 졌다. 돌연 이때, 한 가닥의 전음성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 못된 축생아, 어서 빨리 저 젊은 놈을 막지 않고 무엇 하느 냐, 저 놈의 천마산수와 첩혈마황검을 막을 놈은 너밖에 없단 말이 다.} 담사는 안색이 싹 변했다. (법공대사의 목소리다!) 그가 주춤거리자 또다시 노성이 들려왔다. {이놈아, 어서 빨리 저 미친 놈을 막지 않고 무얼 하느냐?} 담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법공대사의 행방을 찾았다. {이 못된 축생, 저 놈이 너의 마누라를 죽인 원수란 말이다.} 이 말에 담사의 눈빛이 반짝 빛이났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벼락같이 모용천위를 향해 날아갔다. 모용천위는 갑자기 동쪽에 한 가닥 살기를 느끼자 좌수를 재빨 리 뒤로 돌렸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순간 담사는 찔러가던 검을 아래로 숙이며 그의 다리를 베어갔 다. 모용천위는 깜짝 놀랐다. (이 자의 수법이 이렇게 빠르다니....) 생각과 동시에 발끝을 차며 몸은 풍차처럼 돌림과 함께 첩혈마 황검으로 검을 막았다. 창! 금속음이 터지고 불꽃이 퉁겼다. 담사는 이미 그의 고절한 무예를 알고 있는지라 추호도 여유를 주지 않고 연화십팔법의 구초를 차례대로 쾌속하게 시전했다. 비록 그의 검세는 느린 듯하였으나 이어지는 검세는 장중하면서 도 황토의 물결처럼 검풍을 싣고 끊임없이 요해대혈을 찔러갔다. 모용천위는 담사의 현묘한 수법에 수중의 첩혈마황검을 휘두르 며 수비에 치중했다. 용호상박, 담사와 모용천위의 수법은 무예계에서 보기 드문 절예 들로 주위에 있던 중인들은 그들의 전신에서 뻗어나오는 기와 검 풍에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이 자의 무예는 과연 절륜하고 무섭군.) 담사는 내심 등골에 식은땀이 솟아났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손 목이 저려오고 그의 검은 평범한 장검이라 비록 공력이 주입되어 금석을 벨 수 있으나 첩혈마황검과 부딪칠 때마다 검날의 이가 빠 져나갔다. 모용천위는 연신 첩혈마황검을 휘두르며 그 또한 매우 놀랐다. (이 놈은 바로 전날 화련을 겁탈한 그 놈이 틀림없다. 헌데 어디 서 이런 기묘한 수법을 익혔는가 모르겠군.)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증오심이 끌어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놈을 죽여야 한다.) 그는 일순 살기가 크게 일어나 대갈일성을 토하며 검법을 돌변 시켜 순식간에 번개처럼 첩혈마황검을 휘두르다니 핏빛 혈광이 담 사의 전신을 에워싸 버렸다. 담사가 갑자기 눈앞이 핏빛 혈광으로 가득차자 대경실색했다. 돌연 수중의 장검을 머리 위로 번개같이 올려 연화천망(蓮花天 網)의 수법으로 쳐냈다. 그러자, 검과 검이 순식간에 엇갈리고 불꽃 을 튀었다. {제법이군. 허나 네놈은 절대 나의 검을 피하지는 못한다.} 모용천위는 대갈성을 외치며 금두격마(金杜擊魔)의 수법으로 첩 혈마황검을 쳐내니 온 하늘에 수십 가닥의 핏빛 혈광을 일으키며 폭포가 쏟아지듯 담사에게 쏘아갔다. 이 수법이야말로 모용천위가 전력을 모아 발휘한 것이니 그 위 세가 마치 대해의 노도처럼 사나와... 돌연 담사의 몸이 숙인다 싶 자 뇌려타곤의 신법으로 옆으로 굴렀다. 모용천위는 회심의 일격이 무산되어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놈!} 그는 분연히 외치며 그림자처럼 담사의 뒤로 미끄러지듯 따르며 일장을 쳐냈다. 이미 자세를 바로한 담사는 한 가닥 웅후한 장력이 밀려오자 좌 수를 들어 앞으로 밀었다. 순간 그의 손이 은은히 금광을 띠며 장 력을 가르고 쏘아갔다. {금강복마수(金剛伏魔手)!} 모용천위는 경악성을 토하며 벼락같이 장력을 거두고 몸을 날려 몇 걸음 뒤로 피했다. {네놈은 소림의 제자였더냐?} 담사는 그가 물러서자 그 자리에 멈추어서 냉랭히 말했다. [네가 누구의 제자이든 간에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어디 이것이 나 받아 봐라.] 그는 좌수에 공력을 집중시키며 재빨리 기묘하게 뻗었다. {좋아, 네놈이 금강복마수를 익혔다고 해서 적수가 없는 줄 아느 냐?} 모용천위도 차갑게 외치며 좌수를 뻗었다. 순간 그의 손이 녹광 으로 물들며 마주쳐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합쳐지는 것 같았으나 다시 떨어져 뒤로 물 러난다 싶자 다시 번갯불처럼 뒤엉켰다. 중인들은 이들의 신속무비한 수법에 눈알이 빙빙 돌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순식간에 오십초가 교 환되고 서로 검과 장을 난무하니 주위 삼 장 이내는 아무도 접근 을 못했다. 한편 혜천대사와 연운설의 싸움은 일방적으로 혜천대사가 몰리 고 있었다. 연운설의 수법은 한 쌍의 옥장에서 뻗어 나오는 장력인데 간혹 혈마을가 섞여 있었다. 혜천대사는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가 진력을 다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은 참담해져 있는데 눈에는 잔뜩 고뇌의 빛이 담겨 있었다. 돌연 연운설의 신형이 미묘하게 허공을 날으며 쌍장을 교차시켰 다. {혜천, 죽어랏!} 그녀는 악독하게 소리치며 혈장을 쏟아냈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는 사공까지 익혔구료.} 혜천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좌수로 금강복마수를 펼쳐 막아갔 다. 우르르____ 릉_____ 꽝! 굉음이 터지고 연운설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오르며 재주를 넘 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가 아래로 향하여 쌍수를 부쳇살같이 펼쳐 십지를 쏟아냈다. 그녀의 이 수법은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혜천대사는 일순 발끝은 땅을 박차고 벼락같이 뒤로 삼 장이나 날아 오르더니 해학승운(海鶴乘雲)의 신법으로 동쪽 숲으로 날아갔 다. {더러운 중놈! 어딜 도망 가느냐?} 연운설은 날카롭게 교갈을 외치며 다급히 추적했다. 혜천대사의 신법은 초상비(草上飛)의 경공으로 빠르기가 섬전 같 았다. 그러나 연운설의 신법은 마치 제비가 창공을 쏘아가듯이 유연하 게 쏘아가는데 그녀의 신형은 한 줄기 붉은 빛이 보일 뿐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거의 일 리 가량 날아갔을까? 혜천대사는 돌연 숲 속으로 내려 서자 그대로 멈추어 섰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어느 새 따라온 연운설이 교갈을 터뜨리며 덮쳐왔다. {어디로 달아 나느냐, 혜천?} 혜천선사는 팔보단선의 신법으로 피하며 외쳤다. {운설, 잠시만 내 말을 들어 주시오!} 일순 연운설은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며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추어섰다. {운설.... 운설이라고....} 그녀는 망연히 중얼거리며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몹시도 격동한 듯 그녀의 안색은 처연하게 변했다. 혜천대사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흘렸 다. {혜천은 육십 년의 생애 동안 단 한 사람에게만 죄책감을 느끼 며 살아 왔소.} {....!} {승려의 신분으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구했다고는 하나 나 또 한 사람이외다.} 그는 불현듯 회한의 눈빛으로 연운설의 자태를 보며 말을 이었 다. {혜천은 언제나 당신 모자에 대해 한시라도 잊어본 적이 없소. 허나 나는 승려의 신분, 사문에 폐를 끼칠 수는 없었소.} 연운설은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싸늘히 말했다. {그래요. 당신은 승려였어요. 그것도 위대한 고승(高僧)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모자를 외면하고 알량한 사문의 명예와 당신 자신의 명성을 위해 모든 것을 저버렸어요.} 혜천대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하지는 않겠소. 나는... 나는 당신 모자에게 아무런 할말도 없소.}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지그시 연운설을 응시했다. 그녀는 일순 그의 눈빛을 보며 애증이 엇갈리는 눈빛으로 입술 을 깨물었다. {아미타불.... 모든 것은 나의 죄로 인하여 벌여진 것.... 나는 당 신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소이다... 으윽!} 혜천대사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나직이 신음성을 흘리며 천천 히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색이 창백하게 변하고 입 가에 한 줄기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연운설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넋이 빠진 듯 망연히 그를 쳐다 보았다. {운설.... 나는 당신....을 만난 이래로... 단 한 순간도 잊어 본 적 이 없소... 어떤때는 나 자신이 승려의 신분이라는 것이 저주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소림의 제자였소....} 연운설은 망연히 그에게 다가섰다. {당신.... 당신, 안돼요. 당신은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요.} 그녀는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혜천대사를 부축했다. 무릎을 꿇고 혜천대사를 꼬옥 껴안은 연운설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하염 없이 흘러 내렸다. {운설.... 당신을... 사랑했소. 다시 한 번 더 태어날 수만 있다면... 절대 두 번 다시는...} {당신은 죽을 수 없어요. 나의 삼십 년 전의 세월은 누구에게 보 상 받아야 된단 말이예요. 안돼요!} {운설.... 천위라는.... 아이가 나의 아들이오?} 연운설은 황망히 고개를 끄덕이며 얘절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 아이가 당신의 아들이예요. 혜천! 눈을 떠요. 당신은 죽으면 안돼요.} 이미 심맥을 자신의 힘으로 끊은 혜천대사는 눈을 감았다. {혜천! 제발... 눈을 떠요.} 그녀는 미친 듯이 혜천대사를 흔들었다. 혜천대사는 흐릿한 눈을 힘겹게 치켜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운설.... 그 아이가 보고 싶소.... 그 놈은...} 그의 입술은 몇 번 더 달싹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꺾었다. 연운설은 미친 듯이 혜천대사를 껴안았다. {혜천, 이제서야 그런 말을 하다니... 당신이 전날 나에게 단 한 마디라도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운설은 결코 원한의 세월을 살 아오지 않았을 것이예요.} 그녀는 넋이 나간 듯 계속 중얼거렸다. 비운의 연인(戀人)들, 전날 혜천대사가 적용화련에게 말하던 여 인은 바로 연운설이었다. 승려의 신분이었기에 피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떠난 혜천대사, 그 동안 삼십 년의 세월은 그에게 고뇌의 나날들이었다. 연운설은 가만히 혜천대사를 땅에 눕혔다. {혜천, 당신을 증오하기는 했지만, 당신은 나의 지아비였어요. 운 설은 언제까지나 당신의 처예요.} 그녀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운설도 당신을 따라 가겠어요. 당신이 죽어 버린 지금 운설은 아무런 희망도 없어요.} 문득 그녀의 입술에서 한 줄기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 도 혜천대사와 마찬가지로 심맥을 끊은 것이다. {내세(來世)에서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예요.} 말이 끝남과 동시 그녀의 얼굴은 느릿하게 혜천대사의 가슴에 묻혔다. 비련의 두 남녀가 숨이 끊어진 직후, {아미타불.... 혜천, 너는 진정한 소림의 제자였다.} 허름한 잿빛승포를 걸친 노승이 장내에 소리없이 나타나 쓰러져 있는 혜천대사와 연운설의 시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경문을 외웠다. 그는 바로 범천신불 법공(法空)선사였다. 문득 멀리서 한 줄기 화광이 치솟아 오르며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법공선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날 때가 되었군. 마교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야지.} 그의 목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법공선사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제 44 장 波瀾萬丈, 그 十年後 마교의 중지인 전각 앞에서 벌어지는 결전은 압도적으로 중원무 인들의 승리로 끝이 나기 시작했다. 모용천엽은 냉유도와 백상천 그리고 황보가혜의 협공에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날뛰었지만 이미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그의 몸놀 림은 점점 둔해져 갔다. 냉유도의 검이 재빨리 그의 하반신을 찌르자 모용천엽은 급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백상천의 검이 황보가혜의 신녀검이 벼락 같이 단전과 옆구리를 쑤셔왔다. {안돼!} 모용천엽은 미친 듯이 외치며 수중의 섭선을 휘둘렀다. 순간 냉유도의 검이 벼락같이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으악!} 모용천엽은 처참한 비명을 터뜨리며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에서 추락했다. 그는 땅에 떨어지자 다급히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입에서 확하니 선혈을 뿜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황보가혜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진 시신들은 대부분 마교의 제자들이었다. {백랑, 저 늙은이의 마공은 정말 가공스럽군요.} 그녀의 말이 백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마교의 태상노조 적용군이 황 기진인, 조노이, 청운도인 그리고 진방산과 혈전을 벌리고 있는데 이미 청운진인은 중상을 입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적용군의 쌍수에서 뻗어나오는 수법은 심히 악랄하면서도 현묘 한 마공이었다. 돌연 황기진인이 검이 쾌속하게 뻗어왔다. 순간 적용군은 천근추의 신법으로 급히 내리면서 검을 피하고 좌수를 기묘하게 흔들며 중이지를 뻗었다. 쐐_____액! 두 줄기의 혈지가 전광석화처럼 쏘아갔다. 황기진인은 갑자기 눈앞에 혈지가 날아오자 혼비백산, 재빨리 검 을 회수하며 물러났으나 이처 피하지 못하고 어깨에 일지를 맞았 다. {크윽!} 그는 비명을 터뜨리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이런 죽일 놈!} 진방산이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죽장을 맹렬히 휘둘렀다. {흐흐... 늙은 비렁뱅이, 그까짓 타구봉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는 재빨리 천마산수로 죽장을 막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독이 실패하는 바람에 이놈들을 도저히 당할 수는 없다... 우선 피해야 되겠군.) 돌연 그의 쌍수가 풍자처럼 좌우로 돌아가면서 순식간에 십팔장 을 폭풍같이 쳐냈다. 갑자기 맹렬한 장세가 날아오자 진방산 등 삼 인은 감히 맞받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나중에 보자!} 적용군은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벼락같이 신형을 날려 거각으로 날아갔다. 진방산은 설마 그가 갑자기 달아날 줄은 몰랐는지라 급히 신형 을 날리며 외쳤다. {추격합시다.} 그러자, 조노이는 어느 새 적용군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쌍 장을 뻗었다. 적용군은 등 뒤에서 신속한 장풍이 날아오자 왼쪽 발로 오른 발 등을 차며 허공에서 재주를 넘고는 좌수를 뻗었다. 순간 조노이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허리를 옆으로 비틀며 좌수 를 벼락같이 마주쳐갔다. 두 사람의 신형이 섬전같이 부딪친다 싶자 서로 퉁기듯이 물러 섰다. {으윽.... 네놈도 금강복마수를 익혔다니...!} 적용군은 비틀거리며 땅 위에 내려서 경악성을 토했다. 그의 좌 수는 으스러져 피가 옷깃을 물들이고 땅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 다. 그에 비해 조노이는 좌수가 완전히 부러져 축 늘어뜨리고 있는 데 그의 안색은 고통은 처참히 일그러져 있었다. {적용군, 이제 너의 천마산수가 파괴되었으니 더 이상... 날뛰지 는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진방산이 무섭게 죽장을 휘두르며 적용군을 향해 덮쳐 들었다. 적용군은 이를 악물며 우장을 연속 삼 장이나 쳐내며 거각 속으 로 들어갔다. {이런 치사한 늙은이!} 진방산은 그가 다시 달아나자 노호를 외치며 급히 쫓아갔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담사와 모용천위의 결전은 어느 덧 백초를 넘어섰다. 담사는 온통 전신이 땀에 후줄근히 젖었다.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연화구법을 모두 사용했지만 어쩔 수 없으니.) 그는 내심 초조감을 느끼며 연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모용천위의 수법은 무궁무진한 것만 같았다. 담사가 아무리 공격 을 해도 그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기묘한 수법으로 거뜬히 막아 냈던 것이다. 한 번 담사의 마음이 흩어지자 돌연 모용천위의 공세가 맹렬해 지기 시작했다. 우수에 들린 첩혈마황검으로 찌르고, 베고, 좌수로 는 녹장을 현란하게 일으키며 전신대혈을 공격해 오는데 담사는 비록 연화구법에 의존해 버티고 있긴 하지만 누가 봐도 담사의 패 배는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돌연 적용군이 장소성을 토하면서 신속하게 날아왔다. {천위야, 따라 오너라!} 그는 맹렬히 담사에게 일장을 뿌리며 월동문 안으로 쏘아갔다. 모용천위는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이미 탈진할대로 지친 담사는 재빨리 몸을 날려 피하며 그들을 추적했다. 그러자 마교의 제자들은 급히 월동문을 막고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벽같이 막아섰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담사가 월동문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하나의 수려한 정원, 조그만 인공가산 옆에 누각이 그린 듯이 세 워져 있고, 그 옆으로 자리한 소림이 미풍에 흔들렸다. 담사는 힐끗 주위를 살펴보고는 재빨리 누각으로 날아갔다. 누각 문은 꼭 닫혀 있었는데 담사는 검 끝으로 살그머니 문을 밀었다. 꽈꽝_____ 꽝! 순간 문이 산산조각나며 음유한 장력이 몰아쳐왔다. {타앗!} 담사는 대갈일성을 지르며 좌수를 가슴 앞에 세우고 반원을 그 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웅후한 장풍이 쏟아져 나와 장력을 막았 다. 펑! 굉음이 터지고 담사는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그와 동시 누각 안의 전경이 들어왔다. 삼 인(三人), 문 앞에 약간 놀란 듯한 눈빛으로 적용군이 서 있 고 그 뒤로 모용천위와 적용화련이 서 있었다. 담사는 적용화련의 자태를 보자 일순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여인은... 전날 사당묘에서의... 여인 아닌가?) 적용화련의 얼굴은 전날과 달리 백지장 같은 창백한 표정에 눈 빛은 아련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문득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혜비대사를 선두로 중원의 무인들이 월동문을 지나 질풍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천위, 이제는 시간이 없다. 어서 연아를 데리고 떠나게!} 적용군의 말에 모용천위는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적용어른, 모용천위는 절대 피하지는 않겠읍니다.} 적용군은 초조한 눈빛으로 다급히 외쳤다. {청산(靑山)이 변하지 않는 한 녹수(綠樹)는 언제나 푸른 법, 후 일을 기약하고 어서 가게!} 이때 적용화련은 막연한 눈빛으로 담사를 주시했다. (당.... 당신이 왔군요. 나에게 증오와 미움을 준 사람이....) 그녀는 알지 못한 감정에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모용천위는 적용화련의 그런 모습을 보며 전신을 떨었다. (화련, 저놈을 좋아하는 것이오?) 그는 적용화련의 표정에 질투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적용군은 노성을 외쳤다. {천위! 무얼하느냐? 빨리 화련을 데리고 떠나지 않고!} 모용천위는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담사를 증오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적용어른, 저는 가지 않겠읍니다. 화련은 어른이 데리고 먼저 떠나 가십시오.} 적용군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천위, 미쳤는가? 노부는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야. 자네가 없으 면 누가 화련을 돌보아 준단 말인가, 딴소리 말고 어서 가게.} 모용천위는 문득 적용화련을 보며 두 눈에 살기를 피워올렸다. 이때, 적용화련의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담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증오하고 미워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그녀 는 불현듯 마음이 포근해졌다. 담사는 그녀의 눈빛이 한 순간 부드럽게 변하자 기분이 기묘해 졌다. 돌연 모용천위가 몸을 날리며 외쳤다. {지옥혈룡!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성을 갈테다.} 담사는 갑자기 모용천위가 미친 듯이 공격해 오자 흠칫 놀랐다. 첩혈마황검으로 비쾌하게 미간을 향해 찔러오는데, 수법의 빠름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담사는 그가 이렇게 갑자기 공격해올 줄은 몰랐는지라 이미 피 하기는 어려웠다. 원한과 질투에 눈이 먼 모용천위의 일검은 그의 전신공력이 실린 악독한 검초였다. 허나 어릴 때부터 수많은 싸움 속에 자라온 담사에게는 동물적 인 민접한 기민성이 있었다. 허리가 뒤로 눕는다 싶자 철판교의 신 법으로 첩혈마황검을 피하며 미끄러지듯 옆으로 피했다. 순간 일검이 빗나가자 모용천위는 허공을 스치며 좌수를 아래로 쳐냈다. 그때 몸을 뒤로 눕히고 있던 담사는 갑자기 좌수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자, 대경실색 좌수로 급히 막으려고 했으나 때는 늦었 다. 담사는 일순 이를 악물며 오른쪽 어깨를 내밀며 좌수로 그의 배 심을 쳐갔다. 돌연 이때, 적용화련이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오빠, 그를 죽이지 말아요!} 문득 모용천위의 몸이 주춤했다. 고수들의 싸움은 특히 담사와 모용천위 같은 일류고수의 싸움에서 한눈을 판다는 것은 바로 죽 음과 직결되는 것이다. 돌연 모용천위는 배심에 무서운 고통이 번졌다. {으악!}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마침 달려오던 혜비대사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혜비대사는 갑자기 모용천위가 날아오자 선장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선장은 아무런 제약없이 모용천위의 등을 파고들었다. 혜비대사는 너무나 쉽게 그를 죽일 수 있게 되자 일순 선장에 공력을 뺐다. 헌데 바로 그 순간 핏빛 검광이 눈앞을 가리며 그의 미간을 파 고들었다. {으악!} 혜비대사는 짤막한 비명을 토하며 털썩 쓰러졌다. 모용천위는 첩혈마황검으로 땅을 짚으며 힘겹게 섰다. 말은 길었지만 일련의 사건은 전광석화 같은 순간에 벌어진 일 이었다. 중인들은 일순간 멍청해졌다. {오빠!} 적용화련이 모용천위의 곁에 따라섰다. {오빠, 나... 나 때문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러내렸다. 담사는 느릿하게 자세를 바로 하면서 막연히 모용천위를 응시했 다. (그는 충분히 나를 죽일 수 있었는데, 왜.... 그 순간 손을 멈추었 단 말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멍청하게 서서 생각에 잠겼다. 진방산이 돌연 죽장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놈, 혜비대사를 죽이다니...!} 그는 원래 혜비대사와는 극진한 사이, 분노한 그의 죽장은 천근 의 힘이 실려 있었다. {물러서라!} 적용군이 재빨리 모용천위 앞을 막으며 일당을 후려쳤다. 그는 비록 왼손에 상처를 입었지만 수십 년 동안 닦은 그의 공력은 진 방산으로서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진방산은 십초가 지나지 않자 연신 뒤로 물러섰다. 이에 뇌승이 도를 뽑아 가세하니 그때서야 진방산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재빨 리 반격해갔다. 모용천위는 단전(丹田)이 파괴되고 등에서는 피분수가 쏟아져 나 왔다. 일순 첩혈마황검이 땅에 떨어지고 모용천위는 무너지듯이 주저 앉았다. {오빠!} 적용화련은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돌연 모용천위가 왁하며 입에서 한사발의 선혈을 쏟아냈다. 그 바람에 적용화련은 전신에 선혈로 젖었지만 이에 상관하지 않고 그를 껴안았다. {오빠, 정신 차리세요. 오빠!} {화련, 나는.... 나는 괜찮소. 그보다도.... 당신은 빨리 피하시오.} 그는 자신의 몸보다 그녀를 더 염려하고 있었다. 적용화련은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아니예요. 오빠는 이 못난 계집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저도 함께 죽겠어요.} 말과 함께 그녀는 첩혈마황검을 잡으며 일어섰다. 돌연 한 사람이 외쳤다. {저 계집도 마교의 여인이니 죽여야 해요!} 황보가혜가 날카롭게 외치며 신녀검을 휘둘렀다. 적용화련은 재빨리 첩혈마황검으로 신녀검을 막으며 손가락을 퉁겼다. 펑! 한 줄기 지풍이 쏘아오자 황보가혜는 해연히 놀라고는 재빨리 옆으로 석자나 물러섰다. 그러면서 주위에 대고 외쳤다. {저 여자가 바로 연공자의 죽음을 사주한 여인이요!} 동시에 조중도 크게 외쳤다. {무림맹의 형제들, 연공자의 원수를 갚읍시다!} 순간 한쪽에 서있던 무림맹 고수들과 냉유도, 백상천등은 일제히 모용천위와 적용화련을 공격해갓다. 주위에서 마교의 제자들이 고전분투 하고 있지만 모용천위를 도 울 형편이 못되었다. [죽어랏!] 모용천위를 향해서 가장 빠르게 덮쳐온 것은 천갈 냉유도였다. 그는 모용천위가 이미 저항력을 상실했다고 믿고 남보다 먼저 그 를 공격해간 것이다. 마교 제일고수라는 모용천위를 벤 장본인이라 는 명예는 장차 그의 출세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놈!] 하지만 그 순간 제 몸 하나 가누질 못할 것같던 모용천위가 돌 연 벼락같이 일어서며 좌수를 연달아 쳐냈다. ━━━━━━━━━━━━━━━━━━━━━━━━━━━━━━━━━━━━━ <정의와 사랑이 있는곳... 무협세계(go muhyup)> 순간 무방비 상태로 덮여 오던 냉유도는 그의 좌수와 부딪치자 장검이 박살나고, 그 파편에 동시에 한 가닥 무형의 힘에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큭!} 털_____썩! 그와 동시 좌우에서 공격했던 무림맹의 무사도 천마살수에 머리 가 박살나고, 가슴이 파멸되어 죽어갔다. 모용천위는 사력을 다해 냉유도 등을 죽였으나 그것이 그의 최 후에 남은 여력이었다. 힘겹게 두 발을 딛고 버티어 섰으나 또다시 공격해오는 무림맹 무사들의 살수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차창! 바로 그때 담사의 신형이 재빨리 모용천위의 앞을 가로 막으며 사방에서 덮쳐오는 무림인들에게 장검을 휘둘렀다. 무림인들은 질 겁하며 물러섰다. 그중 한 명의 무사가 외쳤다. {담대협! 이게 무슨 짓이요?} 담사는 무사들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물러서자 그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모용천위를 노려보았다. {무엇때문에 중도에서 손을 멈추었소?} 모용천위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쓸쓸히 웃었다. {허허... 지옥혈룡! 네놈은 나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나의 연인까 지...}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뒤로 천천히 쓰러졌다. 부릅뜬 그의 눈은 증오와 허한에 찬 빛이 서려 있었다. 돌연 이때, 적용군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이놈들... 모조리 죽인다.} 모용천위의 죽음에 적용군은 이성을 잃었다. 적용군은 마치 야수 가 날뛰듯이 광폭하게 중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진방산과 뇌승은 당대의 일류고수들이 아닌가? 거기에다 오랜 격전과 상처마저 입은 적용군은 점점 손발이 어지러워져 갔 다. 그에 비해 뇌승의 도는 갈수록 정묘해지고 진방산의 죽장은 날 카로워져 갔다. 잠깐 사이에 십여합이 지났다. 돌연 뇌승의 도가 도광을 번뜩이 며 맹렬히 옆구리를 베어갔다. 그러자 진방산의 죽장도 풍차처럼 원을 그리며 머리를 쳐가자, 적용군은 신형을 회전시키며 우수를 맹렬히 뻗어갔다. 돌연 세 사람의 신형이 엇갈리고, {으악!} {크흑!} 두 마디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진방산은 일장이나 날아가 땅에 떨어진다 싶자 그대로 쭉 뻗어버렸다. 적용군은 주춤 뒤로 물러서는데 가슴에 길게 상처가 나 피가 흐 르고 옆구리에 죽장이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있었다. 적용화련은 날카롭게 외쳤다. {할아버지!} 그녀는 미친 듯이 첩혈마황검을 휘두르며 달려가려고 했지만 황 보가혜의 신녀검과 귀견수 조중의 장력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순간 황보가혜의 입에서 호통이 터졌다. {요녀, 죽어라!} 신녀검이 일순간 새파란 검광을 일으키며 적용화련의 어깨를 스 쳤다. 적용화련은 나직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주춤 물러서는데, 그녀의 어깨에 옷자락이 길게 베어져 그 사이로 선혈이 스며나왔다. 그녀를 지켜보던 담사의 눈빛이 일순간 파르르 떨렸다. 돌연 담 사의 신형이 번쩍 허공을 날더니 재빨리 적용화련의 앞을 가로막 고 검을 쳐냈다. 창! 신녀검과 담사의 검이 부딪치고 황보가혜와 조중이 다급히 물러 섰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황보가혜는 교갈을 지르며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조중은 그를 노려보다가 한순간 전신을 떨었다. (이 자다! 얼굴 모습은 비록 다르지만 이 자의 눈빛이나 몸체, 분위기 등 틀림없다.) 황보가혜 역시 담사를 쳐다보며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맞아. 분명 제남성 지하미로에서 본 자객이 틀림없어.... 또한 아 까 죽은 자가 분명 지옥혈룡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이때 싸움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삼 층의 거각은 누군가에 의 해 검은 연기를 뿜으며 타오르고 여기저기 도검이 부딪치는 소리 와 간간이 비명이 터녀 나오지만 싸움은 정도인의 승리로 끝나가 고 있었다. {지옥혈룡(地獄血龍)! 당신은 지옥혈룡이 틀림없어!} 조중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담사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조중이겠지. 단 한 번 나를 보고 기억하다니 귀견수이란 별호가 아깝지는 않군.} 황보가혜가 날카롭게 외쳤다. {원수, 연오빠의 목숨을 보상해라!} 그녀의 외침에 주위에 서 있던 중원의 무인들은 놀라운 눈빛으 로 담사를 주시했다. 담사는 한 차례 주위를 일별하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장검을 고 쳐쥐었다. {소저, 내가 막을 테니 당신은 피하시오.} 그는 무뚝뚝하게 적용화련에게 말했다. 적용화련은 그의 말에 입술을 꼬옥 깨물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 들었다. 이어 두 눈에 다정한 빛을 담뿍 싣고 나직이 말했다. {제가 도망을 간다해도 어차피 이들은 끝까지 나를 쫓아올 것이 예요.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아요.} 담사는 문득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전... 전날 소저에게 한 행동을 용서해 주시오.}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살아간다면...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소.} 이미, 죽음을 각오한 담사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자신 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비록 그가 금강복마수와 연화수법을 익히 고 있다 해도 이들에게는 그것을 쓸 수가 없다. V 문득 죽음을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고 잡초처럼 살아온 내가 지금 죽 는다 해도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어차피 옛날에 죽었던 내가 아 니었는가?) 그는 태연히 적용화련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적용화련은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담랑, 이미 저는 당신의 처예요.} 담사는 따뜻한 눈빛으로 적용화련의 손을 잡았다. 문득 적용화련은 처연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당신에게 아이를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군요.} 이 말에 담사의 표정이 싹 변했다. {무슨 소리요? 아이라니?} {오 개월 전 당신의 아이를 낳았어요. 아직 이름을 짓지는 못했 지만 담랑을 닮은 사내아이예요.} 담사의 눈빛이 환해졌다. {그 아이는 어디에 있소?} 황망히 묻는 목소리는 가득 기쁨이 담겨 있었다. {이제보니 한패 였구나. 요녀(妖女)와 자객(刺客)이라 잘 어울리 는군.} 돌연 황보가혜가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독기 가득한 눈초리로 두 적용화련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전날은 법공선사로 인해 네년을 놓쳤지만 오늘은 어림도 없다.} 담사는 불현 듯 살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나에게 자식이 있다. 그 아이를 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어야 한 단 말인가... 안돼! 그 아이만은 부모없는 자식을 만들 수 없어!) 담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금강복마수와 연화구법을 쓴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 나중에 죽는한이 있더라도 자식의 얼굴만 보아야 해!) 마음 속으로 결단을 내리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재빨 리 적용화련의 허리를 껴안는다 싶자 벼락같이 좌수를 쳐내며 외 쳤다. {비켜라! 누구든지 내 앞을 막는다면 죽는다!} 그는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돌연 그의 귓전을 두들기는 목소리, {못된 축생 같으니라구.... 용서를 빌어도 죄를 감할 수 있을지 모를 것인데 또다시 살상을 벌이려고 하다니!} 담사는 한 순간 벼락 맞은 듯한 사람처럼 힘없이 내려섰다. 그의 눈길은 천천히 삼 장 밖 나무아래를 향했다. 거대한 느릅나 무 아래 허름한 승포를 입은 노승이 무서운 시선으로 담사를 쳐다 보고 있었다. 법공선사! 바로 그였다. 헌데 그의 품 속에 이제 갓 돐이지난 듯한 아이가 안겨 있었다. 법공선사의 신형이 슬쩍 흔들린다 싶자 마치 환영(幻影)처럼 담 사의 두 자 앞에 홀연히 내려섰다. 눈으로 보고도 이 믿지 못할 강 인한 신법에 중인들은 모두 두 눈을 크게 떴다. {법공대선사님에게 동추평이 인사드립니다.} 동추평이 크게 외치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순간 여기저기 경 악성이 터지고 너나 할 것 없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특히 소림 의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아미타불... 죄악은 끝이 없고 고개만 돌리면 피안인 것을...} 법공선사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담사를 주시했다. {이놈이! 이 아이가 너의 아들이다.} [아가!] 적용화련이 다급히 달려와 아기를 받았다.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품 속에 꼭 껴안았다. 이때 대전을 빠져나오던 조노이, 뇌옥연, 금산혜 등 중인들은 범 천신불(梵天神佛)의 모습에 급히 달려와 경건한 표정으로 하나같이 허리를 숙였다. 담사는 떨리는 손으로 아기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 아이.... 가 나의 아들이요?} 적용화련은 복받치는 설움에 말 문이 막히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담사는 한동안 아이를 쳐다보았다. {....!} 한 줄기 미풍이 곡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담사는 천천히 시선을 들고 중인들을 쳐다보았다. 한 순간 뇌옥 연과 금산혜의 얼굴에 그의 시선이 잠시 머무르고 이내 황보가혜 와 귀견수 조중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었다. {....!} 담사의 눈빛은 한동안 가볍게 떨렸다. 문득 그는 오른손을 칼날 같이 세우며 좌수를 내리쳤다. 털썩! 촤_____ 아! 좌수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그의 어깨에서 피분수가 쏟아졌다. 중인들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흠칫 놀랐다. 담사는 피를 멈출 생각도 않고 황보가혜와 조중 앞에 무릎을 꿇 었다. {나를 어떻게 하셔도 좋소. 그러나 나의 처자식만은 살려 주시 오.} 황보가혜를 비롯한 중인들은 멍청해졌다. {담랑!} {담공!} 뇌옥연과 금산혜가 비통하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담사의 곁에 내려선다 싶자 그녀들은 황망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여러분! 이 분의 목숨만 살려 주세요.} 뇌옥연, 금산혜가 번갈아 외치며 머리를 숙였다. 뇌승은 딸의 행동에 한숨을 쉬었다. 그도 담사와 딸의 관계를 어 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사태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멍청 해졌다. {아미타불... 여러 시주님들 이제 마교는 멸망했고 모든 풍파는 끝이 났소이다.} 법공선사의 조용한 목소리는 나직이 울러퍼졌다. {여기 있는 이 소저는 마교에서 준비해 놓은 독물을 제거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무림동도들을 구출하기도 했소.} 그는 적용화련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소저의 할아버지는 마교의 태상노조였으나 그 모든 것을 무 릅쓰고 대의(大義)를 위하여 그 일을 행했던 것이외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중인들을 한 차례 일별했다. {그리고 저 담사라는 아이는 그 동안 마교를 상대해서 은연중 여러분을 돕기도 했소이다. 게다가 이미 저 아이는 자신의 팔을 자 르므로 완전히 공력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으 니 누구든 이아이를 벌하고자 하는 사람은 벌하시오.} 그는 말을 마치자 두 손을 합장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 황보가혜는 한동안 전신을 떨었다. 신녀검을 쥔 그녀의 손은 무섭게 떨렸다. (이 자는 무림맹의 원수야. 이 놈을 죽여야 해.) 그녀는 내심 살의를 느끼며 신녀검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순 간, 백상천의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말없이 따뜻한 눈 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황보가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 {혜매, 그는 더 이상 악인(惡人)이 아니오.} 백상천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했다. 황보가혜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돌연 그의 손 을 뿌리치고 재빨리 산 아래로 달려갔다. 백상천은 재빨리 법공선사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난 다음 급히 황보가혜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한 사람 두 사람씩 법공선사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추홍곡 내에 법공선사의 나직한 법창소리가 나직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X X X 태행산(黃山)의 혈사가 벌어진 지 십 년후, 장강 하류의 어느 조그만 어촌으로 이제 삼십 오륙세 가량된 외 팔이 청년이 옆에 보퉁이를 끼고 천천히 조그만 장원으로 들어섰 다. 장원의 뜰에서 놀고 있던 십여 세 가량의 소동이 그를 보자 환 히 웃으며 달려들었다. {아버님, 중할아버지가 오셨어요!} 소동은 말하며 재빨리 보퉁이를 잡았다. {내가 들고 갈께요.} 그는 빙그레 웃으며 소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원의 조그만 대청은 검소하게 꾸며져 있는데 팔선탁의 중앙에 법공(法空)선사가 언제나처럼 허름한 승포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세 명의 아름다운 미부가 시중을 들고 있는데, 그녀들은 다름아닌 적용화련(狄容華蓮), 뇌옥연(雷玉燕), 그리고 배 가 불룩 튀어나온 금산혜(金珊慧)였다. 독비청년은 법공선사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선사님, 어서오십시오.} 그는 바로 한때 강호에서 지옥혈룡(地獄血龍)이라는 악명으로 불 리우던 담사였다. 그로부터 삼일 후, 소동과 법공선사는 담사의 장원을 떠나 느릿 하게 하남성으로 향했다. {중할아버지! 소림은 많이 멀어요?} {의(義)아야, 며칠 밤만 자면은 도착하니까 조급히 굴지 말아라.} 법공선사는 담사의 아들 담의(潭義)를 쳐다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띄었다. {아미타불! 소림은 장차 이 아이로 인하여 옛날의 성세를 되찾을 것이다.} * * * 십 년 후(十年後), 소림사로부터 속세에 내려온 한 명의 미승(美僧)이 강호를 진동 시켰다. -옥화승(玉花僧)! 그는 당금소림의 장문인 사숙(師叔) 신분으로 전대의 성승(聖僧) 이라 불리우던 법공선사의 전인(傳人)으로 알려졌다. 환상적인 용모와 경세적인 무예, 천하를 방랑하며 정의를 위해 힘을 썼다. 그러나 그가 왕년에 천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지옥혈룡(地獄 血龍)의 아들이란 것은 그 누구도 모르는 그만의 비밀이었다. <大 尾>